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금강경 1

수선님 2018. 6. 10. 12:47

 

 

금강경

 

금강경은 대승경전이다. 대승경전을 분류해서 보면 반야부, 법화부, 화엄부, 정토부, 열반부, 유마부 이렇게 여섯 등분으로 나눈다.

 

큰 것은 대승 삼부라고 해서 반야, 법화, 화엄 세 가지다. 거기다가 정토, 열반을 더하면 대승 5부이다.

 

그리고 대승불교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경전이 유마경이라고 해서 유마경은 따로 분류해서 보면 6부가 된다.

 

그러나 유마경을 분류하지 않고 그냥 대승경전의 하나로 보면 대승5부라고 한다. 대승불교를 공부하는데는 반야, 법화, 화엄, 정토, 열반 이렇게만 보면 대승불교가 그 안에 다 들어 있다.

 

개괄적인 것을 보면, 반야, 법화, 화엄이다. 그런데 이 대승 삼부 가운데 양으로 보면 반야부가 제일 많다.

 

대반야경은 현장법사가 660년에 시작해서 663년에 번역한 경전인데, 600 권이다. 제일 많다.

 

흔히 말하기를, 화엄경이 방대하다고 하는데 화엄경은 세 가지 본이 있다. 이것을 다 합쳐도 200 권밖에 않된다.

 

그런데 반야부는 600권이다. 그리고 현장법사의 번역본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마라집역이라든지, 다른 번역까지 합치면 800권이 된다.

그렇게 반야부 경전이 많다. 이렇게 많은 반야부 경전에서 금강경은 한 권에 속한다.

 

600권 대반야경 가운데 제 577권째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금강경이다.

 

그런데 왜 금강경이 중요했는가 하면 많은 반야부 경전이 있지만 그게 다 통용되지를 않고 금강반야바라밀경만 통용이 되었다.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에만 주석서가 그렇게 많다. 800명 정도가 금강경을 해석하였다. 전부가 금강경에 대한 해석이다.

 

다른 반야부 경전은 그냥 보기는 했지만 그것을 깊이 탐독하고 공부한 흔적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금강경은 대승불교 중에서 아주 기본에 해당하는 반야부를 한 권만 딱 빼서 대표적으로 별도로 공부하고 유통시켰기 때문에 금강경이 그만큼 중요하다.

 

대표적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한 800권정도 되는 반야부계통의 경전 가운데 금강경이 대표 경전이 되었다.

 

그것만 별도로 통용이 되는 경전이 되었다. 그래서 금강경이 중요하다. 금강경만 하더라도 번역본이 여러 개가 있다.

 

다른 반야부는 번역을 그렇게 여러 분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금강경은 여러 분이 있어서 육역분, 칠역본 이렇게 번역본이 많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세 가지 번역본이 가장 중요하게 주목을 받고 있다. 400년대 초 402년에 구마라집 번역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경전이 있다.

 

그리고 500년대 초 509년에 도류지 삼장이 번역한 경전이 있고, 663년에 현장법사가 번역한 경전이 있다.

 

이렇게 삼역이 있는데, 구마라집 번역을 후진 때 번역했기 때문에 진역이라고 하고 도류지 번역은 위진 남북조 시대 위나라에서 번역 했기 때문에 위역이라고 하고, 현장 번역은 당나라 때 번역을 했기 때문에 당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역본, 위역본, 당역본, 이 세 가지 삼역본의 금강경이 아주 중요하게 인식이 되었다.

 

그 삼역본 가운데서 제일 많이 통용이 된 것이 우리가 지금 독송하는 구마라집역, 진역본이다. 다른 것은 다 연구는 했어도 독송을 한다든지, 신앙화 하는 것은 그렇게 많은 기회가 없었다.

 

우리가 독송하는 금강경의 번역 년대가 가장 오래 되었다. 400년대 초에 번역을 했다. 현장 삼장법사 그 이전에 번역된 것은 구역이라 하고 그 이후를 신역라고 했다.

 

구마라집 번역은 구역인데, 금강경에 대한 통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널리 유포되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오늘 날까지 구마라집 번역본을 보면서 독송을 하고 신행하고 있다. 그래서 구마라집 번역본을 보면 삼십이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본문하고 관계가 없다. 그냥 한 권으로 되어 있어서 [여시아문으로부터 신수봉행까지] 쭉 연결되어 있다.

 

본문하고는 관계없는데 그것을 삼십이분으로 나누어 보면 독경하는데 많은 참고가 된다. 그리고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래서 삼십이분으로 나누어서 독송하는 것이 그동안 아주 상례(常例)처럼 되어 왔다. 그리고 도입부분에 제일 처음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어디나 처음에는 다 제목이 나온다. 그것을 경전의 경명(經名), 이름이 붙는다. 그 다음 몇 권으로 되어 있는가? 그것을 경권(經卷), 금강경은 한 권이다.

 

그리고 경전에는 품(品)이 있다. 그래서 명(名)과 권(卷)이 있고 품(品)은 편(篇)과 같은 것이다. 법화경은 이십팔품이고, 화엄경은 삼십구품이다.

 

금강경은 몇 품일까? 품은 없고 한 권 뿐이다. 그리고 경명(經名)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읽는다. 경전의 이름이 금강경의 내용을 대표하는 말이다.

