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5. 법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

수선님 2018. 6. 17. 13:15

아신 우 자띨라 사야도는 현재 미얀마에서 훌륭한 큰 스님으로 추앙받는 스님 중의 한 분이십니다.

인오선원이 옮겨오면서 이제 수행 중심의 도량으로 거듭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요 교리강좌 시간에도 짧지만 수행 프로그램을 추가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좋은 번역자님을 통해 이미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는

아신 우 자띨라 사야도의 훌륭한 가르침을 27회에 걸쳐 연재하오니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되시기를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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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법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

 

오늘 법문의 주제는 "법(法, Dhamma)<*1>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빨리어 경전 앙굿따라(增支部, Aṅguttara)의 로히따사 경(Rohitassa sutta)에서 설법하신 것입니다. 이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사람은 자신의 몸에서 사성제(四聖諦)<*2>인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깨달을 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사성제인 고집멸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고성제(苦聖諦, Dukkha Sacca)는 고통의 고귀한 진리입니다. 태어남은 고통입니다. 슬픔, 비탄, 통증, 비통과 절망은 고통입니다. 늙음도 고통이요, 죽음도 고통이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 달성되기 어려운 소원 등은 고통입니다.

 

2. 집성제(集聖諦, Samudaya Sacca)는 고통의 원인의 고귀한 진리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과 탐욕으로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갈애(渴愛)입니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kāma-taṇha)이며,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a)이며, 비존재(非存在)에 대한 갈애인데 삶이 끝나기를 바라는 갈애(vibhava-taṇha)입니다. 존재에 대한 갈애가 생기게 하는 것은, 자아라는 실체, 영혼 또는 개아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의 과정과 무관하게 죽은 다음에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믿음인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은 영혼은 영원하다는 견해입니다.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a)도 고통의 원인의 고귀한 진리(집성제, Samudaya Sacca)입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삶이 끝나기를 갈망하는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에 의해서 생깁니다. 죽으면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단견은, 죽은 다음에는 선행이나 악행이거나 간에 아무런 과보가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선업을 즐기도록 고무합니다. 이들 세 가지 것들 감각적 욕망,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고통을 생기게 하므로 집성제라고 합니다.

 

3. 멸성제(滅聖諦, Niroda Sacca)는 고통의 소멸에 대한 고귀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닙바나(열반)를 성취하는 것으로 고성제와 집성제의 소멸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 도성제(道聖諦, Magga Sacca)는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고귀한 진리입니다. 그것은 고성제와 집성제의 소멸과 멸성제의 증득으로 이끄는 여덟 겹의 고귀한 길[八正道]입니다.

도성제는 ① 바른 견해 ② 바른 생각 ③ 바른 말 ④ 바른 행위 ⑤ 바른 직업 ⑥ 바른 노력 ⑦ 바른 알아차림 ⑧ 바른 집중입니다. 이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의 요소들을 계발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하는 우리 수행자들도 이들 여덟 가지 올바른 길[八正道]의 요소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행선을 하면서 왼발을 디딜 때 '왼발을 딛는다.'라고 바로 아는 것이 바른 견해이며, 걷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바른 생각<*3>이며, 한 발 한 발 걸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모든 행위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바른 알아차림이며, 마음을 알아차리고 발을 내딛는 것을 지속적으로 연결하여 알아차리는 것이 바른 집중입니다. 이것들이 팔계(八戒)를 지킬 때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팔정도의 다섯 요소입니다. 수행처에서 수행을 하고 있으면 바른 말, 바른 행위와 바른 생계는 이미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행선을 하면서 매 발걸음마다 알아차리면, 팔정도의 여덟 가지 요소를 모두 계발하는 것입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매순간 팔정도의 여덟 가지 요소를 모두 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수행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해서 실천하는 것은 고귀한 길의 여덟 가지 요소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그러한 집중수행에 의해서만 고성제와 집성제의 소멸을 획득하고 멸성제를 성취하여 닙바나를 증득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법문 주제 "법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은 사성제인 고집멸도를 찾는 것입니다. 법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자기자신의 정신적 및 물질적 현상을 집중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법을 추구함에 있어서 정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정법은 경전 공부[교학], 실천[수행]과 통달[깨달음]의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수행이 잘 될 수 없고, 경전 공부와 수행을 하지 않고 통달[깨달음]이 얻어질 수 없습니다. 경전 공부는 연못의 제방과 같습니다. 수행은 물과 같고 통달[깨달음]은 연꽃입니다. 제방이 없으면 물을 담아둘 수 없고, 물이 없다면 연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예를 들면, 경전 공부는 약을 만드는 방법이고, 수행은 처방이며, 통달은 병이 낫는 것입니다. 약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면 처방이 있을 수 없고, 처방이 없다면 치료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법은 경전 공부, 수행과 통달[깨달음]의 바른 길을 걷게 하는 기준이어야 합니다. 불굴의 인내인 지구력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불굴의 인내로 바른 길을 가는 집중수행이 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몸이 무엇입니까? 몸은 상(想)을 포함한 마음과 물질의 무더기입니다. 여러분의 몸의 크기는 대략 길이가 1m 75cm 내외이고, 폭이 30cm 내외입니다. 법을 탐구하는 것은 알아차리는 동안 수행자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이란, 자기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집중적으로 관찰함에 의해, 사성제를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법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은 빨리어 경전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시대에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제따와나 사원에 계실 때, 범천의 세계에서 로히따사라는 천인이 부처님께 왔습니다. 범천이므로 밝은 빛으로 된 몸을 가진 그는 한밤중에 도착해서 부처님께 예를 표한 다음 질문을 드렸습니다.

