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 연기법

십이연기법을 관하는 세 부류 : 범부, 소승, 대승 - 관점의 차이

수선님 2018. 6. 17. 11:53

십이연기법을 관하는 세 부류 : 범부, 소승, 대승 - 관점의 차이




[문] 만일 무명이 없다면 또한 모든 지어감[行] 등도 없거늘 어떻게 12인연을 말씀하시는가?

 

[답] 12인연을 말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범부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은 뒤바뀐 것이어서 나라는 마음[我心]에 집착하여 모든 번뇌의 업을 일으켜 나고 죽고[生死] 하는 그 가운데서 왕래하는 것이다.

 

 

둘째는 성현은 법안(法眼)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면서 늙고 병들고 죽는[老病死] 것을 마음에 싫어하여 세간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인연(因緣)을 구하면 그것은 태어남[生]으로 말미암으며, 이 태어남은 모든 번뇌의 업의 인연으로 말미암는다. 왜냐하면 번뇌가 없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번뇌는 태어남의 인(因)이 되는 줄 알 수 있다.

 

번뇌의 인과 연은 바로 무명(無明)이다. 무명 때문에 마땅히 버려야 하는데도 취하고 있으며, 마땅히 취해야 하는 데도 버린다. 어느 것을 버려야 하느냐 하면, 늙고 병이 드는 모든 괴로움의 인연인 번뇌는 마땅히 버려야 하는데도 작고 뒤바뀐 즐거움의 인연 때문에 취하고 있다. 지계(持戒)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는 모든 선(善)의 근본이어서 이것이 바로 열반의 즐거움의 인연이라 이런 일은 마땅히 취해야 하는데도 버리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ㆍ짓는 이[作者]가 없다.

 

왜냐하면 이 법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고

다만 거짓된 인연이 상속(相續)하면서 생길 뿐이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이가 이것은 거짓이요 진실이 아닌 줄 알면 쓸모없는 이론[戱論]도 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괴로움을 멸하기 때문에 열반에 들 뿐이요,

모든 괴로운 모양을 끝까지 궁구하지는 않는다.

 

 

 

셋째는 모든 보살마하살로서 큰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근기가 예리하기 때문에

다만 12인연의 근본되는 모양만을 끝까지 다 궁구할 뿐이요,

근심하거나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침몰하지 않는 것이다.

 

그 모습을 구할 때도 일정한 모양을 얻지 못한다.

 

늙음[老]의 법은 마침내 공한 것이요,

다만 거짓으로 붙인 이름에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해서 늙음을 말하나

이것은 마음에 상응하지 않은 행[心不相應行]이어서 이런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희다[頭白]는 등은 바로 빛깔의 모양[色相]이요 늙음의 모양[老相]은 아니며,

이 두 가지의 일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늙음의 모양은 없다.

 

또 세간 사람들은 늙음의 모양을 말하면서 머리가 희고 이가 빠지며 얼굴에 주름살이 지고 몸이 구부러지며 수척해지고 힘이 약해지며 모든 감관이 어두워지는 등의 이러한 것을 늙음의 모양이라 하지만 이런 일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머리가 흰 것은 늙은이만이 그런 것이 아니요 나이 젊어서도 머리 흰 이가 있으며,

늙은 사람에게도 머리가 검은 이가 있기 때문이니,

수척하고 주름살지고 구부러진 것 등도 또한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늙었는데도 모든 감관이 밝고 예리한 이가 있으며,

젊었는데도 어둡고 막힌 이가 있기도 하다.

 

또 나이를 돌리는 약[還年藥]을 먹으면 늙은이라 할지라도 건장해지므로

이와 같은 늙음에 있어서도 일정한 모양이 없으며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이 화합하여 임시로 늙음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또 마치 수레바퀴와 굴대와 끌채와 바퀴살이 임시로 한데 합치면 수레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은 임시 이름이요 진실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과보(果報)의 5중(衆)을 말하기에 그 모양을 늙음이라 한다”고 한다.

