[스크랩] 화엄신행의 불가사의

수선님 2018. 6. 10. 12:46

 

화엄신행의 불가사의

 

대승경전에는 금강경도 있고, 법화경도 있고, 화엄경도 있고, 열반경도 있고, 유마경도 있는데, 이런 경전들을 대승오구경이라고 한다.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다섯 종류의 경전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화엄경을 대승 중에 대승이라 한다.

 

왜냐하면, 대승 중에서 가장 순수한 대승이 ‘일승대승’인데, ‘일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길’이라는 뜻이다. 화엄경이 일승 중에서도 일승을 설명하는 경전이다. 그래서 그것을 ‘별교일승’이라고 한다.

 

다른 일승과는 다르게 순수하게 일승만을 설명하는 경전이라고 해서 [별교,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별교 일승에 반대되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교일승인데, 동교일승이라고 하는 말은 일승이 아닌 것을 수용하는 일승이다 라고 하는 말이다.

 

별교일승은 [일승 밖에 다른 것은 없다. 일승 뿐이다] 라고 해서 이것을 별교일승이라고 한다. 그래서 화엄경은 별교 일승이다. 순수하게 대승 중에서도 대승이 일승인데, 일승 중에서도 순수하게 일승을 설명한 경전이 화엄경이다.

 

그러면 화엄경은 그 제목 자체가 40 권 화엄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부사의 해탈경계 보현행원품]이라 설명했다. [부사의 해탈경계 보현행원에 들어가는 품] 이라고 해서 들어 가는 입(入)를 위에 놓고 ‘부사의(不思議, 생각할 수 없는) 해탈경계 보현행원에 들어가는 품이다. 그 내용이 모두 40권이 된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 40 권이 [보현행원품] 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보현행원품 제목을 보면 ‘부사의 해탈 경계’라는 말이 있다. 보현행원품이라고만 되어 있지 않다. ‘별행권’ 이라고 40 권 화엄경 중에서 [별행권, 별도로 시행되는 경]으로 제일 마지막권이다.

 

앞의 39 권의 제목이 전부 같은 제목, [부사의 해탈 경계 보현행원품] 이렇게 되어 있다. 앞의 40 권 화엄경 제 1 권부터 40 권까지 제목이 똑같다. 그런데 제 40 권 마지막은 [별행본]이라고 해서 그 한 권만 보아도 시작과 끝이 다 나와 있어서 별도로 통용이 되는 경전이다.

 

그래서 이름만 보아도 [부사의 해탈 경계 보현행원]에 들어가는 경전이라고 한다.

 

또 용수보살이 지은 [대지도론] 100 권이 있는데, 그 마지막 100 권에 보면 화엄경을 [불가사의 해탈경] 이라고 했다. [부사의 해탈 경계에 들어 간다] 이것이 화엄경이다. 또 보현행원에 들어 간다. 불가사의 해탈경이다.

 

80 권 화엄경 본문에도 [불부사의 품(부처님은 생각하기 어렵다)]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전부 합쳐서 제목을 붙인 것이 [대방광 불화엄경]이다. 불가사의 해탈경계, 불가사의 경, 보현행원을 전부 합치면 [대방광 불 화엄경]이 된다.

 

불화엄, 화엄불 이 세 글자가 된다. 불(佛)이라고 하면 극존칭이 된다. 경(敬)은 아주 공경하는 칭호이고, 중생이라고 하면 평범하게 부르는 범칭(凡稱)이다. 그래서 불(佛)은 최상의 지위를 말한다.

 

불(佛)이 무엇을 하는가? 화엄을 한다. 화엄은 무엇인가? 보현행이다. 보현행을 닦는 것이 화엄이다. 화엄(華嚴)의 화(華)자는 공덕이고, 엄(嚴)는 장엄이다.

 

많은 공덕을 지어서 많은 장식을 한다. 무엇으로 하는가? 보현행으로 한다. 불(佛)은 결과이고, 보현은 원인이다. 그런데 화엄에서는 인과를 사귈 교자와 사무칠 철자를 교철(交徹)이라고 한다.

 

원인과 결과가 따로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무친다. 결과가 원인과 같이 있고, 원인이 결과와 같이 있다. 그래서 불(佛)도 화엄(華嚴)을 하고 화엄(華嚴)도 불(佛)이니, 불(佛)이 화엄(華嚴)이고, 화엄(華嚴)이 불(佛)이다. 따라서 화엄불이라고 해야 원인결과가 되니 [인과]가 된다.

