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다 불교의 업과 윤회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1. 서문 2. 본론 가. 초기불전에 나타난 업과 윤회 1) 의도와 행위 2) 업의 상속 3) 업과 윤회 4) 업과 윤회전생에 대한 앎의 문제 5) 업론과 작용론 나. 주석문헌과 후대 아비담마의 업과 윤회 1) 『청정도론』의 업과 윤회 2) 아비담마타상가하의 업과 윤회 다. 현재 테라와다 불교의 업과 윤회에 대한 이해 3. 결론 |
1. 서문
업과 윤회사상이 불교이전에 이미 존재했었고, 불교 및 자이나교와 같은 신흥 사문사상이 각각 새로운 입장에서 업과 윤회사상을 주장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본고에서는 초기불교에 기반을 두고 테라와다 불교의 업과 윤회사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불교 문헌에 의거할 때 업에 의한 인과응보 사상과 오온의 상속으로서의 무아 윤회사상은 초기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초기불교 문헌에 보이는 업사상과 윤회사상을 정리한 후 빠알리 주석문헌과 후대의 아비담마 문헌에 보이는 테라와다 불교의 업과 윤회 그리고 현대 테라와다 불교의 업과 윤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본론
가. 초기불전에 나타난 업과 윤회
1) 의도와 행위
업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초기경전에 의하면 업이란 의도(思, cetanā)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cetanā, 思]가 업[kamma, 業]이라고 말한다. 의도한 후, 사람들은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 … 비구들이여, 지옥에서 (그 결과를) 받아야 할 업이 있고, 축생계에서 받아야 할 업이 있으며, 아귀세계에서 받아야 할 업이 있고, 인간계에서 받아야 할 업이 있으며, 천상에서 받아야 할 업이 있다. … 비구들이여, 업의 결과[果報]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현세에서 받는 것, 바로 다음 생에서 받는 것, 미래 생에서 받는 것이 그 세 가지이다.
이 경전에서는 의도한 후(cetayitvā) 몸, 말,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kammaṃ karoti) 또는 행위를 한다고 하였으므로, 의도로서의 업에 근거하여, 몸, 말,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 즉 행위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의도로서 정의된 업은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의도한 후에 하는 身口意의 三業도 인식할 수 있다.
『숫타니파타』에 의하면, 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업[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업에 의해서 바라문도 된다고 한다. 또한 인간에게는 출생에 기인한 다양한 특징이 없고, 인간 가운데 있는 다양한 구별은 단지 명칭뿐이라고 하면서, 행위에 의해서 사람들을 농부, 기술자, 상인, 고용인, 도둑, 전사, 제관, 왕으로 구별할 뿐이라고 하며 붓다는 출생과 가계 때문에 바라문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다양한 구별의 근거가 되는 직업으로서의 행위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
2) 업의 상속
어떤 존재이든 자신의 의도에 의해 지은 업은 스스로 받게 되어있다. 즉 중생은 자신의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이다. 『숫타니파타』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간은 업에 의해 존재하고, 인간은 업에 의해 존재한다. 중생들은 업에 묶여 있다. 마치 달리는 마차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또한 모든 중생들은 업을 자기 것으로 하고 업의 상속자이자 업을 의지처로 삼는다.
비구들이여, 모든 중생들은 업[業]을 자기 것으로 하며, 업의 상속자이고, 업을 모태로 하며, 업을 친족으로 하고, 업을 의지처로 한다. 선한 업이든지 악한 업이든지 그 어떤 업이라 하더라도 그 업의 상속자가 된다.