 

가도 가도 금강반야바라밀을 설명하는 것이 금강경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물어 보지만 글자 하나 하나 전부가 금강반야바라밀이다. 다른 것은 없다.

 

그래서 경전의 이름이 그렇게 중요하다. 화엄경도 마찬가지다.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하면 가도 가도 화엄을 설명하는 경전이다.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와 글씨인데, 그 종이와 글씨에서 무엇을 설명하는가? 가도 가도 그 제목이니까. 다 보지 않고 제목만 읽어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뜻이 거기에 있다.

 

그러면 금강반야바라밀은 무엇인가? 금강은 순금인데, 아무런 잡철, 이물질이 않들어 간 순금을 금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불변성(不變性), 변하지 않는 성질이 있다.

 

불에 들어가도 물에 들어가도 사람이 먹어도 변하지 않는다. 또 광명성(光明性), 빛이 있다. 또 효용성(效用性)이 있다.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

 

목걸이도 만들 수 있고, 귀걸이도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효용성이 있다. 그래서 불변성(不變性), 광명성(光明性), 효용성(效用性), 이런 것을 따와서 반야를 비유하였다.

 

반야는 참다운 지혜를 뜻하는데, 이 지혜는 깨달은 지혜이기 때문에 그냥 지혜라고 하지 않고 반야라고 한다. 지혜는 보통 명사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것은 세속적인 보통 지혜이고, 반야 지혜라고 하는 것은 깨달은 지혜, 해탈한 지혜, 생사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혜를 반야라고 한다.

 

이러한 반야로서 완성을 하는데 무엇을 완성하는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완성한다.

 

그 반야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지혜의 완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반야는 항상 반야를 실천해가는 힘이 있다.

반야 따로 실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반야는 늘 올때나 갈때나 반야를 실천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실천문을 바라밀이라고 하고 완성을 바라밀이라고 한다.

 

그리고 반야에는 장애가 하나도 없다. 않되는 일이 있다든지, 억울한 일이 있다든지, 괴로운 일이 있다든지 하는 것은 반야의 눈을 못뜨기 때문에 그렇다.

 

혜안(慧眼), 반야의 눈을 딱 뜨고 보면 혜안관시지옥공(慧眼觀時地獄空), 지혜의 눈으로 관조면 지옥도 공(空)하여 아무것도 없다. 없는 것도 없다.

 

그것이 반야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생과 사가 절대 평등하다. 모든 것이 없어서 없는 것도 없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설명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경(經)의 명칭이라고 하는 것은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나 목적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방향이 저곳이라고 하는 화살표처럼 딱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가리키는 그것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면 손가락에만 매일 얽매여서 달을 못본다.

 

그러니까. 가리키는 화살표를 통해서 달을 딱 보면 그것이 경(經)을 보는 목적이고 자세이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 반야다. 그러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그 자리가 무엇인가? 모른다.

 

그것은 왜 그런가? 그 말은 손가락이지, 목적지가 아니라고 한다. 해탈의 세계라면 해탈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경(經)이 아니고 화살표처럼 가르쳐주는 그것이 경(經)이다.

 

더 설명을 못한다. 그래서 경(經)은 열쇠와 같다고 한다. 열쇠는 열고 들어가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열쇠 그 자체가 방이 될 수 없으며 방이 아니다.

 

열쇠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방이 될 수는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된다. 반야가 그렇다. 반야는 삼세제불 아뇩다라삼략삼보리가 모두 이 경(經)에서 나왔다.

 

이 경(經)이 바로 반야이다. 다 반야에서 나왔다. 그러면 반야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런데 뒤에 가다 보면,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그리고 반야라는 말 그 자체도 가명(假名)이라고 한다. 그것은 반야라고 하는 그 이름에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다.

 

명(名),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을 통해서 그 실체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이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딱 가리키는 손가락 그 자체라고 한다. 또, 어디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와 같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모습을 딱 보는 거울이라고 한다.

 

거울을 가서 보면 거울이 목적이 아니다. 내가 목적이다. 거울을 보는 순간 딱 나를 보면 되지, 거울을 만지거나 거울을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이 경(經)이다.

 

[경(經)은 거울이다], [경(經)은 열쇠다], [경(經)은 손가락(화살표)이다.] 그래서 열쇠만 갖고 다니면 소용이 없다. 열고 들어가야 된다. 손가락만 쳐다보면 않된다. 손가락이 가르쳐 주는 목적물을 봐야 한다.

 

거울도 자기 모습을 딱 보고 무엇이 이상한 곳이 있으면 고치고 자기를 수정하는 것이 목적이지, 거울 그 자체에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라밀은 완성이고, 실천이다.

 

그래서 경(經)을 딱 보고 바로 해탈하면 된다. 그러니까. 경(經)을 본다는 것은 자기를 보는 것이다.

 

法會因由分 第一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법회를 열게 된 연유를 알리는 바로 이 부분, 제 1분이 금강경의 서분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금강경을 주해하신 많은 선승들께서는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부처님 최상의 설법이라고 하였다.

