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한국·중국의 천태종
1) 한국의 천태종
우리나라의 천태종은 고려 숙종 2년(1097)에 대각국사께서 개경(開京)에 창건한 국청사(國淸寺)에서 천태교관을 강의한 것을 개종(開宗)의 기원으로 삼으나, 천태교의는 이미 그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전래되어 활발히 유포되었다.
신라의 현광(玄光)법사는 중국에 건너가서 남악(南岳) 혜사대사(慧思大師)의 가르침을 받고 법화삼매를 증득하고서 귀국하여 대중을 모아놓고 소증(所證)의 법문을 전해서 그 문하에 깨달은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파야(波若)법사는 수(隋)의 개황(開皇) 16년(596) 법을 구해 중국에 들어가 천태지자대사를 모시고 공부하여 얼마 안되어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그리고 지자대사의 지시로 천태산 화정봉(華頂峯)에 올라가서 16년 동안 수행하고 대업(大業) 9년(613) 2월에 비로소 하산하여 불롱사(佛 寺)에 머물다가 곧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신라의 연광(緣光)법사가 지자대사의 강하에서 수학하였고, 법융(法融) 이응(理應) 순영(純英) 등 3인이 중국 천태 제 5 조인 좌계현랑(左溪玄朗)대사의 강하에서 연찬하고 당의 개원(開元) 18년(730)에 세사람이 함께 법을 전지하여 본국에 돌아와서 전법 하였다고 한다.
음에 제관(諦觀)법사는 국내에서보다 송(宋)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 당시 중국 불교 사정은 당무종(唐武宗)의 폐불(廢佛)과 주세종(周世宗)의 배불(排佛) 등의 법난을 겪고 또 5대의 병란 때문에 불전(佛典)은 분실되고 사탑(寺塔)은 파괴되었다. 특히 천태장소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강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천태교학이 쇠미하였다. 그래서 이를 개탄한 누계의적(螺溪義寂)대사의 권유로 오월왕전숙(吳越王錢澁)이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천태전적(天台典籍)을 구하였다.
고려 광종(光宗) 11년(960)에 제관법사가 왕명을 받들어 많은 천태종 문헌을 가지고 송나라에 들어가 전해주었다. 이것이 송나라 천태종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제관법사는 중국에서 머문 지 10년, 유명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1권을 남기고 그곳에서 입적하셨다. 천태사교의는 천태교의의 강요(綱要)를 가르쳐보인 천태종의 입문서로서 중국*한국*일본 천태종에서는 필수교재로 사용되어 왔다.
2) 중국의 천태종
중국천태종 중흥에 기여하신 보운의통스님(242)
천태종 제16조 보운의통 (寶雲義通)스님은 우리나라 분이다. 중국에 건너가 명성을 떨친 우리나라 스님은 적지 않지만 한 종단의 조사가 된 예는 스님을 제외하고는 없다.
이런 점에서 천태종은 우리 민족하고는 더욱 각별하다.
의통스님은 천태 부흥조 담연존자 이후 천태를 부흥시킨 분이다. 스님이 활동하던 당시는 회창 폐불의 여파와 당말 오대의 혼란으로 선종을 제외한 불교계 전반이 침체에 빠져 있었던 때였다.
이러한 때 외국에서 유학온 의통스님이 다시 교학을 연구하고 지관을 수행하여 천태종을 다시금 중흥시킨 것이다. 의통스님은 진나라 년 간에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먼저 법안종 덕소국사가 주석하고 있는 천태산 운거사 (雲居寺)에서 깨달음을 구하였으나, 이어 천태 제15조 나계의정 (螺溪義寂) 문하에 들어가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이치를 배웠다.
그리고는 "원돈의 교학이 여기에 다 있구나"하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어느 날 스님은 일심삼관의 도를 조국에서 펴고자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 군수를 맡고 있던 태사 (太師) 전유치 (錢惟治)를 만나 귀국 포기 종용을 받고 중국땅에 그대로 머무르게 되었다.
송나라 개보 (開寶) 원년(968), 조사 (漕使)직을 맡고 있는 고승휘 (高乘徽)가 스님의 가르침을 여러 차례 받은 뒤 자신의 집을 전교원 (傳敎院)으로 희사하여 스님께 머물기를 청하였다. 이때에는 뒷날 천태 17조가 되는 법지지례 (法智知禮)가 스님의 문하로 들어왔다.
태평흥국 7년에는 보운선원 (寶雲禪院)이라는 사액을 하사 받았는데, 천태종 증흥도량인 보운원 이라는 절 이름이 여기서 비롯된다. 뒷날 법지지례와 같이 천태종을 이끈 자운준식 (滋雲遵式)도 이때에 제자가 된다. 의통스님이 이곳에서 천태교관을 세상에 편지 20여년, 단공 (端控) 원년(988) 10월21일에 오른쪽으로 누워 입적하시니 세수가 예순 둘이었다.
다비를 하니 사리가 뼈 속에 가득차 있었다. 이 사리는 아육왕사 (阿育王寺) 북서쪽에 안치되었다.
아육왕사는 중국 절강성에 있는데, 아육왕이 전한 사리탑이 있다. 이 절의 스님들이 평소 의통스님을 청해 법문을 듣는 일이 많았으므로 이곳에 안장한 것이다. 나중에 오석산으로 옮겨진 이 사리는 오색 광채가 영통하고 두드리면 옥과 쇠가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의통스님은 평소 사람을 부릴 때 "고향사람(鄕人)"이라고 하였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나는 정토를 고향으로 삼는데 사람들이 다 이곳에 왕생할 것이기에 모두 나의 고향 사람이다"고 답했다고 한다. 의통스님에게는 관경소기 (觀經疏記)와 광명현찬석 (光明玄贊釋) 등 여러 저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스님의 사상은 제자 사명지례로 이어져 많은 저술을 낳게 한다.
의통스님의 또 하나의 제자인 자운준식은 스님을 이렇게 평하였다. "장안존자는 이미 돌아가셨고 형계스님도 떠나신 마당에 의통스님이 태어나시어 그 빛을 계승하였다. 우리 천태 일가의 큰 가르침이 이 세 현인에게 다 모여 있다"고 하고, 또 "의통스님은 천태 일가의 가르침 중 형계스님이 기록하지 못한 것을 다 기록하였고 사람들이 수행하기 어려운 사종삼매를 다 실천하였다"고 찬탄하였다.
스님께서 천태교관을 중흥시킨 데에는 스승 의적스님의 전적 수집과 제관법사의 저술 그리고 지례, 준식 등 뛰어난 제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국으로 귀국치 않고 이역 만리에서 천태중흥을 위해 매진한 스님이 계셨길래 가능하였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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