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김성철

수선님 2018. 7. 29. 12:45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

 

 

 

 

 

김성철

(중앙승가대, 동국대 강사)

 

 

 

 

 

 

 

 

 

 

 

 

 

 

 

 

 

 

 

 

 

 

 

 

 

 

 

 

 

 

 

 

 

 

Ⅰ. 「中觀論理란?」은 가산불교문화연구원에서 출간될 예정인 梵·藏·漢 對譯 『廻諍論』의 해제에 실릴 글이고, Ⅱ. 「逆說과 中觀論理」는 <가산학보> 제6호(佛紀 2541年, 6月)에 실었던 글이며, Ⅲ. 「공과 윤리」는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개최한 <空과 緣起 Seminar>에서 佛紀 2542年 7月에 발표했던 글이다.

 

 

 

 

 

 

 

 

 

 

 

 

 

 

 

불기 2542년 9월

 

 

 

 

 

 

 

 

 

 

 

 

 

 

 

 

 

 

차  례

 

Ⅰ. 중관논리란?                                   page. 7

1. 中觀論理의 宗敎性

2. 中觀論理의 構造

3. 中觀論理의 正當性에 대한 解明 - 『廻諍論』

 

Ⅱ. 역설과 중관논리                              page. 15

1. 逆說이란?

2. 龍樹의 論書에서 발견되는 역설적 상황

3. 中觀論理와 逆說의 구조

4. 逆說的 상황이 惹起되는 이유

5. 逆說의 해결

 

Ⅲ. 공과 윤리                                    page. 41

1. 들어가는 말 - 空과 倫理는 갈등하는가?

2. 倫理의 空觀的 근거

   ⑴ 敎理的 근거 - 世俗諦

   ⑵ 論理的 근거 - 自他平等과 離苦得樂

3. 空과 倫理의 구조적 동질성

   ⑴ 空의 역설적 구조 - 自家撞着

   ⑵ 倫理의 역설적 구조 - 因果應報

   ⑶ 空과 倫理의 合一 - 同體大悲

4. 空에 대한 네 가지 이해와 倫理

   ⑴ 我有法有 - 僞善的 윤리

   ⑵ 我空法有 - 형식주의적 소승윤리

   ⑶ 我有法空 - 막행막식적 非윤리

   ⑷ 我空法空 - 無住相的 대승윤리

5. 끝맺는 말 - 空은 진정한 倫理를 산출한다

 

 

 

 

 

 

 

 

 

 

 

 

 

 

 

 

 

 

 

 

 

 

 

 

 

 

 

 

 

 

 

 

 

 

 

 

 

 

Ⅰ. 中觀論理란?

 

 

 

 

1. 中觀論理의 宗敎性

 

 

論理를 통해 종교적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中觀論理에 있다. <中觀論理>, 또는 <空의 論理>란, 인간의 논리적 사유의 타당성을 비판하는 <反論理>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구사하는 갖가지 개념들의 실체성을 해체시키는 <涅槃의 論理>이다.

우리는 다양한 개념들로 이루어진 생각과 언어를 통해 인생과 세계를 바라보며, 그렇게 해서 형성된 자기 나름대로의 世界理解에 토대를 두고 삶을 영위한다. '나의 영혼은 몸 속 어딘가에 있어서 나를 움직인다', '나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귀로 소리를 듣는다', '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죽으면 이 세상 밖 어딘가로 떠나간다', '나와 남은 다르다', '이 세상은 조물주가 만들었다.' … 이런 관점들은 은연중에 개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고, 각 時代精神의 교육을 통해 구성된 것일 수도 있으며, 특정 종교에서 주입하는 神話構造에 의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관점들이 누적됨으로써 형성된 한 개인의 人生觀이나 世界觀[= 見: d i]은,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一生을 살아가게 해 주는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다른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를 끝없는 윤회의 浮沈 속에 얽어매는 속박의 사슬인 것이다.

또, 우리는 언어와 생각을 이용하여 인생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한다. '나는 어째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지금 이렇게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는 찬란한 이 삶은 어째서 소멸해 버려야 하는 것일까?' 有史以來 수많은 종교가와 철학자들은 이런 형이상학적 고민[= 難問]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해답은 각양각색[= 戱論]이었으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해답의 차이로 인해 새로운 갈등을 야기한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대부분의 갈등은 각 개인들의 세계관의 차이에 起因하는 것이며, 각 세계관들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보다 포괄적인 관점을 형성함으로써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종합 역시 하나의 관점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갈등의 因子를 胚胎하고 있는 것이다. <중관논리>에서는, 갈등하는 양측을 위해 제3의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거나, 다양한 철학적 물음에 토대를 두고 그에 대해 어떤 해답을 내려 주지는 않는다. 그런 세계관과 철학적 고민을 만들어 낸 우리의 생각에 내재하는 본질적 모순을 지적해 줌으로써 갈등과 고민 자체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즉, 제시된 문제에 토대를 두고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의 문제 자체가 거짓되게 구성된 것이었음을 자각케 하여 그 문제 자체를 해소시킨다[= 戱論寂滅]. 즉, 해체시켜 열반에 들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세계관[= 邪見]의 갈등과 철학적 고민[= 難問]에 대한 진정한 해결법이며, 불교적 방법의 본질이기도 하다.

 

 

 

2. 中觀論理의 構造

 

 

우리는 논리에 의해 사유하며, 논리는 <개념>과 <판단>과 <추리>로 이루어져 있다. 개념이 설정되면, 그런 <개념>들을 연결하여, '무엇이 어떠하다'는 하나의 <판단>이 작성되고 그런 판단들을 조리 있게 배열하면, 三段論法(syllogism)과 같은 <추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우리는 논리를 통해 어떤 문제에 대한 합당한 결론이나 이론을 도출해 낸다. 그러나 反-論理인 <中觀論理>에서는 <개념>의 독립적 실재성[= 有自性, 法有]을 비판하고, 그런 개념들을 결합하여 構成해 내는 <판단>에 내재하는 본질적 모순[= 二邊]을 지적하며, 그런 판단들에 의해 築造된 <추론>의 부당성을 力說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反論理的 비판 과정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어 있는 논서가 바로 龍樹의 『中論』인 것이다. 『中論』에서는, 특히 아비달마(Abhidharma) 불교의 衒學的 哲學體系에서 實體視하던 갖가지 개념들[= 法數]을 대상으로 삼아 반논리적 비판 작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런 비판 작업의 토대는 初期佛典에 등장하는 緣起說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公式으로 표현되는 연기설의 還滅門이다. 이를 통해 갖가지 <개념>들의 실체성이 해체되기에, 그런 <개념>들의 결합에 의해 구성되는 <판단>에서 논리적 오류가 도출될 수 있다.

緣起公式에서 말하는 <이것>과 <저것>에는,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과 같은 價値개념은 물론이고, <연료>와 <불>과 같은 存在개념, <눈>과 <시각대상>과 같은 認識개념, <주체>와 <작용>과 같은 體用개념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모든 개념쌍들이 대입될 수 있다. <더러운 것>이 없으면 <깨끗한 것>도 없으며, <연료>가 없으면 <불>도 없고, <눈>이 없으면 <시각대상>도 없으며, <주체>가 없으면 <작용>도 없다. 따라서, <더러운 것>이나 <불>, <눈>, <주체>등은 결코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空의 이치이다. <더러운 것>은 항구불변하는 실체가 없기에[= 無自性: ni svabh va] 空( nya)하고, <불>도 독립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空하며, <눈>도 空하고 <주체>도 空하다. 五蘊이나 六界, 涅槃과 如來등 敎學的 개념들은 물론이고,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은 그 독립적 實體[= 自性: svabh va]가 없기에 空하다.

따라서, 이런 空한 <개념>들을 결합하여 구성하는 갖가지 <판단>들 역시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卑近한 예를 들어보자. '비가 내린다'는 體用판단의 경우, <비(主體)>가 없으면 <내림(作用)>도 없으며, <내림>이 없으면 <비>도 없는 것이기에[= 還滅緣起的 토대], '비'라는 主語와 '내린다'는 述語를 분할[= 分別: vikalpa]하게 되면 논리적 오류에 빠지고 만다. 즉, <비> 속에 <내림>이라는 술어의 의미가 들어 있을 수도 없고 들어 있지 않을 수도 없다.

먼저, '비'라는 주어에 '내린다'는 술어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보면 '비가 내린다'는 말은 '<내리는 비>가 내린다'는 말이 되고 만다. 즉, '비'라고 말을 하는 순간 이미 내리고 있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 다시 '내린다'는 술어를 부가하여 '비가 내린다'는 말을 하게 되니, 내리는 것이 두 개인 '중복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第1句的 이해 비판, 因中有果論的 常見 비판]. 그렇다고 해서, '비'라는 主語에 '내린다'는 述語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고 보게 되면,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는 말이 되는데, 이 세상 어디에도 내리지 않는 비는 없다. '비'라고 말을 하면 내리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第2句的 이해 비판, 因中無果論的 斷見 비판].

서구논리학에서는 <개념>을 연결하여 만들어지는 <판단>의 종류를 두 가지로 나눈다.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이 그것이다. 주어의 의미 속에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판단이 분석판단이며, 그렇지 않은 판단이 종합판단이다. 그러나 중관논리에서는 판단에 대한 그런 구분의 타당성을 모두 비판한다. '비가 내린다'는 판단을 분석판단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위에서 말했듯이 '중복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종합판단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분할 불가능한[= 不二] 사태를 두 개의 개념으로 분할한 후, 그 개념쌍을 연결하여 구성되는 인간의 모든 판단들은 필연적으로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판단들의 사실성은 해체된다.

마지막으로 <추리론>의 경우, 중관논리에서는 적대자가 추론을 통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면, 그와 동등한 타당성을 갖는 상반된 추론식을 제시함으로써 적대자가 구성한 추론의 절대적 타당성을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내세운 추론식을 신봉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空 사상을 비판하는 적대자가 '모든 것이 空하다면 四聖諦는 없다'라고 假言推理 형식의 추론을 구성하는 경우, 龍樹는 '모든 것이 空하지 않다면 四聖諦는 없다'고 상반된 추론식을 제시함으로써 상대의 주장을 논파한다[『中論』 第24 觀四諦品].

그러면 중관논리에서 이렇게 <개념>의 독립적 실재성과 <판단>의 사실적 대응성과 <추론>의 절대적 타당성을 비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우리는 언어와 생각에 의해 구성된 자기 나름의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형이상학적 고민을 하며, 우리의 언어와 생각은 <개념>과 <판단>과 <추론>을 이용해 논리적 방식으로 구사된다. 따라서, 그런 고민들을 야기한 논리적 방식의 본질적 허구성이 폭로될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가장 간단히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고민을 야기한 세계관 자체가 허구였음이 판명되면 그로 인해 야기된 형이상학적 고민 역시 허구로 귀결될 것이다. 中觀的 反-論理에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소시킨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들었던 철학적 고민들 중, '지금 이렇게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는 찬란한 이 삶은 언젠가 소멸해 버리고 말 것이다'라는 판단이 야기하는 비장한 느낌은, 체험할 수도 없고 체험한 적도 없는, 死後의 <無>를 임의로 설정함으로써 발생되는 거짓된 實存感일 뿐이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판단은, 인생을 떠나 <내>가 실재한다는 착각에 토대를 둔 그릇된 感傷이다. 또, '나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판단은 <보이는 대상>과 관계없이 <보는 작용>인 눈이 실재한다는 세계관에 토대를 둔 실재론적 陳述인 것이다. 즉, 그런 의문들과 관점들은 사물의 眞相에 토대를 두고 구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思考가 世界를 제멋대로 裁斷[= 分別]한 후 조작해 낸 허구적 의문이고 관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 허구성을 자각하게 되면 문제 자체가 해소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다. 그 결과 '현실의 이 삶이 새삼스럽게 찬란할 것도 없고[∵ <無>가 없으면 <有>도 없기에], 이 세상에 태어날 주체가 따로 있던 것도 아니며[∵ <세상>이 없으면 <나>도 없기에], 눈이 따로 있어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대상>이 없으면 <눈>도 없기에]'라는 實相을 자각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실상은 無相의 實相이다. 無라는 相이 있는 實相이 아니라 相이 無한 實相이란 말이다. 그런 모든 感傷과 疑問들은 우주와 인생의 정연한 이치인 <緣起實相>을 위배하고 우리의 생각에 의해 문제가 되는 事態를 분할[= 分別]했기 때문에 발생된 거짓 판단들인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떤 事態건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 不二]. 왜냐하면 '모든 것은 緣起的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적 고민이나 갈등이 있는 경우, 中觀論理的 분석 과정을 통해 그런 고민과 갈등을 야기한 갖가지 세계관을 하나하나 해체함으로써[= 苦의 止滅, 擇滅(無爲)] 우리는 마음의 平安을 얻게 된다. 初期佛典의 <無記說>의 취지는, 붓다(Buddha)가 14가지(혹은 10가지) 철학적 문제[= 難問]에 대해 침묵을 한 후, 四諦나 五蘊, 十二緣起등을 說示함으로써 애초의 그런 의문을 구성한 사고 방식을 치료한다는 데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서도 14難問이나 62見등의 邪見을 일으킨 癡心에 대한 치료법으로 緣起觀法을 제시한다. 그리고, 邪見에 대한 이런 치료 과정을, 붓다의 교법을 대하는 一部 아비달마 논사들의 實在論的 태도(realistic attitude)에 적용하여 보다 정밀하게 재현해 낸 논서가 바로 龍樹의 『中論』인 것이다.

 

 

 

3. 中觀論理의 正當性에 대한 解明 - 『廻諍論』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중관논리에서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還滅 緣起에 토대를 두고, 우리의 思惟의 도구인 <개념>의 실재성과 <판단>의 사실성, <추리>의 타당성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그 결과, '모든 사물은 自性(svabh va)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성에 대해 그렇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中觀論師 역시 개념을 이용하여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는 판단을 작성해 내야하고, 어떤 <이유>를 들어 그런 판단을 주장하는 추론을 구성해야 하며, <언어>를 통해 이를 표출한 후, 그런 사실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언어>와 <이유>와 <인식>의 실재성, 즉 自性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는 판단은 진리로서의 보편타당성을 상실하고 마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자성이 없는 모든 사물의 범위 중에서 <언어>와 <이유>와 <인식>등은 제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廻諍論』에서 적대자인 실재론자(realist)는 空思想이 봉착하게 되는, 바로 이러한 自家撞着을 지적하고 있다. 실재론자가 제시하는 논박들을 유사한 성격끼리 묶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말소리도 공해야 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제1, 2송).

②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사실을 아는 인식은 실재해야 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제5, 6송).

③ 모든 것이 공하다면 공이라는 이름은 실재해야 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제9송).

④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부정의 대상은 존재해야 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제11, 12송).

⑤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에 대한 이유도 공해야 하기에 그런 주장은 부당하다(제17, 18, 19송).

 

이에 대한 용수의 답변을 통해, 우리는 '自性이 없다'거나 '空하다'는 언명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 먼저 용수는 空 사상이 봉착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다. 적대자가 말하듯이, 용수는 '모든 것이 자성이 없다'는 <말>도 자성이 없으며, <인식>이나 <이름>, <부정의 대상>, <이유> 모두가 그 자성이 없다는 점을 시인한다.

서구논리학에서도 역설의 발생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럿셀(Russell)의 階型理論(type theory)이나 타르스키(Tarski)의 二種言語論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 이들은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는 말은 제2계의 언어라거나 메타-언어(meta-language)라는 규정을 가함으로써 역설적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보편타당성을 상실한 恣意的인 해결일 뿐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역설적 상황에서, 우리가 언제나 럿셀이나 타르스키와 같은 방식의 대처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금지' 라는 글귀를 예로 들어보자. 이는 역설적 상황이다. 낙서금지라는 낙서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계형이론이나 이종언어론에서는, '일반적인 낙서'와 '낙서금지라는 낙서' 사이에 선을 그음으로써 역설적 상황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선을 긋는다고 하여 '낙서금지'라는 글씨에 의해 더럽혀진 담벼락이 깨끗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낙서금지라는 말은 결코 쓸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낙서금지라는 말이 쓰여지는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첫째는 깨끗한 담벼락에 그 어느 누구도 낙서를 하지 않는 상황인데 집주인이 다짜고짜 낙서금지라는 글을 큼직하게 써 놓는 경우이고, 둘째는 낙서가 잘못된 것이라는 죄의식 없이 동네 어린 아이들이 낙서를 하는 경우 집주인이 그것을 막기 위해 한 구석에 '낙서금지'라는 글을 써 놓는 경우이다. 전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집주인의 행위는 분명 자가당착적 역설에 빠진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나 후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낙서금지'라는 글귀는 역설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다른 낙서를 억제하는 작용을 할 수가 있기에 그 가치가 인정된다. '모든 사물은 자성이 없다'는 <空의 敎說>이 빠지게 되는 역설에 대한 『廻諍論』의 해명 역시 그 구조가 이와 동일하다. 幻覺의 女人을 진짜 여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 붓다의 神通力으로 만들어진 환각의 사람이 그런 착각을 제거해 주듯이, 또 집에 데와닷따(Devadatta)가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집에 데와닷따가 없다'고 말해 줌으로써 잘못된 생각을 시정해 주듯이, 모든 사물에는 自性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自性이 있다'고 착각하기에, 空한 <空의 敎說>을 통해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고 말하여 사물의 진상을 알려 주는 것이다. 즉, 自家撞着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先行하는 잘못이 있는 경우에 그에 대응하여 發話되는 것이 空 사상의 言明이다. 이는 應病與藥의 구조이다. 病이라는 先行條件이 있기에 藥을 주는 것이다. 成道 후 梵天 勸請의 神話가 이를 대변하듯이 붓다의 교설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응병여약적 구조를 갖는다.

龍樹는 『廻諍論』을 통해 불교적 교설의 응병여약적 성격을 논리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자성이 없다'는 말이 단순한 주장이라면 이는 역설에 빠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물의 진상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사물에 자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 이를 시정해 주기 위해 그 말이 발화된 것이라면 이는 정당할 수 있다. 마치 죄책감 없이 낙서가 자행되고 있던 담벼락 한 쪽에 쓰여지는 <낙서금지>라는 낙서와 같이….

 

 

 

 

 

 

 

 

 

 

 

 

 

 

 

 

 

 

 

 

 

 

 

 

 

 

 

 

 

 

 

 

 

Ⅱ. 逆說(paradox)과 中觀論理

 

 

 

 

1. 逆說이란?