 

32분까지의 모든 가르침이 사실 이 제 1분에서 다 설해 마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계실만큼 제 1분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언뜻 보면 아무 것도 설한 것이 없고, 우리가 공부해야 할 만한 그 어떤 가르침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저 평범한 부처님의 일과를 잠깐 이야기 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수 있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이러한 부처님의 일과를 단순하게 겉모습만 본다면 깨달음의 한 줄기 작은 빛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마음의 눈으로 이러한 하루 일과를 온전히 살고 계시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면 수많은 선사 스님들의 그러한 고결한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음을 제가 들었습니다.] 아난존자가 하는 말이다.

[다음과 같음을 내가 들었습니다.]

 

‘여시아문’경전을 몇 번이라도 독경하고,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경전의 앞부분에 늘 등장하는 이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 말은 경전이 부처님께서 스스로 쓰신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들은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들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경전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신 아난존자에 의해 암송되고 옮겨졌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시고 20여 년 간을 홀로 전법의 길을 걸었다. 그 수 세월이 지나 가르침을 배우려는 제자들도 나날이 늘고, 또한 부처님의 연령 또한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시자를 둘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고, 부처님께서는 이윽고 허락을 하셨다. 아난존자는 총명하며 기억력도 뛰어나고 성품도 온화하였다.

 

더불어 외모도 출중하고 또한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라 부처님을 곁에서 시봉하기에는 적임자로 판단되었다.

 

부처님께서 29세에 출가하시고, 35세에 성도하셨으며, 55세 즈음에 비구 아난존자를 시자로 두었다.

 

아난은 부처님께서 80세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약 25년간을 곁에서 시봉하였다. 가장 오랜 기간 부처님 시봉을 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아난존자가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을 하시자마자 상수제자,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와 우파리존자를 위시하여 500아라한을 모아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게 되었다.

 

물론 그 때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존자의 역할이 중요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존자가 가르침, 법을 담당하고, 출가하기 전에 이발사였던 우파리존자가 처음 출가하는 수행자들의 머리를 깍아 준 인연으로 율에 대하여 가장 많이 들었기에 율을 담당하여 결집을 이루게 되었다.

 

경전을 결집하는 방법은 아난존자가 먼저 일어나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러 대중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 때 아난존자는 언제라도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시작함으로써 내 생각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고, 부처님께 들었던 사실만을 온전히 대중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였다.

 

이 사실은 불교 경전들이 비교적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혼란됨 없이 잘 이어져 내려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말을 들었을 때, 백이면 백 다 제각기 자기 색안경으로 걸러 알아듣기 마련이다.

 

자기 판단과 고정관념이 개입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특히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는 데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아난존자는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개입됨이 없이, 아무런 가감도 없이 그대로 부처님께 들은 것들만 있는 그대로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을 말할 때 대부분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하기 쉽다. 물론 내 말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말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책에서, 스승님들에게서 얻어 들은 말이다.

 

그런 것들을 우린 오직 내 잣대, 색안경에 비추어 걸러내어 ‘내 식대로’ 조합하는 역할 정도를 할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얻어 들은 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집하며,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 하곤 한다. 물론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온전한 내 생각인 줄로 착각하고, 옳은 생각인 줄로 착각한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나 혹은 부처님 말씀을 누군가에게 들려 줄 때는 아난존자의 이런 겸손함과 진실함을 본받아야 한다.

 

그래야 말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말을 순수하고 전달할 수 있으며, ‘내가 옳다’라는 아집과 아상이 비워진 텅 빈 진실을 말 할 수 있다.

 

현실은 그저 입가에 떠오르는 말을 아무런 걸러짐 없이 그것도 자기 생각인 양 마구 끄집어내다 보니 여러모로 번거롭고 복잡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에게 주워들은 내용을 내 말인 양 마구 토해 내다보면, 자신 내면에서 침묵과 명상을 통해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진실을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경전을 이렇게 생생한 부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던 데는 아난존자의 역할이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가감 없고 진실한 아난존자의 음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일시에, 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큰 비구 스님 1,250인과 함께 계셨다는 내용이다.

 

그때 사시(巳時)에 부처님께서 공양 시간이 되었는데, 부처님은 한 끼, 일종식(一種食)을 하셨다. 별도로 다이어트 할 필요가 없다. 가사와 발우를 수하시고 사위성, 사위국 수도에 들어 가셨다.

 

기원정사는 사위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다. 인도는 사원이 산중에 있지 않았다. 도심 가까이에 있다. 절이 어떻게 산 속에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태국 사람들은 우리 나라 절을 보고 깜짝 놀란다.

 

태국 사람들은 한국의 사원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한다. 태국은 이웃이 바로 절이다. 차례차례라고 하는 것은 지역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문화가 중심인 지역도 있고, 음식이 중심인 지역도 있고, 유흥가가 중심이 지역도 있다.

 

부처님 제자들은 그 지역을 가려서 다녀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전부 가리지 않는다. 부자 집이나 가난한 집이나 신분이 높은 집이나 낮은 집을 가리지 않는다.

 

인도사회는 독특한 차별주의가 있다. 사성제 계급이 있어서 그것이 인종차별도 되고, 계급차별도 되고, 피부색에 대한 차별이 굉장히 많았다. 아리안 족은 피부색이 깨끗했을 것이다.