업은 그 업을 지은 중생이 태어나는 곳에서 결실을 맺으며, 그 업의 결과를 맛보게 되어있다. 하지만 업의 결과를 맛보는 시기는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모든 중생은 업에 의해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업은 탐진치라는 번뇌에 의해서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탐욕에서 비롯된 업, 탐욕에서 생겨난 업, 탐욕을 원인으로 하는 업, 탐욕을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러한 업이 있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 그곳이 그 업이 무르익는 곳이다. 그 업이 무르익을 때, 현재의 삶[現生]이든지, 다음 생[來生]이든지,아주 먼 후생이든지간에, 그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성냄에서 비롯된 업, 성냄에서 생겨난 업, 성냄을 원인으로 하는 업, 성냄을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러한 업이 잇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 그곳이 그 업이 무르익는 곳이다. 그 업이 무르익을 때, 현재의 삶[現生]이든지, 다음 생[來生]이든지, 아주 먼 후생이든지간에, 그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업,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업, 어리석음을 원인으로 하는 업, 어리석음을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러한 업이 있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 그곳이 그 업이 무르익는 곳이다. 그 업이 무르익을 때, 현재의 삶[現生]이든지, 다음 생[來生]이든지, 아주 먼 후생이든지간에, 그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이 세상에 원인이나 조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연기설인데, 이 연기설은 언뜻 보기에는 타고나면서부터 불공평한 것들의 원인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잠재적인 성향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운명, 모든 행복과 불행이, 부분적으로는 이 생에서 또 다른 부분은 지난 생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 원인에서 생겨난 것임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원인들은 몸과 입과 마음에서 생겨난 행위[業]이다. 탐진치와 결합되어 있거나, 그 결합되어 있지 않은 이 행위[業]가 모든 존재의 성향과 운명을 결정한다. 따라서 업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면, 윤회와 연결되어 있는 선악의 의도를 말한다. 여기에서 업을 생각할 때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존재의 無我的 특성이다. 생사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은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 선과 악이라는 행위에 따라서 이 생에서는 인간으로, 저 생에서는 짐승으로, 또 다른 곳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자신들을 드러내는 단순한 생명의 파도일 뿐이다. 여기서 ‘업’이라고 하는 용어는 오직 앞에서 언급했던 세 가지 행위의 종류만을 의미하지, 그 결과를 의미하거나 그 결과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3) 업과 윤회
업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과보를 가져오는업이 있기 때문에 욕계, 색계, 무색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 업은 들판이며, 識은 씨앗, 갈애는 수분의 역할을 하면서 존재세계에서 윤회전생하게 된다.
세존이시여, 존재. 존재라고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됩니까?
아난다여, 욕계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識은 씨앗이며,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계박되어 저열한 욕계에 識을 확립한다. 이와 같이 내생에 다시 존재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런 것이 존재이다.
이와 같이 업은 윤회전생과 결합되어 있으며, 지은 업에 적절한 세계에 존재를 받게 되는 것임을 초기불교는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업과 윤회전생에 대한 앎의 문제
앞에서 보았듯이 초기불교는 업과 윤회 또는 업에 의한 윤회를 주장한다. 하지만 업에 의한 윤회전생은 누구나 직접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숙명통이나 천안통과 같은 신통지를 얻어야 직접알수 있다. 따라서 업과 윤회에 대해서 스스로 검증할 힘이 없거나 그 힘을 개발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믿음에 의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팔정도를 세간의팔정도와 출세간의 팔정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맛지마 니까야』의 한 경전을 보면 세간의 바른 견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번뇌가 남아있어, 일정한 공덕이 있지만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세간의] 바른 견해는 어떠한 것인가? 보시는 있다. 제사도 있다. 공양을 베푸는 것도 있다. 선행과 악행 둘 다 과보가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즉시 태어나는[化生] 중생도 있다.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는 수행자와 성직자가 있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설명할 수 있다는 [견해가] 번뇌가 남아있어, 일정한 공덕이 있지만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세간의] 바른 견해라고 한다.
이 경전에서는 도덕적 의미의 인과응보가 있고, 인과응보에 따라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다는 즉 윤회가 있다는 사실을 직접 알아 설명할 수 있는 수행자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간의 바른 견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업에 의한 과보와 윤회전생은 이처럼 올바른 수행자가 직접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업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네 가지 불가사의의 하나로 붓다와 삼명, 육신통을 얻은 아라한만이 업의 과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5) 업론과 작용론
外道 출신의 수행자가 승단에 들어오려면 4개월간 별도로 정해진 장소에서 머물면서(別住) 승단의 비구들의 관찰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4개월 후,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시험한 후 승단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 가운데는 붓다의 교법과 승단에 대해서 찬탄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예외적으로 4개월간의 별주를 면제받는 외도가 있었는데 그들은 業論者이며 작용론자에 해당하는, 불을 섬기는 자들과 結髮外道들이었다. 이처럼 외도의 경우, 업론과 작용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출가를 용인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정도로 업에 대한 입장이 중시되었다.