 

 

그리스(Greece) 남쪽 바다 한 가운데에 크레타(Creta)라는 섬이 있다. 이 크레타 섬은 해상 무역의 중심지이기에 그 주민들은 대부분 장사꾼들이다. 그 주민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말도 크레타 사람이 한 것이기에 '이 말도 거짓말이라면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어야 하고 이 말만은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 말은 거짓말이어야 한다.' 이것이 逆說(paradox)이다.1) 이는 근세 서양 철학자 럿셀(Russell: 1872-1970)이 고전적 집합론에서 발생하는 역설(paradox)2)을 설명하면서 함께 들었던 例로 이 말을 한 당사자의 이름을 따서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서구의 논리철학자들은 이 이외에도 다양한 역설들을 고안해 낸 바 있다. '他敍的(heterological)'이라는 형용사가 타서적인지 여부를 묻는 데서 발생하는 그렐링(Grelling)의 역설(1908)3), 우편엽서의 역설4), 리샤르(Richard)의 역설(1905년)5), 베리(Berry)의 역설(1906년)6), 부랄리-포르티(Burali-Forti)의 역설7), 칸토르(Cantor)의 역설8)등이 그 예들이다.

그런데 논리철학자나 수학자들이 고안한 위와 같은 예들 이외에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는 역설적인 發話나 상황을 흔히 경험하게 된다. 이를 나열해 보자.

 

아이들이 떠드는 교실에서 한 아이가 "떠들지 마"라는 소리를 내는 것9).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금지"라는 문구10).

사람이 붐비는 백화점에서 "집에나 있지, 왜들 나와?"라고 짜증을 내는 것.11)

 

이런 역설적 상황이나 發話 행위들을 접할 경우, 이를 전혀 포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역설적 성격을 포착하여 "사돈 남말 하네!"라는 속담을 들어 비판을 가하는 경우도 있고, 그것들이 역설에 빠진 言行인줄 알면서도 그런 역설적 言行者들의 의도에 그대로 순응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일상 생활 속에서 역설적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다양한 태도는, 더 나아가면 역설에 대한 논리철학적 해결 방안에 그대로 대응된다.12) 따라서 역설과 그 해결 방안의 문제란, 비단 수학이나 철학 이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전반에 걸쳐 우리가 항상 접하며 대처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서양철학사 내에서도 역설적 상황이 철학자 자신의 입지를 궁지로 몰고 간 예들이 많이 발견된다. 명제(proposition)의 철학적 사용을 비판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철학의 자가당착13), 로고스中心主義(logocentricism)的 西歐思想史를 해체(deconstruction)시키고자 하는 데리다(Derrida) 자신의 로고스14)에서 보듯이, 逆說(paradox)이란 인간이 보편타당한 철학을 정립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빠지게 되는 딜레마(dilemma)로, 단순히 철학자 자신의 논리 전개 과정의 결함으로 인해 惹起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논리를 전개하여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인간의 선천적(a priori) 사유 구조의 한계에 기인한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禪家의 수많은 명제들 역시 구조적으로 역설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자를 세우지 말아라(不立文字)", "입만 열면 그르친다(開口卽錯)", "마음을 비워라(無心)", "욕심을 내지 말라(無慾)", "모든 집착을 다 내려 놓아라(放下着)"등의 말들 역시 모두 역설을 발생시킨다. 즉,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것 자체가 문자를 세운 것이고, <입을 열면 그르친다>고 입을 열었으며, <마음을 비우라는 생각>이 다시 마음을 채우게 되고,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욕심을 내게 되며, <모든 집착을 내려놓겠다>는 집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학적, 논리적, 철학적 영역은 물론이고, 우리들의 일상 생활이나 종교적 분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사고가 미치는 모든 영역에서 역설(paradox)적 상황이 발생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확립자 龍樹(N g rjuna: 서력 기원 후 150∼250경)의 논서를 보게 되면 도처에서 이런 逆說(paradox)과 유사한 구조의 논법을 이용하여 토론 상대자를 논파하는 것이 발견된다.

 

 

 

2. 龍樹의 論書에서 발견되는 역설적 상황

 

 

그러면 龍樹가 토론 상대자의 주장에서 이런 역설적 상황을 포착해 내어 논파하는 실례를 들어 보겠다.

 

만일 존재하고 있는 것만이 부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空性적 부정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그대는 '[空性的 부정인] 사물에 自性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15)

 

만일 그대가 空性을 부정하고, 또 그런 空性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부정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그대의 이런 말은 파괴된다.16)

 

즉, 적대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이 부정될 수 있는 법이니 自性이 없는 것을 부정하는 龍樹의 논의는 옳지 못하다"17)는 의미의 비판을 가하자 이를 재비판하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역설의 논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존재하는 것만이 부정되는 법이라면 空性에 대한 그대의 부정 역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일 테니 그대의 부정 대상인 空性은 존재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또, 그와 반대로 空性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존재하는 것만이 부정된다'는 애초의 그대의 주장은 훼손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실재론자의 원 주장: 부정이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가능하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대의 부정은 옳지 않다.

* 龍樹의 반박: 옳지 않다는 그대의 부정 역시 옳지 않다.

① 옳지 않다는 그대의 부정이 타당하려면, 그대의 부정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정>이어야 한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정>은 존재해야 하기에 그대의 주장은 오류에 빠진다.

② 그와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는 그대의 부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만 가능하다는 그대의 주장에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그대의 주장은 오류에 빠진다.

 

이는, 상대의 비판 역시 그런 비판의 대상에 속하기에 상대의 비판은 오류에 빠진다는 것으로, <자기 부정을 포함하는 전체>18)라는 구조를 갖는 전형적 역설을 이용한 비판 논법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龍樹의 저술로 포장되어 있는 『大智度論』19)을 보게 되면 붓다 자신도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이용하여 상대를 비판하였음을 알게 된다. 舍利弗의 外叔인 長爪梵志를 교화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사리불의 출가에 분개한 長爪梵志는 붓다와 대면하게 되자 자신은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一切法不受)"고 주장하게 되는데 그에 대해 대응하면서 붓다는 역설(paradox)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인용해 보자.

 

<長爪梵志>: 고따마여, 나는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

<붓다>: 장조여, 그대가 말하는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런 견해는 인정하는가?

<長爪梵志>: 고따마여,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런 견해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붓다>: 그대가 말하는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런 견해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정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꼴이니 뭇사람들과 다를 게 없는데 어째서 스스로 뽐내면서 잘난 체하느냐?20)

 

즉, "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만은 인정한다면 "그 어떤 법"이라는 주어의 범위에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오류에 빠지고, 그와 반대로 그런 주장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내세운 주장을 파기하는 꼴이 되니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처럼 龍樹는 물론이고 전통적으로 불교 내에서는 이러한 역설(paradox)을 이용하여 적대자를 논파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예는 전형적 역설 구조는 아니지만 크링키(Kripke)가 소개한 최소의 고정점(fixed-point)을 갖지 못하는 근거 없는(non-grounded) 개념을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21) 『中論』 第7 觀三相品을 보자.

 

生, 住, 滅에 있어서 또다른 유위법의 相이 있다면 그야말로 무한하게 된다. (반대로) 만일 없다면 그것들(=생, 주, 멸)은 유위법이 아니다.22)

 

아비달마 논사들은 生, 住, 滅의 三相이 유위법 중 心不相應行法에 속하며 그와 동시에 모든 유위법은 三相의 특징(lak a a)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즉, 諸行은 無常하기 때문에 그 어떤 유위법이건 생겨나면(生) 머물다가(住) 소멸하고(滅)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paradox)이 발생한다. 아비달마 이론에 의하면 生, 住, 滅은 모두 무상한 유위법에 속하므로 生, 住, 滅 자체도 다시 생, 주, 멸의 三相을 띠어야 한다. 또, 그런 생, 주, 멸의 三相 역시 유위법이기에 다시 생, 주, 멸의 삼상을 띠어야 하며 결국 무한한 삼상이 필요하게 된다. 무한소급은 논리적 오류이다. 즉, 그 정체성(identity)의 확립을 위해 무한소급을 야기하는 개념은 최소의 고정점(fixed-point)을 갖지 못하는 근거 없는(ungrounded) 개념이다. 그와 반대로 생, 주, 멸이 다시 삼상의 특징을 갖지 않는다면 생, 주, 멸은 유위법의 범위 밖에 있는 꼴이 되어 애초의 아비달마적 주장을 훼손시킨다.23)

다른 예를 들어 보자. 龍樹는 『廣破論(Vaidalyaprakara a)』 제4절과 『廻諍論(Vigrahavyavartani)』 제32, 33송을 통해, "근거 있음(groundedness)"의 不在를 근거로 들어 <인식 수단(pram a: 量)>의 실재성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廻諍論』의 비판을 인용해 보자.

 

실재론자의 원 주장: 모든 대상은 <인식 수단>을 통해 확립된다.

龍樹의 반박: 그런 <인식 수단>은 무엇에 의해 확립되는가?24)

① 만일 다른 인식 수단에 의해 인식 수단이 성립하게 된다면 이는 무궁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는 최초의 성립도, 중간도,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25)

② 그것[=인식 수단]이 만일 인식 수단 없이 성립한다면 論議는 깨어진다. 거기에 불일치함이 있다. 또, 특별한 이유가 말해져야 한다.26)

 

전형적 역설은 아니지만 이렇게 역설적 상황을 이용하여 상대의 주장을 논파하는 예가 龍樹의 논서 도처에서 눈에 띤다. 아니 더 나아가 이러한 역설 구조 자체는 龍樹의 논법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中觀論理와 逆說의 구조

 

 

<中觀論理>는 한 마디로 <四句 批判의 論理>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27) 그런데 이러한 中觀論理의 구조는 역설의 논리적 구조와 동일하다.

먼저 역설의 논리적 구조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어떤 크레타 사람이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장이다."라는 말을 할 경우 이 말도 크레타 사람에 의해 발화된 것이기에 이 말이 거짓말이라면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장이가 아니어야 하고, 그와 반대로 이 말만은 참말이라면 예외가 하나 있는 꼴이 되어 "모두"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발화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크레타 사람들"이라는 主語에 이 말을 한 당사자가 <내포(inclusion)>되어 있기에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그와 반대로 이 말을 한 당사자만은 주어의 의미에서 <배제(exclusion)>되어 있다면 사실에 위배되기에 예외가 발생하는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지 않는 보통 집합들의 집합은 보통 집합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는 특수 집합인가?'를 묻는 <집합론의 역설>의 경우도 위와 마찬가지로 <내포>와 <배제>의 딜레마(dilemma)에 빠져 있다. 즉, <보통 집합들의 집합> 역시 보통 집합에 내포될 수도 없고 배제될 수도 없는 것이다. <보통 집합들의 집합>이 보통 집합에 내포된다면 특수한 집합으로 배제되어야 하고, 그와 반대로 보통 집합에서 배제되는 특수한 집합이라면 보통 집합에 내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앞 장에서 예로 들었던 생, 주, 멸 三相에 대한 비판과 인식 수단에 대한 비판은 "근거 있음(groundedness)"의 不在를 통해 상대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법이기에 전형적 역설 논법은 아니지만 그 구조는 역설의 논리적 구조와 동일하다. 인식 수단의 예를 들 경우, 인식 수단이 모든 대상을 확립시킨다면 그런 인식 수단 역시 모든 대상에 <내포>되어야 하기에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지게 되고 그와 반대로 <배제>시키면, 예외를 인정하게 되니 애초의 주장이 훼손되고 마는 것이다. 즉, 전형적 역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포>시킬 수도 없고 <배제>시킬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中論』을 보면 龍樹가 실재론적 세계관을 논파하는 많은 게송들도 이러한 논리 구조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가는 작용'이 없는 '가는 자'가 실로 성립하지 않는다면 '가는 자'가 간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中論』, <2-9>)28)

 

만일 '가는 자'가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둘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자'라고 말하는 것과, 존재하는 '가는 자', 그 자가 다시 간다는 사실에 의해서.(『中論』, <2-10>)29)

 

가는 자가 간다고 하는 주장, 그런 주장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작용 없이 가는 자가 있고 (또 그) 가는 자의 가는 작용을 추구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中論』, <2-11>)30)

 

여기서 <2-9>의 게송과 <2-11>의 게송은 동일한 논리 구조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양자가 함께 <2-10> 게송의 논리 구조에 대립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2-10>은 <내포의 오류>를 노래한 게송이고 <2-9>와 <2-11>은 <배제의 오류>를 노래한 게송이다. "가는 자가 간다"는 분별이 있을 경우 "간다"는 술어(predicate)의 의미가 "가는 자"라는 주어(subject)의 의미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에 <가고 있는> 가는 자가 <다시> 간다는 말이 되어 감이 두 번 중복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비판을 기술한 것이 <2-10> 게송이고, 그와 반대로 <간다>는 술어의 의미가 배제된 <가지 않는> 가는 자가 <어딘가에 있어서 그 자가> 간다고 보는 경우에는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원 문장: 가는 자가 간다.

第一句31)적인 이해: 가고 있는 가는 자가 간다

               → 주어와 술어에 각각 두 개의 감이 있게 된다.

第二句적인 이해: 가지 않는 가는 자가 간다

               → 주어가 성립될 수 없다.

 

이를 좀 더 쉬운 예에 대입하여 설명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일상 생활 가운데 "비가 내린다"는 문장을 스스럼없이 사용한다. 그러나 이 명제는 "가는 자가 간다"는 명제와 동일한 논리적 오류에 빠져 있다. 이 문장은 "비"라는 主語(subject)와 "내린다"는 述語(predicate)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라는 주어에는 이미 "내린다"는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내리지 않는 비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가 내린다"는 말을 할 경우 내리고 있는 비에 대해 다시 내린다는 표현을 쓰게 되니 비가 두 번 내리는 꼴이 된다. 마치, 꿈을 꾼다고 말을 하면 꿈을 두 번 꾸는 꼴이 되고 얼음이 언다고 말을 하면 얼음이 두 번 어는 꼴이 되듯이. 그렇다고 해서 그와 반대로 "비"라는 주어에 "내린다"는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면 내리지 않는 비가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사실에 위배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 문장: 비가 내린다.

第一句적인 이해: 내리고 있는 비가 내린다.  

              → 비가 두 번 내리는 꼴이 된다.

第二句적인 이해: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 내리지 않는 비는 그 어디에도 없다.

 

龍樹는 『中論』을 통해 '가는 자가 간다'는 명제 이외에도 수많은 명제들을 이와 동일한 구조에 의해 논파하고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도 동어반복적 중복의 오류가 지적되고 있다.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한다면 성립된 불이 (또다시) 성립(되는 꼴이)된다. 이와 같은 존재라면 불 없는 연료 역시 존재하리라.32)

 

이는 불과 연료의 관계에 대한 第一句的인 이해에 내재하는 오류를 지적하는 게송으로 '불이 연료에 의존하여 성립한다'는 진술의 경우 '불'이라는 주어를 發話한 순간 이미 '불'이 성립되어 있어야 하므로 그것이 '연료에 의존하여 성립한다'고 하게 되면 불이 두 번 성립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事態(fact)에 대한 第二句的인 이해에 내재하는 오류를 지적하는 게송들은 다음과 같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다면 能見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能見이 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할 수 있겠는가?33)

 

어떤 無相의 존재도 어디에건 존재하지 않는다. 無相인 존재가 없다면(=일체가 相을 갖고 있다면) 相은 어디서 (없다가 생기는 식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34)

 

만일 苦가 個體 스스로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면, 그렇다면 苦를 스스로 짓는 어떤 個體가 苦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겠는가?35)

 

'能見이 본다', '존재가 相을 띤다', '어떤 개체가 苦를 짓는다'는 판단을 하는 경우, 보기 전에는 能見은 존재할 수 없고, 相을 띠기 전에는 그 어떤 존재도 무의미하며, 五陰盛苦와는 별도의 개체가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을 함으로써 그런 모든 판단들이 오류에 빠져 있음을 지적해 내는 것이다.

이렇게 中觀論理에서는 어떤 사태에 대해서건 第一句적인 분별을 해도 오류에 빠지고 第二句적인 분별을 해도 오류에 빠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어떤 문장이건 <주어>의 의미 속에 이미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에 그 문장을 발화한 순간 <술어>의 의미가 <중복>되는 오류에 빠지며, 그와 반대로 <술어>의 의미를 <주어>의 의미에서 <배제>시킨다면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고찰해 보았던 역설(paradox)의 논리적 구조와 일치한다. 즉, 어떤 하나의 事態에 대해 언급하면서 분별해 낸 두 개념 쌍을 상호 연관시키게 되면, 어느 한 쪽이 이미 다른 한 쪽을 <내포>하고 있기에 오류에 빠지게 되고, 그와 반대로 어느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이 <배제>되어 있다면 그 어느 한 쪽의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大智度論』에 등장하는 <長爪梵志의 오류>와, 『廻諍論』의 <인식 수단의 오류> 및 『中論』의 <가는 작용의 오류>의 논리적 구조를 상호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장조범지의 오류: [전형적 ]역설(paradox)>

{원 주장}: 나는 그 어떤 이론(法)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포의 오류}: 원 주장도 하나의 이론이기에 원 주장 역시 성립하지 않아야 하기에 오류에 빠진다.

{배제의 오류}: 원 주장만은 이론이 아니라면 사실에 위배되는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원 주장은 오류에 빠진다.

 

<인식 수단의 오류: 근거의 부재(ungroundedness)>

{원 주장}: 인식 수단은 모든 것을 확립시킨다.

{내포의 오류}: 그런 인식 수단 역시 인식 수단에 의해 확립되어야 하기에 제2, 제3, …의 인식 수단이 필요하게 되어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진다.

{배제의 오류}: 인식 수단만은 그 스스로 확립되는 것이라면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원 주장은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작용의 오류: 동어반복(tautology)>

{원 주장}: 가는 자가 간다.

{내포의 오류}: 간다는 작용을 갖는 가는 자가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두 개 있게 되는 오류에 빠진다.

{배제의 오류}: 간다는 작용을 갖지 않는 가는 자가 간다면 사실에 위배되기에 오류에 빠진다.

 

 

 

4. 逆說的 상황이 惹起되는 이유

 

 

그러면 위와 같은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럿셀(Russell)은 '自己-指稱(self-reference)'36)이라고 말하며, 이런 자기-지칭으로 인해 일종의 惡循環(vicious-circle)이 야기된다고 주장한다.37)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의 경우, 다른 모든 크레타 사람은 물론 이 말을 한 당사자인 에피메니데스 역시 이 말의 지칭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자기지칭적이라고 해서 모두 역설에 빠지는 것은 아니며 역설에 빠진다고 해서 모두 자기지칭적인 것은 아니라고 럿셀의 주장을 비판한다. 즉,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와 같은 문장은 자기지칭적인 문장이지만 역설에 빠지지 않으며, '우편엽서의 역설'38)과 같이 자기지칭적이 아닌 경우에도 역설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39) 그러나 엄밀히 분석해 보면 이런 예들도 철저한 의미에서 자기지칭적 역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는 자기지칭적인 문장은 물론이고, 하나의 사태(fact)를 주어(subject)와 술어(predicate)로 구분하여 발화되는 모든 문장들은, 전형적 역설은 아니지만, 앞 장에서 예로 들었던 <同語反覆(tautology)的 逆說>을 야기한다. 즉, '<가는 자>가 <간다>'와 같이 위의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진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는 동어반복적인 문장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외견상 자기지칭적이지 않은 듯이 보이는 <꽃이 핀다>는 문장 역시 <피어 있는 꽃이 핀다>는 식의 동어반복적 문장이다. 칸트(Kant)의 術語를 빌려 표현하면, 이 문장은 종합판단이 아니라 분석판단인 것이다. 中觀的으로 眺望해 보면 칸트가 말하는 종합판단도 일종의 분석판단일 뿐이다.40) 칸트는 '모든 물체는 延長的이다'와 같은 명제는 분석판단이고,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와 같은 명제는 종합판단이라고 설명한다.41) 그러나 『中論」 第2 觀去來品 第11偈에 대한 月稱(Candrak rti)의 설명을 보면 칸트가 말하는 종합판단도 분석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中論」 第2 觀去來品 第11偈에서 龍樹는 '가는 자가 간다'는 명제는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진다[두개의 가는 작용이 있게 됨]는 의미의 설명42)을 하고 있는데 적대자는 이 게송을 비판하면서 '그러면 데바닷따가 간다'고 하면 된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月稱(Candrak rti)이 다음과 같이 재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인용해 보자.