 

평등이란 있을 수 없었다. 고질적으로 정착된 차별주의와 계급주의를 부처님이 다 깨었다. 그것은 아주 무서운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 민주주의의 원조는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상이 누구인가? 부모가 누구인가? 잘사는가? 못사는가? 를 일체 인정하지 않고 [지금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 그 행동만 중요시 하셨다.

 

그것이 인과다. 그 인과 밑에는 평등이다. 평등없는 인과는 없다. 기본적으로는 다 평등하다. 그 차별은 어디서 나오는가? 자기 행동, 업에서 나온다.

 

그래서 업보만 있지 불평등은 없다. 업보는 있지만 불평등은 없다. 왜 차별이 나오는가? 그것은 하는 행위가 달라서 차별이 나오는 것이지, 신분이 달라서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그 신분과 계급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고, 평등과 인과만 인정한 분이 부처님이다. 그것을 차제걸이(次第乞已)라고 한다.

 

차제걸이(次第乞已),차례차례(순서대로)로 탁발(걸식)을 다해 마치고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 계시던 자리로 돌아 오셨다.

 

그리고 반사흘(飯食訖),공양을 하셨다. 식(食)자인데, 먹는다고 하면 먹을 식(食)이 되지만 밥이라고 하면 밥 사(食)가 된다. 그래서 밥 반(飯)자가 먹을 반(飯)이 되어서 공양을 마치시었다.

 

수의발(收衣鉢),가사와 발우를 거두어 제자리에 놓으시고 세족이(洗足已),발을 씻었다. 부처님도 맨발로 다니셨다. 그리고 부좌이좌(敷座而坐),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것이 금강경 제일 첫 번째 나오는 경문이다. 이런 부분이 어떻게 금강경 첫 번째에 나올까? 가만히 이 광경을 그려보라. 그것은 삶의 질(質)이다.

 

삶의 양(糧)이라고 하는 것은 [몇 년을 살았는가?]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의 질(質)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신세계에서 사셨는가? 라고 하는 것이 삶의 질(質)이다.

 

그러니까. 매일 발우를 들고 탁발을 하러 시중에 들어가고 공양을 하러 나오고 할 때 어떤 정신세계로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는가?

어떤 정신세계로 공양을 드시고 드신 다음에 발우를 정리하셨는가? 또 앉는다고 하는 것이 어떤 정신세계로 앉았는가? 그것이 삶의 질(質)이다.

 

그래서 삶의 질(質)이 아주 넓고 깊으면 단 하루만 살아도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삶의 질(質)이다. 그런데 삶의 질(質)이 낮으면 억만 년을 살아도 모자란다.

 

일념즉시 무량겁(一念卽是 無量劫)이고,

무량원겁 즉일념(無量遠劫 卽一念)이라.

 

한 생각은 찰나인데, 그 삶의 질(質)에 따라서 일찰나가 무량겁이 될 수 있다. 또 삶의 질(質)에 따라서 무량겁이 일찰나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불교를 공부하는 분은 절대 오래 살려고 연연할 필요가 없고 삶의 질(質)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질(質)은 어떻게 높이는가? 이 정신세계를 높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만 살아도 영원히 산 것이다. 그게 해탈이다.

 

그냥 마음공부 없이 오래 살아보아야 별의미가 없다. 마음공부가 깊으면 오래 살 필요가 없다. 또 금방 죽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것이 마음공부이다.

 

한 생각은 헤아릴 수 없는 영겁(永劫)의 시간이고 헤아릴 수 없이 멀고 아득한 시간도 한 생각에서 나온다.

 

부처님이 맨발로 걷고, 부처님이 탁발 공양하시고 부처님이 자리에 앉으신 그 마음이 반야바라밀이다.

 

부처님이 오시는 것도 반야바라밀이고, 가시는 것도 반야바라밀이고, 공양하시는 것도 반야바라밀이고 전부 반야바라밀이다.

 

부처님께서 사시 때 일종식(一種食)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집 앞에서 음식을 준비해서는 부처님과 그의 청정한 제자들이 오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승가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스님들은 저마다의 탁발한 음식이 다름을 보고 분별심을 일으킬지 모른다.

 

음식의 맛과 양 또 그 종류에 따라 때로는 탐심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곧 다른 많은 스님들이 그렇게 하시듯 그 마음을 관찰하고 분별심을 놓을 수 있다.

 

고요히 탁발을 하시고는 다시금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공양을 한다. 공양을 하기 전에 잠시 저마다 침묵으로써 명상을 한다.

 

이 음식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수많은 인연, 온 우주 법계의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안으로, 안으로 은은히 피어오르게 한다.

 

몸이 약하거나 병이 들은 도반이 곁에 있다면 내 발우에 담긴 몸에 좋은 음식이나 고기 등을 나누어 줌으로써 약으로 삼는다.

 

그리고 때때로 맛에 탐착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는 잘 관하며 고요히 공양을 한다. 공양이 끝나면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금 고요히 선정에 든다.

 

이러한 아난존자의 묘사에 어디 시끄럽고 복잡스런 느낌이 있는가. 이 많은 스님들이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느 한 구석 시끌벅적한 광경이 아닌 한없이 고요하고 여법한 광경일 뿐이다.