빠알리 니까야와 한역 아함경 등의 초기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자신을 업론자이며 행위론자라고 하였다. 즉 업을 설하는 자, 행위를 설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비구들이여. 지금의 正等覺者인 나도 업론자이고, 행위론자이며 정진론자이다. 비구들이여.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나에게도 그의 교설로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업이란 것도 없고, 행위도 없으며, 정진이란 것도 없다고.
身口意의 惡行과 不善法을 행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무행위론에 대한 비판으로 선악의 업에 대하여 그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푸라나의 도덕부정설, 막칼리의 결정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업은 몸, 입, 마음(身口意)의 세 가지 행위(三業)를 말하며, 의지작용을 의미하는 마음의 행위(意業)가 바탕이 되어 있다. 業論과 행위론의 입장에서 붓다는 무인론은 물론 결정론 또는 숙명론도 비판하고 있다.
숙명론(또는 宿作因)이란 현재의 모든 苦樂, 不苦不樂의 느낌은 과거생의 원인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견해는 자이나교의 입장임을 『맛지마 니까야』101경 데바다하경에서 자세히 설명하며 비판하고 있다. 불교의 입장은 업이라는 의지작용에 의해서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입장이며, 행위에 의해 삶이 결정된다고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불교의 업을 숙명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의 업은 어찌할 수 없지만, 현재의 업은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며,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에 의해 개선해 갈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업에 대한 이해이다. 업론은 緣起思想과 깊은 관계가 있다. ‘賢者들은 업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들이고, 연기를 보는 자이고 업과 그 果報를 잘 알 고 있다.’
나. 주석문헌과 후대 아비담마의 업과 윤회
1) 『청정도론』의 업과 윤회
『청정도론』에서는 옛 스승의 시를 인용하면서, 윤회를 만든 자는 없으며, 조건에 의존된 갖가지 법이 펼쳐진다는 점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어떠한 天神도 梵天도 이 生死의 윤회를 만든 자는 아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존된 순수한 법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五蘊과 十二處와 十八界의 연속과 끊임없는 전개를 윤회라고 한다.
이처럼 『청정도론』은 세계를 창조한 유신론의 입장을 부정하면서 조건에 의한 발생을 의미하는 緣起論에 입각하여, 중생이 아니라 5蘊, 12處, 18界의 연속과 전개로 윤회를 설명하고 있다.
『청정도론』을 위시로 한 빠알리 주석문헌에 보이는 보시, 지계, 수행이라는 담마의 실천이 인도하는 행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현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 둘째, 미래의 삶과 관련된 천상의 행복, 셋째,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의 행복이다. 이 가운데 보시와 持戒는 현재와 내생의 행복을 얻는 수단이며, 수행 즉 37보리분법을 닦는 것은 열반의 행복을 얻는 수단이다.
이처럼 빠알리 주석문헌의 입장은 초기불교의 차제설법과 업에 기반한 윤회설의 입장에서 善業으로서의 보시, 지계의 실천에 의해 현생의 행복뿐만 아니라 내생에서 천상의 행복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청정도론』을 중심으로 업과 윤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청정도론』의 17장, 洞察智의 토양-緣起에서 업과 윤회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十二緣起와 24조건을 중심으로 업과 윤회에 대해서 정리하고자한다.
윤회의 두 가지 근거로서 무명과 존재에 대한 갈애
『쌍윳다 니까야』에 의하면 윤회, 무명, 갈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 윤회는 그 처음을 알 수가 없다. 최초의 시간은 알려질 수 없다. 무명에 의해 뒤덮여 있고, 갈애에 의해 속박되어 있는 중생들은 [생사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윤회한다.