 

그런데 불화엄이라고 해서 [과인]이 되었다. 따라서 결과가 원인이 된다. 이것이 불가사의하다. 그렇다면 불(佛)이나 화엄(華嚴)이 어떤 불(佛)이고、 어떤 화엄(華嚴)인가? 불(佛)도 대방광 불(佛)이고, 화엄도 대방광 화엄(華嚴)이다.

 

이것이 대방광불 화엄이다. 이 대(大)라고 하는 것은 무소불변(無所不變), 없는 곳이 없다. 방(方)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 하나가 다 다르다. 용(用)이라고 하는 것은 이 작용이 끝도 한도 없다. 대방광(大方廣) 이것을 체상용(體相用 三大)라고 한다.

 

대(大)는 본체다. 방(方)은 하나, 하나 형상이다. 용(用)은 하나, 하나 작용이다. 그래서 화엄불 또는 불화엄에 대방광이 다 들어 있다

 

불도 대방광이고, 화도 대방광이고, 엄도 대방광이고, 공덕을 짓는 것도 대방광이고, 그것을 장엄하는 것도 대방광이고, 그래서 대방광 불화엄이라고 설명하는게 화엄경제목에 나타나는 설명이다.

 

그것이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불교의 아주 근본이다. 그런데 생각으로 들으면 이것이 전부 불가사의다.

그러면 불화엄, 화엄불처럼 원인과 결과, 결과와 원인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교철(因果交徹)이라 원인과 결과가 서로 사무친다고 한다.

 

이 인과교철(因果交徹), 어려운 단어 같지만 원인 속에 결과가 있고, 결과 속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 한 생각이 날 때 그것에 이미 결과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게 인과교철(因果交徹), 불화엄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설명을 할 때 어떤 방식으로 설명을 하는가 하면 차제문(次第門)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방‘도 있고, ’광‘도 있기 때문에 방은 하나 하나 다르지 않는가? 

 

다르지만 전부 그 작용이 통한다. 이것이 차제문(次第門)이다. 그런데 차제문(次第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섭문(相攝門)도 있다. 이것이 화엄이다.

 

차제(次第)와 상섭(相攝), 차제(次第)는 무엇인가? 차제(次第) 항포(行布), 행(行)은 항열이라는 항자이다. 다닌다는 행이지만 순서라고 할 때는 항이라고 한다.

 

아버지 항열, 아들 항열 이라고 하지 않는가? 원래는 갈 행(行)자 이지만 행열이라고 하지 않고 항열이라고 한다.

순서대로 펼친다. 차례 차례 순서대로 펼치는 것을 항포라고 한다.

 

그 다음 상섭이라고 하는 것은 원용 상섭이라고 하는데, 원융은 하나 속에 전체가 다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는 것이고, 상섭은 서로 서로 전부가 다 포섭되어 있어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씨앗을 하나 심는다.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그 다음에 열매를 맺고 결실이 된다. 이것을 차제 항포라고 한다.

 

그런데 씨앗으로 있을 때도 씨앗이고, 싹이 날 때도 씨앗이고, 줄기가 날 때도 씨앗이고, 꽃이 필 때도 씨앗이기 때문에 씨앗을 버린 일이 없다. 그 싹 속에도 씨앗이 들어있고, 줄기 속에도 씨앗이 들어있고, 꽃 속에도 씨앗이 들어있고 다 들어 있다.

 

마지막에 열매가 맺혀지면 그게 본래 심었던 씨앗이다. 그래서 땅 속에 심었던 씨앗과 마지막 꽃에서 맺혀서 열린 열매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원융이라고 한다.

 

이것이 차제고 상섭이다. 그 씨앗 하나에 싹도 있고, 줄기도 있고, 잎도 있고, 꽃도 있고, 열매도 있고 거기에 다 있는 것이다.

 

또 싹 속에 줄기, 꽃이 다 있고, 열매 속에 씨앗, 잎, 꽃이 다 있다. 이것이 원융과 항포이다.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 십신이 있고, 십주가 있고, 십행이 있고, 십회향이 있고, 십지가 있는데, 이것을 항포문이라 한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순서다. 그런데 순서가 따로 따로 떨어져서 생긴 것이 아니고 다 원융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싹이 날 때도 그 씨앗 그대로 싹이 났고, 줄기가 자랄 때도 그 씨앗 그대로 줄기가 자랐고, 마지막에 열매가 맺었어도 그 씨앗 그대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다.

