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3.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수선님 2018. 6. 17. 13:14

아신 우 자띨라 사야도는 현재 미얀마에서 훌륭한 큰 스님으로 추앙받는 스님 중의 한 분이십니다.

인오선원이 옮겨오면서 이제 수행 중심의 도량으로 거듭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요 교리강좌 시간에도 짧지만 수행 프로그램을 추가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좋은 번역자님을 통해 이미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는

아신 우 자띨라 사야도의 훌륭한 가르침을 27회에 걸쳐 연재하오니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되시기를 발원합니다.

< 참고 : 표기된 빨리어 중에서 일부 단어는 로마자 국제공용 빨리어가 아니고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빨리어입니다. 빨리어 표기가 복잡하여 인터넷에서 수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하고 있는 것을 참작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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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는 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중요한 일, 더 중요한 일,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법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해야 할 여러 가지 종류의 과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과제들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저마다 중요한 것들입니다.

현재 세계의 정세를 살펴보면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 나라는 전쟁 이후에 분리되었기 때문에 통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또는 정치 체제를 바꾸고 있는 나라에게는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서 군대를 증강시키고 있는 나라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중요한 기능이며 현재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려고 협상하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나라들에겐 그것이 지금 현재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한 가정의 가장은 자기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건강을 돌봐주며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과업이고 의무입니다. 지금 여기에 와 있는 우리 수행자들이 집에 있을 때에는 아주 중요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정의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오, 비구들이여, 창이 날아 와 가슴에 꽂힌 사람에게는 즉시 창을 뽑고 치료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머리에 불이 붙은 사람에게는 즉시 불을 끄고 치료를 받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런 것들은 지금 이 순간의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윤회하여 태어나는 미래의 존재까지 고려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을 없애는 것입니다. 유신견은 자아(自我)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만약 가족에게 건강, 교육이나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면, 가장은 이런 것들을 먼저 해결해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누가 창을 던져서 가슴에 와 꽂혔다면, 가족의 건강, 교육이나 경제적인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이 장기간 여행을 가야 할 때, 여행 준비를 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여행 준비를 하는 동안 머리에 불이 붙는 사고가 났다고 칩시다.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여행 준비는 이제 두 번째가 됩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즉시 머리의 불을 끄고 치료를 받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세속적인 것이며 현생에서의 일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유신견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신견은 자아(self)나, 영혼(soul)이나, 아트만(atta)<*1>이 언제나 존재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까야 디티(sakkaaya-di.t.thi)의 어원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유신견을 말하는 사까야(sakkaaya)<*2>는 삭(sak)과 까야(kaay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삭은 명백하다는 뜻입니다.

 

 까야는 정신(naama)과 물질(ruupa)로 구성된 존재를 말합니다. 따라서 사까야는 정신과 물질로 구성된 명백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명백한 존재를 의미한다면, 명백하지 않은 존재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 혹은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명백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머리카락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뼈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근육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어느 것도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명백한 존재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정의한다면 인간이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의 명백한 존재일 뿐입니다. '머리카락은 물질입니까?'라고 물으면 '네, 물질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뼈나 근육이나 신장이나 심장 같은 다른 생체기관이 물질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의식은 정신인데 마음으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인간을 분해한다면, 거기에는 몸이라는 물질과 마음이란 정신밖에는 없습니다.

 

 정신이나 물질은 있어도 남자나 여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개념으로 이야기하면, 자아(self), 아트만(atta), 에고(ego), '나(I)', '내게(me)' 또는 '내 것(mine)'은 없고, 마음과 물질만 있습니다. 자아라는 실체(self-entity)도 없고, 개인의 영혼(individual soul)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정의할 때'나' 혹은 '자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이고, 이것이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마음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 보통으로 말할 때,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 남자, 여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법의 세계에서는 자아, 나, 혹은 내게는 없고, 정신과 물질뿐이며, 자아라는 실체나 개인의 영혼은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무더기'를 의미하는 '사까야(sakkaaya)'는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부처님이나 성인위(聖人位)를 성취한 성자들도 사까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 수행자들도 사까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과 물질의 무더기로 구성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까야(sakkaaya)가 디티(di.t.thi)와 결합하여 사까야 디티(sakkaaya-di.t.thi)가 되면, 자아의 존재를 아트만이라든지, 나라든지, 유신견으로 보는 잘못된 견해가 됩니다. 사실상 마음과 물질은 단지 정신과 물질일 뿐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우리들'에게 속한다던가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 오온의 무더기들은 우리의 소원이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그 자신의 법칙대로 변해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 무더기가 진실로 우리에게 속한다면, '늙지 말아라, 아프지 말아라, 죽지 말아라.'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은 우리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과 물질의 무더기는 우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몸, 우리의 영혼, 우리의 자아, 우리의 에고, 우리의 자아라는 실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 사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의 마음과 몸이라고 믿음으로써, 이 무더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행동이나 불선업도 기꺼이 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트만 이론을 믿기 때문에, 자신이나 자녀, 친척들의 이익을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불선한 행동이나 행위를 기꺼이 저지릅니다.

