博士學位論文
世親 唯識思想의 淵源과 成立에 관한 硏究
指導敎授 吳 亨 根
東國大學校 大學院 佛敎學科
金 晋 台
2000
博士學位論文
世親 唯識思想의 淵源과 成立에 관한 硏究
金 晋 台
指導敎授 吳 亨 根
이 論文을 博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0년 12月 日
金晋台의 哲學 博士學位論文을 認准함.
2000년 12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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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大學校 大學院
目 次
Ⅰ. 緖 論 1
1. 硏究의 目的과 方法 1
2. 硏究의 展開方式과 範圍 5
Ⅱ. 世親의 生涯와 著作 8
1. 世親의 生涯 8
2. 世親의 年代 11
3. 世親의 著作 14
Ⅲ. 世親 唯識思想의 淵源 19
1. 根本佛敎의 心識思想 19
1) 根本敎說과 心識[마음] 19
2) 心의 根本性과 能動性 24
3) 根本佛敎에서의 心體와 心作用 29
4) 根本佛敎의 心性 31
2. 部派佛敎의 心識思想 35
1) 心王과 心所說 36
2) 心意識의 無差別說과 差別說 38
3) 心·心所의 相應說 40
4) 世親의 部派的 心識思想 42
3. 末那識의 淵源 47
1) 部派佛敎의 隨眠說과 種子說 48
2) 部派佛敎의 意根說 50
4. 世親의 種子說과 알라야識의 淵源 52
1) 業力의 保存 53
2) 心心所의 連續性[心相續] 65
3) 輪廻의 主體 72
Ⅳ. 世親 唯識思想의 成立 78
1. 世親의 五蘊說 78
1) 世親의 部派的 五蘊說 78
2) 世親의 大乘的 五蘊說 87
3) 5位 100法 思想의 成立 92
2. 世親의 心識思想 103
1)『唯識20論』의 構造 103
2)『唯識30頌』의 組織 112
3) 識轉變說의 形成 116
4) 八識說의 確立 127
5) 三性說 147
6) 三無性說 156
Ⅴ. 世親의 修行思想 161
1. 修行의 目的 162
2. 修行의 過程 164
1) 資糧位 165
2) 加行位 168
3) 通達位 170
4) 修習位 171
3. 修行의 結果 174
Ⅵ. 結 論 178
* 참고문헌
* Abstract
Ⅰ. 緖 論
1. 硏究의 目的과 方法
佛敎는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現象들을 떠나 저 먼 다른 세상에 대한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생각하는 이 日常生活에서 苦를 보고 苦의 원인을 찾아서, 苦를 苦인 줄 알아서 벗어나며, 煩惱를 煩惱인 줄 알고서 끊어가자는 것이다. 根本佛敎가 한결같이 日常를 강조하는 것은 경험할 수 없는 窮極的 實在[브라흐만,아뜨만 등]와 같은 虛妄한 對象에 관한 探求나 執着이나 믿음에 대해 강하게 否定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苦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苦의 원인이자 그 구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지, 救援을 얻을려고 경험되지 않는 어떤 절대적인 대상을 세우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행에서 禪定의 對象은 반드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대상이어야 한다. 근본불교의 수행법으로 가장 중요하게 설해지는 四念處觀의 핵심도 바로 '있는 그대로의 實相'을 觀察하여 일체의 有爲法이 無常하고, 一切法이 無我이며, 따라서 모두가 苦라는 것을 여실하게 관찰하는 데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기의 身·受·心·法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올바로 관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觀[vipassana]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이나 지각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이 매우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임[無常]을 직접 경험하게 되고, 그러한 인식은 바로 우리들로 하여금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無我〕에 애착해서 온갖 人間의 苦을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해 준다.
나아가 우리는 익숙해진 삶의 습관[業] 때문에 我와 我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무상한 것에서 불변의 실체[我]를 想定하여 그것을 궁극적인 실재처럼 집착하는 한은 오직 苦만을 경험할 뿐이다. 苦의 원인은 모든 것이 연기하고 있는 허망한 것인 줄을 모르고〔痴〕, 그러한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즐거운 감각이나 지각은 탐착[貪]하고, 괴로운 감각이나 지각은 혐오[瞋]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감각이나 지각은 外部의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表象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根本敎義를 나타내며 佛法의 徵表인 四法印에서 보이듯이, 一切는 모두 苦이며, 이러한 人生의 苦로부터 解脫한 상태가 涅槃[寂靜]이다. 그런데 苦로부터 解脫하기 위해서는 諸行이 無常하고 諸法이 無我인 줄을 깨달아야 한다. '諸行이 無常하다'는 것은 '緣起한 것[諸行·有爲法]은 끊임없이 生滅變化 한다'는 것이며, '諸法은 無我이다'라는 것은 '生滅變化하는 것 속에 生滅變化를 벗어나 그것을 주관하는 영원불멸의 고유한 實體나 本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諸法에는 有爲法뿐만 아니라 無爲法도 포함되므로, 無爲法은 常住는 하지만 그 역시 無我이다. 불교의 핵심교설인 五蘊·十二處·十八界說이 말하고자 하는 목적도 無常과 無我, 곧 존재와 현상에는 不變의 고유한 본질적 실체성이 없음을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다.
삶의 흐름은 한 찰나에 자기의 全 모습을 바꿔간다. 그 한 순간 한 순간에는 因緣의 흐름[變化]만이 존재할 뿐, 因이나 緣 속에 그러한 변화를 조종하는 常住不變의 어떤 것[我·神·영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곧 常一主宰하는 것도 없고, 다른 어떤 것[브라흐만·창조주·하나님 등]에 의해서 완전히 支配받는 것도 아니다. 초기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諸法皆空'으로써 모든 존재와 현상이 無常하며 非實體的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깨달음은 '諸法이 모두 空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인데, 곧 我空임을 깨달아 煩惱障[我執]을 소멸시켜 解脫을 성취하고, 法空임을 깨달아 所知障[法執]을 제거하여 菩提를 증득한다. 空性을 體得한 智慧가 般若波羅蜜이며, 이러한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존재와 현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것을 강조하여 靈魂이나 神과 같은 實體를 철저히 부정하는 無常과 無我 그리고 空을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生命있는 것[有情·衆生]들의 輪廻하는 원리이며 그들에게 倫理·道德的 責任을 지울 근거가 되는 業[karma]說을 확립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는 業이나 輪廻의 主體로서 아뜨만[我]과 같은 실체적인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業에 기인한 無我輪廻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해야만 하고, 諸法이 生起하는 원인은 유정의 업력에 있다지만 일단 조작된 업력은 그 果報를 초래할 때까지 어디에 어떻게 보존되는가 하는 業의 所依處도 밝혀야 하는 어려운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또 人格의 핵심이자 실체로서 존재하는 我[아뜨만]를 부정하면서 개개 인격의 연속성과 相似性, 곧 신체와 생명을 유지하는 것[수명과 체온 유지]과 의식보다 더 근원적인 我執의 근거를 밝혀야 하는 필요성도 있었다. 또한 영혼이나 아뜨만 없이 어떻게 정신현상이 생기며, 어떻게 五位無心1)에서 다시 意識이 회복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해결해야 했으며, 나아가 心과 身의 상호관계 그리고 업을 짓는 원인으로서 잠재적 번뇌인 隨眠 및 記憶과 想起의 문제나 外界의 實在問題 등도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佛敎史에 있어서 이러한 난해하고도 민감한 문제점들을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가장 잘 분석·해명하고 있는 불교철학이 유가행파의 唯識思想이다. 苦와 滅, 貪·瞋·痴 등의 煩惱라든가 깨달음〔菩提〕이라든가 하는 것은 모두 마음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는 마음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 실제로 불교의 중요한 교리인 緣起·四諦·十二處說 등은 모두 마음의 작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2)
唯識思想은 이러한 근본불교 이래의 전통인 唯心論을 이어받아 瑜伽行派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中期 大乘佛敎의 사상이다. 중기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근본불교나 부파불교 및 초기 대승불교의 교설이나 이론으로는 논리적·합리적으로 명쾌하게 해명할 수 없었던, 앞에서 언급했던 輪廻論과 無我論 사이의 모순 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이나 문제점들의 해명이나 새로운 해결방법의 모색은 불교 내부에 있어서나 外道와의 論爭에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절실한 것이었다. 또한 唯識思想은 中觀派 龍樹의 空의 論理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空思想을 허무적으로 해석할려는 思考를 시정할 필요가 있었다. 瑜伽行派는 이러한 難題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비달마의 분석적 교리와 그 밖의 여러 이론도 수용하면서 唯識思想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唯識思想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종합하여 조직하고 체계화 한 사람이 無着[Asanga]이며, 그 뒤를 이어 唯識思想의 주요개념과 이론체계를 완성한 사람이 무착의 친동생이면서 제자인 世親[Vasubandhu]이다. 비록 唯識思想이 彌勒[Maitreya]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는 하지만, 唯識思想의 실질적인 定礎者는 무착이며, 그 확고한 大成者는 세친인 것이다.
本 論文이 이들 중에서 世親과 그의 唯識思想에 주목하는 것은, 우선 그가 형인 무착의 敎誡가 있긴 했지만 어떤 이유로 小乘에서 大乘으로 전향하였으며, 그리고 교학상으로는 왜 근본불교나 아비달마의 6識說을 8識說로 확대하여 정립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을 밝혀보려고 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본 논문을 통해 드러나겠지만, 그의 대승전향과 8識說 등의 확립은 앞에서 언급된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과 밀접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世親 唯識思想의 淵源과 成立에 대해 살펴보는 이러한 작업은 그의 小乘 部派期의 사상과 大乘期의 사상을 모두 살펴보아야 가능할 것이다. 특히 두 期의 心識思想의 비교·검토를 통해 세친의 心識思想이 갖고 있는 철학적인 내용을 밝혀보려는 것이며, 그것으로써 前述한 無我論과 輪廻論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점 등 근본불교나 부파불교 이래의 난해하고도 민감한 문제점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나아가 唯識思想이 大乘인 까닭이 무엇이며 그 근거와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혀 내려고 한다. 印度佛敎史에 있어서 唯識思想이 中觀思想과 함께 대승불교의 양대 조류를 형성하는 점으로 봐서도, 唯識思想의 心識說에는 소승부파의 심식설과 그 의미 내용을 달리하는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친은 唯識思想이 大乘이라고 할만한 근거와 타당성이 있고, 大乘의 理致가 小乘을 능가하는 우월성이 있었기 때문에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향했을 것이며, 그러한 대승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여 唯識思想을 체계적으로 정립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敎學上으로는 근본·부파불교 이래의 난해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6識說을 8識의 構圖로 확대하여 定立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동기와 근거를 밝히는데 크게 主眼點을 둘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種子說과 알라야識說의 淵源을 究明하는 것이 우선 과제가 된다. 業相續의 근거로서, 나아가 諸法의 生因으로서 상정된 '種子'는 『리그 베다』나『우빠니샤드』에서도 나타나는 등 이미 인도 고대철학시대 부터 사유되어 왔던 것이다. 불교의 유가행파에 이르러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체계로 규정되면서 마침내 제8 알라야식 중에 존재하는 '生果의 功能'으로 파악되게 되었지만, 그러한 이론체계의 원형은 바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세친이 논거로 삼았던 經量部에 의해 확립되었던 것이다.3)
알라야識이라는 술어는 무착의 『攝大乘論』첫머리에 나오지만, 무착의 시대에는 알라야식이 그다지 큰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末那識도 『攝大乘論』에 나오지만 그 의미가 분명치 못해서 알라야식과 비슷한 것이었다. 알라야식을 제8식, 말나식을 제7식이라는 순서로 확정하는 것은 세친이다. 알라야식은 唯識思想을 특징짓고 있는 心識說의 支柱이면서, 理論을 넘어 종교적 실천인 瑜伽行을 통해 分別의 迷惑[識]에서 無分別의 깨달음[智]으로 전환하는 場이며, 大乘菩薩의 실천행인 六波羅蜜行의 실천에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한다. 이와 같이 이론적인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알라야식을 축으로해서 심식설을 체계화한 것은 세친이었다. 이러한 심식설은 唯識中道를 천명하는 三性·三無性說과 관련하여 논의되며, 修行面에서는 이 三性·三無性說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轉識得智와 菩薩行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가 드러나게 된다.
본 논문의 주된 과제는 세친의 唯識思想, 특히 心識構造의 分析을 통해 輪廻의 主體 등 어려운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한 世親 唯識思想의 淵源과 그 成立을 밝히는 데 있다. 나아가 세친의 唯識思想을 통해 현실의 有情들의 存在形態[依他起·緣起]가 유래하는 근거[業·習氣]와 그 實相[無常·無我·空]을 해명하여, 바로 이 日常에서 煩惱와 執着을 끊어가는 大自由[解脫]의 길·깨달음[菩提]의 길을 摸索하는 데 그 目的이 있다.
2. 硏究의 展開方式과 範圍
본 논문의 根本主題는 世親의 哲學的 思考의 變化과정을 통해서 그의 哲學體系가 어떻게 確立되어 갔는가를 밝혀보는 것이므로, 論議되는 問題에 대해서는 주로 철학적인 觀點에서 敍述해 나가기로 한다. 그러므로 먼저 그 대전제로서 『俱舍論』의 論主인 세친과 唯識思想을 체계적으로 완성시킨 唯識論師로서의 세친을 同一人物로 보고 출발한다. 왜냐하면 筆者는 본 논문 主題의 着眼點을 소승 부파불교시대의 불교연구를 총결집시켜 놓은 『俱舍論』의 저자인 세친이 무슨 이유로 소·대승 과도기의 『大乘成業論』과『大乘五蘊論』을 거쳐, 결국 대승으로 전향하여 『唯識20論』이나『唯識30頌』 등의 大乘論書를 저작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는 것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제2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사실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서나 여러 저서들의 전개형식이나 내용의 흐름을 통해서 보더라도『俱舍論』의 論主인 세친과 唯識論師로서의 세친은 동일인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나 만약 미래에 어떤 역사적인 명확한 증거가 나와 '世親 2人說'이 확인된다 하더라도, 본 논문의 논의들은 학문적으로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들이므로 그 의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俱舍論』의 논주인 세친과 유식논사로서의 세친을 동일인으로 보고서 논의를 전개하여, 세친 자신이 소승적인 생각에서 대승적인 생각으로 넘어간 이면에는 논리적으로나 교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소승적 교리를 대승적 교리로 전개시킬 필요성을 크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므로, 이상의 의문점에 착안하여 구사학으로 부터 唯識思想으로 전개할 수 밖에 없었던 철학적인 動機와 根據를 밝혀 보고자 한다.
본 논문의 硏究範圍는 그 근본주제가 세친의 철학적 사유의 변천과정과 사상체계의 내용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므로, 그 중심 자료는 세친의 주된 論典들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세친이『發智論』의 주석서이며 有部敎學의 正說을 밝히고 있는『大毘婆沙論』200권을 30권으로 요약한『俱舍論』은 그의 초기 사상을 살펴보는 데 필수적인 논서이다. 『俱舍論』은 세친이 자신의 독창적인 교설을 세우기 전에 교학의 표본으로 삼았던 것으로서, 내용면에서 유부의 교학을 표준으로 삼되 비평적 측면에서 경량부나 대중부의 교학을 채용하여 절묘하게 체계화한 탁월한 저작이다. 다음으로 경량부의 입장과 유식 교학의 중간적 성격을 띠면서 적극적으로 세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大乘成業論』과『大乘五蘊論』을 살펴보아야 한다. 『俱舍論』에서는 세친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점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치지만, 소승과 대승의 과도기의 이 두 논서에서는 자신의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하여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세친의 철학적 사유가 발전되어 가는 방향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대승으로 완전히 전향한 뒤의 사상은『유식20론』과『유식30송』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며, 그의 말년의 대표적인 저작『유식30송』에는 그 자신의 주석이 없으므로, 부득이 후대의 10대 논사들 중에서 護法論師의 주석을 주로하여 편집한『成唯識論』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5位100法說에 관해서는, 『成唯識論』에서는『유식30송』을 토대로 해서 분류하고, 『大乘百法明門論』은 『瑜伽師地論』「본사분」가운데에서 100법의 名數만 기록하고 있으므로 두 論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心識思想에 있어서는 세친 자신이 사상적으로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무착의『攝大乘論』과 이 논에 대한 자신의 저작인『攝大乘論釋』과 심식사상을 대승적으로 보게하여 대승으로 귀의케 한『대승오온론』, 그리고 무착이 저술한『大乘阿毘達磨集論』과 또한 무착이『유가사지론』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취하여 엮은『顯揚聖敎論』도 살펴보아야 한다.
修行論에 있어서는 대승전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十地經』과 그에 대한 자신의 주석서인『十地經論』, 그리고 『唯識三十頌』과 그 주석서인『成唯識論』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 밖에 論議의 주제인 윤회의 주체·업·무아론 등은 이미 阿含에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근본경전으로는 阿含部의 경전들을 주로 참고할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논의의 진행상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그 밖의 經論이나 여러 가지 관련 논문들과 국내외의 여러 서적들도 참고하여, 주된 과제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되 형식보다는 내용을 위주로 하여 논의를 진행해 나가기로 한다.
Ⅱ.世親의 生涯와 著作
1.世親의 生涯
世親〔Vasubandhu〕의 傳記는 眞諦의『婆藪槃豆法師傳』4)에 서술되어 있으며, 이것은 세친의 전기자료로서 가장 신빙할 만한 것이다. 또 이보다 약 100년 늦게 玄 은『大唐西域記』5)에서 세친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한편 바수반두[Vasubandhu]를 진제는 '바수반두[婆藪槃豆]'로, 현장은 '벌수반도[伐藪畔度]'로 표기하고 있으며, 나아가 진제는 바수반두를 '천친[天親]'으로, 현장은 진제의 번역이 사투리에 의한 것이라 하여 '세친[世親]'으로 번역했다.6)
『婆藪槃豆法師傳』에 의하면, 세친은 북인도의 뿌루샤뿌라國7)의 사람이며,그는 이 나라의 國師로 바라문 출신인 까우쉬까의 2남으로 태어났다. 說一切有部에 출가하여, 학문이 지극히 넓어 실로 많은 것을 들어 알고 있었으며, 古書·聖典에 두루 통달해 있었다[博學多聞]. 그 재능은 神技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 그를 필적할 만한 이가 없었다[神才俊朗]. 그는 德으로 충만한 바 른 행실로 청아하고 고결한 기품을 드러내 누구도 그와 어깨를 견주기가 어려웠다[戒行淸高]8).
세친은 굽타왕조의 수도 아요디야에 주로 머물었으며, 그의 스승 붓다미뜨라[Buddhamitra]가 상키야학파의 철학자 빈디야바신[Vindhy vasin]과의 논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스승의 수치를 설욕하기 위해『七十眞實論』을 저술하여 외도의 상키야학설을 훌륭하게 논파하였다.
그 후 세친은 바른 佛法이 성립할 수 있도록, 우선『阿毘達磨大毘婆沙論』을 배워서 그 교의에 깊히 통달한 뒤에 많은 사람들을 위해『大毘婆沙論』의 교의를 강의했다. 하루 강의하면 그 날에 설한 교의를 詩에 담아 적동색의 잎에 새겼는데, 이와 같이 해서 600여 시를 짓고 그 시에『大毘婆沙論』의 교의를 수록했다. 그 시는 모두 하나하나 그렇게 지어지고 알려졌는데, 이것이 곧『阿毘達磨俱舍論』안에 있는 시이다. 이 시가 완성된 뒤 설일체유부의 중심지인 캐시미르의 비바사사[論師]들에게 기증하였는데, 그것을 보고 들은 논사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 뒤에 그들의 간청에 의해 문장을 지어 시를 해설하였는데,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서 치우쳐져 있는 곳은 經量部의 교의로써 논파하고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阿毘達磨 俱舍論』이다. 이 논을 완성한 뒤 캐시미르에 기증하였을 때, 그 지역의 논사들은 그들이 주장해 왔던 교의가 참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제각기 번민과 괴로움에 빠지게 되었다.9)
이에 따라 세친의 명성이 점차 높아지고, 굽타왕조 아요디야국의 正勤日[Vikramaditya]왕의 태자 발라디띠야[B l ditya]는 그에게 수계했으며, 왕비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 태자는 그 뒤 왕위에 오르자 모친과 뜻을 같이해서 세친이 아요디야국에 머물러 줄 것과 자신들의 공양을 받아줄 것을 간청했는데 세친은 이를 허락하였다. 이즈음 바수라타라는 바라문이『구사론』중의 문구를 문법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하였던 일이 있었는데, 세친은 논을 지어 그의 지식체계를 논파하여 허물어 버렸다. 바수라타는 세친을 타파하기 위해 설일체유부의 학승 衆賢[Sa ghabhadra]을 아요디야로 초빙하였으며, 그는 도착하자 곧『俱舍論』을 논파할 두 가지의 논을 지었다. 두 논을 완성한 뒤 중현은 세친을 불러 대론코자 하였으나, 세친은 자신이 이미 年老해 있고,『구사론』의 교의는 허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대결을 피하였다.10)
세친은 부파불교 전체의 교의에 널리 통달해 있었고, 실제로 거의 완전하게 소승불교를 이해하였으며 소승불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문에 대승불교를 믿지 않아서 '대승은 佛說이 아니다'라고 까지 하였다. 세친의 親兄인 無着[Asa ga]11)은 세친이 논을 지어 대승불교를 파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매우 심려하였다. 무착은 아요디야국의 세친에게 使者를 보내 뿌루샤뿌라로 불러서 대승불교를 연마할 것을 권유하고, 대승불교의 중요한 교의를 간략히 설하자 세친은 바로 그 자리에서 대승의 이치가 확실히 소승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세친은 대승불교로 전향하였으며, 형을 따라 폭 넓게 대승불교의 교의를 배워서, 이윽고 끝내는 형이 이해하고 있는 대로 모두 그 의의와 내용을 통달할 수가 있었다. 세친은 무착이 죽고 난 뒤에도 더욱 힘써 많은 대승의 논서를 저술하고 여러 대승의 경전에 주석을 썼다.12) 그 후 세친은 아요디야국에서 세수 80세로 그의 生을 마쳤다.13) 세친논사는 有部에 출가하였지만 자기 부파의 교리에만 穿鑿하지 않고 거의 모든 부파불교의 교리에 두루 통달해 있었다. 그 뒤 형 무착의 啓導로 대승으로 전향하면서는 대승의 이치가 소승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폭넓게 대승불교의 교의를 배우고 많은 대승의 경론을 주석하여 탁월한 논서들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세친의 저작들은 모두 그 내용이 뛰어나고 精妙하여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인도와 그 주변지역의 대·소승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세친이 저술한 논서로써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에게는 비록 길지않은 80세의 생애였지만, 그는 불교철학의 많은 어려운 문제점들을 해결했으며, 그때까지의 인도 불교사 거의 천년을 涉歷했던 참으로 위대한 哲人이었다.
2. 世親의 年代
흔히 인도를 '역사가 없는 나라'라고 말한다. 나라에 역사가 없을 리 없겠지만 역사자료를 잘 기록하여 전하지 않거나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는 뜻이겠다. 인도의 불교사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붓다이신 석가모니에 대해서도 그의 생존연대가 확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의 생애에 걸친 전법·교화의 발자취도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용수이건 무착이건,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세친이거나 간에 그 밖의 인도불교의 역사에서 저명한 인물 누구를 지목하더라도, 그의 생존년대나 경력 등이 만족스러울 만큼 밝혀져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 현재의 상태이다.14)
세친의 생존년대에 대해서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와씰리에프[Wassilieff]·케른[Kern]·뷜러[Buhler]·레비[S.L vi]·페리[N.P ri] 등 유럽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연구 논의되어 왔다. 일본에서도 20세기초부터 모치즈키 신코우[望月信亨]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등의 학자들에 의해 세친의 연대론에 관한 논쟁이 있어 왔다.15)
세친의 연대에 대하여 한문의 여러 자료, 특히 진제와 현장과 관련되는 저작들을 검토해보면 ① 불멸후 900년16), 2 불멸후 1000년17), 3 불멸후 1100년18)의 세 가지 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전설이 석가모니의 입멸을 어느 때로 잡고 있는가도 명확하지 않으므로, 여러 전설을 비교·검토하여 세친의 연대를 확정하고자 하는 작업은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 처럼, 선택된 자료와 사용된 방법이 다른 것과 같이 도달된 결론도 구구하다. 그렇지만 이를 크게 나누면, 세친의 연대를 기원후 4세기로 보는 견해와 5세기로 보는 견해로 맞서게 된다.19)
세친은 무착의 친동생이므로, 그의 연대는 미륵20)이나 무착의 생존년대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진제의『바수반두법사전』에는 무착과 세친을 불멸후 900년대의 인물이라고 하고 있다. 또 세친이 正勤日王[Vikram ditya]과 태자 발라디띠야21)의 공양을 받은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데, 干潟龍祥 박사와 오스트리아의 프라우발너[E.Frauwallner]는 이 두 인물을 제5대 스칸다굽따[455∼467년 재위]와 제6대 나라싱하굽따[467∼473년 재위]로 추정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이 두 왕으로부터 공양을 받은 세친의 연대를 400∼480년 경으로 본다. 干潟박사는 이러한 입장에서 아래와 같은 연대론을 주장했다.22)
미륵 350∼430년
무착 395∼470년
세친 400∼480년
또 최근에 陳那의 생존년대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어, 그가 500년 전후[480∼540년경]에 생존했음이 밝혀지고, 세친의 생존년대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세친의 연대를 400∼480년으로 보는 설이 더욱 유력해졌다.
한편, 『보살지지경』[414∼433년에 번역]을 미륵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400년 이전에 성립해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미륵의 생존년대를 350∼430년이라고 하는 것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23)그리고 진제 계통의 논서를 기준으로 삼으면 4세기설이 유력하나, 현장 계통의 논서에 의거하면 5세기설을 주장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점을 피하기 위해 프라우발너는 '세친2인설'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도불교사에서 세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논사가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古 세친은 무착의 친동생으로서 320년경에 태어나 설일체유부로 출가하였으며, 그는 무착의 권유로 대승으로 전향하고 유가행파의 논사로서 『중변분별론』에 대한 주석,『십지경론』『법화경론』『금강반야경론석』『발보리심론』 등의 저작을 남기고, 무착보다 먼저 약 380년경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新 세친은 대략 400년 경에 태어나 설일체유부로 출가하였으며, 경량부의 교리를 배우고,『칠십진실론』을 지어 상키야 학파의 논사 빈디야바신[vindhyav sin]을 논파하고,『구사론』을 지어 설일체유부의 교리의 틀을 명확히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480년경 80세로 아요디야국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24)
이러한 프라우발너의 설을 기존의 연구속에 남아있던 모순이나 무리25)를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지만, 대담한 가설을 설정하여 무리하게 자료를 해석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26)또 자신의 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한 자료는 많은 학자들이 이제까지 사용하여 왔던 것으로 새로운 것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프라우발너가 주장하는 신 세친의 연대가 干潟박사의 설과도 합치하고, 세친의 저작이 중국으로 전래된 실상을 보더라도, 세친의 연대를 400∼480년경으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더구나『구사론』은 경량부의 입장에 서 있으며, 이미 종자설도 설해져 있고, 여기에서 『대승성업론』이나『대승오온론』을 매개로 한 唯識說과의 사상적 연관성이 보인다.27)그러므로『구사론』『대승성업론』『대승오온론』및『유식이십론』이나『유식삼십송』을 동일인의 저작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며, 그러므로 본 논문이 이러한 입장에서 논의를 서술하는 것에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3. 世親의 著作
세친의 생존년대에 대한 기존의 연구 속에 남아있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세친의 2인설까지 주장되었다. 그 주장처럼 세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복수일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으며, 더불어 세친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여러 저술들이 오로지 동일 인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크게 의구심이 간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러 논서가 동일한 한 사람의 세친의 저작인지에 대한 논의나, 어떤 저작이 어느 세친에게 귀속되는 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다만 세친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작품들을 일괄적으로 그의 저작으로 하여 항목별로 나열하기로 한다.
1)經典에 대한 註釋
1『十地經論』12권, 보리류지 등 역·티베트 역[동북목록 3993]
2『妙法蓮華經憂波提舍』[法華經論] 2권, 보리류지역·1권 늑나마제 역
3『無量壽經憂波提舍』[淨土論] 1권, 보리류지 역
4『寶 經憂波提舍』1권, 毘目智仙 역
5『文殊師利菩薩問菩提經論』2권, 보리류지 역·티베트 역
[동북목록 3991]
『涅槃經本有今無偈論』1권, 진제 역
이 밖에도『遺敎經論』1권·『勝思惟梵天所問經論』4권·『轉法輪經憂波提舍』1권·『三具足經憂波提舍』1권 등이 그의 저작으로 되어 있다. 세친의 저작에는 '憂波提舍[Upadesa,論議]'28)라 불리는 것이 많다.
이상의 대승경전의 주석 중에서『십지경론』을 소의로 하여 중국의 지론종이 생겼다. 다음의『법화경론』은 중국에서『법화경』해석의 표준이 되었으며, 曇鸞(476∼542)이 이에 대한 주석인『정토론주』왕생론주]를 썼는데, 중국정토교의 교리 발전의 기초가 된 저작이다.29)
2)『俱舍論』과 唯識思想의 架橋 役割을 한 過渡期의 論書
1『大乘成業論』1권, 현장 역 [『業成就論』1권 비목지선 역]·
티베트 역 [동북목록 4062]
2『大乘五蘊論』1권, 현장 역 [안혜의 주석,『大乘廣五蘊論』1권
지바하라 역]·티베트 역 [동북목록 4059]
3『釋軌論』티베트 역 [동북목록 4060,4061]
『성업론』은 현장 역에는 '대승'이란 말이 붙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경량부의 입장에 서 있으며, 아함부의 여러 가지 경전들을 전거로 하여 각 부파의 業論을 논파하고 있다. 그리고 경량부설의 입장에 서 있다고는 하지만,『해심밀경』도 인용되어 있고 알라야식이라는 술어도 있어서,『구사론』이상으로 대승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다음의『오온론』은 오온에 포함되는 제법을 분류하고 설명한 것이며, 여기서는 心法을 遍行·別境·善·煩惱·隨煩惱·不決定으로 분류하고 있어서『구사론』보다도 유식설의 '6위의 심소설'에 가깝다. 그리고 心을 알라야식과 전식으로 구분한다. 이처럼『오온론』은『구사론』과 唯識思想의 중간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석궤론』은 범본과 한역본이 없으며, 티베트 역만 남아있다. 그 내용은 대승불교의 聖敎量으로서 아함부의 경전들을 충분히 인용하면서 경전 해석의 方軌[Yukti,방법]를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30)
3)唯識關係의 著作
1『唯識二十論』1권, 현장 역. 『唯識論』1권, 구담반야류지 역.
『大乘唯識論』1권, 진제 역. 티베트 역[동북목록 4057,4065]. 범본
2『唯識三十頌』1권, 현장 역[호법 등 釋,『成唯識論』10권, 현장 역]
『轉識論』1권, 진제 역. 티베트 역[동북목록 4055, 안혜 釋, 동북목록 4064. 조복천의 복주, 동북목록 4070]. 범본
두 저작 모두 실뱅 레비에 의해 범본이 발견되어 출판되었다.31) 『唯識二十論』은 22송으로 되어 있으며, 세친 자신의 주석이 있기 때문에 '이십론'이라고 부른다. 외계의 사물이 실재한다고 보는 다른 학파로부터의 비판에 대하여 하나하나 반론함으로써 '萬法唯識'이라는 유가행파의 근본명제를 입증한 책이다. 이 논서에는 알라야식이나 3자성 등 유식학의 중요한 술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논서는 다른 학파의 주장에 대한 반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유식임'을 드러내려는 유가행파의 中觀書와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의정 역의 護法造『成唯識寶生論』5권은 이 책의 주석이다.32) 『유식삼십송』에는 세친 자신이 주석을 짓지 않았으며, 다만 범본에는 안혜의 주석이 붙어 있다. 한역의『成唯識論』10권은 이 책에 대한 주석서인데, 호법의 설을 정통으로 삼고 다른 논사들의 주석도 취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진제 역의『전식론』1권은 頌만의 번역이 아니며, 이에 간단한 주석이 덧붙여져 있다. 세친은 『유식30송』에서 식전변을 중심으로 알라야식·말나식·前6식 등 8식에 의해, 우리들이 경험하는 세계가 識의 현현임을 알라야식연기로 정교하게 조직했다. 또한 삼성·삼무성의 유식설, 나아가 유식의 실천수행과 轉依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세친의 대표작이며 唯識思想가로서의 자신의 사상체계를 불과 30송으로 정교하게 정리한 것으로, 세친의 최후 작품이라고 한다. 또한 3성설에 관하여『三自性說示』라는 책이 있으며, 이것은 산스끄리뜨 원본과 티베트 역만 있다. 특히『유식30송』과『성유식론』은 유가행유식학파의 역사에 새 시대를 열었으며, 중국 법상종 성립의 연원과 전거가 되는 책들이다.33)
이 밖에 진제 역의『三無性論』2권과『顯識論』1권도 세친의 저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제 역의『佛性論』4권도 세친의 저작으로 전해지지만, 내용이『究境一乘寶性論』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에 이를 의심하는 설도 있다. 또한 현장 역의『大乘百法明門論』1권은 唯識思想에서 설하는 100종의 법의 명칭을 정리한 것이다. 유식의 법상을 100법으로 정리한 것은 호법 등의『성유식론』에는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오온론』 등의 설과도 서로 다른 점이 있어서 세친의 저작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의문이 있다. 누군가가『대승아비달마집론』의 「본사분」에서 法數를 모아 조직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세친의 저작으로 보고 있다.34) 이 책에는 한역을 중역한 티베트 역35)이 있는데, 저자는 '세친 혹은 호법'으로 되어 있다.36)
4) 다른 사람의 論書에 대한 註釋書
1『大乘莊嚴經論』13권, 파라파밀다라 역. 티베트 역[동북목록 4020]. 범본
2『中邊分別論』2권, 진제 역[『辨中邊論』3권, 현장 역]. 티베트 역 [동북목록 4027]. 범본
3『法法性分別論』티베트 역[동북목록 4028]. 범본 단편
4『攝大乘論釋』15권, 진제 역[『섭대승론석』10권, 현장 역『섭대 승론석론』10권, 급다공행구 역]. 티베트 역[동북목록 4050]
『大乘莊嚴經論』과『中邊分別論』에서 미륵이 지은 것은 게송 뿐이며, 미륵의 게송에 세친의 주석을 붙인 것이다. 다음의『法法性分別論』은 티베트 역만 존재하는『법법성분별』37)에 세친이 주석을 한 것이다. 그 다음의『攝大乘論釋』은 무착의 주저인『攝大乘論』에 대한 주석인데,『섭대승론』은 유식의 교리를 집대성한 것이며 오래 전부터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번역본도 많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친의 저작은 다방면에 걸쳐 다수가 있다. 지금까지 한역 중심으로 세친의 저작을 살펴보았는데, 티베트 역으로는 이밖에도『육문다라니해설』등 약간의 저작이 있다. 부톤의『佛敎史』에 의하면 세친은 '8부의 논서'를 지었다고 한다. 그 8론이란『唯識三十頌』『唯識二十論』『五蘊論』『釋軌論』『成業論』『莊嚴經論釋』『中邊分別論釋』『緣起經釋』이다.『연기경석』은 테베트 역만 전해지고 있는데, 범문의 단편이 발견되었다.38) 한역과 티베트 역은 상당히 일치하지만, 한역에 빠져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法華經論』『淨土論』『佛性論』등은 티베트 역이 없다는 점이 주목된다고 하겠다.39)
훌륭한 著作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후세에 좋은 내용의 글을 길이 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적 내용이 전설이나 소문 형태의 단편만으로 전해지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런데 세친의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저작들은 오늘날까지도 산스끄리뜨·漢譯·티베트 譯으로 상당히 많이 전해오고 있다. 모두가 인류 철학사의 寶庫이며, 앞으로도 인류의 정신사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저작들이 우리에게 계속 남아서 전해지는 한 세친의 위대성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더해 갈 것이다.
Ⅲ. 世親 唯識思想의 淵源
1. 根本佛敎의 心識思想
1) 根本敎說과 心識[마음]
불교는 석존의 깨달음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근본불교가 형성된다. 그 뒤를 이어 일어나는 부파불교나 대승의 반야·중관사상 등도 모두 그 교학적 근거는 근본불교로 부터 연원하는 것이다. 唯識思想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일 수 없다. 깨달음은 苦로부터의 解脫이며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因으로서의 修行이 필요하며, 수행을 통해 煩惱와 業을 끊고 苦로부터 벗어나 無爲寂滅한 涅槃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現象界의 一切諸法은 모두 業力에 의하여 緣起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業은 우리들 마음의 작용인 煩惱의 힘에 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번뇌를 일으키는 根本體는 우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40).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데, 수행은 이와같은 번뇌라는 染汚의 마음을 끊어가는 작업이다. 그래서 근본불교 이래 다양하게 전개되어 온 불교사상들도 그 主된 흐름은 항상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自我와 世界를 포함하는 諸法의 분류로서 근본불교의 중요한 교설이 五蘊·十二處·十八界라는 三科說이다. 이 3과설은 모두 諸行과 諸法이 無常과 無我임을 드러내는 교리로서, 우리가 煩惱와 業을 끊어가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며, 分別과 執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중생들이 윤회하는 세계와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말하고 있는 四聖諦와 十二緣起說은 붓다의 대표적인 교설인데, 이 교설들의 바탕도 마음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이러한 불교의 근본교설이 내용상으로는 모두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설해지므로, 그대로 唯識思想의 연원이 되는 것임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1) 五蘊과 마음
五蘊說에서 다섯 가지 蘊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나열하고, 이에 의해 인간의 생존 및 환경의 일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가운데서 色은 색깔과 모양을 가진 일체의 물질적 존재를 의미하지만, 識은 마음으로서 인간존재의 내적인 세계를 나타내고, 나머지의 受·想·行은 마음과 色이 접촉하여 생기는 마음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41) 세상 사람들이 自我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五蘊이며,42) 五蘊이 자아로 計度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識이다. 色은 중생들이 육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受·想·行·識은 감정 내지 意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五蘊은 중생들의 생각, 곧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43) 이와 같이 五蘊說에서 色蘊은 色法으로 보더라도, 나머지 4蘊은 분명히 마음에 관한 분류이며, 더욱이 오온을 구성하는데 주체가 되는 것은 識이다. 따라서 우리는 '一切'의 分析에서 佛敎가 얼마나 마음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겠다.