 

화엄 신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치를 믿는 순간에 바로 씨앗을 땅에 심은 것와 같은 것이 된다. 이것을 최초 신심이라고 한다.

 

최초 신심을 일으키는 순간에 결과 성불을 한 것이다. 십신에서부터 십지까지 다 닦아서 성불을 하고 보면 처음에 최초 신심을 일으켰을 때 그 마음이다. 이것이 화엄이다. 그래서 불가사의다.

 

그래서 [부처님]하고 신심을 일으켜서 예경을 잘하는 순간 그 최초 신심에 이미 최고 성불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차제문과 상섭문이 조금도 떨어져 있지 않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차제문이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처음 태어날 때를 떠나 있지 않다. 그게 상섭문이고, 차제문이다.

 

손자, 아들, 아버지, 할아버지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차제문인데, 할아버지와 손자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조상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 몸에 있다. 산소에 가서 조상을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차제문만 알았지 상섭문은 모른다는 것이다.

 

100대조 할아버지도 포섭을 하니까. 서로 상섭을 하니까. 원융이니까. 나한테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럼 십대 때 모습이 지금 없느냐?

 

차제문으로 보면 열 살 때 모습과 지금 모습과는 다른데, 상섭으로 보면 10대 때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싹이 나는 것과 잎이 나는 것과는 다르지만 상섭으로 보면 잎이 피는 것 속에 싹나는 것이 거기 그 속에 그대로 다 포함이 되어 있다.

 

그래서 ‘중생과 부처가 다르다’ 라고 하는 것만 아는 것은 차제문만 아는 것이다. 다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섭,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 성불할까. 언제 극락갈까. 생각하는 것은 차례 차례 펼쳐지는 것만 알지, 펼쳐지지만 하나도 그 본체, 본 종자, 본 씨앗을 떠나지 않고 펼쳐진다는 상섭문을 알게 되면, 염불 잘하면 그 순간이 극락 가는 순간이 된다.

 

부처님께 예경 잘하면 그 순간이 성불하는 순간이다. 이것이 일승 신심이다. 그런 신심을 철저하게 가지면 그 신심이 곧 성불이다. 그게 [화엄신앙의 불가사의]이다. 그런 신심이 있어야 한다.

 

화엄경 세주묘엄품 제 1 권에 있는 내용이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내용인데, [그대는 응당히 부처님의 한 털구멍을 보라] 공간 중에서 제일 작은 공간을 털 하나 뽑아낸 모공이라고 한다. 작은 것 중에서 작은 것이 모공이다. 그런데 일체 모든 중생이 그 털구멍 속에 있다고 한다.

 

이것이 불가사의다. 화엄 신앙을 하려면 이런 것을 믿어져야 하고 이해되어야 한다.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털구멍 속에 있다.

 

그리고 제 3 권에 있는 내용이다. 일찰나 중에 백천겁이 있다. 이게 화엄이다. 이것을 부처님의 힘으로 능히 나타내되 움직이는 바가 없다. 화엄신앙을 철저히 하게 되면 조그마한 티끌 속에서 온 우주를 다 보게 된다.

 

아주 일순간 눈 깜짝하는 순간보다 더 짧은 일찰나 중에서 무량억겁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일미진중함시방] 하나의 미진, 티끌 중에 시방세계를 다 가지고 있다. 일찰나 중에 한량없는 영원한 무진억겁을 다 포함하고 있다. 이것을 차제요, 상섭이라 한다.

 

무량억겁, 시방세계는 항포 차제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미진 속에 있고, 일찰나 속에 있다. 이것을 의상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행행본처(行行本處) 가도 가도 본래 처소요, 지지발처(至至發處)이르러도 이르러도 출발한 그 자리라” 하셨습니다. 멋진 법문이다.

 

행행본처라, 가고, 가고, 자꾸 간다. 씨앗에서 가고, 줄기에서 가고, 잎에서 가고 꽃에서 가고, 열매에서 자꾸 간다. 그런데 항상 씨앗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행행이 본처다. 가고 가고 가는데 그것이 다 일미진 속에 있다.

 

늙고 늙고, 나고 나고 하는데, 무량원겁이 바로 일념, 일찰나다. 이것을 보고 죽어야 다리 뻗고 죽을 수가 있다. 무량원겁즉일념 일미진중함시방 이것을 알고 죽어야 다리 쭉뻗고 죽을 수 있다.

 

이것을 모르면 죽어서 어디로 갈꼬? 가도 가도 제자리라는 것을 모르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행행이본처고, 지지가 본처라. 이르는 곳마다 출발한 곳이다. 이것을 차제문이고, 상섭문이다.