 

아난존자는 항상 그림자처럼 부처님 옆에 서 있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나가실 때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부처님을 따르고, 공양을 하실 때 말없이 옆에 앉아 함께 공양하며 항상 부처님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한 부처님에 대한 지켜봄이 있었기에 부처님의 일상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깨달음의 순간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을 때 시시콜콜해 보이는 이런 사소한 일상까지 아난존자는 경전에서 소중하게 말하고 있다.

 

이 광경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부처님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하셨던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하루를 돌아보면 어떠한가. 잠이 안 깨니 자명종도 소리 큰 것을 사다가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출근하기 직전까지 맞춰놓는다. 또,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지 못해 눌러 놓고 자다보니 이만 저만 늦은 게 아니다.

 

그러니 아침이 얼마나 바쁘겠나. 정신없이 시계 보면서 씻고 화장하고 대충 밥 먹거나 아침밥도 굶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서 후다닥 회사로, 학교로 간다.

 

하루의 시작이 정신없으니 어찌 하루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저녁 때 동료들과 어울려 한 잔 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쓰러지듯 잠이 들곤 한다.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 정신없이 마음 챙기지 못하고 사는 것은 이와 다를 게 없다. 이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 금강경 제 일분에 나오는 부처님의 평화롭고 고요한 삶과 우리의 허둥지둥 정신없는 삶을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모든 순간순간이 그대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밥 먹고, 걷고, 씻고, 앉는 모든 일들이 소중한 수행 아닌 것이 없으니 따로 수행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

 

어느 한 가지 사소하고 덜 중요한 일이 없이 모든 일과가 그대로 소중한 깨어있음의 행이다. 우리들은 중요한 일도 있고 사소한 일도 있으며, 때때로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사소한 일들은 일일이 신경을 쓰지 못하곤 한다.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지간한 사소한 일이나 소소한 일들은 그냥 흘려 보내기 쉽다.

 

회사에 가야 된다는 목적 때문에 집에서 밥 먹고, 버스를 타고, 회사로 걸어가는 그런 일상은 사소하고 귀찮은 일쯤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행에 있어 사소하고 중요한 분별은 없다. 낱낱의 모든 일상은 그대로 하나의 소중한 깨달음의 행이 된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밥 먹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밥 빨리 먹고 나서 좌선에 들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오직 밥 먹는 그것이 그대로 목적이다. 밥 먹는 순간 온전히 밥만 먹는다.

 

밥 먹으며 다른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과거를 떠올리며 그렇게 번잡하지 않고, 오직 밥만 드실 뿐이다.

 

밥을 먹는 순간, 발을 씻는 순간, 걷는 순간, 탁발을 하는 순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거기에 있다.

 

매 순간 도착해 있다.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 도착지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일 뿐, 또 다른 도착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다.

 

걷는 순간 오직 걸을 뿐, 탁발을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고, 발을 씻는 순간 오직 씻을 뿐, 빨리 씻고 좌선에 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깨어있음이다.

 

모든 순간순간 더 이상 도달할 곳이라고는 없다. 그 순간이 가장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은 바로 이러한 점을 일깨우고 계신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과라도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지금 부처님의 삶에서처럼 온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던 ‘평상심이 도’라는 말 또한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선사 스님들께서 부처님의 일상을 언급하신 금강경 제 일분을 두고 깨달음 최고의 순간이며 최상의 설법이라고 하셨다.

 

똑같은 일상이라도 그 일상이 깨달음의 순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중생들의 평범한 일과가 될 것인가? 하는 데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똑같은 일상이라도 온전히 그 순간 집중을 하여 깨어있게 되면 그것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과 같다.

 

그러니 늘 일과가 깨어있지 못한 우리들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 금강경의 제 일분이 얼마나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나. 그저 우리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맑게 씻고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살짝 엿보게 되면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모든 일과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임을 알 수 있다.

 

겉모습은 서로 같더라도 그 내면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부처님도 배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자고 역대의 고승들도 지금의 우리들도 모두 배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자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듯 평범하고 똑같아 보이는 일상일지라도 내면에 중심을 세우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보내느냐? 그저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느냐? 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평화롭게 깨어있는 낱낱의 일들이 곧 좌선을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모든 일상을 살아감이 그대로 좌선하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는 것과 둘이 아니며, 생활과 수행이 둘이 아니라고 말이다.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가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구절인데, 아쉽게도 우리가 많이 독송하고 있는 구마라집의 번역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대일로 직역하는 것을 중시하는 현장 삼장의 번역이라던가, 진제 삼장본, 보리유지 본 등의 다른 한역 금강경에서는 모두 번역이 되고 있다.

 

빠알리어 경전에서도 이 부분은 잘 드러나 있음을 볼 때, 분명 이 부분은 금강경의 원본에는 나타나 있는 경구라고 할 수 있다.

 

금강경 제 일분에서 말하고 있는 부처님의 일상 하나하나가 그대로 가부좌를 결하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는 좌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이 부분에서는 말하고 있다.

 

앉아서 하는 좌선은 중요하고 법 먹고, 탁발하고, 발을 씻는 등의 일은 중요치 않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낱낱의 행위가 그대로 마음집중의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양이 끝나시고 부처님께서는 여느 때처럼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술 바로 위쪽으로 호흡이 들고 나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시며 앉아 계신다. 호흡이란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스님은 이 부분을 ‘주대면념(住對面念)’이라고 하여, ‘전면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라고 해석을 했다.

