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16칙 鏡淸啐啄機 - 경청화상과 형편없는 수행자

수선님 2018. 7. 8. 12:37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16칙에는 경청 화상과 형편없는 졸승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경청 화상에게 질문했다. “학인이 달걀 속에서 나오려고 신호하면() 화상께서는 병아리가 태어나도록 달걀을 쪼아(啄) 주시오”

 

경청 화상이 말했다. “과연 살아날 수 있겠는가?” 그 스님이 말했다. “만약 살아나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경청 화상이 말했다. “역시 형편없는 놈(草裏漢)이군!”


擧. 僧問鏡淸, 學人, 請師啄. 淸云, 還得活也無. 僧云, 若不活遭人怪笑. 淸云, 也是艸裏漢.


경청 화상은 道(868~936)선사로 〈조당집〉 제10권 등에 그의 약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경청 화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처음 설봉 화상을 친견하고 종지를 얻은 뒤에 항상 줄탁(啄)의 기연으로 후학을 지도하고, 학인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하였다. 그는 대중법문에서 ‘대개 수행하는 사람은 줄탁(啄) 동시의 안목을 가지고 줄탁동시의 지혜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수행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병아리가 달걀 속에서 껍질을 쪼면 어미 닭이 밖에서 달걀 껍질을 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그 때 어떤 스님이 앞으로 나와서 질문했다. ‘어미 닭이 쪼고 병아리가 쪼면 화상의 경지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 좋은 소식이다.’ ‘ 반대로 병아리가 쪼고 어미닭이 쪼면 학인의 경지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본래면목이 들어나지.’ 이 때문에 경청 화상의 문하에서는 줄탁의 기연(이야기)이 있게 되었다.”

 

이 공안에서 문제로 제시하는 말은 줄탁동시(啄同時)이다. 즉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고 신호를 보내는 소리를 줄()이라고 하고, 어미닭이 병아리가 알에서 태어날 시기를 알고 껍질을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달걀 속에서 성장된 병아리가 내부에서 알을 쪼는 것을 줄()라고 하고, 그 순간에 어미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 깨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달걀 속의 병아리와 어미닭의 호흡과 기합(氣合)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선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지도하고 불법을 체득하는 깨달음의 인연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깨달음을 체득하는데 필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학인이 좌선의 수행으로 불법의 대의를 참구하는 내적(內的) 사유와 스승의 올바른 지도와 교시를 제시하는 외적(外的) 사건(기연, 인연)이 동시에 부합되어야 한다.

 

경청 화상은 줄탁의 기연으로 학인들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본칙과 같은 어떤 학인이 도 이 문제를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 있다. 즉 학인은 “나는 달걀 속에서 쪼아 신호를 보낼테니, 화상은 밖에서 달걀을 쪼개어 주십시오.” 이 말은 ‘저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깨달음을 열도록 하고자 하니 화상은 방편으로 빨리 학인을 깨닫도록 지도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학인의 질문은 병아리가 어미닭에게 알에서 나갈 것을 재촉하고 있는 것인데, 달걀 속에서 성장한 병아리의 부화시기가 맞지 않는데 어미닭이 껍질을 쪼개면 병아리는 죽고 만다. 그래서 경청 화상은 그대가 재촉하면 껍질을 쪼아 쪼갤 수는 있지만, “과연 무사히 살아 날 수 있을까?”라고 걱정스럽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어미닭으로서는 병아리가 무리하게 재촉하면서 요구하기 때문에 당연한 걱정에서 한 말이다. 줄탁동시의 작용이란 조작심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서 작위성이 없이 자연스럽고,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학인은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이 대꾸하고 있다. “만약에 살아남지 못한다면 천하의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만약 내가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안목이 없는 존재라면 화상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라는 의미이다.