이 경전에서 윤회의 근거로서 무명과 갈애가 제시되어 있는데, 붓다고사는 『앙굿따라 니까야』의 두 경전을 인용하면서 무명을 출발점으로 하는 윤회와 존재의 갈애를 출발점으로 하는 윤회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원인으로 하여 윤회를 설명한 이유는 無明은 惡處로 인도할 업의 두드러진 원인이 되며, 존재의 갈애는 善處로 인도할 업의 특별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전에 의하면 무명은 五蓋를 자양분[조건]으로 하며, 존재의 갈애는무명을 자양분으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번뇌들간의 상호조건관계를 알 수 있지만, 무명에 의해 악업을 짓게 되면 악처에 윤회하고, 무명에 덮여있다 하더라도 존재의 갈애가 있으면 불살생 등의 선업을 짓고 선처에 윤회함을 보여주고 있다.
無明緣行의 행
‘無明을 조건으로 行이 있다’는 십이연기의 첫 번째 조건관계의 行에는 ‘공덕이 되는 행위,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의 세 가지와 몸의 行, 말의 行, 마음의 行의 세 가지가 있어 모두 여섯 가지인데, 이 여섯 가지는 세간적인 유익함과 해로움의 의도일 뿐이다. 라고 行을 해석하고 있다.
십이연기의 行은 다름아닌 의도라고 해석하기 때문에 의도로 정의된 업과 동의어가 된다.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6가지 의도가 일어나며 공덕이 되는 행위는 보시, 지계 등으로 생긴 8가지 欲界의 유익한 의도와 수행으로 생긴 色界의 5가지 유익한 의도 등 13가지 의도이다. 공덕이 되지 않는 불선업은 살생 등으로 생긴 12가지 해로운 의도이고, 흔들림 없는 행위는 수행으로 생긴 4가지 無色界의 유익한 의도이므로 모두 29가지 의도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이 苦集滅道의 四聖諦에 대한 無知인 무명을 조건으로 한 의도로서의 行 즉 업은 29가지로 정리되며, 이 업에 의해 욕계, 색계, 무색계의 三界에서 윤회하게 된다. 무명이 사라지고 지혜가 생겨나면 29가지 의도가 모두 사라지게 되어 윤회에서 벗어나게 된다.
네 가지로 분류되는 12가지 業
『청정도론』에서는 4가지로 분류되는 업을 3가지 그룹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과보를 초래하는 순서로 되어있다. 첫 번째로 4가지 업은 금생에 받는 업, 내생에 받는 업, 미래생에 받는 업, 효력을 상실한 업의 4가지 업이다. 미래생에 받는 업은 윤회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는 과보를 받게 되어있는 업이다.
또 다른 4가지 업으로 무거운 업, 습관적인 업,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 이미 지은 업이 있다. 유익하거나 해롭거나 무겁거나 가벼운 업 가운데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의 업이나 고귀한 경지[禪의 증득]의 업이 무거운 업이며, 이것이 먼저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습관적인 업과 습관적이지 않은 업 가운데에는 습관적인 업이 다음으로 과보를 초래한다.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은 임종시에 기억나는 업으로 그 업에 따라 태어나게 된다. 위의 세 가지에 속하지 않고, 자주 반복하여 지은 업을 이미 지은 업이라고 하며, 앞의 세 가지 업이 없을 때는 이 업이 재생연결을 일으킨다고 한다.
또 다른 네 가지 업으로는 생산업, 돕는 업, 방해업, 파괴업이 있다. 생산업은 유익한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 재생연결과 삶의 과정에서 물질과 마음의 과보의 무더기를 생기게 한다. 돕는 업은 과보를 생기게 할 수 없으며, 다른 업에 의해 재생연결이 주어지고 과보가 생길 때,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면 그것을 지지하고 지속하게 한다. 방해업은 다른 업에 의해 재생연결이 주어지고 과보가 생길 때,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면 그것을 방해하고 막는다. 파괴업은 유익하거나 해로운 업으로 힘이 약한 다른 업을 파괴하고 그 업이 과보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버리고 자기의 과보를 낼 기회를 만드는 업이다.
