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위해서
“법공양 사무실을 하나 구했어.”
차에서 내리자마자 큰스님은 성큼성큼 1층 복도로 들어가셨다. 혹시 그동안 계속 잠궈놓았던 엘리베이터가 개통이 된 걸까 하고 여쭤봤더니 그게 아니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햇살이 가득하다. 싱크대가 놓여진 중앙의 유리창엔 아직 ‘유화화실’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었다.
큰스님이 사방 벽마다 “여기도 채우고 저기도 채우고” 학생들이 쓰는 제일 싼 책장들을 사다놓으라고 하셨다. 전주인이 쓰라고 했다는 낮은 테이블과 의자를 당장 중앙에 옮기게 하셔서 보살님들에게 앉아 보라고 하셨다.
“가운데 좀 높은 테이블을 놓고 여기 앉아서 이렇게 책을 보다가 보자기에 싸가면 되지” 하고 진짜 책과 책상이 있는 것처럼 동선을 보여주셨다.
*
지난 여름에 출판사 사장님이 5층까지 책을 들고 나르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하셨다.
“그 무거운 책을 올리는 데, 세상에 알아주는 사람도 없어서 내가 알아주는 거야.” 큰스님 말씀에 보살님들이 문수선원을 관리하는 혜원심 보살님이 더 많이 알아주었지만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말씀드리자 큰스님은
“그거 소용없는 거야. 구체적으로 뭘 실행에 옮겨야지” 하셨다.
“일단은 그 분을 위해서 여길 마련한 거다.”
이제부터 책은 모두 1층으로 가져오면 된다고 하셨다.
*
큰스님께서 마니주 보살님과 함께 새로 제작할 금강경 사경집의 글자 크기와 글자 간격을 의논하시고 성철스님의 책 5천권을 전화로 주문하시는 사이에 보살님들이 책꽂이도 세로로 세워놓고, 구석에 세워있던 탁구대를 풀어서 중앙에 가져다 놓았다.
“누가 탁구대를 여기 놓을 생각을 했지? 굿아이디어다. 훌륭해”
“이거는 네트를 칠 때 딱 연결하는 거야. 탁구대가 이래. 탁구 좋아했는데.” 하시면서 두 개의 탁구테이블을 연결하는 지점을 일러주셨다. 높이도 딱 맞아서 위에 책을 놓으면 서점의 책진열대처럼 될 거라고 기뻐하셨다.
탁구대에 테이블보를 깔자고 하는 보살님들에게 그럴 필요없다고 하시면서 원래 주인이 가져간다고 하면 “안준다고 그래.” 하시다가 “가져간다면 간단하다. 책만 이렇게 내려놓고 주면 되지.” 하셨다.
복도로 나오면서 법공양실을 다시 둘러보셨다. 거기 30분 이상을 계셔서 선원에서 스님들을 미리 만나는 시간이 짧았다.
*
내년에 백 분의 스님을 모시고 백고좌 대제를 열려고 하는데 큰스님의 의견을 여쭙는 비구니 스님이 계셨다. 큰스님은
“그동안 스님이 큰스님들 모셔서 불교방송까지 동원해서 했잖아. 경제적으로는 마이나스지?” 하고 물으시면서
“스님이 아직 그런 행사를 할 정도로 인지도라든지 신도수라든지 여러가지 것이 축적이 덜 되었다는 뜻이라. 10년간은 개인적으로 기도 열심히 해서 신도들에게 기도동참하게 해. 그렇게 판을 벌이는 것은 허장성세라고 겉으로만 번드르르하게 보이지 실속이 없는 거라. 큰스님들 와서 법문하는 것이 세상에 없는 일이 아니고. 요즘은 그렇게 귀한 것도 아니야.”
“나도 몇 십년 만에 처음으로 오늘 법공양실을 하나 마련했어.”하셨다.