 

십대가 바로 구십대고 그런 것인데, 그것을 꿈에도 모른다. 중생자리 조금도 떠나지 않고 부처되는 도리가 차제문이고, 상섭문이다.

 

중생과 부처가 다르니까. 차제고, 그런데 상섭이니까. 부처 속에 중생이 있고, 중생 속에 부처가 있어서 이것이 상섭이 된다.

 

그래서 일심이 십법계요, 십법계가 일심이다. 한 마음이 있는데,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人), 천(天)의 미혹한 세계와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佛)의 깨달음의 세계를 십법계라 한다.

 

여기에는 중생도 있고, 부처도 있고 다 있지만 그 일심이 원융문이고, 상섭문이다. 그런데 십법계가 펼쳐지는 것은 차제문이고, 항포문이다. 이런 신앙을 깊이 하면 처음 최초 신심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그런데 왜 않 믿느냐? 자신이 중생이라는 것은 철석같이 믿는데, 중생 속에 부처가 들었다는 것은 꿈에도 믿지 않는다. 누가 일부러 믿지 말라고 해도 기분이 상할 탠데 스스로 그렇게 중생이라고 믿는다.

 

“나는 중생이다” 라고 하는 것은 믿지 말라고 해도 다 믿는다. 그런데 “중생이 다 부처다” 라는 것은아무리 믿어라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이 중생이다. 자신이 중생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차제문만 보는 것이다.

 

원융문, 상섭문은 믿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에 보조국사께서 [화엄론절요]를 지었다.

 

중국의 통현장자라고 하는 분이 [화엄론 40권]을 지었는데, 아주 대단히 중요한 저술이다. 화엄신앙에 굉장히 중요한 저술이다. 그 가운데 요점을 뽑아서 3권의 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중간 중간에 보조스님 스스로의 소견을 붙인 것이 있는데, 거기에 무슨 말이 있는가 하면 최초신심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의 몸과 마음, 분별지성(좋아하고, 싫어하고, 울고, 웃는 것), 내 몸, 내 마음이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탐하고, 성내고, 좋아하고, 성내는 분별지성이 없으면 중생이 아니다. 그러나 분별지성이 그대로 변함없는 지혜의 부처님이다(부동지불) 이것을 철저히 믿는 것이 화엄 신심이다.

 

중생의 탐진애증은 욕심대로 하고 그대로 않되면 짜증내고, 화내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가 없으면 중생이 아니다. 그것이 분별이다. 애증,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으면 중생이 아니다. 중생이라면 탐욕과 분노, 애증이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파도가 아니듯이 그런 마음이 없으면 중생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그대로가 부동지불(변함없는 지혜의 부처님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화엄 신심이다. 따라서 중생이 중생 아니길 바라지 않아야 한다.

 

중생이 어떻게 탐욕과 분노 그리고 애증이 없을 수 있나? 그런데 그 탐욕, 애증이 그대로 변함없는 지혜의 부처(부동지불)라는 것을 있는대로 다 믿는 것이 신심이다. 조금이라도 틈새가 있으면 그것은 신심이 아니다.

 

그러면 거기서 바로 성불한다는 신심이 이루어지면 바로 원을 새우게 된다. 보현행을 닦고자 원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발심이다. 발심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원을 세우는 것이 발심이다. 그러면 자연히 도를 닦게 된다.

 

이렇게 발심만 되면 도닦지 말라고 해도 자연히 도를 닦게 된다. 자연히 도를 닦으면 자연히 성불한다. 그게 바로 최초 신심이 구경성불이다. 최초 신심이 없으면 성불이 않된다. 구경은 최고다. 가장 높은 것이 가장 밑에 있는 씨앗에서부터 있다.

 

열매는 가장 높은 곳에서 열리지 않는가? 그것이 구경성불이다. 최초 신심은 땅 속에 심은 씨앗이다. 땅 속에 씨앗이 없이 어떻게 가장 높은데 있는 열매가 열리겠는가? 따라서 신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승신심이고, 그것이 화엄 신행이다. 이런 신심으로 보현행이 자연히 부처님께 예경하게 되고, 참회하게 되고, 공양하게 되는 보현행이다.

 

그래서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원각경이나 기신론에서 항상 하시는 말씀인데, 이런 것이 있다.

 

태어나자 마자 눈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을 날생(生), 눈안(眼)자를 써서 생안이라고 한다.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가? 그 생안이 어떻게 하다가 병이 생겼다. 그것을 병안이라고 한다. 그런데 병안이 되면 잘보지 못한다.

