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해설

[스크랩] 입보리행론 해설 17. 마음을 바꾸려면,

수선님 2018. 6. 24. 11:57

 

앞에서 말했듯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마음속에 정반대가 되는 의식을 찾아서 그들을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번뇌의 힘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번뇌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각각의 번뇌에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되는 것의 힘을 키우면 번뇌의 힘은 줄어듭니다.

예로 자애와 자비의 힘을 키워나가면 분노는 저절로 줄어듭니다. 

    

한편, 사랑으로써 탐욕을 줄일 수 있습니까?

 

사랑은 그 대상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가까이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대상을 마음에 두고 이를 가지려는 탐욕이 자비심을 수행해서 줄어들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냄이란 어떤 대상을 보면 아주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자애와 자비심은 대상을 감싸는 것이니 성냄과 정반대가 됩니다.

 

그래서 분노를 치료하려면 자애와 자비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주 적합합니다. 정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탐욕을 치료하기 위해 자비를 수행한다면, 정반대가 아니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습니다.

탐욕 때문에 대상을 아름답게 보고, 이로 인해 마음이 그 대상을 향한다 해도,

그것의 아름답지 않은 허물을 보면 마음을 조금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하면 대상에게 마음이 가고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때 아름답지 않은 더러움에 대해 명상(부정관不淨觀)하면 ‘아! 이토록 좋은 것은 아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그것의 허물을 봄으로써 마음에서 그 대상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번뇌를 치료한다는 것은 그것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마음의 힘을 키워나가면 반대쪽의 힘이 줄어들 것입니다.

    

예로 배고픔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배고픔이 사라지도록 하소서!’ 하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배고픔을 명상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음식을 먹음으로써 배고픔을 해소할 수 있을 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외적인 경우, 정반대가 되는 것을 찾아서 다른 한쪽을 없앨 수 있는 것처럼 내면에서도 정반대가 되는 것을 찾아서 실천할 때 다른 한쪽의 힘을 줄일 수 있습니다.

    

분노를 줄이기 위해 분노를 일으키는 그 대상의 허물을 본다면 누그러뜨릴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자애와 자비로 습성을 들인다.”는 것은 그 대상 즉 인간을 예로 들자면 행복하지 못하고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아, 그가 불쌍하구나!’ 하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분노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반면 자애와 자비는 우리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의식이 서로 정반대가 될 때 좋은 것에 의해 나쁜 것이 해독(解毒)이 되는 것입니다. 자애의 이로움과 분노의 허물을 보고, 어떻게 하면 공덕이 있는 자애를 더욱 키워나갈 수 있는지를 살피고, 습성을 들여야 합니다.

    

자애와 자비가 분노와 대치된다는 지식만으로 자신의 생활 속에 자애와 자비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애는 타인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로만 하는 것도 아니며,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본인의 마음에 자애와 자비심이 실제로 생겨야 합니다. 자애와 자비심이 생긴다는 것은 습성을 들여 다른 대상이 행복하지 못하고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자애와 자비심을 점점 더 키우는 것을 말합니다.

    

 

화를 내는 경우를 봅시다.

 

화가 나는 대상에게 순간적으로 화를 낼 때, 화를 내는 이유에 대해 거듭 생각하다보면 화는 점점 더 커집니다. 예로 우리가 서로 다투고 죽이는 경우를 봐도 처음부터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해로운 짓을 했다’는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 때문에 그 대상에게 화가 점점 더 나는 것입니다. 화가 점점 더 커지면 상대를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마음까지 일어나고 결국 악행을 저지릅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커집니다.

    

그와 같이 ‘자애’ 같은 선한 의식도 근거와 이유를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공덕은 습성을 들임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한편, 아무런 동기가 없는 몸의 움직임도 어떻게 습을 들이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집에 새 물건을 뒀는데 그 물건 둔 곳은 어두운 방입니다. 처음에 그 물건을 가지러 갈 때는 도중에 넘어지기도 하고, 다른 물건에 부딪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점차 익숙해지면 이쪽은 돌아가야 되고 저쪽은 비켜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습성을 들이면 ‘이쪽은 돌아가야 한다.’고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몸의 행동에도 습성을 들임으로써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마음 또한 습성을 들일 때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성을 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기도를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습성을 들임으로써 나아갈 수 있기에 여기서 “선업에 길들여진 내 선업의 힘에 의해”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습성이라는 것은 동기를 가지고 언제나 노력을 하고 실천하여 습관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실천함으로 습관이 되는 것을 ‘습성’이라 합니다. 자애와 자비로 습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은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나 이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생각하고 익힘으로써 알고 있던 자애와 자비를 진정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습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선업에 길들여진 내 선업의 힘에 의해”와 같이 마음에 변화가 오기까지는 고통을 원하지 않고 행복만을 원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고통을 주는 마음을 허물로 보고 이런 것을 가까이 하지 않고 되도록 멀리하며, 마음에 평화를 주는 공덕을 가까이 하는 습성을 들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마음에 변화가 올 것이고 이런 것이 바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방법입니다.

    

몸의 외형과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 외부적인 규율을 만들어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면 몸의 외형과 행동이 바뀝니다. 하지만 마음은 외부에서 아무리 엄하게 해도 변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본인 스스로 바꾸려고 하는 마음이 우러나 실천하고 노력할 때만이 마음이 변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아무리 엄하게 해도 마음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변화시키려면 본인 스스로가 지금의 마음가짐이 어떤 손해를 가져오는지, 만약 바꾸면 어떤 이로움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변하려고 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선업을 길들이는 내 선업의 힘에 의해”라고 하셨습니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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