의논을 드렸던 스님께서 홀가분한 얼굴로 “예” 하고 인사를 올리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六
十住品 弟十五
二, 菩薩十住
십주품 413쪽(민족사 刊) 제3 수행주부터 할 차례다.불교에서는 수행계위, 수행지위점차 또는 보살계위, 보살지위점차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십신법문이 끝나고 십주법문이 시작되면서 첫 주는 발심주였다. 부처님의 이런 저런 모습을 보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 법문 속에서도 수기를 주는 문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문제 등등 이런 것들을 통해 보살들은 발심을 한다. ‘이러 이러한 이유들로 우리는 발심을 해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하고 발심주를 통해 모두를 귀속시킨 것이다.
첫째주인 발심주가 끝나면 치지주라고 하는 두 번째 주가 나온다. 발심을 잘 가꿔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항복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발심한 다음에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고 항복받고 나서는 이제 수행에 들어가야 된다. 그래서 오늘 공부할 세 번째 주는 수행주다.
5, 第三 修行住
(1) 十種行
佛子야 云何爲菩薩修行住오 此菩薩이 以十種行으로 觀一切法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觀一切法無常과 一切法苦와 一切法空과 一切法無我와 一切法無作과 一切法無味와 一切法不如名과 一切法無處所와 一切法離分別과 一切法無堅實이니 是爲十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수행주라 하는가. 이 보살이 열 가지 행으로 온갖 법을 관찰하나니, 그 열 가지 행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온갖 법이 무상하고, 온갖 법이 괴롭고, 온갖 법이 공하고, 온갖 법이 '나'가 없고, 온갖 법이 지음이 없고, 온갖 법이 맛이 없고, 온갖 법이 이름과 같지 않고, 온갖 법이 처소가 없고, 온갖 법이 분별을 여의었고, 온갖 법이 견실(堅實)함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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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 수행주(第三 修行住): 제3 수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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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행주에는 관(觀)자가 나온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발심을 하기 전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던 것과 불교적인 관점을 가진 후에 보는 것이 다르다. 소위 관행(觀行)이라는 말을 하는데 보는 안목인 관점이 곧 진정한 수행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무상한 것을 무상하지 않게 보면 아직 수행이 안 된 것이다.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무상을 이론적으로 알고 제대로 느껴서 무상한 것을 무상하게 볼 줄 알아야 그것이 수행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수행을 강조한다. 그런데 진정으로 수행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꼭 집어서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나부터도 그렇다.
‘그냥 눈 딱 감고 앉아 있는 것이 수행인가?’‘그렇다면 절구통은 잘도 앉아있으니까 그것도 수행인가?’ 그렇지 않다. 앉아 있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염불소리를 잘 내고 있으면 수행인가?’ 녹음을 틀어 놓으면 소리가 더 잘 나온다.
불교에서 제일 자랑으로 삼는 것은 불교에 수행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걸핏하면 수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무엇이 수행인가를 이론적으로 정립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을 얼마나 소화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평생 우리들의 몫이다.
*
십종행(十種行):보살은 열 가지 행으로 온갖 법을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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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수행주(云何爲菩薩修行住)오: 무엇을 보살의 수행주라고 하는가.
차보살(此菩薩)이: 수행주에 오는 보살은
이십종행(以十種行)으로: 열 가지 행으로써
관일체법(觀一切法)하나니: 일체법을 관찰한다. 관점이 수행이라는 뜻이다.
하등(何等)이
위십(爲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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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관일체법무상(所謂觀一切法無常)과: 일체법이 무상하다고 하는 것을 관해야 된다.
불교의 첫 항목은 무조건 제행무상(諸行無常),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다.
스님들이 가끔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우스개 삼아 이야기한다. 예전 어느 암자에 동자가 있었다. 관광객이 보니 초등학생인데 스님은 스님이어서 머리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 그러면서 어린이답게 여학생들이 많이 하는 줄넘기를 한참 열심히 하고 있다. 그래서 이 관광객이 어떤 대답이 나오나 알고싶어서 물었다.
“스님 스님 어떻게 해서 출가했어요?” 그러자 어린 스님은 줄넘기를 계속하면서 “인생이 무상해서요.” 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답이다. 무상이 불교적인 이해의 제1조다. 그것이 자신에게 소화가 되고 감동이 되는 것은 평생 수행해야 할 일이고 일단은 인생무상, 세상무상, 일체법무상이 불교를 이해하는 제1 관점인 것이다.