(2) 十二處와 마음
十二處說은 일체의 인식세계를 설명하는 교설이다. 인식은 주관의 영역과 객관의 영역, 곧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로 설해지며, 根本佛敎에서는 여기에 일체가 포함된다고 보았다.44) 世界는 그것이 우리에게 認識되고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 세계의 본질이 어떤 존재로 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 본질적 존재를 무엇이라고 하든 그 존재는 결국 우리에게 인식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가 어떤 존재로 되어 있는가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세계로 포함하여 존재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를 如實하게 觀察하여 인식된 존재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가 말하는 中道의 입장이다.45) 이와같은 중도의 입장은 존재라는 개념이 忘念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 觀念이라고 보는 것이며, 十二處는 그 같은 허구적인 관념이 구성되는데 바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십이처는 아직 존재를 전제로 하는 主·客이나 內·外가 分別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므로, 이들은 주객으로 분별된 상태에서 주관과 객관으로 인식되고 있는 色法으로서의 六根이나 六境과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아니 세계니 하는 것은 이들을 緣하여 생긴 識에 의해 나타난 分別이므로, 십이처는 識의 성립을 설명하는 개념이기도 하다.46)이와같이 십이처는 우리의 인식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며, 自我와 世界가 분별되고 있지 않은 상태에 있는 主觀的 要因과 客觀的 要因으로서 일체가 그대로 마음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교설인 것이다. 그리고 十二處說이 認識論이라면 六外入處의 前五處가 그대로 마음밖의 物理的 存在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47) 그러므로 12처설도 心識을 위주로 하여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교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十八界와 마음
十八界說은 六內入處와 六外入處를 緣으로 하여 6識이 발생하면, 未分의 영역을 뜻하는 十二處가 六識의 발생으로 인해 각기 다른 界域으로 구분된다는 의미의 敎說이다. 십이처에서 발생한 6識은 십이처를 연으로 하여 마음속에 생긴 分別心이다. 6識은 外入處라는 대상적 계기가 주어질 때 內入處라는 작용적 계기가 이를 규정하고 의미구성함으로서 우리의 마음 속에 발생한 새로운 意識狀態라고 할 수 있다.48) 6식으로 말미암아 다른 계역으로 구분된 18가지의 계가 인간의 心身에 복잡하게 섞여 있지만, 제각각 독립된 요소로서 서로 넘나들 수 없으며 다른 것으로 부터 구별된다는 점에서 이들을 界라고 한다. 또한 界에는 중생들이 分別하여 그들이 구성한 世界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界는 外部에 實在하는 세계가 아니라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르게 구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十八界도 그 구조는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할지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각기 다르며,49) 이러한 사고에 의하면 중생들은 같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중생의 수 만큼의 세계가 있는 것이 된다. 결국 우리는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가 나에게 던져진 것이며, 그래서 이 세상은 각 개체의 마음이 드러낸 각 주관의 모습임을 알 수 있겠다.
위에서 살펴본 五蘊·十二處·十八界說은 一切를 분석하여 一切가 無我임을 밝히는 교설들이다. 여기서 기술되는 一切는 衆生 자신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한에서의 세계의 '一切'이다. 즉 한 인간의 經驗的 삶의 '일체'로서, 인간의 삶과의 관계를 떠난 自然界 그 自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명백한 일이다.50) 心法은 말할 나위가 없으며, 불교가 말하는 色法도 認識上의 色法이므로 마음을 떠나 있는 색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런 색법은 말할 수도 없다. 이 모두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4) 四聖諦와 마음
四聖諦는 佛敎의 實踐的 原理를 나타내는 부처님 敎說의 大綱이다. 阿含部의 모든 교설 곧 五蘊·十二處·十八界·十二緣起·37조도품 등의 모든 교리는 四聖諦에 포함되며 사성제를 軸으로 설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苦諦는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이며, 대표적으로 生老病死의 4苦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自然現象으로서의 생로병사가 고통이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에게 있어서의 생로병사가 고통인 것이다.51) 자연현상이 고통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認識하는 사람과 實踐的 關係를 맺어야 하는 것이므로, 苦는 바로 마음의 문제이다. 集諦는 고통의 原因을 밝히는 것으로 자기에게 있어서 生存이 고통이 되는 것은 마음의 깊은 곳에 '渴愛'가 있기 때문이다. 集은 갈애를 근저로 하는 갖가지 煩惱를 말하며 이 또한 마음의 문제이다. 번뇌를 멸한 상태를 滅諦라고 하는데, 마음이 번뇌의 束縛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므로 '解脫'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고통으로 부터의 해탈을 실현하는 길을 道諦라고 한다. 이것은 八正道로 나타나는데, 첫 번째의 正見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곧 緣起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마지막의 正定이란 正見이나 正念에 기초하여 실현되는 '마음의 통일'을 말한다.52)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상의 고·집·멸·도의 사성제도 모두가 마음을 중심으로 설해진 교설임을 알 수 있겠다.
(5) 十二緣起와 마음
緣起의 도리에 의해서 人間存在의 본연의 모습을 法의 입장에서 밝힌 것이 十二緣起說이다.53) 십이연기설은 우리가 三世에 걸쳐서 生死하고 있다고 느끼는 착각된 인식이 근본적으로 無明에서 비롯된 妄念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같은 망념의 세계에서 識은 輪廻의 主體로 인식되고, 그것은 삼세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流轉하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세계는 實相의 세계가 아니라 망념의 세계이며, 십이연기설의 첫 支인 무명은 이것을 말해준다.54) 無明支 이하의 11支도 사실은 무명의 모습들이며, 生이나 老死도 생리적인 생·노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이연기설의 還滅門은 이같은 망념들을 멸진하는 길이다. 환멸문의 측면에서 보면 무명이 사라짐과 동시에 삼세에 걸쳐 생사가 거듭한다는 망념도 사라진다.55) 만약 태생학적인 해석으로 생·노사를 생리적인 것으로 보게되면 환멸문은 죽음의 門이 되고 말 것이다. 生을 멸하고 六入을 멸하고 識을 멸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끊어,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죽음의 상태로 만들라는 말씀이 아니라, 妄念을 끊어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면서 바르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56) 이처럼 十二緣起에서 각 緣起의 支들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로 착각된 우리들의 허망한 마음작용들이다.
阿含部의 여러 經典에서는 五蘊이나 十二處나 十八界에 의해 인간의 삶에 관련된 '一切'의 無常·苦·無我를 설한다. 이 '일체'는 다양한 인과관계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어 있는 '有爲法'이다. 동시에 이것은 중생에 의해 欲望·執着되는 유루법이다. 무상이며 유위이고 또한 유루이며 고인 현실의 삶의 일체는 그 무상을 무상으로 알고 유위를 유위로 알 때, 곧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이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되어 그대로 寂靜하고 안락한 경지인 涅槃으로 전환된다.57) 四聖諦에서도 우리는 苦를 苦인 줄 알아야 그것으로 부터 벗어날려고 할 것이며, 그것의 원인[集]을 알아야 고를 끊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고를 끊어가는 길이 八正道며, 번뇌를 멸진한 경지가 涅槃이다. 十二緣起說에서도 無明[망심]을 일으켜 생사로 輪廻하는 길이 流轉門이며, 無明[妄念]을 끊어가는 길이 還滅門이다. 유전문은 세간의 중생의 길이고, 환멸문은 출세간의 깨달음의 길이다. 깨달음은 수행자의 內面的 體驗의 사실로서 마음밖의 어디엔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곧 깨달음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12연기설의 유전문과 환멸문은 바로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2) 心의 根本性과 能動性
거듭되는 말이지만 깨달음은 마음의 문제이다. 근본불교의 교리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것은 心識의 문제이다. 진리를 증득한다는 것도 사실 객관적인 어떤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如實知見〕'이며,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결국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如實知自心〕'이다. 근본불교의 경전상에 석존의 悟道過程을 표현한 여러 가지 문헌도 석존의 심리나 지혜에 관련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근본불교 시대에 있어서는 唯心說이 적극적으로 표방되고 있지는 않지만, 마음을 중요시하고 교설의 중심으로 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신이 후세 대승불교의 교리에서 일관되고 있는 唯心思想으로 이어지는 것이다.58) 그래서 불교는 근본불교 시대 이래로 인생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나 수행의 문제와 관련하여 마음과 마음의 조복에 대해 많은 것을 설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간단하게나마 心의 근본성과 능동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1) 心의 根本性
마음이 자아나 세간의 근본이 된다는 說은 근본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보이고 있다. 먼저 『法句經』「雙要品」제1·2게는
마음이 法의 근본이고 마음이 으뜸이어서, 마음으로부터 다 이루어 지느니라. 만약 악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하면, 그로부터 고뇌가 따르나니, 마치 수레가 바퀴자국을 따르듯이,
마음이 法의 근본이고 마음이 으뜸이어서, 마음으로부터 다 이루어 지느니라. 만약 착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하면, 그로부터 즐거움이 따르나니,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59)
라고 되어 있다. 번뇌의 마음으로 惡業을 행하면 고통의 과보가 따르고, 善한 마음으로 善業을 행하면 즐거움의 과보가 따른다는 말씀이다. 불교의 기본교설인 業說을 간략하게 잘 표현하고 있으며, 그러한 업의 본질은 마음이라는 것과 업에 따른 과보도 필연적이라는 것을 비유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곧 惑·業·苦의 구조로써 윤회하는 세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雜阿含經』第36卷에는 다음과 같은 天子의 물음이 있다.
무엇이 세상을 유지해 가며, 무엇이 세상을 이끌고 있습니까? 또 어떤 한 法이 있어서, 이 세상을 제어합니까?60)
이에 대해 붓다께서는
마음이 세상을 유지해가고, 마음이 세상을 이끌고 있다.
그 마음이 한 법이 되어, 능히 세상을 제어하도다.61)
라고 대답하셨다. 天子의 물음에 대해 붓다는 마음을 위주로 한 설명으로써 대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분히 교훈적이고 경구적인 것에 불과하다. 후세 대승불교에서 보이는 '三界唯心 萬法唯識'과 같은 강한 주장은 아직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마음을 일체 제법의 근본으로 본다든가, 마음이 제법을 모두 제어하고 종속시키는 것이라는 의미는 여기에서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一切唯心造'의 사상이 될 것이다.62)
또, 『雜阿含經』제10권에는
비구들이여, 마음을 잘 사유하고 관찰하라. 왜냐하면, 기나긴 밤 동안에 마음은 탐욕에 물들어 있고,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번민하기 때문에 중생이 번민하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이 청정하느니라.……
비유하면 화가나 화가의 제자가 본 바탕을 잘 다루고, 여러 가지 채색을 갖추어 뜻대로 갖가지의 모양을 그리는 것과 같느니라.63)
라고 나와 있다. 중생의 근본은 마음이며, 그래서 수행의 근본도 마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보이는 화가의 비유는 바로 『華嚴經』「夜摩天宮偈讚品」중에 覺林菩薩이 읊는 唯心偈인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릴 수 있나니, 오온이 마음을 따라 일어나서 모든 것을 짓지 않음이 없도다."64)라는 구절과 내용이나 표현에 있어서 너무나 비슷하다.
또한, 『中阿含經』 제27권에는,
業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의 업이 있으니 思已業과 思業이다. 이것을 업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65)
라고 되어 있어서, 業의 本質도 思라는 마음작용이라고 한다. 佛敎의 修行은 결국 業을 끊어 가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善業이든 惡業이든 輪廻의 原因이 되므로,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보이다시피 업의 본질이 思心所이므로, 여기서 우리는 업을 짓는 것도 그 主體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주로 근본불교의 경전을 중심으로하여 마음의 근본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요약하자면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며, 업의 본질 역시 마음의 작용이므로 수행의 요체도 마음에 있음을 알 수 있겠다.
(2) 마음의 能動性
근본불교는 五蘊說에서 보더라도 色法보다는 心法에 관한 부분을 훨씬 더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五蘊은 12연기설에서는 名色에 해당하는데, 名은 受·想·行·識의 4蘊을 포함하는 개념이고, 色은 그대로 色蘊이다. 12연기의 識支는 이 名色支와 연기관계에 있는데 이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잡아함경』제12권에
'어떤 법이 있기 때문에 老死가 있으며, 어떤 법을 인연하기 때문에 老死가 있는가?' 곧 正思惟하여 참다운 지혜가 생겼다.
'生이 있기 때문에 老死가 있고, 生을 인연하기 때문에 老死가 있다.……'어떤 법이 있기 때문에 名色이 있으며, 어떤 법을 인연하기 때문에 名色이 있는가?' 곧 정사유하여 참다운 지혜가 생겼다. '識이 있기 때문에 名色이 있으며, 識을 인연하기 때문에 名色이 있다.'66)
라고 되어 있다. 이른바 齊識緣起說이라 불리우는 교설이다. 제식연기설은 붓다가 사유과정에서 부딪혔던 딜레마를 술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 붓다의 반성적 사유를 통해서, 의식은 반드시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며, 대상이 없으면 의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식(識)속에 名色이 있을 때 우리는 사물을 지각하여 그들의 존재를 인식한다. 만약 명색이 없으면 우리에게 지각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67) 또한 識이 없으면 名色이 있을 수 없으므로, 유정의 심식이 一切諸法을 조작하는 因이 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의 연기의 형식 중에서 무명으로부터 일체제법을 조작하는 인이 되는 것은 모두 유정의 심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四聖諦 가운데서 제2의 集은 苦의 현실계[世間]가 연기하는 원인을 밝힌 것인데, 集은 煩惱의 異名이므로 번뇌심이 곧 유정의 현실계를 연기케 하는 根本因이 되는 것이다.68) 主·客觀의 세계를 조작하는 원동력은 主觀體의 心識이며, 그 중에서도 심식작용 중의 일종인 번뇌가 그것이다. 이 번뇌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이 無明이다.
또한,『잡아함경』제12권에 사리불이 묻고 마하구희라가 답하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나온다.
늙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죽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남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도 아니고 남도 아니며 因이 없이 지어진 것입니까? 존자 사리불이여,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지은 것도 아니고, 자기와 남이 짓거나 인이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태어남을 緣으로 하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됩니다.……그러나 그 名色은 識을 緣하여 生起합니다.……그러나 그 식은 명색을 연하여 생기합니다.69)
인용문의 끝부분에서 앞에서는 名色이 識을 緣하여 生起한다고 하다가, 뒤에서는 다시 식이 명색을 연하여 생기한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명색은 식에 내재하는 식의 대상이다. 따라서 명색은 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식은 항상 명색에 대한 식이며, 명색을 요별하는 것이다. 곧 식은 명색을 요별하는 식이고, 명색은 식에 요별되는 식인 것이다. 만약 명색이 없다면 명색을 요별하는 식도 있을 수 없고, 식이 없다면 요별되는 명색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70) 이상의 논거만으로서도 근본불교 시대에 아직 '唯心'이라는 술어로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一切諸法이 우리들의 心識으로부터 연기하고 있다는 의미는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장아함경』제16권의 偈頌은
무엇 때문에 4大인 地·水·火·風은 소멸하여 없어지는가? 무엇 때문에 거칠고 세밀한 것과 길고 짧음과 아름답고 추한 것이 없어지는가? 무엇 때문에 명색이 없어져 아주 멸하여 남는 것이 없는가?
답하기를, 識은 형상이 없고 한량이 없으나 스스로 광명이 있다. 이것이 멸하면 4대가 멸하며, 거칠고 세밀한 것과 아름답고 추한 것이 멸하며, 이에 명색도 멸하나니, 식이 멸하면 그 밖의 것도 또한 멸하느니라.71)
라고 되어 있는데, 地大 등의 色法과 心法의 滅은 모두 識의 멸에 의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대승불교의 唯心思想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본경전에서도 心의 根本性과 能動性을 강조함으로써 唯識思想의 기반은 충분히 닦여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修行으로 귀결되는 佛敎哲學으로서는 결국 그 주된 흐름이 唯心論의 전통으로 이어져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根本佛敎에서의 心體와 心作用
근본불교에서는 마음의 문제 그 자체를 論究의 목적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일체법을 설하면서 그것을 오온·십이처·십팔계 등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온·십이처·십팔계설에는 물질적인 것과 마음이 포함되어 있지만, 근본불교에서 이러한 것들이 설해진 목적은 일체법 하나하나가 모두 無常하고 無我라는 것을 논하기 위해서였다.72)
根本佛敎의 經典上에는 心을 心·意·識이라는 세 가지의 이름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상의 차이점은 자세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五蘊說 중에서 色을 제외한 受·想·行·識의 四蘊은 心을 분석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 네 가지 중에서도 識은 心의 主體라 볼 수 있으며, 수·상·행의 세 가지 蘊은 심의 작용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심의 작용을 部派佛敎의 아비달마 시대가 되면 心所라고 부르게 되지만 근본불교 시대에는 아직 심소라는 술어는 사용되지 않았다.73) 心所에 대해서는 修行을 통해 解脫로 나아가는 敎說 가운데 여러 종류가 언급되고 있다. 아함부의 여러 경전에는 心所法 중에서도 특히 煩惱에 대해서 많은 종류가 밝혀져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주목적이 번뇌를 끊는데 있기 때문이다.74) 그러나 그 이외의 심소에 대해서는 阿含部에는 주된 것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곧 受·想·思·作意·觸·念·尋·伺·欲 등을 비롯하여 약간의 심소법이 여기저기 설해지고 있는데 불과하다.
근본불교의 여러 경전에서는 五蘊 가운데 수·상·행·식이라든지 '六六經'의 六根·六境·六識·六受·六想·六思에서 식·수·상·사 등은 그 하나하나의 항목이 독립적인 마음작용으로서, 마음이 식-수-상-사 등과 繼起한다. 또 12緣起에서 觸-受-愛-取 등도 각각 독립적인 마음작용이며 인식성립의 과정을 설하는 것이다. 또한 작의-촉-수-상-사 등도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단독의 마음작용이고, 이것들의 작용 이외에 마음의 當體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수·상·사·식 등의 마음작용이 그대로 마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受의 마음, 想의 마음, 思의 마음, 識의 마음을 의미한다. 수·상·사 등은 식과 대등한 입장으로 함께 마음작용을 이루는 하나의 마음이다.75)
『雜阿含經』제12권에는
心과 意와 識은 밤낮으로 때를 다투어 잠깐도 멈추지 않고 여러 가지로 구르고 변하여, 다른 것으로 나고 다른 것으로 멸한다. 마치 원숭이가 숲 속에서 놀 때 잠깐동안에 여기 저기의 나무가지를 더위잡아, 하나를 놓자마자 곧 다른 것을 잡는 것과 같나니, 심과 의와 식도 또한 그와 같아서 여러 가지로 변하고 바뀌어 다른 것으로 났다가 다른 것으로 멸하느니라.76)
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범부의 心意識은 무상하여 찰나로 생멸하는 것이 숲 속에서 잠시도 쉬지않고 다니는 원숭이와 같다는 것이다. 심과 의와 식 각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의식을 합칭하여 한 마리의 원숭이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다닌다는 비유로 봐서 그 體가 하나라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잡아함경』제21권에는
想·思는 意行으로서, 마음을 의지하고 마음을 따르며 마음을 의지하여 굴러간다. 그러므로 상·사는 의행이다. …… 상·사는 心數法으로서, 마음을 의지하고 마음을 따라 같이 굴러간다. 그러므로 상·사를 의행이라고 한다.77)
라고 나와 있다. 이 經文에 의하면 想과 思는 意行으로서 심에 의지하고 따르며 전변한다는 것이다. 곧 상과 사는 심수법으로서 심에 의지하고 따르며 전변하기 때문에 心法은 體이고 想과 思는 그 작용이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심수법은 뒷 날 유가행파에서는 심소법으로 이해하게 된다.78)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근본불교에서는 심의식 3자의 의미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사용되지는 않았으며, 그 명칭만 다를 뿐 그 체는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또한 심작용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양하게 분류되어 논구되지는 않았지만 후세에 발달할 수 있는 근거는 마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根本佛敎의 心性說
心性의 문제는 心性의 淨·不淨의 문제로서 가치판단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불교의 경전상에 명확한 교설의 판단이 없다. 일체의 현상적인 존재의 본질은 모두 三法印 중의 諸行無常과 諸法無我라는 二印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心性이 본래 청정한 것이라면, 그것은 無常한 존재일 리가 없고 따라서 無實體한 것도 아닐 것이다. 五蘊중에서 受 等의 4蘊이 이미 무상하고 무실체한 것이라면, 그것은 벌써 본래 청정한 것이 아님을 反證하는 것이다.79) 그러나 근본불교의 경전전반을 통해서 붓다는 번뇌제거의 수행을 말씀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범부에게도 해탈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示唆하는 것이며, 미혹한 범부의 현실심에도 청정성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왜냐하면 迷惑心이 本心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극복하는 수행을 한다는 것은 無意味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이란 본래 청정한 것인가, 아니면 본래 不淨한 것인가? 『雜阿含經』 제1,246經에는
冶金者가 모래와 흙을 모아 통에 넣고 물을 부으면, 굵고 골치아픈 억센 돌과 단단한 흙덩이는 물을 따라 씻겨간다. 그래도 굵은 모래가 붙어 있어서 다시 물을 부으면, 굵은 모래는 물을 따라 흘러 나가고 금이 남는다. 그래도 가는 모래와 검은 흙은 붙어 있게 되는데 다시 물을 부으면, 가는 모래와 검은 흙도 물을 따라 흘러나가고 섞인 것이 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진금이 남게 된다.……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비구가 거친 번뇌의 결박과 惡하고 착하지 않은 業과 여러 가지 나쁘고 그릇된 견해를 차츰 끊어 없애는 것은, 마치 자연상태의 금에서 억센 돌이나 흙덩이를 일어서 버리는 것과 같다.80)
라고 한 것이 있다. 이 문장은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신 것인데, 범부의 마음을 순금에 비유하고 있다. 혹자는 이 문장을 자연상태의 금이 비록 흙속에 묻혀있다 하더라도 그 빛나는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처럼, 衆生心도 본래 淸淨하다는 논리의 근거를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의 비약일뿐, 수많은 아함부의 경전들 어디에도 心性의 本淨을 명확하게 설한 곳은 없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에 이어지는 말씀도 모두가 冶金의 과정에 맞춰 수행의 정도를 더해가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계속된다. 위의 경 끝부분은,
또 비구가 모든 覺과 觀81)을 떠나, 내지 제2·제3·제4선정을 얻고, 이와 같이 禪定[正受]82)이 순수하고 청정하여 많은 번뇌들을 떠나고 부드럽고 연하며 진실하여 거기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 入處에서 증득하고자 하여 모두 증득하는 것은, 저 야금사가 자연상태의 금을 제련하여 지극히 가볍고 연하게 하여 광택을 끊이지 않게 하고, 어떠한 그릇을 만들거나 마음대로 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가 삼매와 禪定[等至]에 들어, 내지 모든 입처에서 모두 증득하게 되느니라.83)
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 經 전체의 문맥의 흐름으로 봐서도 이러한 비유의 초점은 '心性本淨'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染汚된 마음을 淸淨하게 닦아가는 수행의 과정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비유는 일부분의 비유일 뿐이므로 여기에 너무 많은 내용을 牽强附會할 필요는 없다. 자기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무리한 해석을 억지로 펼치다 보면, 오히려 佛說의 眞意를 크게 왜곡하게 된다. 아함부의 경전들 어디에서도 뒷날 부파불교의 대중부가 주장하는 '心性本淨說'의 확실한 근거가 될만한 명확한 내용의 교설은 없다. 그러므로 근본불교에서 '自性淸淨心'사상의 근거를 찾는 것은 논리의 비약을 초래할 뿐이다.
만약 중생심이 본래 청정한 것이라면, 절대로 염오될 수 없을 것이므로 처음부터 아예 수행은 필요가 없을 것이며 중생이 있을리 만무하다. 만약 중생심이 본래 염오성의 것이라면, 결코 청정하게 될 수 없을 것이므로 수행은 무의미한 것이며 붓다도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부파불교시대의『사리불아비담론』「假心品」에는
심성은 청정하지만 객진번뇌에 의해 더러워진다. 범부는 이것을 듣지 못한 까닭에 있는 그대로 보지〔如實知見〕 못하고, 또한 마음을 닦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인은 들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며, 또한 마음을 닦는다. 심성은 청정하므로 객진번뇌를 떠난다. 범부는 이것을 듣지 못한 까닭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또한 마음을 닦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인은 들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며, 또한 마음을 닦는다.84)
라고 되어 있다. '心性本淨'을 설하고 있는데, 본래 청정한 마음이 객진번뇌에 의해 염오된다는 것으로 보아 마음의 본성을 상주하는 무위법으로 보는 사상이다. 이것은 유위법의 본성을 무위로 보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85) 그러나 淸淨한 것이든 染汚의 것이든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有爲法의 본성이 無爲라고 하는 것은 유위법의 바탕이 無爲法이라는 것이지, 無爲法이 有爲法을 떠나 따로이 本來的·實體的으로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위법과 무위법은 그 존재형태가 다르므로, 있다고 해도 그 차원이 서로 다른 것이다. 중생 대부분이 염오에 젖어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청정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얘기한 것이 '心性本淨說'의 진정한 의미이다. 염오에서 청정으로 갈 수 있는 근거는 중생심의 염오성도 無常·無我·空性의 것이기 때문이다. 自性淸淨心이라 하든 佛性이라 하든 무상·무아·空性과 緣起性의 자각 가능성에 대한 표현으로 봐야지 실체적으로 미리 주어진 본질로 고정화시켜서는 안된다. 佛性說은 心性本淨說을 근저로 하며, 佛性은 의인화한 空性의 다른 명칭이다. 청정성이란 내용적으로 무상·무아·空性이며, 염오성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다만 중생들의 마음이 염오성에 기울어 있기 때문에, 수행의 필요성과 중요성 및 깨달음의 가능성의 측면에서 방편적으로 심성본정과 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일체의 염오나 청정이라는 가치적인 것도 무상·무아·空性 안에 있다. 마음을 번뇌로 일으키면 惡이고, 마음에서 번뇌를 끊어가면 善이다. 선악의 문제도 결국 마음의 문제로서 수행을 중요시하는 불교는 唯心思想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部派佛敎의 心識思想
부파불교의 아비달마는 근본경전에서 설하는 석존의 설법을 분류·정리하고, 경전의 문구를 해설하고, 용어의 정의를 내리고,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敎理와 修行法을 통일하여 조직한 것이다. 각 용어에 대한 개념을 규정함과 동시에 개념과 개념 사이의 異와 同을 상세하게 고찰하고, 이것에 의해 일관된 교리를 조직하였다. 그러한 경우에 기성의 개념이 부족할 때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고 보충하여 당시까지는 없었던 개념과 교리조직이 나타나게 되었다.86)
이러한 경향을 心識의 문제에서 보면 석존 시대에서는 심식을 심식 그 자체로서 논한 것이 아니라, 宗敎的 實踐이나 人生問題를 설하는 경우에 심식의 문제가 자연히 포함된 것이었다. 그런데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에서는 심식을 심식 그 자체로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부족한 개념은 새로운 용어로써 보충하여 심식의 개념규정을 석존 시대의 사회통념적 개념에서 엄밀하게 정의하고 규정된 전문적인 개념으로 변화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불교에 없었던 심소법이라는 개념이 아비달마에서 새롭게 발생하고, 여기에 다양한 교리조직이 나타난 점이다.87) 아래에서는 먼저 심왕·심소에 관련된 설들을 살펴보고, 나아가 부파불교의 심체설과 이들을 종합하여 체계지운 세친의 부파적 심식사상을『구사론』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心王과 心所說
(1) 心王과 心所의 本質
心法은 일체의 정신적 현상을 총괄하는 술어이며, 色法의 相對語이다. 心法은 다시 心王과 心所로 나뉘어 진다. 근본불교에서는 心을 표현함에 있어서 心·意 ·識이라는 세 가지 이름을 사용하며 六識을 설하고 있다. 『구사론』에서는 眼·耳·鼻·舌·身·意의 6識이 있다고 보지만, 심왕의 體는 하나라고 한다. 心王은 산스끄리뜨로 citta인데 그 어원인 cit는 '생각한다'는 뜻이며, citta에 王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漢譯者가 그 의미를 王과 臣下로 나누고 마음의 중심체를 王에 비유하여 心王으로 번역했다. 心所는 산스끄리뜨로 caitta이며, '心(王)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王에게 많은 臣下가 따르는 것처럼 心王에도 많은 권속이 따르는데, 이 권속을 心所라고 하며 자세하게는 心所有法이라고 한다. 곧 心(王)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88)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시대가 되면 아함부의 심소법을 이어받고, 거기에다가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상세한 심소론을 발전시킨다. 이것은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번뇌와 다른 심소가 어떻게 협동하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89)
『阿毘達磨品類足論』「辯五事品」제1에는
心이란 무엇인가. 心·意·識을 말한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六識身 곧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다. 心所法이란 무엇인가. 어떤 法이 心과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受·想·思·觸·作意·欲·勝解·念·定·慧·信·勤·尋·伺·放逸·不放逸·善根·不善根·無記根과 일체의 結·縛·隨眠·隨煩惱·纏,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여러 智와 여러 見과 여러 現觀을 말한다. 또 그밖에 이러한 부류의 법이 심과 상응하는 것이니, 이를 총괄하여 심소법이라고 한다.90)
라고 하여, 心과 心所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心意識은 6識身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心所說에 대해서도 이른바 대지법과 대선지법 및 대번뇌지법 그리고 善·惡·無記의 三性에 대한 명칭까지 정연하게 들고 있다.91) 이와 같이 부파의 아비달마에서는 심소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주체인 心法[心王]과 그 속성인 심소법은 별개로 생각하는 입장이 두드러져 시대에 따른 변천과 발달이 보인다.
그리고『品類足論』제2권에는
10大地法이란 무엇인가. 수·상·사·촉·작의·욕·승해·염·정·혜이다. 10대선지법이란 무엇인가. 신·근·참·괴·무탐·무진·경안·사·불방일·불해이다. 10대번뇌지법이란 무엇인가. 불신·해태·실념·심란·무명·부정지·비리작의·사승해·도거·방일이다. 10小煩惱地法이란 무엇인가. 분·한·부·뇌·질·간·첨·교·해이다. 5煩惱란 무엇인가. 욕탐·색탐·무색탐·진·치이다.92)
라고 하여, 아주 자세한 심소법이 전개되고 있다. 10대지법·10대선지법·10대번뇌지법·10소번뇌지법·5번뇌 등 45심소를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후세의 구사학에서 심소를 46종으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는 심소설이다.93) 이러한 발전된 심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구사학의 46심소설을 거쳐 유가행파의 51심소설로 확대되는 것이다.
(2) 三科와 心·心所의 포함관계
5縕에서는 色縕만이 色法이다. 그러나 12處·18界에서는 대부분이 色法에 포함되며, 色을 제외하면 12處에는 法處와 意處 그리고 18界에는 7心界와 法界만이 남는다. 12處의 法處와 意處, 18界의 7心界와 法界는 5蘊에서는 受·想·行·識의 네 가지 蘊에 해당한다. 5蘊 중 識蘊은 心王에 해당하고, 受·想·行蘊은 心所에 해당한다. 心王은 12處說에서는 意處에 해당하고, 18界說에서는 意界와 眼識界 내지 意識界의 7心界에 해당한다. 受·想 이외의 心所法은 5蘊說에서는 行蘊에 포함되며, 그러므로 不相應行法도 이 行蘊에 포함된다. 受·想·行의 3蘊은 12處說에서는 法處에 포함되며, 18界說에서는 法界에 포함된다.94)
五蘊은 有爲法이며 無爲法은 오온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무위법은 十二處說에서는 法處에 포함되며, 十八界說에서는 法界에 포함된다. 크게 요약하자면 色法은 色蘊, 十處와 法處의 일부분, 十界와 法界의 일부분에 포함되며, 心王은 識蘊, 十二處의 意處, 十八界의 七心界에 해당한다. 따라서 법처·법계에 포함되는 법이 阿含에서는 미처 분화되지 않았는 데, 部派佛敎에 이르면 상세히 고찰되고 연구되게 된다.95)
2) 心意識의 無差別說과 差別說
심의식의 체성이 동일한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하는 심체설에 대해서 부파불교에서는 상당히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현존하는 아비달마논서는 대부분이 설일체유부의 논서이므로 아래에서는 유부의 논서를 중심으로 하여 이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心意識의 無差別說
먼저『阿毘達磨法蘊足論』제5권에는
이 가운데서, 심이란 출가가 멀리 여의어야 생기는 선법에 의하여 일어나는 심·의·식을 말하는데, 이것을 心이라 이름한다.96)
라고 하여, 심과 의와 식은 그 작용이 같다고 설하고 있다.『아비달마품류족론』에는 '심은 곧 심의식이며, 이것은 육식신이다'97)라고 하였다.
그리고『아비담심론』제1권 에서는
심은 의이고, 의는 식이다. (이 세 가지는) 실제로 동일한 것이며, 명칭만 다를 뿐이다.98)
라고 하여, 심·의·식은 그 체가 동일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비달마의 6족론에서는 심의식은 명칭만 다를 뿐 체는 동일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대비바사론』의 단계에 오면 심의식의 무차별설과 함께 차별설도 주장되었다. 먼저 심의식의 3자가 차별이 없다는 주장을 살펴 보자.
『대비바사론』제72권에
여러 경전에서 심의식을 말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심이 곧 의이고 의가 곧 식으로서, 이 셋은 명칭만 다를 뿐 의미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99)
라고 하여, 심의식의 3자는 체가 동일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心意識의 差別說
『대비바사론』에는 심의식의 무차별설과 함께 심·의·식을 구별하려는 견해가 주장되고 있다.
『대비바사론』제72권에는
또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心·意·識 셋은 또한 차이가 있다. 우선 명칭에서 차이가 난다. 각각 심·의·식이라고 다르게 이름하기 때문이다. 또 世의 차이가 있다. 과거세의 심법을 意, 미래세의 것을 心, 현재세의 것을 識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또 (교설의) 施設에서도 차이가 있다. 十八界說에서는 心을, 十二處說에서는 意를, 五蘊說에서는 識을 시설하기 때문이다. 또 의미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心은 種族, 意는 生門, 識은 積聚의 의미이다. 또한 업에서도 차이가 있다. 遠行하는 것은 心의 업이다. …… 前行하는 것은 意의 업이다. …… 續生하는 것은 識의 업이다. …… 또한 滋長하는 것이 心業이고, 思量이 意業, 分別이 識業이다. 脇尊者는 滋長과 分割이 心業, 思量과 思惟가 意業, 分別과 解了가 識業이라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滋長하는 것은 有漏心이고, 분할하는 것은 無漏心이다. 사량하는 것은 有漏意이며, 사유하는 것은 無漏意이다. 분별하는 것은 有漏識이고, 解了하는 것은 無漏識이다. 그러므로 심·의·식 셋은 차이가 있다.100)
라고 되어 있어, 아주 논리정연하게 근거를 제시하면서 심의식의 차별설을 주장하고 있다. 곧 심의식은 명칭·世·시설·의미·업 등의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는 심·의·식의 차이를 분석하고 있을 뿐, 여전히 心體一說을 주장하였다. 심·의·식은 동일한 심체의 세 가지 작용적인 측면으로 생각한 것이다.101) 그러므로 부파불교에 있어서 심의식의 無差別說과 差別說이 모두 심체일설을 전제로 하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물론 그 중에서 심의식의 차별설은 후세의 심체별설의 전단계의 의미는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心· 心所의 相應說
心王과 心所가 서로 대응하여 작용하는 것을 相應이라고 한다. 그런데 心所는 心王에 그냥 소극적·피동적으로 소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동등하게 화합하는 상응의 관계로서 작용하며 그래서 心所法을 心相應行法이라고도 한다.102) 心王에 대해 心所法의 別體를 인정하지 않고 心王의 分位差別이라고 보는 經量部에서는 心王과 心所法이 次第로 生起하며 서로 相應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有部는 이와 반대로 心王과 心所法은 동시에 生起하며 相應한다고 주장하면서, 心心所法의 相應義를 五事等으로써 설하고 있다.
이러한 상응관계를『入阿毘達磨論』이나 『구사론』에서는 所依·所緣·行相·時·事의 五義平等으로 말하고, 뒷 날 유가행파의『성유식론』에서는 時·所依·所緣·事의 相應의 四義로써 설명한다. 所依平等은 심왕과 심소가 그 所依의 根을 함께 하는 것이며, 所緣平等이란 심왕과 심소가 그 所緣의 境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時平等은 심왕과 심소가 동일 찰나에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事平等이라는 것은 事는 體의 의미로서 심왕과 심소는 그 體가 각각 한 개씩이며, 동일한 심왕·심소가 두 개 이상의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行相平等이란 심왕과 심소가 그 行相을 같이 하는 것을 말하는 데, 여기서 行相은 行解相貌의 의미로서 心心所 위에 나타나는 所緣의 境相이다.
後世의 瑜伽行派에서는 時同·依同·所緣等·事等이라는 네 가지의 同等으로 말미암아 相應이라103) 하여 四義平等을 내세운다. 時·依는 同一을 平等이라고 이름하고, 所緣·事는 相似를 平等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行相의 平等이 빠진 것은 유가행파의 경우에는 有部 등의 部派와는 行相을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유부 등의 부파는 識을 떠난 心外의 所緣境을 인정하지만, 唯識無境을 주장하는 유가행파의 경우에는 識을 떠난 所緣境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구사론』등에서 말하는 行相이란 心心所 위에 나타난 影像을 말하며, 行相이 平等하다는 것은 心王에 나타난 영상도 心所에 나타난 영상과 相似하기 때문에 平等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心分說을 주장하는 유가행파에서는 見分이 行相이고, 相分이 所緣이며, 自體分을 事라고 한다. 本質에 대하여 所緣이라고 하지도 않고, 또한 影像을 行相이라고 하지도 않으므로 相應을 설명하는데 行相은 제외되는 것이다.104)
이와같이 心王과 心所는 상응하기 때문에 心王과 心所는 반드시 함께 일어나며, 心王이 일어날 때에는 心所法도 반드시 心王에 의하여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 관계는 동등하게 화합하는 상응의 관계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心心所法이 境을 취함에 있어서 心王은 總相을 了別하며, 心所는 總相뿐만 아니라 別相도 了別하는 것이다.
4) 世親의 部派的 心識思想
세친의 部派期의 심식사상을 살펴볼려면, 세친 자신이 부파불교시대의 불교연구를 집대성한『구사론』을 중심으로 해서 논의되어야 한다.『구사론』은 대부분 毘婆沙師의 義理에 의해 설해지고, 說一切有部의 敎義體系가 이 논서에 의해 완성된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경량부적인 입장에서 유부의 전통설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므로 세친의 部派期의 심식사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절한 저작이다. 이 項에서는『구사론』을 중심으로 하여, 우선 세친의 심의식사상을 살펴보고, 이어서 심왕·심소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世親의 心意識思想
먼저 心意識의 體一異說에 관하여 살펴보면,
『俱舍論』제4권에
쌓아서 일으키므로 心이라 하고, 헤아려서 알므로 意라고 하며, 自法과 他法을 분별하여 요별하므로 識이라고 한다. 다시 해석하면, 청정[善]과 부정[惡]의 요소에 의해 갖가지로 차별이 있기 때문에 心이라고 하고, (수반되는)다른 마음에 대하여 所依가 되므로 意라고 하며, (根과 境을 통하여)能依로서 작용하므로 識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心과 意와 識은 표현하는 의미는 비록 다르지만 그 체는 하나이다.105)
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구사론』에서는 심·의·식의 명칭은 각기 다르지만 그 體가 동일하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심의식의 體一說을 주장하는『대비바사론』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心은 산스끄리뜨 citta로서 集起의 의미, 곧 心所 및 三業의 所作事業을 引起함을 의미한다. 意는 산스끄리뜨 manas로서 思量의 의미, 곧 所緣의 경계를 思惟量度하는 것을 말한다. 識은 산스끄리뜨 vijnana로서 了別의 의미, 곧 여러 가지의 경계를 명료하게 식별하는 것을 의미한다.106) 심·의·식이라는 명칭과 작용만 다른 뿐이지, 그 체는 세 가지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심의식에 대한 의미규정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구사론』의 위 문장은 부파불교의 심의식에 대한 정의를 종합하여 결론짓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논의는 심의식의 차별적인 특성을 통해 이러한 구분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우리는 '集起'라는 心의 정의에서 무상하여 찰나멸하는 심식이지만, 생기하여서 멸하는 것만이 아니라, 뒤에 무엇인가를 남겨둔다는 표현을 통해 후세 알라야식설의 희미한 싹을 볼 수 있어야 겠다.
