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실천 행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해’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열심히 하는 사람도
경전을 읽고, 강의를 듣고, 불법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처님도, 2,500년 전 당시 제자들을 교화하고 전법 하실 때,
법을 설함으로써 가르침을 전달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굳은 믿음을 가지고
불법을 배워 실천 수행을 하게 되었을 때‘[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증(證)인 것입니다.
‘증’이란, 작은 의미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수행을 하였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크고 작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불법을 생활화하는 가운데 환희심을 느끼고,
나름대로 ‘증’을 경험하게 되는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작은 깨달음은
우리들에게 보다 굳은 신심(信)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다시금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신, 해, 행, 증 이후엔
또다시 신, 해, 행, 증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큰 의미에서의 ‘증’은, 당연히
부처님의 크나큰 반야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활수행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상 속에서의 작은 깨침, 깨침의 조각들이 모두 ‘증’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증’은 또다시 굳은 믿음(信)을
가져다주고, 다시금 신해행증 할 수 있는 수행력과 불퇴전의
가행정진을 불러옵니다. 이렇게 신해행증의 수행이 계속
되어질 때 결국 부처님께서 증득하셨던
밝은 깨침의 반야지혜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해, 행, 증’의 단계가 바로 방편반야[解], 관조반야[行],
실상반야[證]와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 힘은 평등, 절대, 무념(無念), 무분별(無分別), 비움의 경지일
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의 차별 현상을 관조(觀照)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현명함이나 지식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모습에 대한 ‘눈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깨달음의
문제에서부터, 지금, 이곳 우리의 사회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
해결이 ‘반야’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의 자질구레한 문제에서부터,인간 개개인적인 문제,
사회 문제, 환경 문제, 정치 문제, 경제 문제, 노사 문제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문제 등 그 어떤 문제라도
‘반야’의 지혜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반야의 지혜는 사회의 모든 현상을, 선입견, 편견, 고정된 관념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안목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야’는 부처님이나 산 속에서 정진하는 스님들만이
얻을 수 있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지혜가 아닙니다.
누구나 수행을 통해서 바로 지금 이 곳에서 ‘반야’의 지혜를
구체적으로 획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반야’의 성취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행복을 성취하는 길이고,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반야’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보살은 열반을 얻으며, 중생은
당면한 문제와,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