여기에도 일체법무상이라고 했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매일 무상한 것을 많이 본다. 벼슬무상, 재산무상, 인정무상, 세상무상,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일체법고(一切法苦)와 : 다음으로 일체법고다. 이것은 느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일체개고(一切皆苦),열반적정(涅槃寂靜)은 불교의 사법인(四法印)이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부탄의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켄체스님은 이 사법인을 가지고 ‘우리 모두는 부처다’라는 책을 썼다. 아주 똑똑한 스님인데 그 스님의 글에 보면 사법인이 불교 전체라는 것이다.
사법인(四法印)은 네가지 진리의 도장이라고 해서 도장 인(印)자를 쓴다.
도장을 찍어야 영수증이나 보증서나 청구서가 발효되고 매도니 매수가 이루어진다. 주민등록증이나 주민등록초본을 떼려고 해도 도장이 필요한데 ‘이 사람이 틀림이 없다’고 하는 진실을 드러내고 보증하는 의미로 도장을 찍는 것이다.
불교의 사법인도 마찬가지다. 제행무상,제법무아,일체개고,열반적정이라고 네 가지 진리의 도장이 찍혀야 불교이며 그러한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불자라는 것이다.
켄체스님의 ‘우리 모두는 부처다’라는 책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자가 아니다. 불교인이 아니다’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사법인이 빠지고서는 어떤 외형적인 불교도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자기 처지가 어떻든 사법인의 정신과 사법인의 사고로 무장된 사람이 불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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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법공(一切法空)과: 일체법이 공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공(空)을 보살의 안목에서는 즉공(卽空)이라고 하고 성문의 입장에서는 분석공(分析空)이라고 하며 연각의 입장에서는 연기공(緣起空)이라 한다.
성문이 이해하는 분석공은 이런 저런 것을 분해해서 공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마이크가 있는데 이 마이크는 여러가지 부속이 결합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분해하면 마이크 자체는 없다. 그러므로 마이크는 공하다. 분석해보니 공하다는 식으로 공을 이해하는 것이다.
연각은 연기로써 공을 이해한다. 이 꽃 한 송이가 여기 있지만 사실은 농부의 피와 땀과 온갖 비료와 바람과 물과 산과 들과 구름 같은 모든 것이 동원이 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꽃에서 바람이나 공기나 하늘의 별이나 물이나 구름을 다 제하고 모든 것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꽃 한송이가 이루어진 인연들을 다 제하면 꽃은 없다고 보는 것이 연기공이다. 이런 설명을 우리 불자들은 상식적으로 다 안다. 이것은 연각이 아는 공도리(空道理)다.
제일 수준 낮은 공이 분석공이고 조금 수준 높은 공이 연기공이다. 그다음은 보살의 공인 즉공(卽空)이다. 즉공은 바로 분해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한 것이 즉공인데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의 관점에서 바라본 공(空)이기 때문에 보살공이고 즉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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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와: 일체법이 무아다. 사법인 중에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벌써 세 가지가 나왔다. 일체법이 아(我)가 없다. 무상이나 고나 공이나 무아나 전부 맥락은 같다.
고라는 것도 사람 따라서 다르다. 예를 들어서 가까운 도반이 멀리 가면 고통스러울 수가 있지만 꼭 고통스러워야 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시원한 사람도 있다. 고(苦)는 느낌이다.느낌에 따라서 고(苦)가 되기도 하고 락(樂)이 되기도 한다.
변화에서 우리는 고를 느낀다. 그 변화도 공으로 변한다든지 무아로 변한다든지 무상으로 변한다든지 이렇게 변할 때 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재산을 얼마 가졌는데 그 돈이 하루아침에 달아났다면 고통을 느낀다. 돈이 공으로 돌아가고 무아로 돌아가고 무상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런 것은 불교의 ABC이므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화엄경은 모든 경을 다 아우른다. 그래서 무진수다라지총명(無盡修多羅之總名)이라는 표현을 했다.