(2) 世親의 部派的 心王說
『구사론』의 입장은 心·意·識의 명칭과 작용은 각기 다르지만, 그 體는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心의 主體는 무엇인가?
『구사론』제1권에
각각 이러저러한 경계를 요별하여 境의 특질을 총괄하여 취하므로 식온이라 한다. 이것[식온]은 다시 차별하면 6식신이 있는데, 안식신 부터 의식신까지의 (여섯)이다.107)
라고 하여 있으므로,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가지 識이 곧 心의 주체라는 것이다. 안식은 안근을 소의로 하여 색경을 요별하는 것, 내지 의식은 의근을 소의로 하여 法境을 요별하는 것이다. 곧 마음이 六根을 통하여 외계의 육경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작용을 행할 때에 비로소 6식의 명칭이 성립되는 것이다. 육식이라 할지라도 識의 體가 6종이라는 것은 아니며, 識體는 하나라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定義이다.108) 그런데 識이 일어날 때는 根과 境의 두 가지 緣에 의탁하는데도, 所依의 명칭을 얻음에 있어서는 境이 아니라 根으로 명칭을 얻는다. 그러면 眼識 등의 육식의 명칭을 五境에 의하지 않고 五根에 의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구사론』제2권에
소의가 수승한 것과 불공의 인 때문에 식은 근에 따라서 명칭을 얻게 된 것이요 경에 의한 것이 아니다.109)
라고 하여,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所依가 수승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根이 增益하고 損減함에 의하여 識이 분명[明]하거나 흐릿[昧]하게 달라진다는 것으로, 根이 轉變하면 識도 따라서 전변한다. 그러나 境이 전변하더라도 識은변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所依의 의미는 境보다 根이 수승하다고 한다. 그리고 不共의 因 때문이라는 것은 眼 등의 五根은 眼識 등에게 不共의 소의가 되지만, 色 등의 五境은 다른 사람의 五識 및 自他의 의식에게 모두 緣取되므로 不共依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자면 눈 앞의 책상은 나만이 보는 게 아니므로 境을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五識은 五境보다는 五根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根의 명칭을 識에게 붙이게 된 것이라고 한다.110)
다음에 제6식을 意識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前五識은 不共依의 根이 따로 있어서 그 명칭을 얻었지만, 제6식은 이러한 不共依의 근이 없으므로 무엇에 의하여 명칭을 붙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하여 제6識은 不共法의 근은 없지만, 소의가 수승한 意根이 있으므로 이에 의하여 意識이라는 명칭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근은 의식만의 소의가 아니고 전5식의 소의도 되는 共通所依의 根이다.111)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세친은 심왕에 대해서『品類足論』의「辯五事品」에서 처럼 6識身으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아울러 6識의 명칭에 대한 연유를 논리적으로 잘 밝혀 놓고 있다. 그러나 육식의 體가 6종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아서, 識體는 하나라는 유부의 정의를 그대로 따르는 것 같다.
(3) 世親의 部派的 心所說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에서는 근본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마음작용을 마음의 주체에 포함된 부분적인 것으로 보고, 이것을 심소라고 부른다. 어떤 종류의 심소법을 세우고, 그것을 어떻게 분류하고 정리하는가는 각 부파에 따라 다르고, 한 부파의 아비달마에서도 시대에 따라 변천과 발달이 보인다.112)
心의 主體는 心王으로서 六識이다. 6識은 오직 그 境을 총괄적으로 요별함에 그치고, 그 요별된 대상에 대하여 善惡의 구별과 美醜의 愛憎과 正邪의 판단을 내려 이에 대한 취사선택의 판별을 하는 작용은 心所가 한다. 심소는 심왕인 육식에 부수하여 일어나며, 심왕과 같이 경계의 총상도 緣取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계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판별하고, 또 이것을 취사선택하는 것이다.113) 부파의 설일체유부에서 심소법이 분류되기 시작한 것은『界身足論』에서이다. 『品類足論』이 이것을 이어 받고『대비바사론』에 이르며 차례로『雜阿毘曇心論』에 이르고, 이것을 더욱 개선하여 세친의『구사론』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114) 여기에서는 번거로움을 피하여 부파불교로서는 최종적으로 분류된 심소법에 관하여 세친의『구사론』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구사론』제4권에는 심소법을 6類115) 42法으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大地法(10) - 수(受)·상(想)·사(思)·촉(觸)·욕(欲)·혜(慧)·
염(念)·작의(作意)·승해(勝解)·삼마지(三摩地,定)
2 大善地法(10) - 신(信)·불방일(不放逸)·경안(輕安)·사(捨)·참( ) ·괴(愧)·무탐(無貪)·무진(無瞋)·불해(不害)·
근(勤, 精進)
3 大煩惱地法(6) - 치(痴, 無明)·방일(放逸)·해태(懈怠)·불신(不信)· 혼침( 沈)·도거(掉擧)
4 大不善地法(2) - 무참(無 )·무괴(無愧)
5 小煩惱地法(10) - 분(忿)·부(覆)·간( )·질(嫉)·뇌(惱)·해(害)· 한(恨)·첨(諂)·광( )·교( )
不定地法(4等) - 오작(惡作)·수면(睡眠)·심(尋)·사(伺) 等116)
여섯째의 不定地法을 세친의『구사론』에서는 '惡作·睡眠·尋·伺 等'이라고 하여 구체적인 심소법의 명칭은 4法만을 들고 있는 데, 여기서 '等'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관해『구사론』의 주석가들 사이에 異論이 발생하였다. 중국의 俱舍宗에서는『구사론』의 번역자인 현장의 전승에 따라 '等'이란 貪·瞋·慢·疑의 4법을 포함한다 하여 부정지법을 8법으로 하여 6류 46법으로 완성한다.117)
그런데 설일체유부의 법분류에는 한 가지 커다란 결함이 있다. 그것은 번뇌심소의 분류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서는 근본번뇌로서 탐·진·치[無明]·만·의·견의 6종, 또는 見을 身見·邊見·邪見·見取見·戒禁取見의 다섯으로 나누어 10종으로 한다. 일체의 번뇌를 98종으로 하는 98수면의 설은 이 10종의 근본번뇌를 三界에 두루 분류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심소법의 분류에서 번뇌심소를 열거하고 분류하는 경우에는 이 6종 또는 10종의 根本煩惱를 가장 먼저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의 분류에서는 痴만을 大煩惱地法으로 하고, 貪·瞋·慢·疑는 不定地法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이 4법은 세친의『구사론』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후세에 더해지는데, 이 점에서 『구사론』의 번뇌심소의 분류는 소략한 면이 있다. 물론 설일체유부에서는 견 또는 5견을 심소법에서 설하지 않지만, 이것을 10대지법 가운데 慧심소의 일부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근본번뇌로서 별도로 분류하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이러한 결함과 불합리를 모두 제거하고 설일체유부의 심소설을 참조하면서 독자적인 심소법의 분류를 설한 것은 대승의 유가행파다. 유가행파는 최종적으로 6류 51법의 심소를 들고 있는데, 번뇌심소에는 근본번뇌로서 탐·진·만·무명[痴]·견·의의 6종만을 설하고, 그밖의 번뇌는 모두 隨煩惱로 분류하여 이것을 더욱 세분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타당하고 합리적이며, 섬세한 분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118) 어쨌든『구사론』의 법분류는 소략한 면은 있지만, 뒷 날 유가행파의 5위100법설의 바탕이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구사론』과『대승백법명문론』의 저자가 다 같이 세친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末那識의 淵源
모든 불교의 교리는 근본불교에 그 사상의 근저를 두고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하여 후세에 다양한 교리의 발전을 보게 된다. 그것은 시대적인 요청에 의한 것으로 논리적으로 보다 치밀해지고, 용어의 다양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었다. 널리 알다시피 불교의 목적은 苦로부터의 해탈에 있으므로 人生苦의 근원을 추구하고 규명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 인생苦의 근원이 연기설에서 無明임이 밝혀지고, 無明의 本性에 대한 추구가 심식의 체성에 대한 논구로 이어져, 마침내 唯識思想에서는 우리 인간의 심식중 第7말나식이 무명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이라고 밝히게 된다. 근본불교시대나 부파불교시대에서는 하나의 독립된 식으로서 말나식이라는 명칭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말나식의 연원이 되는 사상으로서 근본불교에서는 無明과 무명에 의한 我見의 문제119), 부파불교에서는 수면설과 종자설120) 그리고 제6의식의 所依根의 문제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本節에서는 말나식의 체성과 작용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피하고, 부파불교에서 나타난 말나식의 연원과 그 성립과정에 대한 것만을 중심으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部派佛敎의 隨眠說과 種子說
부파불교의 大衆部는 우리 인간의 심성은 본래 청정하지만 객진번뇌에 의해 염오되어 청정하지 않게 된다122)고 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객진번뇌의 작용을 纏과 隨眠으로 구분하여, 纏은 현재에 작용하고 있는 번뇌라 하고, 隨眠은 번뇌가 작용한 功能으로 우리 내부에 간단없이 잠재하고 있는 種子로 보았다.
수면설은 대중부·설일체유부·경량부·일설부·설출세부·化地部·鷄胤部 등에서 주장되었지만, 수면의 體에 대해서는 부파에 따라 견해가 같지 않았다. 대중부·일설부·설출세부·계윤부·化地部에서는 수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수면은 심왕법도 심소법도 아니며 소연경[대상]도 없다. 수면과 纏은 서로 다르다. 수면은 心과 상응하지 않으며, 전은 심과 상응한다.123)
곧 전은 현행한 번뇌심소이지만, 수면은 현행적인 심·심소가 아니라, 번뇌를 일으키는 잠재적인 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만약 수면을 현행의 심소라고 한다면, 無心 혹은 善心位에는 번뇌가 없으므로 凡夫를 聖者라고 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나 無心位 등에 있는 者라도 범부인 까닭은 번뇌의 종자인 수면이 간단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면은 현행이 아니므로 심·심소가 아니며 따라서 상응의 의미도 없으므로 不相應法에 포함되는 法이라고 한다.124) 이에 반하여 설일체유부에서는 수면을 纏과 다른 종류의 번뇌로서 現勢態이며 心心所相應法이라고 주장한다125)
이러한 수면설과 종자설로부터 후기 경량부가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경량부에서 수면은 惡心을 일으키는 종자로서 心相應法도 不相應法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다.126)
이와 같이 잠재적인 번뇌로서의 수면설이 대두된 것은 중생이 禪定 등의 無心位에서나 善心인 경우라도 범부의 현실을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곧 범부의 윤회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도로서 이러한 교설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127)
또, 마음에 근거하여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교설로서 業說이 있다. 業說은 근본불교에서부터 나타난 것이지만, 이론적인 체계화는 부파불교시대에 와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業의 體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說一切有部에서는 業의 體가 思의 心所라고 하였다. 上座部 계통의 經量部도 業의 體는 思心所라고 하였다. 유부는 業을 表業과 無表業으로 나누는데, 表業은 思를 體로하여 思가 作業할 때 표면으로 나타나는 작용을 말하며, 無表業은 표업에 의하여 조성되는 것이다. 몸과 입을 통해 행동과 말로서 외부에 나타난 表業의 功能은 아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심식에 잠재되어 있다가 緣을 만나면 熏發되어 果報를 받을 원인이 되는 업 곧 無表業이 된다. 이것은 습기로서 중생을 윤회케하는 원동력이 되며, 이와 같은 惡業은 惑에 의하여 조성되는데, 이것을 隨眠이라고 부른다. 경량부에서는 우리가 행한 善·惡業의 결과로서 種子들이 심식內에 남게 된다고 하였다. 이 종자들은 우리가 지은 업의 훈습에 의하여 우리 내부에 남게되는 습기와 같은 것이며, 이 종자들이 緣을 만나면 현행되어 果報를 받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有部에서는 無表業의 이론으로써 業報를 설명하고, 경량부는 종자설로써 업보를 설명한다. 경량부에 의하면 종자들은 잠재기간에 있어서도 不變하며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相續轉燮하면서 존재하다가 果報로서 나타난다고 하여 實體論的 思考를 비켜간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중부에서 먼저 수면설과 이에서 연유되는 종자설을 창안하였고, 후에 경량부가 그 영향을 받아 종자설을 교리적으로 체계화한다. 이러한 수면설은 종자설의 연원이 되고, 수면설과 종자설이 교리적으로 발전하여 제7말나식의 연원사상이 되는 것이다. 번뇌의 문제를 추구한 끝에 수면설이 나오고, 수면의 세력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범부의 윤회가 계속된다는 종자설이 확립된다. 我慢 등의 根本煩惱를 일으키는 말나식은 사실상 수면설을 더욱 구체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후세 대승불교의 唯識論師들은 부파불교의 안·이·비·설·신·의의 6식 외에 보리와 열반을 장애하고 번뇌를 일으키는 독립된 心體가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제7말나식을 정립하였다.128)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근본불교의 無明에서 비롯된 수면설과 부파불교의 종자설은 唯識思想의 말나식설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2) 部派佛敎의 意根說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에서 제6意識의 所依根 문제가 거론되는데, 이것은 또한 인식의 주체인 識이 각각의 인식대상인 境을 요별할 때 依止하는 감각기관[所依根〕을 말한다. 근본불교나 부파불교 시대에 있어서 眠識 등의 五識은 眼根 내지 身根이라는 다른 識과 공유되지 않고 독립적인 不共別依의 所依根이 인정되었지만, 제6의식의 소의근은 분명하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부파마다 의식의 소의근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상좌부에서는 前五識이 五根이라는 色法을 소의근으로 하므로, 제6의식도 色法을 소의근으로 할 것이라고 추측하였으며, 결국 胸中의 色物인 肉團心〔심장〕을 의식의 소의근으로 여기게 되었다.129) 다시 말하면 生理學的인 의미로 해석되는 심장을 意識의 不共別依의 依止處인 意根으로 정했던 것이다. 경량부는 色心互熏說에 근거하여 色法을 의식의 別所依根으로 설명하기도 했다.130) 이에 대하여 大乘의 唯識論師인 無性은 경량부에서 色法을 의식의 소의근으로 하는 것이나, 상좌부에서 胸中의 色物을 所依根으로 삼는 것은 道理에 맞지 않는다고 논파하였다.131)
세친은 『俱舍論』제3권에서
각각의 대상을 요별하는 것은 六識身이라고 한다. 眼根 등의 五根은 각각의 독립된 대상을 요별하는 오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을 한다. 제6의근은 일체의 대상을 요별하는 식〔의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안근 등의 육근은 각각 (육식의) 소의근이 된다.132)
라고 하여, 육식의 소의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六識身은 六識을 말한다. 增上이란 다음 찰나의 識이 계속 발생되게 하고, 또 자재롭게 隨行하게 한다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두 가지의 의미는 어느 識에나 해당된다.133)
論의 文에서 제6의근은 일체의 대상을 요별하는 식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고 하는 바, 일체의 대상이란 法境이므로 法境을 요별하는 식은 제6의식이며, 따라서 제6의식의 소의근은 의근이 된다. 그런데 부파불교에서는 '識體一說'이 지배적이어서 6식의 體는 하나가 되므로, 의근이란 찰나생멸하는 식의 바로 前찰나의 識作用을 의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전 찰나의 識作用은 法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前滅後生하면서 지속되는 의근은 불완전하며 그것을 내용적으로도 확실하게 밝혀놓지 못한 점이 많다. 그래서 대승 唯識思想에서는 '識體別說'에 입각하여 染汚意로서 또한 제6의식의 소의근으로서 제7의 말나식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4. 世親의 種子說과 알라야識의 淵源
석존의 證悟의 내용은 緣起法이다. 全 佛敎思想의 근본명제라고 할 수 있는 三法印 중의 諸行無常印과 諸法無我印도 이 緣起의 원리위에서 논의된 것이며,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까닭은 그것이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기의 근본원인은 業力으로서, 有情 各者가 지은 이 업력으로 해서 유정세간과 器世間의 差別이 초래된다. 다시 말해서 각 유정이 조성한 업력에 의하여 인생과 우주, 곧 그 자신과 각자의 환경이 연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業을 조작케 하는 원동력은 일체의 煩惱이며, 지어진 업은 반드시 果報를 가져오는 바, 유정들은 자기의 업력에 의하여 六道를 輪廻轉生하게 되는 것이다.134)
그러나 이러한 無常·無我說과 業·輪廻說 사이에는 불교철학상의 대단히 어려운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곧 '諸法이 無我인데 누가 業을 짓고 무엇이 輪廻하면서 그 과보를 받는 것인가'하는 문제와 '一切가 無常하여 찰나에 生滅하는데, 어떻게 업이 轉移相續되어 과보를 가져오는가'라는 문제이다. 그러나 석존은 오히려 업으로써 實體我가 아닌 緣起하는 我를 규정하고, 일체가 찰나에 생멸하지만 업력의 相續으로써 윤회하는 삶의 세계를 해명하고자 하였다.135) 바로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해명작업이 대승 유가행파의 種子說과 알라야識說의 연원이 되는 것이므로, 그 과정에 관하여 本 節에서는 業力의 保存과 心心所의 連續性[心相續] 및 輪廻의 主體라는 세 項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業力의 保存
모든 有爲法은 찰나에 生하고 찰나에 滅하는 無常한 것이다. 근본불교에서는 諸行無常을 설하고 業說을 주장하고 있지만, 業의 果報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부파불교 시대가 되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 진다. 아니 도리어 이러한 논의들로 해서 부파불교가 성립되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業力의 保存 問題에 대해서 각 부파들은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지, 그 이론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說一切有部의 理論
一切法의 刹那性은 業과 果報 사이에 어려운 문제점을 남긴다. 곧 有爲諸法이 찰나에 생멸한다면, 업 역시 생기하자마자 소멸되는 것인데, 소멸된 업이 어떻게 미래의 과보를 산출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異時因果의 관계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有部에서는 이러한 풀기 어려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三世實有'와 '無表業' 그리고 '得' 등의 이론을 창출하였다.136)
1 三世實有說
유부의 三世實有·法體恒有說은 '모든 유위법은 3세를 지날 때에 自性[본질,dravya]에는 차이가 없고, 상태[位,avasta]만 변화한다'는 교설이다.137) 곧 유위법의 작용은 현재세 뿐이지만, 법의 體[自性]는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실유한다는 것으로, 作用하고 있는 현재는 물론이고 자성만 있는 과거나 미래도 실유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태나 작용이 변하기 때문에 無常說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삼세실유설은 말 그대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가 실재한다는 뜻이지만, 유부의 法相에서 볼 때, 시간 자체는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생멸변천하는 유위제법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시간은 有爲의 異名이기 때문에 삼세실유는 삼세에 걸친 유위제법의 실유를 의미하며, 그것은 결국 法體恒有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삼세실유설은 有部 실재론[諸法有論]의 이론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138) 유부에서는 삼세실유설의 理證으로서 '선행된 業은 반드시 그 果報를 산출하기 때문이다[巳謝業有當果故]'라는 논거를 제시한다. 만약 현재만이 실재하고, 과거나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業의 因果說에 모순이 생겨나게 된다. 즉 과거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과거로 落謝한 善惡業은 소멸해 버렸으므로 현재 아무런 과보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며, 현재에 감수하는 고락 등의 과보도 그 원인이 되는 선행된 業이 없이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의 업 역시 미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떠한 과보도 낳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無因有果 有因無果'에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현재의 苦樂 등을 과보로 보면 그 원인이 되는 선행된 업이 과거에 있어야 하며, 현재의 업을 원인으로 보면 그 과보는 반드시 미래에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유부의 교학체계의 제1명제인 삼세실유설의 논거중의 하나가 업력의 보존 문제임을 보았다. 그들의 논리로는 현행법뿐이라면 因果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법체가 미래에서 오다가 현재에서 현행하고서는 사라지지 않고 과거에서 실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업력의 보존문제와 관련되는 이러한 유부의 삼세실유설은 인과응보의 문제를 나름대로 해명하기 위해서, 삼세는 실유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교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無表業
業의 다양한 분류 중에서 身·語·意의 三業이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분류이다.139) 이 중에서 意業을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불교의 특색이다.140) 有部에서는 3업을 實有로 인정하는데, 이 중 신업과 어업은 다시 表業과 無表業으로 나뉜다. 유부에서는 身業의 본질을 形色으로, 語業의 본질은 言語[소리]로 보고 있으며, 이것은 유위법의 찰나생멸론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다. 표업은 외부에 나타나 타인이 認知할 수 있는 업이며, 무표업은 다음의 업에 대해 영향을 끼쳐서 善의 무표업은 惡業을 막고, 不善의 무표업은 善業을 막는 것으로서 무표업이 다음 업의 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곧 무표업은 다음 업에 대해 영향을 끼쳐서, 善의 무표업은 악업을 방해하고 不善의 무표업은 선업을 방해하는 것이지, 선의 무표가 계속 선업을 일으키고 불선의 무표가 계속 악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표업에는 신업과 어업이 해당되며, 무표업은 표업이 있는 경우에만 생길 수 있어서 의업은 표업이 아니므로 의업에는 무표업이 없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무표업은 業은 아니지만, 업을 因으로 하기 때문에 업이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무표업은 표업에서 생기하므로 표업을 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有部에서 無表業의 특질은 無表色이다. 무표색은 善·惡의 身·語表業을 지을 경우나 無心定에서 생기하며, 그 때 마음이 중간에 바뀌어도 상속되는 無見無對이며 大種所造의 성격을 갖는다.141) 무표업이 선악에만 통하고 無記에는 없는데, 이것은 無記心은 힘이 미약하고 저열해서 因과 함께 일어나서 강력한 업을 이끌만한 功能이 없기 때문이다.142)
業說에서 表業의 意義는 戒律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유부의 업설의 목적은 因果說明의 논리적 해명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持戒의 意義와 수행의 의미를 살리고자 하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것과 관계가 깊은 것이다. 善戒를 지닌 자에게는 심신에 나타나는 表色이 4대종에 의하여 일종의 色法을 내고, 이에 의하여 防非止惡하는 功能이 생기는데, 이것이 戒體이다. 무표업은 5位의 法體系에서는 色法이며, 5蘊 중에서는 色蘊이고, 12處에서는 法處이며, 18界에서는 法界에 속한다. 그러므로 업으로 명칭된 무표업이 법의 분류에서는 표업과 같이 색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부에서는 無想定과 滅盡定에서 心相續이 완전히 단절된다고 하더라도, 身표업과 語표업에 의한 무표업이 색법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무표업의 상속이 단절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무표의 작용은 惡의 無表는 善行을, 善의 無表는 惡行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防善防惡의 역할을 하며, 그 공능은 持戒나 不律儀 등의 행을 단절하지 않는 한 일생동안 유지되고, 死後에 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극미와 형색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유부의 경우, 五根과 五境은 바로 극미의 和集이다. 유정이 5근과 5경을 所依와 所緣으로 삼아 업을 지을 때 표업은 짓는 순간 바로 소멸해 버리지만, 과보를 낳게하는 업의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 無表業의 형태로 존속해 간다. 이처럼 유부가 표색의 잔재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표색을 요청하고 상정하게 된 것은 業과 果報의 일관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유위법의 찰나생멸성 속에서도 업의 존속이 있어야 과보를 산출할 수 있으므로, 유부는 그러한 업이 성취되는 근거를 무표업의 이론으로 설명하여 그 실유성을 논증했던 것이다.
3 得·非得
유부는 일체법이 찰나멸한다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업의 양태도 生·住·異·滅이라는 有爲四相의 과정을 통해서 생멸한다. 그래서 생주이멸하는 업이 어떻게 그 영향력을 한 개인의 상속에 계속 남아있게 하여 미래에 그 과보를 생성하도록 하는가를 설명해야만 했다. 이러한 업의 상속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유부가 도입한 개념중의 하나가 得이다.
得은 어떤 한 유정으로 하여금 자신이 상속한 유위제법이나 택멸·비택멸의 무위법과 관계시키는 힘이며, 非得은 그러한 제법과 소극적으로 관계시키는 힘이다.143) 업의 상속원리로서의 득·비득은 특히 번뇌의 단진과 관계가 있다. 번뇌자체가 현행하고 있지 않더라도 번뇌의 得이 상속에 구비되어 있다. 번뇌는 미래세라는 시간적 장소에 보존되어 있으며, 이것은 득이라는 힘에 의해 자기의 상속에 연결되어 그 과보가 생성될 때까지 이어진다. 득에 의해 상속에 주어진 번뇌가 의식의 場에 현행된 것이 纏이고, 아직 의식의 장에 현행되지 않고 잠재상태에 있는 것이 隨眠이다.
大衆部나 一說部 등의 부파에서는 纏은 現行하고 있는 諸 번뇌로서 心相應法이라 하고, 隨眠은 纏을 생기하게 하는 잠세적인 힘으로서 그것은 心도 아니고 心所도 아니며, 구체적인 특정의 대상을 갖지 않는 추상적 원리로서 心不相應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有部에서는 수면을 번뇌의 다른 이름이라 하여 心所, 곧 心相應法의 일종으로 간주한다.144) 유부의 경우에는 잠세적인 힘으로서의 수면이 아니더라도 업의 인과상속은 '法體恒有'나 '無表業' '得' 등의 이론으로써 충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구태어 심소로 생각되기 쉬운 수면을 別法의 原理로서 상정할 필요가 없었다. 表業이 이루어질 때 그것에 따라 생겨난 無表業이 또 다른 실체로서의 원리인 득에 의해 현재의 마음과 결합함으로써 과거의 업이나 기억은 상속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표업과 득은 異時的 因果關係의 相續을 설명하기 위해 제출된 유부의 이론으로서,145) 업은 성취되는 순간 바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무표업의 형태로 잔재하여 상속하다가 득·비득 등의 제 원리에 의해, 또는 다양한 여러 연에 의해 마음과 결합함으로써 미래의 새로운 과보를 낳는다고 한다.146) 그러나 유부에서 무표업이나 불상응행법의 득은 다같이 相似相續[隨轉,prav ha]하여 제법을 규정하는 세력이지만, 득은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반면 무표업은 所造色에 근거하기 때문에 色法이라고 한다.147)이와 같이 유부에서는 業의 因果相續의 근거로서 得·非得과 無表業 등을 상정하고 그것의 실재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4 彼同分
유부에서는 三世實有說을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이론의 하나로서, 18界의 범주를 同分[sabhaga]과148) 彼同分[tat-sabh ga]으로 분류하고 있다. 分[bh ga]이란 根과 境 그리고 識이 서로 작용하고 교섭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三事]가 각기 자신의 작용을 실현하면서 자기의 역할을 완성하는 것을 同分이라고 한다.149) 예를 들자면 同分眼이란 어느 때인가 色을 볼 수 있는 分을 가진 眼이라는 말이며, 同分色이라고 하면 언제인가 眼識의 대상이 될 分을 가진 色이라는 의미이다. 어떤 하나의 인식이 생겨날 때 작용하는 三事의 각각을 동분이라 하며, 이 때 삼사는 顯勢的인 것이다. 이에 반해 彼同分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가능성에 그칠 뿐 그 작용을 실현함이 없는 三事를 말하며, 동분과 同類의 것으로 어느 때·어느 장소에 있어서 인식에 참여하지 않는 潛勢的인 根·境·識 곧 不生의 有爲法을 말한다.150) '彼'는 산스끄리뜨 'tat'를 번역한 말로서 대체로 '저 것(同分)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뜻이다.
유부의 경우 대상없는 인식이란 있을 수 없기[識有必境] 때문에 인식에는 반드시 실재적인 대상[境]이 존재해야 된다. 그리고 根은 根대로 남아있어야 發識할 수 있다. 유부는 이러한 동분과 피동분을 18계 각각에 대해 적용시키고 있는데, 여기에는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시간의 복수성, 인식주체의 복수성, 나아가 인식이 성립하는 공간의 복수성 등 여러 가지 요소들로 나누어 지고 있기 때문에 몹시 번쇄한 교설로서 시설되고 있다.151) 그리고 이러한 동분과 피동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서 상속하며, 또 12處에서는 동일한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동분의 관계이다. 근·경·식은 모두 찰나에 생멸하면서 전변·상속하는 것이므로, 어느 시점에서 현세적인 것도 다음 시점에서는 잠세가 되며, 잠세적인 것을 원인으로 하여 다음 순간에 현세적인 것이 된다. 곧 이 두 가지는 같은 부류의 사실로서 실재의 두 가지 양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것도 결국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동분의 관계로서, 그것은 현세와 잠세라고 하는 두 가지 존재양태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외계의 대상은 우리에게 직접 지각되는 것이며, 다만 그것이 피동분의 관계에 놓일 경우에는 잠세가 되어 지각되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의 지각에 관계없이 법의 본질은 항상 실재하며, 그것을 제한된 현재 자신의 지각으로 한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 유부의 주장이다.152) 諸法의 찰나생멸을 주장하므로 間斷이 있는 六根·六境·六識 만으로 현상을 설명해야 하는 有部로서는 만약 彼同分을 설정하지 않으면, 인식의 連續性이나 三事의 轉變·相續 등을 설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그것의 설정은 논리상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2) 大衆部 等의 理論
아비달마의 여러 부파들은 유부의 三世實有說에 반대하여 過未無體·現在實有說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경량부처럼 철저한 刹那滅論에 입각함으로써 당연히 발생하게 되는 업의 연속과 인과상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체계를 마련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원인과 결과의 시간적 간격을 해소할 만한 원리를 상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異部宗輪論』에서는 大衆部·一說部·說出世部·鷄胤部 등 네 부파의 本宗同義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隨眠은 心法도 아니고 心所法도 아니며, (그러므로 그것은) 어떠한 대상도 갖지 않는다. 수면과 纏은 서로 다르다. 수면은 心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며, 전은 심과 상응하는 것이다.153)
곧 纏[prayavasth na]이 현행하고 있는 번뇌로서 心相應法이라면, 隨眠[anu aya]은 전을 낳게 하는 잠세적인 힘이며 心法도 心所法도 아닌 心不相應法이라고 한다. 過未無體를 주장하는 대중부 등의 네 부파의 경우에 만약 수면을 찰나멸의 마음작용으로만 생각한다면 업의 因果相續은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현세적 번뇌인 纏을 일어나게 하는 잠세적 번뇌인 隨眠을 인정치 않게 되면, 無心의 상태에 있을 때나 중생이 어떤 機緣으로 善心이 생겨났을 경우에 그 순간 그에게는 어떠한 不善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聖者라고 해야 하는 곤란한 문제점이 따른다. 그러므로 대중부 등의 네 부파에서는 惡業(因)과 煩惱(果)라고 하는 業道의 문제를 놓고 본래 相應法이었던 수면을 不相應法의 수면으로 개념을 轉移시키므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154) 이러한 대중부 계통의 隨眠說은 사실상 凡夫와聖者의 구별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비롯된 업 일반의 문제로서 전개된 것이며, 그것은 종자설과 잠재심으로서의 알라야식의 構圖없이 업도의 문제를 해결할려는 고육지책의 논리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3) 正量部의 不失法
犢子部로부터 流出된 正量部는 業相續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不失法이라는 개념을 상정하였다. 世親은 그의『大乘成業論』에서 이러한 개념의 설정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유부에서처럼 실유의 업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선과 불선의 身과 語의 두 업에 따라, 그 體가 실유이며 심불상응행온에 포함되는 別法을 오온의 상속 중에 설정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법을 증장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부실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법이 있어야만 미래세에 좋거나 나쁜 과보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의업에도 역시 이와 같은 법을 설정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행한 마음과) 다른 마음이 일어날 때, (선행된 전 찰나의) 마음은 바로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 즉 심상속 중에 이와 같은 법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이전에 어떤 글을 읽거나 의미를 익혔기 때문에 그 뒤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그것을 기억해낼 수 있으며, 또 지난 날에 경계들을 자주 보고 들었기 때문에 그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그 경계에 대해서 도로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찰나에 어떤 법을 일으켰다면, 이로 말미암아서 그것을 도로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이다.155)
말하자면 不失法은 유부의 得과 같이 心不相應法으로서 業의 作者가 행한 業力을 상속시켜 그 과보를 현행하게 하는 상속의 원리이다. 유부의 득이 善·惡의 無表業으로 하여금 마음과 결합시켜 樂·苦報를 낳게 하는 원리[心不相應行法]이듯이, 부실법 또한 업 그 자체[當體]나 업의 主體가 아니라, 업에 근거하여 주체로 하여금 좋거나[愛] 좋지 않은[非愛]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원리이다.156) 나아가 그들은 이 不失法으로써 기억과 想起의 문제를 해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실법은 업의 인과상속과 記憶과 想起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며, 이것은 유부의 得과 유사한 개념으로서 그것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經量部의 批判과 種子說
經量部 철학의 경향은 유부의 제법분별론에 대한 비판으로써 그 大綱을 이룬다. 有部의 三世實有說·無表業·得 등의 이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 부파에서 설정한 개념들도 유부의 득과 같이 업의 상속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요청된 불상응법으로서 批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경량부 철학의 체계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유부 등이 주장한 개념으로서의 존재인 不相應法을 단지 假立[praj apti]된 것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점이다. 따라서 大衆部系에서 주장한 隨眠이나 正量部의 不失法 역시 그것이 불상응법인 한 그것은 실체로서의 존재[實有, dravya satt ]가 아니며, 다만 언어적 假說로서 설정된 존재[假有, praj apti satt ]일 뿐이다.157)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한 경량부는 대중부 등의 수면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만약 번뇌를 낳게 하는 수면[煩惱種]이라고 하는 별도의 心不相應法을 주장한다면 마땅히 (현행의 생각을 낳게 하는) 생각의 종자[念種]라고 하는 별도의 불상응법이 있어, 그것이 다음 생각[後念]을 낳게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앞의 것은 어째서 그러한가? (이 두 가지 사실을) 차별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불상응법으로서의 수면은) 실재하지 않는다.158)
三世實有를 주장하는 유부의 경우에 隨眠은 당연히 心所 곧 心相應法이지만, 過未無體를 주장하는 대중부 계통이나 化地部에 있어 그것은 유부의 得과 같은 불상응법으로서, 업을 상속시켜 현행하게 하는 원인[能生의 因]이다. 물론 여기서 수면은 바로 煩惱를 낳는 것이 아니라, 선행된 악업으로 하여금 번뇌를 낳게하는 別法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형태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만약 隨眠이 불상응의 실체로서 번뇌를 낳게하는 원리라고 한다면, 현행하는 일체의 법도 또한 번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낳게 하는 실체로서의 원리 곧 能生의 因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 번뇌라고 하는 현상만을 차별하여 별도의 불상응법을 세울 이유가 없으며, 그것만을 차별하여 주장할 경우에는 그 근거로서 또 다른 원리를 상정해야 할 것이다. 둘째, 理致的으로 불상응의 실유법인 隨眠은 貪欲 등의 善惡業과 어떠한 관계도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實體이기 때문에 그것과 성질을 달리하는 어떤 다른 법으로 부터 생기할 수도, 혹은 그것으로 轉移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159)
결국 이와 같은 불합리한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면 등을 불상응법으로부터 배제시키지 않으면 않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다시 유부의 경우처럼 심상응법 곧 심소법이라고 한다면 法體恒有를 주장하는 유부로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過未無體의 찰나멸론을 주장하는 대중부 등의 경우에서는 업의 인과상속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며, 마침내 문제는 원점으로 되돌아 오고 만다.160) 여기서 아비달마 제 부파의 견해들을 비판하고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회통시킬려고 하는 經量部의 독자적인 견해가 나타나게 된다. 有部에서는 隨眠을 相應法[心所法]이라 하였고, 大衆部 등에서는 그것을 현행의 번뇌인 纏과는 다른 不相應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량부에서는 상응법도 아니고, 불상응법도 아니라고 하여 유부와 대중부계를 동시에 비판한다. 그렇다면 경량부에서 말하는 隨眠이란 어떤 내용의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俱舍論』제19권에,
그들이 말한 것: '欲貪의 隨眠'이라는 의미이다. 수면의 본질[體]은 心相應도 아니고 心不相應도 아니다. 어떤 다른 존재[別物]가 없기 때문이다. 번뇌가 잠자고 있는 상태를 隨眠이라 하고, 깨어있는 상태를 纏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을 잠자고 있는 상태라고 하는가?
(답) 현행하지 않고 종자로서 隨逐하는 것을 말한다.
(문) 무엇을 깨어있는 상태라고 하는가?
(답) 번뇌들이 現起하여 마음을 속박하는 것을 말한다.
(문) 무엇을 번뇌종자라고 하는가?
(답) 自體상의 差別功能을 말한다. (선행된) 번뇌로부터 生起하여 (또 다른) 번뇌를 생기한다. 마치 念種子가 證智에서 생기하여 현재 찰 나의 생각을 생기하는 功能差別이듯이, 또는 싹 따위가 앞의 열매 로부터 나와 뒤의 열매를 내게 하는 공능차별인 것과 같다.161)
라고 나온다. 곧 경량부에 있어 업의 인과상속은 선행된 업에 의해 형성된 種子의 功能差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所依身 上에 保持[熏習]·相續하여 이 후 새로운 결과[果報]를 낳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경량부의 이러한 사유방법은 유부나 대중부 등의 사유방식과는 완전히 그 성격을 달리 한다. 대중부계의 隨眠이나 정량부의 不失法은 선행된 원인이나 현행의 결과와는 별도의 존재[別法]로서, 선행된 원인에 따라 현행법을 생기하게 하는 불상응법이기 때문에, 그것과 현행의 관계는 직접적인 것이다. 현행하는 번뇌종자[번뇌의 生因, 能生法]는 선행된 번뇌공능의 차별[所生法]일 뿐, 대중부 등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어떤 別法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경량부의 '種子[b ja]說'이다.162) 그리고 경량부가 설하는 종자는 실체가 아니며, 단지 비유적인 명칭일 뿐이다.
경량부가 설하는 種子와 相續에 대해『俱舍論』제4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엇을 종자라고 하는가? 名色[有情의 所依身]이 자신의 과보를 생기할 때 가지는 전전공능과 인근공능이다. 이것은 상속의 전변과 차별을 통해서 형성된다. 전변이란, 상속 중의 앞뒤가 다른 성질이다. 상속이란 因果關係를 본성으로 하는 三世의 諸行이다. 차별이란 間斷없이 과보를 내는 공능이다.163)
경량부가 말하는 종자는 名色[五蘊] 그 자체도 아니고, 심불상응의 별법도 아니며, 더구나 심상응법인 심소도 아니다. 현행의 결과[과보]는 유부나 대중부계의 경우처럼 오온과는 다른 별도의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경량부의 종자는 名色이 保持하고 있는 능력이며, 현행의 결과는 바로 이것에 의해 생겨난다. 展轉功能은 種子의 相續이며, 隣近功能은 轉變·差別로서 현행하기 바로 前찰나의 種子[공능]를 말한다.