그리하여 범죄로 인해 감옥에 간다든지 하는 현생에서의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윤회의 과정 속에서 다음 생에 비참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현생에서의 고통과 내생에서의 비참한 삶의 진정한 범인은 삿된 견해인 유신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아트만, 자아, 에고의 존재를 믿는 유신견을 없애는 것이라고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 유신견을 극복하고 없애기 위해서 부처님은 어떻게 이 삿된 견해를 물리칠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경전에서 설명하셨습니다.

알아차림만이 이 유신견을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 수행자들이 여기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매일 수행하고 있는 것, 즉 좌선할 때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리고 행선할 때는 발을 들어서 내리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의 주요 목적은 바로 이 유신견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유신견이라는 삿된 견해를 없애는 첫 단계는 마음과 물질의 차이를 명백하게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처음에는 "일어나고 꺼지는 것이 '나'이며, 걷는 것이 '나'이며, '내'가 듣고 있고, '내'가 먹고 있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당연히 그가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수행이 점점 무르익어 감에 따라 나중에는 아트만도 없고, 자아도 없고, 에고도 없고, 자아라는 실체도 없고, 단지 마음과 물질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가 구별할 수 있는 첫 번째 것은, 왼쪽 발을 내디딜 때, 내딛는 것은 물질적 행동이고, 걸음을 주시하는 것은 마음이므로, 거기에는 에고도 없고 자아라는 실체도 없고 정신과 물질뿐이라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불교용어를 잘 모른다면 정신과 물질은 모르더라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발을 딛는 것은 물질적 움직임이고, 그것을 주시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 이것이 서로 다른 것임을 알 것입니다. 좌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배가 부풀어오르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고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며, 꺼지는 것은 물질적이며,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부푸는 움직임은 숨을 들이쉼으로 인해 공기가 배의 피부를 밀어 올리기 때문입니다. 배의 움직임은 물질이며 주시하는 마음은 정신으로, 이들은 서로 다른 기능입니다. 배의 꺼지는 움직임은 물질적 현상이며 주시하는 마음은 정신적 현상입니다.  

 

소리가 들리는 것을 주시할 때는 소리, 듣는 의식[耳識], 귀[耳根]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수행자가 육문(안․이․비․설․신․의)으로 들어오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는 통찰 명상(vipassanaa meditation)을 실천하여 마음과 물질뿐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 유신견으로부터 벗어나서 아트만이나 에고나 영혼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유신견을 전적으로 없앨 정도로 아주 강력하지는 않습니다. 유신견은 수행자가 수다원도(須陀洹道, sotaapatti-magga)와 수다원과(須陀洹果, sotaapatti-phala)를 획득했을 때에만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한 범천(梵天, Brahmaa)<*3>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들이 선정 수행을 해서 다섯 개의 감각기관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기 위하여 힘써 노력하여 우리들과 같은 범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창이 날아와 가슴에 꽂힌 사람이 즉시 창을 뽑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이, 혹은 머리에 불이 붙은 사람이 즉시 불을 끄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이 즉시 수행해야 합니다."

 감각적 욕망을 배제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의 방법은 선정(禪定, jhaana)<*4> 수행에 의해 일시적으로 배제하는 방법과, 또 하나의 방법은 아나함도(阿那含道, anaagaami-magga)<*5>에 의해 완전히 배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때 선정에 의한 배제는 불선업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어서, 선업의 공덕이 소멸되면 다시 사악도(四惡道)<*6>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다원도에 들어 유신견을 완전히 배제하면 다시는 사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므로 이것이 보다 확실한 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범천의 말이 절대적인 진리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를 측은하게 여겼습니다. 범천이기는 하지만 아직 성인<*7>위를 획득하지 못한 범부(凡夫)<*8>입니다. 범부이므로 선업과 불선업에 의해 발생하는 과보를 받아야만 합니다. 선업의 공덕이 끝나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처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상세히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수다원도에 의해서 유신견이 사라진 다음이라야만, 사악처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범천에게 유신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범천의 말대로 천인(天人)으로서의 지복을 누리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유신견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서는 선정수행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위빠싸나 명상인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수행 초기에 경험하는 첫 번째 통찰지(洞察智)는 마음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그 다음에 수다원도를 성취할 때까지 차례차례 통찰지를 성취해 갑니다.