 

허공에도 자꾸 꽃이 보이고, 사람을 보아도 머리가 둘로 보이게 된다. 그 병안에서 잘 치료를 하면 깨끗할 정(淨), 눈안(眼) 정안이 된다. 정안이 되면 그 정안은 다른 눈이 아니라 본래 태어난 생안과 똑같아진다.

 

이것이 깨달음이고, 최초 신심이 구경성불이 된다. 그러면 최초 신심 이것은 무엇인가? 눈에 병이 나서 허공에도 꽃이 보이고, 사람 머리도 둘 셋으로 보이는 이런 눈이 바로 본래 태어난 깨끗한 눈이다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믿어야 그 눈을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병이 난 눈은 고칠 수 없다. 그냥 이대로 보고 살아야 된다] 고 한다면 못고친다. 지금 탐심 일으키고, 분심 일으키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죄짓고, 온갖 나쁜 짓 다하는 그 놈이 바로 본래 변함없는 [부동지불]이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그쪽으로 걸어 간다.

 

[눈병은 고쳐봐야 쓸데가 없다]고 한다면 영원히 못고친다. 눈병이 생긴 그것이 바로 본래 태어난 생안, 깨끗한 눈이다. 이것을 믿어야만 돌아간다.

 

눈병이 나서 그렇게 하늘도 제대로 못보고, 사람도 제대로 못보던 눈이 병이 싹 나으면 어떻게 되는가? 깨끗한 눈이 된다. 본래 하늘은 하늘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하나도 걸림없이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래도 문제가 있다. 눈병 낫던 그 병안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공부를 많이 하면 그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 깨달음이 있다.

 

눈병을 앓다가 눈병이 나았다. 그래서 깨끗한 눈이 되었다. 그러면 병안, 눈병 낫던 눈은 어디 갔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신론에 나오는 말씀인데, 어떤 사람이 동방에 놀다가 어떻게 갑자기 놀다보니 동방은 생각이 않나고 그것을 서방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그 서방이라고 아는 순간에 문제가 생겼다. 동방을 찾아가야 되는데, 동방은 어디 있나? 동방은 정방(깨끗한방)이고 서방은 사방(삿된방)이다. 순간적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착각만 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내가 본래 동방 사람인데, 어쩌다 내가 서방에 왔다. 그러니 내가 동방을 찾아 갈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막 찾는다. 그렇게 찾고 보니까. 자기가 본래 머물러 있던 그곳이 바로 동방이었다. 그런 것이 바로 화엄이다.

 

가만히 제자리에서 서방도 갔다가 동방으로 또 오는 것이다. 그것이 차제문이고, 상섭문이다. 그런데 서방에서 동방을 찾고 보니까. 서방은 어디 갔는가? 서방은 간곳이 없다. 왜냐하면 생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생불멸이다. 서방이 어디 생겼나? 동방 그대로다. 단 서방이라고 착각을 했을 뿐이다. 착각이 생긴 것 없이 생긴 것이다. 그것이 불생불멸이다. 분명히 서방으로 착각은 했는데, 그게 어디서 왔는지 족보가 없다.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긴 것 없이 생긴 것이 바로 생노병사이고, 죽고 사는데 시달리다가 열반적정을 얻어서 해탈열반을 얻으면 그러면 생노병사는 어디 갔는가? 간곳이 없다. 본래 생긴 것이 없기 때문에 본래 돌아간 곳이 없다.

 

이런 것을 불교라고 하는데, 항상 하나 아니면 둘 이런 것만 알았지, 하나 속에 둘이 있고, 둘 속에 하나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렵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서 죽는다는 것만 알았지, 나이 들어서 죽는 것이 본래 어릴 때 살아 있을 때, 그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다. 그래서 불가사의한 것이다.

 

불가사의하니까. 어떻게 되는가? 불가사의한 신심을 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이 절대 우리를 속일리 없다.

 

그 중생이 바로 부처를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화엄경도 않믿는다. 보조스님도 않믿고, 서산스님도 않믿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가? 중생이라는 그것 하나만 철석같이 믿는다. 중생이 바로 부처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눈병 난 것만 믿지, 병안이 바로 그 본래 타고난 생안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화엄경처럼 불가사의한 신심을 일으키면 불가사의한 결과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화엄 신행의 불가사의다.

 

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 종범스님

 

출처 : 수보리
글쓴이 : 아침이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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