 

"오, 부처님이시여,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늙음도 없고, 노쇠함도 없는 우주의 끝까지 인간이 걸어 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로히따사 범천이여, 늙음도 없고, 노쇠함도 없고, 죽음과 재탄생도 없는 우주의 끝이라는 것은 닙바나를 의미하는 것이며, 걸어서 닙바나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도달할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로히따사 범천의 질문은 보이는 세계(Okāsa Loka)의 끝에 대한 것이며, 부처님의 대답은 조건 지워진 세계(Saṅkhāra Loka)의 끝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 지워진 세계의 끝을 보이는 세계의 끝으로 간주될 수도 있으므로, 부처님의 대답이 질문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로히따사 범천은 부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존경스러운 대답은 대단히 놀랍고도 대단히 파격적입니다. 닙바나를 의미하는 우주의 끝은 걸어서는 도달할 수 없다는 말씀은 아주 훌륭한 대답입니다. 제가 옛날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 저는 가정생활을 그만 두고 은둔자가 된 로히따사라는 사냥꾼의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깊은 숲 속에서 은둔자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신통력이 있어서 먼 거리를 순식간에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 능력을 설명 드리면, 마치 활의 명인이 쏜 화살이 야자나무 그늘을 지나가는 짧은 시간 동안, 우주를 한 바퀴 돌 수 있었습니다. 저의 걸음걸이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동쪽 바다의 끝에서 서쪽 바다의 끝까지 한 걸음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걸어서 우주의 끝까지 가겠다는 강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주의 끝까지 걸어가겠다는 집념과 신통력과 빠른 걸음으로, 세상의 끝까지 가는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식사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 의지대로 모든 신통력과 빠른 걸음걸이를 사용하여 100년 간 걸어갔지만, 보이는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떤 우주의 끝에서 죽었습니다. 저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여행이 끝나서 죽은 다음에, 저는 범천의 세계[梵界]에 태어나서 로히따사 범천이 되었습니다."

 

범계에 태어나서 전생을 기억해 낸 그는 부처님께 와서, 그 자신의 경험을 확인하기 위하여, 늙음도 없고, 노쇠도 죽음도 재 탄생도 등도 없는 보이는 세계의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늙음도 없고, 노쇠함도 죽음과 재탄생도 없는 조건 지워진 세계의 끝까지 걸어갈 수는 없다고 그의 경험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닙바나를 증득하지 않는 한, 이 세상 어디에도 늙음도 없고, 노쇠함도 없고, 죽음과 재 탄생도 없는 곳은 없으며, 따라서 고통받게 되어 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로히따사 범천은 모든 고통의 끝은 닙바나의 증득이라고 설명 들었습니다. 그리고 증득하는 바른 길은 자기자신의 몸에서 법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 몸 안에서만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성제란 간단히 말하면 오온(五蘊)입니다.<*4> 우리 수행자들이 여기서 수행하는 것은 오온입니다. 오른발, 왼발을 알아차리는 것은 고성제입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은 고성제이고, 보는 것과 듣는 것도 고성제입니다. 수행하기 전에는 수행자가 이런 것들이 고성제임을 모르고, 갈애에 의해 잘못 인도된 감각적 즐거움으로 간주했습니다.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하기 전에 보통 사람들은 먹는 것,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등을 즐거움으로 간주합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만이 아니라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부터의 모든 느낌은 좋고 즐거운 것이며, 이들 감각에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은 갈애인 집성제입니다. 고성제와 집성제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수행자는 도성제를 계발해야 합니다.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하는 것이 도성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하는 모든 알아차림이 도성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수행자는 점차적으로 도성제를 진척시켜서 마지막에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이 작동을 멈춘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를 닙바나의 증득이라고 합니다. 그 증득은 자기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알아차려서 획득되기 때문에, 오늘의 법문 주제, "법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부 비평가들에 의한 잘못된 추론에 주의해야만 합니다. 부처님께서 고집멸도의 사성제는 우리 자신의 몸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씀하셨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사성제가 우리의 몸 안에 있기 때문에, 노력도 그 어떤 수행도 필요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 전제는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고 어렵습니다. 어떤 가르침은 법에 정통한 사람이 바르게 설명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티크(teak)" 나무의 숲은 "티크" 숲으로 불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숲에는 티크 나무만 자란다는 뜻도 아니고, 다른 지역에는 "티크" 나무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티크" 숲에서 다른 종류의 식물도 물론 자랄 수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 예를 들면, 대통령이 행차를 했다면, 대통령 혼자 나타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비서관, 경호원과 다른 모든 수행원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물이 대통령이므로 그의 호칭만이 거론된 것이고, 그것은 그의 수행원 전부를 포함합니다. 이를 훌륭한 인연법(勝因法, Padhāna Method)이라고 합니다.

