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펌]`대승불교와 연관하여 몇 가지 성찰해야 할 점들`/ 현응스님의 글에서

수선님 2018. 6. 17. 13:15

현응스님께서 불교평론에 기고하신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라는 글에서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인 '대승불교와 연관하여 몇 가지 성찰해야 할 점들'이라는 단원만

발췌하였습니다.

스님의 글 전문을 읽고자 하시면 아래를 클릭하십시오.(펌글의 출처입니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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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와 연관하여 몇 가지 성찰해야 할 점들

 

 

 

1) 유식불교(唯識佛敎)는 인식론과 심리학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유식불교를 인식론과 심리학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유식불교의 취지는

연기론(緣起論)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보살행 등의 대승적 실천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유식(唯識)이란 ‘세계, 사물, 인식, 개념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비친 영상(影像)’이라는 뜻이다.

이 뜻은 인식(주관)과 대상(객관)이 상호규정, 삼투되어 나뉠 수 없이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 유식학에서는 ‘세계, 사물, 인식, 개념 등’을 ‘5위 100법’으로 구체화하여 망라하고 있다. 즉 5위 100법이 상호규정, 삼투되어 연관되어 있는 연기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이 세상의 존재 영역을 5가지로 크게 분류하며, 그것을 다시 100가지로 세분화하는데

일반적 용어로 말한다면 물질계[色法], 정신계[心法, 心所有法], 개념계[不相應行法]―물질과 정신에 해당하지 않는 개념의 영역으로서 시간, 공간, 언어, 문자, 수, 법 등― 등에 해당하는 말이다.

 

유식학의 핵심과 주요 메시지 중 하나는 이러한 5위 100법, 즉 물질계와 정신계와 개념계, 또는 주관계와 객관계가 상호 연기적 존재임을 파악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12가지 사이클로 진행되는 삶의 연기’라는 초기불교의 연기론은 ‘몸, 감각작용, 마음, 법[身受心法]’과 ‘5온, 12처, 18계’등이 상호 연기적 양상으로 존재한다는 단계를 거쳐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의 시대가 되면서 ‘5위 100법이 상호 연기적’이라는 매우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연기론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식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유식학은 인식론이나 심리학 차원의 세세한 이론을 펼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물질계 · 정신계 · 개념계 등이 상호 연기적 양상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식불교의 근거가 되는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등에서는 인식 과정과 물질계의

존재 양상을 연기적으로 설명하고 이를 잘 알기 위한 방법으로 지관(止觀)을 권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론을 바탕으로 보살이 실천할 11지(地)와 10바라밀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유식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는 대승불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유식불교는 인식론이나 심리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 존재론, 실천론을 겸한 대승불교의 정수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등의 가르침으로 형성된 유식불교를 설명함에 있어

심리학과 인식론의 영역(心法, 心所有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책의 이름이 ‘요가행자(yogacara, 瑜伽師)의 실천 단계(bhumi, 地)’라는 뜻을 가진

《유가사지론(yogacarabhumi)》은 《해심밀경》을 전문 인용하면서 부연설명하고 있는 논서인데,

그 속에는 각종 바라밀 등 무수한 실천 방법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유식불교를

말하는 자는 왜 이런 점은 외면하고 심리학으로, 인식론으로만 이야기하는가?

 

이 또한 중국의 법상종(法相宗)의 폐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유식불교를 선도하고 있다는 독일 불교도 이러한 추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유식불교는 마땅히 인식론, 존재론이 어우러진 연기론을 바탕으로 대승적인 실천론을 제창하는 불교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쓴 소리

 