 

[문] 여기서 이제 묻는다. 가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데바닷따가 간다'고 하는 표현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는 작용은 존재한다.

[답]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데바닷따에 의지하여 [다음과 같은] 이런 생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대체 [다음의 세 가지 중] 어떤 것인가? [①] 존재하는 가는 자가 가는 것인가, [②]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는 자가 가는 것인가, [③] 아니면 그런 두 가지와 다른 그 어떤 자가 가는 것인가? 그런데 이 모든 경우 중 그 어떤 것도 불합리하다.43)

 

즉, '가는 자가 간다'는 분석판단의 동어반복적 외형을 지우기 위해, 적대자는 이를 '데바닷따가 간다'는 식의 종합판단으로 바꾸었지만, 이는 '가는 데바닷따가 간다'는 의미이어야 하기에, 위와 같은 논리에 위해 비판받게 되며, 결국 분석판단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분석판단 역시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사실 종합판단, 또는 경험적 판단이란 <실재론(Realism)>적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즉, 하나의 事態(fact) 속에서 각각의 개념(conception)들이 독립적인 실체성을 갖고 관계한다는 세계관이 前提되어야 <종합판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각의 개념들이 엄정한 線에 의해 오려질 수 있어야 그렇게 오려진 개념들을 서로 관계시켜 경험적 판단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태 내의 개념들은 그렇게 분할되지 않는다. 우리의 눈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다고 하자. 그런 하나의 사태(fact)를 어떻게 <가는 자>와 <가는 작용>으로 오려낼(scissor out) 수 있겠는가? 즉, 分割(partition) 또는 分別(vikalpa)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는 명제는 '무게를 갖는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는 분석판단일 뿐이고,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는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진 이 문장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는 동어반복(tauotology)적인 분석판단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지칭적이긴 하지만 역설에 빠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비판의 경우, 그 때 말하는 역설이 서구논리학적에서 말하는 전형적 역설이라면 타당할지 몰라도, 중관적 조망 하에서 본다면 부당한 비판이다. 이와 같이 자기지칭적인 문장은 물론이고,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모든 문장들이 동어반복적인 분석판단인 것이다. 즉, 주어의 의미에 이미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판단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하나의 사태에 대한 판단은 술어를 이미 지칭하고 있는 주어가 다시 술어와 조합되는 것이기에 외견상 자기지칭적이지 않은 문장도 그 의미 구조는 자기지칭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지만 자기지칭적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을 야기하지 않는 사태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집합이 그것이다. 집합은 '도시의 집합'이나 '사람의 집합'과 같이 그 집합 전체는 그 원소에 포함되지 않는 집합도 있고 '도서관의 장서 목록'과 같이 자기 자신도 그 원소에 포함되는 집합도 있다.44) 여기서 후자의 성격이 자기지칭적이다. 어떤 도서관에 있는 장서들의 이름을 모두 기입해 놓은 <도서관의 장서 목록>이라는 장서에는 그 자신의 이름도 기입되어 있다. '도서관의 장서 목록'의 존재는 이렇게 자기지칭적 성격을 갖는 사태이지만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장서의 이름>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점이다. 겉표지가 상실되어 이름을 모르는 장서도 있을 수 있고 동일한 이름의 장서이지만 그 내용이 상이한 장서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각 장서들의 엄밀한 자기-정체성(self-identity)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각 <장서의 이름> 란에 각 장서의 내용 전체를 기입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도서관의 장서 목록>이 만들어지게 되면 이 목록에는 도서관에 있는 모든 장서의 내용이 모두 기입되어 있어야 하고 그 장서 중에는 <도서관의 장서 목록>이라는 그 책 자체의 내용 역시 모두 기입되어야 하기에 결국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는 '근거 부재의 오류'에 해당하는 역설적 상황이다. 그러면 이런 오류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장서 목록의 개념을 정의한 후 장서 목록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정의 과정에는 반드시 恣意性이 介入되기에 '자기지칭적 성격을 갖는 사태이지만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는 않는 것이 있다'는 명제의 무한-보편적 타당성이 훼손되고 마는 것이다.45)

이제 '역설에 빠진다고 해서 모두 자기지칭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비판에 대해 검토해 보자. 우편엽서의 한쪽에는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거짓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그 반대쪽에는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참이다'라고 쓰여 있는 경우46), 각 문장은 자기를 지칭하지 않지만 역설을 야기한다고 한다. 또, '이 다음 문장은 거짓이다. 이 앞 문장은 참이다'라는 형식의 역설의 경우에도 앞, 뒤의 그 어느 문장도 자기를 지시하지 않는다고 한다.47) 

이제 이런 비판이 부당한 이유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위에 인용한 두 가지 예에 등장하는 앞, 뒤의 문장이 역설을 야기하기 위해서는 두 문장이 불가분리적으로 관계해야 한다. 즉,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은 그 문장 하나만으로는 결코 위와 같은 형식의 역설을 야기할 수 없다.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참이다'라는 문장과 결합하고 있어야만 역설이 발생한다. 즉, 역설을 야기시키는 구조 전체를 놓고 보면 앞, 뒤의 각 문장은 自己가 소속되어 있는 <결합된 두 문장 전체> 중 一部를 가리키는 것이기에 自己-指稱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경우도 '이 말은'이라는 주어와 '거짓말이다'라는 술어가 결합됨으로써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지, 만일 '이 말은'이라는 주어와 '거짓말이다'라는 술어를 결합시키지 않고 어느 한쪽만 보게 되면 역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이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문장에서, 역설을 발생시키는 것은 이 문장 全體가 아니라 이 문장의 一部인 '거짓말이다'라는 술어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자기지칭적 문장'이라고 해도 전체 중 그 일부를 지칭하는 것이지 전체 모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English'나 '검은(black)'과 같은 自敍的(autological) 형용사48)의 경우도 이는 마찬가지다. 'English'라고 하더라도 'English'라는 것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색깔>49)이나, <綴字의 수>50)가 아니라 그 <의미>만이 'English'이다. '검은(black)'의 경우는 그 <의미>나 <綴字의 수>가 아니라 그 <색깔>이 '검은(black)' 것이다. 따라서 '우편엽서의 역설'의 경우, 어느 한 면에 쓰인 문장이 반대 면에 쓰인 문장을 지칭하고 있다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자기가 속한 분할 불가능한 전체' 중 一部를 지칭하는 것이기에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똑같이 '자기지칭적'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해 보았듯이 '자기지칭적이라고 해서 모두 역설에 빠지는 것은 아니며 역설에 빠진다고 해서 모두 자기지칭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비판은 부당하다. 즉, 逆說(paradox)이란 럿셀(Russell)의 지적과 같이 어떤 命題(proposition)나 事態(fact)의 '自己-指稱(self-reference)'에서 야기된다고 보아야 한다. 더 범위를 넓히면, 럿셀의 <전형적 逆說>은 물론 크립키(Kripke)의 <根據의 不在(ungroundedness)>, 中觀論理의 <同語反覆(tautology)的 逆說>등, 논리적 모순을 초래하는 모든 역설적 상황들이 '명제나 사태의 자기지칭적 성격'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면 어째서 자기지칭적인 명제나 사태에서 역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 어째서, 비단 전형적 역설을 야기하는 명제나 사태뿐만 아니라 물론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모든 문장들이 역설적 상황51)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하면, '분할 불가능한 전체를 분할을 했기 때문'이다.

먼저, <전형적 역설>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자. 럿셀(Russell)의 착안과 같이 '자기 부정을 포함하는 전체'가 전형적 역설의 발생 원인이다.52)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의 경우 '크레타섬의 사람들'과 '이 명제의 發話者'는 결코 분할될 수 없는 하나인데, 이를 분할하여 '크레타섬의 사람들'을 주어로 삼았기 때문에 결국 자기지칭적 발화가 되고 만다. 그런데 전형적 역설의 경우는, 자기지칭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주어에 대해 부정적 의미의 서술을 하게 된다. '거짓말쟁이다'라는 술어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명제는 자기-부정적 명제가 되고 만다. 다른 것을 부정(타자-부정)하기 위해 그 다른 것을 주어로 삼아 어떤 명제를 진술하였는데, 그 다른 것 속에 발화 당사자도 내포되어 있기에 그것이 결국 자기-부정적 역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경우, '이 말'과 '거짓말'이 분할 불가능한 전체임에도 이를 분할하여 발화하면서 부정적 진술을 덧붙였기에 자기지칭적 부정으로 귀결되어 역설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根據 不在(ungronundedness)>의 오류에 대해 검토해 보자. 본고 제2장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龍樹가 『廣破論(Vaidalyaprakara a)』 제4절이나 『廻諍論(Vigrahavyavartani)』 제32, 33송에서 <인식 수단(pram a)>의 실재성을 논파하는 논법이 이에 해당된다. "모든 대상은 인식 수단에 의해 확립된다"고 주장하는 경우, 그 인식 수단 을 확립시키기 위한 根據로서 제2의 인식 수단이 요구되고, 제2의 인식 수단을 확립시키기 위한 근거로서 다시 제3의 인식 수단이 요구되며, 결국 무한한 인식 수단이 필요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런 비판법이 <근거 부재>의 오류를 이용한 논법이다. 그런데 이 역시 전형적 역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할 불가능한 전체>를 분할했기에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인식 대상> 속에는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 수단> 역시 포함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인식의 세계에서 인식 수단과 인식 대상은 분할 불가능한 전체인데, 이를 분할하여 하나를 '작용의 도구'로, 다른 하나를 '작용의 대상'으로 삼아 그런 도구가 대상에 작용한다고 보는 경우, 그 도구는 자기 자신에게도 작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무한소급에 빠지는 것이다. 이 역시 자기지칭적 사태이다.

마지막으로, 中觀論理的 <同語反覆의 오류>에 대해 고찰해 보겠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가는 자가 간다'는 『中論』 第2 觀去來品의 문장과 동일한 구조를 갖는 '비가 내린다'는 문장을 예로 든다. '비가 내린다'는 문장의 경우, '내린다'는 작용과 분리된 '비'라는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즉, 내리고 있어야만 '비'라는 호칭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재론자(Realist)들과 같이 '비'라는 주체와 '내린다'는 작용을 별개의 존재로 간주하게 되면 '비가 내린다'는 발화는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즉, 내리고 있는 비가 다시 내려야 하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는 사태는 <분할 불가능한 전체>인데, 여기서 '비'라는 주체와 '내린다'는 작용을 오려 내어(scissor out) ― 즉, 분할하여 문장을 구성하기에, <同語反覆의 오류>가 발생한다. '비'라는 개념에는 이미 '내린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라는 주어와 '내린다'는 술어의 兩 槪念은, 결코 종합판단적으로 관계 맺어지는 독립된 他者일 수는 없는 것이다. '비'라는 主語를 他者인 '내린다'는 述語와 관계지으려고 하지만 '내린다'는 술어는 타자가 아니라 '비'라는 주어 자신의 일부이기에, '비가 내린다'는 發話는 '자기지칭적 중복 진술'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고찰해 보았듯이 <분할 불가능한 전체53)>를 분할하려고 하는 경우, 자기-지칭적 명제나 事態가 야기되고, 결국 역설적 상황에 빠지고 만다.54) 그런데, 서양 논리학에서는 <전형적 역설>이나, <근거 부재>의 상황만을 논리적 오류라고 간주한 반면, 龍樹는 그런 두 가지 오류는 물론이고, 모든 일상적 문장에서도 <동어반복>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간파해 내어 자신의 논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분할 불가능한 전체>를 분할하려고 하기 때문에 전형적 역설의 <자기지칭적 부정의 오류>나, 근거 부재(ungroundedness)시 발생하는 <자기지칭적 무한소급의 오류>, 또는 中觀論理적인 <자기지칭적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본고 제3장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이 세 가지 모두, 자기지칭적 사태나 명제에서 <내포(inclusion)>와 <배제(exclusion)>의 딜레마가 야기됨으로써 발생되는 오류인 것이다.

 

 

 

5. 逆說의 해결

 

 

<분할 불가능한 전체>를 분할함으로써 야기되는 역설적 상황을 이용하여 적대자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 中觀論理의 요체이다. 그러면, 龍樹 자신의 진술들은 그런 역설적 상황에서 빠져 나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廻諍論』 서두의 다음과 같은 비판이 이런 의문을 대변한다.

 

만일 '그 어디서건 모든 사물에 自性이 없다'면 自性이 없는 그대의 말은 自性을 부정할 수 없다(제1송).55)

 

이와 달리, 만일 이 말이 自性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대의 앞에서의 주장은 깨어진다.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제2송).56)

 

즉, 龍樹가 실재론자의 세계관을 논파하면서 모든 존재들(諸法: sarvabh v )의 空性(=無自性性)을 이야기하자, 실재론자는 그러한 空性 역시 空해야 하기에 自家撞着에 빠지게 된다고 龍樹를 역공격하는 것이다.

만일 럿셀(Russell)이었다면 이에 대해 답하면서 '모든 것은 自性이 없다'는 명제만은 모든 것에 포함되지 않는 第2階의 명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럿셀의 階型理論(type-theory)에서는 逆說(paradox)의 발생을 피하기 위해 언어의 계층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構成된(constructed) 것이다. 언어의 계층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수학의 公理(axiom)와 같은 약속일 뿐이기에, 그런 약속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명제들의 진리성은 그 약속 바깥의 세계에서는 보편타당성을 잃고 만다.

역설(paradox)에 대한 럿셀의 해결방안과 유사하지만 보다 향상된 방법이 타르스키(Tarski)에 의해 고안된 바 있다. 럿셀은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나 '리샤르(Richard)의 역설', '부랄리-포르티(Burali-Forti)의 역설', '집합론의 역설'등이 모두 같은 구조를 갖는다고 보았지만57), 램지(Ramsey)는 이를 비판하면서 <언어상의 역설>58)과 <논리상의 역설>59)을 구분할 것을 제안하였다.60) 즉, '에피메니데스의 역설'과 같은 것은 <언어상의 역설>에 속하고 '집합론의 역설'과 같은 것은 <논리상의 역설>에 속한다는 것이다. 타르스키는 램지의 이런 분류법을 계승하면서 이 중 <언어상의 역설>의 문제는 논리 체계 내부에서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럿셀이 고안한 계형이론은, 논리 체계 내부에서 명제의 자기지칭(self-reference)을 금지시킴으로써, 역설을 해결하려 한 것이었으나, 타르스키는 명제에 대한 眞·僞를 기술하는 가치 개념을 논리 체계 밖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그것을 써서 이야기하는 언어(die Sprache von der wir sprachen)>와 <반성된 언어(die betrchtete Sprache)>를 구분함으로써 역설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전자를 <고차언어(Meta-sprache)>, 후자를 <대상언어(Objekt-sprache)>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대상언어>란 '연구의 대상이 되는 언어'이고 <고차언어>란 '대상언어 중의 명제나 추리등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가치판단하기 위하여 쓰여지는 언어'이다.61) 예를 들어 '눈은 희다'는 표현은 <대상언어>에 해당되고 '눈은 희다는 참이다'는 표현은 <고차언어>에 해당된다는 말이다.62) 즉 명제의 체계와 그 명제에 대한 가치 판단의 체계를 구별함으로써 역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에 인용한 『廻諍論』의 예에 적용하면, '모든 사물에 自性이 없다'는 龍樹의 말은 '반성된 언어(die betrchtete Sprache)인 <고차언어(Meta-sprache= meta-language)'에 해당되고, 이 말에 의해 비판되는 '사람에게는 自性이 있다', '地·水·火·風 四大에는 自性이 있다'와 같은 말들은 '우리가 그것을 써서 이야기하는 언어인 <대상언어(Objekt-sprache= object-language)>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은 自性이 없다'는 말 속에 이 말만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하기에 역설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잔 하크(Susan Haak)의 지적과 같이 이와 같은 해결책은 형식적 해결책은 될지언정 철학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즉, 그 유용성은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해결이 직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는 말이다.63)

비근한 예를 들어, 담벼락에 '낙서 금지'라는 글씨가 쓰여 있을 때, 그 글씨만은 결코 낙서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不立文字'라는 말을 썼을 때 이 문자만은 결코 문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세상은 타르스키나 럿셀이 만든 <논리학의 장기판(chess board of logic)>보다 그 넓이가 넓다.

이렇게, 역설(paradox)에 대한 럿셀(Russell)이나 타르스키(Tarski)의 해결책은, 恣意的 성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本稿 제2장과 제3장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龍樹는 논쟁 상대가 봉착한 역설적 상황을 드러내 줌으로써 적대자의 주장을 논파하고 있다. 즉, <中觀論理>에서는 역설적 상황을 인간 사고의 한계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상대를 논파하는 龍樹의 中觀論理 역시 역설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의문에 토대를 둔 비판이, 본장 서두에 인용한 『廻諍論』 제1송과 제2송에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龍樹는 이런 비판을 피해 나간다. 그리고 龍樹의 논의 역시 역설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空의 교설>이라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먼저 龍樹는 '모든 것에 自性이 없다'는 자신의 말 역시 自性이 없다고 시인한다. 즉, 이 명제의 의미 속에는 이 명제 자체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龍樹의 해결 방안은 럿셀이나 타르스키와 다르다. 적대자인 실재론자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갈래의 논의( a ko iko v da )64)를 나열하며 龍樹가 역설에 빠져 있음을 力說한다.