 

빠알리어에서 ‘전면’이라고 해석한 부분을 원본에서 ‘무카(mukha)’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얼굴이나 입이라고 해석한다. 산스크리트본에서 무카는 입이나 얼굴을 나타낸다.

 

전후 사정을 보았을 때 아함경 등에서 나오는 사념처 수행에 빗대어 ‘얼굴에 마음을 집중한다’거나 ‘전면에 마음을 집중한다’는 해석 보다는 ‘입술 위 부분의 호흡이 들고 나는 곳에 마음을 집중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어쨌거나 여기에서는 호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금강경의 제 일분에서는 부처님의 평범한 하루 일상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가르침을 열고 있다. 우리의 삶과 부처님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똑같이 먹고 자고 걷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깨어있는 정신으로 오직 그것을 할 뿐이며, 오직 매 순간 순간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매 순간 다른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달해 있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있다.

 

우리 또한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보며 우리의 삶도 부처님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외양상으로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내면의 빛을 현실에 피어오르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또한 그대로 깨달음을 삶 속에서 피어오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꾸 어디로 갈까 망설이지 말고, 자꾸만 욕망을 일으켜 도달할 곳을 찾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번뇌와 집착으로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삶과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매 순간 순간 깨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의 행이고, 금강경의 실천이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해석이 어마어마하게 굉장히 많다.

 

그런데 삼등분으로 나누는데,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까지는 법회의 청중이다.

 

그리고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여기까지는 부처님의 계행(戒行)이다. 오고 가는 것이 다 계행(戒行)이다.

 

그 다음에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여기까지는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계행(戒行)은 공양 시간이 돼서 부처님이 가셨다가 돌아오시는 것을 말한다.

 

계행(戒行)이라고 하는 것은 해탈이다. 계행(戒行) 하나 지키면 하나 해탈이고, 두 개 지키면 두 개 해탈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해탈이다.

 

계행(戒行)은 갔다가 오시는 것으로 해탈이라고 한다. 다 공양하고, 정리하고 다 자리 펴고 앉은 것을 부처님의 선정(禪定)으로 본다.

 

그 다음, 자리 펴고 앉는 것이 문제다.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부좌이좌(敷座而坐), 자리 펴고 앉았다고 하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하나 재미있는 것은 금강경은 이렇게 [부좌이좌(敷座而坐), 자리 펴고 앉았다]로 시작해서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응당히 이렇게 보라고 하면서 끝난다.

 

앞에는 모두 청중이고 설명이다. 그래서 금강경은 [앉을 좌(座)]로 시작해서 [볼 관(觀)]로 끝난다. 그 구성이 멋지다. 턱 [앉아서 본다]는 것이 금강경이다.

 

그렇다면 [좌(座),앉는다]라고 하는데 앉는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진제삼장본과 보리유지본에는 조금 복잡하게 번역되어 있다.

 

여상부좌(如常敷座),평상시와 같이 자리를 펴고, 결가부좌(結加趺坐),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단신이주(端身而住),몸을 단정히 머물러서, 정념부동(正念不動),정념(알아차림)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구마라집의 번역본에서는 부좌이좌(敷座而坐)이 네 글자로만 되어 있다. 단신이주 이후 부분은 구마라집 번역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단정한 몸으로 바른 주의집중, 알아차림(정념)으로 앉다.” 여기서 염(念)은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고 기억하여 지키고, 주의집중, 알아차림을 뜻한다.

 

좌선의 단계를 나눠보면,

 

1) 알아차리고, 주의집중을 하는 단계(반야바라밀을 가기위한 기본적 자세)

 

2) 앎의 단계

 

3) 반야(지혜)를 확립하는 단계.

 

구마라집은 왜 이 부분을 생략했을까? 구마라집은 젊어서 초기불교(위빠사나)를 수행했고, 나중에는 대승선을 공부했다.

 

반야계통의 대승선에서는 위빠사나를 하지 않는다. 대승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미 무상이며 형상이 없기에 더 이상 관찰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이유로 구마라집이 문장을 생략한 것으로 보여진다.

 

세 가지 부류의 사람

 

1) 형상과 모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형상과 모양에 집착한다.

 

2) 그 모양과 형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모양과 형상을 알아차리기 위해 수행한다.

 

3) 이미 형상과 모양이 없다.

 

참다운 기도는 반야바라밀의 실천에 있다. 그리고 정념, 주의집중, 바른 알아차림이야말로 반야바라밀 실천의 초석이다. 이렇게 보면 보리유지 번역이 아주 자세하다.

 

단신이주(端身而住)

 

단신(端身)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있다. 돌아다니거나, 서있다. 그 다음 앉거나 눕는다.

 

선(禪)을 하는데, 돌아다니면서 선(禪)을 하면 산란이 오기가 쉽다. 또 딱 서서 선(禪)을 하면 피곤함이 오기가 쉽다. 그리고 누워서 선(禪)을 하면 무엇이 오기 쉽겠나?

 

잠이 오기가 쉽다. 딱 앉아서 선(禪)을 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중에서 제일 좋다고 한다. 그래서 좌선(坐禪)이다.