언젠가부터 중국적인 간화선을 수행하는 한국의 선불교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위빠사나 열풍이 불고 있다. 초기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행하는 위빠사나 수련은 한국불교를 위해 무척 고무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위빠사나의 중심이 되고 있는 4념처(身, 受, 心, 法)에 대한 마음챙김과 관찰, 4념주(念住)를 행함에 있어 몸[身]과 감수작용[受]과 마음[心]에 대한 마음챙김과 관찰은 하는데, 법(法=존재계, 특히 5위 100법에 있어 불상응행법과 색법)에 대한 마음챙김과 관찰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제대로 된 연기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챙김을 하고 관찰한다는 것이 꼭 정좌를 하고 단체로 수련장에서 해야 하는가도 의문이지만(이 점은 중국의 선불교를 답습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한국 선불교도 매한가지임), 중요한 것은 4념처 수행의 목적이 물질계, 정신계, 개념계 등이 모두 연기적 현상(공)임을 깨닫기 위함이라면서 법(法)에 대한 마음챙김과 관찰을 빠뜨린다면 전체적인 삶과 세계의 연기성이 드러날 수 있겠는가?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정치, 사회, 경제, 법, 국가의 문제와 물리, 화학, 생물학, 천문학 등의 영역 등―유식학에서 말하는 색법, 불상응행법에 해당됨―에 대해서는 왜 관찰하고 마음챙김을 하지 않는가?

 

특히 색법이나 불상응행법이라는 것은 단순히 정좌하고 앉아 명상적 살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독서와 실험, 관찰, 대화, 토론, 강의 등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영역(색법, 불상응행법)에 대한 이해와 관찰은 2,000년 전의 인도의 불교철학에서 정리된 추상적인 이론을 대상으로 하기보다 발달된 인지와 문명을 통해 연구, 집적되어 있는 오늘날의 물리학, 생물학(유전자공학), 화학, 천체학, 정치학, 사회학, 법학, 윤리학 등을 살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연기와 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모든 존재 영역의 세밀한 측면까지 다 파악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의 구조적 상관성과 변화성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색법이나 불상응행법 등의 존재[法]에 대한 세세한 차별상을 다 알아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과 우리 자신(심법, 심소유 등)과의 구조적 상관성을 알아야 곧 존재의 연기성(緣起性)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위빠사나 행법의 내용을 보면 정좌를 하여 살피는 대상이 우리 자신의 문제(호흡이나 신체, 그리고 마음의 흐름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위빠사나를 행함으로써 삶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문제에 대해 어떤 전문적이고도 적합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만일 신체와 호흡, 그리고 마음과 심리현상에 대하여 정밀한 분석과 성찰을 하는 노력을 우리의 삶과 사회와 세계에도 했다면 정말 불교도들은 세상과 역사를 두루 알아[正遍知, 世間解] 사람들을 도와주는 뛰어난 스승[無上師, 人天師]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위빠사나의 취지는 보살의 10바라밀에서 말하는 열 번째 지바라밀과 같이 삶과 사회 등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현실(역사)적인 파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모든 존재들과의 상관성과 변화성을 읽어내어 그것들의 연기성을 깨닫자는 것이다. 즉 위빠사나는 4념처를 제대로 해서 연기와 공을 깨닫는 반야지혜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빠사나의 불교 교리적 위상은 바로 기본불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은 위빠사나를 제대로 행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연기와 공에 눈떠야 하지만, 위빠사나에 대한 노력이 불교의 전부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땅히 기본적인 깨달음(연기, 공)을 바탕으로 자비와 원을 일으켜 각종 역사적인 바라밀을 닦아야 비로소 진정한 불교수행이라 할 것이다.

 

 

3) ‘수행(修行)’은 ‘보살행을 닦는 것(修菩薩行)’

 

 

근래에 와서 한국불교는 부쩍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수행하는 한국불교’ ‘수행론 연구계발’ ‘수행가풍 진작’ 등의 슬로건이 그런 점을 말해 준다.