이상의 12가지 업과 업의 과보는 붓다의 업과 그 과보에 대한 지혜에 의해서만 그대로의 성질에 따라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이 지혜는 제자들과 공유하지 않는 붓다만의 지혜에 속한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자는 업의 차이와 과보의 차이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제목과 간단한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2) 아비담마타상가하의 업과 윤회
빠알리 아비담마 교학의 강요서로 11세기에 저술된 『아비담마타상가하』(『아비담마길라잡이』로 번역됨)는 『청정도론』 이후에 아비담마 이해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업과 윤회는 제<5장 인식관정을 벗어난 마음>에서 다루어졌다. 그 내용은 네 가지 세계, 네 가지 재생연결, 네 가지 업, 네가지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간과 출세간세계, 재생연결, 업,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순서대로 간략하게 살펴본다.
네 가지 세계와 네 가지 재생연결
네 가지 세계는 윤회세계인 欲界惡處, 欲界善處, 무색계의 세계를 말한다. 욕계악처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를 말한다. 욕계선처는 인간과 욕계의 6가지 천상인 사천왕천, 삼십삼천(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을 말한다. 욕계에는 모두 11가지가 있다. 새계는 색계선을 닦아 태어나는 곳으로 모두 16가지가 있다. 무색계는 무색계정을 닦아 태어나는 4가지를 말한다. 네 가지 세계에는 모두 31가지 처소가 있다. 네 가지 재생연결은 네 가지 세계 각각에 대한 재생연결을 말한다.
네 가지 세상과 31가지 처소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네 가지 업
『아비담마타 상가하』에서는 네 가지 업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청정도론』이 4가지 업을 3가지로 제시한 것보다 많아졌고, 순서가 바뀐 곳이 있다. 먼저 기능 또는 역할에 따라 생산업, 돕는 업, 방해업, 파괴업의 4가지가 제시되며 과보를 생산하는 순서에 따라 무거운 업,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 습관적인 업, 이미 지은 업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에서 『청정도론』과 달리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과 습관적인 업의 순서가 바뀌었다. 주석서에 보이는 임종에 이르러 지은 업에 대한 사례를 보면, 고대 스리랑카에 소나(soṇa)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 비구의 아버지는 사냥꾼이었는데, 이들은 아버지가 악행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죽기 바로 직전에 아버지를 출가시켰다. 출가한 소나비구의 아버지는 지옥과 개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공포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소나비구는 아버지를 데리고 탑묘와 보리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공양물을 올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바로 그 앞에서 천상세계를 보았다.
사냥꾼으로 지은 악행의 과보로 지옥에 가게 될 아버지를 위해 대신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아버지는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임종에 이르러 선행을 닦거나,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선행을 대신 닦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다음은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금생에 받는 업, 다음 생에 받는 업, 세 번째 생부터 받는 업, 효력이 없는 업이 있다. 마지막으로 과보를 생산할 장소에 따라서, 해로운 업, 욕계 유익한 업, 색계 유익한 업, 무색계 유익한 업으로 나뉜다.
업의 과보와 죽음 및 재생연결
업은 그 결과로서 과보를 낳는다. 이것은 정해져 잇는 업의 법칙이다. 해로운 업과 유익한 업은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각각 惡處와 善處의 재생연결을 생산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죽음에는 4가지 원인이 있다. 4가지란 수명이 다함, 생산 업이 다함, 둘다 다함, 파괴하는 업이 끼어듦이다. 마지막을 불시의 죽음이라 하고 나머지는 정상적인 죽음이라 한다.
죽을 때에는 다음 생에서 직면하게 될 재생연결을 생산할 업이나, 이전에 지은 업의 표상이거나 바로 다음 생에 경험할 태어날 곳의 표상 가운데 하나가 나타난다. 죽음 다음에는 바로 죽을 때 나타난 표상을 대상으로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재생연결이 일어난다. 재생연결 이후에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기 전까지 마음은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것을 존재지속심(有分心)이라고 한다.