 

[1] 그런데 만일 모든 존재가 空하다면, 그에 의해 그대의 말은 空하다. 모든 존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空한 그것[=말]에 의해 부정함은 성립하지 않는다[A]./ 거기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空하다고 부정하는 것, 그것은 성립되지 않는다[B]./

[2] 만일 모든 존재들이 空하다는 부정이 성립한다[∼B]면, 그에 의해 그대의 말은 空하지 않다./ 空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의해 부정함은 성립하지 않는다[C]./65)

[3] 만일 모든 존재들은 空하고, 부정을 행한 그대의 말은 空하지 않다[∼C]면, 그에 의해 그대의 말은 모든 곳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된다[D]./ 여기서는 실례(實例)에 위배됨이 있다./

[4] 그런데 만일 그대의 말이 모든 곳에 포함되고 또 모든 존재가 空하다[∼D]면, 그에 의해 그것[=그대의 말]도 역시 空하다./ 空하기 때문에 이[=그대의 말]에 의해 부정함은 존재하지 않는다[E]./

[5] 만일 空하고 이에 의해 모든 존재들이 空하다는 부정이 존재한다[∼E]면, 이에 의해 空한 모든 것들도 <작용을 할 수 있는 것들(k ryakriy samarth )>이 되리라[F]. 그러나 이는 기대되지 않는다./

[6] 만일 실례(實例)에 위배됨을 없애려고 생각해서 空한 모든 것들은 <작용을 할 수 있는 것들(k ryakriy samarth )>이 되지 않는다[∼F]고 한다면, 空한 그대의 말에 의해 모든 존재의 自性을 부정함은 성립하지 않는다[A]./66)

 

이런 비판에 대해 龍樹는, 空한 것들도 그 작용(k rya)을 하는 경우에는 어떤 역할을 한다(√v t)고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즉, 위에 인용한 [5], [6]의 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또, 緣起性이기 때문에 自性이 空한 수레와 옷감과 물단지등도 각각의 作用(k rya)인 나무와 풀과 흙을 운반하는 경우에, 꿀과 물과 우유를 담는 경우에, 추위와 바람과 더위를 막는 경우에 역할들을 한다(vartante). 이와 같이 이러한 연기성이기 때문에 無自性한 나의 말도 사물들의 無自性性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vartate). 이런 상황에서, 무自性성이기 때문에 그대의 말은 空性이라고 말했던 것, 또 그것이 空性이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모든 존재의 自性을 부정함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그것은 옳지 않다.67)

 

마치 꼭두각시(nirmitaka)가 다른 꼭두각시를 제압하고 허깨비(m y puru a)가 스스로의 마술로 만들어낸 다른 허깨비를 제압(prati edha)하듯이, '모든 사물은 空하다'는 自性이 없는 말에 의해, 自性이 없는 모든 것의 自性을 부정(prati edha)하는 작용(k rya)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68) 이런 부정은, 꼭두각시 여인에 대해 진짜 여인이라고 잘못 파악하는 경우 다른 꼭두각시가 이를 시정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69) 즉, 꿈을 꿀 때, 꿈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것은 생시가 아닌 꿈이라고 알려주는 것과 같이 空性의 교설 역시 空하지만 그 작용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空性의 교설이 역설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有意味(significant)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이다.

더욱이 龍樹는 空性의 교설이 무엇을 주장하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무엇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먼저 주장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살펴보자. 적대자는 空性의 교설을 역설적 상황에 빠뜨림으로써 비판한 후,70) 자신의 그런 비판 역시 동일한 논리에 의해 비판받을 수 있다고 할 龍樹의 항변을 예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空性的] 부정을 [실재론자가] 부정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이 逆說에 빠진]다고 하는 생각이 있겠지만 그것은 없다. 그와 같이 그 특징으로 인해 망쳐지는 것은 그대의 주장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71)

 

이 게송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된다'는 말을 부정한다면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된다'는 말의 自性도 부정되지 않을 것이고, 이와 반대로 이 말의 自性 역시 부정된다면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되지 않는다'는 말에 예외가 있는 꼴이 되어 옳지 못하다.

 

그러나 적대자는, 자신은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운 적이 없으며, 이 논쟁은 애초에 龍樹가 '모든 것의 自性은 부정된다'는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반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龍樹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만일 무엇인가가 나의 주장이라면 그로 인해 그런 과오는 나의 것이리라. 그러나 나의 주장은 없다. 그러므로 나의 과오는 없다.72)

 

즉, '모든 것이 自性이 없다'는 명제는 龍樹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분명 龍樹는 도처에서 모든 것이 自性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니…. 그러나 이것이, 空性( nyat )의 교설이 逆說(paradox)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有意味(significant)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이다.

세 번째로, 龍樹가 제시하는 명제는 그 어떤 것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고찰해 보자. 적대자는 '어떤 존재를 부정하려면 부정되기 이전에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는 龍樹의 空性의 교설을 비판한다.

 

존재하기 때문에 항아리가 집에 없다는 부정, 이것이 있으므로, 그러므로 그대의 이런 自性 부정은 존재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이다.73)

 

'집에 항아리가 없다'는 부정이 가능하려면 항라리가 실재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에 自性은 없다(sarve  bh v n  na vidyate svabh va )'는 부정은 自性이 원래 있어야 가능하다고 龍樹를 비판한다. 이에 대해 龍樹는 먼저 상대를 역설에 빠뜨림으로써 논파한다.74) 즉, 존재하는 것만이 부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空性에 대한 적대자의 부정도 그런 부정의 대상인 空性이 존재해야 가능할 것이기에, 오히려 空性의 교리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75) 또, 그와 반대로 空性의 교리는 부정되지만 空性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존재를 부정하려면 부정되기 이전에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어야 하는 것'이라는, 자신이 내세운 애초의 주장에 위배되는 사례(反喩: pratid nta)가 하나 있는 꼴이니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76)

이어서 龍樹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부정하지 않는다. 또 무엇인가 부정되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정한다'는 비방, 이것은 그대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77)

 

그러나 여기서 '나는 무엇인가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龍樹는 무엇인가를 부정한다'는 말을 부정한 자가당착에 빠진 말 아닌가? 즉, 스스로 부정적인 표현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龍樹는 그것이 부정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상대를 역설에 빠뜨림에 의해 상대를 비판하면서 그 스스로도 역설에 빠져 있는 모습이 분명한데도 자기 자신은 역설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龍樹의 言明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로 인해 中觀論理의 특징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다. 역설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일 ―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럿셀 이후 서구 논리학자들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럿셀(Russell)의 階型理論(type theory), 타르스키(Tarski)의 二種言語論, 체르멜로(Zermelo)의 公理的 集合論(axiomatic set theory)등이 모두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연구 성과들인데 이런 이론들 모두 構成的(constructive)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이런 해결 방안들이 형식적으로는 유용할지 몰라도 철학적으로 역설의 문제를 보편타당하게 해결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이 넓은 세상에서, 역설의 발생을 금지시킨 하나의 '장기판(chess-board)'을 고안한 것일 뿐이다.

그럼 龍樹는 어떻게 해서 역설에서 벗어난 것일까? 먼저 明記하여야 할 것은 서구의 논리학자들이 고안했던 모든 종류의 역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龍樹가 제시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龍樹는 역설을 인간 사고의 한계로 보았다. 따라서, 그렐링(Grelling)의 역설(1908), 우편엽서의 역설, 리샤르(Richard)의 역설(1905년)등 모든 역설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이 자리에서 모색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렇게 분별 행위를 비판하는 龍樹의 논의만이, 어째서 역설의 덫에 걸리지 않고 유의미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보는 일만이 과제로 남는다.

 그 어떤 분별을 하더라도 역설이 발생하기에, 모든 사유와 명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中觀論理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龍樹가 中觀論理를 구사하는 空性의 교설만은, 그 독특한 성격으로 인해, 自家撞着的 역설에 빠지지 않고 有意味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독특한 성격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하면, <對機說法的 性格>이다. 즉, 空性의 교설은 <應病與藥>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기에 역설을 피해 有意味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廻諍論』에서 空性의 교설에 대한 실재론자의 비판에 대해, 龍樹가 항변하며 제시하는 비유들을 열거해 보자.

 

① 꼭두각시(nirmitaka)가 다른 꼭두각시를 제압하고 허깨비(m y puru a)가 스스로의 마술로 만들어낸 다른 허깨비를 제압(prati edha)하듯이, 이런 부정도 그와 같으리라.78)

② 혹은, 만일 [어떤 사람이] 꼭두각시 여인에 대해 [진짜] 여인이라고 잘못 파악하는 경우, 어떤 다른 꼭두각시가 [이를] 시정해 주게 되는데 이것은 그와 같으리라.79) 

③ 그것은 마치 데바닷따가 존재하지 않는 집에서, [잘못된 인식을 가진 누군가가] '데바닷따가 집에 있다'고 하는, 그런 경우에 [올바른 인식을 가진] 어떤 사내가 이에 대해 '[데바닷따가 집에]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데바닷따의 없음>이라는 사물(bh va)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데바닷따가 집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줄(j payati) 뿐이다. 그와 같이 '사물(bh va)들은 自性이 없다'는, 이런 말은 사물(bh va)들의 無自性性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 自性이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j payati).80)

 

이 세 가지 비유 모두,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는 空性의 교설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여기서 龍樹는 <空性의 교설>을 <다른 꼭두각시>를 제압하는 꼭두각시, <다른 허깨비>를 제압하는 허깨비, <다른 꼭두각시 여인에 대한 착각>을 시정해 주는 꼭두각시, <'데바닷따가 집에 있다'는 오해>를 제거해 주는 '데바닷따가 집에 없다'는 말에 비유한다. 이들 비유를 보면 그 어느 경우건, <다른 꼭두각시>, <다른 허깨비>, <다른 꼭두각시 여인에 대한 착각>, <'데바닷따가 집에 있다'는 오해>등, 비판의 대상이 先行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에는 自性이 없다'는 空性의 교설의 경우도, '모든 사물에는 自性이 있다'는 <잘못된 판단>의 <病>이 先行하는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治療>해 주기 위한 <도구>로서 龍樹에 의해 發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느 누가 그 어떤 주장도 하지 않고 있는데 무턱대고 龍樹가 '모든 사물은 自性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後者와 같은 경우라면, 空性의 교설 역시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구 논리철학에서 公理的(axiomatical)으로 해결하려한 전형적 逆說과, 역설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할 수 있는 空性의 교설의 성격을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 역설>                         <空性의 교설>

① 발화의 선행조건이 없다.      ① 선행조건이 있는 경우에 한해 발화된다(應病與藥).

② 발화된 명제를 주장으로 본다. ② 발화된 명제를 도구로 본다(方便性).

 

이렇게 空性의 교설은 무턱댄 주장이 아니라, <先行하는 잘못된 판단>을 비판해 주는 <도구>인 것이다. 즉, 동일한 發話라고 하더라도, 어떤 선행하는 <주장>이 있는 경우에 한해 그것을 비판하는 <도구>로 쓰였기에 龍樹의 발화는 有意味할 수 있다. 그러나 럿셀(Russell)등은,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에피메니데스의 발화'가 나오게 된 <선행조건>이나 언어의 <도구적 성격>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면 '에피메니데스의 발화'가, 空性의 교설과 같이 有意味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 보자. 크레타섬은 그리스 남쪽의 지중해상에 위치한 섬으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에 그 주민의 대부분이 장사꾼들이었으며 거짓말도 잘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주민 중 한 사람이 '우리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진실하다'는 뻔한 거짓말을 한다. 이것을 보고 같은 크레타섬 사람인 에피메네스가, '아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을 한다면 이 말로 인해 앞의 말은 비판된다. 여기서 '에피메니데스의 발화'는 유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 발화를 하기 이전에 <선행조건>으로서,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모두 진실하다'는 잘못된 주장이 있었고, 그런 <주장>을 대상으로 삼아 그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서 '에피메니데스의 발화'가 쓰인 경우에는 유의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금지'라는 글씨 역시, 아무도 담벼락에 낙서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써 놓은 것이라면 그 글씨로 인해, 원래는 깨끗할 수도 있었을 담벼락이 오히려 더럽혀졌기에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죄책감 없이 온갖 낙서를 자행하고 있는 상황[→선행조건]에서, 낙서의 잘못을 알려주기 위해[→도구적 성격] 그 글씨를 쓴 것이라면, '낙서금지'라는 글씨는 自家撞着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有意味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不立文字'라는 禪家의 명제도 '文字'를 통한 공부에만 집착하는 풍토가 성행하는 상황에 한해서 有意味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찰해 보았듯이 <空性의 교설>이나 <遮詮的 發話>는 그 이전에, <비판의 대상이 되는 發話가 先行>하는 상태에서, <도구>와 같이 구사되는 것이기에 自家撞着의 모습을 띰에도 불구하고 無意味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論者는, 新造語(a newly coined world)를 만들어, 中觀論理의 이러한 성격을 <논리적 정당방위(logically legitimate self-defence)>라고 부르겠다.

恣意的으로 自己指稱(self-reference)을 금지시킴으로써 역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럿셀(Russell)이나 타르스키(Tarski)등 西歐 논리철학자들의 해결 방안은, 그 성격이 構成的(constructive)이기에, 보편적 진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이 넓은 세상에서 단지 자그마한 <논리학의 장기판>을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러나 <空性의 교설>은, 상대방이 이 세계를 보고 어떤 개념이나 판단을 오려내는(scissor out) 경우에 한해, 즉 어떤 논리에 입각한 어떤 주장을 하는 경우에 한해, 그것을 비판하는 도구로서 구사되었기에, 역설의 모습을 띰에도 불구하고 有意味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Ⅲ. 空과 倫理

 

 

 

 

1. 들어가는 말 - 空과 倫理81)는 갈등하는가?

 

 

불교인이건 비불교인이건, 空의 교설을 접하게 되는 경우 늘상 떠오르는 의문들이 있다. 일체가 空하여 善惡이 없다면 善을 행할 것도 없지 않은가? 세속이 곧 열반82)이라면 수행도 필요 없고 막행막식해도 되는 것 아닌가? 空에 대한 니시다니 게이지(西谷啓治)의 해석83)에 토대를 두고 민중불교의 이론적 근거를 懷疑하는 吉熙星의 다음과 같은 비판 역시 이러한 의문을 대변한다.

 

깨달은 禪師의 눈에 모든 色이 空으로 비친다면 윤회하는 경험세계를 어떤 부분은 惡으로 부정하고 어떤 부분은 善으로 선택할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此岸과 彼岸의 전적인 동일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무차별의 긍정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理想과 現實, 規範과 實在 사이의 긴장을 무너뜨림으로써 [비]윤리적 행위를 비난할 초월적 기준을 상실케 하는 것이다.84)

 

만일 善이나 惡, 옳다거나 그르다는 분별을 모두 떠난 것이 불교의 空 사상이라면, 不義를 시정하기 위한 불교인들의 사회 참여는 분명 反佛敎的인 행위일 것이다.

또, 일반적인 불교 교설에서는 이 세상에는 인과응보의 이치가 엄연히 있다고 말한다. 모든 길흉화복은 과거에 지었던 업의 과보로 나타나는 것이며, 지금의 일거수일투족은 우리의 미래나 내생의 삶의 조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善行은 三界 內에서의 향상의 삶을 보장하고 惡行은 삼계 내에서의 추락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空의 교설에서는, 그러한 업과 과보의 이론이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中論』 第17 觀業品에서 龍樹(N g rjuna, 150∼250 C.E.)는 업의 실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만일 業이 自性(실체)을 갖는 존재라고 한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은) 常住하리라. 또 業은 지어지지 않는 것이 되리라. 왜냐하면 常住하는 것은 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85)

 

만일 지어지지도 않은 業이 존재한다면 짓지도 않았는데 (과보를) 받는다는 두려움이 있게 되리라. 그리고 그 경우에는 梵行에 머물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86)

 

煩惱들과 業들과 身體들 또 業의 主體들과 果報들도 신기루의 姿態를 띠고 있으며 아지랑이나 꿈과 같다.87)

 

이것만이 아니다. 심지어 매일매일의 불교 의식에서 독송되는 『般若心經』에서조차 불교의 핵심 교설일 뿐만 아니라 윤리설도 내포하고88) 있는 <四聖諦>와 <十二緣起>의 교설에 대해서까지 부정적 표현89)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90) 

이렇게, 모든 것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空의 교설은 세속적 윤리와 무관한 것일까? 아니, 오히려 세속적 윤리를 부정하는 교설일까? 사실, 극히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과거에 막행막식적 無碍行을 見性의 징표로 착각했던 수행인들이 터득했던 空은, 그들로 하여금 세속적 윤리를 부정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中論』이나 『大智度論』91)등의 논서를 보면 空에 대한 이런 식의 오해를 경계하는 구절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空과 세속적 윤리가 갈등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龍樹가 邪見이라고 부르며 우려했던 관점으로, 후대 유식불교도들에 의해서도 철저하게 비판받았던 惡取空的 空見인 것이다. 龍樹는 이런 空見을 우려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空性이란 일체의 見解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러 勝者들에 의해 교시되었다. 그러나 空性의 見解를 가진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라고 말씀하셨다.92)

 

그런데, 어째서 佛敎 內外의 많은 사람들이 空의 의미에 대해 위와 같은 惡取空的 오해를 범하게 된 것일까? 논자는 본 논문을 통해, 空에 대한 그런 오해를 시정함과 아울러, 진정한 윤리란 오히려 철저한 空觀에 토대를 두어야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제2장을 통해 세속적 윤리의 근거를 공 사상 내에서 모색해 보았다.

위에 인용한 『中論』의 게송에서 보듯이 인과응보의 이론과 공의 논리는 상충하는 듯이 보인다. 공 사상에서는 인과응보의 이치가 엄존하는 이유에 대해 도저히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일까? 논자는 제3장을 통해 공의 논리와 인과응보 사상의 구조적 동질성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이에 대해 답해 보았다.

그리고 제4장에서는 제2장과 제3장에서 도출된 결론에 토대를 두고 공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수준에 따라, 각 개인의 윤리관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2. 倫理의 空觀的 근거

 

 

⑴ 敎理的 근거 - 世俗諦

 

『大智度論』의 적대자는 도처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어째서, 어느 곳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三時가 모두 不可得空이라고 말하다가 다른 곳에서는 三時의 존재를 말하는가?' '어째서, 어느 곳에서는 자아가 없다고 하다가 다른 곳에서는 자아가 있다고 하는가?' '어째서, 어느 곳에서는 善根功德에 소득이 없다고 설하고 다른 곳에서는 선근공덕의 소득이 있다고 설하는가?' … 이런 물음들에 대해 답하면서 龍樹는 眞俗二諦說을 제시한다. 즉, 三時의 不可得空이나 無我說, 또 善根功德이 無所得이라는 교설은 眞諦的인 교설이고 三時가 있다거나 自我가 있다거나 선근공덕이 有所得이라는 교설은 俗諦的 교설이라는 것이다.93) 이 밖에도, 속제에서는 生死도 있고, 동서남북의 方位도 있으며 衆生도 있지만, 진제에서는 생사도 없고 방위도 없고 중생도 없다고 말한다.94)

『大智度論』의 經文 한 곳을 인용해 보자.

 

問: 만일 시간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제 시간에 식사하는 것만을 허용하고 제 시간이 아닐 때 식사하는 것은 금하는 것이냐?