相續의 轉變과 差別[sa tati pari ma vi e a]이란 종자가 결과를 낳기까지 특수하게 변화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사실상 종자와 동의어이다. 種子는 선행된 業因에 따라 果報를 낳게 될 때까지 찰나찰나 상속하면서 변화[轉變]하다가 마침내 특수하게 변화[差別]함으로써 과보[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경량부에 있어 종자는 실체적 개념이 아니라, 종자적 성격을 지닌 공능[ akti,samartha]으로서, 그 자체 상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속의 전변과 차별'이란 용어에는 종자의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相續의 내용은 인과관계를 가진 三世의 諸行이며, 시간적 연속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생멸하는 제법과 다른 어떤 영속적 원리[anasthita:不相應의 別法]가 아니라, 선행된 業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오온[色心]이 단절되지 않고 연속하여 계기하는 힘[行:sa sk ra]으로서 종자 그 자체를 의미한다. 轉變은 상속이 앞 뒤 다르게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差別이란 전변의 최후 순간에 이르러 바로 결과로 이어지는 특별한 공능을 지님으로써 다른 상속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전변을 말한다. 이러한 상속의 전변과 차별설은 바로 종자가 결과를 낳을 때까지의 과정을 해명하는 교설이며, 인과상속의 근거로서 제시된 이론이다.
맥락을 달리하여 종자의 정의는『구사론』에서 유부의 得論을 비판하면서 설해지기도 하는데,164) 유부의 得은 바로 所得諸法의 生因이다. 따라서 경량부의 종자설은 유부의 得·非得論의 代案으로 제출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경량부에서는 종자라고 하는 개념으로써 찰나멸하는 色心의 所依身이나 業의 因果相續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165) 선악의 업이 있고 나서 그 과보를 받을 때까지의 업력의 보존 문제에 있어서는 업과 그 과보를 연관시키는 매개자가 필요하다. 그것을 유부는 무표업이나 得 등으로 설명했으며, 정량부는 不失法이라고 불렀고, 대중부계에서는 增長이라 부르고 번뇌와 관련해서는 수면설로써 업도의 문제를 해결했다. 경량부는 이 업력을 종자라고 불렀는데, 경량부의 종자·상속의 전변과 차별설은 업의 인과상속에 관한 부파불교의 여러 이론체계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학설이다. 6識의 構圖로써는 種子說 이상의 설명은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다만 해결되지 않고 남는 문제점이 있다면, 色法과 心法種子의 個別性 문제와 종자가 보존되어 있는 장소의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의 완전한 해결은 대승 유가행파의 알라야識說의 발견으로 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2) 心心所의 連續性[心相續]
(1) 有心位에서의 心相續
모든 有爲法은 生·住·異·滅의 四相이 있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 生滅變化하는 無常한 것이다. 유부는 心心所도 찰나멸한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그것의 지속성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고 곤란할 수 밖에 없었다. 유부는 마음을 心地[citta-bh mi]로서 이해한다. 이 용어는 이미『界身足論』에 나오는데,166) 地[bh mi]란 토대로서 다른 것이 거기서 활동하는 지반이다. 동시에 그것은 다른 것을 생산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마음은 갖가지 마음작용이 활동하는 심지로 생각된다. 그러나 善心이 不善을 地로 하여 활동할 수는 없기 때문에 心的 性質이 다른 地로서 5種의 地가 설정되었다. 심소는 6종류이지만 不定法에 있어서는 심지가 생각되지 않았다. 예컨대 煩惱地는 그로부터 번뇌가 생기는 지반이다. 왜냐하면 탐욕이나 진에 등의 번뇌는 항상 마음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緣을 만나야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이것이 번뇌지[kle abh mi]이다. 선심 등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 생각된다. 慙이나 愧나 精進 등의 마음작용이 생기는 지반이 善地[ku alabh mi]이다. 이러한 사유방식에서 유부는 심소법을 구별하여 大地法·大善地法·大煩惱地法·大不善地法·小煩惱地法이라는 5종의 심지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느 것으로 부터도 생기지 않는 심소를 부정법이라고 하여, 심소를 모두 6종류로 했던 것이다.167) 유부가 심지를 생각한 것은 심심소의 지속성에 대한 미비점을 보충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찰나멸하는 심심소의 연속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유부가 命根을 설하는 것도 이로써 인간의 생명적인 지속성을 해명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유부는 심상속을 설하고 전후의 마음이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심작용의 지속성을 밝히는 점에 있어서는 유부의 심소론은 불충분하기 짝이 없다.168)
한편, 팔리 상좌부에서는 잠재심으로서 有分識[bhava ga-vi a, 有分心:bhava ga-citta]이 설해지고 있다. 이 유분식은 7論의 하나인『發趣論』에 설해지고 있으며,『밀린다팡하』에도 설해져 있다. 유분식이란 잠재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표면심에서 심작용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 때에는 마음은 유분의 상태, 곧 무의식의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러다가 외계로 부터 자극이 있다든지 혹은 마음 속에 동요가 일어나 마음이 활동하려고 하는 상태가 되면, 마음은 유분으로부터 표면심으로 轉化한다. 이것을 引轉이라고 하며, 그로부터 領受·推度·確定 등 12종의 과정을 거쳐 인식이 성립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69) 다음으로 경량부는 앞의 項에서 살펴 본 바와같이 마음의 지속을 '種子'에 의해 설명했다. 이 종자의 상속·전변·차별에 의해 마음현상의 지속과 변화를 설명했던 것이다. 또한 대중부가 '根本識'을 설하고,170) 譬喩者와 分別論師가 '細心'을 인정했다고 하는데,171) 이러한 것들도 잠재적인 지속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상들은 잠재심을 설정하지만 그 설명이 미흡하며, 이러한 마음현상이 생기는 장소 문제에 있어서는 합리적인 해명이 없다. 이러한 사상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치적·논리적으로 무의식의 영역을 설정한 것이 대승 유가행파의 알라야식 사상인 것이다.
(2) 無心位에서의 心相續
모든 有爲法이 찰나멸한다는 입장에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는 無心의 상태로부터 깨어날 때 한동안 중단되었던 心相續이 어떻게 다시 生起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승의 唯識思想에서는 무심의 상태로서 5位無心172)을 설하지만, 유부의 『大毘婆沙論』에서는 無心位로서 無想定과 滅盡定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173) 그러나 여기에서는 심상속의 문제를 禪定중심으로 다루되, 무상정은 외도의 범부가 행하는 선정이므로, 불교의 선정인 멸진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멸진정은 滅受想定 또는 想受滅定이라고도 하는데, 受와 想이 완전히 소멸되는 선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世親은『俱舍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8解脫은 滅盡定이다. 그 自性 등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受와 想을 싫어하고 등져서 이 定을 일으켰기 때문에, 혹은 대상[所緣]이 있는 것을 모두 싫어하고 등졌기 때문에, 이 멸진정은 해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174)
곧 멸진정은 대상을 가지지 않으며, 일상적인 의식상태를 넘어선 완전한 無意識의 선정으로서 일시적으로 모든 心心所가 정지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만약 멸진정이 완전한 無心의 상태라면, 우선 멸진정의 상태에서는 심상속이 중단되지만, 신체[身]와 목숨[壽]과 체온[煖]을 계속해서 유지[執受]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멸진정 동안에 심상속은 중단되더라도 種子상태에 있는 業의 果報[異熟]와 行相[ k ra]의 相續은 소멸되지 않아야 하며, 나아가 멸진정의 상태에서 중단되었던 심상속이 멸진정에서 나올 때 다시 생기할 수 있어야 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남긴다. 이러한 내용들이 멸진정의 무심설이 야기하는 存在論的인 問題點들이다.
그런데 우리는『雜阿含經』의 제568經에서 멸진정을 有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경에 質多羅長者가 묻고 伽摩[k mabh ]비구가 답하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문) 존자여, 그러면 몇 가지의 법이 있습니까?
만약 사람이 신체를 버릴 때에, 그 신체는 시체로 땅에 누웠고, 다시 그것을 무덤에다 버리면, 마음이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 습니다.
(답) 목숨[壽]과 체온[暖]과 의식[識]은 신체를 버릴 때 함께 버리어 진다네. 그 신체를 무덤에다 버려버리면, 마음이 없어 마치 나무 나 돌과 같은 것이라네.
(문) 또 존자여, 죽음과 滅盡定에 드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목숨[壽]과 체온[暖]을 버리면, 근들은 모두 허물어져 신체[身]와 목숨[命]은 분리되는데,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멸진정은 身· 口·意의 行[業]만 멸하는 것으로서, 壽命을 버리지 않고 체온도 사라지지 않으며, 根들도 허물어지지 않아 신체와 목숨이 서로 붙어 있다. 이것이 죽음과 멸진정에 드는 것과의 차이가 나는 특 질이다.175)
곧 목숨[壽]과 체온[暖]과 의식[識]은 항상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멸진정에 든 수행자는 모든 身·口·意의 三業이 소멸된다는 점에서는 죽은 사람과 동일하지만, 목숨·체온·根들이 파괴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죽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의 내용을 종합하면, 멸진정에 든 수행자의 의식[識]은 멸진정 동안에도 수행자의 신체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이것은 멸진정 有心說의 중요한 논거가 된다. 그러나 멸진정이 유심의 상태라면, 멸진정에 觸이 존재할 것이고, 受·想·思 등 나머지의 心所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法法性分別論176) 그렇게 되면 상과 수가 소멸되는 선정이라는 멸진정의 기본적인 정의에 모순되어 認識論的인 問題를 낳게 된다.
초기의 경량부에서는 色心互熏說177)에 입각하여 멸진정의 상태에서도 心種子는 멸진정에서도 파괴되지 않는 有色根身에서 유지된다고 하여 멸진정의 無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멸진정의 존재론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思[cetan ]심소를 업의 본질로 인정하면서 업의 과보가 종자의 형태로 심상속에 熏習된다고 주장하면서, 경량부는 멸진정의 유심설로 전향하게 된다. 그들은 멸진정에서도 단절되지 않는 心을 細心 또는 細意識이라고 부른다.
유부의『大毘婆沙論』에서는 細心說이 譬喩師와 分別論師의 견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譬喩者와 分別論師는 滅盡定에서도 細心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정이면서 색이 없거나, 또한 선정에 있으면서 마음이 없는 자는 없으며, 만약 선정에 마음이 없다면, 命根도 끊어져 버릴 것이므로, 죽음이라고 해야지 선정에 들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178)
그러나 譬喩師나 分別論師의 細心理論도 멸진정의 인식론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멸진정에서 마음이 존재한다면 그로부터 三事和合이 있게 되고, 계속해서 수·상·사가 생기하여 想受滅이라는 멸진정의 기본적인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친 이전의 멸진정 유심설들은 기본적으로 現行識 곧 六識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멸진정의 認識論的인 問題를 극복하지 못한다.179) 그래서 세친은『大乘成業論』에서 이러한 이론들을 검토한 후, 기존의 현행식의 한계를 넘어서 心을 현행식에 해당되는 種種心과 잠재식에 해당되는 集起心으로 나누고, 멸진정에서는 비록 종종심은 중단되지만[無心], 집기심은 단절되지 않고 존재한다[有心]고 새로운 이론을 세운다. 세친은『大乘成業論』에서 집기심과 종종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마음은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集起心[ cayacitta]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種子들이 모여 있다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種種心[n n citta]이다. 所緣과 行相 그리고 差別로써 굴러가기 때문이다. 滅盡定 등의 (無心)상태에서는 두 번째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무심'이라고 일컫는다. 마치 한 발만 있는 평상에는 다른 발이 없기 때문에 발이 없다고 일컫는 것과 같다.180)
곧 集起心은 일체의 종자를 저장하는 心이며, 種種心은 찰나찰나에 생멸하면서 각각의 所緣과 行相을 지니고 차이를 나타내면서 작용하는 心이다. 그러므로 종종심은 현행식이며, 집기심은 잠재식이 된다. 이 잠재하는 집기심은 항상 외계의 대상과 관계하면서 끊임없이 생멸하는 현행의 종종심들과는 다르게, 잠재적인 상태로 계속하여 相續의 흐름을 이어가게 된다. 이러한 집기심이 존재한다면 멸진정을 無心位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세친의 이러한 사유체계는 뒷날 유가행파의 알라야識說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빠알리 상좌부의 有分識은 멸진정에서 육식이 단절되더라도, 그 흐름을 이어가며 존재하지만, 업의 과보를 執受한다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 大衆部는 刹那論을 받아들이고 種子說을 받아들이지만, 종자의 熏習에 대한 이해를 놓치고 있다. 멸진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근본식의 잠재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멸진정의 有心說을 지지하는 태도이며, 그들의 심리론이 기본적으로 心性本淨說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점에서는 불충분한 점이 있다. 譬喩師 등의 細心說도 멸진정의 인식론적인 문제점을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멸진정의 문제에서 유부처럼 無心說을 지향하게 되면 壽·煖·識의 俱有나 심상속의 단절 그리고 入定心과 出定心의 상속이라는 존재론적인 문제점이 따르게 된다. 有部는 수·난·식이 항상 함께 존재한다는 문제에 대해서, 명근[jivitendriya]을 체온과 식의 의지처로서 실체적인 불상응행법으로 세우고 상속을 유지하며 목숨[壽, yus]이란 명칭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멸진정에 들어 가는 心인 출정심이 후에 멸진정에서 나오는 心인 출정심을 어떻게 생기하여 상속의 흐름을 계속해서 이어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의 法이 존재하기 때문에 멸진정에서 心相續이 완전히 중단되지만, 멸진정에 들어가기 직전의 심인 微細心은 파괴되지 않고 존재하다가 이 心을 等無間緣으로 하여 출정심이 생기게 된다고 설명한다. 유부에서는 三世實有說·得·無表業·彼同分·命根·等無間緣 등의 많은 개념과 복잡한 이론들을 동원해서, 업과 과보나 심상속 등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하나, 너무 번쇄하고도 구차한 논리로서 난해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빠알리 上座部나 大衆部나 經量部처럼 滅盡定의 有心說을 주장하게 되면 想受滅이라는 멸진정의 기본적인 정의에 위배되어 인식론적인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이들이 주장하는 유분식·근본식·세심 등의 설은 기존의 현행식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유부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멸진정은 인식론적인 분석을 통해서는 無心의 상태로 파악되고, 존재론적인 분석을 통해서는 有心의 상태로 파악되는데, 이러한 모순점을 해결할려면 반드시 잠재심으로서의 알라야식과 거기에 저장되어 있는 潛在된 業力으로서의 種子라는 개념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알라야식과 종자설의 입장에서는 멸진정의 상태도 현행식의 측면에서는 無心이지만, 잠재심의 측면에서는 有心이 되므로 멸진정의 존재론적·인식론적인 문제점이 동시에 해결된다. 또한 入定心이 알라야식에 종자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出定心으로 현행하게 되므로 심상속의 단절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181)
3) 輪廻의 主體
근본불교는 無我說에 입각하여 실체적인 我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인격이나 윤회의 주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我라는 주체를 설정하지 않으면, 윤회나 기억의 지속이나 업의 과보 및 책임의 소재 등의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雜阿含經』제13권에는 업의 주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
眼과 色을 연하여 眼識이 생기한다. 이 세 가지의 和合이 觸이다. 촉과 함께 受·想·思가 生起한다. 이 네 가지[수·상·사·식]은 無色蘊이며, 안은 色蘊이다. 이러한 法 등을 인간[人]이라고 하며, 여기서 갖가지 인간의 개념[想], 이를테면 衆生[sattva]·나라[nara]·마누샤[manu ya]·마나바[m ava]·뿌루샤[puru a]·뿌드갈라[pudgala]·지바[j va]·잔뚜[jantu] 등을 만들어 낸다. 또, '내 눈이 색을 보고, 내 귀가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만, 그 때의 '나[我]'란 주관적 관념[想]이고, 기억[誌]이며, 言說일 뿐이다.182)
이 經文에서 중생이나 뿌드갈라 등의 명칭은 인간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이지만, 철학적으로 심화될 때는 모두 윤회의 주체를 나타내는 용어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諸蘊, 곧 네 가지의 無色蘊과 色蘊이 바로 그러한 윤회의 주체이며, 그 밖에 따로 常一主宰하는 我나 실체적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183) 말하자면 受는 苦·樂·不苦不樂으로서 윤회의 결과이며, 行[思]은 업의 본질이니 윤회의 원인이다.184) 아직 철학적 논의가 심화되지 않은 근본불교에 있어서 윤회의 주체는 無常·無我인 五蘊이며, 이 오온의 상속에 의해 윤회의 세계는 펼쳐지는 것이다.
또,『잡아함경』제13권에는 윤회의 주체와 관련하여 근본불교의 분명한 입장이 보인다.
眼이 생기할 때 오는 곳이 없으며, 소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안은 실체없이 생기하며, 생기해서는 바로 소멸해 버린다. 그러므로 업과 과보는 있지만, 업의 작자는 없다. 곧 전 찰나의 諸蘊이 소멸함과 동시에 다음 찰나의 다른 제온이 상속하는 것이다.185)
곧 모든 것은 연기하는 것이며 찰나에 생멸한다는 것이다. 연기하는 세계에서는 실체적인 윤회의 주체는 있을 수 없으며, 근본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라면 끝없이 연기하는 무상·무아인 오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설이나 무아설은 이해하기가 어렵고, 세간의 사람들은 대부분 諸法이 있고 유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일부의 부파에서는 윤회의 문제에 있어서 有我的인 방편을 취하게 된다. 아래에서는 유아적인 교설의 대표격인 犢子部의 補特伽羅[pudgala]와 化地部의 窮生死蘊, 그리고 經量部의 一味蘊 등에 대해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犢子部의 補特伽羅
犢子部는 설일체유부보다 늦게 分派하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인 뿌드갈라 사상이 있었다. 뿌드갈라는 인간 또는 영혼·我·有情·命者라는 뜻이며, 人·數取趣·衆數者라고 번역하는데, 다시 태어나서 죽어가는 주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뿌드갈라는 업을 짓고 그 결과로서 苦樂의 과보를 감수하며, 見聞覺知하고 輪廻轉生하는 主體이다. 그리고 기억과 상기의 주체이며, 善惡業에 대한 책임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교리는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설명된 교의로서는 매우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후세에는 실유사상이라고 해서 배척된다.186) 그러나 뿌드갈라는 實有로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며, 假說로 설정된 것이다. 그 당시의 논사들이 불교의 무아사상에 역행하여 實我思想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異部宗輪論』에는 독자부의 本宗同義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뿌드갈라는 蘊도 아니고, 蘊 아닌 것도 아니며, 蘊·處·界에 근거하여 임시로 시설되어진 명칭이다.……만약 諸法에 뿌드갈라가 없다면, 그것은 전세로부터 후세에로 轉至相續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뿌드갈라가 있기 때문에 轉移相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187)
독자부가 말하는 뿌드갈라는 常一主宰하는 실체적인 我가 아니다. 곧 그것은 蘊·處·界에 근거하여 假立된 것으로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뿌드갈라를 설정하는 이유는 만약 그것이 없으면, 윤회나 상속을 설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俱舍論』제29권에서는 독자부의 뿌드갈라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뿌드갈라가 있는데, 그 體는 五蘊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우리가 세운 뿌드갈라는 당신이 따지는 實有나 假有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다. 다만 내적인 것이며 현재세에 해당하는 有執受의 諸蘊에 근거하여 뿌드갈라를 세운 것이다.……이것은 세간에서 섶에 근거하여 불을 세우는 것과 같다.188)
뿌드갈라는 오온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현재의 순간에 해당하는 유집수의 제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비유하자면 섶[諸蘊]에 근거하여 불[뿌드갈라]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곧 섶을 떠나 불은 있을 수 없지만, 불과 섶은 같다고 할 수 없다. 만약 같다면 불과 섶은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데, 만약 다르다면 섶이 없이도 불은 탈 것이기 때문이다. 뿌드갈라도 역시 오온과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오온과 다르다면 그 본질[體]은 마땅히 상주[常]할 것이며, 같다면 오온과 더불어 단멸[斷]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189)
이와 같이 독자부가 주장하는 뿌드갈라의 본질은 실체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윤회의 주체임을 확실히 했기 때문에 다른 부파에 의해 有我論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 되었으며, 세친 등의 유가행파에 의해서도 배척당하게 된다. 그러나 뿌드갈라說이 알라야식의 淵源이 되는 사상임은 그 내용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2) 化地部의 窮生死蘊
化地部는 上座部의 계통이며, 교리의 특징은 過未無體說과 種子相續說 그리고 窮生死蘊 등의 사상이 있다. 이 가운데서 궁생사온설은 화지부의 독특한 교설로서 인격이나 윤회의 주체라는 관념으로 나타난 것이다.
無着의『攝大乘論』에서는 궁생사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화지부도 다른 이름으로 이 識〔알라야식〕을 말하며, 궁생사온이라고 일컫는다. (왜냐하면) 어느곳 어느 때에 색심〔五蘊〕이 단절되더라도 알라야식 중의 그 종자는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190)
곧 처소와 시간에 따라 色과 心〔오온〕에는 단절이 있지만, 궁생사온은 알라야식중의 종자처럼 단절이 없다는 것이다. 世親은 『攝大乘論釋』에서 주석하기를,
화지부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궁생사온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를 해석하기 위해서 '어느 곳' 등이라고 말한다.
'어느 곳'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색계에서는 色들이 없음을 말한다. '어느 때'라고 말하는 것은 무상정 등의 상태에서는 마음작용이 없음을 말한다. '알라야식 중의 그 종자는 단절됨이 없다'는 것은 알라야식 중의 色心〔오온〕의 훈습은 이것을 因으로 삼아 色心이 다시 있게 됨을 말한다.191)
라고 했다. 궁생사온은 무색계에 출생하거나 無想定이나 멸진정에 들어가도 단절되지 않고 상속된다는 것이다. 無性의 『攝大乘論釋』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져 있다.
화지부 등에서는 세 종류의 蘊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一念頃蘊 〔한 찰나 존재하는 온〕으로서 한 찰나에 생멸하는 법이다. 둘째는 一期生蘊〔일생동안 존재하는 온〕으로서 죽을 때까지 항상 따라 굴러가는 법이다. 이것은 알라야식이 없으면 다른 식도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궁생사온은 알라야식과 명칭만 다를 뿐인데, 온들은 결정코 생사가 다할 때까지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192)
이러한 설명에서 무성논사는 궁생사온을 알라야식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궁생사온은 생사윤회의 주체이며, 생사의 끝인 금강유정에 이르기까지 단절되지 않고 상속되는 것이다. 화지부가 六識構圖의 교의에 입각하여 알라야식에 해당하는 것을 설명할려고 상정한 개념이 바로 궁생사온이다. 궁생사온설은 제8 알라야식의 연원이 되는 것으로, 후세의 호법논사도 『성유식론』에서 그러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3) 經量部의 細意識과 一味蘊
細意識과 一味蘊은 經量部가 주창한 개념이다. 경량부는 규기의 『성유식론 술기』에 의하면 상좌부에서 분파된 것이 불멸후 1세기까지 소급되며, 鳩摩羅多〔Kum rata〕를 시조로 본다. 꾸마라따는 細心說을 창안하였는데, 불멸후 400년경에 나타나는 室利邏多〔 rilata〕가 細心說의 내용을 보충하여 細意識 및 一味蘊說을 정립하였다. 一味蘊은 世友의 『異部宗輪論』에서 根邊蘊과 더불어 언급되고 있는데, 규기는 『異部宗輪論述記』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미온은 무시이래 전전화합하여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으로서, 일찌기 간단이 없이 존재하는 세의식이다. 이것은 네 가지 온들을 갖추고 있다. 根邊蘊에서 根이란 앞에서 말한 세의식이다. 생사에 머무는 〔윤회하는〕 유정들의 근본이기 때문에 根이라고 말한다. 이 근본으로부터 오온이 생기한다. …… 따라서 일미온은 근본이므로 중단〔邊〕된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외의 중단되는 오온의 法은 부수적인 것이 일어나는 것이기에 근변온이라고 한다.193)
세의식은 一味蘊과 근변온으로 분류된다. 一味蘊은 오온의 근본으로서 무시이래로 동일〔一味〕하게 전전하고 화합하여 단절되지 않는 것이다. 根邊蘊은 일미온에 훈습된 종자의 공능에서 발생되는 五蘊과 心作用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미온은 受·想·行·識을 속성으로 하는 세의식임과 동시에 윤회의 근본체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194) 이러한 경량부의 세의식 곧 一味蘊說은 알라야식설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멸진정의 상태에서도 단멸되지 않는 것이므로 알아야식설의 연원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겠다.
Ⅳ.世親 唯識思想의 成立
1. 世親의 五蘊說
1) 世親의 部派的 五蘊說
世親의 部派佛敎期의 五蘊說은 그의『俱舍論』을 통해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구사론』을 통해서 그의 오온설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함에서는 一切가 無常·苦·無我임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훗날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그것을 분석한다. 五蘊과 十二處와 十八界라는 三科說이 바로 그것이다. 일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5종류·12종류 또는 18종류를 열거하고, 이 다섯·열둘·열여덟 모두가 무상·고·무아라고 설하는 것이다. 아함에서는 그 중에서도 色·受·想·行·識의 오온 하나하나가 무상이며, 고며, 무아라고 설하는 것이 횟수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많다.195)
(1) 蘊의 구체적인 의미와 내용
오온의 蘊은 산스끄리뜨 skandha의 譯語이며, 舊譯에서는 陰·衆·聚 등이라고 했다. 我[aham]라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삶의 '그림자'라는 비유적인 의미를 취한다면 '陰'이라는 번역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며, 과거·현재·미래의 色法이나 心法들이 '쌓인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衆'이나 '聚'로도 번역이 가능한 것이다. 蘊의 의미에 대해서『구사론』제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 蘊·處·界의 개별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聚와 生門과 種族이 온·처·계의 의미이다.
여러 유위법이 화합하여 모였다는 의미가 蘊의 의미이다. 경전의 말씀: 色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과거든 미래든 현재든 안이든 밖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든 가깝든, 이와 같은 일체가 대략 하나의 무더기가 된 것을 색온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무더기의 의미로 말미암아 온의 의미가 이루어 진다.196)
곧 여러 유위법이 화합하여 모여있는 것을 蘊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온은 有爲法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유위법과 관련하여『구사론』은 오온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엇을 유위법이라고 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또 온갖 유위법은 색 등의 오온이며, 또는 세로197)·언의198)·유리199)·유사200) 등이라고 한다.
논한다. 색 등의 오온은 처음의 색온으로부터 식온까지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법은 모두 유위법에 포함된다. 여러 연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조그마한 법이라도 하나의 緣만으로 생기하는 것은 없으므로, 이것도 그러한 부류이기 때문에 미래에도 방해됨이 없는 것이 마치 우유라 하고 섶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201)
오온은 여러 緣에 의해서 만들어진 有爲法임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미래에도 방해됨이 없다'는 말은 '유위법[sa sk ta-dharma]'은 산스끄리뜨로 과거분사형이지만 미래에도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곧 우유는 '짜여진 것[과거·현재완료]'이며, 미래의 일에도 관계된다. 섶 또한 '타게 될 것[미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온은 과거·현재·미래의 것들이 쌓여진 것이라는 의미도 분명해 지는 것이다.
(2) 色蘊
色蘊에 대해서『俱舍論』은
색은 오직 五根과 五境 및 無表色이다.202)
라고 말한다. 뒤이어 色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길게 이어진다. 색은 變壞 내지는 變碍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하는 것이다.203) 이러한 색의 定義에서 '變'은 색의 시간적 존재성을 의미하며, '碍'는 색의 공간적 존재성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이 색은 시간적으로는 변화·변천하는 것이며, 공간적으로는 障碍·質碍하는 것, 곧 공간의 어떤 한 지점을 차지[占有]하여 거리끼는 성질의 것이다. 이러한 색은 有情에서는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는 물질의 일반을 총칭하는 것이다.204) 색은 地·水·火·風의 4大에서 나오며, 4대는 堅·濕·煖·動의 성질을 가진다. 무표색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한다.
(3) 受 등의 三蘊
또 受 등의 三蘊에 대해서『구사론』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受는 受觸을 領納하고, 想은 取像을 體로 하며, 4온 외에는 行蘊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수 등의 3온과 無表와 無爲를 法處와 法界라 하네.
논한다. 受蘊은 세 가지로 수촉을 영납하는 것, 곧 즐거움과 괴로움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그것이다. 이것은 다시 六受身으로 분별되는데, 안촉에서 생긴 受 내지 意觸에서 생긴 수이다. 想蘊은 像을 취하는 것을 體로 삼으니, 곧 청·황·장·단·남·녀·원·친·고·락 등의 형상을 集聚한다. 이를 다시 분별하면 六想身이 이루어 지는데, 마땅히 受에서 말함과 같다.
앞과 뒤의 色과 受와 想과 識을 제외한, 그밖의 일체의 行을 行蘊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존께서 계경 중에서 六思身을 행온이라고 말한 것은 그것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행은 조작을 뜻하는데, 思는 業性이 조작의 뜻이 강하기 때문에 가장 수승함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만약 유루와 유위를 조작하면 行取蘊이라고 이름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밖의 심소법과 불상응법은 蘊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며,……그러므로 마땅히 4온을 제외한 그밖의 有爲行은 모두 행온에 포함된다. 곧 수·상·행온 및 무표색과 세 가지 무위의 그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處門 중에서는 法處라 세우고, 界門 중에서는 法界라 세운다.205)
受蘊[vedan -skandha]은 감수작용이며, 眼觸 내지 意觸의 六觸을 통해서 일어나는 감각작용을 말한다. 곧 우리들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이 이 수온에 속한다. 受는 苦受·樂受·不苦不樂受[捨受] 등으로 구별된다. 想蘊[sa j -skandha]은 형상을 취하는 마음작용이다. 우리가 外界의 대상을 인식할 경우에 그 인식대상을 직접 인식하는 것은 아니며, 마음위에 나타난 형상을 인식하는 것인데, 그 형상을 떠올리는 표상작용이 想이다. 그러한 형상을 떠올리는 작용은 眼想身 내지 意想身 등 六想身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청·황 내지 苦·樂 등의 상을 집취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행온[sa sk ra-skandha]은 色·受·想·識蘊을 제외한 그밖의 심소법과 불상응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행온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行은 조작의 의미이며, 思를 본질로 하여 業을 조작하는 마음작용이다. 이러한 수·상·행온은 12처에서는 法處에 속하고, 18계에서는 法界에 포함된다. 그리고 세친이 무표색을 법처와 법계에 포함시키는 점은 무표색을 색법으로 보는 유부와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다.
(4) 受·想蘊의 別立理由
受와 想은 여러 심소들 중의 일부분에 불과하므로, 受蘊과 想蘊은 넓은 의미의 행온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수온과 상온을 따로 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구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諍根因과 生死因 및 次第因 때문에,
모든 심소법에서 受와 想을 따로 蘊이라고 한다.
논한다. 諍根은 두 가지가 있으니, 온갖 애욕에 탐착하는 것과 온갖 사견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수와 상은 그 순서대로 가장 수승한 인이 된다. 수에 맛을 들이는 힘으로 인해 온갖 애욕에 탐착하고, 전도된 상의 힘으로 인해 온갖 사견에 탐착하게 된다. 또 生死法에서는 수와 상으로써 가장 수승한 인으로 삼는다. 수에 탐착해서 전도된 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生死에 윤회한다. 이 두 가지의 인과 뒤에 설할 차제인에 의하여 수와 상을 별개로 세워 온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206)
수온과 상온을 행온에서 분리하여 별도로 논하는 이유로서 쟁근인과 생사인과 차제인의 세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諍根因에서 '諍'은 騷擾의 의미로서 번뇌의 다른 명칭이며, 根은 根本의 의미이다. 곧 수와 상은 일체 번뇌의 근본이라는 의미이다. 번뇌에는 외부의 자극에 의하여 감수되는 肉感的인 煩惱와내면적인 마음에 의하여 일어나는 思想的인 煩惱의 두 가지가 있다. 受 자체가 번뇌는 아니지만 유정들은 苦受에 대해서는 別離할려고 집착하고, 樂受에 대해서는 和合할려고 집착하기 때문에 受는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상
자체도 번뇌는 아니지만 모든 사상의 근본은 邪見 등의 五見인데, 想은 오견을 일어나게 하는 심리적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生死因이란 수와 상이 생사윤회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유정들이 三界九地를 윤회하면서 苦報를 받는 직접적인 원인은 業力이며, 이 업력의 원인은 번뇌이다. 또 이러한 번뇌가 있게 되는 원인은 外境에 대한 五欲貪着의 因인 受와 내면적 邪見 등의 因이 되는 想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와 상은 유정들의 생사윤회苦의 근본원인이 되는 것이므로 그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별개로 세워 論明한다는 것이다.
次第因이란 오온의 순서에 있어서 이 수와 상을 따로 세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차제인에 대해서『구사론』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거침(미세함)과 염오(청정)과 그릇 등과 界의 다름에 따라 순서를 세웠다.
논한다. 色은 對[걸림]가 있기 때문에 모든 蘊 중에서 가장 거친 것이다. 無色法 중에서 거친 것은 오직 受의 행상이므로, 세간에서 나의 손 등이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에 비교해서는 想이 거친 것이니, 남녀 등의 상은 알기 쉽다. 行은 識보다 거친 것이니, 貪·瞋 등의 행은 알기 쉽다. 識은 가장 미세한 것이어서 境의 想을 총취하므로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거침에 따라 온의 순서를 세운 것이다.
혹은 시작도 없는 생사를 통해 옴으로부터 남녀가 색을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니, 이것은 樂受의 味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수에 탐착하는 것은 다시 전도된 상을 생기게 하는 因이 된다. 이 전도된 상은 번뇌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고, 이와 같은 번뇌는 識을 의지하여 생긴 것이다. 이것과 앞의 세 가지 모두가 식을 染汚시킨다. 이 염오에 따라 蘊의 순서를 세운 것이다.
혹은 色은 그릇과 같고, 受는 음식과 같으며, 思는 맛을 돕는 것[조미료]과 같고, 行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같으며, 識은 먹는 사람과 같으므로 그릇 등을 따라 蘊의 순서를 세운 것이다.
혹은 界의 다름으로 蘊의 순서를 세웠다. 欲界에는 온갖 묘욕이 있는데, 色의 相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色界에는 靜慮[禪定]의 수승한 기쁨 등이 있는데, 受의 相이 두드러진다. 세 단계의 無色界에는 허공 등의 相을 취하는데, 想의 相이 두드러진다. (제4단계의) 有頂天[第一有]에는 思가 가장 수승한데, 行의 相이 두드러진다. 이것[색·수·상·행]에는 識이 머문다. 식이 그 안에 머무는 것이 세간에서 밭과 씨의 순서와 유사하다. 그러므로 모든 蘊의 순서는 이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五蘊이 더하거나 덜하는 허물이 없는 것은 곧 이와 같은 次第因 때문인 것이다. 行을 떠나서 따로 受와 想의 두 가지 蘊을 세운 것은 受와 想이 行들 중에서도 그 相이 거칠고 염오되어 있어서, 음식과 조미료 같아 二界 중에서 강하기 때문에 별도로 蘊으로 세운 것이다.207)
수온과 상온을 따로 세우는 이유를 말하면서, 더불어 오온의 순서가 합리적인 연유에 의해 정해진 것임을 다양하게 잘 밝히고 있다. 곧 색·수·상·행·식으로 그 순서가 정해진 이유는 隨 ·隨染·隨器·隨界別의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 隨 次第라고 하는 것은 大한 것으로부터 微細한 것으로 순서를 정했다는 것이다. 곧 色蘊은 有見有對의 것으로 가장 了知하기가 쉬우므로 第一 먼저 열거하고, 非色法 중에서는 受가 고수·락수 등이 있어서 누구나 그 감수작용을 인지하기 쉬우므로 第二에 들고, 想은 수보다도
요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第三으로 든다. 뒤의 두 가지 蘊 중에서 行은 境의 別相을 인식하는 心所에 포함되고, 識은 境의 總相을 인식하는 心王이므로 認識上의 추세의 차제에 의하여 이들을 第四와 第五로 열거한다는 것이다. 둘째, 隨染次第라고 하는 것은 유정들이 번뇌를 일으키는 第一의 원인은 色法에 있으며, 이 색법에 의하여 고·락의 감수작용[受]이 일어나고, 이 감수작용에 의하여 여러 가지의 전도된 망상[想]이 일어나며, 또 이 倒想에 의하여 여러 가지의 의지적 형성력[行]이 일어나고, 이 행의 業力에 의하여 식이 염오된다. 이와 같이 식이 염오되어 가는 순서를 보이는 것이 수염차제이다. 셋째, 隨器次第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다. 그 의미를 풀어본다면, 색을 바탕으로 하여 감수작용[受]이 일어나고, 이 감수작용을 통하여 여러 가지의 관념[想]이 일어나며, 이 관념에 의하여 의지[行]가 일어나고, 이 의지에 의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총괄적인 了別作用[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색은 나머지 4온의 所依이면서, 식을 일으킬 근거이므로 이것을 제일로 들고 그로부터 순서대로 4온을 열거한다는 것이다. 넷째, 隨界別次第란 만약 欲·色·無色의 三界를 우리들의 인식의 한계로 한다면, 우리들과 가장 가깝고 인식하기 쉬운 것은 색상이 현저한 欲界이므로 색을 第一로 들고, 色界에서도 색은 있지만 색계의 특징은 수에 있으므로 受를 第二로 열거한다. 無色界는 순수한 정신세계이므로 상이 가장 현저하므로 想을 第三에 열거하고, 또 무색계 중에서도 有頂天[非想非非想處]에 이르러서는 오직 行의 相이 현저하므로 이것을 第四에 들고, 識은 삼계를 통하여 四蘊을 所住處로 하는 能住의 위치에 있으므로 第五의 순서에 열거한다는 것이다.208) 살펴본 바와 같이『俱舍論』은 오온의 순서가 합리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매우 주도면밀한 구도속에서 열거된 것임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뒷 날 五蘊이 自然界까지를 통털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지만, 여기서 보이다시피 五蘊說은 본래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설해진 교설임이 분명해진다.
(5) 識蘊
識蘊[vij na-skandha]은 外境을 了別하는 마음의 본체, 또는 마음의 總體를 말한다.『俱舍論』에서는 식온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識은 각각 요별하므로, 이를 意處와 7界라 한다.
마땅히 6식이 轉하여 意가 됨을 알아야 한다.
논한다. 각각 이러저러한 경계를 요별하여 境相을 총괄하여 취하므로 識蘊이라 한다. 이것은 다시 차별하면 6식신이 있는데, 안식신부터 의식신까지 이다. 마땅히 식온에 대해 설한 바를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식온은) 處門 중에 세우면 意處가 되고, 界門중에 세우면 7界가 되며, 안식계부터 의식계까지 이 6식이 전전한 것을 意界라 한다.209)
곧 識은 對境의 總相을 요별하는 것으로서, 眼識으로부터 意識까지 六識이 있다. 이러한 식은 12處에서는 意處에 속하고, 18界에서는 안식 등의 6識界와 意界의 7界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서술해온 五蘊을 유위와 무위의 분류법에 대비하여 고찰하면 어떻게 되는가?『구사론』에서는
무슨 까닭으로 無爲는 處와 界에서 설명하고, 蘊에는 포함되지 않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온은 무위를 포함하지 않는다. 義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한다. 세 가지의 무위법210)은 色 등의 온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색 등과 그 의미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無爲의 體는 色 내지 識도 아니며, 또한 제6蘊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온의 의미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211)
라고 설하고 있다. 12처와 18계에서는 법처와 법계에 무위법이 포함되어 오온은 유위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오온은 일체법이 아니다. 무위법이 오온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오온의 분류에서는 12처나 18계 보다도 심법이 훨씬 많은 비중을 두고 분석되고 있는 점이 큰 특색이다.