무진수다라의 총명, 그 많고 많은 경전의 전체적인 이름을 하나로 말할 때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금강경 속에는 화엄경이 안 들어간다. 그런데 화엄경 속에는 금강경이 다 들어있다. 여기 나오는 공이니 무아니 하는 것은 모두 금강경의 도리다. 고정불변 하는 실체가 없다. 이것이 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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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법무작(一切法無作)과:일체법이 지음이 없다. 모든 것이 지어져 있는데 지음이 없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래서 무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체법무미(一切法無味)와:일체법이 맛이 없다. 재미가 없다는 뜻도 된다. 아무 살 맛이 안난다. 알고보면 희망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부가 공이고 무상이고 무아이고 무미다. 여기 관이라고 했는데, 부처님 당시에 이런 관이나 관행을 많이 하던 제자들이 집단적인 자살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가만히 관해보니 일체가 무상하고 무아이고 공이고 무미여서 흥미가 없고 살맛이 없고 의욕이 없고 희망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삶에 대한 흥미가 다 떨어진 것이 무미다. 그러니까 ‘모르겠다’ 하고 ‘그만 죽자’해서 집단으로 자살하는 소동도 벌어졌는데 그것은 보살행이 가미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체법무미니 하는 것은 불교의 아주 기초적인 단계다.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불자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관념 없이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보아서 현실주의자가 되어 물질이나 명예를 밝힌다면 추하다. 물질이나 명예가 어느 정도 누구에게나 다 필요하기는 하지만 너무 밝히면 지나친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허무주의자로 떨어져 있어도 문제를 야기한다.
일체법불여명(一切法不如名)과 : 일체법이 이름과 같지 않다. 내 이름이 무비(無比)다. 그런데 내가 어디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인가. 아니다 이름과 다르다. 여러분들은 어떤가. 이름과 자기 자신을 비춰보았을 때, 일광(日光)은 태양이다. 자신이 태양인가, 반딧불이나 되는가 모른다.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면 그런 것이다. 불여명(不如名)이다. 이런 것은 상당히 기초적인 교리지만 실제적이다. 우리에게 가슴에 와닿는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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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법무처소(一切法無處所)와: 일체법이 처소가 없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처소가 없다.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는 황사가 우리나라에 온다. 그 먼지가 얼마나 가볍기에 그렇게 먼 거리에 오는지 늘 의문이다. 무엇이든지 무처소인 것이다.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지만 큰 나무들도 옮겨간다. 실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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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법이분별(一切法離分別)과: 일체법이 분별을 떠났다. 우리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이해와 분별을 붙이고 사량을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실컷 생각해 놓고 계산해 놓아도 엉뚱하게 돌아간다. 인생사가 그렇고 세상사가 그렇다. 계산하고 나름대로 작전을 짜놓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체법은 분별을 떠나 엉뚱한 데로 돌아가 버린다.
일체법무견실(一切法無堅實)이니: 일체법이 견고하고 실다움이 없다.
시위십(是爲十)이니라 :이것이 열 가지다. 수행주에 대한 이야기다. 열 가지로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무작(無作),무미(無味),불여명(不如名),무처소(無處所), 이분별(離分別), 무견실(無堅實)이 나왔지만 다 같은 맥락으로 비슷하다. 글자만 조금씩 바꿔 놓았지 한마디로 ‘무상(無常)’이라고 해버리면 제일 좋겠다.
그야말로 줄넘기를 하다가 관광객이 물어도 바로 머뭇거릴 것 없이 재깍 ‘인생이 무상해서 왔다’ 이렇게 대답해야 된다. 그것이 정답이다.
이렇게 무상으로 보는 것, 인생이 무상하고 세상이 무상한 줄 아는 것이 일차적인 수행이다. 그것이 안 되어 있으면서 선방에 백날 쭈그려 앉아봐야 아무것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십년 앉아 있다가도 본사 주지 선거에 나가서 패배한 충격으로 병에 걸리거나 어디로 가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세상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인생무상을 모르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똑같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해도 인생무상을 몰라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무상을 또 너무 지나치게 알아도 문제가 있다.
