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15칙에는 운문 화상이 일대시교에 대한 질문에 ‘일대일(一對一)의 설법도 완전히 끝내버렸다’고 하는 ‘도일설(倒一說)’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 화상께 질문했다. “현재 눈앞에 직면한 상대의 마음 작용(機)도 없고, 현재 눈앞에 직면한 문제(事)도 없을 경우는 어떻습니까?” 운문 화상이 대답했다. “일대일(一對一)의 설법도 끝났다(倒一說)”
擧. 僧問雲門, 不是目前機, 亦非目前事時如何. 門云, 倒一說.
이 일단은 〈벽암록〉 제14칙에 제시한 ‘대일설(對一說)’과 짝을 이룬 선문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운문광록〉 상권에는 각각 수록하고 있다. 질문자가 같은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원오의 시대에는 대화의 내용을 한 짝으로 파악하고 있다.
‘목전(目前)의 문제(事)’란 눈앞에 직면한 지금 여기 자기 일(事)을 말하며, ‘목전(目前)의 마음 작용(機)’이란 눈앞에 직면한 자기 일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선어록에 자주 언급하는 선기(禪機)나 대기(大機)는 마음의 지혜작용을 표현하는 말이다. 불교교학에서 작용(機)이란 주관(能觀)적인 마음이고, 문제(事)는 객관(所觀)적인 경계로서 인간의 인식은 이 주관과 객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지금 여기서는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상대적인 인식을 초월하여 “눈앞에 직면한 지금 여기 자기 마음의 작용도 없고, 눈앞에 직면한 지금 여기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일도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날카롭게 던지고 있다.
〈벽암록〉 제14칙에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는 일대일(一對一)의 대화로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한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번뇌 망념의 문제가 있는 중생도 없고, 중생심에 떨어진 번뇌 망념의 일(문제)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운문 화상이 질문하고 있다. 즉 ‘병든 환자도 없고, 번뇌 망념의 병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지도 하시겠습니까?’
운문 화상에게 질문한 스님은 마음과 경계,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본래 한 물건도 없는 세계(本來無一物)’, ‘천지(天地)라는 차별심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경지’ 혹은 ‘부모(父母)라는 차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의 경지를 체득한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불법을 설하여 지도 하시겠습니까? 라고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언설로서 설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 혹은 한 글자로도 설할 수 없는 불립문자의 세계를 체득한 사람에게 어떻게 불법을 제시합니까? 라고 날카롭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스님의 질문에 대하여 원오는 “이러한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대개 많은 사람이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고 코멘트를 하면서 평창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참으로 작가 선객이기에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처음의 질문은 법문을 청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질문이며, 또한 지혜작용의 칼날을 숨긴 질문이라고 하겠다. 만약에 운문이 아니었다면 그의 질문을 어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운문 선사는 이러한 기량이 있었기에 그의 질문에 응하여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운문 화상은 ‘일대일(一對一)의 설법도 끝났다’라는 의미로 역시 ‘도일설(「倒一說)’이라는 일구(一句)로 대답했다. 앞의 14칙에서는 ‘대일설(對一說)’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도일설(倒一說)’로 말했는데, 여기서 ‘도(倒)’라는 한 글자가 이 선문답에서 운문 화상이 설한 중요한 법문인 것이다.
질문자가 마음으로 번뇌 망념이 있을 때는 부처님께 질문하고 설법을 듣지만, 질문자도 없고, 질문할 문제도 없을 때는 일대일의 설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설법이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로 일대일의 설법도 타도해 버린다고 하면서 ‘도일설(倒一說)’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즉 ‘일대일의 설법을 타도해 버렸다’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일대일의 설법은 끝나 버렸다는 의미이다.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한 것이 일대일의 설법이었다. 설법을 듣고 진실을 깨달았다면 그것으로 만사는 끝난 것이다. 병든 환자가 처방을 받고 병이 나았다면 본래 건강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병든 흔적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일대일의 설법을 듣고 진실을 체득하여 본래의 청정한 불심으로 되돌아간 경지는 마음에 번뇌 망념도 없고, 경계에 대한 차별심과 집착도 없다. 일체의 흔적과 자취도 남김이 없는 몰종적(沒跡)의 경지, 본래 텅 빈 근원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고 한다. 본래 한 문제도 없어진 경지에서는 일대일의 대화나 문답도 필요 없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질문하는 것이고, 올바른 법문을 설하는 것이 대답이다. 일문일답(一問一答)의 선문답은 대화를 추론하거나 분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체의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문제가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인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일대일의 대화로 이루어진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 하나하나의 대화를 모두 텅 비우고,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다. 그것이 49년간 설법한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자불설(一字不說)’의 참된 소식인 것이다.
〈증도가〉를 보면 “깨닫고 나면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 근원적인 자성이 천진불이다(覺卽了 無一物)”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불법의 근본을 깨닫고 나면 마음의 번뇌도 경계에 떨어진 차별 분별심도 없는 것이다.
〈무문관〉 제22칙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전법에 대한 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난존자가 가섭존자에게 질문했다. ‘석가세존께서 가섭존자에게 금란가사를 전한 일 이외에 또 무엇을 전했습니까?’ 그러자 가섭은 ‘아난이여!’라고 불렀다. 아난은 ‘예’라고 대답하니, 가섭은 ‘문전의 찰간(刹竿)에 걸려있는 깃발을 철거하라(倒却門前刹竿着)!’ 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깃발을 철거하라(倒却)’는 말은 운문의 ‘도일설(倒一說)’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찰의 문전에 있는 찰간에 깃발을 세우는 것은 설법이 있다는 표시이다.
가섭이 아난에게 찰간의 깃발을 철거(倒却)하라고 지시한 것은 설법과 전법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깃발을 걸어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말한다. 가섭이 “아난이여!” 부르고, 아난이 “예!”라고 대답한 그것으로 이심전심의 전법이 모두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쓸데없이 깃발을 내세워 모양과 형식으로 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운문이 ‘도일설(倒一說)’이라고 한 일구(一句)도 문제를 제기하여 해결을 구하는 일대일의 대화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를 단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일대일의 대화가 끝났다(倒一說)고 한 말씀, 한 덩어리를 쪼개어, 생사를 같이하는 각오로 그대를 위하여 결단해 주었네. 8만 4천의 대중은 봉황의 털이 아니며, 33인의 조사는 호랑이 굴로 들어갔도다. 별나고 별남이여, 술렁술렁, 한들한들 물속에 비친 달이로다.”
‘한 덩어리를 쪼개어(分一節)’는 스님의 질문과 운문이 대답이 한 치의 틈도 없고,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는 것과 같이 분명하고 적절한 답변이었다. ‘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운문의 살인도와 활인검을 휘두르는 법문은 질문한 스님을 위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비결을 제시한 것이다. 부처님의 문하에도 8만4천의 대중이 있었지만 모두 불법을 계승한 것은 아니다. 오직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심인을 전해 받았다. 또한 서천 28조와 동토 6대 조사 33명의 조사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 새끼를 얻은 것처럼, 목숨을 걸고 수행하여 석존의 불법을 전해 받은 것이다. 이러한 조사들의 풍광은 각각 독특하고 독창적인 것으로 마치 달빛이 천만의 강물 속에 비치는 것처럼, 법신의 광명이 시방세계에 두루함을 읊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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