 

행선(行禪)도 있고 주선(住禪)도 있고 와선(臥禪)도 있는데, 그것보다 딱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면 피곤하지도 않고 잠도 않온다. 그래서 부처님은 좌선(坐禪)을 하셨다.

 

그 다음 앉아서 무엇을 하는가?

 

정념부동(正念不動)

 

정념(正念)은 마음을 챙긴다고 한다. 주의집중해서 마음이 도망가지 않도록 마음을 알아차림(정념)에 딱 붙들어 놓는다.

 

정념(正念)을 잘 챙기면, 마음을 잘 챙긴다고도 그렇게 번역을 하는데, 다른 말로는 수의(守意), 자기 생각을 지킨다고 한다.

 

그래서 정념(正念)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정정(正定)이 된다. 팔정도에 보면 정념(正念) 다음에 정정(正定)이다.

 

산란한 생각을 여의고, 참으로 마음이 안정되어 곧 선정(禪定)을 바로 든다. 그리고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되면 그 다음은 무엇이 되는가?

 

지혜(智慧)가 환희 밝아지게 된다. 그것이 정견(正見)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정견(正見)이 항상 되기에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늘 하고 있다.

 

부처님도 평소에 마음을 딱 지킨다. 그래서 늘 선정(禪定)에 계신다. 이것을 념정혜(念定慧)다. 마음 공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념정혜(念定慧)다.

 

마음 공부라고 하는 것은 정념(正念), 정정(正定), 지혜(智慧)를 이르는 말이다. 마음이 이리가고, 저리 가는 그런 것이 아니고, 집중을 해서 내가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거기에 마음을 딱 지킨다.

 

그러면 마음이 턱 안정이 된다. 안정이 되면 무엇이 보이는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것이 지혜(智慧)다.

 

마음이 이리 가고, 저리 가고 따라 다니면 절대로 마음은 선정(禪定)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정(禪定)이 않이루어지면 보이지를 않는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그것이 반야로 보이는 세계인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설명을 하는 말이 아니라 [저기 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있다] 그러면 누가 가야 하는가? 내가 가야한다.

 

내가 정념(正念), 정정(正定), 지혜(智慧)을 통해서 가야 한다. 마음을 딱 지키고 가야 된다.마명보살(馬鳴菩薩)이 부처님을 칭찬하면서 지은 불소행찬경(佛所行讚經)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정념(正念)은 무엇인가? 에 대한 비유가 있다. 마명보살은 정념(正念)을 성곽(城郭)이라고 표현하였다.

 

궁(宮)이 있는데, 궁을 지키는 것은 성(城)이다. 궁이 있는데 성이 없으면 않된다. 정념은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인데, 마음이 여기 딱 있으면 그것이 정념인데, 호홉에 집중을 하면 그 호홉이 마음을 딱 지키고, 자기 몸에 집중을 하면 그 몸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성곽(城郭)을 지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면 마음이 탁 안정(安定)이 된다고 한다. 안정이 된 그 선정(禪定)은 무엇인가?

 

임금이 앉아있는 용상(龍床)이라고 하였다. 용상도 좋기는 하지만 성을 잘 지켜져야 그 용상이 유지가 된다. 적군이 쳐들어 와서 성곽(城郭)이 무너진다면 용상[선정(禪定)에 비유]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않된다.

 

그래서 념정(念定), 념(念)이 있어야 정(正)이 이루어진다. 마음 챙김을 항상 해야 마음이 탁 안정이 되지, 마음 챙기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절대 안정이 되지 않는다.

 

공부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러면 지혜는 무엇과 같은가? 지혜(智慧)는 그 성곽(城郭)을 밝게 비추어 주는 햇빛과 같다고 하였다.

 

생각해보세요? 성곽도 튼튼하고 용상도 안전하지만 깜깜해서 어두워지면 군인들이 성곽을 잘 지켜지겠습니까? 지혜(智慧)는 일광(日光)이라 햇빛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딱 집중해서 달아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은 성곽(城郭)과 같고, 안정이 탁 되어 있는 것은 용상에 임금이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불소행찬경(佛所行讚經)에서 부처님의 세계를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멈춤이다. 무엇이 멈춤인가? 마음이 멈춤이다.

 

중생이 중생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마음이 멈추어 지지 않아서 그렇다. 마음이 한없이 한없이 앞만보고 앞만보고 달아난다. 그리고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목표를 항상 구하는데 두어서 구해도 구해도 구하고 나면 두면 허망하다. 부모가 가르치는 지식은 무엇을 구하라. 부자되라. 유명한 사람되라. 힘있는 사람되라. 전부 이런 것을 가르친다.

 

재물, 권력, 명예다. 이런 것은 구해보면 허물어 버린다. 현실은 노인이나 누구든지 편안하게 오래 살려고 건강을 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건강도 천년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딱 죽는 순간에는 허망하다.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내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 갈 때, 평생 건강했던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무상 앞에는 허망한 것일 뿐,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끝임없이 구하는 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을 꿈에도 모른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토끼 한 마리를 만났는데, 그 토끼를 잡으려고 열심히 열심히 쫒아 다니다 보니까. 나중에는 지쳐서 토끼도 못잡고 산과 들을 다 잃어버렸다.

