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의 이유(2)
청화 스님
어째서 내가 없는고?
'사람 몸(人身)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집착(執着)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 제법(諸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함을 법아(法我)라 합니다'
제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일체만법(一切萬法)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산이나 내(川)나 또는 무슨 주의(主義)나, 좋다 궂다 하는 것이나, 유정(有情), 무정(無情) 일체 만유(萬有)를 가리켜서 제법(諸法)이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 몸(人身)은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체(我體)가 없습니다'
오온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 몸은 색(色)에 해당하고 사람 마음은 수, 상, 행, 식(受想行識)에 해당합니다.
곧 감수(感受)하는 작용, 또는 상상하는 작용, 또는 의욕 작용, 또는 분별하는 작용입니다.
사람 몸은 이런 오온이 잠시간 가짜로 합해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의 나라는 그런 몸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성(我性)이 무(無)라' 합니다.
일체 제법은 모두가 인연생으로서 어떤 법이나 단독으로 이루어진 법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무수한 인연, 인과 연이 합해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항상 하나인 아(我)의 성품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통달무아법자 진시보살(通達無我法者眞是菩薩)이라, 참다운 도인이나 보살은 내가 없다는 무아법(無我法) 즉, 내 몸도 참다운 것이 아니고 일체 만법도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법에 통달하면, 그때는 도인이요 보살입니다.
그만치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어째서 내 몸이 없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제가 누누히 말씀 했습니다마는 내 몸이라 하는 것은 각 원소(元素)가 잠시간 화합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지은 업력(業力)을, 업력은 내나야 우리 마음에 붙은 여러 가지 우리 행위(行爲)나 훈습(熏習)된 것이 업력 아닙니까, 이런업력을 핵(核)으로 해가지고 무수한 인연이 모여서 각 원소가 되고 또 이렇게 조직된 세포가 몸이라는 말입니다.
불교말로 하면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즉,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이요, 물리학적인 술어로 말하면 산소나 수소, 질소, 탄소같은 원소가 되겠지요.
이런 것이 우리 업(業)이라 하는 에너지를 핵으로 해서 이렇게 모여 구성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구성되어진 몸은 잠시도 상일(常一)의, 이른바 항시 그대로 있는 몸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변화되어 갑니다.
세포라 하는 것은 어느 순간도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일초(一秒)전의 자기 몸과, 일초 후의 자기 몸이 똑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우리 중생이 느끼지 못할 뿐이지 결국은 어떤 것이나 존재하는 것은 순간순간 변질되어 갑니다.
따라서, '항상 있는 어느 공간 속에 항상 존재하는 나' 라는 것은 결국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것을 못 보니까 있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내 몸은 그와 같이 지, 수, 화, 풍 사대(四大) 각 원소가 잠시 간 업 따라서 이렇게 이루어져 있지마는, 그것도 역시 항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도 그대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항상 하나로 있는 내 몸은 없다는 말입니다.
가사, 하나의 꽃이 피었다고 하면, 그 꽃이 하나의 원인 때문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공기나 수분이나 또는 태양광선이나 거름이나, 그러한 직접 원인과 또 간접으로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나 여러 가지 천지 우주의 모두가 다, 직접 간접으로 다 포함되어서 하나의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연생(因緣生)이라 할 때에, 말은 쉽습니다마는 인연이란 말은 굉장히 의미 심중(深重)한 말인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을 찾다보면 천지우주를 다 알아야만 인연(因緣)을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를 모르면 인연을 모르는 셈입니다.
우리 중생들이나 지금 현대 과학이나 물리학처럼 인연(因緣) 가운데 몇가지 중요한 인연만 추려서 "무엇이 원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수없는 인연들이 잠시간 화합해서 이제 이런 꽃이 피었고 그것도 역시 순간순간 또 변질되어 갑니다.
항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흘러가는 물 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고체(固體)인 바위도 역시, 우리 중생이 보면, 고체로서 이와 같이 딱 둥그런 바위가 있다고 생각할려는지 모르지마는 그것은 중생의 제한된 견해인 것이고, 바위를 구성한 각 원소(元素)를 보고 원자(原子)를 본다고 할 때에는 순간순간 변질되어가는 무상(無常)인 것입니다.
항상(恒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구조적(構造的)인 겉만 보니까 내용을 모릅니다.
내용을 보면 다 그때그때 변화하고 마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내가 없다 해도 말은 쉽지마는 구성적(構成的) 내용을 모르면 집착을 끊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업장이 무거워서 말입니다.
우리는 나(我)라는 것을 이와 같이 아주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본다고 할 때는 차근차근 나에 대한 집착이 좀 끊어지겠지요.
'사람 몸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집착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는 일체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함을 법아(法我)라고 하는데, 사람 몸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지수화풍과 우리 마음을 구성한 감수하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의지작용, 분별하는 작용, 이런 오온(五蘊)이 잠시간 가짜로 화합되어 있으므로 항시 하나인 나의 몸이 없으며, 일체법은 모두가 인연 따라 이루어진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이것도 역시 항상 하나인 아(我)의 성품이 없다' 이렇게 아는 것이 불교의 초보인 셈입니다.
'내가 없다, 내가 비었다' 하는 것은 불교말로 해서 아공(我空)이라 하고, '일체법이 없다. 일체법이 비었다' 하는 것은 법공(法空)이라 합니다.
아공 법공을 깨달아버려야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가 원래 비었다고 분명히 깨닫고, 일체법이 원래 비었다고 보아야만 비로소 깨달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조금 더 부연(敷衍) 설명하고 더 강조하기 위해서 도인들은 '내가 없다' 는 말씀을 종종 합니다.
여기, '내가 없다' 하는 굉장히 중요한 법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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