 

수행이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닦는다(修)’와 ‘행한다(行)’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닦는다’라고 하면 유명한 중국의 마조 선사의 ‘기왓장 법문’이 떠오르기도 한다.(마조 스님은 제자가 참선을 할 때 그 앞에 가서 기왓장을 갈고 닦았다 한다. 그래서 의아해하는 제자에게 기와를 갈고 닦아 거울을 만들 수 없듯이 앉아 있거나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일반적으로는 수행이라 하면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일’ 정도로 생각하지만, 한국불교 교단(조계종)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간화선)을 하는 일’을 수행이라 부른다. 또 근자에 와서 크게 관심을 얻고 있는 ‘위빠사나’나 ‘명상’ 등도 수행이라 함직하다.

 

초기경전에는 위빠사나(觀), 사마타(止), 드야나(禪)처럼 특별한 노력을 뜻하는 용어와는 별도로 일반적인 수행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바와나(bhavana)’란 용어가 무수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바와나는 ‘변화되어 간다(becoming)’ ‘노력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근행(勤行)’ ‘수행(修行)’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바와나가 수행이라는 말의 시원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 오늘날에 사용되는 수행이란 용어는 아무래도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 번역되어 사용되는 ‘수행’이라는 용어인데, 이때의 수행은 ‘닦고 행한다.’라는 뜻이 아니라 ‘행을 닦는다.’라고 해석되는 용어이다. 이런 때의 ‘수(修)’는 타동사로서 ‘~을 닦다.’라는 의미이다. 수도(修道)가 ‘도를 닦다.’이듯이.

 

그러면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수행의 ‘행’은 무엇인가? 바로 ‘보살행’이다.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에는 ‘수행’이라는 말과 ‘수보살행’ ‘수보살만행’ ‘수선근(修善根)’ ‘수공덕(修功德)’ 등의 말이 무수히 반복되어 나온다. ‘보살행을 닦는다.’ ‘보살만행을 닦는다.’ ‘선근을 닦는다.’ ‘공덕을 닦는다.’는 말이 약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행을 닦는다.’는 수행인 것이다.

 

그런데 보살행은 10바라밀 등을 말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지관행(止觀行)을 닦거나 위빠사나를 닦거나 간화선을 닦는 것도 당연히 수행이다. 그러나 대승의 경지에서는 선정과 반야는 모든 사고와 행동에 따라 붙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 반야바라밀이란 모든 사회적 실천과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한순간도 저버릴 수 없는 안목과 지혜이다. 따라서 대승적 의미에서 보살행을 닦는다 함은 반야(연기적 관점)를 기본적으로 갖춘 바탕 위에 전개하는 실천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야나 선정의 문제는 이미 성취되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연기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문제는 2,000년, 2,500년 이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겠지만, 오늘날은 발달된 문명과 학문(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으로 인해 매우 손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를 몸과 마음의 어떤 신비한 경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삶과 사회, 세계의 연기적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꼭 아비달마나 각종 불교경전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500년 전에 인도 범어로 된 경전과 논서를 언어 체계가 다른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용과 용어가 부정확하게 되거나 변형된 것도 무수히 많아 이를 현대인들이 꼼꼼히 번역하여 이해하라고 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은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절의 불교 공부법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 연기와 공을 이해하기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불교 공부란 일반 성인이 현대적 교육을 바탕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불교교리에 대한 공부를 하고 그 내용을 잘 음미하여 정리하면 알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불교지도자들이 불교나 깨달음을 오도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아직도 일부 불교지도자들이 연기와 공에 대한 깨달음을 ‘몸과 마음의 어떤 경지’로 설정하여, 깊은 산속 바위나 봉우리 위에 홀로 앉아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을 수행이라고 잘못 이끄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4) ‘본래부처론’의 밝음과 그늘

 

초기불교 이후로 불교는 삶과 세계를 무상, 무아, 연기, 공이라고 줄곧 강조함으로써 고정불변하는 실재를 전제하지 않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유지해 왔다. “모든 상(相)은 허망하다.” “따라서 허망함을 잘 알아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라.” 라는 것이 기본적인 메시지였다.

 

그런데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며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부터 이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마찰하는 이상한 기류가 나타났다. 각종 대승경전과 논서에 ‘불성’ ‘진여’ ‘여래장’ ‘영원한 부처(久遠佛)’ ‘본래부처(本來佛)’ 등의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다.