答: 나는, 世界名字法은 실체가 있는 법이 아닌 경우도 있다고,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그러니 그대는 비난하지 말지어다. 더우기 이것은 율장에서 규정해 놓은 계법이기도 해서 俗諦的 세계 내에서는 진실되지만 第一義諦的(= 眞諦)으로 진실된 법상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自我나 法의 相이 실제로는 불가득이기 때문이다.95)

 

적대자가 午後不食의 계율과 空의 교리가 상충된다고 항의하자, 龍樹는 이제설을 통해 이를 화해시킨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空하다면 오후랄 것도 없고 식사 시간이랄 것도 없는데 어째서 오후불식을 하라는 것이냐는 의미의 적대자의 물음에 대해, 龍樹는 계율이란 제일의제에서는 공하지만, 세속제에서는 엄연히 진실한 규범이라는 답하고 있다.

『中論』에서도 일상적 교설과 공의 교설이 충돌할 때 龍樹는 二諦說을 통해 양자를 화해시키고 있다. 第24 觀四諦品에서 적대자가 空의 교설은 因果와 四聖諦와 三寶등 모든 佛法을 파괴한다고 비판96)하자 龍樹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부처님들의 교법은 二諦에 의거한다. 世俗諦와 勝義諦이다.97)

 

따라서, 破相的인 空의 교설은 진제적 교설에 속하고, 倫理는 속제적 규범에 속하기에 공에 대한 조망을 터득했다고 해서 세속적 윤리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龍樹의 저술 중 『中論(M dhyamika- stra)』, 『六十頌如理論(Yukti- a tik )』, 『空七十論( nyat -saptati)』, 『廻諍論(Vigraha-vy vartan )』, 『廣破論(Vaidalya-Prakara a)』 등의 五如理論에서는 모든 법에 대한 실체적 집착을 비판하는 진제적 공사상이 천명되어 있지만, 『寶行王正論(Ratn val )』이나 『勸戒王頌(Suh llekha)』등의 논서에서는 아비달마적인 세속적 수행과 실천이 강조된다. 龍樹는 결코 아비달마 교학이나 윤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아비달마 교학체계에서 말하는 法數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를 비판했을 뿐인 것이다. 아비달마 교학에서 말하는 四緣說에 대한 龍樹의 다음과 같은 설명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보살은 諸法이 四緣에서 생하는 것을 알아서 관찰하지만 사연 가운데에서 定相을 취하지 않는다. …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다만 邪見을 제거하는 것이지 사연을 破하지 않는다.98)

 

四緣이란 諸法의 발생의 조건이 되는 因緣과 緣緣과 次第緣과 增上緣인데, 분명 龍樹는 『中論』 第1 觀因緣品을 통해 그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99) 그러나, 위와 같은 『大智度論』의 설명에 비추어 보면 이는 四緣 하나하나가 실체를 갖는다는 사고방식인 邪見을 비판하는 것일 뿐이지, 모든 사물의 연기적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사연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연설은 엄연히 불교 교법으로서의 효용을 갖는 것이다. 이렇듯이 공은 세속이나 윤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세속과 윤리에 대한 우리의 실재론적(realistic) 태도를 시정할 뿐이다. 교리적으로 보더라도 空의 교설과 倫理의 교설은 결코 상충될 수 없다. 이를 상충된다고 보는 것은 空 사상의 핵심 교리인 二諦說을 看過한 데서 비롯된 오해인 것이다.

 

 

⑵ 論理的 근거 - 自他平等과 離苦得樂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부정하는 듯한 空의 교리이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세속적 윤리는 이제설을 통해 철저하게 긍정된다. 그러나 空 사상에서 긍정되는 세속적 윤리가 보다 확고한 토대를 갖기 위해서는 空과 倫理의 양자 사이에 論理的 架橋가 놓아져야 할 것이다.

제1장의 脚註에서 설명했듯이 대승불교의 윤리는 上求菩提를 위한 自利의 윤리와 下化衆生을 위한 利他의 윤리로 양분된다. 이런 구분을 空 사상에 대입하면, 자리의 윤리란 '공성을 터득하기 위해 지켜야 되는 윤리'를 말하고 이타의 윤리란 '공성을 터득한 이후에 示現되는 윤리'를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100) 고요한 곳에서 홀로 수행하는 求道者는 戒·定·慧 삼학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런데 戒律과 禪定과 智慧는 항아리에 담긴 물에 비유된다. 항아리의 물이 잔잔해야 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데 여기서 '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는 것은 <지혜>에 대비되고, '물의 잔잔함'은 <선정>에 대비되며, '그 양자의 토대가 되는 항아리'는 <계율>에 해당된다. 항아리가 깨지면 물도 담을 수 없는 것이기에 달의 존재조차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自利의 윤리인 戒律과 空性으로서의 智慧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러면 利他的 윤리의 당위성은 그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어째서 타인을 위한 善行이 至高의 가치 중 하나가 되는 것일까? 金東華는 이러한 도덕적 행위의 당위성의 근거로 萬物一切와 萬物相依性의 원리를 든다.101) 즉, 본체적으로 본다면 만물이 一體이고 무차별하게 平等하며, 현상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해 있는 것이기에 나와 남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일거수일투족이 도덕적 행위일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즉, 불교적 윤리설은 無條件的인 至上命令이 아니라 우주와 인생의 실상에 토대를 둔 합리적 요구이다.102) 후기 중관파의 학승인 寂天( antideva) 역시 이타적 윤리의 철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공포와 고통은 싫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타인을 버리고 자신만을 수호할 근거는 전혀 없다.103)

 

寂天( antideva)은, 이를 주석하면서 보살은 먼저 自他의 구별을 없애야 한다(par tmasamat : 自他平等)고 말한다. 自他의 구별이 없어진 보살은 他人에게 공포나 고통이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되면 자연히 그것을 제거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즉, 自他의 구별이 해체된 자의 경우, 타인에게 慈悲를 示現하고자 하는 菩薩心이 자연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타의 구별이 해체되는 것, 즉 <自他不二의 證得>은 바로 <空性에 대한 自覺>에 해당된다. 그리고 모든 중생은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離苦得樂)이기에 그 누군가에게 고통이 있는 경우에 그 누군가를 타인으로 보지 않는, 我空을 터득한 보살은 그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唯識佛敎에서 말하는 平等性智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처의 지위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을 구성하는 總8識은 모두 智慧로 바뀌게 되는데104) 그 중 우리의 自意識과 利己心의 원천이었던 第7 末那識(mano vij na)은 자타의 구별이 사라진 平等의 智慧로 바뀐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다른 중생과 한 몸(同體)이라는 實相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다른 중생에 대한 大悲心은 논리적이고 자연적인 귀결이다. 아니, 보살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린 자식을 구하기 위해 자동차에 뛰어드는 어머니에서 우리는 <同體大悲>를 실증할 수 있다. 또 눈 앞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짐승을 볼 때 아무 느낌 없이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믈 것이다. 심지어 지렁이를 밟아도, 꽃나무가 꺽어져도, 산허리가 잘려 나가도 우리의 가슴은 반응한다.

 

 

 

3. 空과 倫理의 구조적 동질성

 

 

⑴ 空의 역설적 구조 - 自家撞着

 

이 세상 모든 것은 緣起的이다. 따라서, 이 세상 그 어떤 사태건 分割할 수가 없다. 즉, 오릴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눈(能見)과 시각대상(所見)을 나눌 수가 없고, 나와 세상을 나눌 수가 없으며, 긴 것과 짧은 것을 나눌 수가 없고, 삶과 죽음을 나눌 수가 없다. 그러나 연기실상을 위배하고 우리의 사유가 어떤 事態에 대해 분할을 가할 경우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오류를 지적해 주는 논리가 바로 <空의 논리>이다. 空의 논리는, 우리의 구성적(constructive) 사유에 의해 이루어진 <판단>이나 <추론>의 절대적 타당성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反論理>라고 부를 수가 있으며, 모든 <개념>의 독립적 실재성을 해체(deconstruct)시킨다는 점에서 <涅槃의 論理>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이다.105) 또, 空의 논리는 緣起實相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도출된 논리이기에 <緣起의 論理>라고 부를 수가 있고, 思惟의 이율배반106)적 속성을 비판하는 논리이기에 <中道의 論理>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中觀論理>라고 부를 수도 있다.

불교 논서 중 空의 논리가 克明하게 표출되어 있는 논서가 바로 龍樹의 『中論』인데, 『中論』의 논리는 초기불전의 緣起說에 토대를 두고 있다. 연기설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에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이 멸한다'107)는 緣起公式으로 표현되는데 이 중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에 저것이 생한다'는 구절은 연기의 構成的(constructive) 측면인 流轉門의 원리를 나타낸 것이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이 멸한다'는 구절은 연기의 解體的(deconstructive) 측면인 還滅門의 원리를 나타낸 것이다. 龍樹는 이 중 還滅門의 緣起說만을 논리적 오류가 없는 연기의 표현으로 간주한다.108) 그래서 『中論』에서 갖가지 <판단>에서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경우 그 토대로서 제시되는 연기설은 환멸문의 형식으로 기술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109)

 

만일 <가는 자>를 떠난다면 <가는 작용>은 성립되지 않는다. <가는 작용>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가는 자>가 성립하겠는가?110)

 

<色의 因>이 없으면 色은 포착되지 않는다. 色이 없어도 <色의 因>은 보이지 않는다.111)

 

그런데 <보는 작용>이나 <듣는 작용> 따위 그리고 <감수 작용> 등이 속해 있는 그것(= 근본 주체)이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들(=<보는 작용> 等) 역시 존재하지 않으리라.112)

 

이렇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개념쌍의 환멸연기적 관계에 대해 선언을 함으로써 각 개념들의 독립적 실재성(= 自性: svabh va)을 비판한 다음 龍樹는 두 개념쌍으로 이루어진 <판단>에서 논리적 오류를 도출시킨다. 위에 인용한 第2 觀去來品의 경우 '<가는 자>가 간다'는 판단에 대해 龍樹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비판한다.

 

<가는 자>가 간다고 주장하는 자에게는, <가는 작용> 없이 <가는 자>가 있다는 오류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가는 자>에 소속된 <가는 작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113)

 

만일 <가는 자>가 다시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두 개인 오류가 있게 된다. [그 두 가지는 ]<가는 자>라고 부르게 만드는 것과, 가고 있는 존재인 <가는 자>이다114)

 

一例로 지금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다고 할 때, 거기서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을 분할하여 '<가는 자>가 간다'고 표현하게 되면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가는 자>라는 주어 속에 <가는 작용>이라는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면, 가는 작용이 두 개로 되는 '중복의 오류'에 빠지고, 배제되어 있다고 보면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한국어로는 '가는 자가 간다'는 표현이 생경하기에 다른 卑近한 예로 바꾸어 이런 오류에 대해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바람(風)이 분다'는 표현의 경우 '바람'이 없으면 '분다'는 작용도 있을 수 없으며 '분다'는 작용이 없으면 '바람'도 있을 수 없다. '바람'과 '분다'는 작용은 緣起的이다. 그런데 연기성을 위배하고 '바람'과 '분다'는 작용을 분할한 후, '바람이 분다'는 발화를 하는 경우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분할 불가능한 하나의 사태인데 <생각의 가위>에 의해 바람을 오려낼 경우(= 分別), 우리는 '분다'는 작용이 '바람'이라는 개념에 내포되어 있는지 배제되어 있는지 물을 수가 있다. 이 때 그 어떤 쪽의 대답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먼저, '분다'는 술어의 의미가 '바람'이라는 주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의 토대 위에서 '바람이 분다'는 發話를 하게 되면 이미 '불고 있는 바람이 다시 분다'는 말이 된다. 즉, 바람이 두 번 분다는 '중복의 오류'에 빠진다. 그와 반대로, '분다'는 술어의 의미가 '바람'이라는 주어 속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본다면 '불지 않는 바람이 있다'는 뜻이 되는데 그런 바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에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바람이 분다'는 말을 하는 경우 '분다'는 의미는 '바람' 속에 <내포>되어 있을 수도 없고 <배제>되어 있을 수도 없다.

이를 고대 인도의 세계 발생 이론에 대비시키면 <내포>적 관점은 因中有果論115)的 세계관과 통하고 <배제>적 관점은 因中無果論116)的 세계관과 통한다. 엄밀히 말하면 '<가는 자>가 간다', 또는 '바람이 분다'는 판단에 대한 그런 두 가지 이해 방식은 主中有述論(주어 속에 술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과 主中無述論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常斷의 二邊說과 비교하면 인중유과론은 원인이 결과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常見에 해당되고 인중무과론은 원인과 결과는 단절되어 있다는 斷見에 해당된다. 이를 다시 四句와 비교하면 상견은 어떤 사태에 대한 제1구적인 해석이고 단견은 제2구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中道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실천적 중도와 사상적 중도가 그것이다. 苦行과 快樂의 양극단(= 二邊)을 떠난 八正道의 수행이 실천적 중도의 수행이라면 常見과 斷見의 양 극단(= 二邊)을 떠난 십이연기설은 思想的 중도설인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설에서는 인중유과론적 상견도 비판하고 인중무과론적인 단견도 비판한다. 龍樹는 십이연기설의 인과론적 중도성을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판단에 적용하여 술어의 의미가 주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없고 배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없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연기의 중도성을 드러낸다.117)

비단, '바람'이나 '부는 작용'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이 이렇게 분할 작용에 의해 탄생된 것들이다. '더러움'이라는 개념은 '깨끗함'이라는 개념과 함께 발생하였고, '인식수단(pram a: 能量)'이라는 개념은 '인식대상(prameya: 所量)'이라는 개념과 함께 발생하였으며, '불'이라는 개념은 '연료'라는 개념과 함께 발생한 것이다. 즉, 가치개념이건 인식개념이건 존재개념이건 모두 대응쌍과 함께 발생한 것이기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즉, 그 自性이 없으며 空하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런 개념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분할을 한 후 다시 양자를 연결하는 행위가 先行해야 한다. 즉, 개념을 오려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오려진 개념들은 허구이다. 허구의 개념들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판단들은 필연적으로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空의 논리에 의해 어떤 <판단>의 사실성이 비판되는 과정은 <逆說(paradox)>적 명제가 논리적 오류로 귀결되는 과정과 그 구조가 동일하다.118) 예를 들어 보자.

전형적 역설인,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의 경우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을 한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 사람> 가운데에 내포되기에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며, 이와 달리 <에피메니데스>만은 <크레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즉,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 사람>에 내포시킬 수도 없고, <크레타 사람>에서 배제시킬 수도 없다. 여기서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에 내포된다는 사실은 四句판단 중 제1구적인 판단과 같은 구조를 가지며, 에피메니데스만은 크레타 사람에서 배제된다는 생각은 四句판단 중 제2구적인 판단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많은 불교적 명제들 또한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며 문자를 세우는 <不立文字>, 입만 열면 그르친다면서 입을 열고 있는 <開口卽錯>. 마음을 비운다는 마음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으며, 욕심을 버리겠다는 욕심을 내고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역설을 도출시킬 수 있다. 이 중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명제의 경우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바로 그 말 역시 문자의 범위에 내포되고 말기에 역설이 발생되는 것이다. 즉, 타자를 향해 부정적인 발화를 하였는데 그것이 다시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마치 부우메랑을 던진 것과 같은 자가당착이 발생한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말 역시 문자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제1구적인 것이고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것은 문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제2구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상관하는 두 事體[能과 所] 중 어느 하나[所]를 다른 하나[能]에 내포(inclusion)시킬 수도 없고 배제(exclusion)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 <중관 논리>와 <역설>의 공통점이다.119)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思考의 한계이다.120)

그러면 이런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럿셀(Russell)은 '自己指稱(self-reference)'121)이라고 말하며, 이런 자기지칭으로 인해 일종의 惡循環(vicious-circle)이 야기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122) 논자 역시 이에 일부 동의한다. '불립문자'라는 말을 한 순간 자기지칭이 발생하고,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을 한 순간 자기지칭이 발생한다. 그러면 어째서 자기지칭이 일어난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 '위와 같은 발화를 하면서 문제가 되는 사태를 분할했기 때문'이다. 즉, 분할 행위가 자기지칭에 선행한다. 분할이란 線을 긋는 것이다. 크레타 사람 전체가 거짓말쟁이인데 자신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자신과 크레타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불립문자라는 발화 역시 문자에 속하는데 불립문자만은 문자가 아니라고 불립문자라는 문자와 다른 문자들 사이에 심정적으로 선을 그었기에 무심코 역설적 발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는 하나의 사태에서 '바람'과 '분다'를 분할하는 경우 '중복의 오류'와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가 발생하듯이, 불립문자라는 발화 역시 그 발화만은 문자가 아니라고 문자의 세계에서 분할해 내었기에 '자가당착의 오류(prasa ga sama)'와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pratid nta sama)'가 발생한다.123)

이와 같이 空의 논리에서는, <분할 불가능한 하나의 사태124)>를 우리의 思考가 주어와 술어, 주체와 작용, 실체와 현상 등으로 오려낸 후(=분할, 분별) 어떤 發話를 하는 경우 자기지칭을 야기하게 되며, 결국 <논리적 자가당착>이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한다.125) 

 

 

⑵ 倫理의 역설적 구조 - 因果應報

 

세속적인 善行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근거가 因果應報 사상이다. 모든 분별을 비판하는 空 사상에서는, 善을 행하면 福을 받고 惡을 행하면 禍를 입는다는 인과응보의 이치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까? 제1장에서 살펴 보았듯이 『中論』에서는 업과 과보의 실체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中論』에서 말하듯이 果報에 이르기까지 이어질 수도 없고(不常), 매 찰나 소멸할 수도 없는(不斷) 業인데 그것이 어째서 果報를 초래하는 것일까? 선행이건 악행이건 나의 행위는 분명히 타인을 향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차후에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분명 통상적인 인과관계와 그 구조가 다르다. 그러나 불교는 물론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응보의 이치를 가르친다.