(2) 勸學十法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觀察衆生界와 法界와 世界며 觀察地界와 水界와 火界와 風界며 觀察欲界와 色界와 無色界니라 何以故오 欲令菩薩로 智慧明了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중생계와 법계와 세계를 관찰하며, 지계(地界).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를 관찰하며,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관찰함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들로 하여금 지혜가 분명하게 하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
권학십법(勸學十法): 열 가지 법을 배움
*
우리가 수행주라고 하는 세번째 지위에서 배워야할 공부다.
*
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수행주에 이른 보살이
응권학십법(應勸學十法)이니: 응당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하노니
하자(何者)가: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가지냐
*
소위관찰중생계(所謂觀察衆生界)와: 소위 중생계를 면밀히 잘 관찰해야 한다.
법계(法界)와: 법계를 관찰하고
세계(世界)며: 세계를 관찰하고
관찰지계(觀察地界)와: 지계와
수계(水界)와:수계와
화계(火界)와:화계와
풍계(風界)며: 풍계를 잘 관찰해야 된다. 지수화풍의 본질에 대해서 잘 관찰해야 된다.
*
관찰욕계(觀察欲界)와: 다음에 욕계
색계(色界)와: 색계
무색계(無色界)니라: 무색계를 또 관찰해야 된다. 열 가지를 맞추기 위해서 중생계, 법계, 세계를 말하고 지수화풍 네 가지를 말하고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했다.
이것을 잘 관찰하라. 어떻게 관찰하느냐. 앞에서 십종관을 말하였는데, 한마디로 무상으로 관찰하라는 것이다.
*
하이고(何以故):왜 그런 관찰을 권하느냐
욕령보살(欲令菩薩)로 :보살로 하여금
지혜명료(智慧明了)하고: 지혜가 명료하고
유소문법(有所聞法)에: 들은 바 법에 있어서. 어떤 공부를 했느냐에 대해서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스스로 알아야 된다.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이다.
‘즉자개해하야 불유타교’ 이것이 중요한 말이다. 다른 사람이 무상하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것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스스로 무상한 것을 느껴야 한다. 부처님이 말씀해주시거나 경전이나 책에서 이야기하거나 법사나 강사가 이야기 하는 것은 전부 남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부처님도 다른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어서 아직 내 살림이 안 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은 즉자개해해서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 한다.
‘부처님이 그렇다 하더라’ ‘어떤 큰스님이 그렇다 하더라’ 하는 그야말로 '카더라' 라고 하는 것은 아무 힘이 안된다. 내가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해야 된다.
‘유소문법(有所聞法)에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하는 이 세 구절은 늘 따라다닌다.
6, 第四 生貴住
(1) 成就十法
佛子야 云何爲菩薩生貴住오 此菩薩이 從聖敎中生하야 成就十法하나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永不退轉과 於諸佛所에 深生淨信과 善觀察法과 了知衆生과 國土와 世界와 業行과 果報와 生死와 涅槃이니 是爲十이니라
"불자들여, 어떤 것을 보살의 생귀주라 하는가. 보살은 성인의 교법으로부터 나서 열 가지 법을 성취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영원히 퇴전하지 아니하며, 모든 부처님께 깨끗한 신심을 내며, 법을 잘 관찰하며,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의 행[業行]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을 잘 아는 것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
제사 생귀주(第四 生貴住): 제 4 생귀주
*
좋은 주가 나왔다. 생귀주라고 하는 것인데 귀한 집안에 태어난다는 뜻이다. 인도 사회는 계급이 확실하다. 사성계급이 있고, 여기 들지 못하는 불가촉 천민도 있다. 사성계급 안에서도 여러 가지 차별이 펼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못나고 천한 사람도 귀한 집안에 태어난다고 하는 생귀주 같은 내용이 중요하다.
