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장산스님

[스크랩] 화엄의 바다

수선님 2018. 6. 1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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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의 바다

1.화엄경의 역해(譯解),논(論),소(疎),초(招) 등의 역저들

(1)지엄(智儼)이 5권의 소(疎)를 지었음. 수현기(搜玄記)라 함.

(2)현수(賢首)가 탐현기(探玄記)20권을 지었음.

(3)80화엄경에 대해 혜원(慧苑)이 간정기(刊定記)16권을 지었음.

(4)청량 법사(淸凉法師)가 소(疎)20권을 지었음.

(5)화엄경 전기 5권 당나라 법장(法藏)지음. 줄여서 화엄전이라고도 함.

(6)화엄경 금사자장(金獅子章)1권을 당나라 현수(賢首)가 지어서 측천무후(測天武后)에게 설 법한 것임. 금사자를 비유를 들어서 강설함.

(7)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신라 스님인 의상 대사가 지음.

(8)화엄종의 초조로 원효 대사가 해동종을 세웠다. 화엄종 계통으로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 스님이 있다. 화엄해동초조라고도 함.

(9)화엄종 계통의 스님이나 화엄경을 역하거나 주, 소, 초, 논, 기등을 모두 합하여 무려 300 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화엄경의 글자수

첫째, 화엄경의 글자는 십조구만오천사십팔자라고 하는데, 100000000000000000000000로 0이 23개나 된다. 약 십조의 글자라 하고, 요즈음 보통 책으로 한 페이지에 200자 원고지 10장으로 치고 300페이지의 책으로 치면 200곱하기 10하면 2000자 곱하기 300페이지 하면 약 60만자는 (1권), 10조 나누기 60만은 1666666666666666666 일백육십육경 육천육백육십육만육천육백육십육억 육천육백육십육만 육천육백육십육 권이 된다.

이것은 화엄경을 말할 때, 글자 수를 한번 셈하여 본 것이다. 화엄경은 10만 게송이니 30만 게송이니 하니 말이다. 10만 게송이나 30만 게송도 사실은 다 믿을 수는 없다.

다만 부처님 멸후에 많은 스님들이 게송을 부처님 입장에서 지은것도 있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화엄경의 많은 분량을 말할 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화엄경의 글자 수가 하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 셈하여 본 것이다. 그런데 화엄경은 겨우 80권이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화엄경을 이와 같은 비유로 말한 것이 있다. 마치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 수를 세는 것과 같다 하였다. 화엄경의 내용과 그 수많은 공덕이 이와 같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회석(會釋)

(합론 제6권 180현. 181현)

저 출현품은 이 경 가운데에 여래가 스스로 미간 백호광명을 놓으사 문수 보살이 입 가운데 광명이 나고 다시 보현의 이마에 이르게 하니 2인으로 하여금 한 가지 서로 문답케 하여 인과(因果)와 이사(理事)가 서로 사무치게 함이니라.

두 사람이 이치와 행과 그 몸이 되는 것과 그 씀[用]이 되는 것[理事體用]으로써 부처님을 이루는 고로 세상에 출현하시거든, 저 선재동자가 미륵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 미륵 보살이 또한 선재로 하여금 도리어 최초의 선지식인 문수사리를 보게 하시거늘 선재가 듣기를 마치고 다 기억하는 까닭에 보현 보살의 이름을 듣고 이에 무량한 삼매문(三昧門)에 들어 문득 그 몸이 보현의 몸에 듦을 보시며, 미륵보살이 누각 가운데 있으사 삼세사(三世事)가 다 금시에 있음을 보고, 선재의 공력이 한량없거늘 그 과(果)가 지극(極)한데 미륵보살이 너그러이 함께하여 법칙을 이루어 후학으로 하여금 믿어 알게 하고 증득하여 들어감에 하나도 의심이 없게 함이라.

여기에서 이사(理事)가 서로 사무치게 한다는 뜻은 곧 형이상학적으로나 형이하학적으로 서로 융합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무량삼매에 드시고 문수와 보현이 대보살로 이 경을 설하기도 하고 부처님 경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상수보살(上首菩薩)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에 동참한 많은 대중이 있는데 그 대중 가운데 상수가 되는 보살은 보현보살과 문수사리 보살이다. 문수와 보현은 법신 부처님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좌우 보처이기도 하다. 문수보살은 대지(大智)이시고 보현 보살은 대행(大行)보살이다. 대지(大智)와 대행(大行)은 지혜와 실천을 나타낸 것이다. 문수 보살이 있는 데에는 항상 보현 보살이 있고, 보현 보살이 있는 곳에는 항상 문수가 있다.

화엄경에는 물론 한량없는 보살 대중이 나오지만 모두가 보현이나 문수를 따라가지 못한다. 부처님 회상에는 모두 500인의 보살 대중이 있다. 대개 광념당 보살, 수미당 보살, 보당 보살, 무애당 보살, 화당 보살, 이진당 보살, 묘당보살, 보광당 보살 등이 수도 없이 나온다.

여기에 일일이 보살들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름마다 특별한 성격이나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모두 나열하게 된 것이다. 깃발 당(幢)자 돌림의 이름 자, 힘력(力)자 돌림자의 위력(威力)보살이 나온다. 대개 이 힘력 자의 보살들은 십행, 즉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힘력 자를 썼다.

다음으로 감출 장(藏) 자 돌림의 보살이 있다. 예를 들면 지장 보살, 허공장 보살, 연화장 보살, 보장 보살, 일장 보살 등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이 장(藏) 자 돌림의 보살님들은 한량없는 보배들을 갖추고 있다.