 

결과 추론법(Phalānumāna Method)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를 보고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물이 엄청나게 불어나서 홍수가 났을 때, 상류에 폭우가 쏟아졌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홍수는 결과이고 상류의 폭우는 원인입니다.

 

세 번째 예는 의미에 의한 지혜법(Attha paññā method)입니다. 이는 문장의 의미를 취하는 것입니다. "데와다따(Devadatta)"가 낮에 음식을 먹지 않고도 배가 불렀다는 진술을 검토해 봅시다. 낮에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부르다면, 밤에 먹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이 자신의 몸 안에 사성제가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사성제가 자신의 몸 안에 고정된 형태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고성제와 집성제는 몸 안에서 발견될 수 있지만, 도성제는 계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인을 계발하고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알아차리면, 그 결과는 소멸과 닙바나의 증득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법문의 주제인 "법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과 같이, 수행자가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알고자 한다면, 자신의 몸의 물질과 정신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기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알아차리면, 고통의 소멸인 닙바나를 증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수행자들은 부처님께서 "법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이라고 법문을 하신 대로 자신의 몸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사성제를 깨닫고, 가능한 가장 짧은 기간 내에 모든 고통의 소멸을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옮긴이 주해(註解)

<*1> 법(法, Dhamma) : 법(法)은 크게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첫째는 진리, 부처님 말씀, 가르침, 깨달음의 법 등을 말할 때 법이라고 한다.

둘째는 마음의 대상(dhammaarammana)을 말할 때 법이라고 한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대상이 있다.

이때의 마음은 내적 외적 대상을 맞이하는데 이것이 모두 대상으로써 법이라고 한다. 이것이 육근과 육경이라는 육내처와 육외처의 12처를 말한다.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경계에 부딪치는 것이 모두 법이다. 수행 중에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도 모두 법에 속한다.

법을 로마자 빨리어로 표기할 때는 두 가지가 있다.

 

법의 첫 번째 뜻인 진리를 말할 때에는 처음 D를 대문자로 써서 Dhamma(담마)라고 쓴다. 법의 두 번째 뜻인 마음의 대상을 말할 때는 소문자를 써서 dhamma(담마)라고 쓰거나 복수로 s를 붙여서 dhammas(담마스)라고 한다. 알아차릴 내적 외적 대상이 많기 때문에 복수로 써서 법을 표현한다.

이와 같이 법에 대한 로마자 빨리어 표기법은 법을 구별하기 위해서 일부의 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차츰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통상적 표기법으로 보면 된다.

법을 말하는 담마(Dhamma)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시던 빨리어(paali語)이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梵語. sanskrit)로는 법을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그러므로 상좌불교에서는 빨리어 경전에 근거하여 담마(Dhamma)라고 하며 대승에서는 산스크리트어 경전에 근거하여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법(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서 사용되지만 세부적으로 많은 뜻으로 사용된다.

법(法), 진리, 이론, 원인, 조건, 현상, 현상 세계, 정신적 대상, 생각, 철학, 자연, 우주적 질서, 도덕, 선한 행위, 가르침, 교훈, 조직적 가르침, 분석적 지식 등이 있다.

수행에서 말하는 법(法)은 통상적으로 두 번째의 법의 의미인 마음의 대상을 말한다. 이때의 법은 마음이 대상을 맞이할 때 새로 마음을 내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다.

