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해설 14. 자아(영혼/아트만)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다.
우리가 평상시 독송하는 [반야심경]을 보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며,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고 공과 색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해 잘 생각하고, 또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다면 미세한 번뇌이자 뒤집힌 견해인 미세한 무명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미세한 무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 것이고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멸성제’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생길 터이고, 그런 다음 공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성현이 된다는 ‘도성제’에 대해서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멸성제’에 포함된 법보가 진정 존재하며, 스스로에게도 이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멸성제’와 ‘도성제’가 있는 이들을 ‘승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이루려고 한다면, 견도에 오른 보살들은 점차 허물이 사라지고, 깨달음의 지혜가 점점 증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청정해질 것도 없으며, 위없는 지혜를 성취한 상태를 위없는 승보인 부처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알면 오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삼보께 귀의할 때 그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보다 앞서 깨달음을 이룬 삼보이기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신심이 우러날 것이며, 삼보에 귀의하면 스스로의 마음에 서서히 법보가 생길 것이고 이로 인해 나중에 ‘위 있는 승보’가 되는 것은 물론 ‘위 없는 승보’ 즉 부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생길 것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의 부처님 찬탄 예찬문에서 “(부처님께서) 연기(緣起)인 공성(空性)을 말씀하셨노라!” 하셨습니다. 공성에 대한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티베트의 큰 스승이신 쫑카파Tsongkhapa 대사께서는
“그와 같이 보셔서 바르게 말씀하신 당신 뒤를 따를 때, 끝도 없이 우리를 타락의 길로 끌어내리려는 모든 허물의 뿌리를 없앨 수 있네. (만약) 당신의 불법의 반대 방향으로 간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고생을 한다 해도 도리어 모든 허물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아서 ‘나’가 있다는 견해를 더욱 견고하게 하네. 아! 지혜로운 사람은 이 둘의 차이를 알아서 마음으로 깨달아 골수에 사무치니 어찌 당신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보셔서 바르게 말씀하신..”
이것은 대상의 진정한 그 뜻 즉 진정한 실체를 보시고 말씀하신 부처님을 따른다면 고통의 뿌리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뒤집힌 식(識)을 없앨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뒤를 따를 때 끝도 없이 우리를 타락의 길로 끌어내리는 모든 허물의 뿌리를 없앨 수 있네.”
이 말씀은 부처님을 따르면 모든 허물의 뿌리인 법집을 없앨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당신의 불법과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고생을 한다 해도 도리어 모든 허물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아서 ‘나’가 있다는 견해를 더욱 견고하게 하네.” 이것은 부처님 당신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다른 가르침들이 이롭기는 하지만 윤회계의 뿌리인 법집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아(人我)’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혼Atman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가 있다고 여기는 견해를 더욱더 견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과 같은 번뇌와 여기서 비롯된 생. 노. 병. 사의 고통이 끊임없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 지혜로운 사람은 이 둘의 차이를 알아서 마음으로 깨달아 골수에 사무치니 어찌 당신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게 깊고도 수승한 공성을 보여주신 부처님은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고도 수승한 공성과는 반대로 ’‘나’가 있다고 설한 교주와 ‘무아’를 설한 교주이신 부처님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알면 수승한 가르침을 보여주신 부처님이야말로 정말로 뛰어난 분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열반에 잘 가신 분(선서善逝)의 아들(보살菩薩)이 율의에 들어가는 것을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요약하여 말하겠습니다.” 이 구절까지가 이 논을 지으신 샨티데바의 서언입니다.
“선서의 아들이 율의에 들어감을..”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입행. 원행. 과행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경에서와 같이..”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샨티데바 스스로가 지으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은 [반야부]를, 논서는 나가르주나의 [고귀한 화환] 같은 많은 경론을 토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전에 있었던 경에서 먼저 말씀하셨으니 중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경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풀어 말씀하신 것을 샨티데바께서는 여기서 간략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중복되는 허물을 범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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