눈안(眼) 자 돌림의 보살이 있다. 선안 보살, 정안 보살, 보안 보살, 이구안 보살 등 많은 안 자 돌림의 보살들이 출현한다. 이 안(眼)자 돌림의 보살 등은 한량없는 세계를 보시며 중생들이 이 보살들의 눈을 통하여 세계를 보게 하는 위신력이 있다.

관(冠) 자 돌림의 보살은 벼슬을 하고 있는 보살들이다. 벼슬을 하고 있는 보살들의 역할은 아주 크다. 만약 그들이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불교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기도 하다. 중생계는 바로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또 빛광(光) 자 보살이 나오고, 소리 음(音)자 돌림의 보살, 윗상(上) 자 보살이 나오고, 이길 승(勝) 자 보살이 나오고, 자재왕(自在王)이란 이름의 보살이 나오고, 깨달을 각(覺) 자의 보살이 나온다.

여기에 글자의 의미가 있으니 그 의미는 한번 새겨볼 만하다.

지혜의 빛은 미혹의 어둠을 깬다

옛날 우리 고대사를 보면 나라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등 이들 여러 나라들은 살육의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나는 왕이다. 나는 벼슬이 높다.' 하는 자들은 실제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면서 순하디 순한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가까이로는 6.25사변도 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의 부끄러운 싸움으로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이 유린을 당했는지...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이러한 싸움에서 그들의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서로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또 총 안 든 경제 전쟁이 지금은 더욱 치열하기도 합니다. 언어가 다르고, 풍속이 다르고, 사는 곳이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인간들의 이와 같은 살육하고 생. 노. 병. 사 하는 것에 대한 문제들에 의문을 품고 그것을 완전히 풀기 위해 설산으로 고행의 길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곧 왕위를 이어 받을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분은 전혀 부족함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얻고자 하고 그렇게도 되고자 하는 그런 것들을 모두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귀영화가 참으로 무상한 것으로 간주하고 일말의 후회도 없이 중생의 아픔을 보고, 당신의 아픔인 양 싯다르타는 출가의 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석가모니 부처님께 큰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그분의 팔만 사천 법문이 없었다면 우리 중생들은 어디에 의지처를 두고 살겠습니까? 살육이 끊이지 않는 지구 도처에 부처님의 광대한 법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 불교도들이 부처님께 은혜 갚는 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 길이 있습니다. 누구나 복을 구하고 또 행복을 바랍니다. 그렇지만 복을 구한다고 해서 마냥 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복이란 선을 닦아서 얻는 것이며 또 부처님처럼 수행하면 큰 복이 됩니다. 원래 복이란 실체가 없습니다.

왜 살아가는 것일까? 왜 고통이 있을까? 왜 복은 구해지지 않는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이 좀 더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항상 힘써 나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치라는 것., 이것만큼 귀중한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가치는 어떻게 보면, 만인을 먹여 살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은 기껏해야 자기와 가족밖에는 먹여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치는 참으로 우리 인간들이 추구해야 할 정말 좋은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복은 좋은 것이지만 옛 조사스님들께선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경의 말씀에 "복은 선의 종자이기는 하나 지혜를 모른다. 그러므로 복이 다 끊어져 버리고 나면 미혹에 빠진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이 아무리 많다고 하여도 복을 자 받고나면 그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기에 조사스님들께선 경계해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이 잇을 때 지혜를 낼 수만 있다면 그는 많은 선근 공덕을 베풀었을 것이고, 아무리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이 없다손 치더라도 그는 슬기롭게 고난을 헤쳐 가면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를 모르니 그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복은 그리 좋은 것이 못 된다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좋은 것인가? 그것은 가치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우침의 문을 여신 것이 이와 같은 많은 중생들이 살아 갈 바 큰 의지처인 것처럼 이 가치라는 것은 만인을 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일까? 가치는 마치 연금술사와도 같아 사람을 깨우침의 길로 인도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어떻게 살아야 실패 없는 성공의 인생이 될까 하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가치라는 것은 이것 저것 섞여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가치있는 삶을 살았던 많은 분들 가운데 부처님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럼 '왜 부처님을 위시한 세상의 성현들은 가치 있는 창조적 삶을 살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만인에게 큰 이로움을 주신 거룩한 분들이기에 가치있는 분들이십니다. 이것이 복과 가치의 차이입니다. 세계가 이와 같이 많은 발전이 있는것도 가치 창조를 미래를 열어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한때 아들이 서당에 다녀와서 "어머니 저기서 잡는 돼지는 왜 잡습니까?" 하는 말에 "오, 그것은 너를 위한 것이란다." 그랬답니다. 그리고선 가만히 생각을 하니 '아이쿠, 내가 거짓말을 하였구나. 이 거짓말이 장차 아들을 망치겠다' 싶어 얼른 돼지 잡는 곳으로 거사 사정을 하고는 돼지고기 한 근을 얻어와 아들에게 끓여 먹였다고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 때 복의 인을 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움에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그저 공부, 공부합니다. 그 바람에 아이들은 갈 곳을 잃고 방황을 하게 되지요.

이제 가치 있는 삶, 요소 요소에 선과를 심는 삶, 그래서 모두가 소중해지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습니다. 이 화엄경의 세계는 이와 같은 삶의 지혜를 베풀어 주는 거룩한 경전의 바다입니다.

장산스님 화엄경 백일법문 중에서-

※앞으로 계속 화엄경 백일법문을 올릴것입니다

출처 : 대불법회
글쓴이 : 장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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