그 후 인도에서는 일면 실재론적인 측면으로 비치는 진여, 여래장, 영원한 부처를 내세우는 불교와 무상과 무아를 강조하는 불교가 혼재되어서 많은 교리적 논쟁과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런 내용들은 고스란히 중국에 옮겨졌는데, 중국에서는 무상, 무아를 강조하는 불교보다 진여, 여래장, 영원한 부처를 표방하는 불교를 대승불교라 하여 상위에 자리매김하여 존중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이런 점과 별도로 위진남북조 시대에 노장(老莊)사상의 용어를 차용해 불교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도’ ‘자연’이라는 실재론적 존재관를 끌어들였고, ‘천지는 나와 한 몸이며, 만물은 나와 한 뿌리’라는 보편적이고도 실재론적인 노장적 표현을 불교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 후 당, 송 시대의 선불교에서는 ‘세상 전체가 다 진리(擧體皆眞)’ ‘푸르른 대나무는 진여의 모습이며, 소복이 피어 있는 노란 국화들은 반야 그 자체’ ‘두두물물이 모두 부처’ ‘푸른 산은 부처님의 모습, 흐르는 물소리는 부처님의 설법’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하게 되었다.

‘본래부처’ ‘영원한 부처’로 대표되는 이러한 불교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불교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본래부처’ 등의 표현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초기불교의 교리로서는 용납하기 힘들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당시 인도 브라마니즘이 주장하는 영원한 자아라고 일컫는 아트만(atman)과, 오온과 별개로 존속하는 영원한 개아(個我: 개별적 사람, 개인, 인간 등)인 푸드갈라(pudgala)와, 영원한 생명(목숨, 영혼)인 지와(jiva)와 살아 있는 모든 것이라는 사트바(sattva)가 다 허망한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떤 경로를 거쳐 ‘본래부처’ ‘영원한 부처’ ‘여래장’이라는 생각이 탄생되었는가?

 

역설적이게도 이런 생각들은 연기(緣起)의 존재관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초기경전에는 “연기법은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안 하든 법계로서 상주하는 것이다.”(잡아함 권12 제299경)라는 표현이 있는가 하면 “12인연을 보면 무상도(無上道)를 보게 되고 법신을 구족하게 된다.”(《도간경》)라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연기법의 법계 상주에 대한 내용들은 부파불교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연기법이 유위법인가 무위법인가 하는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연기와 관련한 이러한 특별한 구절들은 후대에 경전으로 편찬되는 과정에서 첨가되거나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고정불변하는 실재를 부정하는 연기적 세계관이 인도사회의 각종 실재론(수론, 승론 등)과 대론을 하는 과정에서 방어적 차원에서 변형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불교도들의 입장에서는 무아적 연기론을 가지고도 적극적인 역사적 삶을 살 수 있는 방안이 늘 필요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래서 연기의 가르침을 꼼꼼히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무상, 무아, 연기를 통해 세상이 허망하고 덧없으며 꿈같은 줄 알았다.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을 얻었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첫 번째 교훈이다. 그런데 세상이 연기적(변화성, 관계성)이라는 것은 ‘존재들이 고정불변하는 실재(實在)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非有)’이지,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닌 것(非無)’이다. 그렇다면 연기적 존재라는 것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존재들이 다른 존재들과 밀접한 관계로 이어져 서로 삼투되어 있으면서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화해 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연기를 이해한다면, 존재를 긍정적이고도 역동적으로 바라보는 적극적인 존재관을 가질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두 번째 교훈이다.

 

이상과 같이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두 가지 다른 의미의 교훈을 이끌어내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들은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적 움직임을 통해 체계화하게 되었다.

특히 두 번째 교훈을 진전시킨 것이 설일체유부의 ‘아공법유설’이었으며, 중관사상에서 존재를 공(空), 가(假), 중(中)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고 본 것도 바로 그것들이었다.