경장에서는 마음의 대상으로써의 법은 관념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로 구별한다. 관념적 진리의 법은 빤냐띠(paññatti)로써 모양, 개념, 관념을 말한다. 무엇을 말하기 위해 지칭하는 것이나 알게 해 주는 것, 언어, 행위, 뜻을 나타내는 몸짓 등도 모두 빤냐띠이다. 또한 궁극적 진리의 법은 빠라마타(paramattha)로써 실재, 성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빤냐띠도 큰 틀에서 법의 개념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아비담마(논장)에서 말하는 법은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 dhamma)이다. 빠라마타 담마는 최승의 법(最勝義 法), 최상의 법(最上義 法), 최고의 의미를 가진 법이라고 한다.

빠라마타 담마에는 ① 마음 ② 마음의 작용 ③ 물질 ④ 닙바나 네 가지가 있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법은 이상의 네 가지 것의 실재하는 것을 법이라고 말한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 물질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유위법으로 분류하고 닙바나는 원인과 결과가 없는 무위법으로 분류한다.

그러므로 경장에서 본 법(法)의 포괄적 개념은 관념적 진리의 법과, 궁극적 진리의 법으로 본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빠라마타 담마인 궁극적 진리를 법으로 받아들인다.

빨리어 경전에는 법의 여섯 가지 덕목이 있다.

① 잘 설해져 있음. ② 지금 이곳에서 경험될 수 있음. ③ 시간을 지체하지 않음. ④ 와서 보라고 할 수 있음. ⑤ 열반으로 이끌어 줌. ⑥ 현명한 사람에 의해 직접으로 체험됨.

 

<*2> 사성제(四聖諦, ariya sacca) :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설하신 법문이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이다. 이것을 초전법륜경이라고 한다.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한다. 이것은 불교 사상의 핵심이다. 또한 사성제는 수다원이 되면 불리어지는 성인(聖人)이 되어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스러운 진리, 또는 성자의 진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상좌불교에서는 사제(四諦)라고 하지 않고 사성제(四聖諦)라고 한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고성제(苦聖諦):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현실은 괴로움이고 몸과 마음이 있다는 것은 괴로움을 의미한다. 산다는 것이 괴로움이고, 늙어 가는 것이 괴로움이고, 오온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설하신 진리이다. 인생이 괴로움이라고 밝힌 부처님 말씀에 대한 반론으로 불교는 염세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은 있는 것이지만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소멸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 사성제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결코 염세가 아니다. 완벽한 대안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② 집성제(集聖諦): "괴로움은 원인이 있다." 그것이 집착이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집착이라고 분석하셨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집착을 끊기 위한 방편이다.

 

③ 멸성제(滅聖諦): "괴로움은 소멸될 수 있다." 그것이 닙바나이다.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기 때문에 삶은 염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은 부처님께서 몸소 체험한 것이고 이 체험에 의해 확신에 찬 법을 펴신 것이다. 그리고 모두 자신과 같이 사념처 수행을 통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기를 바라셨다. 이것이 지고의 행복이다.

 

④ 도성제(道聖諦): "괴로움을 소멸하는 여덟 가지 길이 팔정도이다." 부처님께서 사람들은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모르고 어리석기 때문에 윤회를 거듭한다고 하셨다.

괴로움을 해결하는 길이 바로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을 의미하며 계정혜는 한 마디로 알아차림(sati)을 뜻한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괴로움이 소멸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팔정도는 여덟 가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을 말한다.

 

<*3> 바른 생각(正思惟, samma saṅkappa): 바른 생각의 빨리어 삼마 상까빠(samma saṅkappa)에서 삼마(samma)는 '적절하게, 정확하게, 철저히'를 말한다. 그리고 상까빠(saṅkappa)는 '사유, 의도, 목적'을 말한다. 그러므로 삼마 상까빠(samma saṅkappa)는 '바른 의지, 바른 결심, 정사유'를 뜻한다.

이때의 삼마는 '바른[正]'이라고 표현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알아차림이 있는'이란 의미를 가진다. 또한 상까빠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알아차림은 대상이 있어야 하고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대상에 마음을 보내야 한다. 이것을 정사유라고 한다. 이것은 한문식 표기이다.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정사유는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정사유의 바른 뜻은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것' 이라는 의미이다. 알아차릴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깃들이게 하여 집중이 이루어지게 된다.

 

<*4> 고성제란 간단히 말하면 오온(五蘊)입니다. :

부처님께서는 아들 라훌라에게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몸과 마음인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몸과 마음의 오온은 이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세 가지로 분류한다.

① 고고성(苦苦性): 일상적인 괴로움.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생로병사 등의 괴로움이다.

② 괴고성(壞苦性):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괴로움이다.

③ 행고성(行苦性): 조건 지어진 상태의 괴로움이다. 조건 지어진 상태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유위법으로 몸과 마음이란 오온의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 오온은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다. 몸은 병의 먹이이며, 몸과 마음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하셨다

출처 : 인오선원 - 행복을 위한 열린 수행도량
글쓴이 : 대연 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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