그런데 타자를 향해 던져진 행위가 자신을 향해 回歸한다는 인과응보의 구조는 타자(他者)를 향해 던진 비판이 자신을 향해 돌아온다는 불립문자의 역설과 그 구조가 동일하다. 불립문자라는 문자나 다른 일반적인 문자는 모두 문자일 뿐인데, 불립문자만은 문자가 아니라고 심정적으로 무심코 선을 그은 후 불립문자라는 발화를 하게 되면 결국 자가당착에 빠지고 마는 <논리적 역설>126)이 발생하듯이, 나와 남은 <분할 불가능한 하나의 전체>인데 이를 분할하여 남에게 증오와 해악을 끼치게 되면 마치 부우메랑과 같이 그 작용이 나에게 돌아오는 <행위의 역설>이 야기되는 것이다. 이는 善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127) 나와 남을 분할한 이후의 惡行과 善行은 그 행한 만큼 자기 자신에게로 回歸한다. 누워서 침뱉기와 같다. 논리적 역설에서와 같이 이 경우에도 자기지칭(self-reference)이 발생한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비단 타인을 향한 행동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을 향한 우리의 행동 역시 역설을 야기한다. 서구 프로테스탄티즘과 함께 발달한 자본주의는 인류사에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라는 직선적 세계관을 심어 놓았다. 그 결과 오늘날의 지구는, 인류 역사 이래 유례가 없는 환경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량 소비의 부산물인 내가 버린 쓰레기(= 분할)는 영원히 나와 결별할 줄 알았는데 그렇질 않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공해가 된다. 즉, 이 세상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이라는 사실(= 자기지칭)이 체험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환경오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쓰레기를 버리기 이전에 미리 활용하는 인위적 순환이 요청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환경 문제를 초래한 장본인이었던 서구인들을 중심으로 최근들어 쓰레기의 재활용이라는 순환적 세계관이 다시 보급되고 있다. 우리는 쓰레기와 함께 살아 가야 한다. 소화 과정을 거친 밥은 똥으로 변하지만, 그 똥이 비료가 되어 다시 밥으로 변한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된다. 우리의 인식에도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환경문제는 더러움과 깨끗함을 분할한 후 깨끗한 것만 자신의 주변에 놓고 더러운 것은 밀쳐 버리려고 하는 우리의 이분법(= 분할)적 가치관에 그 원인이 있다.128) 원래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129) 더러움과 깨끗함은 연기적으로 발생된 허구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선행해야 환경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이 이외에도 끝 없이 세균을 박멸하려고 하는 현대 의학 역시 '병은 나쁜 것, 건강은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 분할)적 가치관에 토대를 둔 것이기에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 것이다. 즉, 항생제에 의해 우리 몸에서 추출된 세균은 강화되어 다시 우리 몸으로 돌아 온다(= 자기지칭). 최근 들어 아토피성 피부염이 급증하는 이유는, 과거에 우리 몸 속에 함께 살던 기생충이 박멸되었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병원 간판마다 그려진 十字 표시에서 보듯이 현대의 의료 문화는, 治病이 至高의 가치인 것처럼 착각케 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결과이다. 우리는 적당한 병과 함께 살아가다 죽어야 한다. 우리는 적당한 기생충과 함께 살아가다 죽어야 한다. 『寶王三昧論』130)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러한 共存과 循環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⑶ 空과 倫理의 合一 - 同體大悲

 

<분할 불가능한 하나의 사태>인데 이를 분할한 후 어떤 문장이나 이론을 구성해 내는 경우 우리는 自家撞着的 逆說(paradox)에 빠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와 남, 나와 세상은 <분할 불가능한 하나의 전체(同體)>인데 이를 분할하여 어떤 행위를 할 경우 自業自得의 因果應報의 이치가 작용한다. 善行이라고 하더라도 나와 남을 분할한 이후의 선행은 결국 자기만족일 뿐이며, 三界 내에서의 일시적 향상만 보장할 뿐이다. 진정한 윤리란 自他不二의 空觀에 토대를 둔 것으로, 나와 남을 분할한 이후의 윤리행이 아니라 분할 이전의 同體大悲的 윤리행이어야 한다. 즉, <同體>라는 自他不二의 空觀的 자각이 있어야만, <大悲>라는 진정한 윤리행이 示現될 수 있는 것이다.131) 이는, 남의 고통을 마치 자기 자신의 고통인 듯이 여기는 자세로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132) 

 

 

 

4. 空에 대한 네 가지 이해와 倫理

 

 

⑴ 我有法有 - 僞善的 윤리

 

대부분의 세속 사람들은 我有法有的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 즉, 이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나의 자아도 실재하고(我有), 그런 자아가 구사하는 갖가지 개념들도 실재한다(法有)는 것으로 空에 대한 자각이 결여된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 위에서의 善行은 僞善이 된다. 즉, 아무리 남을 위해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는 베푸는 자(施者)도 있고 받는 자(受者)도 있으며 베푸는 물건(施物)도 있다는 생각 위에서의 선행이며 그 목적도 자기 자신의 이득에 있다.133) 『大智度論』에서는 <不淨施(청정하지 못한 보시)>라는 이름 하에 이와 같은 僞善的 布施行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① 재물을 구하기 위해 ② 사람이 두려워서 ③ 책망받기 싫어서 ④ 칭찬을 받으려 ⑤ 죽음이 두려워서 ⑥ 부자가 되려고 ⑦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⑧ 질투심에서 ⑨ 교만심에서 ⑩ 명예를 위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보시한다.134)

 

 

⑵ 我空法有 - 형식주의적 소승윤리

 

『大智度論』에서는 바라밀행이 안된, 소승불교의 형식적 持戒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 혹, 계율을 지키더라도 다른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며 마음에 회한이 없다. 그러나 만일 상을 취해 집착을 생한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사람은 비록 이전에는 다른 중생에게 대해 화를 내지 않았지만 법에 대해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다른 중생에게 화를 낸다. 그러므로 만일 다른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려면 제법을 평등하게 실천해야 한다. 만일 이것은 죄가 되고 이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분별을 하게 되면 이는 지계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135)

 

無我의 진리(我空)를 추구하기 위해 持戒라는 自淨의 윤리를 행하지만, 그런 윤리적 덕목에 대해 집착(法有)을 하게 되면, 그 線을 넘는 자에 대해 화(瞋)를 내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三毒心인 貪心과 瞋心과 癡心은 그 뿌리가 하나이다. '내가 있다'고 착각(= 癡心)하기에 좋다(淨)고 생각되는 것은 나를 향해 끌어당기고(= 貪心) 싫다(不淨)고 생각되는 것은 밀어 버린다(= 瞋心). 따라서 持戒行을 통한 無我의 수행을 한다고 해도, 戒律을 어긴 자에 대해 瞋心을 일으키게 되면 도리어 我相이 강화될 뿐이다. 다시 말해, 계율이라는 法의 공성(法空)에 대한 터득이 없으면 무아(我空)의 실상 역시 체득될 수 없는 것이다.

 

 

⑶ 我有法空 - 막행막식적 非윤리

 

『大智度論』에서는 惡取空的인 空見을 가지 邪見人과 空을 올바로 파악한 觀空人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136)

 

           <邪見人>

① 모든 법을 斷滅시켜 空이 되게 함

② 모든 법의 空相을 取해 희론함

③ 비록 입으로는 일체가 空하다고 하지만 貪心, 瞋心, 自慢心, 癡心을 발한다

④ 금세에 폐인이 되고 내세에 지옥에 떨어짐

⑤ 空空三昧가 없다.

⑥ 다른 功德 없이 생각 속에서 空만 얻으려 한다.

 

          <觀空人>

① 모든 법이 원래 眞空이라 파괴되지 않음을 안다.

② 모든 법의 空함을 아나 空相를 취하지 않고 戱論도 하지 않는다.

③ 空을 올바로 알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며 번뇌도 생하지 않는다.

④ 금세에 명예를 날리고 후세에 부처가 됨

⑤ 空空三昧가 있다.

⑥ 먼저 무량한 보시와 지계, 禪定을 행한 후 眞空을 얻는다.

 

여기서 말하는 邪見人이란 罪도 없고 福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이들은 금세는 있으나 후세는 없다고 생각한다.137) 즉, 내세가 없기에 인과응보의 이치도 없다. 따라서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꺼리낄 것이 없다. 비윤리적 행동을 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관념적으로 파악된 空, 다시 말해 無我의 實相에 대한 실천적 증득 없이 이해된 法空은 다만 모든 가치판단을 상실케 할 뿐이다. 龍樹는 이러한 空病을 우려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잘못 파악된 空性은 지혜가 열등한 자를 파괴한다. 마치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닦은 呪術과 같이138)

 

소승불교의 위빠싸나(vipassan ) 수행은 매 찰나 明滅하는 法들에 주시함으로써, 우리가 그 존재를 당연시하던 일상적 自我가 사실은 거짓되게 구성된 것임을 體得하게 해 주는 수행법이다. 즉, 無我를 자각케 하는 我空의 수행이다. 我空에 대한 철저한 체득은 法空에 대한 조망도 수반하는 것이겠지만, 미숙한 위빠싸나 수행자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여 과거의 아비달마 논사들처럼 法有論的 세계관139)을 갖게 되기 쉽다. 그와 반대로 『中論』은 法空의 이치에 대해 기술한 논서이다.140) 북방불교의 전통적 수행법 중의 하나인 看話禪의 경우 수행자는 話頭를 타파하여 法空을 자각하게 된다. 물론, 法空에 대한 진정한 自覺을 통해 我空 역시 體得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숙한 看話禪 修行者나 中觀行者는 자칫하면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된 惡取空者가 될 수도 있다. 악취공자는 善과 惡, 輪廻와 涅槃, 부처와 衆生, 깨끗함(淨)과 더러움(不淨), 옳고(是) 그름(非) 등 모든 개념(法)에 대한 固着에서는 벗어났으나, 貪心과 瞋心의 求心點인 我相은 남아 있기에 아무 죄책감 없이 막行막食을 하기 쉽다. 막행막식은 다만 空病의 한 症狀일 뿐이다. 『中論』을 불교의 핵심으로 간주해 온 티베트 불교계나, 看話禪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간주하는 한국 불교계의 일부에서 가끔 막행막식의 수행자가 발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141)

 

 

⑷ 我空法空 - 無住相的 대승윤리

 

진정한 대승보살은, 自他不二의 我空을 터득하였기에 동체대비의 무량한 자비심으로 충만해 있으며, 모든 개념이 해체되는 法空을 터득하였기에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분별을 내지 않는다. 보시행의 경우 무엇을 남에게 준다는 분별을 내지 않는다. 즉, <無住相의 布施>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보시바라밀이라고도 하는 바 보시를 행하되 無所得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비단 보시행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덕목의 윤리행도 무소득으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무주상적 대승윤리의 요체이다. 다시 말해 <無所得>이라는 진제적 측면과 <윤리행>이라는 속제적 측면이 균형을 이룬 상태의 삶이 바로 대승 보살의 윤리적 삶인 것이다. 三論學의 巨匠 吉藏은, 小乘의 我空法有的 수행자와, 大乘 내의 我有法空的 邪見人 모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 십이연기법이나 오온 따위의 확고한 모습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第一義諦를 모르는 사람들이고 이와 반대로 대승의 필경공이라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죄도 없고 복도 없고 인과응보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世俗諦를 모르는 사람들이다.142)

 

진정한 대승보살은 我空에서 비롯된 속제적 윤리와 法空에서 터득된 진제적 관조가 균형을 이룬 無住相의 윤리를 시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六波羅蜜行인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준다는 생각을 낸다면 그것은 단순한 보시행(布施行)일 뿐 바라밀은 아니다. 내가 어떤 계율을 지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지계행(持戒行)일 뿐 바라밀은 아니다. 내가 누군가의 괴롭힘을 참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인욕행(忍辱行)일 뿐 바라밀은 아니다. 내가 어떤 일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단순한 정진행(精進行)일 뿐 바라밀은 아니다. 내가 어떤 특정한 선정을 닦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단순한 선정(禪定)일 뿐 바라밀은 아니다. 내가 어떤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단순한 지혜(智慧)일 뿐 바라밀은 아닌 것이다.143) 바라밀의 조망이 결여된 보시 등의 세속적 공덕들은 다만 세간적 과보만 초래할 뿐이다.144) 즉, 그런 공덕들은 하늘나라(天上)나 인간계에서의 삶을 보장할 뿐 결코 열반의 길잡이가 될 수는 없다. 여섯 가지 덕목을 행하되, 그것이 空性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육바라밀행만이 成佛을 향한 菩薩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보시를 행하되 주는 자나 받는자나 줄 물건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계율을 지키되 계율이나 지계인이나 파계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나아가 지혜를 추구하되 지혜나 지혜가 있는 자나 없는 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145)

진정한 <空의 윤리>란, 我法俱空에 토대를 둔 것으로, 六波羅蜜에서와 같이 세속적 윤리와 공성에 대한 관조가 균형을 이루는 <中道의 윤리>이며, 나와 남을 분할하지 않는 <緣起의 윤리>인 것이다.146)

 

 

 

5. 끝맺는 말 - 空은 진정한 倫理를 산출한다

 

 

空과 倫理는 결코 갈등하지 않는다. 교리적으로는 공 사상의 이제설에서 엄연히 세속적 윤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自他가 不二하기에 우리는 利他的이지 않을 수가 없다. 오히려 공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진정한 윤리가 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윤리란, 空에 대한 집착이 야기한 막행막식적 <無碍行>도 아니고 我相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僞善의 윤리도 아닌, '내가 무엇을 한다'는 관념 없는 <無碍心>에 입각한 육바라밀의 윤리이다. 진제적 空觀과 속제적 善行이 함께하는 六婆羅蜜의 실천이야말로 이기심이 해체[我空]된 상태에서 분별 없이[法空] 행해지는 無住相의 <空의 倫理>인 것이다.

또, 세속적 윤리는 無條件的인 至上命令이 아니다. 만물의 실상인 空性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바로 세속적 윤리이다. 따라서 공성에 대한 자각의 깊이에 부응하여, 그 윤리의 차원도 심화된다. 왜냐하면 空과 倫理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일한 구조의 다른 측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思考가 能所不二의 空性을 위배하여 分別을 시작할 경우 <자가당착>이라는 논리적 역설에 빠지듯이, 우리의 행위가 自他不二의 空性을 위배하여 愛憎을 표출할 경우, 우리는 <인과응보>라는 행위의 역설에 빠진다. 누군가가 善行이나 惡行을 하였을 경우 어떤 절대자가 있어서 그에 상응하는 賞罰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147) 이 세상의 역설적 구조로 인해 인과응보가 발생된다. 인과응보의 이치가 정연하기에 숨을 곳도 없다. 나의 행동을 내가 보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理論理性의 한계를 지적한 칸트(I. Kant)는, 우리가 윤리적이어야 하는 實踐理性의 근거를 '우리 마음 속의 도덕률'에서 찾았다. 칸트는 논리적 사변을 통해서는 결코 윤리와 도덕의 當爲性이 도출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佛敎의 空 思想에서 양자는 合一된다. 즉, 空性에 대한 知的인 자각을 통해 도덕률이 도출되는 것이다. 티베트의 密敎에서는 이를 男女가 교합한 모습의 合體尊으로 형상화하였다.148) 반야 지혜로서의 어머니(般若母)와 자비 방편으로서의 아버지(方便父)가 男尊(yab)과 女尊(yum)의 모습으로 交合하고 있는 모습은 <理論理性>의 극단에서 발견되는 空性과 <實踐理性>의 원동력인 大悲心이 합일한 大樂具現의 경지를 상징화한 것이었다.149)

空性을 體得한 菩薩은 결코 無差別과 無分別의 彼岸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때 그 어느 곳에서든, 그 때 그 곳에 가장 알맞는 差別과 分別로써 利他의 大悲行을 示現한다.

一切法의 空性을 관조하신 觀世音菩薩께서는 그래서 千萬億의 化身으로 나타나신다.


1)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기원전 500년경)의 逆說: 金容雲·金容局 共著, 集合論과 數學, 祐成文化社, 1991, p. 390 참조.

2) 이는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모든 집합은 두 가지로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지 않는 집합(Ex: 도시들의 집합)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는 집합(Ex: 도서관에 꽂힌 도서관의 장서 목록)이다. 전자를 보통의 집합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특수한 집합이라고 부를 경우 보통 집합들 전체의 집합은 과연 보통의 집합일까, 아니면 특수한 집합일까? 만일 <보통의 집합들 전체의 집합>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지 않는 <보통의 집합>이라면, <보통의 집합들 전체의 집합>도 <보통의 집합>이고 그 원소인 <보통의 집합들> 역시 <보통의 집합>이기에 <보통의 집합들 전체의 집합>의 원소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기에, 결국 <보통의 집합들 전체의 집합>은 자기 자신도 원소로 하는 <특수한 집합>이 되고 만다. 이와 반대로 <보통의 집합들 전체의 집합>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는 <특수한 집합>이라면 <보통의 집합들 전체의 집합>은 <특수한 집합>이나 그 원소는 <보통의 집합들>이기에 <보통의 집합들 전체의 집합>의 원소에는 자기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꼴이 되며, 결국 <보통의 집합들 전체의 집합>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지 않는 <보통의 집합>이 되고 만다. 즉, <보통의 집합 전체의 집합>이 <보통의 집합>이라면 <특수한 집합>이 되어야 하고, <특수한 집합>이라면 <보통의 집합>이 되고 마는 것이다(위의 책, p. 387 참조).

3) 이는 다음과 같다: 형용사 A는 그 자신이 A라는 성질을 가질 때 '自敍的(autological)'이라고 하고, 그러한 성질을 갖지 않을 때 '他敍的(heterological)'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타서적(heterological)'이라는 형용사는 '타서적(heterological)'인가? 예를 들어, 'long(긴)', 'red(붉은)'란 형용사 자체는 전혀 길지도 않고 붉지도 않기에 타서적(heterological)이다. 그러나 'English(英語인)',라는 형용사는 그 자체도 英語이고, 'four-syllabic(네 음절의)'이라는 형용사 역시 그 자체가 네 음절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들 형용사는 자서적(autological)이다. 그러면 '타서적인(heterological)'이라는 형용사는 타서적인가, 자서적인가? 만일 '타서적인'이라는 형용사가 '타서적'이라면 타서적이라는 형용사는 자서적인 형용사이어야 하고, 그와 반대로 '타서적인'이라는 형용사가 '자서적'이라면 타서적이라는 형용사는 타서적인 형용사이어야 한다(위의 책, p. 388).

4) 우편 엽서의 한쪽에는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거짓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그 반대쪽에는 <이 엽서의 반대쪽에 있는 문장은 참이다>라고 쓰여 있는 경우(수잔 하크, 김효명 譯, 논리철학, 종로서적, 1993, p. 176 참조).

5) 특정한 整數(Ex: 素數, 完全제곱數)들을 정의한 문장들을, 각 문장의 길이의 長短과 알파벳 순서의 전후 관계에 따라 차례로 배열한 후, 각 문장들을 일련의 數字에 대응시킬 때, 대응시킨 숫자의 성격이 그 문장이 의미하는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 그 숫자를 '리샤르數'라고 정의하게 되는데, 이런 정의 역시 특정한 整數에 대한 정의(=리샤르數에 대한 정의)이기에 그에 대응되는 數字가 있게 된다. 이 때 <리샤르數에 대한 정의에 대응하는 數 n은 리샤르數인가?>라고 묻는 경우 逆說(paradox)이 발생하게 된다. 즉, n이 리샤르數라면 n은 리샤르數가 아니어야 하고 n이 리샤르數가 아니라면 n은 리샤르數이어야 하는 것이다(金容雲·金容局, 앞의 책, pp. 389∼390에서 要約).

6) 수잔 하크, 앞의 책, p. 176.

7) 金容雲·金容局, 앞의 책, p. 386.

8) 金容雲·金容局, 위의 책, pp. 385∼386.

9) "떠들지 마!"라는 소리를 냄으로써 더 떠들었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 만일 그것이 더 떠든 것이 아니라면 사실에 위배된다.