불성, 진여, 여래장은 바로 이러한 ‘법유(法有)’ ‘가(假)’ ‘중(中)’이라는 중립적 표현이 종교적으로 윤색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다. 그리고 중국 선불교의 ‘마음이 곧 부처’ ‘두두물물이 다 부처’ 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리하여 불교의 존재관은 ‘무상, 무아, 연기→공(空)→가(假)→중(中)→불성, 진여, 여래장→마음이 곧 부처→만물이 부처’라는 단계로 뉘앙스가 약간씩 달라지는 용어들로 다양하게(variety) 변천되었다.

문제는 불성, 진여, 부처라는 이름의 용어를 사용할 때, 연기론의 존재관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설법이나 저술을 접할 때 그것들을 제3자가 구분하기란 쉽지가 않다.

 

‘영원한 부처’ ‘본래부처’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 이런 점을 늘 유의하지 않으면 불교를 자칫 표현만 다른 브라마니즘(brahmanism)이나 노장사상으로 오인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결국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이러한 용어들이 사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사용하게 될 것인데, 어쨌든 불교의 연기적 존재관이 주는 두 가지 측면의 교훈을 늘 상기하면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진여, 여래장, 본래부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도 《금강경》에서 말한 ‘머물지 않고 마음 내기’의 대승적 의미를 늘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그럴 때도 불교의 기본적 자세는 세상이 환상이며 공이라는 관점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본래부처, 진여, 여래장은 단지 연기상(緣起相)을 가설(假設)하여 임시로 붙인 이름임을 알고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 측면을 적용하여 사용해야 하는 대승적 입장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이해받기가 쉽지만은 않다. 오죽하면 《법화경》에서 설법 초기에 부처님이 세 번이나 설법하기를 사양하고, 불만을 품은 ,1000명의 대중이 퇴장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영원한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했겠는가?

《화엄경》(십지품)에서도 보살의 십바라밀과 십지(十地, 열 가지 실천 단계)를 설명하기에 앞서 금강장보살이 세 번이나 사양하고, 대중의 거듭된 요청이 있고서야 비로소 설법을 한다. 이런 것들은 대승의 이러한 미묘한 이중적 입장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불교가 일반인에게 주는 가장 큰 매력은 ‘모든 것을 다 꿈이요, 환상이며, 덧없다’라고 일깨워 주어 역사와 삶이 주는 무거운 짐을 일시에 다 놓아버리고 해탈해서 자유롭게 해 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의 제목도 있듯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벼운’ 입장을 견지하는 태도는 일면 삶을 진지하고도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비판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삶과 존재와 역사가 본래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 삶이 허망하고 환상이어도 살아내고 존재하는 기간에는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지 않고 마음 내기’라는 대승의 입장이 나온 것이 아닌가?

 

다만 ‘영원한 부처’ ‘본래부처’ ‘삼라만상이 부처’라는 이야기를 불교도가 할 때는 반드시 《유마경》에서 이야기하는 ‘중생계는 환상이다. 하지만 환상과 같은 자비를 일으켜 각종 바라밀을 행하여 정토를 지향하되, 보살이 이루고자 하는 정토도 환상이다.’ 라는 대승불교의 기본입장을 늘 상기해야 한다. 즉 ‘본래부처론’의 밝음과 그늘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부처’라는 슬로건은 사람들에게 환희로운 가르침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존재들을 대함에 있어 무거운 중압감과 피로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또 ‘영원한 세월에 걸쳐 본래부처’라면 무슨 개선할 노력이 필요하고, 새삼 다시 이루어야 할 목표를 수립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늘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본래부처’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라는 표현을 듣고도 사람들이 세계와 삶을 브라마니즘과 기독교적인 실재론으로 이해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부처’라는 명제가 주는 삶에 대한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삶과 역사를 ‘가벼움’과 ‘무거움’을 음악처럼 조화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빠알리공부모임
글쓴이 : 아위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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