 

본래 산에 있었기 때문데 토끼 쫒아 다니는 것을 탁 멈추어 버리면 그때는 산도 보이고, 들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온천지가 다 밝게 보이는데 그게 깨달음이다.

 

그래서 산에서 산을 못 보는 것은 토끼 쫒는 사람이듯이 불생불멸(不生不滅) 속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못 보는 것은 앞만 보고 달려 가는 중생과 같다.

 

수의(守意),마음이 달아나지 않도록 딱 지키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부처님을 해칠려고 따라오는 앙굴리마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백 명의 사람을 해치는 것이 목표였는데, 부처님을 해치면 백 명을 채우게 되어 있었다. 부처님이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뒤에서 [멈추어라]고 외쳤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벌써 [멈추었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계속 갔다.

 

그러자 [멈추어라] 외치고, 부처님은 나는 벌써 [멈추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막 쫒아와서 왜 거짓말을 하느냐?

 

계속 도망가면서 왜 [멈추었다]고 하느냐? 고 하니까.

 

부처님은 나는 벌써 [멈추었다] 그러자, 그는 무엇을 멈추었느냐?

 

부처님은 [내 마음은 벌써 멈추었다] 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발이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은 벌써 멈추었다. 그런데 너는 마음을 멈추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부좌이좌(敷座而坐)라고 하는 것은 몸이 가고 오고 앉고 서는 그것에 의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똑같다. 마음이 달아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갈 때도 마음이 딱 멈추어서 몸과 마음이 함께 간다. 앉을 때도 몸과 마음이 함께 한다.

 

그것은 그 몸이 전부 내가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항상 알고 보이니까. 그렇다.

 

어린아이들이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나는 누가 낳았어요?] 그러면 엄마는 [엄마가 낳았지?]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는 [아빠는 무엇을 했나요?]고 이것을 묻는다.

 

그러면 엄마는 대답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엄마로 하여금 너를 낳게 하였지?] 또 보통은 [커보면 알아]라고 대답한다. 이런 것은 교의적(敎義的)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또는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야!]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 선(禪)은 곧 선(禪)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나로 하여금 너를 낳게 했다] 이것은 교의적(敎義的)으로 설명을 해 주는 것이다. [커보면 안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손가락을 보고 너가 직접 달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멈추는 일을 자기가 했을 때, 알게 되는 것이다. 설명을 가지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지혜를 얻었을 때 알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라고 하는 분이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어떤 분일까? 삶과 죽음이 없는 것을 아셔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생활 속에서 완성한 분이다

 

탁발하러 갈 때도 걸음걸음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없는 상태에서 걸었고, 앉을 때도 삶과 죽음이 없는 상태에서 앉았다고 한다.

 

흔히 계를 잘 지키면 선정이 오고, 선정을 잘 닦으면 지혜가 온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깨닫는 과정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항상 지혜 속에 있는 것이다.

 

지혜에서 그냥 계를 실천하고 지혜에서 선정을 실천하는 이런 것이 깨달은 뒤에는 순서가 없다. 그런데 닦는 것은 똑같이 닦는다. 그것은 산을 본 사람도 산 속에 있고, 산을 보지 못하고 토끼만 쫓아가는 사람도 산 속에 있다. 산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념을 하게 되면 불소행찬경(佛所行讚經)에도 그런 말이 있는데, 마음 지키는 일이 마음 속에 딱 있으면 모든 악한 것이 다 내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벽관(안심,壁觀),마음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되고 허망된 것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왜 들어 못하는가? 내 마음을 성처럼 지키고 있으면 내가 허망한 것에 현혹되지 않는다고 한다.

 

중생이 습관적으로 무엇을 구해봐야 마지막에는 고통뿐인데, 그냥 모르고 쫓아간다. 가서 보면 또 허망해서 우울해진다. 또 반해서 쫓아간다. 또 가서 보면 허망해서 울고, 쫓아가고 울고, 쫓아가고 우는 것이 중생이다.

 

왜 그런가? 마음 하나 지키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큰 스님들 법문에 그런 것이 있다. 누가 [아, 뭐 하고 싶다] 고 말한다. 그러면 큰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난 다음에는 어쩔래?] 하고 한다. 무서운 법문이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허망한 것을 미리 아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 광명각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

 

일찰나에 무량겁을 환희 보면 그것이 지혜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조그마한 티끌 속에서 온 우주를 다 보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찰나의 순간 속에서 영원한 시간을 다 보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일찰나에 무량겁의 세월을 환희 보면,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그 마음을 딱 지켜서 지혜를 항상 밝히고 있으면 간다든지 온다든지 머문다든지 하는 이런 것은 전혀 없다.

 

그래서 걸음걸음이 다 해탈이고 앉으나 서나 모두가 해탈이다. 그런 경지를 부처님이 완성시키니까. 그런 경지가 반야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완성이 될 때 바라밀이다.

 

완성이 안되면 바라밀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완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분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생은 부처님은 본받는 것이다.

 

부처님의 오고 가는 계행을 본받고, 념정(念定)부처님의 선정을 본받고, 정념, 정정, 부처님의 정견의 지혜, 그 세계로 가는 것이 불자이다. 금강경도 그런 내용을 쭉 강조하고 있다.

 

종범스님

 

 

 

 

 

 

 

출처 : 수보리
글쓴이 : 원종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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