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

[스크랩] 禪門拈頌 5. 노모(老母)

수선님 2018. 6. 2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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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칙


성동(城東)의 노모(老母)는 부처님과 같은 세상에 태어났으나, 부처님 보기를 싫어하였으므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기만 하면 얼른 피했다. 그러나 피하면 피할수록 피해지지 않아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으나 열 손가락에 모두 부처님이 보였다.

염·송·어


설두현이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여러 상좌들이여, 그가 비록 노파이지만 완연히 장부의 기상이 있다. 이미 피하기 어려움을 알았을 때엔 소리를 죽여 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에도 부처님을 보기 싫어하는 것을 허락하였거니와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는 말라. 왜냐하면 눈 밝은 이가 볼 때에 설두의 문하에서 너희들에게 노파선(老婆禪)을 가르쳤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산천(蔣山泉)이 염했다.


“그 노파가 퍽이나 억울하게 되었으니, 오직 피할 수 있는 한 가닥의 길을 몰랐기 때문이다. 여러분이여! 피할 길을 알겠는가? 만일 알았다면, 그대가 노파선을 알았다고 허락하리라.”

장영탁(長靈卓)이 상당하여 말했다.


“석가노인의 가장 좋은 자비의 방편이 퍽이나 기묘하구나,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끝내 그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알고자 하는가? 이미 피할 도리가 없는 곳이라면 합장하여 부처님을 우러러 뵙고, 향 한 촉과 촛불 하나로 공경할 것이지 무엇이 어려우랴? 어렵지 않다면 공왕전(空王殿) 안에서 스스로 보리라!”

감상


부처를 보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렇다. 부처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부처를 부처로 보기 위해서는 부처를 부정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바로 그러한 말이다.

설두는 말한다. 나의 문하에서는 노파선(老婆禪)을 가르치지 않는다. 늙은 노파 자식 귀여워하듯 선은 가르칠 수 없다. 장영탁은 말한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공양하라. 부정하고 부정한 다음에 긍정하라. 끝내 피할 수 없어 긍정한다면 제대로 바라보라.

보기 싫어한다는 것은 어쩌면 못내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정지용은 〈호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湖水)만하니

눈감을 밖에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어찌 부처를 보지 않을 것인가. 가리면 가릴수록 열 손가락이 다 부처인 것을 노파는 왜 몰랐을까. 아니다. 이 노파야말로 진정 부처를 보았을 것이다. 부정하지 않고 만나는 부처는 진짜 부처가 아니다.

 

최동호/고려대 국문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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