위에서 살펴본 五蘊說은 一切法을 色法[色蘊]과 心所法[受·想·行蘊]과 心王法[識蘊] 및 색법도 심법도 아닌 일종의 세력적 존재[行蘊에 속함]로 나누어 분석하는 분류법이다. 이러한 분류법은 人生을 중심으로 하여 諸法無我의 진리를 밝히는 것이며, 일체법은 다섯 가지의 蘊으로 성립된 五蘊假和合의 존재로서 집착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 오온설의 진정한 의미이다.
2) 世親의 大乘的 五蘊說
세친논사는 부파불교의 교단에 입문하지만, 뒤에 大乘佛敎로 전향하게 된다.그는 처음 說一切有部에 출가하여 부파의 교리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총정리하여『阿毘達磨俱舍論』을 저술하였다. 또, 그 뒷날 친형인 무착보살에게 인도되어 대승불교로 전향하여서는『大乘成業論』『大乘五蘊論』그리고 산만한 法數를 총정리한『大乘百法明門論』과『唯識20論』『唯識30頌』 등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部派와 大乘을 모두 경험하고 두루 저작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저서를 열람하면 大·小乘의 敎學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212)
前項에서 '世親의 部派的 五蘊說'을 살펴본 뒤, 본 項에서 굳이『대승오온론』을 중심으로 하여 '세친의 대승적 오온설'을 살펴보는 것은, 그가 오온의 내용을 분석할 때 부파불교에 몸을 담고 있을 때는 부파적인 五蘊觀을 가졌고, 대승에 귀의하였을 때는 대승적인 오온관을 갖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13) 아래에서는 주로 세친의『대승오온론』에 의거하여 그의 대승적 오온설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色·受·想蘊
世親은『大乘五蘊論』의 첫머리에서 五蘊의 순서를 열거하고, 바로 이어서 各蘊의 의미와 내용을 해설한다. 먼저 色蘊은 四大種과 四大에 의해 만들어진 色法[四大種所造諸色]이다. 四大種은 地·水·火·風大이며, 각기 堅强性·流濕性·溫 性·輕等動性을 본질로 한다. 사대종소조색은 眼根으로부터 身根까지의 五根과 色·聲·香·味의 四境과 觸處의 일부분 및 無表色으로서 모두 11種이다. 여기서 '촉처의 일부분'이라는 말은 滑性[미끄러운 성질] 등을 가리키며214), 사대도 촉처에 포함된다. 무표색은 삼마지에서 일어나는 색 등의 無見無對의 것이라고 한다.
다음 受蘊은 領納의 의미로서, 苦·樂·不苦不樂의 三受를 들고 있다. 이어서 樂受는 사라질 때에 화합의 욕망이 있는 것이고, 苦受는 생기할 때에 떠나고 싶은[乖離] 욕망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곧 受蘊 자체가 번뇌는 아니지만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想蘊은 경계에서 여러 가지의 相을 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곧 想은 표상작용이며 지각작용으로서 이미지[image]를 형성하여 언어를 발생시키는 心作用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대승오온론』에서 보이는 색·수·상온에 대한 세친의 분석은 그 종류나 내용면에서 유부교학의 견해나 자신의 저작인『구사론』에서 살펴본 것과 거의 다름이 없다.
(2) 行蘊
세친은 行蘊의 분석에서는『구사론』과 그 종류를 달리하고 있다.『대승오온론』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行蘊이란 무엇인가. 受蘊과 想蘊을 제외한 그 나머지의 心法과 心不相應行法이다.215)
곧 行蘊은 五位百法의 51心所 중에서 수온과 상온을 제외한 그 나머지의 心所法과 不相應行法을 모두 포함한다고 한다. 이어서『대승오온론』에서는 유식학에서 들고 있는 51심소를 모두 열거하면서 간략하게 내용설명까지 덧붙이고 있다.216) 이 점은 그의『대승백법명문론』이 심소의 명칭만을 나열하는 것과 다르다. 그리고 세친은 심소법을 5遍行과 5別境과 11善과 6煩惱와 20隨煩惱와 4不決定으로 大別하고, 유식학의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아가 心不相應行法에 대해서 그의『대승오온론』에는
心不相應行이란 무엇인가. 色·心·心所法의 분위에 의하여 다만 施設할 수 없는 결정적으로 다른 성질과 다르지 않은 성질을 가정으로 세운 것이다. 또 그것들은 무엇인가. 得·無想定·滅盡定·無想天·命根·衆同分·生·老·住·無常·名身·句身·文身·異生性 등의 이러한 부류들이다.217)
이라 하고 있다. 心不相應行이란 (色)心과 상응치 않는 行(蘊)이라는 의미이다. 有爲法 중에서 色에도 心에도 心所에도 속하지 않는 法을 말한다.『俱舍論』제4권에는 得·非得·衆同分·無想果·無想定·滅盡定·命根·生·住·異·滅·名身·句身·文身의 14不相應行法이 열거되고 있다.218) 그런데『오온론』에는 非得이나 異나 滅이 빠져있고 老나 無常이나 異生性 등이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오온론』의 불상응행법은 유가행파처럼 24가지 모두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大乘系統에 속하는 견해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행온의 설명에 있어서는『오온론』이 『구사론』보다 교리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여기서 세친의 大乘的 五蘊觀을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3) 識蘊
마지막으로 五蘊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識蘊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세친은『오온론』에서 식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밝히고 있다.
識蘊이란 무엇인가. 所緣境에 대해 了別하는 것을 性으로 삼는다. 또한 心이라고도 하고 意라고도 한다. 心은 채집하기 때문이고, 의는 섭수되기 때문이다. 가장 수승한 심은 알라야식이다. 이 識 중에 諸行의 종자가 모두 채집되기 때문이다.…… 알라야식이란 일체의 種子를 거두어 저장하기 때문이다. 또 아만의 相을 거두어 저장하기 때문이다. 또 몸을 緣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에, 이것을 아다나[ad na]식이라고도 하는데, 몸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가장 수승한 意란 알라야식을 연하여 경계로 삼아, 항상 아치·아견·아만·아애 등과 상응하는 식이다. 앞뒤로 동일한 종류가 상속하여 따라 굴러간다. (다만) 阿羅漢果와 聖人의 道와 멸진정이 현전하는 상태는 제외한다.219)
세친은 識蘊을 心·意·識으로 분류하여 그 내용을 밝히고 있다. 心은 諸行으로 훈습된 일체의 종자를 저장하는 알라야식이며, 신체를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는 아다나식이라고 한다. 다음 意는 항상 알라야식을 緣하여 我見 등의 4근본번뇌와 상응하며 遍行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여, 제7말나식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 다음 識은 소연경을 요별하는 것이라 하여 안식 등의 前六識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식온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보면, 세친은 비로소 이『오온론』에서 부파의 小乘的인 識觀을 탈피하여 大乘的인 識觀으로 완전히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다.220) 다시 말하자면 세친은 부파의 오온설에서 식온을 6식으로만 분류하여 설명하던 것을,『오온론』에서는 意를 末那識으로 해설하고 心을 알라야識으로 풀이하여 두 식을 보태 8識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세친의 심식사상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8識說의 構圖가 보이며, 『구사론』과『오온론』의 오온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4) 『大乘五蘊論』에서의 法數
위에서 살펴본 바를 종합해보면, 色蘊에는 11種이 있으며 受蘊은 1種이고 想蘊도 1種이었다. 行蘊은 51心所 중에서 受와 想을 제외한 49종과 心不相應行法은 '等'으로 처리하여 구체적으로 모두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식학의 술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24종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식온은 8종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모두 합치면 94法이 되어, 여기에다 無爲法의 6종을 합치면 100법이 되는 것이다.
『대승오온론』에서는 오온과 諸法의 포함관계에 대해서
(문) 무슨 의미로 蘊이라고 합니까.
(답) 積聚의 의미로써 온이라고 한다. 세간에서 相續되는 品類의 차별 된 色 등의 제법을 총괄적으로 요약하여 포함하기 때문이다.221)
라고 한다. 다만 오온에서 무위법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데, 12處의 法處에 무위법이 포함되게 된다. 따라서『대승오온론』은
法處란 受·想·行蘊과 無表色 등과 無爲法이다.222)
라고 하여 법처에 무위법이 포함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18계에서는 법계에 무위법이 포함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이러한 오온설 등은 무슨 목적으로 설해지는 것일까?『오온론』에는 我執을 對治하고자 宣說된 것이라고 한다.223) 3科說은 諸法이 無我임을 보이기 위한 분류법이며, 그 목적이 아집을 끊어 解脫하는 것에 있음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五蘊論』에서 오온은 有爲法만이지만 100법 중 94법이나 포함하고 있다. 특히 心法을 5遍行·5別境·11善·6煩惱·隨煩惱·不決定으로 분류하고 있어서,그 분류법이『구사론』보다도 唯識思想의 '육위의 심소설'에 훨씬 가깝다. 나아가『오온론』은 다시 12처와 18계의 門을 열어서 6無爲法까지 포용한다. 이와 같이 오온설은 아함 이래 諸法의 가장 기초적인 분류법으로서, 대승의 5位100法說도 이 오온설에 무위법을 더하여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오온설을 宣說하는 목적이 불교의 궁극인 해탈에 있음으로 보아, 오온은 간단한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교설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五位百法 思想의 成立
앞에서 살펴보았다시피 部派의 5位75法이나, 大乘의 5位100法說은 根本佛敎 이래 가장 기초적인 諸法의 분류방법인 오온설에 무위법을 더하여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법의 분류법은 우주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法]을 합리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분류의 발전은 근본불교에서 부터 시작하여 부파불교를 거쳐 대승불교시대에 접어들면서 마무리가 된다.224) 아래에서는 먼저 5위100법의 淵源을 살펴보고, 이어서 成立의 過程을 고찰하기로 한다.
(1) 五位百法의 淵源
5位100法은 일체의 有爲와 無爲法, 그리고 有漏와 無漏法을 총망라하여 일목요연하게 분석하여 설명하고자 한 분류이다. 5위는 다섯 종류의 位態라는 의미로 일체법을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이다. 百法은 이 5위를 다시 분류하여 확대한 것이다. 法[dharma]은 불교에서 모든 존재를 총칭하는 술어이며, 흔히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敎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가 하나하나 모두 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 대상화되는 모든 것이 바로 법이다. 결국 법은 좁은 의미로는 하나의 대상이나 사물 또는 개념 등의 뜻으로서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넓은 의미로는 석존의 교법과 현상계의 모든 것, 眞理[眞如法性] 또는 軌範·법칙·규범·윤리·도덕 등 有形이나 無形 그리고 心的·物的인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중국의 法相宗에서는 법을 '任持自性 軌生物解'로 정의하는데,225) 이는 '항상 自相을 잃지 않고 유지하며, 사물과 사물 사이의 軌範이 되어 그 사물에 대한 理解가 생기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복잡하고 분류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우주만유의 제법도 실상의 파악을 위해 명백하게 분석할 필요성이 있으며, 불교의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도 이러한 분류작업은 필요한 것이다.
1 根本佛敎의 分類法
五位百法의 연원은 근본불교에서 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불교의 기본사상이며 一切法의 분류방법인 五蘊·十二處·十八界의 三科나 十二緣起說 등에서 보인다. 이와 같은 분류들은 사실상 불교의 諸法分類에 있어서 기초가 되고 연원이 되었으며, 부파불교나 대승불교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六足論의『品類足論』등은 三科를 바탕으로 하여 諸法을 확대해석하거나 분류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226) 부파불교의 논서가 그러한 경향을 띠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대승불교의 논서에서 까지 삼과를 기초로 하였다는 것은 의외이기는 하나, 앞 節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온 등의 삼과가 부파의 5위75법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승의 5위100법설의 근저가 되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리고 후세의 구사학이나 유식학의 心所에 대한 法數도 근본불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4阿含 등에 나타나는 21穢說·4暴流·5力·7覺支·37助道品 등은 百法 中 心所論의 기초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후세의 심소론의 법수에서 나타나는 술어와 일치되는 것이 많다. 21穢說이나 21結說이나 16心穢說 등에는 특히 후세에 설명되는 煩惱心所와 동일한 술어들이 대부분이다. 다음으로 善心所에 해당하는 술어는 37조도품과 8正道의 내용과 부합하는 것이 많다.227) 이와 같은 근본불교의 술어들은 부파불교에 들어오면서 그 수가 증가하고 정연하게 체계가 확립된다. 그렇지만 그 연원은 대부분 근본불교에 두고 있는 것이다.
2 部派佛敎의 分類法
본 논문의 제Ⅲ章 제2節 '部派佛敎의 心識思想'에서 心心所法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주로 그 나머지의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부파불교의 제법의 분류는 六足論228)에 매우 잘 조직되어 있다. 6족론은 부파불교의 가장 기초가 되는 논서들로서, 그 중에서도『品類足論』에는 제법에 대한 분류의 근저가 되는 형태가 잘 정리되어 있다.『품류족론』은 諸法을 '一色·二心·三心所有法·四心不相應行·五無爲'로 분류하고 있는데, 부파불교의 五位說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세친논사도 이것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229) 이어서 오위를 분류하고 있는데, 색법을 가장 먼저 열거하고 있다.
色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색으로서 모든 4대종과 4대종으로 만들어진 색을 말한다. 4대종이란 지계·수계·화계·풍계이며, 4대종으로 만들어진 색이란 안근·이근·비근·설근·신근과 색·성·향·미와 감촉되는 것[所觸]의 일부분과 무표색이다.230)
라고 하여, 15종류를 들고 있다. 다음 心法은 眼識으로부터 意識까지 6識을 들고 있으며, 心所有法은 구체적인 것으로 受로부터 纏까지 24종류를 나열하고 있다.231)
그 다음 心不相應行法으로는
심불상응행이란 무엇인가. 어떤 법이 심과 상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득·무상정·멸진정·무상사·명근·중동분·의득·사득·처득·생·노·주·무상성·명신·구신·문신을 말하며, 또 그밖의 이러한 부류의 법이 심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총괄하여 심불상응행이라고 한다.232)
라고 하여, 구체적인 것으로 16종류를 들고 있으며, 또한 無爲法은
무위란 무엇인가. 세 가지의 무위가 있으니, 첫째는 허공무위이고, 둘째는 비택멸무위이며, 셋째는 택멸무위이다.233)
라고 하여, 3종류를 들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품류족론』은 제법을 아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분류법은 불교의 諸法分類法上 매우 귀중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된 법수는 확정적인 것이 아니며, '所餘如是類法[그밖의 이러한 부류의 法]'이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얼마든지 증가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이어서 善根과 不善根과 無記根, 그리고 結과 纏을 여러 종류로 세분하고 있다.234) 나아가 隨眠과 隨煩惱도 여러 종류를 열거하고 있다.235)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심법과 심소법에 후세의『구사론』 등에서 언급되고 있는 술어들이 거의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심법과 심소법의 분류는 뒷 날 체계화된 75법설과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五位의 次第와 수면 및 수번뇌 등의 술어는『구사론』 등의 부파불교 논서는 물론이고, 유가행파의 논서에까지 직접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236)
나아가 心所의 분류에 대해서 『品類足論』第二卷에는 10大地法과 10大善地法, 그리고 10大煩惱地法과 10小煩惱地法 등이 열거되고 있는데,237) 『구사론』의 項目이나 언급되는 술어가 거의 같다. 또한 이것은 술어의 순서나 數에 있어서 大乘의 100法說과도 별로 틀린점이 없어서, 불교의 諸法에 대한 분류는 이미 六足論에서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육족론을 바탕으로 하여 佛滅後 400년경에 迦多衍尼子가 이것을 체계적으로 조직·정리하여 『發智論』을 저술하였고, 다시 간다라국의 까니쉬까王 時代에 이 『발지론』을 註釋하여 『大毘婆沙論』 100권이 저작되었으며, 후에 世親이 이들 저서를 체계적으로 총정리하고 요약하여 『俱舍論』을 완성하였다. 그래서 『구사론』제4권에서도 諸法의 分類는 『품류족론』의 순서와 동일하게 기술되고 있다.238) 部派佛敎의 특징은 5位를 色→心→心所 등으로 순서를 세우는데, 이것은 心外의 대상을 實在하는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그것에 의해 心心所가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唯識思想에서는 心→心所→色 등의 순서로 하는데, 이것은 諸法이 識轉變의 산물로서 心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五位의 次第에 있어서 부파불교는 色法을 우선하고, 대승의 唯識思想은 心法을 우선하는 것이다. 세친도 부파불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저작했던 『구사론』에서는 色法의 11가지를 먼저 언급하고, 이어서 心法1·心所有法46·不相應行法14·無爲法3으로 하여 5位75法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것이 부파불교 諸法分類의 대표적인 것이며, 뒷날 대승불교 諸法分類의 근간이 되었다.
(2) 五位百法의 成立
大乘佛敎에 들어와서 5位 100法 思想의 가장 가까운 淵源은 『瑜伽師地論』에서 찾아볼 수 있다. 瑜伽行派의 많은 典籍 中 『유가사지론』은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방대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논서이다. 이 논서에 5位100法의 내용이 보이는데, 第一卷의 〈本地分〉에
意地의 自性은 무엇인가. 心과 意와 識이다. 心이란 일체의 종자가 따르고 의지하는 체성이고, 따르고 달라붙는 체성이다. 體가 執受할 수 있으며, 異熟에 속하는 알라야식이다. 意란 항상 작용하는 意와 육식신의 간단없이 멸하는 意이다. 識은 바로 지금 나타나 所緣의 경계를 요별하는 것이다.239)
라고 하여, 心·意·識의 體性을 논하며 心法을 9識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심식의 작용을 『유가사지론』에서는 助伴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心所에 해당한다. 이 心所〔助伴〕에 대해서 本論은 이어서
그것의 조반〔심소〕은 작의·촉·수·상·사·욕·승해·념·삼마지·혜·신·참·괴·무탐·무진·무치·정진·경안·불방일·사·불해·탐·에·무명·만·견·의·분·한·부·뇌·질·간·광·첨·교·해·무참·무괴·혼침·도거·불신·해태·방일·사욕·사승해·망념·산란·부정지·오작·수면·심·사이다. 이와같이 구유하고 상응하는 심소유법의 부류를 조반이라고 한다.240)
고 하고 있다. 심식과 서로 상응하는 心所〔助伴〕를 53가지나 열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世親의 『大乘百法明門論』에 나오는 心所들을 그대로 볼 수 있고, 51心所의 대승적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色法에 대해서는 論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모든 법들이 생기는 것은 모두 自種子로부터 생기하는데, 무엇 때문에 4대종이 所造色을 생기게 한다고 말하는가? 소조색이 그것에 의해 그것이 건립되며, 그것이 任持되며, 그것이 長養되는가?
(답)모든 內外의 大種과 所造色의 種子는 모두 內의 相續心에 依附하며, 내지 모든 4大의 종자가 아직 생기지 않은 이래 4대종자는 끝내 생기지 않는다. 소조색은 반드시 그것[대종의 종자]에서 생기하며, 소조색은 바야흐로 自種子로부터 생기하므로 그것[종자]이 色을 만들어 낸다고 하며, 반드시 그것[대종]이 소조색을 생기하는데 앞에서 인도를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 때문에 대종들이 그것[소조색]의 生因이 된다고 한다.241)
이와 같이 色法에 관한 설명은 부파불교의 그것과 완전히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色法을 內外의 種子로부터 생기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곧 대종과 소조색의 종자가 內心의 상속에 의부하다가 現象界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色法에 14種이 있다고 한다. 地水火風과 色聲香味觸과 眼根 등의 五根이 그것이다.242)
또 不相應行法과 無爲法에 대해서는 論 제3권에
불상응행에 24종류가 있다. 득·무상정·멸진정·무상이숙·명근·중동분·이생성·생·노·주·무상·명신·구신·문신·유전·정이·상응·세속·차제·시·방·수·화합·불화합이다. 무위에 8종류가 있다. 허공·비택멸·택별·선·불선·무기법·진여·부동·상수멸이다.243)
라고 하여, 불상응행법 24종과 무위법 8종을 열거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을 합쳐보면, 心法 8·心所有法53·色法14·不相應行法24·無爲法9 등 107法이 되며,여기에다 法處所攝色을 보태면 108法이나 된다. 『유가사지론』은 유가행파의 논서중에서 最古의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次第의 五位와 法數는 唯識思想의 諸法分類로서는 가장 앞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밖에 百法說의 연원이 될 만한 것으로서 無着論師의 『阿毘達磨集論』이 있지만, 그것은 부파불교의 분류방식이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色蘊은 15종으로 분류하여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고, 受蘊과 想蘊은 心識의 作用만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다만 行蘊을 52心所로 확대한 것은 유의할 만한 점이다. 不相應行法은 24종을 들고 있어 부파불교의 분류와 거의 같다. 그리고 識蘊과 無爲法은 각각 8종을 들고 있다. 결국 『아비달마집론』은 五蘊을 바탕으로하여 法數만 大乘의 百法에 가깝게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244) 그런데 五位의 次第에 있어서 『유가사지론』은 第100卷에서 心法·心所有法·色法·心不相應行法·無爲法의 順으로 열거하고 있는데,245) 『아비달마집론』은 第2卷에서 色法·心法·心所有法·心不相應行法·無爲法의 順으로 열거하고 있다.246) 이러한 점으로 봐서는 諸法의 分類에 있어서 『아비달마집론』은 부파불교에 가깝고, 『유가사지론』의 次第나 분류가 훨씬 唯識思想에 부합하고 大乘的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五位百法의 確立
唯識思想에서는 萬法이 識에 의하여 變現된다는 識所變의 입장에서 外境을 인정치 않으며, 所緣의 境界는 어디까지나 心識에서 變現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五位의 次第에 있어서도 能緣인 心識을 앞에 두고, 識의 대상인 所緣境을 뒤에 둔다. 이와 같이 心王法을 首位에 두는 것은 그 작용이 다른 法들보다 수승하기 때문이며, 心所有法을 제2位에 두는 것은 이 심소법이 心王과 항상 상응하여 生起하는 까닭이다. 色法을 제3位에 둔 것은 색법이 심왕과 心所에서 變現된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不相應行法을 第4位에 두는 것은 이 法이 心王과 心所와 色과 無爲와 서로 상응하지는 않지만, 心王과 心所와 色法의 分位의 差別에 假立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無爲法을 최후에 둔 것은 무위법은 有爲法인 앞의 4位의 法이 없어진 때에 비로소 顯現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47) 이와같은 5位의 法들은 100法과 더불어 識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唯識'의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유가행파에 있어서 5位100法說의 풍부한 내용은 『유가사지론』을 요약·정리한 無着의 『顯揚聖敎論』에서 찾아볼 수 있고, 그 완결된 형태는 世親의 『大乘百法明門論』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無着은 『顯揚聖敎論頌』에서
心과 心所有와 色이며, 不相應과 無爲이네.248)
라고 하여, 5位의 분류에서 心識爲主의 體制를 갖추고 있다. 이것을 무착논사는 『현양성교론』에서 주석하여 106法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현양성교론』에서 무착은 心法을 8종의 識으로 분류하고, 心所法은 51종으로 확정한다.249) 이 51心所를 遍行心所5와 善心所11과 煩惱心所6과 隨煩惱心所20과 不定心所4로 세분하여, 그 항목과 술어를 명확하게 定立시킨다. 이것은 세친논사가 『百法明門論』을 저술하기 전에 이미 51心所論이 무착논사에 의해 확정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250) 나아가 色法은 15種으로 확정되는데,251) 이것은 부파불교의 분류법에서부터 있던 숫자이며, 『백법명문론』에서 보다 地·水·火·風의 4大요소가 더 많다. 다음으로 心不相應行法은 心法과 色法의 分位로서 24種을 열거하고 있다.252) 마지막으로 無爲法은 8種을 들고 있는데253),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듯이 『유가사지론』에 나타난 숫자로서 부파불교의 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숫자이다. 이와 같이 무착논사는 五位를 唯識所變의 次第로 하였고, 五位의 분류도 心法8·心所法51·色法15·心不相應行法24·無爲法6 등 106法으로 확정하였다. 그러므로 사실상 五位法說은 세친보다도 먼저 무착에 의하여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254)
그러나 五位百法은 세친의 『대승백법명문론』에서 확정된 法數로서, '五位百法'이라는 술어로서 불교계에 알려진 것은 바로 이 論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100法은 무착이 정한 色法의 15종을 11종으로 줄이고, 또 無爲法의 8종을 6종으로 줄여 확정한 것에 불과하다. 『현양성교론』과 『대승백법명문론』의 두 論에서 내용상의 몇가지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기로 한다.
『현양성교론』〔以下에서는 『성교론』으로 略稱함〕에서 心法 中 '意'라 한 것을 『대승백법명문론』〔이하에서는 『명문론』으로 약칭함〕에서는 '末那'라고 하였다.
別境心所 중 『성교론』에서 '等持'라 한 것을 『명문론』에서는 '定'이라 하였다.
善心所 中 『성교론』에서 '捨'라 한 것을 『명문론』에서는 '行捨'라 하였다.
煩惱心所 中 『성교론』에서 '見'이라 한 것을 『명문론』에서는 '不正見'이라 하였다.
隨煩惱 中 『성교론』에서 '心亂'이라 한 것을 『명문론』에서는 '散亂'이라 하였다.
色法에서 『성교론』에서는 '地·水·火·風'이 들어 있지만, 『명문론』에는 그것들이 빠져있다.
不相應行法 中 『성교론』에서 '無想天'이라 한 것을 『명문론』에서는 '無想報'라 하였다.
無爲法 中 『성교론』에서 '善法眞如·不善法眞如·無記法眞如'라 한 것을 『명문론』에서는 다만 '眞如'라고 하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성교론』과 『명문론』의 字句의 차이는 번역에서 달라졌을 뿐 그 내용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五位百法은 이미 『성교론』에 있던 것을 주석만 제외하고 名數만을 그대로 『명문론』에 정리하여 기록했다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255) 『대승백법명문론』에서도 오위백법설은 세존께서 설하신 一切法 無我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무아에 두 가지가 있어서 人無我와 法無我가 그것이라고 하고 있다.256) 물론 인무아와 법무아를 설하는 목적은 我執과 法執을 없애어 解脫하라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끝으로 『대승백법명문론』의 5位100法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五位百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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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心法(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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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末那識·阿賴耶識 | |
2. 心所有法(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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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遍行(5) 作意·觸·受·想·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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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別境(5) 欲·勝解·念·定·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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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善(11)........................信·精進·慙·愧·無貪·無瞋·無癡·輕安·不放逸·行捨·不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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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煩惱(6) 貪·瞋·慢·無明·疑·不正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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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隨煩惱(20) 忿·恨·惱·覆· ·諂· · 害·嫉· ·無 ·無愧·不信 ·懈怠·放逸· 沈·掉擧·失 念·不正知·散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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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不定(4)................... 睡眠·惡作·尋·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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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色法(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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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五根........................ 眼·耳·鼻·舌·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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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五境........................ 色·聲·香·味·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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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法處所攝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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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不相應行法(24) |
得·命根·衆同分·異生性·無想定·滅盡定·無想報·名身·句身·文身·生·老·住·無常·流轉·定異·相應·勢速·次第·方·時·數·和合性·不和合性 | |
5. 無爲法 |
虛空無爲·擇滅無爲·非擇滅無爲·不動滅無爲·想受滅無爲·眞如無爲 |
2. 世親의 心識思想
唯識思想에 대한 世親의 저작은 대부분 彌勒이나 無着의 저술에 대한 註釋의 형식으로 지어진 것이며, 독자성을 띠고 있는 책은『唯識20論』『唯識30頌』그리고『三性論偈』가 있다. 이 가운데서 『유식20론』은 부파불교나 外道의 唯識說에 대한 비판이나 의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唯識無境'의 道理를 밝히고 있다.『유식30송』은『解深密經』으로부터『攝大乘論』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經論에 의해 밝혀진 唯識思想의 大綱을 30개의 頌으로 정리한 것이며, 여기에는 종래의 說에는 없었던 識轉變說이 보완되어 있다. 三性說은 모든 法의 존재형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며, 三性이 각각 無自性·空이라는 관점에서 三無性을 세운다. 本節에서는 이러한 논의들을 중심으로 하여 世親의 心識思想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唯識20論』의 構造
『唯識20論』은『唯識30頌』처럼 직접적으로 唯識思想의 內容을 조직하여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며, 부파나 외도의 外境實有說을 비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唯識思想의 내용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러한 비판을 통해 唯識哲學上의 어렵고도 곤란한 많은 문제들을 해명하고 있다.『유식20송』은 모두 합해서 21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맨 마지막의 1頌은 全文을 총결하는 것으로서, 唯識의 道理를 설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頌數에 계산하지 않고 20頌으로 산정하여 '유식20송'이라 이름붙인다.
이 책은 유식의 도리를 사용하여 부파와 외도의 詰難을 논파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내용을 크게는 외경실유설의 批判·極微實有說의 비판·現量難 및 꿈에서의 作業批判·他心智不成難과 無我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唯識20論』은 이 20頌을 중심으로 하여 간단한 논문을 덧붙여 頌을 간략하게 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20頌을 잘 이해하면 20論의 의미가 그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20송을 중심으로 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外境實有說의 批判
1 處·時決定難과 相續不決定難 및 作用不成難
論의 제1頌은
만약 오직 識만 있고 실재하는 外境이 없다면,
처소[장소]와 시간의 결정은 성립될 수 없으며,
상속에서 일정하지 않은 것과 작용이 있는 것은
마땅히 성립되지 않아야 한다.257)
라고 되어 있다. 서술방식에 있어서 세친은 唯識無境의 道理를 논증하기 위하여 일부러 外人과의 一問一答의 형식으로 頌文을 지어 그것을 밝히고 있다. 제1句의 의미는 만약 瑜伽行派처럼 제법이 단지 內識에만 존재하고 결코 實在의 外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이 그리운 사람을 보고자 하면 그 사람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고, 돈을 갖고자 하면 방안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와 같이 외경은 일정한 處所가 존재하며, 일정한 처소가 존재하면 외경은 實有하며, 이것은 결코 識이 顯現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萬物은 處의 決定이 있어야 실유하는 것이며, 결코 식이 현현한 것은 아니다. 만약 만물이 식이 현현한 것이라면 處所의 결정은 성립할 수 없다고 詰難한다. 이것이 處決定難이다.
그다음 제2句의 의미는 만약 유가행파처럼 諸法이 단지 內識에만 존재하고 實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밤에 태양을 보려고 하거나 겨울에 매미소리를 들을려고 하면 태양이나 매미가 현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태양은 낮에만 볼 수 있고 매미는 반드시 여름에 존재한다. 이와 같이 외경에는 일정한 時間이 존재하며 일정한 시간이 존재하면 외경은 실유하며, 이것은 결코 식이 현현한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만물은 時의 결정이 존재해야 실유하는 것이며, 결코 식이 현현한 것은 아니다. 만약 식이 현현한 것이라면 시의 결정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고 힐난한다. 이것이 時決定難이다.
제3句에서 相續이라는 말은 衆生의 異名으로 因果와 生死를 취해 상속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유가행파처럼 오직 내식만 존재하고 境은 識變이어서 외경은 실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중생들의 業報나 識이 모두 다르고 각 개인의 識이 각 개인의 境을 變現하므로 각자가 보는 것도 달라야 한다. 그러나 現前의 境界인 도시나 공원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모두 하나의 모습으로 본다. 이와 같이 만약 단지 식만이 존재하고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個個의 相續에 의해 변현된 경계는 결정적이지 못하므로[일정하지 않으므로] 다수의 상속에 의해 결정되는 경계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고 힐난한다. 이것이 相續不決定難이다.
제4句에서는 만물은 모두 그 나름의 작용이 있는데, 물의 작용은 갈증을 없애고 돌의 작용은 집을 짓는 재료가 되는 것이다. 만약 유가행파의 주장처럼 다만 能變의 識만 존재하고 外境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돌을 물로 변화시켜 갈증을 해소하고, 물을 돌로 변화시켜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우주간의 각 개체가 모두 각기 개별작용이 존재하며 서로 通融될 수 없다면, 외경은 그 독립성이 있는 것이므로 실유하는 것이다. 만약 외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각각 서로 다른 개별작용은 성립할 수 없다고 힐난한다. 이것이 作用不成難이다.
2 處決定難 등의 四事에 대한 論破
論은 제2頌에서 다음과 같이 四事에 대해 비유로써 논파하고 있다.
처소[장소]와 시간이 일정하다는 것은 꿈과 같고,
몸에서 일정하지 않은 것은 아귀가 다 같이
고름의 강을 보는 것과 같으며, 꿈 속에서
정혈을 유실하여 손해하는 작용이 있는 것과 같다네.258)
이 頌에서 세친은 앞서 의문을 제기했던 외인의 힐난에 대해 스스로 답하고 있다. 송 가운데 제2句는 제1頌 제2句의 處·時決定이 성립될 수 없다는 詰難에 대해 논파하고 있다. 비록 處所와 時間의 결정이 성립된다 하더라도 實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259) 곧 꿈 속에서의 장소설정도 결정적인 것으로 자신이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으며, 꿈에서도 언제나 어떤 시간이 설정되어 있어서 이것을 마음대로 변경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2句와 제3句는 제1頌 제3句의 相續不決定難에 대한 논파이다. 모든 아귀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보이는 고름으로 가득찬 강은 실재물이 아니다. 그러나 아귀들은 한결같이 고름의 강으로 본다. 그러므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는 복수의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 사물이 실재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이 복수의 사람들에게 같은 것으로 보이는 까닭은 그들이 모두 같은 업을 지어서 아주 유사한 종자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 사물이 실재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 세친의 주장인 것이다.260)
제4句는 제1頌 제4句의 作用不成難에 대한 논파이다. 힐난자의 의도는 대상의 실재성은 곧 대상의 작용성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실제상의 남녀의 성교가 없는데도 손실이 있는 것처럼, 몽정이라는 경험을 통해 꿈도 작용성을 가짐을 입증할 수 있다. 세친은 꿈 속에서의 境은 識이 현현한 것으로 실재하지 않지만 그 작용성이 존재함을 증명함으로써, 눈 앞에서 작용하고 있는 모든 것도 또한 식이 현현한 것이라고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論은 제3頌에서 地獄의 비유를 통해 위에서 언급한 四事에 대해 총괄적으로 논파한다.
모든 것은 지옥에서 다같이 옥졸 등이 핍박하고 해치는 일을 한다고 보는 것과 같도다. 그러므로 네 가지의 의미가 모두 성립된다네.261)
頌의 첫머리에 있는 '모든 것(一切)'이란 외인이 힐난했던 四事를 가리키며, 이 四事가 모두 지옥 중의 情形과 같으므로, 지옥의 비유를 들어 이 네 가지의 문제를 총괄적으로 논파하고 있다. 제1·2의 兩句에서는 일체의 유정이 살면서 惡業을 지으면 죽어서 지옥의 果報를 받아 모두 獄卒을 다같이 본다는 것이며, '等'字는 지옥내의 각종 依報와 正報를 포괄한다. 이러한 의보와 정보들은 모두 죄를 지어 고통받는 중생들의 共業에 의해 감수되는 것으로 識이 현현한 것이며, 이것은 幻夢과 같아 하나도 실제의 일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 '同見'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출현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處와 時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共業의 유정에게는 동일한 境界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兩句는 앞에서 언급된 四事의 힐난중에서 세 가지, 곧 처·시결정난과 상속결정난을 논파한 셈이다.
제3句의 獄卒 및 蛇·火 등의 사물은 그 업무가 지옥의 유정들을 핍박하고 해치는 일이다. 지옥 중의 옥졸과 그 곳에서 사용되는 도구는 모두 공업에 의해 감각되는 것으로 실재의 외경으로 존재하지는 않으며, 식이 현현한 것이지만 그 작용은 존재한다.262)
이 제 3句는 作用不成難을 논파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네 가지의 힐난이 모두 논파되어 唯識無境의 의미가 성립되므로, 頌에서는 四義가 모두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다.
(2) 極微實有說의 批判
論의 제10頌은 각 학파가 주장하고 있는 極微說을 다음과 같이 논파한다.
그 대상은 하나가 아니고, 또 많은 극미도 아니다.
또한 화합 등도 아니므로 극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라네.263)
세친논사는 極微문제에 관하여 이 頌으로써 4派를 논파하고 있다.
제1句에서는 다수의 극미가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勝論學派[와이셰시까]의 잘못된 견해를 논파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무수한 것들이 집합함으로써 변하여 하나의 커다란 '一'이라는 존재를 이룬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제2句에서는 多數의 극미가 實有한다는 有部의 견해를 논파한다. 제3句에서는 다수의 극미가 화합하여 色法을 이룬다는 경량부와 順正理師를 논파한다. 유부와 경량부에서는 적어도 7極微가 합하여야만 비로소 微塵이 되고, 1미진이 되어야 眼根과 眼識이 취할 수 있는 境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극미에 方分이 있다면 이미 극미가 아니며, 만약 방분이 없다면 聚合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극미는 성립되지 않으며, 물질의 개념적 최소한으로서 假想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논파하는 것이다.
(3) 現量難 및 꿈에서의 作業批判
1 現量難
現量難은 外境의 實在는 現量에 있어서 否定될 수 없는 현실이라는 힐난이다. 그러나 論은 제15頌에서
현량도 꿈 등과 같아, 이미 현량을 일으킬 때에는
能見의 識과 對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현량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으리오.264)
라고 하여, 현량도 꿈과 같아서 꿈 속에서도 현량을 일으키지만 거기에 경은 없다. 마찬가지로 깨어있을 때의 현량에서도 경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외경이 실유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現量으로써 境界를 결정하며 이 경계는 實在하는 것이지, 결코 前6識의 分別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곧 현량되는 현전의 외계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가행파의 입장에서는 因緣所生의 것은 刹那에 생멸하므로 현량도 찰나에 끝난다. 그러므로 현량된 것의 유무에 대한 생각은 현량되어 없어진 뒤의 妄念에 불과하다. 세친은 보인 것은 다만 꿈과 같으며, 꿈에 본 것에 대해 실유인지 아닌지를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唯識所現이며 似有實無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현량의 경계라고 할지라도 心識을 떠날 수 없으며, 꿈 속의 일체와 같이 識이 變現한 것으로서 識을 떠나 實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論은 제16頌에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상으로 사현하는 식이 있어서,
이것으로 부터 기억을 일으킨다네.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때에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도다. 꿈에서 본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265)
라고 하고 있다. 기억은 결코 實境이 아니며, 꿈을 깨기 전에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外境은 實境이 아니며 識이 變現한 것으로, 이것을 기억할 수 있다하더라도 心外의 실법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本頌의 後2句에서는 衆生이 成佛하지 못했을 때에는 모두가 꿈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꿈에서 본 경계가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없다고 한다.