10) "낙서금지"라는 낙서를 하였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 만일 그것이 낙서가 아니라면 사실에 위배된다.

11) 자신도 백화점을 붐비게 만든 사람이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 자신만은 백화점을 붐비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면 사실에 위배된다.

12) 차후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일상인들이 역설적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는 태도는 "무한의 영역까지 집합론의 적용 대상으로 삼았던 칸토르(Cantor) 이전의 수학자들의 태도"에 대비되고, 역설에 대한 자각과 그에 대한 순응하는 태도는 럿셀(Russell)의 階型異論, 타르스키(Tarski)의 二種言語論, 체르멜로(Zermelo)의 公理的 集合論의 해결 방안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13)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6.53에서의 진술이 逆說(paradox)에 빠짐을 인정하며 곧이어 6.54를 기술하여 이런 역설에서 빠져나가고자 하였다. 이를 인용해 본다: "6.53 철학하는 올바른 방법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 ― 즉, 자연과학적인 명제들이나 철학과는 무관한 것 ―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 누군가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얘기하고자 할 때면 언제나, 그에게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 이런 식의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만족스러울지 모르지만 ― 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 오직 이런 식으로 하는 것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이 해명된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나의 명제들을 이용하여 기어올라가 나가 버리고 나면, 결국 그것들[=나의 명제들]이 무의미한 것임을 알게 된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간 다음에는, 소위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보게 된다."(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C. K. Ogden Trs., International Library of Psychology, Philosophy and Scientific Method, pp. 187∼189).

14) "흔히 있어온 데리다에 대한 표면적인 비판은 그가 '진리'와 '논리'의 가치에 대하여 의심을 품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자기 주장의 진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논리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단 사럽(Madan Sarup)외, 임헌규 편역, 데리다와 푸꼬,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인간사랑, 1995, p. 48.

15) sata eva prati edho yadi nyatva  nanu prasiddham idam/ prati edhayate hi bhav n bh v n  ni svabh vatvam//: 『廻諍論』, 第61頌.

16) prati edhayase 'tha tva   nyatva  tacca n sti nyatvam/ prati edha  sata iti te nanve a vih yate vc da //: 『廻諍論』, 第62頌.

17) 집에 항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은 [항아리가] 존재하는 경우에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가 자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성이 원래] 존재하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sata eva prati edho n sti gha o geha ityaya  yasm t/ d a  prati edho 'ya  sata  svabh vasya te tasm t//: 『廻諍論』, 第11頌).

18) 末木剛博, 記號論理學, 金仁洙·鄭 燮 共譯, 學文社, 서울, 1993, p. 151 참조.

19) 『大智度論』은 산스끄리뜨 원문이나 티베트 역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번역자 鳩摩羅什의 가필인 듯한 구절들이 많이 발견되기에 그 저자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龍樹의 眞撰으로 인정되는 다른 논서의 사상에 그대로 부합된다.

20) 瞿曇我一切法不受 佛問長爪 汝一切法不受 是見受不 … 瞿曇一切法不受是見亦不受 … 汝不受一切法是見亦不受則無所受與衆人無異 何用自高而生 慢: 大正25, 『大智度論』, p. 62a.

21) 수잔 하크, 앞의 책, pp. 188∼193 참조.  

22) utp dasthitibha g n manyatsa sk talak a am/ asti cedanavasthaiva  n sti cette na sa sk t // 若謂生住滅 更有有爲相 是卽爲無窮 無卽非有爲: 『中論』, <7-3>.

23) 이 예는 "이 명제는 거짓이다"의 경우와 같은 전형적 역설과 그 형식이 다르다. 오히려 "이 명제는 참이다"라는 명제의 근거(ground)의 무한소급적 성격이 이 예의 역설 구조에 대응된다고 보겠다(수잔 하크, 앞의 책, pp. 188∼193). 어떤 주장의 진위의 근거가 어느 고정점(fixed point)에서 멈추게 될 경우는 그 주장은 근거 있는 주장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게 되어 위와 같은 근거 없는 주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24) 또, 만일 그대에게 있어서 갖가지 事體들이 인식 방법에 토대를 두고 성립한다면, 그대에게 있어서 그 인식 방법들은 다시 어떻게 성립하는지 말하거라(yadi ca pram aste te  te  prasiddhirarth n m/ te  puna  prasiddhi  br hi katha  te pram nam//): 『廻諍論』, 第31頌.

25) anyairyadi pram ai  pram asiddhirbhavettadanavasth / n de  siddhistatr sti naiva madhyasya n ntasya//: 『廻諍論』, 第32頌.

26) te matha pram airvin  prasiddhirvih yate v da / vai mikatva  tasminvi e ahetu ca vaktavya //: 『廻諍論』, 第33頌.

27)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論者의 拙稿 「龍樹의 中觀 論理의 起源」(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의 내용 중 pp. 187∼209를 참조하기 바람.

28) gant  t vadgacchat ti kathamevopapatsyate/ gamanena vin  gant  yad  naivopapadyate// 若言去者去 云何有此義 若離於去法 去者不可得

29)gamane dve prasajyete gant  yadyuta gacchati/ ganteti cocyate yena gant  sanyacca gacchati//(梵頌 2-11) 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30) pak o gant  gacchat ti yasya tasya prasajyate/ gamanena vin  gant  ganturgamanamicchata //(梵頌 2-10) 若謂去者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者 說去者有去

31) 이는 中觀 論理의 비판 대상인 四句分別 중 第一句的인 분별을 의미한다.

32) yad ndhanamapek y gniragne  siddhasya s dhanam/ eva  sat ndhana  c pi bhavi yati niragnikam// 若因可燃燃 則燃成復成 是謂可燃中 則謂無有燃: 『中論』, <10-9>

33) n pa yam na  bhavati yad  ki  cana dar anam/ dar ana  pa yat tyeva  kathametattu yujyate//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中論』, <3-4>.

34) alak a o na ka cicca bh va  sa vidyate kva cit/ asatyalak a e bh ve kramat  kuha lak a am// 是無相之法 一切處無有 於無相法中 相則無所相: 『中論』, <5-2>.

35) svapudgalak ta  du kha  yadi du kha  punarvin / svapudgala  sa katamo yena du kha  svaya  k tam// 若人自作苦 離苦何有人 而謂於彼人 而能自作苦: 『中論』, <12-4>.

36) <자기 언급>(金容雲·金容局, 앞의 책, p. 393), 또는 <자기 부정을 포함하는 전체>(末木剛博, 앞의 책, p. 151).  

37) Russell & Whitehead, Principia Mathematica Ⅰ, London, 1925, p. 37.

38) 본고, 각주 4) 참조. 또는 다음과 같은 문장: "이 다음 문장은 거짓이다. 이 앞 문장은 참이다."

39) 수잔 하크, 앞의 책, pp. 181∼181. 참조.

40) 콰인(W. V. O. Quine)의 역시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Two Dogmas of Empiricism)」라는 논문을 통해 종합판단과 분석판단을 구분하는 것은 근거 없는 독단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 더욱이 경험에 근거하여 우연히 성립하는 종합적 진술과 어느 경우에나 성립하는 분석적 진술간의 경계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된다. 어떤 진술이든지 우리가 체계 내의 여러 곳을 충분히 철저하게 조정한다면 경우에 상관 없이 참이라고[=Tautology적인 분석판단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W. V. O. 콰인, 논리적 관점에서(Froma a Logical Point of View), 허라금 역, 서광사, 1993, p. 62)

41) 칸트, 純粹理性批判, 尹聖範 譯, 乙酉文化社, 1983, pp. 58∼60.

42) 만일 '가는 자'가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둘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자'라고 말하는 것과, 존재하는 '가는 자', 또, 그 자가 간다는 사실에 의해서(gamane dve prasajyete gant  yadyuta gacchati/ ganteti cocyate yena gant  sanyacca gacchati// 『中論』, <2-10>): 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2-11>)

43) atr ha/ yadyapyeva  tath pi devadatto gacchat ti vyapade asadbh v dgamanamast ti// naiva / yasm ddevadatt rayaivai aiva cint  kimasau gant  san gacchati uto 'gant  gacchati tadvyatirkito veti sarvath  ca nopapadyata iti yatki  cidetat//: Candrak rti, Prasannapad , de la Vall e Poussin Ed., Bibliotheca Buddhica Ⅳ, 1977, p. 99.

44) 金容雲·金容局, 앞의 책, p. 387.

45) 이 경우는 물론이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의 의미는 확률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개념의 內包(intension)와 外延(extension)에 대한 규정이 可變的이라는 점도 이러한 '개념의 확률적 의미 규정'의 임의성에 기인한다. 확률론의 정규분포도에서 밀도함수에 대응하는 확률변수 x가 -∽< x <∽의 범위를 갖는 데서 보듯이, 우리가 쓰는 어떤 하나의 개념의 의미가 원래는 무한으로 열려 있지만, 세속언설(vyavah ra)의 세계에서는 잠정적인 규약에 의해 x의 의미를 恣意的으로 설정하고 어떤 판단이나 추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예로 든 '장서목록'이나 '도서관'이라는 개념의 의미 규정도 원칙적으로는 무한으로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華嚴 敎學에서 말하는 '一卽一切 多卽一'의 원리이다. 즉, 무한-보편타당하게 정의하자면 '모든 것(一切)이 도서관(一)'이고 '모든 것(一切)이 장서 목록(一)'인 것이다. 따라서 '도서관의 장서 목록'이라는 事態가 자기지칭적(self-referent)임에도 역설(paradox)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도서관'이나 '장서 목록'이라는 개념의 의미에 대한 의미 규정이 선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 규정은 임의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자기지칭적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을 야기하지 않는 사태가 있다.'는 주장은 보편타당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46) 수잔 하크, 앞의 책, p. 176 참조.

47) 수잔 하크, 위의 책, p. 181.

48) 'English'는 '영어의'라는 뜻을 갖는 '영어'이기에 그 자체도 지칭하며, '검은(Black)'이라는 형용사는 그 자체도 검은 색이기에 이 역시 그 자체도 지칭하기에 自敍的(autological)인 형용사라고 한다.

49) 검은 색.

50) 7字.

51) 논자는 럿셀등이 예로 들었던 '전형적 역설(paradox)'은 물론, 크립키(Kripke)적 '근거 없음(ungroundedness)'과, 中觀論理의 '同語反覆的 逆說'까지를 모두 포괄하여 역설적 상황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內包時의 오류와 排除時의 오류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三者의 성격이 공통되기 때문이다.

52) 末木剛博, 앞의 책, p. 151.

53) 一圓相(○)

54) 이는 비단 논리의 영역뿐만 아니라 윤리의 영역에도 적용된다. 불교적 윤리설인 인과응보설도 남에게 끼친 해악이나 이익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역설적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次日로 미룬다.

55) sarve  bh v n  sarvatra na vidyate svabh va cet/ tvadvacanamasvabh va  na nivartayitu  svabh vamalam//: 『廻諍論』, 第1頌.

56) atha sasvabh vametadv kya  p rv  hat  pratij  te/ vai amikatva  tasmin vi e ahetu ca vaktavya //: 『廻諍論』, 第2頌.

57) 럿셀은 원칙적으로 모든 역설이 악순환의 원리(V.C.P.: vicious circle principle)를 어긴 것에 기인한다고 본다(수잔 하크, 앞의 책, p. 183 참조).

58) <의미론적 역설(semantic paradox)>, 또는 <인식론적 역설(epistemological paradox)>이라고도 하며, 거짓말쟁이 역설과 그 변형들, 그렐링의 역설, 베리의 역설, 리샤르의 역설 등이 이에 속한다(수잔 하크, 위의 책, p. 179. 참조).

59) <논리적 역설(logical paradox)>이라고도 하며, 럿셀의 역설, 칸토르(Cantor)의 역설, 부랄리-포르티(Burali-Forti)의 역설등이 이에 속한다(수잔 하크, 위의 책, p. 179.).

60) 럿셀 역시 논리상의 역성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형(type)의 개념을 쓰고, 언어상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원(order)의 개념을 쓰고 있기에 램지(Ramsey)적 분류를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있다(末木剛博. 앞의 책,  p. 150. 참조).

61) 末木剛博, 앞의 책, p. 307.

62) 위의 책, p. 310.

63) 수잔 하크, 앞의 책, p. 187.

64) 상대의 주장을 역설에 빠뜨려 비판하는 경우 <자띠(j ti) 논법> 중의 <無窮·反喩 相似(prasa ga-pratid nta-sama)> 논법과 같이 두 갈래의 논의만 제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서양 논리학의 전형적 역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섯 갈래의 논의( a ko iko v da )>에서는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圓環 構造>를 가진 논의들을 나열함으로써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위의 인용문에 표시하였듯이 논의가 A→B, ∼B→C, ∼C→D, ∼D→E, ∼E→F, ∼F→A로 이어진다. 이런 <여섯 갈래의 논의( a ko iko v da )>의 구조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긴다.

65) <여섯 갈래의 논의> 중 이 문장에 한해서 티베트譯本과 漢譯本의 내용이 다르다. 위의 梵本은 그 내용이 漢譯本과 일치한다. 티베트譯本과 漢譯本의 원문과 그 번역은 다음과 같다: *  gal-te thad-pa yin-no she-na/ d os-po thams-cad ni sto -pa-yin-no shes bkag-pas des-na khyod-kyi tshig kya  sto -pa-yin-la/ sto -pa- id yin-pa i phyir des ni gog-pa mi thad-do: 만일 인정함이 있다고 한다면/ 모든 사태는 공하다고 하는 억제에 의해, 그로 인해 그대의 말도 공하며/ 공성이기 때문에, 그에 의해 소멸함은 인정되지 않는다(台北版, p. 380, 243葉, 1째줄∼2째줄.). *  又若相應言語能遮一切法體 一切法空語則不空 語若不空遮一切法則不相應(高麗大藏經, 卷17, p. 758a∼b.): 또, 만일 말이 모든 법들의 실체를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이 상응한다면, 모든 존재는 공하다는 말은 공하지 않은 것이다. 말이 만일 공하지 않다면 모든 법들을 부정하는 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66) [1] cetpuna   ny  sarvabh v stena tvadvacana   nya  sarvabh v ntargatatv t/tena nyena prati edh nupapatti / tatra ya  prati edha   nya  sarvabh v  iti so 'nupapanna / [2] upapanna cetpuna   ny  sarvabh v  iti prti edhastena tvadvacanamapya nyam/ a nyatv danena prati edho 'nupapanna / [3] atha ny  sarvabh v stvadvacana  c nya  yena prati edha , tena tvadvacana  sarvatr sa g h tam/ tatra d ntavirodha / [4] sarvatra cetpuna  sa g h ta  tvadvacana  sarvabh v ca ny stena tadapi nyam/ nyatv danena n sti prati edha / [5] atha nyamasti c nena prati edha   ny  sarvabh v  iti tena ny  api sarvabh v  k ryakriy samarth  bhaveyu  na caitadi am/ [6] atha ny  sarvabh v  na ca k ryakriy samarth  bhavanti m  bh d d ntavirodha iti k tv , nyena tvadvacanena sarvabh vasvabh vaprati edho nopapanna iti/: 『廻諍論』, 第2頌에 대한 주석.

67) yath  ca prat tyasamutp nnatv t svabh va ny  api rathapa agha daya  sve u sve u k rye u k hat am ttik hara e madh dakapayas m dh rane tav t tapaparitr aprabh ti u vartante, evamida  mad yav cana  prat tyasamutp nnatv n ni svabh vamapi ni svabh vatvapras dhane bh v n  vartate/ tatra yadukta  ni svabh vatv t tvad yavacanasya nyatva , nyatv ttasya ca tena sarvabh vasvabh vaprati edho nopapanna iti tanna/: 『廻諍論』, 第22頌 주석.

68) nirmitako nirmitaka  m y puru a  svam yay  s am/ prati edhayeta yadvat prati edho 'ya  tathaiva sy t//: 『廻諍論』, 第23頌.

69) athav  nirmitak y  yath  striy  str yamityasadgr ham/ nirmitaka  pratihany t kasyacideva  bhavedetat//: 『廻諍論』, 第27頌.

70) 『廻諍論』, 第1頌, 第2頌.

71) prati edhaprati edho 'pyevamiti mata  bhavettadasadeva/ eva  tava pratij  lak a ato d syate na mama//: 『廻諍論』, 第4頌.

72) yadi k cana pratij  sy nme tata e a me bhaveddo a / n sti ca mama pratij  tasm nnaiv sti me do a //: 『廻諍論』, 第29頌.

73) sata eva prati edho n sti gha o geha ityaya  yasm t/ d a  prati edho 'ya  sata  svabh vasya te tasm t//: 『廻諍論』, 第11頌.

74) 이는 <자띠(j ti) 논법> 중 <無窮·反喩 相似(prasa ga-pratid nta sama)> 논법에 해당된다.

75) 만일 존재하기 때문에 부정이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런 空性은 성립한다. 왜냐하면, 그대가 사물의 無自性性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sata eva prati edho yadi nyatva  nanu prasiddham idam/ prati edhyate hi bhav n bh v n  ni svabh vatvam//): 『廻諍論』, 第61頌.

76) 만일 그대가 공성을 부정하고 또 공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한다는 그대의 이런 논의는 오히려 무너진다(prati edhayase 'tha tva   nyatva  tacca n sti nyatvam/ prati edha  sata iti te nanve a vih yate v da //): 『廻諍論』, 第62頌.

77) prati edhay mi n ha  ki cit prati edhyamasti na ca ki cit/ tasm tprati edhayas tyadhilaya e a tvay  kriyate//: 『廻諍論』, 第63頌.

78) nirmitako nirmitaka  m y puru a  svam yay  s am/ prati edhayeta yadvat prati edho 'ya  tathaiva sy t//: 『廻諍論』, 第23頌.

79) athav  nirmitak y  yath  striy  str yamityasadgr ham/ nirmitaka  pratihany t kasyacideva  bhavedetat//: 『廻諍論』, 第27頌.

80) tadyath  ka cidbr y davidyam nag he devadatte 'sti g he devadatta iti/ tatraina  ka citpratibr y n n st ti/ na tadvacana  devadattasy sadbh va  karoti ki tu j payati kevalamasa bhava  g he devadattasya/ tadvann sti svabh vo bh v n mityetadvacana  na bh v n  ni svabh vatva  karoti ki tu sarvabh ve u svabh vasy bh va  j payati/: 『廻諍論』, 第67頌의 주석.

