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요해(華嚴經 要解)
1. 화엄의 바다
대방광불 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란 '제불중생의 평등불성을 바로 보이신 것이다' 라고 하엿다. 삼세제불이 함께 증득한 바이며 시방의 모든 보살이 함께 닦은 바이다. 석가 여래가 처음으로 정각을 이룰 때 수행의 인(因)과 닦는 바 과(果)를 밝히고자 하사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닦고 함께 깨닫게 하사 노사나 부처님의 몸을 시현해 연설하고자 함이다. 문수 보살이 아난해(阿難海)로부터 철위산에서 결집할 때 상중하의 근기에 따라 나누어 삼부를 나누었었다.
이 경의 말한 바는 비로법신(毘盧法身)으로써 몸을 삼고 문수 보살의 묘한 지혜로 그 활용을 쓴다 하였다. 보현 보살의 행원으로 그 씨앗이 되고 그 원행으로써 묘지(妙智)가 원만하여 바로 미륵의 보처가 됨이라. 문수와 보현, 미륵을 의지하여 새로운 세계의 지표를 열어감은 광명보조(光明普照)를 믿기 때문이다. 문수사리 보살은 묘덕성(妙德性)이다. 미륵은 우리 말로 하면 자씨(慈氏)이고 범어로는 '마이뜨리아' 이며, 마이뜨리아는 '사랑의 부처' '사랑의 붓다' '희망의 부처' '희망의 보살' '사랑의 보살' 이라는 뜻이다. 화엄은 화엄해(華嚴海)라 하여 화엄은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용해된다는 보편성의 진리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배운 금강의 묘리와 반야지혜는 바로 이러한 화엄의 세계를 열기 위한 기초에 불과하다.
대(大)는 크다는 뜻이요, 또 그 몸이 한량럾이 크기 때문에 무외(無外)라 한다. 무외란 밖이 없다는 뜻이니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방(方)이란 그 상(相)이 방대하기가 마치 법계와 같아서 방정(方正)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평등하여 옮겨지거나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광(廣)은 그 씀(用)이 마치 태허(太虛)와 같아서 두루하고, 모두 품고(含容) 있어서 막히거나 걸릴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불(佛)은 곧 본지(本智)의 과(果)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서 근본각(根本覺)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잇을 것이다. 불(佛)은 우주의 근본자리요, 만물의 아버지이다.
화(華)는 만행(萬行)으로 얻어진 꽃이니 곧 그는 만행의 근본인 인(因)으로서 모든 것의 씨이다. 과[果, 열매를 맺기 위하여 꽃이 피듯이 華는 곧 열매를 맺기 전의 형태인 수행의 種因인 셈이다. 이것을 왜 꽃화자를 썼느냐 하는 것이다. 꽃이라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열매를 맺기 위하여는 모든 식물은 꽃을 피운다. 어떠한 방법이든 그 식물들은 꽃을 피우는 것을 그 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룩한 역사인 셈이다. 설사 꽃을 피우기는 피웠는데 열매가 없다하는 것은 또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생각할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열매 맺기 이전, 하나의 流轉的 형태일 수 밖에 없다. 법화경의 華字도 바로 이 華,자이니 화란 바로 수행을 의미한다. 예의바른 것도 화요, 공부하는 것도 화요, 염불하는 것도 화요, 참선하는 것도 이 화이다]를 말해 화(華)를 말한 것이니라.
엄(嚴)은 인과의 꽃으로써 불과를 장엄하되 복지행화장엄(福智行華莊嚴, 복지란 복덕을 겸비한 것이요, 행화란 수행의 꽃이니 그것이 장엄하게 된다는 뜻이다)한다 하니 십덕(十德)이 원만하여 십신(十身)노사나를 증득한다고 한다.
2. 오십이위(五十二位)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이것을 52위라 한다. 이 지위는 보살의 지위이다.
오십일위는 수행의 인(因)이고 묘각은 스행의 과(果)이다.
대저 유정(有情)의 근본이 지혜바다를 의지하여 근원이 되고 함령(含靈: 함령이란 일체 유주무주 제중함령의 준말이다. 함령이란 모든 중생의 식(識)의 세계를 말한다. 그가 의식하는 그것을 일러 함령이라 하는데 그것은 미물중생들까지 갖고 있는 의식의 세계인 것이다) 근본을 요달하여 식정이 멸진하여 마음을 알아서 근본몸에 합하는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것은 중생의 본제(本際)를 밝히시고 모든 부처님의 과원(果源)을 보임이라 하였다. 자재함은 곧 비로자나불이시니 본성으로 그 근본을 삼음이라. 사람마다 지혜가 근기에 따라서 응하시니 대비(大悲)로 제도하시어 이로써 이름한 것이라 하였다.
불(佛)의 십신(十身)이 있으니 그 첫째는 광명신(光明身)이요, 둘째는 실상신(實相身)이요, 셋째는 자재신(自在身)이요, 넷째는 보리신(菩提身)이요, 다섯째는 원신(願身)이요, 여섯째는 복덕신(福德身)이요, 일곱째는 위세신(威勢身)이요, 여덟째는 화신(化身)이요, 아홉째는 보신(報身)이요, 열째는 법신(法身)이다.