우리 나라도 양반이 있고 평민이 있고 상놈이 있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런 구분이 더 분명히 있었고, 시골에서는 50년 전만 해도 양반과 상놈을 나누는 풍속이 있었다. 서자 출신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총명해도 과거 시험을 못봤다.
생귀라는 것은 귀한 종족에 태어난다는 뜻인데 우리가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를 받으면 불위에 오른다. 우리는 전부 계를 받았다. 요즘 신도님들은 보살계까지 다 받는다. 그러면 바로 부처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금강경에는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이라고 해서 법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구절이 있다. 나는 금강경에서 그 구절을 좋아한다.
불법을 모르고 그냥 산다고 해봐야 별 가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불법을 제대로 배워서 제대로 불자노릇을 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귀족인 부처의 종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
성취십법(成就十法): 열 가지 법을 성취하다
*
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생귀주(云何爲菩薩生貴住)오 :무엇이 보살이 생귀주인가.
스님들이나 일반인들도 불자는 석가모니 석자를 써서 석(釋)씨라고 한다. 법적으로 필요한 곳에서는 석씨를 써서는 안되겠지만, 그렇지 않는 곳에서는 무조건 석씨라고 해야 된다. 모두가 석씨문중이라고 하는 표현이나 신도들 역시 부처님의 제자라고 해서 불자라고 하는 표현이나 모두 불교 안에서 좋은 표현들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신분이 한 순간에 높이 올라간다. 석씨 문중에 들어왔으니 부처님 문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 큰 혜택을 우리가 받고 산다. 그것이 생귀주다.
차보살(此菩薩)이: 이 보살이
종성교중생(從聖敎中生)하야: 성인의 가르침으로 부터 태어났다.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인생을 살아간다. 의법출생과 똑같은 뜻이다.
성취십법(成就十法)하나니: 십법을 성취하나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
소위영불퇴전(所謂永不退轉)과: 영원히 이 불문중에서 퇴전하지 않는 것과. 이것은 출가했다가 환속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환속을 했어도 환속을 안 한 사람보다 신심이 더 깊을 수 있다. 또 상황에 따라서는 환속할 수가 있고 환속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부처님 당시에 일곱 번씩 갔다 왔다 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할 정도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인연들이 또 있는 것이다. 그런 것과 신심은 다른 조건이다.
불법에 대해 영원히 퇴전하지 않는 것과
어제불소(於諸佛所)에: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심생정신(深生淨信)과 : 청정한 신심을 깊이 내는 것. 중요한 말이다. 부처님이나 불교에 대해서 청정한 믿음을 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스님들의 입장에서 제일 강조해야 할 것이 신심이다. 그동안 십주 법문에 들어오기 전에는 믿음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처럼 주옥같은 가르침이 전부 십신법문인 현수품에 있었다.
선관찰법(善觀察法)과: 모든 존재의 실상을 잘 관찰하는 것과
요지중생(了知衆生)과 : 중생을 철두철미하게 알고
국토(國土)와: 국토의 실상을 철두철미하게 알고
세계(世界)와: 세계와
업행(業行)과: 업행과
과보(果報)와: 업행을 통해 과보를 받는 것과
생사(生死)와: 생사문제와
열반(涅槃)이니 : 열반문제 이런 것을 철저히 아는 것
시위십(是爲十)이니라: 이것이 열 가지다.
우리가 이제 석씨가 되었고 불자가 되었고 퇴전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신심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잘 알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2) 勸學十法
佛子야 此菩薩이 應勸學十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了知過去와 未來와 現在의 一切佛法하며 修集過去와 未來와 現在의 一切佛法하며 圓滿過去와 未來와 現在의 一切佛法하며 了知一切諸佛平等이니라 何以故오 欲令增進하야 於三世中에 心得平等하고 有所聞法에 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알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 법을 닦아 모으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부처님 법을 원만하여 온갖 부처님들의 평등함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로 하여금 더욱 나아가 세 세상 가운데서 마음이 평등하게 하려 함이며,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
권학십법(勸學十法) : 열 가지 법을 배움
*
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응권학십법(應勸學十法)이니 : 응당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하노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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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요지과거(所謂了知過去)와: 소위 과거라고 하는 시간
미래(未來)와: 미래라고 하는 시간
현재(現在)의: 현재라고 하는 시간
일체불법(一切佛法)하며: 일체 불법이라고 하는 것을 요지해야 된다. 요(了)자만 써도 되고 지(知)자만 써도 되는데 늘 ‘요지’라고 붙여서 쓰는 것은 철저히 아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어름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아는 것이다.