2 꿈에서의 作業批判
論의 제17頌에서는 增上緣은 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외부 대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더불어 꿈에서 지은 일은 果報가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전전하여 증상하는 세력이 둘의 식이 결정됨을 이룬다.
마음이 수면에 의해서 무너지기 때문에, 꿈과 깸의
과보가 같지 않다네.266)
앞의 두 句는 전전하는 증상력은 善하거나 惡한 他人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自相續 중의 善·惡業의 두 가지 종자가 현행할 때 생기하는 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뒤의 두 句에서는 깨어 있을 때의 心識은 제어할 수 있어 自作이라 할 수 있으므로 業이 되고 果報가 따르지만, 꿈 속에서는 마음이 수면에 의해 損壞되어 理智를 잃어서 자기 스스로 행위할 수 없기 때문에 업이 성립되지 않고 과보도 따를 수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세친은 업의 본질이 思이므로 업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자기일 수 밖에 없고, 꿈 속에서는 의도가 극히 약하므로 업이 성립될 수 없으며, 따라서 과보도 감득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4) 他心智不成難
論의 제20頌에서는 他心智가 如實智가 아님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는 어째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닌가?
자기의 마음을 아는 지혜와 같아서
알지 못하는 것이 부처님의 경계와 같다네.267)
外人이 唯識無境說을 비난하여, 六神通 중 他心通이 있어서 自心을 사용하여 他人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만약 이러한 일이 진실이라면, 타심은 곧 外境이므로 외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일이 사실이 아니라면 他心智는 헛된 것으로서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唯識學派에서는 他心智란 단지 心으로 心을 緣하는 것이며, 心은 본래 虛妄不實하므로 他心을 實境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他心智에서 境이 타심이라고 하지만 타심지는 그 타심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自心內의 허망분별로 인하여 타심이라고 알 뿐이며, 境은 언제나 識을 떠난 경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자기의 마음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며, 그 헤아리지 못함이 중생들이 부처님의 경계를 헤아리지 못함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듯이, 타인의 마음을 여실하게 헤아리는 자도 오직 부처님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5) 無我
論의 제7頌에서는 부처님께서 교화받는 有情을 위해서 密意의 취지로써 12處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제8頌에서는 色 등의 10처는 自種子로 부터 생기한 識이 대상의 모습으로 似現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밀의로써 12처를 설하신 부처님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
제9頌에는
이 가르침에 의지해서 人無我[數取趣無我]에 깨달아 들어간다.
집착되는 法이 無我라는 것은 다시 다른 가르침에 의지해서
깨달아 들어간다.268)
라고 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人無我[我空]에 깨달아 들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오직 식이 현행하여 색법으로 사현하는 것이며, 그래서 색법에는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서 인무아의 이치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한다. 제4句의 '다른 가르침[餘敎]'이란 '唯識無境의 가르침'을 말하며, 이 가르침에 의지해야 法無我의 이치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諸法은 因緣所生으로 實體가 없어 我와 法이 모두 空하며, 그것은 식의 分別을 떠나면 그 근거가 없어져 空無로 되어 버린다. 이와같이 마음밖의 實境을 부정한 것은 그것의 근거가 없음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허망한 것을 중생들은 마음 밖의 그 무엇으로 세우고서는 그것을 實體化하고 그것에 執着한다. 눈 앞의 이 분명한 것들이 찰나 찰나 緣起하고 있는 無常하며 空한 것인 줄 모르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을 꿈에 비유하는 것이며, 또다른 꿈임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하는 한 작용성이 생기므로 다시 그것을 실유하는 것으로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중생들은 業力의 차이에 의해 동일한 경계를 다르게 인식할 수 밖에 없는데,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꿈인데, 또한 깨닫기 전에는 그것이 꿈인 줄 조차도 모른다. 諸法이 연기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無明을 벗어나는 길이며, 그것에 대한 집착을 끊어가는 것이 大自由로 가는 길이다. 無明과 집착은 마음의 문제이므로, 修行도 마음의 문제이다. 이러한 사정을 깨닫게 하는 것이 唯識無境說의 진정한 의도인 것이다. 人無我임을 깨달아 解脫하고 法無我임을 깨달아 菩提를 證得해야 成佛이라는 佛敎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의 要諦는 我法二空觀을 닦아 轉識得智를 성취함에 있다. 그러므로『唯識20論』을 설하는 목적도 바로 여기로 귀결되는 것이며, 그 要旨인 唯識無境說은 중생들을 교화하여 修行으로 인도할려는 하나의 방편적인 法門인 것이다.
2)『唯識30頌』의 組識
『唯識30頌』은 다양한 唯識의 道理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唯識思想을 적극적으로 건립하고 있다. 이 저작은 약 30개의 頌으로 唯識思想의 전체를 요약해 놓은 것으로서, 종래에는 없었던 識轉變說이 보완되고 빈약했던 心所에 대한 설명이 두드러진다. 비록 120句의 單文이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풍부하며, 유식의 體系가 엄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中國 法相宗의 근본 문헌인『成唯識論』은 이『유식30송』을 註釋한 것이다.
『유식30송』의 조직을 살펴보면 『成唯識論述記』제1卷에서는 이것을 나누어 三種의 三科로 보고 있다. 곧 相·性·位로 나눈 것과 初·中·後로 나눈 것 및 境·行·果로 나눈 것이 그것이다.269) 이제 이것을 하나 하나 略述하면 다음과 같다.
(1) 相·性·位의 구분
相·性·位의 三科에 의거하면, 제1頌에서 제24頌까지는 唯識의 相을 밝히고, 제25頌은 유식의 性을 밝히며, 나머지의 다섯 頌은 유식의 位를 밝힌다. 유식의 상을 밝히는 처음의 24송에서는 3종류의 識轉變으로써 8識을 말하고 각 識들의 성질을 善·惡·無記의 三性으로 분별하고 무기를 다시 有覆無記와 無覆無記로 나눈다. 더불어 3가지의 식전변이 止息되거나 없어지는 상태[位]를 말하고 있다. 특히 心所를 遍行·別境·善·煩惱·隨煩惱로 나누어 자세하게 설명하며 여러 頌을 할애하고 있지만, 色法과 不相應行法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3종류의 식전변이 분별이며 분별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것이 唯識이라고 밝힌다. 나아가 알라야識이 모든 種子를 갖는 것이며, 알라야식에 놓인 業習氣에 의해서 미래의 生이 있게 됨을 말하여 알라야식이 輪廻의 主體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중요한 3自性과 3無自性의 사상을 설한다. 대개 번뇌에 묶여 있는 중생은 無始以來로 無明에 덮혀서 唯識無境의 道理를 알지 못하고, 공연히 心外의 實境을 인정해서 實我·實法의 妄執을 일으킨다. 이러한 허망한 執着 때문에 끝없이 生死에 윤회하며 解脫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論主가 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우선 依他起의 識相을 분별해서 모든 것은 因緣所生임을 설하여 허망하게 실아·실법이라는 집착을 일으킬만한 것이 없음을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識相을 분별한다고 할지라도 그 實性이 무엇인지를 了知하지 못하면 진정한 依他起의 취지를 깨달을 수 없다. 곧 眞如를 봐야 緣起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識性인 圓成實의 진여를 밝힌다.270)
遍計所執性은 能取와 所取로 분별된 것이며, 그것의 경계는 相이고 상은 비교된 것으로서 고유하지 않기 때문에 相無性이다. 의타기성은 다른 因과 緣들에 의지하기 때문에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곧 生起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生無性이다. 圓成實性은 依他起性이 변계소집성을 항상 遠離하는 性, 곧 의타기가 그 소취와 능취를 항상 모든 때에 완전히 원리하는 성이며, 의타기를 본성으로 하는 모든 法의 勝義이며 그것들의 法性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無가 自性이기 때문에 勝義無性이다.271)
識相은 世俗諦이고, 識性은 勝義諦이다. 그리고 世俗과 勝義의 二諦를 자세히 말하는 의도는 유정들이 妄執을 끊어서 佛果의 大覺을 이루게 할려고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佛果는 너무나 뛰어난 경지이므로 여기에 도달하려면 3아승지겁의 오랜 기간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마지막 5頌에서 수행의 階位를 설하는 이유이다.272) 다만 여기서는 아직 資糧位·加行位·通達位·修習位·究境位라는 다섯 단계로 명확하게 구별한 형태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뒷 날『成唯識論』에서 제26頌 이하의 5頌은 명백하게 수행의 다섯 단계를 서술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여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이유 때문에 相·性·位의 次第가 있게 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뜻은『성유식론』제9卷에 "이와 같이 설명된 唯識相과 唯識性을 누가 몇 가지 위에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가?"273) 라고 한 것에 의해서 分科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과는 佛道修行의 과정에 배대하여 '유식상과 유식성에서 信解하고 唯識位에서 行證한다'는 차제로 보더라도 아주 체계적인 구분이라고 생각된다.
(2) 初·中·後의 區分
初·中·後의 三科에 의거하면, 첫머리의 1頌半은 初分으로서 識을 떠나서 따로 我와 法이 없는 趣旨를 간략하게 나타내어 보인다. 다음의 23頌半은 中分으로서 널리 唯識의 相과 性을 밝혀서 어려운 것들을 잘 정리하고 해석하였으며, 뒤의 5頌은 後分으로서 유식의 行位를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次第에 의해 初·中·後의 三科로 나눈 것이며, 이러한 뜻은 『成唯識論』제10卷에 "이 논서는 세 分科로 유식의 도리를 성취한다"274)라고 한 것에 의해서 분과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생각컨대 이 분과는 그 나누는 의미가 평이해서 별다른 특색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위의 논의로부터 추측하면 이와 같이 분과할 수도 있기 때문에 또다른 하나의 형식으로서 열거한 것이다.275) 굳이 그 의미를 찾는다면 처음의 1頌半에서 佛敎의 大義인 我와 法은 말 뿐이라는 것[假說한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과,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識 뿐으로서276) 識轉變에 세 가지가 있다는 唯識思想의 근본적 교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특히 강조하여 初分으로 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유식의 相과 性을 묶어서 中分으로 한 점은 명쾌하지 못한 면이 있고, 유식의 行位를 後分으로 따로 한 점도 특별한 구분방법이 되지는 못한다.
(3) 境·行·果의 區分
境·行·果의 三科에 의거하면, 처음의 25頌은 유식의 境을 밝히고, 다음의 4頌은 유식의 行을 밝히며, 마지막의 1頌은 유식의 果를 밝힌 것이라고 한다. 境은 所觀境을 말하며, 수행자들이 관찰하여 깨닫는 대상을 뜻한다. 行은 能觀行을 말하며, 수행자들이 관찰의 대상을 관찰하며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果는 所得果를 말하며, 수행자가 수행한 공덕으로 얻게되는 果報를 뜻한다. 그 과보는 구체적으로 資糧位·加行位·通達位·修習位·究境位의 과보를 뜻하며, 이 가운데 진실한 과보는 구경위의 佛果이다.277) 먼저 관찰의 대상을 觀해서 바야흐로 勝行을 일으키며, 因行을 원만히 해서 究竟의 妙果를 증득해야만 하는 것이다.278) 이러한 分科에 의하면 30頌 中 앞의 24頌의 唯識相과 제25頌의 唯識性이 모두 觀의 對象, 곧 수행의 대상이 된다. 그 중에서도 유식상은 수행을 통해 治斷해야 하는 淨化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알라야識도 相이며 정화해야 될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유식성[眞如]을 觀하게 되는 것이 見道이며, 수행자는 유식성에 悟入한 견도에서 시작하여 修道를 거쳐 불과를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식성도 觀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제26頌에서 제29頌까지는 唯識位의 因行이며, 제30頌에서 구경의 佛果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차제에 의해 경·행·과의 삼과를 나누었다고 하며, 이러한 뜻은 따로『성유식론』上에 文의 根據는 없지만 『瑜伽師地論』이나『攝大乘論』 등의 綱格에 準하면 반드시 이 분과를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279)
이와 같은 境·行·果의 구분은 修行을 중심으로 하여 분과한 것이며, 수행자가 관찰의 대상을 觀하여 智를 얻고 佛果를 證得하게 된다는 교리의 분석은 아주 탁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唯識30頌』은『解深密經』『中邊分別論』『大乘莊嚴經論』『攝大乘論』등 중요한 유식의 저작에서 밝혀진 대체적인 줄거리를 30개의 頌으로 정리한 것으로, 이 30개의 송에는 唯識思想의 전체적인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특히 세친은 처음으로 轉變이라는 개념을 識에 결부시켜 識轉變이라는 唯識思想의 술어로 구성하여 識轉變 思想을 창안하였으며, 心所에 대한 설명도 이전의 唯識論書에서 보다는 훨씬 풍부하게 정리하였다. 그러나『유식30송』에는 『唯識20論』과는 달리 세친 자신의 長行釋이 없으므로, 세친 이후에 이 책에 대하여 10대론사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배출되었다. 현장이 10대 논사들의 해석 중에서 호법의 학설을 정통으로 하고 다른 논사들의 학설을 비판하고 종합해서 번역한 것이『成唯識論』이다. 10대 논사들의 주석의 原本이 없는 오늘날로서는 이『성유식론』이『유식30송』연구의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친의 심식사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우선『성유식론』을 위주로 하면서『大乘成業論』그리고『攝大乘論釋』 등을 통하여 살펴볼 수 밖에 없다. 다음 項부터는 위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하여 세친의 중요한 심식사상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3) 識轉變說의 形成
(1) 識轉變說의 意義
轉變[pari ma]은 문자 그대로 '변화하는 것' 또는 '달라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상키야 학파에서는 이 용어를 근본물질[prak ti]에서 시작하는 우주의 전개라는 의미로 사용한다.280) 세친은 이 용어를 경량부가 業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도입했으며, 이 전변의 개념을 식에 결부시켜 唯識思想의 술어로 그 의미를 새롭게 형성했다. 그러므로 識轉變[vij napari ma]이란 識, 곧 마음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唯識思想에서 논술하는 식전변설은 '마음은 유동적·활동적이며, 내외의 모든 존재는 마음의 변화, 곧 마음의 활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唯識思想의 시각에서 보면, 緣起는 모두 識 內部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識의 轉變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식전변'이라는 술어는 매우 조직적이고 포괄적으로 唯識思想을 서술하고 있는『攝大乘論』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며, 세친이 그의 주저인『唯識30頌』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이다.281) 『유식30송』에서는 이 술어가 5번이나 사용되는 것으로 봐서,『유식30송』의 사상체계 속에서 이 술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 根本佛敎에서 轉變의 意味
根本經典에서는 心意識의 無常함을 설명하는 곳에서 轉變이라는 술어가 보인다. 인간의 마음이 잠시도 쉬지않고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生滅하는 것을 전변이라는 술어로 표현하고 있다.282) 근본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전변, 곧 변화하는 것을 苦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파악한다. 불교가 설하는 苦의 하나에 壞苦가 있다. 壞苦의 '壞'의 산스끄리뜨는 vipari ma이며, 여기에서 접두어 vi-를 생략한 pari ma가 식전변의 '전변'에 해당하는 원어이다. vipari ma와 pari ma는 그 원래의 의미가 '변화하는 것'으로서 서로 다르지 않다. 이 '전변'이라는 개념이 후세에 현상적 존재의 존재형태를 나타내는 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식전변'이라는 고도의 사상으로 까지 발전되는 것이다. 그러나 식전변설은 마음의 구조·존재의 형태를 구명하는 것이 최종의 목적은 아니다. 전변이란 본질적으로는 苦이므로, 식전변은 식의 전변에 의해서 생기는 갖가지의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283) 세친이 식전변설을 통해서 섬세하게 마음의 구조와 현상을 분석하는 것도 정확한 수행의 길을 제시하고 올바른 수행을 촉구하여 해탈을 성취케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2 部派佛敎에서 轉變의 槪念
根本佛敎에서 轉變은 無常과 비슷하게 단지 '변화하는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부파불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변'의 개념에 대해서 깊은 철학적 사색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당시 인도사상계의 풍조를 반영한 것이며, 특히 상키야 학파의 쁘라끄리띠[prak ti]로 부터의 現象轉變說이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생각된다.284)
그러나 부파불교의 논사들은 外道가 설하는 轉變과 佛敎가 설하는 轉變이 내용상 서로 다르다는 것을 해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부파불교는 외도에서 주장하는 永續的 실체개념인 쁘라끄리띠 등을 논파하고, 불교의 無我說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근본불교의 無常槪念에서 변화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분석한 결과로서 '모든 것은 찰나에 생멸한다'는 刹那論이 정립되었다. 부파불교에서는 존재의 찰나성을 논증함으로써 타학파의 실체론적 가정들, 곧 神[ vara]·영혼[ tma]·實體[dravya]·原質[prak ti] 등의 개념을 동시에 논파한다.285) 이와 같이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아설의 입장이며, 상키야 철학 등은 실체론을 주장한다. 따라서 같이 '전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 『大毘婆沙論』제39권에서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보인다.
저들[轉變外道]은 諸行이 상속전변할 때 前位가 소멸되지 않고 전변하여 後位가 된다고 주장한다. 땔나무[薪]가 재[灰]로 되고, 우유가 낙[酪]등으로 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제행이 상속 전변할 때, 前法이 소멸하고 後法이 생겨남으로써 전변이 성립된다고 말한다.286)
이와 같은 서술로 보아 전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두 견해가 내용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전변외도는 전변과정에서도 불변의 실체가 존속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有部의 경우는 無常·無我를 논증하기 위해 轉變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부가 일체법의 상속전변과정에서 찰나생멸론을 주장함으로서 名色[오온]의 동일성 유지문제에는 모순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유부에서 사용한 개념이 三世實有 法體恒有說에서의 '轉變'이었다.287) 그러나 이러한 이론으로써도 無我說은 유지되지만 業力이 어디에 보존되었다가 果報로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고 남는다. 어떻든 전변이 근본불교에서는 '변화'라는 소박한 의미에서 부파불교에 와서는 현상계의 변화원리를 설명하는 철학적 개념으로 深化된 것만은 틀림없다.
(2) 識轉變說 形成의 過程
1『俱舍論』의 相續轉變差別
識轉變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선구가 되는 사상은『俱舍論』의 '相續轉變差別'說이다. 세친은『구사론』에서 경량부가 주장하는 상속전변차별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먼저 경량부의 種子說에 대하여
종자란 무엇인가? 名色이 자신의 과보를 생기할 때 展轉功能과 隣近功能이다. 이것은 상속의 전변차별에 의한다.288)
라고 서술한다. 그리고 毘婆沙師가 無表業을 實有라고 보는 것에 반하여, 무표업을 非實有로 보는 경량부는
그 뒤에 보시를 베푼 사람이 비록 마음이 다르게 반연한다 하더라도,
앞에 보시한 思에 緣하여 熏習된 미세한 상속이
차츰 전변차별되어 생기하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많은 과보를 받게 된다.289)
라고 설한다. 나아가 '無我인데 이미 소멸한 業에서 미래의 果報가 생기는 것은 어째서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논주인 세친은
業相續의 轉變差別에 따르는데, 마치 種子에서 열매가 생기는 것과 같다.290)
라고 대답한다. 살펴본 것처럼 이들의 相續轉變差別이란, 어떤 業力에 의하여 色心[五蘊]에 훈습된 種子가 뒤에 과보를 일으키게 되기까지의 잠재적인 과정 동안의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 과정은 업의 종자가 찰나생멸을 되풀이하면서 존속하고[相續], 종자의 상속이 전후로 찰나찰나 변화하며[轉變], 마침내 종자가 전변의 과정에서 다음 찰나에 과보를 일으킬 수 있는 특수한 힘을 갖게 되는 것[差別]으로 된다.291) 이와 같은『구사론』의 상속전변차별설은 찰나론에 입각하여 근본불교의 무아설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어떤 존재가 상당한 정도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업력의 보존장소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色心互熏說292)은 설득력이 없어서 보존장소의 문제는 해명되지 않고 그대로 남게 된다.
2『大乘成業論』의 相續轉變差別
相續轉變差別[Sa tati-Pari ma-Vi e a]이라는 술어는 그대로의 형태로 혹은 Sa tati를 생략한 Pari ma-Vi e a[전변차별]의 형태로『大乘成業論』과『유식20론』이나『大乘莊嚴經論』의 주석 및『유식30송석』과『中邊分別論釋疏』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앞의 세 저서는『구사론』과 함께 세친의 저술이므로, 그가 경량부의 상속전변차별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견해가 발전하여 '識轉變'의 사상을 산출하게 되는 것이다.293)
상속전변차별의 개념이 唯識思想化되는 것은 먼저『대승성업론』에서 행해지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과보를 얻는가. 상속의 전변차별로 말미암는 것이 마치
벼종자 등이 열매를 얻는 것과 같다.294)
그리고,
다만 思의 차별로 말미암아 그 작용이 마음에 훈습되고 상속으로
하여금 공능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공능의 전변차별 때문에 미래세의
과보가 차별되어 생기는 것이다.295)
라고 하여, 미래세의 과보는 相續[종자]의 전변차별에 의하고, 업력은 마음에 훈습된다고 하여 相續轉變差別의 唯識化가 이루어진다. 또한 業의 본질인 思心所의 차별에 의해 과보의 차별이 생긴다고 하여 因果說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저 識들의 種子가 損伏되어 가는 상태에서는 이숙과식이 찰나찰나에
전변차별되고, …… 이러한 상속의 전변차별로 말미암아 종자력의
성숙함에 따라서, (또는) 助緣의 만남에 따라서 미래의 좋은
과보와 좋지 않은 과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296)
또한,
무릇 훈습이란, 그로 하여금 훈습된 상속의 전변이 공능의 차별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 만약 훈습이 없다면, 전변차별의
공능이 없게 된다.297)
라고 하고 있다.
『구사론』에서는 경량부의 色心互熏說에 근거하여 종자가 훈습되는 장소는 色心[오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대승성업론』에서는 異熟果識 곧 알라야識이 종자를 유지한다는 입장에 근거하여 '알라야識의 相續轉變差別'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했다.298) 여기서의 '相續'이라는 개념은 '心相續'을 의미하며 그것은 알라야식으로서, 이제 '상속의 轉變'을 대신하여 '識[알라야식]의 전변'이라고 불렀다. 한편 '轉變差別'에서 종자를 함유하여 과보를 낳는 특수한 힘은 '功能差別'이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술어화하여, 결국 상속전변차별 중에서 '전변'이라는 말만 남게 되었다. 종자가 보존되는 장소가 알라야식임을 분명히 하고 종자력의 성숙이나 助緣에 따라 미래의 좋거나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여, 불교철학상의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는 '種子生現行·現行熏種子'의 構圖가 이미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3『唯識20論』의 識轉變
살펴본 바와 같이 상속전변차별의 의미는 이미『대승성업론』에서 唯識思想화가 이루어졌으며, 세친은『유식20론』에서 그것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더욱 심화하여 서술했다. 이러한 과정이『유식30송』의 식전변설 형성에 관한 준비단계가 되었다.
먼저『유식20론』에서 식전변설에 관계되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만약 (지옥중생의) 업력에 의해
다른 大種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는
이와 같은 전변을 일으킨다고 인정한다면,
識에 있어서는 어째서 (生起와 轉變을) 인정하지 않는가?299)
業이 다른 곳[알라야식이 아닌 신체상의 어느 곳]에 훈습되고
그 이외의 다른 곳에 과보가 있다고 집착하는구나.
훈습받는 識에 과보[식전변]가 있다고 (하는 유식논사의 주장을)
어떤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가?300)
앞에서 상속전변차별은 마음의 잠재적인 과정을 나타내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경량부는 外界의 현상에 대해서는 轉變이라는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외계의 전변'과 '마음의 전변'의 관계를 처음으로 문제삼은 것이『유식20론』의 위의 제5송과 제6송이다. 이 두 頌은 마음을 떠나서 외계에 사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량부에 대한 세친의 반박이다. 지옥에 떨어진 중생이 옥졸 등에 의하여 핍박의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하여, 經量部는 외계실유설의 입장에서 외계에 실재하는 4대종이 지옥중생의 업에 의하여 특수한 상태로 변화된 것이 옥졸이나 옥졸들의 핍박 등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곧 지옥의 여러 현상들은 외계에 실재하는 '4대종의 전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世親은 위의 두 송에서 唯識無境, 곧 識一元論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지옥의 현상들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의 業習氣[種子]의 결과로서 '識의 轉變'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반론한다.301)
이『유식20론』의 두 송에서 벌써『유식30송』의 제1송과 제17송에 있는 '식전변'과 같은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轉變이 단순히 潛在的인 現象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지각되는 顯在的인 現象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302) 이와 같은 점으로 봐서『유식20론』의 이러한 사유는『구사론』 등의 '상속전변차별'이나『대승성업론』의 '전변'의 개념보다 더욱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唯識30頌』의 識轉變과 그 意味
識轉變은『구사론』이나『대승성업론』『유식20론』 등의 사상적인 전개를 거친 뒤에, 세친이『유식30송』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하여 형성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세친의 唯識思想 성립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식전변의 개념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세친이 식전변설을 창안하여 이 개념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나 그 의도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 시도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 왜냐하면 식전변설은 세친 최후의 저작인『유식30송』에서 처음으로 제창되고, 더구나 그것은 식전변의 개념을 포함한 세 개의 게송 형식으로만 설해지고, 세친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주석을 달아 풀이하지 않고 입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개의 게송에서 식전변설에 대한 세친 자신의 의도와 그 의미내용을 찾아볼 수 밖에 없다.303)
『유식30송』의 서두에 식전변의 개념이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我와 法을 假說함으로써 여러 가지의 모습들이 轉起한다.
그것들은 識이 轉變한 것이며, 이 能變識은 세 종류이다.304)
우리들이 마음을 떠나서 실체적인 것으로 외부에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我와 法은 假說된 것이라고 한다. 가설[upac ra]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개념상에서 임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唯識思想은 오직 識만이존재한다는 근본적인 입장에서, 외부대상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305) 실제로 아와 법에는 실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들은 잘못된 인식작용[顚倒]으로 그것들을 실체시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顚倒夢想을 떠나고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유식무경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에는 세간의 언어습관상 아와 법을 가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친은 아와 법의 가설이 행하여지는 場은 識轉變이라고 파악한다. 아와 법은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개념적으로 가립하는 바의 어떤 장이나 의처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와 법에 관한 가설의 근거가 식전변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식전변에 3종류가 있다고 한다. 제2송 이하의 표현으로 말하면, 첫째로 異熟이며 일체의 種子를 지닌 제8알라야식, 둘째로 思量이며 알라야식을 所緣境으로 하는 제7말나식, 셋째로 外界를 了別하며 6종류로 차별되는 전6식이 바로 그것이다. 유가행유식학파에서는 다시 이것을 세분하여 8종류의 식을 건립한다.306) 유가행파가 아와 법에 관한 가설의 근거로서 식[전변]을 세우는 이유는 반야경의 공사상을 허무주의로 해석하는 오해를 바로잡고 수행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제1송의 이러한 견해는 6식이라는 현재적·표층적인 마음의 과정도 포함된 활동전체를 '전변'이라는 술어로 파악한 것이다. 그점에서 전변을 마음의 잠재적·심층적인 과정으로만 파악한 경량부나『대승성업론』그리고 구체적으로 지각되는 顯在的인 현상까지 전변의 개념에 포함시키기 시작한『유식20론』의 사유보다도 훨씬 발전된 것이다. 세친이 현상적 존재가 생성되는 場으로서의 識의 존재를 보다 명확히 하는 것은 현상계의 모든 상황을 식을 중심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인식론적 측면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식이 전변된 것에 의거하여 아와 법을 假立한 것이므로, 그것은 식을 떠난 實有의 것이 아니다. 세친은 이러한 견해를 제17송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識들이 전변하여 분별하는 것[見分]과 분별되는 것[相分]이 된다.
이것[能分別:견분]과 저것[所分別:상분]은 모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일체는 오직 識일 뿐이다.307)
마음의 활동을 종래는 '분별한다' 곧 '생각한다'라는 일반적 의미로 파악한 것에 반해서, 세친은 감히 그것을 '전변한다' 곧 '변화한다' 라는 특수한 의미로 파악하여 고쳤다.308) 식의 본래 기능을 '분별하는 것' 곧 '대상을 인식하는 것'에다가 세친은 轉變의 개념을 도입하여 '분별되는 것'의 내용까지 부가한 것이다. 그래서 一切가 唯識임이 더욱 분명해졌으며, 根·境의 문제까지 완전하게 識을 근거로 하여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세친이 그가 중요시한 轉變이라는 술어에 分別을 추가한 의도는 무엇일까? 다시한번 제18송의 서술을 검토하여 그 이유를 알아보자.
일체 종자식이 이러이러하게 전변하여 展轉生起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저러저러한 분별이 생긴다.309)
일체의 현상을 생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종자식의 전변, 곧 알라야식의 전변이 설해져 있다. 종자의 전변과정이 다양하게 진행되므로 여러 가지의 현상을 있게 하는 분별작용이 성립된다고 한다. 알라야식은 業果인 종자를 보존하고, 그 종자는 현행될 때까지 거기에서 성숙하고 있는데 그 성숙해가는 과정을 '轉變'이라는 말로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앞의 제17송에서 分別은 識轉變이라고 정의되어 있고, 여기 제18송에서는 알라야識의 轉變과 분별의 상호인과성이 설해져 있으므로, 이 제18송은 내용적으로 알라야식의 전변과 轉識의 전변과의 相互因果性이 의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종자식과 분별이라는 술어의 의미를 통해서 느낄 수 있지만, 세친은 심층적인 심적과정과 표층적인 심적과정의 인과관계 및 양자의 상호적인 인과작용에 근거한 마음의 유기적인 활동을 '전변'이라는 한 마디의 술어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다.310)
그리고 알라야識의 轉變이란 전식의 전변 곧 분별이 원인이 되고, 종자가 미성숙의 상태에서 성숙의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轉識의 전변이란 그 종자의 변화가 원인이 되어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변은 種子의 變化와 전식의 分別과의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진다.311)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요약해보면, 알라야식의 전변은 알라야식 속에서의 변화, 곧 '種子生種子'가 되고, 轉識의 轉變[분별]은 現行에 해당한다. 분별이 종자로 되는 것이 '現行熏種子'이며 종자가 분별로 되는 것이 '種子生現行'이다. 우리들의 식의 활동은 이와같이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無始無終으로 활동하면서 일체의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種子生現行·現行熏種子'의 構圖는 많은 술어나 다양한 논리를 펼치지 않으면서도 앞에서 문제되었던 윤회주체의 문제나 개개 인격의 연속성의 문제나 정신현상의 지속문제나 기억이나 想起의 문제 등을 아주 간단하고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위대한 철학적 구도이다. 세친의 識轉變說의 궁극적인 의도는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하나의 구도로써 이치적·논리적으로 해결하고, 나아가 수행의 가능성의 근거를 해명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4) 八識說의 確立
불교의 구극목적은 해탈인데, 불교는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의 세계로의 질적인 변화는 마음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마음의 과정을 섬세하게 관찰하여 치밀하게 분석한 학파가 바로 瑜伽行唯識學派이다. 瑜伽行唯識學派라는 학파의 명칭에서 '唯識'이라는 술어가 의미하듯이, 현상적인 존재는 모두 識의 活動의 所産이며 識에 의해 개념적으로 인식된 것이므로, 유가행파에서는 모든 현상을 識을 중심으로 하여 설명한다. 유가행파 이전의 불교학파에서는 6識으로써 현상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6식의 구도로써는 현상을 명쾌하게 규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했으며,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논의는 교단분열과 부파불교 형성의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唯識思想도 그때까지 불교를 포함한 인도 사상계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문제점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수행위주의 불교논사들이 그러한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에서 생긴 철학적 결실이었다. 불교철학사에 있어서 이러한 唯識思想이 가지는 의미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듯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근본불교 無我說의 내용을 지키면서 業과 輪廻의 主體로서 알라야識이라는 존재를 설정하여 人格의 連續性을 보장하며 業의 果報 등을 설명할려고 했다는 점이다.312) 곧 무아설과 윤회설이 병립할 수 있는가 하는 難點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알라야식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313) 둘째는 대승불교의 般若空 思想을 잘못 이해하여 虛無主義에 빠지는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空이 성립하는 場으로서 識의 存在를 인정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유가행파는 中觀學派의 진리에 대한 부정적 접근방식[無의 입장]에 만족하지 않고, 空思想은 받아들이면서도 긍정적 접근 방식[有의 입장]으로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을 전개했다. 中觀學派의 空觀에 대해 唯識思想에서는 사물들은 자성이 없이 우리의 마음에 의해 구성되거나 조작된 것으로서 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므로, 存在의 문제를 認識의 문제로 전환하여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唯識思想은 현상적인 존재가 모두 식의 소산, 곧 활동적인 식과 식에 의해 개념적으로 인식된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현상을 식으로 소급하기 위해서는 식의 작용에 따라 다양하게 발생되는 여러 가지의 모습을 설명해내기 위한 이론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유식철학은 식을 여덟가지로 나눈다. 眼識으로 부터 意識까지의 6識과 末那識 및 알라야識이 그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표층에서 심층을 향해서 여덟 가지의 중첩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유식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확립시킨 세친의 唯識思想을 통해 그의 八識說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알라야識說
불교는 삶을 얘기하고, 그래서 日常을 떠나지 않는다. 삶은 身·口·意의 三業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러한 業力에 의해 중생들의 윤회의 세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業의 習氣가 어디에 보존되어 있다가 어떻게 과보를 발생시키고 生死輪廻를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곧 업력의 보존장소와 윤회주체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그래서 몇몇 부파에서는 업력을 보존하면서 윤회를 가능하게 하는 윤회의 주체를 상정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犢子部의 뿌드갈라·化地部의 窮生死蘊·經量部의 細意識 一味蘊 등이 그것이며, 업력의 보존장소에 대해서는 경량부의 色心互熏說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술어들의 주제는 알라야식설의 선구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내용상 불합리하다고도 불충분한 점을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가행파에서는 경량부의 種子說을 받아들여 의미를 새롭게 하고, 종자를 擔持하는 알라야식설을 창안함으로써 한없이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의 간단한 구도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알라야식으로써 그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점들을 합리적이고도 간결하게 해결한다.
1 알라야의 意味
알라야識[ laya-vij na]은 유가행파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술어이다. 그러나 알라야[ laya]라는 말은『숫따니빠다』를 비롯한 몇몇 근본불교의 경전에서 보이며, 주로 '집착'이나 '집착의 대상'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또한『大毘婆沙論』제145권에서 알라야는 '애욕'으로 설명된다. 이처럼 부파불교까지 알라야는 집착·집착의 대상, 곧 우리의 집착작용을 의미했다.314)
laya는 동사 -li에서 유래하는데, 여기에는 본래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집착하다'와 ㉡'저장하다[되다]'라는 의미이다. 알라야는 이 가운데서 ㉠를 취하면 '집착'의 의미가 되고, ㉡를 취하면 '저장'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저장'을 다시 분석하면, ⓐ저장하다 ⓑ저장되다의 두 가지의 의미로 나뉜다. laya識에서 laya를 ⓐⓑ 두 가지의 뜻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성질을 가지므로 알라야식이라고 한다.
ⓐ 어떤 것을 저장하므로 알라야식이다.
ⓑ 어떤 장소에 저장되므로 알라야식이다.
알라야식의 ⓑ의 성질은 그때까지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지만, laya-vij na라는 술어를 처음 만든 사람들은 이 식의 개념에 ⓑ의 성질도 충분히 고려하였다.315) 처음으로 알라야식을 설한『解深密經』에는 이 식이 알라야식으로 불리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또한 알라야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식은 신체에 내재하고 잠재하여 安危를 함께 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316)
알라야식은 신체 속에 내재하고 잠재해 있기 때문에 알라야식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의 유식논사들은 laya를 '잠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신체 속에 잠재하는 근원적인 식을 알라야식이라고 이름붙였다. 알라야식의 laya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앞에서 말한 ⓐ '어떤 것을 저장하는 창고'라는 의미이다. 알라야식은 그 안에 모든 法을 習氣[種子]의 형태로 저장하고 있다. 습기는 과거의 業의 印象이므로, 모든 법의 결과로서 저장되어 있는 것이 된다. 잠재적인 식을 발견한 요가 수행자들은 그것이 마치 종자[습기]를 저장하는 그릇 내지 창고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그런 뜻을 갖는 laya를 붙여서 laya-vij na를 命名하기에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된다.317)
세친도 알라야식의 개념을 받아들일 때 '알라야'를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한 것은 그의 저작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점은 아래에서 밝혀진다.
2 알라야識의 三相
『唯識三十論頌』제2頌의 後 半頌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의 능변식은 알라야식이고
이숙식이며 일체종자식이다.318)
'첫번째'[初]라는 말은 알라야식이 으뜸가는 識體이며 根本識임을 표명하는 것이다. 三相은 제8식에 具有된 自相·果相·因相의 세 가지 측면을 말하며, 頌文에 알라야식·이숙식·일체종자식이라고 열거한 것이 순서대로 그것에 해당한다. 알라야식은 藏識이라고 번역되며, 과거의 경험이나 업력이 보존되는 장소이며, 諸法이 전개되는 바탕이 되는 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異熟識과 一切種子識은 알라야식의 別名이다. 異熟이란 善惡의 業因에 의해서 感得된 有情總報인 無記의 果體를 말한다. 알라야식은 선악의 引業에 招感된 三界·五趣·四生의 異熟의 과체이기 때문에, 異熟이라는 것은 이 識의 果相이다. 과거의 善·不善業의 과보에 의해 이끌리므로 果報識, 또는 그 引業所感의 이숙이기 때문에 異熟識이라고도 하는 것이다.319) 일체종자식이란 前七識의 업의 결과가 알라야식에 종자로서 저장되어, 모든 법을 生起하는 因[種子]이 된다는 의미이므로 이 識의 因相이 된다. 業은 그 영향력을 알라야식 속에 남기는데, 그 남겨진 영향력이 種子이다. 이것은 의식의 영역에서는 직접 지각되지는 않지만, 모든 존재를 발생시키는 가능태로서 심층심리속에 잠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알라야식은 前世의 業의 總報이면서, 일체의 종자를 담지하는 識인 것이다.
3 알라야識의 所緣과 行相
이어지는 제3송에서는 알라야식의 所緣과 行相을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執受와 기세간[處]과 了別作用[了]을 감지하기 어렵도다.320)
執受와 處는 알라야식의 所緣을 가리키고, 了가 行相을 나타낸다. 執受[up di]는 有根身과 種子를 말하며, 處[sth na]는 유정의 所依處인 器世間이다. 執受의 執은 攝持로서 알라야식과 함께 安危를 같이하는 것321)이고, 受는 領覺으로서 알라야식이 능히 覺受를 생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알라야식이 유정의 體로서 능히 그것을 任持하여 자기의 對境으로 삼고 그것에 감각이 생기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有根身은 유정의 色身[신체]을 가리키고, 種子는 일체 有漏三性의 諸法種子를 말한다. 기세간은 山川草木 등의 모든 外界를 가리킨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유정에게 受用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器라 하고, 그러한 세간이므로 器世間 혹은 器世界라고 한다. 그 體는 色·聲·香·味·觸의 五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安危를 共同으로 하거나 能生覺受로 하거나 집수의 뜻이 없기 때문에 외경으로 삼는다. 다만 그것은 心外의 경의 뜻이 아니고 外處存在의 뜻이다. 곧 제8알라야식이 현행할 때 그 親因緣과 增上緣의 힘에 의해서 안으로는 종자 및 유근신을 변현하고 밖으로는 기세간을 변현해서 그것을 所緣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322) 알라야식은 이러한 육체를 유지하는 기능과 本識의 親所緣인 종자·유근신 및 기세간을 변현해서 소연으로 하는 기능이 있다.