이것 역시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은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면서 머무르지 않으며,

만일 머무르지 않으면 그 모양도 없고 모양이 없으므로 늙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온갖 유위의 법에 만일 머무름이 있다면 무상(無常)하다는 것이 없고

만일 무상하다는 것이 없으면 곧 항상하다[常]는 것이니,

만일 항상하다면 늙는다는 것도 없거늘

하물며 항상 있는 것도 아니요 무상한 것도 아닌 필경공 가운데서 늙는다는 것이 있겠는가.

 

또 모든 법의 마침내 공한 가운데서는 태어나는 모양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늙는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늙음의 법을 구하여도 얻을 수가 없으며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모양이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아 다할 수 없나니,

마치 늙음[老]에서와 같이 무명(無明)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무명을 깨뜨리는 일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마침내 공이어서 아무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고 관하며

또한 이런 일에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거니와

 

중생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진실하지도 않고

뒤바뀌며 허망한 법 가운데서 모든 괴로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처음의 12인연은 다만 범부의 사람만을 위한 것이므로 여기에서 잘잘못을 가릴 것은 없고,

두 번째의 12인연은 2승(乘)의 사람과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법을 얻지 못한 보살들이 관하는 것이며,

세 번째의 12인연은 무생법인을 얻은 이로부터 도량(道場)에 앉은 보살에 이르기까지가 관한다.

 

그러므로 “무명의 허공은 다할 수 없으며, 나아가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憂悲苦惱]의 허공도 다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와 같이 인연의 법[因緣法]을 깊이 관한다.

 

“모든 치우친 소견과 뒤바뀜을 여읜다”고 함의 치우친 소견[邊見]이란 항상하다 하는 치우친 소견[常邊]과 아주 없다 하는 치우친 소견[斷滅邊]과 있다 하는 치우친 소견[有邊]과 없다 하는 치우친 소견[無邊]과 진실하다 하는 치우친 소견[實邊]과 공하다 하는 치우친 소견[空邊]과 세간은 있다 하는 치우친 소견[世間有邊] 등을 말한다.

 

모든 치우친 소견에 집착하여 뒤바뀐 이는 무상한 것 가운데서 항상하다는 등의 모든 뒤바뀐 번뇌를 일으키고 있으므로 이 12인연의 법을 관하면 모든 치우친 소견의 뒤바뀜이 소멸하게 된다.

 

 

모든 번뇌에는 두 갈래가 있다.

 

첫째는 외도의 삿된 소견[邪見]을 지닌 사람을 치우친 이라 하며,

둘째는 그 밖의 중생들의 번뇌를 뒤바뀐 이라 한다.

 

12인연을 관하면 이런 두 가지의 번뇌는 모두가 소멸한다.

 

 

이 세 번째의 12인연관(因緣觀)은 매우 깊어서 오직 도량에 앉은 모든 보살만이 관할 수 있다.

 

앞에서 비록 관했다 하더라도 아직 구족하지는 못한 것이니, 마치 "성비유경(城譬喩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는 본래 도를 얻지 못했을 적에 생각하기를 ‘중생을 가엾이 여겨야 한다’고 하고 험한 길로 들어간 것이니, 이른바 자주자주 태어났고 자주자주 늙었으며 자주자주 죽으면서 세간을 왕래하며 벗어날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때 다시 생각하기를 ‘어떤 인연으로 늙어 죽는 것이 있을까’라고 이렇게 찾고 구하자, 그때에 ‘태어남[生]의 인연이 바로 늙고 죽는 등이로구나’ 하는 등의 진실한 지혜를 얻게 되었다”고 하신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세 번째의 관(觀)은 도량에 가 앉아야만이 비로소 얻는 줄 알아야 한다. 경에서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이와 같이 인연의 법을 관하면 2승을 지나가서 일체종지를 얻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 도에서 물러나면 그는 모두 이 매우 깊은 관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니,

만일 이 관을 얻으면 물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경공 가운데에 깊이 들어가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이 인연의 법을 관하면 그는 인연 없이 자재하게 생기는 정해진 어느 한 법도 보지 않나니,

온갖 법은 자재하지도 않고 모두가 인연으로 생기는 데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비록 온갖 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긴다고 보기는 하나 삿된 인연으로부터 생긴다고 여긴다.

