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내가 읽은 금강경 현실 떠난 ‘상근기’는 하근기도 못돼 일체 중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들어야
금강경의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은 나에겐 일종의 충격이었다.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해 마쳤는데 실은 한 중생도 제도 받지 않았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청천벽력이었다. 이것은 남의 화두를 나의 화두로 만들려고 애쓰는 의심이 아니었다. 옛날의 금강경 주석가들은 금강경의 독자를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제1장 법회인유분은 상근기를 위해서, 제2장 3장은 중근기를 위해서, 그 이하는 모두 하근기를 위해서 설했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밤낮 금강경을 읽고 있는데 금강경을 모른다”는 속담이 맞는 말이라면 이 세상엔 하근기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도대체 그들은 누굴까?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하늘에 달은 보지 않는구나!(只看標月之指 不睹當天之月).” 이런 선시(禪詩)는 언제 들어도 신선하다. 그렇지만 누가 정말 달을 본 사람일까. 금강경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금강경 첫머리의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이 금강경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해 마쳤다고 한다. “아침밥을 먹을 때가 되어서, 밖에 나가 밥을 빌어 와서, 밥 먹기를 마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 글엔 신비도 없고 기복도 없다. 일상 그대로의 평범한 현실이다. 이러한 평범한 일상을 특별히 상근기라야 알아듣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한다 해도, 달을 본 사람과 손가락만을 본 사람은 다른 것이다. 양자의 혼동은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손가락만 보거나 헛 달을 본 사람이 정말 달을 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에 집착해도 하근기이지만 달에만 집착해도 하근기다. 현실을 떠난 ‘상근기’는 하근기도 못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금강경 공부를 올바로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심도 중요하고 삼매도 중요하다. 그리고 신비, 가피 등등 이제까지 우리 선배들이 강조한 것은 모두 다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현실을 떠나진 말자”는 것이다. 금강경, 금강경... 금강경의 노래를 부르면서 딱하게도 현실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고 앉아있는 사람들!” 선사들은 이들을 “똥강아지들”이라고 나무랬다. “똥개에게 돌을 던지면 돌을 쫓아가 물어뜯지만 사자에게 돌을 던지면 돌을 던진 사람을 물어 버린다(韓逐塊 獅子咬人).” 우리는 말만을 뒤좇아 다니지 말고 사자처럼 말의 낙처(落處)를 보아야겠다.
금강경의 낙처는 어딘가? 현실을 떠나서 이를 찾으려 하면 똥강아지다. 현실로 돌아오라. 일체 중생이 다 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라. 일체 중생이 다 듣고 있는 것을 그대로 들어라. 신심이니 삼매니 기적이니 가피니 운운하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 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승정종분 가운데 감격적인 대목을 다시 적어본다.
“알로 태어난 중생, 모태를 빌어 태어난 중생, 습기로 생긴 중생, 조화로 생긴 중생 등등 문자 그대로 일체중생을 하나도 차별하지 말고, 하나도 빼놓지 말고, 이들로 하여금 최상의 행복을 얻도록 해주겠다고 마음먹어라.”
나는 여기서 화엄경의 「보현행원」 사상을 보았다. 그 다음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모두 다 잘 살게 했다”는 대목은 다름 아닌 선(禪)의 세계이었고 마지막의 “실은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자가 없다”고 후려치는 대목은 높이 쌓아올린 아상의 탑(我相塔)을 여지없이 때려 부수는 선사의 주장자이었다.
그동안 우리 불교는 금강경 사상을 등지고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금강경이 때려 부순 아상탑이 각양각색으로 도처에 되살아나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은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자가 없다”는 금강경 사상은 오히려 어색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금강경의 세계엔 ‘누군 깨쳤고 누군 못 깨쳤고, 누구는 됐고 누구는 아직 덜 됐고…’ 하는 식의 사고방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한국불교는 하루속히 반금강경적인 요소들을 말끔히 청소해 버려야 할 것이다.
뉴욕주립대학교 불교학 교수( sbpark@notes.cc.sunyb.ed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