그리고 了라는 것은 了別[vij apti]의 의미로, 能緣인 見分의 작용을 말한다. 이것을 行相이라고 하는 것은 능연인 마음[見分]이 소연의 體相[상분]에 작용해서 인식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감지하기 어렵다[不可知]'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알라야식의 所緣과 行相이 미세 또는 廣漠해서 범부의 사려로는 도저히 요지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곧 행상인 緣變의 모양은 지극히 미묘하므로 解了할 수 없으며, 또한 소연 중에서 種子·五根도 매우 은밀하므로 識別할 수가 없다. 所依處인 기세간은 그 量이 광막하여 헤아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연·행상에 관해서 '不可知'라고 말한 것이다.
4 相應하는 心所
제3頌의 제2·3·4句에서는 제8알라야식과 相應하는 心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항상 觸·作意·受·想·思와 相應한다.323)
心所는 相應法이라고도 하며, 心王[識]에 상응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다. 心王이 작용할 때 거기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의 종속적인 마음작용을 심소라고 하며, 唯識思想에서는 51法으로 나눈다. 지금 初能變의 알라야식과 상응하는 심소는 다섯 가지의 遍行心所이다. 이 심소들은 8식의 어떠한 식이 일어나도 반드시 거기에 상응해서 일어나는 종속적인 작용이므로 이러한 명칭을 얻게 되었다.『성유식론』에서는 알라야식은 有漏·無漏의 단계를 不問하고 轉依를 이루기 이전까지 일체의 位에서 항상 5변행심소와 상응한다고 한다.
觸[spar a]이란 心法을 대상[境]으로 향하게 하고 접촉하게 하는 작용을 갖는 심소이며, 그 작용은 根·境·識의 三事가 和合함으로써 생긴다. 나아가 삼사의 화합이 원인이 되어 생긴 결과로서의 촉이 더욱 더 그들 셋을 결합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마음이 대상에 접촉하면 作意·受·想·思의 心所도 生起하기 때문에 觸은 작의·수 등의 心所의 所依가 된다. 곧 촉은 心法과 境의 인식론적 접촉에서 생기하며, 모든 심작용을 생기하게 하는 최초의 심작용이다.
作意[manask ra]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활동시키고, 마음을 어느 일정한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심소이다. 곧 대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볼려고 하는 심작용을 말한다.
受[vedan ]는 所緣의 대상을 苦나 樂 및 捨로 감수[領納]하는 심소이며, 順境에 대해서는 애착을 일으키고 違境에 대해서는 非愛를 일으키는 등의 情的인 마음작용이다.
想[sa j ]은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진 감각적 소재를 통합하여 하나의 表象으로 구체화시키는 心作用이다. 대상의 특수성 내지 특질을 인지하는 知覺作用이며 언어를 발생시키는 지적인 마음작용이다.
思[cetan ]는 대상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마음의 내용을 조작하며, 그것에 의해 善·惡·無記의 구체적인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意志作用이다. 여기서 업이 생겨나고, 이 의지를 통해 행위가 善 혹은 惡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띠게 된다. 唯識思想은 모든 業을 마음으로 환원하는데, 業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 思心所이다.
5 五受에 있어서의 相應
제3송의 제4구는
오직 捨受뿐이다324).
라고 되어 있다. 앞에서 알라야식은 5변행심소와 상응한다고 서술했으므로, 알라야식은 受心所와 항상 상응하는 것이 된다. 受의 心所에는 三受 또는 五受가 있다. 三受는 苦受·樂受·捨[不苦不樂]受이며, 五受는 여기에 憂受와 喜受를 더한 것이다. 五受는 三受에서 苦受를 다시 苦受와 憂受로, 樂受를 다시 樂受와 喜受로 나누고, 여기에 捨受를 더해 다섯 종류로 한 것이다. 五受에서 苦·樂受는 前五識相應의 身受이며 無分別의 감수작용이고, 憂·喜受는 第6意識相應의 心受이며 有分別의 감수작용인 것이다. 그런데 알라야식은 捨受[upek vedan ]하고만 상응한다고 밝히고 있다. 捨受는 苦도 樂도 아닌 감수작용을 말한다.
알라야식의 行相은 지극히 不明了해서 順·違의 境相을 分別할 수는 없지만, 심층적인 마음으로서 매우 미세해서 一類相續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捨受와만 상응한다. 또, 이 識은 眞異熟이므로 相應하는 受도 또한 진이숙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捨受임을 要한다. 또한, 이 識은 일류상속하여 轉易이 없기 때문에 第七識이 執着하여 我見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相應하는 受는 반드시 捨受여야 하는 것이다. 만약 7轉識처럼 전역하는 識이거나 前6識과 같은 異熟生의 識이라면 苦·樂이나 憂·喜의 受와 상응하게 된다.
三性에 있어서의 所屬
제4頌의 제1·2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無覆無記이며, 觸 등도 또한 이와 같다325).
三性이라는 것은 善과 不善[惡]과 無記의 세가지 性類의 의미로서, 法을 종교·도덕적인 성질의 측면에서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無記는 그것이 染인지 不染인지에 따라서 有覆·無覆의 둘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三性의 내용은 네 가지가 되고, 그 중에서 알라야식은 無覆無記性이라는 것이다.
알라야식이 無覆無記이지 않으며 안되는 이유를『성유식론』에서는 세 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즉 첫째로는 알라야식이 異熟性[眞異熟]이기 때문이며, 그 이숙이라는 것은 性類를 달리해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알라야식은 선·악의 업에 이끌린 總報의 果體이므로 무기이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것이 무기가 아니라면, 유정의 流轉과 還滅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요컨대 만일 알라야식이 善이라고 고정되면 유정은 善果만을 끌어당겨 유전하지 않게 되고, 반대로 不善이라면 유정은 染汚의 業만을 지어서 還滅로 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알라야식은 善·染 어떤 쪽에서건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無覆無記라고 한다. 만일 善이거나 惡이라면 善法만을 또는 染法만의 所依가 될 뿐이며, 쌍방의 所依는 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 識은 所熏處이기 때문에 무부무기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곧 알라야식은 前7識에서 三性의 어느쪽의 종자도 훈습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善 또는 染만이라면 다른 性의 것에 대해서는 훈습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게 된다. 훈습이 없다면 알라야식을 근본으로 하는 染·淨의 인과관계도 성립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이유들에 의해 알라야식은 무부부기성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무부라는 것은, 覆는 聖道를 장애하는 染法, 또는 마음을 가려서 부정케한다는 의미이므로 '성도를 장애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326) 알라야식은 이런 점에서 染이 아니며, 뒤에서 설명할 제7말라식이 有覆임에 대해서는 無覆라는 것이다.
다음에 頌文의 '觸等도 또한 이와 같다'라는 것은 알라야식[心王]이 무부무기이기 때문에 상응의 心所도 여기에 따라서 무부무기성이라는 것을 말한다. 觸等[spr dayah]이라는 것은 觸·作意·受·想·思의 심소를 가리킨다. 이들 심소가 심왕에 따르는 것에 대하여『성유식론』에서는 性類뿐만이 아니라, 五義의 例同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곧, 觸等의 심소는 알라야와 같이 ㉠異熟일 것 ㉡所緣·行相이 다 不可知일 것 ㉢種子·五根·器界의 三境을 緣으로 할 것 ㉣다섯의 심소 가운데서 각자를 제외한 다른 四法과 여기에 제 8심왕을 더한 五法에 상응할 것 ㉤무부무기성인 것이 모두 각각의 心所에 대해 例同한다는 의미이다.327)
알라야식의 因果와 비유 및 伏斷의 位次
또, 계속되는 제4송 제3·4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상 流轉하는 것이 폭포수와 같도다.
阿羅漢位에서 버리네.328)
有情으로서의 알라야식이 상속하는 것을 폭포수에 비유한 것으로, 그 相續의 인과가 연기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제8알라야식은 斷滅하는 것도 아니고 常住하는 것도 아니며 항상 유전하는 것에 의하여 상속되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恒[항상]'이라는 것은 非斷의 뜻으로, 그것은 이 식이 무시이래 오로지 상속해서 끊임이 없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알라야식은 三界·五趣·四生의 근본이 되어 상속하며, 또 그 性이 堅住해서 諸法의 種子를 잘 保護維持하여 그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그리고 '轉[流轉]'이란 非常의 의미로, 그것은 이 識이 무시이래로 찰나찰나에 생멸하여 변화하기 때문에 實我와 같이 常一主宰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것은 이 識이 항상 7轉識의 종자를 훈습시키며 변화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非斷·非常의 알라야식의 인과상속의 교설은 알라야식이 유정이라는 존재의 중심주체이면서도 實我와 같이 상일주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폭포수와 같다'는 말은 물의 흐름으로써 제8알라야식의 흐름을 형용한 것으로 알라야식이 常住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서 tman과 다른 성질의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我空觀을 닦아 阿羅漢位에 이르면 分別我執이 끊어지는데, 이 때의 알라야식은 제7말나식이 상응하는 我見에 의해 我라고 집착되지 않으므로, 곧 알라야식의 我愛執藏의 명칭이 제거되므로 아라한위에서 버려진다고 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斷)捨라고 해도 그것은 알라야의 명칭을 버린다는 의미이지 제8식의 體마저 없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알라야는 일체의 雜染法을 잃지 않고 있는 범부와 有學位에서의 명칭이다. 제8식의 여러 가지 異名 가운데 心·阿陀那·所知依·種子識 등의 명칭은 각각 이 식의 특성을 나타내며,329) 이들의 명칭은 凡·聖을 불문하고 일체의 位를 통해서 존속하는 것이다.
제8 알라야識說의 佛敎哲學史上의 意義
알라야식說은 佛敎哲學上에서만이 아니라, 全 印度哲學上에서 쟁점이 되었거나 잘못 이해되었던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한다. 불교철학 특히 部派佛敎에서 많이 論議되었던 業力의 保存·心相續·輪廻의 主體에 관한 문제를 種子說과 함께 合理的으로 해결한다. 부파불교 중에서도 有部는 많은 술어와 다양한 논리를 펴지만, 그들의 교설이 三世實有說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항상 實體論的 思考에 빠질 우려가 크며, 불교의 근본교리인 無常·無我說에 違背될 위험성이 컸다. 그래서 그들은 근본불교의 무상·무아설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刹那滅論을 주장하면서 또한 업력의 果報나 심상속 등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삼세실유설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에 바탕을 두고 문제를 해결하자니 각 경우에 따라 述語와 論理가 雜多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外界實有說에 입각하면서 潛在心의 設定없이 6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어쩔수 없는 限界였다. 大衆部 등은 刹那滅論과 거기에 맞춰 過未無體說을 주장하면서 業力이나 마음이나 生命 등의 持續性 問題를 6識說의 범위내에서 해명할려고 하다보니 그 설명과 내용이 미흡할 수 밖에 없었다. 大衆部의 隨眠說이나 經量部의 種子說 등은 6식설의 한계는 벗어나는 듯 했지만, 그 保存場所에 대한 설명이 理致에 어긋나 버렸다. 業相續에 관한 正量部의 不失法이나 輪廻의 主體로서 想定된 犢子部의 뿌드갈라, 化地部의 窮生死蘊 등도 그 보존장소의 문제 뿐만아니라, 實體論的 思考에 빠질 우려가 크기 때문에 브라만교의 아뜨만說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無心位에서의 심상속에서, 有部처럼 滅盡定을 無心의 상태로 보게 되면 壽·煖·識의 俱有나 心相續의 斷絶 그리고 入定心과 出定心의 상속이라는 存在論的인 問題點이 따르고, 빠알리 上座部나 大衆部나 經量部처럼 멸진정의 有心說을 주장하게 되면 想受滅이라는 멸진정의 기본적인 정의에 위배되어 認識論的인 問題點이 생기게 된다.
위에서 언급된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潛在心으로서 또 업력의 보존장소로서 알라야識을 몰랐고, 그것을 想定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들이다. 알라야識說과 種子說이라면 위의 문제점들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業力의 保存은 種子로써 그 보존장소는 알라야識說로써 해결되고, 心相續은 알라야식 內 종자의 相續으로써 해결되며, 輪廻의 主體는 찰나에 생멸하면서도 업력을 종자상태로 擔持하여 잃지 않으면서 一類相續되는 알라야식으로써 해결된다. 無心位의 문제는 無心位가 現行識의 측면에서는 無心이지만, 단절됨이 없는 알라야식의 측면에서는 有心이므로 論爭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알라야식은 업력을 보존하는 藏識이며, 前世의 업력의 과보에 의해 이끌리는 異熟識이며, 업력이 종자로 저장되어 있다가 모든 法을 生起하는 一切種子識인 것이다. 또한 제8識은 생명을 유지하는 阿陀那識이며, 모든 無漏法의 의지처인 無垢識으로서 범부에게 成佛의 가능성까지 나타내 보이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 識이다. 이와같이 제8 알라야識說은 哲學上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는 위대한 敎說인 것이다.
(2) 末那識說
苦는 貪欲이나 無明에서 온다. 탐욕의 원인은 執着이며, 집착에는 我執과 法執이 있고, 아집에서 煩惱障이 생기고, 법집에서 所知障이 잃어난다. 그러므로 수행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집착이며, 그 중에서도 아집은 크게 수행에 障碍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에 가장 장애가 되는 근원적인 번뇌로서의 아집의 근원은 무엇일까? 唯識思想에서는 제6意識 너머에 그보다 더욱 深層的인 아집의 근원으로서 末那識을 발견하였으며, 世親은 그것을 合理的인 理致에 의하여 제7識으로 설정하였다. 아집의 번뇌장과 법집의 소지장도 모두 이 말나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세친의 末那識說을 중심으로 하여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1 末那識說이 성립된 動機
말나식은 의식 속에서 작용하는 심층심리이며 자아의식이다. 물론 唯識思想 이전에는 이 식의 존재가 거론되지 않았으며,『해심밀경』등 초기의 유식경론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末那識說은 알라야식을 발견한 뒤에 유가행파에 의해 점차 다듬어졌다. 말나식을 생각하게 된 사상사적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현실생활의 심적행위를 관찰할 때, 의식의 안쪽에서 활동하는 자아의 식을 상정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몇 가지 있다는 체험
㉡ 발생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의식이 생기게 되는 기관[意根]이 존재 해햐 한다는 인식
이 그것들이다.330) 무시이래로 중생들은 진리에 미혹하여 현상의 도리를 모르고서 허망하게 고통스러운 삶을 반복하고 있다. 唯識思想은 그런 無知의 근원적인 작용을 말나식이라는 심층심리의 영역에서 찾는다. 그리고 무지에서 비롯된 자아의식[我見·我慢·我愛]이 의식 속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행위는 자아의식을 띤 오염된 행위[有漏業]로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유가행파는 우리의 무지몽매성과 고통스러운 존재성의 원인을 내면에서 추구하여, 그것이 의식 영역 밑에서 활동하는 말나식의 자아집착작용임을 발견했던 것이다.331)
말나식설이 성립된 또 하나의 사상적인 동기는 제6의식이 생겨나게 하는 기관, 곧 意根이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안식 내지 신식의 오식은 안근 내지 신근의 감각기관을 가지며, 오식의 기관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이다. 그러나 의식의 감각기관인 意根은 無色根, 곧 비물질적인 것으로 생각된다.332)
설일체유부 등에서는 의근을 無間滅意라고 생각했다. 무간멸의는 현상적으로 지금 이 순간 작용한 안식 내지 의식의 6식이 다음 순간 과거로 소멸해버린 것을 가리킨다. 이 소멸한 의근이 현재의 의식과 전5식을 이끌어 낸다고 생각한다. 유가행파는 부파불교에서 말한 무간멸의와는 다른 染汚意를 수립했는데, 이것이 말나식에 해당한다.『섭대승론』에서 처음으로 意[manas]에는 무간멸의와 염오의의 두 가지가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유가행파는 意에 본래의 '思量'의 의미를 되살리면서 '染汚'·'雜染'의 색채를 덧붙였다. 이런 배경에는 부파불교까지 동의어로 간주된 심·의·식을 心은 알라야識, 意는 염오의[말나식], 識은 6識으로서 전부 여덟 가지의 식이 존재한다는 八識說을 확립하려는 의향도 크게 작용했다.333)
2 말나식의 의미
末那識에서 말나의 산스끄리뜨는 manas로서, √man[생각하다]의 명사형이다. 이것은 思量으로 번역되듯이, 일반적으로 대상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런데 제6의식을 mano-vij na라고 하여 똑같이 manas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제6의식과 구별하여 보통 말나·말나식·제7 말나(식) 또는 단지 意라고 한다.334)
3 末那識의 所依와 所緣
제5송의 제3구는 말나식의 所依와 所緣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것[알라야식]에 의지[依]해서 유전[轉]하고,
그것을 반연한다.335)
'依[의지]'라는 것은 依止의 뜻이며, '轉[유전]'이라는 것은 流轉의 뜻으로 相續轉起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彼]은 제8알라야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제7말나식은 제8알라야식을 의지해서 상속전기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반연한다[緣彼]'는 것은 彼[그것]가 제8식을 가리키므로 말나식이 제8알라야식을 所緣의 境으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識은 제8식의 見分만을 緣하고 다른 것을 연하지는 않는다.
말나식은 알라야식을 근거로 하여 생기하며, 알라야식 중의 自種子가 전변하여 성립한 식이다. 말나식은 알라야식의 견분을 자아로 잘못 생각하고 자아의식을 일으켜 집착한다. 말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은 제6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처럼 명료하거나 강하지는 않지만, 계속 활동하고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멈추기가 어려운 것이다.
4 末那識의 體性과 行相
제5송의 제4구는 말나식의 自性과 行相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사량하는 것을 자성과 행상으로 삼는다.336)
말나식이 다른 7식과 구별되는 특징 중의 하나가 '항상 살피고 헤아린다[恒審思量]'는 것이다. 思量의 원어 manas는 '생각하다'라는 동사 √man의 명사형으로, 보통 '意'로 번역된다. 근본불교 이래 心과 意와 識은 동의어로 간주되어 왔으나, 유가행파에서는 이 중에서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意[思量]에 주목하여 이 용어로써 심층적인 自我執着心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항상 살피고 헤아린다'는 것은 생사윤회하는 한 항상 끊임없이 깊고 명확하게 알라야식의 견분을 대상으로 하여 自我라고 잘못 생각하면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알라야식의 인식활동은 미세하고 분별이 없으며 저절로 행해지는 데 반하여, 말나식은 알라야식을 명확한 대상으로 해서 깊고 강하게 인식한다. 그리고 제6의식은 無心位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지만, 제6의식의 배후에 있는 이 識은 항상 활동하고 있는 자아집착심이므로 소멸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이와같이 말나식은 제8알라야식을 의지해서 流轉하고, 그것을 所緣境으로 삼아 恒審思量하는 심층심리이다. 알라야식은 항상하지만 審察하지 않으며, 제6의식은 심찰하지만 항상하지 않고, 前五識은 恒常하지도 심찰하지도 않는다. 오직 제7말나식만이 항상하면서 심찰하므로 이것이 다른 식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그리하여 말나식은 알라야식의 견분을 恒審思量하여 이것을 我의 本體라고 여기며, 4가지의 근본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5 末那識과 相應하는 心所
제6송은 말나식과 상응하는 심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하나니
아치와 아견과 아만과 아애이며,
및 다른 촉 등과도 함께 한다.337)
말나식은 5변행심소와 함께 활동하며, 뒤이어 我癡·我見·我慢·我愛의 4번뇌가 부수하여 일어난다. 我癡[ tmamoha]는 無明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自我에 대한 無知 곧 無我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무명은 근본불교 이래 四聖諦·緣起의 道理에 무지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유가행파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에 서지만, 무명 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했으며, 세친은 무명 대신에 我癡라는 술어로 바꿔 사용하였다. 我見[ tmad i]은 自我[ tman]가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이며, 薩迦耶見[satk ya-d i]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제6의식과 함께 활동하는 살가야견은 五趣蘊을 집착해서 我와 我所로 삼는 것이지만, 제7말나식과 함께 작용하는 살가야견의 대상은 알라야식이다. 말나식은 심층심리로서 근원적인 자아의식인데, 이 자아의식의 중심적인 기능이 바로 我見이다. 我慢[ tmam na]이란 我見에 의해서 설정된 자아를 의지처로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게 뽐내는 惡한 심작용이다. 六識에 동반하는 심소로서의 我慢은 오취온에 대해 我·我所로 집착해서 교만한 것이지만, 유가행파에서는 말나식에 동반하는 아만을 따로 세워서 네 가지의 근본번뇌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자아로 대상화되는 것은 알라야식이며, 그렇게 자아로 인식된 것에 근거하여 자아가 존재한다는 교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我愛[ tmasneha]란 자아에 대한 애착심이다. 아애는 일상생활에서도 갖가지 고뇌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며, 인간의 가장 원초적 고뇌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근본원인이라는 점에서 부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애를 없애지 않는 한 생사윤회의 苦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338)
말나식과 상응하는 4종의 근본번뇌는 아치·아견·아만·아애이다. 그리고 觸 등의 5변행심소와 8大 隨煩惱와 別境의 5심소 중에서 慧 등은 모두 말나식과 상응한다. 이 慧는 所觀境에 대해서 간택하는 능력이고, 三性에 통하는 것이며, 결코 出世間의 無漏慧는 아니다. 제7말나식과 상응하는 심소는 총 18가지가 된다.
말나식에 상응하는 심소는 네 가지의 번뇌만이 아니고, 觸 등의 변행심소도 당연히 작용한다. 그리고 '다른 촉 등'이라고 한 것은 알라야식에 상응하는 5변행심소와 말나식에 상응하는 5변행심소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알라야식의 5변행심소는 無覆無記인데 반하여, 말나식의 그것은 有覆無記이기 때문이다.
三性에 있어서의 所屬
제7송의 제1구는
유부무기에 포함된다.339)
라고 하여, 말나식의 三性에 있어서의 所屬을 아주 간단하게 有覆無記라고 규정한다. 제6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은 선·악의 心所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선·악·무기의 세 가지 경우가 모두 있다. 그러나 말나식은 그 識의 활동이 미세하므로, 비록 我癡 등의 4번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不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有覆는 번뇌로 덮혀 있어 聖道를 장애한다는 의미이며, 이처럼 말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은 染汚이지만 그 활동이 미세하므로 불선이라고도 보기 어렵기 때문에 無記이다.
말나식은 제6의식의 배후에 있으며, 사량에 의해 끊임없이 자아의식을 구성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더러워져 있지만, 善으로도 惡으로도 기별되지 않는 유부무기성의 識인 것이다.
三界에 있어서의 繫屬
제7송의 제2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어난 곳[所生]에 따라서 매인다[隨…所繫].340)
'所生[태어난 곳]'이란 第8識의 所生으로서 유정이 生하는 곳이며, 三界九地의 어느 곳을 말한다. 이 제8식의 소생에 따라서 그 界地에 매이게 되기 때문에 '隨…所繫[∼에 따라서 매인다]'라고 말한다. '繫[매인다]'라는 것은 繫屬·繫縛의 의미로서 그 界地에 매이게 되는 것을 뜻한다. 계박이라는 것은 태어난 곳의 4煩惱에 매어진 것을 말하므로, 말나식은 所繫이고 4번뇌는 能繫이다. 대개 말나식은 항상 自地의 제8식을 緣해서 我執을 일으키고, 결코 他地의 것을 緣해서 計執하지 않기 때문에 소생의 제8식에 繫屬하고 근본번뇌에 繫縛되어 지는 것이다.341)
末那識의 滅位
제7頌의 제3·4句는 末那識의 滅位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서는 (말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342)
제7송의 제3·4구는 말나식이 소멸하는 位次를 말하고 있다. 阿羅漢과 滅盡定과 出世道에서는 말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나식은 有覆無記性이다. 말나식 그 자체는 비록 善·惡業을 지을 수 없어 惡性에는 속하지 않으므로 無記이지만, 我를 집착하는 까닭에 4根本煩惱와 8大隨煩惱가 상응하여 일어나므로 有覆이다. 이 染汚의 말나식은 天 내지 지옥의 유정들 모두에게 있어서 어디서나 사량하고 我執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阿羅漢位에 이르거나 滅盡定에 들어가거나, 出世道를 얻을 때에는 없어지게 된다. 깨달음을 얻어 我執이 소멸하면, 말나식은 平等性智로 轉化하게 되는 것이다.
末那識의 意義
우리는 매일 자기의 신체를 바라보고 신체를 통해 다양하게 감각을 경험하며 자기의 마음작용도 느낀다. 그래서 이러한 신체와 마음을 가진 자기가 현재 여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억을 통해 어제의 자기와 오늘의 자기는 동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사실에 대해 秋毫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이 되풀이 되면서 자기를 實體視하게 되고, 그러한 자기에게 무섭게 執着하면서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습관화되어 극단적인 利己主義로 흘러간다. 그렇게 되면 중생들 사이에 貪欲의 충돌로 인해 疎外와 葛藤과 鬪爭이 있게 되고, 탐욕의 충족을 위해 自然과 人性의 파괴로 이어져 걷잡을 수 없이 苦에 세계를 끝없이 輪廻하게 된다. 이러한 윤회의 근본원인은 無明[我癡]이며, 唯識思想은 무명의 근거를 我執에서 찾고서 심층적인 아집의 근원으로서 末那識을 발견하였고, 世親은 이것을 제7識으로 확정하였다. 말나식은 알라야識의 見分을 所緣으로 하여 我癡 등 4가지의 根本煩惱를 일으킨다. 그리고 我執은 항상 法執에 의존하므로, 아집이 있을때는 반드시 법집이 함께 한다. 따라서 아집과 법집의 근본원인은 末那識인 것이다. 말나식에 의해 발생된 아·법집은 前6識에 영향을 주어 枝末煩惱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번뇌로 인해서 행해진 業은 종자로 훈습되고 알라야식에 보관되어 또다른 번뇌행을 현행함으로써 끝없는 윤회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번뇌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衆生의 利己心과 自然破壞의 根源이 바로 末那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修行의 어려움의 根據도 말나식이 미세한 잠재심인 점에 있으므로, 그 근거를 알게 되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확실한 수행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이러한 말나식의 발견은 唯識思想의 대단히 위대한 業績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3) 六識說
眼識 등의 前6식은 근본불교 이래 언급되어 온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제8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음 제3능변은 구별하여 여섯 종류가 있으며,
대상을 요별하는 것을 자성과 행상으로 삼는다.
善과 不善과 둘이 아닌 것[無記]이다.343)
前6識은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前5識과 第6意識이다. 전5식은 감각적 인식이며, 그 所緣[인식대상]은 각각 색·성·향·미·촉의 5境[5處]으로 고유의 인식대상을 갖는다. 제6의식은 모든 존재[一切法]를 인식대상으로 하는데, 안식 내지 신식의 대상은 물론 과거나 미래의 事象도 대상으로 할 수 가 있다. 제6의식에는 감각적 인식과 동시에 활동하고 이 결과를 인식하는 것[五俱意識]과 의식만이 단독으로 활동하는 경우[獨頭意識]가 있다. 了別이란 판단, 곧 識의 作用을 말한다. 알라야식이건 말나식이건 識인 이상, 요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알라야식과 말나식은 일상의 의식으로는 지각되지 않는 미세한 심층심리이지만, 대상을 판단하는 전6식의 작용은 미세하지도 않고 대략적이기 때문에, 전6식의 작용을 특별히 了別境轉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특히 제6의식은 외계의 個物을 실체적으로 구상하여 '法執'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대상은 전5식의 相分인 색·성·향·미·촉의 5境이다. 이들을 소재로 해서 다시 槪念을 적용하여 산천초목 등의 '個物'을 구상하고서는 무엇인가 마음 밖에 실체적인 것이 있다고 執着하는 것이다. 法執에는 俱生起와 分別起의 두 종류의 구별344)이 있다.345)
또, 의식은 알라야식이나 말나식을 대상으로 하여 自心의 相을 일으키고, 實我의 見을 일으킨다. 또한 신체를 자아로 보거나 마음을 자아로 본다. 이 두 가지 我執은 미세하며, 任運轉하기 때문에 끊기 어렵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자아의식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에 '俱生起의 我執'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아의식에는 이밖에 잘못된 교리나 사색에 의해 생기는 것이 있다. 그릇된 스승이나 서적을 통해 다른 학파의 잘못된 교리를 배운다거나 혹은 논리적 사색에 기초하여 '실체적 자아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여 實我의 見을 일으킨다. 이 아집은 후천적으로 일으킨 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分別起의 我執'이라고 한다. 이러한 아집은 잊고 있을 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有間斷'이라고 하며, 緣起의 道理를 알면 곧바로 제거된다. 그러나 구생기의 아집은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끊기가 어려우며, 無我觀을 반복해서 닦아 깨달음의 지혜가 생긴 후에야 비로소 끊어진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我와 法이 모두 제6의식의 所緣이다.346) 이처럼 제6의식은 法境을 認識·追理·追想하는 마음으로서 삼세의 일체법에 대해서 작용하는 廣緣의 識인 것이다.
마음의 가치적 분류에 있어서 前5識은 감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선·악의 구별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五俱意識과 동시에 활동하기 때문에, 그것에 염오되어 전5식도 선·악·무기의 三性으로 활동하게 된다.
다음,『唯識30頌』에서 이어지는 제9·10·11·12·13·14송은 모두 전6식과 상응하는 심소에 관한 것이므로 간단하게 요약하여 정리하기 한다.
6식과 함께 활동하는 心所法은 51종이다. 이것을 6종으로 나눈어 '6位의 심소'라고 한다. 제1은 受 등의 5변행의 심소이다. 이중 受는 苦受·樂受·不苦不樂受의 3종이 모두 있다. 이것은 6식의 작용이 미세하지 않고 대략적이기 때문이다. 알라야식이나 말나식은 不苦不樂수[捨受]뿐이다. 제2는 別境의 심소로서 5종이 있다. 이것은 欲·勝解·念·定·慧이다. 다음으로 善의 심소가 11종이 있다. 이들 善의 심소가 심왕과 함께 활동할 때 마음은 善性이 된다. 선의 심소는 信·慙·愧·無貪·無瞋·無癡·勤·輕安·不放逸·行捨·不害 이다. 제4는 번뇌의 심소로 6종이 있다. 곧 貪·瞋·癡·慢·疑·(惡)見이다. 제5는 隨煩惱 20종이다. 忿·恨·覆·惱·嫉· · ·諂· ·害 ·無 ·無愧· 沈·掉擧·不信·懈怠·放逸·失念·散亂·不正知이다. 제6은 不定의 심소 4종으로서, 惡作[追悔]·睡眠·尋·伺 이다. 이상의 6위의 심소는『성유식론』에는 분명히 설해져 있지만, 『유식30송』에는 不定의 심소가 수번뇌와 한꺼번에 설해져 있으며, '6위'라는 말도 없다. 여하튼 번뇌·수번뇌 등이 심왕과 함께 활동할 때 마음은 惡性이 되는 것이다.347)
이상이 6식의 行相이다. 전5식은 알라야식에서 緣에 따라 생기하기 때문에, 항상 있다고는 할 수 없는 有間斷의 識이다. 意識은 無想定·無想果·滅盡定·極睡眠·極悶絶 나아가 極催眠·極痲醉 등에서는 단절하지만, 그 이외의 경우에는 항상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인식세계는 알라야식·말나식·전6식의 중층구조에서 성립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8식의 인식대상[所緣] 및 主觀도 모두 알라야식의 종자가 轉變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의 인식의 세계를 '唯識[vij aptim tra]'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唯識은 개개인의 唯識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外界의 他人을 인정하는 것이며, 唯識思想은 修行을 전제로 하는 것으므로 결코 觀念論이 아닌 것이다.
5) 三性說
三性說은『解深密經』이래 유식의 사상체계에서 中道思想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것으로서 아주 중요한 교리中의 하나이다. 이것은 '존재의 형태'를 3종류로 분석한 것으로서,『해심밀경』에 처음 나오며, 그후 거의 모든 唯識論書에서 언급되고 차츰 사상적으로도 발전하였다. 그 3종류란 遍計所執性[parikalpita-svabh va]·依他起性[paratantra-svabh va]·圓成實性[parini panna-svabh va]을 말한다.348) '존재형태'의 譯語에 해당되는 svabh va는 '고유의 성질'·'본성'을 의미하는 말로서, '自性'으로 한역된다. 龍樹는『中論』기타의 저술에서, 존재요소가 변하지 않는 本性을 지니고 있다는 說一切有部의 학설을 철저히 비판하여, 실재는 '본성을 갖지 않는[ni svabh va]' 것인 '無自性'이고, 空인 것을 밝혔다. 瑜伽行派의 교설에서 3종류의 '존재형태'는 각각 자기의 동일적인 본성을 가지고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유일한 실재가,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관련방식에 따라서 나타난 것이다. 실재는 그것과의 관련방식에 따라서 이 3종류의 어느 것인가의 존재형태를 취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3종류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3종류의 존재형태는 어느것이나 존재의 본질로서는 '無本性[ni svabh va]'이므로 三無性說이 설해진다.349) 이러한 三性·三無性說은 實踐修行과 內的으로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교설이므로, 그 역사적 흐름과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한다.
(1) 二諦說과 三性說
三性說은 유가행파의 독특한 학설로 이해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中論』의 勝義諦와 世俗諦의 구별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緣起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점은 불교가 밝힌 불변의 진리이다. 그래서 대승불교, 특히『般若經』이래 中觀派의 교리에서는 일체의 법이 無自性·空이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그러한 법이 本質·本性, 곧 無自性이요 空이라는 성질을 法性이라 하여 法과는 구별하여 표현하기도 하였다. 法性은 어디까지나 法의 體性이므로 법과 다른 것은 아니지만, 법을 법답게 하는 본질로서 단순한 법과는 구별되는 바를 발견했던 것이다.350)
一切法이 空이며 無自性이라고 간주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존재는 言語에 의해 표현된 것이지만, 그 언어활동이 이루어지는 場에 있어서 언어에 대응하는 대상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가 緣起의 道理에 의해서 성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반야경』이래의 '法은 自性이 없고 空이다'라는 설명은 명칭에 의해 세워진 것[名言所立]이나 여러 가지의 緣에 의해서 생겨난 것[衆緣所生]이나 다같이 無自性임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法과 法性, 世俗諦와 勝義諦라는 두 가지 관점만으로 충분하게 된다.351)
그러나 中觀으로부터 유식으로 진행되는 과도기에『瑜伽師地論』「本地分」菩薩地의〈眞實義品〉에서 언급되는 하나의 비판이 있다. 그것은 惡取空에 대한 비판이며, 거기서는 악취공에 반대되는 善取空도 언급된다. 악취공에서는 '일체의 법은 무자성이다'고 말하는 경전 등의 표현을 '일체는 無이다'고 이해하여 虛無主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선취공에서는 거기서 '無'라는 말로써 부정되는 것은 言語에 의해서 파악된 것에 대해서일 뿐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언어는 반드시 무언가에 의거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 언어가 의거하는 바로서의 사건이나 사물은 絶對無[虛無]인 것은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명칭에 의해 세워진 것과 명칭이 의거하는 것이라는 구별이 있다. 이른바 名言所立과 名言所依의 구별이다.
언어를 통해 갖추어 드러내는 것을 假說이라 하면서, 가설된 것과 가설의 근거가 되는 것을 구별한다. 물론 그 가설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의 사물·사건은 실체로서 있을 수 없으며, 극미로서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무언가의 사물이나 사건이 없다면, 거기에 언어를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가설된 것과 가설의 근거가 되는 것은 존재론의 입장에서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다. 가설된 것은 실은 완전히 無[絶對無]라고 말해도 좋지만, 가설의 근거가 되는 것은 실체적인 것은 아니지만[非有], 무언가 다른 의미에서 현상적 세계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非無]이다[相對無]. 이처럼 일체의 법이 무자성이라 할 때, 그 무자성에 있어서의 두 가지 존재론적 구별이 唯識哲學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2諦로부터 3性으로 나아가는 前提이며, 이로부터 3종류의 존재형태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일체의 법이 무자성이라 할 때의 무자성을 둘로 나누는 觀點은 오로지 언어작용에 대한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三性說에 있어서는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352)
가설된 것은 遍計所執性이며, 가설의 근거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의 緣에 의해서 생겨난 依他起性이다. 2제설에서 世俗諦의 분석이 변계소집과 의타기성의 두 가지로 나뉘고, 그 의미가 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3성설은 識說과 관련되면서 존재형태의 분석이 더욱 명확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2) 世親 以前의 三性說
遍計所執性의 원어는 parikalpita-svabh va이며, '보편적인 분별에 의해 분별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parikalpita라는 말은 수동을 표시하는 과거분사이므로 '所'를 붙여 번역한 것이 原義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依他起性의 원어는 paratantra-svabh va이며,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의타기성이라고 번역할 때, '起'에 해당하는 말이 산스끄리뜨에는 없지만, 그것은 生滅의 世界에 있는 것, 곧 有爲法을 가리키므로 起라는 말을 붙이더라도 잘못은 아니며 오히려 그 원래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圓成實性의 원어는 parini panna-svabh va이며, '이미 완전하게 성취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panna는 과거완료를 표시하는 말이므로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것이 본래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미완성이지만 앞으로 완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시이래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원성실성이다.353)
그런데 이 삼성설은 유식계통의 다양한 경전이나 논서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설해져 있으며, 표면상으로는 반드시 일치하고 있지는 않다. 이 때문에 삼성설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생겨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다양해 보이는 삼성설도 의미상 일관되는 면이 있을 것이므로, 그 측면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적으로 해석해 보도록 하겠다.
1『解深密經』과『瑜伽師地論』의 三性說
우선 삼성설을 처음으로 제창한『해심밀경』과 그 흐름을 따른『유가사지론』에서 설하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354)
遍計所執性 ------ 명칭에 의해 세워진 것[名言所立]
依他起性 ------ 여러 가지 因緣에 의해 생긴 것[衆緣所生]
圓成實性 ------ 있는 그대로의 참된 실재[眞如]
遍計所執性이란 명칭에 의해 세워진 것을 말한다. '명칭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는 표현은, 사물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명칭을 어떤 대상에 부여하여 그것의 존재를 지각하는,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 대상이 마음을 떠나서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명칭에 의해 인식되고, 더구나 마음과는 다른 독립된 존재물이라고 생각되는 사물이 변계소집성[분별된 존재형태]이다.
依他起性이란 여러 가지의 因과 緣에 의해 생긴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인연소생의 법'이라 불리웠던 것으로 유위법에 해당한다. 유가행유식학파에서는 그때까지 사용된 '인연소생의 법'을 특히 의타기성[다른 것에 의존하는 존재형태]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因과 緣에 의해 생긴 것은 현상적 존재, 곧 유위법을 가리키는데, 유가행파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을 모두 識으로 환원하는 입장에서 유위법은 '식'에 해당된다. 그러나『해심밀경』이나『유가사지론』에서는 아직 의타기성이 '식'이라고까지는 말해지고 있지 않다.