 

수행자가 일어남, 꺼짐, 봄, 들음 그리고 행선할 때 왼발, 오른발, 혹은 들음, 앞으로, 놓음을 처음으로 주시하면, 주시하는 마음은 '정신(naama)'이고, 몸의 물질적 움직임은 물질(ruupa)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견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책에서 얻은 지식

(2) 일반 지식

(3) 스스로의 경험에 의한 수행 지식

 

첫 번째, 책에서 얻은 지식은 피상적입니다. 그것은 물질(ruupa)<*9>은 28가지, 마음(citta)은 89가지(또는 121가지), 그리고 마음의 작용(cetasika)은 52가지라고 상세히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에 의하면 마음과 물질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나무, 숲, 산처럼 의식이 없는 모든 것은 물질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아는 의식이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아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알게 되는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일 뿐 자기 스스로 알아낸 것은 아닙니다.

 세 번째, 여기서 우리 수행자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왼발, 오른 발, 혹은 좌선할 때 일어남, 꺼짐을 주시하면서 알아차림을 통해 자기 스스로의 경험으로 이 마음과 물질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상을 주시하는 순간 아는 의식과 물질적 현상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주시하는 모든 순간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사건과 감각들이 바로 마음과 물질이란 것을 명백하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개인적 발견에 의하여 수행자는 더 이상 봄, 들음, 냄새 맡음, 맛 봄, 닿음이나 생각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는 에고도 없고, 자아라는 실체도 없고, 유신견도 없고, 영혼도 없으며, 정신과 물질의 무상․고․무아가 있음을 깨닫고, 유신견이라는 삿된 견해를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유신견을 없애서 자유로워집니다. 그의(혹은 그녀의) 수행이 한 단계 두 단계 진보될 때, 모든 물리적 정신적 현상의 소멸에 도달하여 수다원을 성취합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자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여, 가장 짧은 기간 내에 모든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해탈인 닙바나를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옮긴이 주해(註解)

<*1> 아트만(atta): 아트만은 호흡, 생명의 근원, 자신, 영혼, 자아(自我)를 말한다. 아트만(atman)에서는 마음이라고 하는 정신은 영원하다는 의미에서 영혼이라고 한다. 이때의 영혼은 불변하는 실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무아(無我)를 주장한다. 이때의 무아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불변하는 영혼은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를 말한다. 또한 마음은 있지만 항상 조건에 의해 생멸(生滅)하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주인으로서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비아(非我)라는 의미도 있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몸을 바꾸어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재육화(再肉化)의 윤회를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마음은 한 순간에 일어났다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며, 이 마음은 흐름에 의해 상속된다는 의미에서 윤회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몸을 바꾸어서 태어난다는 힌두교사상과는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마음은 흐르면서 매순간 생멸을 거듭하지만 사라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음 마음을 조건지어 주고 사라진다. 이렇게 매 순간에 새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은 아라한이 되면 죽는 사몰심의 마음을 끝으로 새로 일어나는 결생심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그친다. 이것이 윤회가 끝나는 순간이다. 여기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요인은 집착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탐진치의 번뇌가 불타버렸기 때문에 집착이 끊어져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또 다른 의미에서 마음이 영원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2> 사까야(sakkaaya): 존재하고 있는 몸, 개체(個體), 상주신(常住身), 유신(有身)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까야(sakkaaya)에 디티(di.t.thi)가 붙으면 유신견(有身見)이 되는데, 내가 있다거나, 개체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견해를 말한다.

 

<*3> 범천(梵天, Brahmaa): 브라흐마라고 하는데, 천상의 천인을 말한다. 힌두에서는 우주의 창조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바라문 계급을 칭하기도 한다.

 

<*4> 선정(禪定, jhaana): 선정을 빨리어로 자나라고 하는데, 지금, 여기 편히 머묾이라는 뜻이다.

선정은 차원 높은 선심(善心)으로,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우울,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가 선정에 따라 단계적으로 제거된 상태다. 그러나 선정의 순간에 있을 때만 고요해진다. 선정에서 벗어나면 장애가 다시 나타난다.