81) 大乘經典인 『菩薩瓔珞本業經』이나 『梵網經』에서는 攝律義戒와 攝善法戒와 攝衆生戒라는 三聚淨戒의 윤리를 말한다. 섭율의계란 모든 惡을 끊는 것으로 五戒와 十戒 등이 그 예이다. 섭선법계란 적극적으로 모든 善을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데 붓다의 팔만사천 法門이 그것이다. 섭중생계란 慈·悲·喜·捨의 四無量心으로써 모든 중생이 안락을 얻게 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적 윤리는 上求菩提的인 自利의 윤리와 下化衆生的인 利他의 윤리로 구분할 수 있는데 金東華가 분류하듯이 악을 끊는 섭율의계와 선을 행하는 섭선법계는 자리의 윤리에 속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섭중생계는 이타의 윤리에 속한다(김동화, 불교윤리학, pp. 314∼315). 여기서 말하는 自利의 윤리란 개인윤리에 해당되며 利他의 윤리란 사회윤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2) 윤회는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열반은 윤회와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na sa s rasya nirv tki  cidasti vi e a am/ na nirv asya sa s r tki  cidasti vi e a am// 涅槃與世間 無有少分別 世間與涅槃 亦無少分別(龍樹, 『中論』 第25 觀涅槃品 第19偈).

83) 西谷啓治, 『宗敎とはなにか』, 西谷啓治著作集, 創文社, 東京.

84) 길희성, 민중불교 禪 그리고 사회윤리적 관심, 종교연구 제4집, 서울, 한국종교학회, 1988, p. 36.  

85) karma svabh vata cetsy cch vata  sy dasa ayam/ ak ta  ca bhavetkarma kriyate na hi a vatam// 若業有性者 是則名爲常 不作亦名業 常則不可作(『中論』, 17-22)

86) ak t bhy gamabhaya  sy tkarm k taka  yadi/ abrahmacaryav sa ca do astatra prasajyate// 若有不作業 不作而有罪 不斷於梵行 而有不淨過(『中論』, 17-23)

87) kle  karm i deh ca kart ra ca phal ni ca/ gandharvanagar k r  mar cisvapnasa nibh // 諸煩惱及業 作者及果報 皆如幻與夢 如炎亦如嚮(『中論』, 17-33)

88) <사성제> 중의 <道諦>와, <십이연기설>의 三世兩重的 因果應報觀에 토대를 둔 有情類의 행동이 <세속적 윤리>에 해당된다.

89) …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

90) 사실 이것은 以毁佛語 承佛意의 苦肉策이다.

91) 龍樹의 저술이지만 번역자 鳩摩羅什이 가필한 부분이 많다.

92) nyat  sarvad n  prokt  ni sara a  jinai / ye  tu nyat d ist nas dhy n babh ire(『中論』, 13-8)//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中論』, 13-9)

93) 大正25, p. 66a, 64a, 197c.

94) 大正25, p. 117c, 133b, 162c.

95) 問曰 若無時 云何 聽時食 遮非時食 是戒 答曰 我先已說 世界名字法有時非實法 汝不應難 亦是毘尼中結戒法 是世界中實 非第一實法相 吾我法相實不可得故… (大正25, p. 66a.)

96) 『中論』, 第24 觀四諦品 第1偈∼第6偈.

97) dve satye samup ritya buddh n  dharmade an / lokasa v tisatya  ca satya  ca param rthata // 諸佛衣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中論』, 24-8).

98) 菩薩觀知諸法從四緣生而不取四緣中定相 … 般若波羅蜜中但除邪見而不破四緣(『大智度論』, 大正25, p. 297b∼c)

99) 因緣 비판: 어떤 존재(法)가 있을 때 그것은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처럼 나타난 것에 <因緣>이 있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하겠느가?(梵頌, 1-7)/ 緣緣 비판: 실로 존재하는 이런 법은 攀緣되는 것이 아니라고 교시되었다. 그래서 攀緣되지 않는 法이라면 다시 어떻게 攀緣이 있겠는가?(梵頌, 1-8)/ 次第緣 비판: 사물들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소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속된다는 것(次第性)은 타당하지 않다. 또 소멸했다면 무슨 緣이 있겠느냐?(梵頌, 1-9)/ 增上緣 비판: 무자성한 존재물들에는 존재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있음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梵頌 1-10)

100) 엄밀히 말하면 모든 계율은 自利의 측면과 利他의 측면을 공유하고 있기에 自利卽利他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본 논문은 속제적 입장에서 기술하는 것이기에 위와 같이 양자를 구분한다.

101) 金東華, 佛敎倫理學, 寶蓮閣, pp. 133∼149 참조.

102) 金東華, 위의 책.

103) 이는 田村智淳의 意譯(中觀の實踐, 講座大乘佛敎7 中觀思想 참조)으로 直譯을 하면 다음과 같다: '나건 남이건 [모두 ]공포와 고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른 쪽은 말고 한 쪽만 보호하는 차별이 어떻게 나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yad  mama pare  ca bhaya  du kha  ca na priya / tad tmana  ko vi e o yatta  rak mi netara )', Bibliotheca Buddhica Ⅰ, antideva, ik samuccaya , p. 2. Cecil Bendall Ed.

104) 轉識得智: 眼, 耳, 鼻, 舌, 身識이라는 前5識은 成所作智로, 第6 意識은 妙觀察智로, 第7 末那識은 平等性智로, 第8 阿賴耶識은 大圓鏡智로 전환한다.

105) 불교 수행자가 이러한 空의 논리를 터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걱정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살아 있다'는 생각 '죽음이 있다'는 생각등이 모두 우리의 분별적 사유가 구성해 낸 착각임을 자각케 함으로써 모든 걱정을 해소시켜 준다. 空의 논리를 통해 모든 分別苦가 消滅된다. 즉, 분별로 인해 야기된 고통이 열반에 든다(苦滅).

106) 칸트적 의미의 이율배반(antinomy). 불교에서는 二邊이라고 부른다.

107) imasmi  sati ida  hoti, imassupp d  idam uppajjati, imasmim asati ida  na hoti imassanirodh  idam nirujjhati(Sa yutta-Nik ya Vol.Ⅱ, 37.5, P.T.S., p. 65).

108) 연기관계를 연기공식의 유전문에서와 같이 긍정적으로 표현하게 되면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용수는 제1 관인연품에서 심지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공식조차 비판한다. 모든 사물은 그 자성이 없기에, '이것'이건 '저것'이건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연기공식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경우 우리는 '이것이 있으면'이라고 말함으로써 '이것'의 실재성을 前提해야 하기 때문이다('무자성한 존재물들에는 존재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bh v n  ni svabh v n  na satt  vidyate yata / sat damasmin bhavat tyetannaivopapadyate// 諸法無自性 故無有有相 說有是事故 是事有不然: 『中論』, <1-12>]).

109) 위에 인용한 예 이외에도 『中論』 <6-2>, <7-30>, <9-5>, <19-6>, <21-8>, <23-4>게송 등에서도 환멸연기적 표현이 등장한다.

110) gant ra  cettirask tya gamana  nopapadyate/ gamane 'sati gant tha kuta eva bhavi yati// 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以無去法故 何得有去者(『中論』, 2-7).

111) r pak ra anirmukta  na r pamupalabhyate/ r pe pi na nirmukta  d yate r pak ra am// 若離於色因 色則不可得 若當離於色 色因不可得(『中論』, 4-1).

112) 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na vidyate cedyasya sa na vidyanta im nyapi// 若眼耳等根 苦樂等諸法 無有本住者 眼等亦應無(『中論』, 9-11).

113) pak o gant  gacchat ti yasya tasya prasajyate/ gamanena vin  gant  ganturgamanamicchata // 若謂去者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者 說去者有去(『中論』, 梵頌 2-10)

114) gamane dve prasajyete gant  yadyuta gacchati/ ganteti cocyate yena gant  sanyacca gacchati// 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中論』, 梵頌, 2-11)

115) satk rya-v da: 결과로서의 현상 세계는 원인자에 내재한다는 세계관으로 상캬(s khya)의 쁘라끄리띠(prak ti) 轉變說이 그 예이다.

116) asatk rya-v da: 이는 결과로서의 현상 세계는 원인자에 내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출되는 것이라는 세계관으로 와이셰시까(vai e ika)의 積聚說이 그 예이다.

117) 두 개의 개념이 <주어>와 <술어>로서 만나면 하나의 <판단>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칸트(Kant)는 판단을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구분한다. 분석판단이란 술어의 의미가 주어 개념 중에 내포된 판단을 말하고 종합판단이란 술어의 의미가 주어 개념 중에 내포되어 있지 않은 판단을 말한다. 위에서 말하는 主中有述論的인 제1구적인 이해는 분석판단적 이해라고 볼 수 있고 主中無述論的인 제2구적인 이해는 종합판단적 이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龍樹는 그런 두 가지 이해를 모두 비판한다.

118) 논리적 역설을 이용하여 상대의 주장을 자가당착에 빠지게 만드는 비판법도 공의 논리에 속한다. 용수는 『회쟁론』에서 적대자의 비판을 논박하며 다음과 같이 논리적 역설을 이용한다: '만일 존재하고 있는 것만이 부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空性적 부정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그대는 '[空性的 부정인] 사물에 自性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sata eva prati edho yadi nyatva  nanu prasiddham idam/ prati edhayate hi bhav n bh v n  ni svabh vatvam//: 『廻諍論』, 第61頌.)' '만일 그대가 空性을 부정하고, 또 그런 空性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부정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그대의 이런 말은 파괴된다(prati edhayase 'tha tva   nyatva  tacca n sti nyatvam/ prati edha  sata iti te nanve a vih yate vc da //: 『廻諍論』, 第62頌.)'

119) 이 중 내포는 因中有果論, 배제는 因中無果論的 사고방식에 해당된다.

120) 럿셀(Russell)은 계형이론을 통해, 또 타르스키(Tarski)는 언어를 대상언어(object-language)와 메타언어(meta-languge)로 양분함으로써 역설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잔 하크(Susan Haak)는 이런 해결책은 형식적 해결책은 될지언정 철학적인 해결책은 아니며, 그 유용성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의 해결이 직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고 말한다(수잔 하크, 김효명 역, 논리철학, 종로서적, p. 187).

121) <자기 언급>(金容雲·金容局, 앞의 책, p. 393), 또는 <자기 부정을 포함하는 전체>(末木剛博, 앞의 책, p. 151).  

122) Russell & Whitehead, Principia Mathematica Ⅰ, London, 1925, p. 37.

123) 여기서 말하는 prasa ga sama와 pratid nta sama는 『니야야 수뜨라(Ny ya-s tra)』에 등장하는 자띠(J ti) 논법 에 속하는 것으로 논리적 역설(paradox)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이론을 비판할 때 구사하는 논법이다. 위에서는 '자가당착의 오류'와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라고 번역하였으나 '無窮相似(prasa ga sama)'와 '反喩相似(pratid nta sama)'라고 번역되기도 한다(金星喆, 龍樹의 中觀 論理의 起源, 東國大 博士學位 論文, 1996, pp. 49∼60 참조).

124) ○: 一圓相.

125) 그러면 不立文字나 開口卽錯은 역설에 빠진 말이기 때문에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문자나 말에 의한 공부만이 성행할 때 이를 시정해 주기 위해 발화된다면 不立文字나 開口卽錯이라는 선언은 효용을 갖는다. 즉, 應病與藥과 같이 문자나 말의 病이 先行할 때 마치 藥과 같이 쓰인다면 이런 言明은 문자나 말의 병을 치료해 준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言明들이 마치 하나의 도그마(dogma)와 같이 간주된다면 自家撞着에 빠지고 만다. 예를 들어 아무도 낙서하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집 담벼락에 <낙서금지>라는 글을 쓰게 되면 이는 자가당착에 빠진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동네 아이들이 죄책감 없이 낙서를 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글이 쓰여진다면 이는 앞으로의 다른 낙서를 방지해 주는 효과를 갖는 글이 될 것이다. 즉, 자가당착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은 有意味할 수 있다(金星喆, 逆說과 中觀論理, 伽山學報 第6號,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7, p. 158 참조). 첨언하자면, 이 경우 <낙서금지>라는 글귀에 의해 낙서가 방지되기 위해서는 그 글귀를 쓴 사람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응병여약과 같은 불교 교설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에 한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치밀한 反論理的 논리에 의해 쓰여진 『中論』도 처음(歸敬偈)과 마지막(第27 觀邪見品 第30 歸敬頌)은 다음과 같이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歸依의 게송으로 포장되어 있다: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緣起), 희론을 寂滅하며 吉祥인 緣起를 가르쳐 주신 正覺者, 제일의 설법자이신 그 분께 예배합니다.(anirodham anutp dam anucchedam a vatam/ anek rtham an n rtham an gamam anirgamam// ya  prat tyasamutp da  prapa copa amam ivam/ de ay m sa sa buddhasta  vande vadat  varam//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中論』, 歸敬偈)' '(잘못된) 모든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 연민을 갖고 正法을 설해 주셨던 가우따마 그분께 귀의합니다(sarvad iprah ya ya  saddharmamade ayat/ anukamp mup d ya ta  namasy mi gautamam// 瞿曇大聖王 憐愍說是法 悉斷一切見 我今稽首禮: 『中論』, 27-30).

126) 램지(Ramsey)는 역설을 <논리적 역설(= 집합론적 역설)>과 <인식론적 역설(= 의미론적 역설)>로 양분하는데, 本稿에서 사용하는 <논리적 역설>이란 術語는 知的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역설에 대한 통칭일 뿐 램지적 구분과는 무관하다.

127) 善行은 공중에 떡을 던지는 것에 비유된다: 『大智度論』에서는 제사의 공덕을 설명하면서 공중에 떡을 던지는 비유를 들고 있다. 윤회하여 다른 곳에 태어난 조상에 대한 祭祀 공덕은 마치 공중에 떡을 던지는 것과 같이 祭主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128) 貪心이란 대상을 깨끗하다(淨)고 착각하고 자신을 향해 끌어 당기는 마음이고 瞋心이란 대상을 더럽다(不淨)고 착각하여 배척하는 마음이다. 『中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淨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貪慾이 존재하겠는가. 不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瞋 가 존재하겠는가?(avidyam ne ca ubhe kuto r go bhavi yati/ a ubhe 'vidyam ne ca kuto dve o bhavi yati// 若無有淨者 何由而有貪 若無有不淨 何由以有 : 『中論』, 23-12).

129) 不垢不淨

130) 이 小論은 明의 妙 이 편집한 『寶王三昧念佛直指』의 내용 중의 일부(大正47, pp. 373c∼374a)를 풀어 해석한 것이다.

131) 上求菩提卽下化衆生

132) 『대반열반경』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유하자면 부모는 자식이 아픔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서 고뇌를 생한다(大般涅槃經, 제16권).

133) 龍樹의 직제자 阿利耶提婆 역시 <不淨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外道: 부정시란 무엇을 말하는가? 提婆: 보상을 바라는 보시가 부정한 것이다. 마치 시장에서의 거래와 같기 때문이다(外曰 何等名不淨施 內曰 爲報施是不淨 如市易故: 百論, 大正30, p. 169c)'.

134) 大正25, pp. 140c∼141a.

135) 或有持戒 不惱衆生 心無有悔 若取相生著則起諍競 是人雖先不瞋衆生 於法有憎愛心故 而瞋衆生 是故若欲不惱衆生 當行諸法平等 若分別是罪是無罪 則非行尸羅波羅蜜(大正25, p. 196c.)

136) 大正25, pp. 193c∼194a.

137) … 無罪無福人 不言無今世 但言無後世 如草木之類自生自滅 或人生人殺 止於現在更無後世生 …(大正25, 『大智度論』, p. 193c.)

138) vin ayati durd   nyat  mandamedhasam/ sarpo yath  durg h to vidy  v  du pras dhit // 不能正觀空 鈍根則自害 如不善呪術 不善捉毒蛇(『中論』, 24-11)

139) 自我는 없지만 자아의 구성 요소는 존재한다는 세계관. 예를 들어 五蘊 중 그 어떤 것도 자아가 아니지만, 五蘊인 色受想行識이라는 法들은 존재한다는 세계관.

140) 『中論』의 第9 觀本住品이나 第18  觀法品에서 我空에 대한 논의를 벌이고 있긴 하지만 이 때 논파되는 자아는 체험적 자아가 아닌 관념적 자아이다. 이는 法我, 즉, 개념으로서의 자아이다.

141) 위빠싸나를 수행하는 남방의 소승불교권에는 대승의 法空 사상이 보급되어야 하고 法空의 수행이 강조되는 북방의 대승불교권에는 소승의 我空 수행, 즉 위빠싸나 수행이 보급되어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의 대승불교 문화와 소승불교 문화가 서로 만나야 부처님의 참뜻을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다.

142) 吉藏, 二諦義 大正45, p. 83a.

143) 布施時作是念我與彼所受施者物 是名得檀那不得波羅蜜 我持戒此是戒 是名得戒 不得波羅蜜 我忍辱爲是人忍辱 是名得忍辱不得波羅蜜 我精進爲是事勤精進 是名得精進不得波羅蜜 我修禪那所受是禪那 是名得禪那不得波羅蜜 我修慧所修是慧 是名得慧不得波羅蜜(摩訶般若波羅蜜經, 大正8, p. 295a).

144) 布施等離般若波羅蜜 但能與世間果報(大智度論, 大正25, p. 191a).

145) 菩薩盡行六波羅蜜法 以無所得故 行檀那波羅蜜 不得施者不得受者不得財物 行尸羅波羅蜜 不得戒不得持戒人不得破戒人 乃至行般若波羅蜜 不得智慧不得智慧人不得無智慧人(摩訶般若波羅蜜經, 大正8, p. 293a.).

146) 空卽緣起, 緣起卽中道, 空卽中道임을 선언하는 다음과 같은 『廻諍論』과 『中論』의 구절은 위와 같이 空의 윤리에도 적용할 수 있다: '空性과 緣起와 中道가 하나의 의미임을 선언하셨던 분, 함께 견줄 이 없는 붓다이신 그 분께 예배 올립니다(ya   nyat  prat tyasamutp da  madhyam  pratipada  ca/ ek rth  nijag da pra am mi tamapratimabuddham//: 『廻諍論』, 第71頌 )'. '緣起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 공성]은 의존된 假名이며 그것[= 공성]은 실로 中道이다(ya  prat tyasamutp da   nyat  t  pracak mahe/ s  praj aptirup d ya pratipatsaiva madhyam //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中論』, 24-18)'.

147) 設或, 天神의 啓示나 恩寵, 治病, 救援 또는 懲罰에 대한 종교적 체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인간보다 위대하고 온갖 신통력을 갖추었지만, 愛憎을 갖고 三界 내에서 윤회하는 衆生神인 人格神의 행위(業)일 뿐이다.

148) 이는 儒家哲學에서 말하는 태극( )의 형상에 대비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49) 大樂具現形의 秘密集會만다라는 二重의 동심원과 三重의 동심방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태장만다라와 유사하지만, 佛·菩薩이 護敎와 降魔를 상징하는 忿怒尊의 모습을 띠고 있고, 大悲와 空性의 合一, 또는 方便과 般若의 합일, 또는 禪定과 智慧의 合一을 상징하는 合體尊(= 交合像)이 등장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金容煥, 만다라 - 깨달음의 靈性世界, 悅話當, 1991. 참조).

 

 

 

출처 : 불교인드라망
글쓴이 : 연화덕/부루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