내가 자꾸 사경책을 만들고 스님들에게 가져가서 신도님들이 사경하도록 지도하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부를 해보면 불법은 무한히 깊고 무한히 높은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스님들이야 화엄반이니까 해당이 안되지만 대다수 스님들은 불교를 건성으로 알고 있다. 신도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그런 점이 안타까왔다. 이 좋은 보물을 왜 건성으로 아는가.
수박을 탁 쪼개서 안에 시뻘건 단물이 흘러내리는 수박 속을 숟가락으로 훑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는데 그걸 놔두고 수박 겉만 계속 핥고 있으니 그 수박 속맛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가 불교를 건성으로 아는 것은 꼭 그와 같다.
그래서 반야심경 하나라도 자꾸 쓰고 해석을 읽어보고 열 번 스무 번 백 번 반복해서 써서 그 속맛을 직접 맛볼 수 있도록 해보자고 근래에 나는 법공양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몰라서 관세음보살을 천번 만번 부르는 것이 아니다. 반복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반야심경 하나만이라도 반복해서 쓰는 것은 즉자개해(卽自開解) 불유타교(不由他敎)다.
스스로 이해해야 된다. 남이 뭐라고 설명해주는 것은 전혀 나와 관계없다.
내가 알려고 할 때, 내가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들이고 공을 들일 때 이해가 빠르다. 그렇지 않고 남이 해주는 유창한 설명, 부처님의 설법은 나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즉자개해 불유타교’라는 이 말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반야심경 하나라도 스스로 철두철미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런 마음에서 나는 자꾸 좋은 책을 읽게 하고 사경을 통해서 깊이 있게 불교를 이해하도록 하는 운동을 혼자나마 외롭지만 하고 있다.
*
수집과거(修集過去)와: 과거와
미래(未來)와 : 미래와
현재(現在)의: 현재의
일체불법(一切佛法)하며: 일체 불법을 닦아서 모은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은 그만두더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강원에서 공부하는 불교 교과서 외에 중요한 책들이 많다. 임제록이라든지 육조단경이라든지 신심명, 증도가, 유마경 등등 아주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경전들을 우리가 수집하고 공부를 해야 된다. 팔만대장경을 다 알려고 욕심 부릴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은 수집하여 닦아서 모야야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사실 일생은 길고 시간이 많다.
*
다음으로는 원만히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원만과거(圓滿過去)와: 과거와
미래(未來)와: 미래와
현재(現在)의: 현재의
일체불법(一切佛法)하며:일체불법을 또 원만하게 한다. 앞에서는 철저히 안다고 하는 요지가 나왔고, 다음에 닦아서 모으고 수집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원만히 한다. 제대로 갖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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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요지가 나온다.
요지일체제불평등(了知一切諸佛平等)이니라:일체제불의 평등 이 모든 가르침은 모든 부처님이 다 평등하게 가르쳤다고 하는 사실도 철두철미하게 알지니라.
‘요(了)’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깨달았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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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왜 그러냐
욕령증진(欲令增進)하야: 하여금 앞으로 더욱더 나아가게 해서
어삼세중(於三世中)에: 과거 현재 미래 삼세 가운데
심득평등(心得平等)하고: 마음의 평등함을 얻고
유소문법(有所聞法)에: 내가 법을 들은 바에 있어서. 내가 오늘 본 화엄경, 내가 공부한 그 페이지 대해서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내가 스스로 이해하고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다른 사람이 일러주고 가르쳐 준 것에 말미암지 않고 내가 내 마음으로 소화가 되도록 하자. 이런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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