 

원오는 “이 학인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산다고 하여,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 걱정하도록 만들고 있다”라고 하면서, 그 학인은 “한 쪽만 쳐다보고 가는 놈(擔板漢)”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 말은 편견에 떨어져 융통성이 없는 놈이란 말이다. 즉 경청 화상의 유명한 줄탁동시의 법문에만 집착하여 자신의 수행과 근기는 고려하지 않고 화상의 지시만을 무리하게 요구하고 있는 놈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경청 화상은 “역시 형편없는 놈(草裏漢)이군”이라고 평하고 있다. 즉 학인은 자신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입장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지만, 경청 화상의 눈에는 번뇌 망념의 차별심과 분별심에 떨어져 풀밭에서 헤매며 안목이 없는 형편없는 놈이라고 나무라고 있다. 즉 줄탁동시의 인연과 기회를 만들기엔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는 녀석이다. 밖으로 깨달음을 체득하는 분위기는 추구하고 있지만, 안으로 불법수행의 안목이 전혀 구족되지 않고, 근기가 익지 않은 놈이라고 꾸짖는 말이다.

 

원오도 경청 화상이 주장하는 ‘줄탁동시’의 공안을 적당히 생각하면 안 된다고 이 공안을 읽는 수행자들에게 주의하면서, ‘평창’에 남원화상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남원 혜옹(南院慧 : 860~930) 화상이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여러 총림에서 줄탁동시의 안목을 갖추었을 뿐, 줄탁동시의 작용은 갖추지 못했다.’ 라고 말하자, 어떤 스님이 나와서 질문했다. ‘무엇이 줄탁동시의 작용입니까?’ 남원 화상이 말했다. ‘작가 선지식이라면 줄탁을 하지 않는다. 줄탁을 하면 동시에 죽게 된다.’”

 

남원 화상이 제시하고 있는 줄탁동시의 안목과 작용에 대한 법문을 잘 음미하고 사유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해야 경청 화상의 법문을 충분히 소화할 수가 있다. 작가는 생사대사의 본분사(일대사)를 체득한 선승인데, 그러한 선승은 줄탁(啄)같은 쓸데없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줄탁과 같은 조작과 작위성에 떨어진 행위는 이미 줄탁의 선기(禪機:지혜작용)는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안에서 쪼고, 어미닭이 밖에서 쪼는 것을 형용하며 말하는 줄탁동시의 작용은 전광석화와 같고 의식적인 분별의 여지가 없는 세계이다. 그런데 본칙에서 “학인이 안에서 쪼면, 화상은 밖에서 쪼아 주십시오”라는 질문은 조작과 의식적인 줄탁동시를 요구하는 질문인 것이다. 이러한 줄탁동시의 질문은 벌써 줄탁동시의 안목이 아니며, 지혜작용인 선기도 죽은 것이다. 그래서 남원 화상은 작가 선지식은 분별과 의식으로 조작된 줄탁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의미로 게송으로 읊고 있다. “경청 고불(古佛)은 줄탁동시의 가풍이 있네. 선승은 선문답으로 종지를 거양할 때에 반드시 학인의 잘못됨을 완전히 벗기고 들어내어 본래면목을 체득하도록 해야 한다” 경청 화상의 줄탁동시 법문은 어미닭이 병아리가 달걀 속에서 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병아리는 어미닭이 껍질을 쪼는 것을 알고서 쪼는 것이 아니라고 “새끼와 어미가 서로 모르는데, 누가 동시에 줄탁 할 수 있으랴!”라고 읊고 있다. 어미닭과 병아리가 모두 무심의 경지에서 줄탁이 동시에 작용하여 근기가 서로 익은 상응된 묘용인 것이다. 분별 의식으로 줄탁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에게도 과연 그런 줄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경청 화상이 ‘살아 날 수 있을까?’ 라는 말을 ‘쪼았다(啄)’고 하고, 학인인 ‘살아남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는 말은 ‘자각했다(覺)’고 읊고 있다. 지도해 주시면 깨닫게 되지요 라는 의미이다. 학인이 “살아남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고 말했지만 “아직도 그대는 껍질 속에 병아리로 남아 있군” 경청 화상이 “형편없는 놈”이라고 한 말로 다시 한번 두드려도 “천하의 납승은 부질없이 겉모습만 더듬네”라고 읊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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