다. 현재 테라와다 불교의 업과 윤회에 대한 이해
붓다는 재가자를 위해서 먼저 보시, 지계, 天上의 차제적인 실천법을 제시하여 현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위해 공덕을 쌓고 계를 지니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믿음이 생기고, 사성제를 듣고 실천할 만한 때가 되었을 때, 재가자에게도 四聖諦를 설하여 궁극의 행복인 열반을 경험하게 하였다. 붓다 당시에 많은 재가자들이 預流에서 不還의 경지를 깨달았다. 열반을 향한 이러한 가르침은 출가자 뿐만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항상 열려있었다. 테라와다 불교국가를 방문하면, 법문이나 경전의 공식적인 담마와 실제적인 일상 종교생활의 영적인 세계가 대조적이기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 특히 공덕을 쌓는 것은 개인적인 현세구복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공덕이 되는 행위를 통해 업을 나누는 것이 발달했다. 공덕을 짓는 일은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의 대부분의 테라와다 국가에서 널리 실천되고 있다. 주의할 점은 민속문화와 마을 차원의 불교에서 업의 가르침은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업과 윤회는 후기-전통 테라와다 교리에서 지엽적인 교설이 아니며, Ames는 전체적인 종교체계로서 테라와다는 교리적으로 문화적으로 혁명의 상태에 있다고 진단한다.
인류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Winston King과 Melford Spiro는 더 좋은 환생을 목표로 하는 ‘업의 불교(Kammatic Buddhism)와 환생에서 벗어나게 하는 ’열반의 불교(nibbanic Buddhism)에 대한 두 가지 분명한 구분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Aronson은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의 비판적 시각에 따라서 현대 테라와다 불교의 두 가지 모습의 관계에 대해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King에 의하면 업의 기법은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같은 도덕적 습관의 개발을 포함한다고 한다. 업의 기법은 올바름과 그름의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이며, 행복한 내생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四無量心의 마지막 평정은 善惡의 세계에서 물러나게 하는 열반의 기법이라고 한다.
Melford Spiro는 보시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내생을 얻기 위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기법이라고 주장한다. King과 달리 四無量心 전체를 포함하는 명상은 열반의 불교라고 주장한다.
King은 교학에 뛰어난 승려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번역된 경전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서, 열반의 불교와 업의 불교 사이의 대극은 열반을 추구하는 출가자의 진정한 길과 더 나은 내생을 구하는 재가자의 길 사이의 본래적인 구분을 의미하기 때문에 진실하다는 입장을 주장하였다(King 1964, p.169).
한편 Spiro는 경전의 교리와 일반대중의 불교를 대조하였다. 따라서 경전의 교리는 열반의 불교이고 일반대중의 불교는 업의 불교라고 선택하게 되었다(Spiro, 1972, p.68). 하지만 Spiro가 말하는 열반의 불교인 경전불교는 업과 관련있는 곳이 많고, ‘업의’ 실천 안에는 열반에 이르게 하는 요소가 많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따라서 Spiro의 용어선택은 운이 없었다(unfortunate)고 Bruce는 지적한다.
King과 Spiro는 둘다 사무량심에 대한 가르침을 언급했지만 둘다 사무량심의 초기불교적 특징과 인새의 질 뿐만 아니라 열반의 깨달음과의 관계를 표현하지 못했다고 Aronson은 지적한다. 사무량심 수행은 행복한 내생을 위해서 두 바라문에게 가르쳤음을 『디가 니까야』의 「三明經」에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이 가르침은 항상 열반을 향해 열려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업-열반”의 이분법적 사고는 전통적인 교리에도 위반되고 실제적인 실천에서도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현대의 테라와다 불교의 生天사상과 열반을 추구하는 것은 같은 선상의 수행임을 교리나 실제 수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본고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공덕회향의 사상도 가족이나 조상을 대신해서 보시를 행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관련이 있으며, 공덕 회향사상 또한 불교가 추구하는 現生 및 來生의 행복과 궁극의 행복을 추구하는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테라와다 불교의 업과 윤회사상을 초기경전과 주석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의도로 정의된 업은 초기불교ㅡ이 핵심적인 사상이자 붓다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업에 의해 윤회전생하지만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윤회사상을 주장한 것이 초기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청정도론』을 위시로 한 주석문헌은 업을 더욱 정밀하게 분석하여 윤회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테라와다 불교는 보시, 지계 등의 善業을 쌓아 현재와 내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업의 길과 37보리분법을 닦아 열반을 얻고자 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 결코 이질적인 두 길이 아닌, 같은 길을 여러 가지로 제시한 붓다의 일관된 가르침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테라와다 불교의 신앙과 명상실천은 이러한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되 궁극적으로는 열반의 행복을 향해가는 한 갈래의 길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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