십신은 무변하여 중생의 마음을 다 아시고 어느 곳이든 아니 계신 곳이 없다. 십세(十世: 십세란 三世에 또 三世를 곱하여 九世가 되고 현존 일념(한생각)에 격(隔)하지 않고 시작과 마침이 마땅히 생각에 옮기지 않는다.)는 오직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허공으로써 량이 됨이며 세상을 모두 거둠이라 하였다.
3. 선재 동자
화엄경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 화엄경에서 선재 동자는 그 백미이다. 선재동자는 입법계품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선재가 일만팔천 대중 가운데 一人으로서 선두에서 일체 중생을 선도한다는 것이다.) 가 가는 길은 바로 우리가 가는 길이다. 선재는 오십삼(五十三) 선지식을 찾아 나선다. 선재는 그가 찾는 스승으ㄹ 찾아 나서는 용기가 있다. 때로는 배도 고프고 짜증도 나고 병도 얻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오직 일념으로 생각하기를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뿐이다. 자기 자신을 구한다는 것은 바로 남을 구하는 일도 된다. 반야의 가르침은 공(空)을 설(說)하여 실(實)을 말한다 하였다. 또 화엄경에서는 실(實)을 말하여 과(果)를 위한다고 하였다.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기는 쉬워도 나보다 낮은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선재는 모두가 다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선재는 법계에 있는 일체 미진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재의 눈에는 모두가 스승으로만 보이는 것일까. 선재는 바로 십신과 십주와 십회향과 십지와 십행을 차례대로 수행하고 마지막에 등각을 성취하는 일을 한다. 불교는 지식을 쌓는 것만이 배움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로 지혜 다음으로 실천이라는 오십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십위는 내가 걸어가야 할 과제로 남겼다고 보면 될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의 아버지
어떤 사람에게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하루는 아들 셋을 불러 놓고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각각 돈 천만 원씩을 줄 터이니 너희들은 이 돈을 가지고 가거라. 그리고 삼년 후 오늘이 되면 이 돈의 용처를 물어 볼테니 그 때 나에게 말해다오."
삼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셋이 다시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먼저 큰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그 돈을 어디에 사용하였느냐?" 큰아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버지 앞에다 저금통장 하나를 내어놓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준 천만원을 하나도 쓰지 않고 그대로 은행에다 정기예금을 시켜 두었고, 그 동안 상당한 이자가 늘어 돈의 액수가 제법 불어 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너는 무얼 어떻게 했느냐?" 하고 묻습니다. 둘째 아들은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버지, 돈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쓰라고 있는 것인데 천만원이 삼 년 갈 것 같습니까? 저는 그 돈을 다 써버렸고 오히려 돈이 더 필요해서 형님한테 좀 빌려썼으니 아버지께서 그 돈을 좀 갚아 주시지요." 하는 겁니다.
셋째 아들은 어떤가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셋째 아들이 내어놓은 서류에는 그 동안 천만원이 투자가 되어 불어난 사업 실적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 아들은 천만원을 몇 배로 불려 놓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흡족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그럭저럭 사는 사람도 있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며 사는 사람도 있고 또는 공덕을 쌓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저 세 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부처님의 위대하신 가르침을 늘 배우고 있지만 과연 그것을 내것으로 얼마만큼 저축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복이지만, 있는 그 복덕(福德)마저 까먹고 말았느냐? 아니면 복을 지어 세세생생 태어나는 곳에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는 그런 복을 지었느냐는 것입니다.
법화경에는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본래 이 아들은 부잣집에 태어 났습니다. 그런데 부모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자라면서 객지를 떠돌고 그는 참으로 가엾은 존재가 되어 돌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부잣집의 머슴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이제나 저제나 아들을 찾기 위해 무척 애쓰다가 어느날 그 아들이 자기 집에 머슴으로 온 것을 알고, "내가 네 아버지이고 이 집은 바로 너의 집이란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아들은 놀래서 달아나려고 합니다. 자기를 해코지 하려는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 부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예불할 때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고 항상 우리에게 깨달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본래 부처 보배를 가진,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나와 똑같은 불성을 가진 나의 아들들이라고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부처님 말씀을 못 듣는 것입니다. 스승의 말씀을 늘 잊고 삽니다. 스승은 나에게 있어 큰 복전입니다. 저 세 아들의 비유처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배워 내 인생을 보다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축해 놓은 돈을 꺼내 쓰지 않은 첫째 아들은 인내가 있고 끈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과 같이 우리도 부처님 말씀을 배우는 데 좀 끈기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하나라도 남다른 데가 있는 사람, 용기있게 자기의 미래를 꿈꾸는 사람, 어떤 성공을 거둔 사람, 이와 같은 사람들은 우선 생각이 남다릅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을 갖고, 또 행동함에 있어서도 항상 진취적입니다. 셋째 아들은 우선 그 생각이 남달랐고 그래서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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