 

 삿된 인연이라 함은 작은 티끌[微塵]과 세간의 성품[世性] 등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인연이 없이 생기는 어떤 법도 보지 못하고 또한 항상 있는 인연과 작은 티끌과 세간의 성품으로부터 생기는 어떤 법도 보지 못한다. 마치 허공이 항상 있는 것처럼 항상 있기 때문에 나는 것이 없으며 허공도 또한 물건에 인(因)이 되어 주지도 않나니, 이 때문에 항상 있는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어떤 법도 없다”고 한다.

 

또 보살은 이와 같이 “온갖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긴 데에 속하므로 자재하지도 않고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없으며, 나아가 아는 이[知者]와 보는 이[見者]도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그때 보살은 마침내 공한 데에 편히 머물러 12인연 가운데서 온갖 물질 등의 법을 ‘있다, 없다’는 등으로 보지도 않고 또한 반야도 보지 않으며 또한 이런 법을 써서 반야를 행한다고도 보지 않나니,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또한 그와 같다. 이것을 바로 ‘보살의 얻을 것이 없는[無所得]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이 얻을 것이 없는 반야를 얻으면 온갖 법 가운데서 곧 장애가 없는 반야를 얻게 되나니,

그때에 모든 악마는 몹시 크게 근심하고 괴로워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12인연의 마침내 공한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서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다, 없는 것도 아니다’ 등 62종의 모든 삿된 소견의 악마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는 이제 보살에게서 틈[便]을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법도 없다”고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고기잡이가 한 마리의 큰 고기가 큰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리는 것을 보고 갈고리나 그물로써는 잡을 수 없으므로 절망하면서 근심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새로 부모의 상(喪)을 당하는 것과도 같다.

 

또 보살이 이와 같이 얻을 것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곧 단바라밀(檀波羅蜜)을 두루 갖출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법을 행하면 모든 번뇌장(煩惱障)을 반야의 법으로 모두 꺾고 얇게 하므로 모든 악마의 백성들로서는 그의 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모든 바라밀이 두루 갖춰지게 된다.

 

이제까지 비록 6바라밀을 행했다 하더라도 아직 이와 같이 구족하지 못했으므로 수보리는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 있으며 단바라밀 등의 모든 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있습니까”라고 하며,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보살은 그의 모든 보시를 모두 살바야에 회향하느니라”고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사람이 있나니, 근기가 연약한 이[軟根]와 근기가 예리한 이[利根]다. 근기가 연약한 이는 많건 적건 간에 모두 모양을 취하면서 보시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이요, 근기가 예리한 이는 이런 취하는 모양을 깨뜨리면서도 공법(空法)에 대해 쓸모없는 이론을 펴며 믿는 힘이 갈수록 얇아져 살바야를 이용하지 않고 다만 모든 법의 실상(實相)만을 구하는 이다.

 

이 두 가지 사람은 모두가 단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없나니,

첫째 사람은 믿는 힘은 많되 지혜의 힘이 적으며,

둘째 사람은 지혜의 힘은 많되 믿는 힘이 적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제 “믿는 힘과 지혜의 힘이 똑같기 때문에 살바야에 회향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살바야를 생각한다’ 함은 바로 믿는 힘이요,

‘살바야와 같이 회향한다’ 함은 바로 지혜의 힘이다.

 

나아가 반야바라밀도 또한 그와 같다.

 

 

 

 

출처 : 대지도론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771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