선정을 얻기 위해 필요한 수행이 사마타(寂止, samatha)인데 사마타 수행으로 다섯 가지 선정 요건을 발전시킨다. 5선정 요건은 주시, 고찰, 기쁨, 행복, 집중이다. 선정은 경장에서는 4선정을 말하고, 아비담마에서는 5선정을 말한다. 4선정은 주시와 고찰을 하나의 단계로 묶어서 분류한다.

선정은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이 있다. 수행자의 선정 상태에 따라 죽은 뒤에 색계나 무색계로 가는 곳이 결정된다. 평소에 수행을 통해 색계 선정의 어떤 단계를 경험했으면 죽어서 경험한 단계의 세계로 간다.

수행에서 선정과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지혜이다. 선정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수행이 사마타이다. 그리고 지혜를 얻기 위해 필요한 수행이 위빠싸나이다. 선정 수행의 결과는 색계와 무색계에 이르지만, 지혜 수행은 출세간의 수행으로 세간의 윤회가 끊어진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선정에 편히 머묾은 숭고한 삶이 아니라고 하셨다. 결국 지혜 수행을 통해 열반을 성취할 것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지혜를 얻기 위한 과정으로 먼저 선정 수행의 필요성도 함께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선정수행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른 방편으로 경우에 따라 필요한 것이다.

 

<*5> 아나함도(阿那含道, anaagaami-magga):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의 도(道)를 말한다. 아나함을 불환과(不還果), 아나가미라고 한다. 아나함이 되면 죽은 뒤에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천상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그곳에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끊어진다. 천상에서는 괴로움이 없어 수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아나함이 머무는 정거천만이 천상에서 유일하게 수행을 하여 윤회를 끊을 수 있는 곳이다.

 

<*6> 사악도(四惡道): 욕계의 세계 중에 네 개의 세계이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가 머무는 세계이다. 사악도의 수명은 색계 무색계와 달리 각자의 업에 의해 결정된다. 수행자가 닙바나를 경험하여 수다원이 되면 4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7> 성인(聖人, ariya): '성스러운 자'라는 뜻으로 성자(聖者)를 말한다. 성자는 지혜 수행인 위빠싸나의 통찰지혜로 닙바나에 이른 자를 말한다.

성자에는 네 단계가 있다.

① 수다원: 흐름에 들어선 분으로 예류(預流)라고 한다.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된다.

② 사다함: 다시 한 번 오시는 분으로 일래(一來)라고 한다. 인간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나서 수행을 하여 아라한이 된다.

③ 아나함: 돌아오지 않는 분으로 불환(不還)이라고 한다. 천상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그곳에서 수행을 하여 아라한이 된다.

④ 아라한: 탐진치가 소멸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분을 말한다. 아라한은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분으로 응공(應供)이라고 한다.

 

<*8> 범부(凡夫, puthujjana):보통 사람, 평균적인 사람, 이생(異生). 번뇌에 얽매여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9> 물질(身, ruupa):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32가지이다. 몸은 32가지 물질로 조건지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양으로써의 물질이다. 이것을 빤냐띠(pa~n~natti, 모양, 관념)라고 한다.

위빠싸나 수행에서는 모양이 가지고 있는 실재의 성품을 알아차린다. 이것을 빠라마타(paramattha, 실재)라고 한다.

 몸은 모양이지만 모양을 알아차리는 실재하는 대상은 몸의 성품이다. 몸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성품은 기본적으로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와 나머지 24가지 파생된 것들이 있다. 그래서 물질의 실재하는 성품은 28가지로 분류한다.

물질로써의 몸은 있지만 이것은 여러 가지로 조건지어진 물질의 결합이고 몸이 있는 것을 실재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지수화풍이라는 4대이다. 지대는 흙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단단하다, 부드럽다, 무겁다, 가볍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대는 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두드러지게 알아차릴 대상이 되지 못한다. 화대는 불의 성질을 가진 것인데 뜨겁고 차가운 것이다. 풍대는 바람의 성질을 가진 것인데 호흡, 기침, 방귀, 트림 등 몸의 진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물질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있을 뿐이고, 물질을 인식할 수 있는 지, 수, 화, 풍과 나머지 파생된 것들을 앎으로 물질이 있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이 빠라마타이고 이것을 법(法)이라고 한다.

 

출처 : 인오선원 - 행복을 위한 열린 수행도량
글쓴이 : 대연 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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