圓成實性이란 있는 그대로의 실재[진여]를 말한다. 眞如의 원어 tathat 는 '그와 같이'라는 부사 tath 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어 -t 를 붙여 이루어진 말로 그 원뜻은 '그와 같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眞如란 '스스로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情的으로든 知的으로든 業力에 염오되어 있어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그 염오의 상태를 유가행을 통해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 결국 전혀 염오되지 않은 마음에 의해 보여진 사물의 참모습, 그것이 바로 진여이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 한단계 한단계 완성된 곳으로 접근해 간다. 종국적으로 당도한 곳, 곧 완성된 것이 진여이기 때문에 이 진여를 원성실성[완성된 존재형태]이라 부른다.355) 찰나멸하면서도 상속하는 8識의 세계가 依他起性이며, 거기에 대해 意識이 言語를 통해 그것을 實體化하고 執着하면 그렇게 실체시 되고 집착된 세계가 遍計所執性이다. 그런데 의타기성의 세계는 緣起속에 있는 無自性·空의 것이고, 存在가 空이라는 그 존재의 本質이 法性이고 空性이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眞如이고 그 진여가 바로 圓成實性이다.
2 彌勒의 三性說
『解深密經』과『瑜伽師地論』의 견해는 이후 三(自)性說의 기조를 이루며, 그 받아들이는 방식과 표현 방식에서 점차 사상적인 발전이 있게 된다. 미륵의 저작으로 알려진『中邊分別論』에서는 三性이 다음과 같이 파악되고 있다.356)
遍計所執性……경[境]
依他起性……허망분별[虛妄分別]
圓成實性……소취[所取]·능취[能取]가 없음
『중변분별론』에서는 三性이 우선 인식적 관계로서 간결하게 정의되고 있다. 境[artha]이란 인식대상이나 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명칭이나 말이라는 개념은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경이란 외계에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대상이며, 구체적으로는 所取와 能取를 말한다. 이것을 遍計所執性으로 보았다.
소취[gr hya]는 '인식되는 것', 능취[gr haka]는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곧 우리는 현상적 존재를 명칭이나 말로써 크게 '객관'과 '주관'으로 나눈다. 예를 들면 '나는 책상을 본다'라고 하는 경우, 거기에 책상이라는 객관과 나라고 하는 주관이 설정되고 그 두 가지는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실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그릇되게 사고하는 것을 '허망분별'이라고 하며, 그것을 依他起性에 배분한다.
『해심밀경』이나『유가사지론』에서 단순히 因緣所生의 法을 依他起性이라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진일보하여, '일체는 오직 識일 뿐이다'고 하는 '唯識'說을 강하게 밀고나가, 현상적 존재를 모두 識으로 환원하는 입장에 서서, 의타기성을 허망분별[abh ta-parikalpa]로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세친도 이 견해를 계승하여 依他起性은 分別[vikalpa]이라고 정의한다.
圓成實性은 소취·능취라는 새로운 개념을 써서 정의하는데, 이것이 바로『중변분별론』의 특징이다. 여기서는 '소취·능취가 없음'이라고 하듯이 부정적으로밖에 표현되고 있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 空性은 '소취·능취의 無'와 '無의 有'라고 하는 두 가지 면을 갖춘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원성실성과 공성은 동일한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원성실성도 역시 '無의 有'라는 측면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의 유'라는 사고는 彌勒의 저작으로 알려진『大乘莊嚴經論』『中邊分別論』에서 강조되기 시작하여 無着과 世親 등에게도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사고이다. 유식의 空觀은 낮은 차원의 존재성을 부정함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성을 가진 존재를 窮究하는 觀法이다. 그러한 부정을 반복하여 결국에는 아무것도 부정할 것이 없게 되는 경우에 나타나는 절대적 긍정이 있게 된다. 이것을 '무의 유'라고 간결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357)
彌勒의 三性說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主·客으로 分別하는 인식이 依他起性이고, 그 주관과 객관이 識을 떠나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遍計所執性이며, 그러한 주·객의 분별이 없는 無分別의 세계가 圓成實性이라는 것이다. 변계소집의 境은 인식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므로 唯識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의타기의 識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能·所取로서는 있지 않지만, 空性으로서 있는 唯識性의 세계가 원성실성인 것이다.
3 無着의 三性說
무착은 그의 주요저서『攝大乘論』에서 三性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358)
遍計所執性……경[境]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오직 識이 경으로서 현현한 것
依他起性……알라야식을 종자로 하는 허망분별로 종합되는 제식[諸識]
圓成實性……의타기성에서 境의 相이 항시 존재하지 않는 것
遍計所執性에 있어서는 '顯現'이라는 개념을 써서 표현하고 있다. 이 '현현'은 역시『대승장엄경론』『중변분별론』등 미륵의 저작으로 간주되는 논서에서 비로소 중요시 된 용어이다. 그 의미는, 'A로서 현현하는 識이 생기한다'고 하듯이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식, 곧 마음이 A라는 표상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이 마음 속에 나타난 표상, 곧 境을 변계소집성이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파악 방법도 기본적으로는 미륵과 다르지 않다. 다만 현현이라는 말을 써서 표현한 데에 진보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依他起性에 있어서는 미륵의 의타기성[허망분별]이라는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그 허망분별을 여러 識으로 나누고 있는 점에서는 한 단계 더 진보한 셈이다. 비로소 三性說이 識說과 관련되어 고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圓成實性은 의타기성 속에 境의 相이 없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비로소 명확하게 원성실성이 의타기성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원성실성, 곧 진여는 의타기성, 다시 말하면 識[허망분별]과 다른 것이 아니다. 識 안에서부터 境이라는 표상이 언제나 완전하게 되어 있는 그 識 자체, 바꾸어 말하면 質的으로 변화한 識이 진여이고 그것이 바로 원성실성이라는 사고이다.
境의 相이란 변계소집성의 것이기 때문에 이 원성실성의 정의는 내용적으로는 '의타기성 속에 변계소집성이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이러한 정의는 세친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359)
唯識思想에서 본래 心識說은 알라야식을 중심으로 하여 無我·空의 측면보다는 認識이나 輪廻의 成立問題를 더욱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며, 三性說은 인식이나 윤회의 성립보다는 中觀哲學에서 심화된 무아·공의 의미를 재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無着은 이와 같이 논점의 방향을 달리하는 두 說을 그의 삼성설에서 서로 관련시켜 고찰하고 있는데, 이 점이 무착의 탁월한 견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世親의 三性說
이제『唯識三十頌』에 나타난 세친의 三性說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遍計所執性……분별에 의해 분별된 사물360)
依他起性……緣에서 생기한 분별361)
圓成實性……의타기성이 변계소집성을 遠離하는 性362)
遍計所執性에 있어서는 境[artha]이라는 말 대신에 事物[vastu]이라는 말을 쓴 점과, 그 사물이 '분별에 의해 분별된'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변계소집[parikalpita, 분별된]이라는 말을 써서 보다 語義를 충실하게 표현한 점이 종래와는 다르다.
依他起性에 있어서는 종래의 '인연소생의 법'과 '허망분별'이라는 두 가지의 파악방법을 하나로 훌륭하게 종합해서 정의하고 있다. 다만 세친은『유식삼십송』에서는 허망분별[abh ta-pahikalpa]이라는 말보다는 분별[vikalpa]이라는 말을 즐겨쓰고 있다.
圓成實性에 있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착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한 단계 더 명확히 의타기성에 있어서 변계소집성을 항상 원리해 있는 성, 그것을 원성실성이라고 정의하여 三性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나아가 세친은 의타기와 원성실의 관계를 제22頌에서 더욱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의타기와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네.
무상성 등과 같이라고 말해야 하네.
이것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이 보이지 않네.363)
依他起性에 있어서 遍計所執性을 항상 遠離해 있는 性은 圓成實性이며 法性이다. 그러므로 법성이 法과 다르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다르지 않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無常性이 諸法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닌 것과 같다. 만약 서로 다르다면 諸行은 常住하는 것이 될 것이며,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제행은 壞滅의 無性이 될 것이다. 마지막 句의 '이것'은 원성실성이며, '그것'은 의타기성이다. 그러므로 원성실성[眞如]이 보이지 않을 때 의타기성은 보이지 않는다.364) 通達位의 見道에 들지 않고는 緣起를 볼 수 없다는 말이며, 연기를 본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세친은 내용적으로는 종래의 학설을 계승하면서도, 표현적으로는 자신의 독자적인 표현방법을 연구하여 짧은 頌안에 절묘하게 三性說을 정리해 놓았던 것이다.365) 마침내 세친에 이르러서 삼성설은 교리상에 있어서 이와 같이 체계적인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삼성설은 瑜伽行派에서 中道를 천명하는 說로서 무엇보다도 修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매우 중요한 교설이다.
6) 三無性說
唯識思想은 근본적으로는 般若의 空思想을 계승하고 있지만, 양자에는 서로 차이나는 점이 있다. 곧 반야의 공사상에서는 일체제법이 모두 無自性이라고 보지만, 唯識思想에서는 일체제법이 결정적으로 무자성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로 앞에서 서술되었던 三性說로 유식의 입장에서 세 가지의 존재방식을 설한 것이며, 모든 것이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은 그 존재성[自性]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앞에서 서술되었듯이 존재는 遍計所執性과 依他起性과 圓成實性의 세 가지 방식으로 분류되며, 그것들은 각각의 방식을 갖는 것으로서 존재방식과 그 정도를 달리하여 그 존재성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唯識思想은 근본적으로는 空思想에 입각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의 존재방식은 각각 각자의 존재성을 인정받지만, 동시에 그 존재성이 空이라는 근본적인 입장에서 다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세워지는 것이 三無性說이다. 아래에서는『唯識30頌』을 중심으로 하여 그 내용을 살펴본다.
(1) 三性과 三無性의 관계
제 23송에서는
곧 이 三性에 의거해서
그 三無性을 건립한다.
그러므로 붓다께서는 密意로써
모든 法은 自性이 없다고 말씀하셨다.366)
라고 하여, 三性과 三無性의 관계를 총설하고, 동시에 반야의 空思想을 唯識思想의 입장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三性에 의거해서 三無性을 건립한다'는 것은 삼성과 삼무성이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굳이 무자성을 세우는 것은 앞에서 말했던 삼성[세 가지의 존재방식]도 비실체적인 것으로서 집착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철두철미하게 공사상에 입각하여 두 說 모두 실천수행을 중요시하는 이론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2) 三無性의 내용
이어지는 제 24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의 것[변계소집성]은 相이므로 無自性이고,
다음의 것[의타기성]은 스스로 있는 自性이 없으며,
뒤의 것[원성실성]은 앞의 것[변계소집성]에서 집착된
我와 法의 자성을 멀리 떠난 것에 말미암는도다.367)
이 訟에서도 三性에 의거해서 三無性을 설하고 있다. 삼성은 삼무성의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양자는 표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성의 존재성의 부정은 相無性이고, 의타기성의 존재성의 부정은 生無性이며, 원성실성의 존재성의 부정은 勝義無性이다. 변계소집성에는 我와 法의 相이 없으므로 상무성이라고 한다. 의타기성에는 生起는 있지만, 그것은 실체적인 생기가 아니며 緣生의 것으로서 假일 뿐이다. 그러므로 自然生起가 아니기 때문에 생무성이라고 한다. 원성실성은 본래 實我實法이라는 망분별을 떠나 있기 때문에 승의무성이라고 하며, 이것이 제법의 勝義이며 眞如이다. 이것을 깨달음으로써 唯識思想의 목적인 唯識性에 안주할 수 있는 것이다.368)
遍計所執性은 相無性이다. 여기서 相이란 사물의 형상 혹은 특질이며, 실제로는 마음을 떠나서는 실재하지 않는데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개념이나 언어로써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개념이나 언어로 파악되는 것은 사물 일반이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개념이나 언어는 사물 고유의 형상이나 특질 자체를 직접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개념이나 언어로 파악된 사물은 妄分別된 것으로서 고유의 형상 내지 특질이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되는 것이다. 곧 변계소집은 相에 대한 것이며, 상은 無自性이므로 相無性이다. 이러한 변계소집성의 존재성은 空華처럼 畢竟無이다.369)
依他起性은 生無性이다. 의타기란 구체적으로는 諸識이며 分別이다. 유정의 心識도 다른 것의 힘에 의해 생기하는 것이지, 자신의 힘에 의해 스스로 생한 것이 아니다. 곧 識은 과거 업의 영향[종자]과 현재의 여러 가지 緣에 의해 일어나므로 우리는 자기의 마음들을 자기 마음대로 일으킬 수가 없다.370) 이러한 마음의 타율적인 면과 그 존재성의 무상함을 生無性으로 표현했으며, 그 존재성의 정도는 假有이다.
圓成實性은 勝義無性이다. 승의는 法無我性, 곧 일체법의 無自性을 말하며, 일체법의 부정을 통해 얻어지므로 승의가 그대로 무자성이라는 의미에서 원성실성을 승의무성이라고 한다.371) 원성실성은 無自性이지만 常住하는 것이므로 그 존재성은 實有이다. 물론 원성실성의 존재방식은 현상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현상적인 의미의 有·無를 초월한 세계이므로 그 부정적인 측면을 승의무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삼성·삼무성설에 의해 범부의 인식은 망분별을 본성으로 하고 있으며, 붓다의 인식계는 원성실성·승의임을 알 수 있다.
(3) 勝義·眞如·唯識性
또, 이어지는 제 25頌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법의 승의이며
또한 진여이다.
항상 동일한 것이 그것의 자성이기 때문에
유식의 실성이로다.372)
여기서 모든 法이란 依他起의 모든 현상적 존재를 말한다. 승의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안혜는 勝[parama]과 義[artha]로 나누어 勝이란 '出世間智'를 말하며, 이 수승한 智로써 파악된 대상[義]을 '勝義'라고 해석한다. 이 때의 대상은 주객분별의 대상이 아니고 출세간지와 一味和合된 상태의 것이며,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서 眞實在이다. '항상 동일한 것이 그것의 자성'이라는 말은 '眞如는 常住한다'는 뜻이다. '常住'는 '항상 있다'는 말이지만 이 경우의 '있다'는 말은 有·無의 상대적 有가 아니며 현상적 존재가 '있다'는 의미와는 차원이 다른 의미에서의 '有'이다. 승의는 '일체법의 無我性·無自性性'으로 정의되며, 일체법을 부정한 경우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이와같이 일체법의 부정을 통해 얻어진다는 의미에서 승의가 그대로 무자성이라고 하여 원성실성을 승의무성이라고 하는 것이다.373)
唯識의 實性이란 唯識性을 말하며, 산스끄리뜨는 vij apti-m trat 이다. '유식'의 산스끄리뜨 vij apti-m tra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어 -t 를 붙인 것으로 '유식인 것'이라는 것이 그 원래의 의미이다. 유가행파에서는 이 말로써 궁극적 진리를 나타내려고 했다. 圓成實性이 唯識性이며, 圓成實性은 주관적으로는 無分別智를 말하고, 객관적으로는 眞如를 의미한다. 물론 주관·객관이라 하더라도 주객미분의 상태이므로, 유식성은 진여를 주객미분의 상태로 파악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마음이며 또 도달했을 때의 마음이다.374) 眞如는 주관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超越的 眞理가 아니라, 主觀안에 있는 內在的인 眞理이다. 唯識思想에서 生無性만이 아니라 굳이 勝義無性을 말하는 이유는 無我說의 취지를 살리면서 依他起性 곧 알라야識을 기반으로 하는 8識이 수행에 의해 無分別智[진여]가 될 가능성을 일깨우기 위함일 것이다.
Ⅴ. 世親의 修行思想
佛敎 修行의 目的은 깨달음[覺:buddha]에 있다. 그러므로 세친이 출가한 목적도 깨달음에 있었을 것이다. 唯識思想에 있어서는 唯識性[圓成實性·眞如]에 安住하는 것이 깨달음이다.375) 大乘의 5位 가운데 通達位에서 無分別智에 의해 비로소 진여를 보는 단계부터가 깨달음인 것이다. 그 때 識은 무분별지로 전환되는데, 바로 그 무분별지의 대상이 진여이다. 三性에서 원성실성은 주관적으로는 무분별지를, 객관적으로는 진여를 의미한다. 물론 주관·객관이라 하더라도 이 경우는 主客未分의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의 眞理·眞實이 있을 뿐이며, 그 하나인 상태를 굳이 반성적으로 파악할 때 그것을 무분별지와 진여로 나누는 것이다.376)
그리고 唯識思想에서 識은 궁극적으로는 그 존재가 부정되어야 할 것이지만, 일상적으로는 미혹의 세계를, 실천적으로는 수행생활을 성립시키는 基體로서 그 존재가 잠정적으로나마 인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 잠정적으로 존재하는 식을 수단으로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唯識思想은 단순한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며, 실천되고 전개되어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唯識思想에서 교학과 실천의 상관관계는 그 근본명제인 '唯識無境'에서 명료하게 나타난다. 유식무경이란 단지 識의 表象만이 있을 뿐이고, 그것에 대응하는 外界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그리고 단지 식의 표상뿐임을 아는 것은 동시에 표상을 초월하는 수행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唯識思想은 止觀의 수행을 골격으로 하는 '瑜伽行'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유식의 수행사상은 유가행파의 체계에서 대승의 5위와 연관되면서 내용적으로 심화된다. 아래에서는 세친의『唯識三十頌』과 그에 대한 10대논사의 주석서인『성유식론』을 중심으로 하고, 세친의 주석서가 있는『十地經』이나『攝大乘論』등을 참고로 하여 세친의 수행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 서술방식은 먼저 수행목적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고, 이어서 수행단계인 대승의 5위를 중심으로 하여 각 수행계위에서 실천되는 덕목들의 내용을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수행의 果인 佛果의 내용을 밝히는 방법으로 전개하기로 한다.
1. 修行의 目的
瑜伽行唯識學派의 명칭에서 보이듯이, 유가행파는 요가[yoga·瑜伽]의 실천을 통해서 자기를 변혁하고, 미혹의 세계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가행파의 이런 목적은『성유식론』의 머리말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 이 논서를 짓는 이유는 두 가지의 空[我空·法空]에 대해서 미혹하고 오류가 있는 자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두 가지의 무거운 장애[煩惱障·所知障]를 끊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집과 법집 때문에 두 가지의 장애가 모두 일어난다. 두 가지의 공을 증득하면, 그 장애도 따라서 끊어진다. 장애를 끊는 것은 두 가지의 證果[涅槃·菩提]를 얻기 위해서이다. 윤회의 삶[生]을 계속하게 하는 번뇌장을 끊음으로써 眞解脫을 증득한다. 지혜[解]를 장애하는 소지장을 끊음으로써 大菩提를 증득한다.
또한 그릇되게 我와 法으로 집착하여 유식(의 이치)에 미혹한 자에게 열어 보여서, 두 가지의 空을 통달함으로써 유식의 이치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 이러한 갖가지 주장들을 없애고, 유식의 심오하고 묘한 도리 속에서 참된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해서 이 논서를 짓는다.377)
이것은『성유식론』을 짓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唯識思想이 지향하는 궁극 목적을 통괄한 것이기도 하다. 이 글에 의하면 唯識思想을 설하는 대상은 二空所顯의 眞如에 어두운 자[聲聞·獨覺]와 오류에 빠진 자[惡取空者]이다. 그들에게 二無我의 이치·唯識의 이치를 설해서 올바로 이해하게 한다. 그리하여 煩惱障을 소멸하여 참다운 解脫을 증득하고, 所知障을 소멸하여 大菩提를 얻게 하는 것이 唯識思想을 선양하는 목적이며, 최종적으로 '진해탈'과 '대보리'를 얻는 것이 유가행파에서 추구하는 수행의 목적이라는 것이다.378)
我執에 의해 煩惱障이 생기고, 法執에 의해 所知障이 생긴다. 이 두 가지의 장애 때문에 우리는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며 붓다[覺者]가 되지 못한다. 번뇌장[kle a- vara a]은 情意的인 마음의 염오로서 '我가 실재한다'고 보는 我執에서 비롯된다. 소지장[j eya- vara a]은 知的인 마음의 염오로서 '外境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法執에서 생긴다. 우리는 번뇌장의 원동력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게 되고, 소지장의 세력 때문에 붓다가 되지 못하고 있다.379) 그러나 만약 무분별지가 떠올라서 진여를 보게 되면 번뇌장이 소멸되면서 解脫을 이루게 되고, 소지장까지 끊어가면 菩提를 얻어 붓다가 될 수 있다.
解脫의 산스끄리뜨 mok a는 muc[해방되다]에서 유래한다. '해방된 것·자유롭게 된 것'이 원래의 의미인데, 인도사상계에서 널리 '깨달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고통스러운 존재 곧 생사윤회의 생존상태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안락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해탈을 涅槃[nirva a]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번뇌의 불길이 꺼지고 평안함으로 가득찬 상태를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欲界·色界·無色界의 三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해탈 또는 열반은 생사유전이라는 실존적인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380)
그런데 唯識思想은 그런 경지에만 한정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의 수행자들은 부파불교[소승]의 수행자들이 번뇌장만을 끊은 열반의 경지에만 안주하여 自利에만 급급한다고 비난했다. 유가행파는 보다 높은 깨달음의 경지, 진실의 세계를 지향했다. 그것이 '보리[bodhi]'의 세계이다. 보리의 산스끄리뜨 어근은 budh[알다·깨닫다]로서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이다. 이미 석존 자신이 "나는 붓다[buddha]로서 無上菩提[anuttar -samyak-sa bodhi]를 얻었다"고 선양했듯이, 보리는 붓다의 내용이며, 보리를 얻는다는 것은 붓다가 되는 것[成佛]이다. 그것은 法無我[法空]를 깨닫는 것이며, '外界의 모든 사물[諸法]은 자기의 마음을 떠나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을 法執을 버리고 所知障을 끊어서 大菩提를 증득한다고 한다. 단지 자기의 본질[人無我]만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모든 事象의 本質[法無我]까지도 이해할 것이 요구된다. 실존적인 고통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원인으로 내재하는 無知까지 제거하여 자기와 우주의 참다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唯識思想의 궁극 목적이면서 동시에 수행의 目的이다. 이렇게 절대 진리가 되어서 자기와 우주의 본질을 깨달은 체험은 바로 行爲로 연결되어 전개된다. 그것이 바로 佛·菩薩께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활동, 곧 利他行이다. 아집·번뇌장뿐만아니라,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법집·소지장을 발견한 것이 大乘佛敎의 위대성이다. 人法二無我로서 제법이 하나로 緣起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同體大悲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유가행 유식학파에서 보살의 수행인 波羅蜜思想을 강조하고 10地說 등을 얘기하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唯識思想에서는 '唯識'을 설하기 때문에 수행의 수단도 識이며, 그 식을 통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수행의 목적을 '轉識得智'나 '轉依'라고도 한다. 8識의 번뇌를 淨化하고 唯識實性인 眞如性을 깨달아 번뇌장·소지장을 끊어가서 열반과 보리를 증득하는 것이 유가행파 수행의 목적인 것이다.
2. 修行의 過程
唯識思想에서는 존재의 형태이며 인식의 형식인 三性으로부터 三無性을 깨닫거나, 8識을 淨化하여 智慧를 증득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었다.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천수행이 필요하다. 수행에는 경지가 있으므로 수행에도 단계가 있게 된다. 유식의 수행단계에는 資糧位·加行位·通達位·修習位·究境位의 五位가 있다. 이러한 유식의 수행5위는『俱舍論』의 見道와 修道의 구별이 채용되어서 통달위를 견도, 수습위를 수도로 받아들이고 자량위와 가행위를 견도의 앞에 놓고, 구경위를 수도의 뒤에 놓는 형태로 오위의 체계가 구성되고 있다.381) 또한,『구사론』에서는 견도에 들어가기 전에 順解脫分과 順決擇分의 두 단계를 상정해서, 순해탈분으로 聞所成과 思所成을, 순결택분으로 修所成을 고안하고 있는 것을, 『성유식론』에서는 이 고안을 답습해서 견도에 해당되는 통달위의 앞에 놓여진 자량위와 가행위를 각각 순해탈분 및 순결택분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만아니라,『구사론』에서 순결택분의 내역으로 거론되고 있는 煖·頂·忍·世第一法이라는 네 범주를 가행위에서 받아 들인다.382)
이 다섯 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침으로써 점차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染汚로부터 淸淨으로 변혁시켜 가는 것인데, 그 경우 마음의 상태를 유식적으로 설한 것이『유식30송』제26송 이하의 내용이다. 다만 여기서는 아직 前述한 다섯 단계로 명확하게 구별한 형태로서나, 그러한 술어를 사용하면서 설해져 있지는 않다. 단지 安慧가 이 다섯 단계를 서술한 것이라는 입장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383) 이제 여기서도 안혜의 이러한 견해에 맞추어서 논의를 펼치고자 한다.
1) 資糧位
먼저, 수행은 처음에 어떻게 진행되고, 그 가능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자.『유식30론송』에서는 제26송에 들어가기 전 유식의 수행단계를 밝히면서,『成唯識論』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유식의 性과 相을 누가 몇 가지의 단계에 의지해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가? 대승의 두 가지 種性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本性種性이니, 무시이래로 근본식에 의탁해서 본래부터 있는 무루법의 因이다. 둘째는 훈습으로 이루어지는 종성이니, 법계로부터 동등하게 흘러나오는 법을 듣고나서, 들어서 얻는 지혜 등의 훈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종성을 갖추어야 바야흐로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384)
이에 의하면, 수행은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素質이 있고, 후천적으로는 자신의 실천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수행은 多聞熏習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곧 대승의 가르침을 듣는 것으로부터 수행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聞·思·修라고 하여,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사유하고 그리고 실천수행하여 열반과 보리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것이 유식철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유식에서는 수행의 구조를 熏習이라는 면에서 이론화하고 있다. 곧 수행의 구조가 훈습과 알라야식의 이론 속에서 명료하게 해명되어 있는 것이다.385)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유식수행의 독특한 점은 수행이 교설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과 그 교설을 法界等流라고 지칭하고 있는 점이다.
이어서 언급되는 제26송은 수행의 최초 단계인 資糧位에 속하는 내용인데,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이에 識을 일으켜서 唯識性에 安住하지 않는 限, 두 가지의 집착을 생기게 하는 잠재력[二取隨眠]을 조복하고 소멸시킬 수 없도다.386)
이 송에서는 특히 일상적인 主客二分의 인식이 일어나는 이유와 그러한 인식을 단멸시킬 수 있는 길을 서술하고 있다. 唯識思想에서는 오직 마음[식]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이 主客으로 二分化되어, 우리가 色 등의 대상적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하여 本頌은 '唯識性에 안주하지 않는 한, 두 가지의 집착[二取]을 생기게 하는 잠재력[隨眠]이 소멸되지 않는다'라고 답한다. 唯識性은 마음의 本性을 말하며, 주관[能取]과 객관[所取]의 二元的 대립이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마음이 그와 같은 본래적인 一元의 상태로 돌아갈 때 '識이 유식성에 안주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마음은 그와 같은 主客一元의 상태에 머무는 일이 없이, 언제나 주관과 객관의 대립 위에서 인식활동을 하며, 더구나 주관에든 객관에든 집착한다. '두 가지'란 인식하는 것[능취]과 인식 되는 것[소취]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작용은 그 영향력[業力]을 알라야식 속에 남긴다. 그것을 '두 가지의 집착을 생기게 하는 잠재력[수면]'이라 표현한 것이다. 수면의 산스끄리뜨는 anu aya이며, 유정에게 따라 붙어서 심층적인 알라야식속에 잠복하고 있는 種子를 말한다. 주관과 객관에 집착하는 우리 마음의 활동은 곧 바로 그 영향력이 종자로 되어 알라야식 속에 저장되고, 그 저장된 종자는 잠재력으로 유지되다가 미래에 緣을 만나면 다시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된 마음으로 생기하게 된다. 이 현상세계의 다양화와 주관과 객관의 대립되는 양상을 유가행유식학파는 현실의 마음작용[業]과 그 작용의 영향력[種子], 이 두 가지의 상호 인과관계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에의 집착과 외부 사물에의 집착, 이 두 가지의 집착은 근본적으로 일상의 마음이 마음 자체의 본래적인 상태[本性], 곧 주·객의 대립이 없는 唯識性에로 되돌아오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다고 제26송은 강조하고 있다.387) 유식 수행의 목적은 유식성에 안주하는 것이며, 자량위는 유식성에 안주하기 위해서 發心하여 수행을 준비하고 시작하는 단계이다. 자량위의 구체적인 수행은 六波羅蜜을 수행하면서 유식성에 다가가는 것이며, 수행의 절차에는 十住·十行·十廻向의 三十位의 단계가 있다. 자량위는 불도수행의 긴 도정에서 路資와 糧食을 준비하는 단계이며, 노자와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은 福과 智慧이다. 6바라밀에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바라밀은 福이고 반야바라밀은 智慧이다. 이 기초적인 수행에 의해 상당한 단계에 까지 도달하면, 이제 진여[유식성]를 체험적으로 증득하기를 추구하는 加行位로 들어가게 된다.
2) 加行位
加行位는 資糧位의 수행에 더욱 정진을 더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제10廻向의 滿心의 단계에서 煖·頂·忍·世第一法이라는 四善根을 내용으로 하는 止觀行을 닦는 것이다. 이 가행위에 있어서는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에 대한 집착을 점차 조복하고 제거한다.
제27송에서는 가행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전에 어떤 것을 세워 유식성이라고 이해하면, 관념이 있게 되는 것이므로 진실하게 유식성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로다.388)
이 頌은 '유식임[唯識性]'을 단순히 知的·槪念的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즉각적으로 '모든 것이 유식이다[萬法唯識]'라는 진리 자체[유식성]를 체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선 유식이라는 것을 경론에서 배우거나 善知識의 가르침을 듣고서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아가 그것을 지식으로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amatha[止]나 vipa yan [觀]라는 요가의 실천을 통해 '유식임'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유식임을 관념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것을 송에서는 '현전에 어떤 것을 세운다'라고 한다.
'일체는 유식이다'라고 하는 의식[관념]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유식임을 대상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며, 결국 거기서는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분별되고 집착이 따르게 되므로, 그 본래의 일원적인 상태[유식성·진여]로 돌아가 머물지 못한다. 그것을 송에서 '진실하게 유식성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다. 유식성에 안주한다는 것은 어떠한 관념이나 표상을 갖는 일이 없이 마음이 본래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389)
가행위는 四善根位라고도 하는데, 난·정·인·세제일법의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 네 가지 중 앞의 두 단계에서 四尋思觀, 뒤의 두 단계에서 四如實智觀이라는 觀法을 닦는다. 尋思의 尋은 尋求, 思는 思察의 뜻이다. 심사란 '무엇일까'라고 추구하는 마음이다. 유식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사물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을 추구하고 관찰하는 마음이다. 如實智란 印可決定智라고 하듯이, 그러한 추구·관찰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결정적으로 인정하고 아는 마음을 말한다.390) 이 두 가지 관법의 대상에는 名·義·自性·差別이라는 네 가지가 있다. 여기서 名이란 句와 文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며, 갖가지의 존재를 표현하는[能詮] 언어를 말한다. 義란 그 언어에 의해 표현되는[所詮] 의미, 혹은 '의미를 지닌 것'을 말한다. 自性이란 그러한 名과 義自體[體性]를 말하고, 差別이란 명과 의의 여러 가지 세세한 존재방식을 말한다.391)
그리고 사심사관과 사여실지관 두 가지 관법의 목적은 '名 등 네 가지의 것은 모두 假有이며 實無이다'392)라고 관찰·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은 책상이다'라는 인식현상을 통해, 책상이라는 의미를 갖는 책상이라는 명칭으로써 지시된 책상이라는 사물이 마음을 떠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가행파의 관법은 모든 사물을 마음속에 거둬 들이고, 마음을 밖으로 流散시키지 않는다. 마음을 내면으로 비추어, 오직 명칭만 있고 그것에 대응하는 사물은 없으며, 사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나 그 사물을 인식하는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찰한다. 이것이 두 가지 관법의 내용이며, 이 관법을 실천하여 '諸法은 假有이며 實無이다'라는 인식을 단계적으로 심화시키는 과정이 煖 등의 네 단계이다.393)
四善根의 처음인 煖位는 인식되는 것[所取]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심사관 중에서도 下品의 尋思에 의해 관찰하는 단계이다. 수행의 내용은 대상에 대한 집착을 제게하는 것이며, 이 단계에서 닦는 三昧를 明得定이라고 한다. 무분별지의 광명의 따사로움을 은은하게 느끼기 시작하는 단계이므로 煖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다음의 頂位는 사심사관 중에서도 上品의 심사에 의해 所取는 空이라고 보다 깊게 관찰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는 무분별지에서 발하는 광명이 점점 증대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닦는 삼매를 明增定이라고 부른다. 이 단계에 頂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심사단계의 頂點에 도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忍位란 사여실지관 중에서도 下品의 여실지관에 의해서 인식하는 것[能取]도空이라고 관찰하는 단계이다. 앞의 煖·頂位에서 소취는 공이라고 관찰했지만, 이 단계에서는 소취는 無라고 분명하게 결정적으로 이해[印]하고, 나아가 능취도 無라고 하는 이해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닦는 삼매를 印順定이라고 이름붙인다.
마지막 世第一法位는 사여실지관 중에서도 上品의 여실지에 의해서 소취도 능취도 모두 空이라고 결정적으로 아는[印]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의 삼매를 無間定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취·능취의 無를 아는 찰나에 無間으로 見道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단계는 異生[凡夫]의 상태로서는 최고의 상태이기 때문에 世第一法이라고 한다. 世는 世間을 말하며 범부가 머무는 세계이다. 이 가행위는 어디까지나 二元對立의 범부세계이다. 소취와 능취가 無이고, 일체는 唯識이라고 말해도, '所取·能取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관념[相·想]을 마음속에 떠올리기 때문에 진실하게 唯識性을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다.394)
3) 通達位
자량위와 가행위를 통하여 끊임없이 수행한 결과로서 眞如를 보게되고 無分別智가 발생하게 된다. 진여에 도달하므로 通達位라고 하며, 진여의 이치를 보게 되므로 見道라고도 한다. 근본 무분별지가 일어나서 唯識性을 깨달아 들어가고, 그 뒤에 後得智를 발하여 唯識相을 깨달아 들어가, 실재와 현상의 진실에 통달하게 되어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게 된다. 제28송에서는 통달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어느 때에 인식대상에 대해서 지혜가 전혀 집착·분별함이 없게 된다. 그 때에 유식성에 안주하나니, 主·客의 양상[二取相]을 떠났기 때문이다.395)
통달위는 수행의 단계가 進展하여 집착·분별로 일어나던 마음이 마음의 本性[唯識性]에 머물러 처음으로 진여에 계합하는 단계임을 밝히고 있다. 중생은 하나로 緣起하는 一元的인 世界를 主觀과 客觀으로 分別하면서, 주관의 입장에서 객관이 樂受로 와 닿으면 貪欲心을 일으켜 영원히 和合할려고 집착하고, 苦受로 와닿으면 瞋 心을 일으켜 끝없이 別離할려고 집착한다. 그러나 諸行이 무상하므로 樂受는 壞苦로 되고, 苦受는 그대로 苦(苦)이기 때문에 一切는 皆苦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苦로부터 해탈할려면 일원적인 세계로 돌아가 유식성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분별과 집착이 사라지고 번뇌의 불길이 꺼져 涅槃[寂靜]에 들 수가 있는 것이다. 통달위는 유식성에 안주하게 되는 첫 단계이며, 보살 10地 중에서는 初地의 시작이다. 이 통달위부터 聖者라 부르고, 또 地上菩薩이라고 이름한다.
唯識性은 眞如이며, 허망한 분별을 떠난 人法二無我의 본성으로 三性 가운데서는 圓成實性에 해당한다. 유식성에 安住한다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완전히 인식대상이 없어졌을 때를 말하며, 자신의 마음의 본성에 머무는 것이다. 二取는 인식작용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곧 인식하는 것[能取:gr haka]과 인식되는 것[所取:gr hya]을 말한다. 능취와 소취는 한 쪽의 존재위에서 다른 쪽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相依關係로서, 소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능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상이 뒤에 중국에 들어가 '境識俱泯'이라 부르는 마음에서 主客의 對立을 없애는 논리적 근거로서 유가행파의 유명한 논리가 되었다.396) 통달위는 十地 가운데 初地[歡喜地]의 수행위이며, 진여를 관찰하게는 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증득한 것은 아니다.
4) 修習位
통달위에서 진여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아직 無明과 煩惱의 習氣를 완전하게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계속 무분별지를 닦아 마음을 더욱 정화하여 나가야 한다. 이 단계가 修習位이며, 修惑을 끊어 나가기 때문에 修道라고도 한다. 수도는 10地에서 성립하며, 각 지에서 고유한 바라밀다를 수행하여 점차 成佛에 가까워지는 단계이다. 10지의 각각은 入心·住心·出心의 세 가지로 구성되는데, 이 가운데서 初地, 곧 歡喜地의 입심이 見道[通達位]에 해당하고, 주심 이후가 修道[修習位]가 된다. 제29송의 수습위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별적 인식이 없고[無得], 범부의 사고로 알 수 없으며[不思議], 이것은 出世間의 智이다. 두 종류의 重을 버리기 때문에, 문득 轉依를 증득하는도다.397)
이 頌은 唯識性에 悟入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無得은 인식대상[所取의 대상]을 분별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不思議는 개념적 사고의 대상과는 달리 [尋思를 초월] 스스로의 마음으로 직접 體得해야 할 것이며[自內證], 어떠한 논의로써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유식성에 오입하여 머무는 마음은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는 세간적인 마음이 아니라, 세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고 주객의 대립이 없어진 것[無分別]이며, 세간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出世間智라고 한다.398)
두 종류의 重이란 번뇌장과 소지장을 말한다. 추중은 잠재적으로는 알라야식속에 있는 惡種子, 곧 자기존재를 근원적으로 속박하는 잠재적인 힘이며, 顯在的으로는 그 잠재력이 구체적으로 작용하여 심신이 부자유스럽게 된 상태[心身의 不堪能性]를 말한다. 우리의 존재를 속박하여 유식성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두 가지의 장애가 번뇌장과 소지장이다.399) 번뇌장은 情意的인 번뇌로서 '我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我執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諸法, 곧 존재의 구성요소의 작용에 미혹하는 마음이다. 소지장은 知的인 번뇌로서 '마음밖에 사물이 實在한다'고 생각하는 法執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제법의 體에 미혹하는 마음이며, 표층적인 마음에는 올라오지 않는다.400) 번뇌장과 소지장은 제법의 用과 體에 미혹하는 마음으로서 다른 것이 아니다.『성유식론』에서는 번뇌장을 끊어 열반을 얻고, 소지장을 끊어 보리를 얻는다고 한다. 이 송에서는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음으로서 轉依를 증득한다고 표현했다. 전의란 所依를 변화[轉]시키는 것이다. 소의의 산스끄리뜨는 raya이며 - ri[의존하다·의지하다]라는 동사에서 형성된 명사형으로 '어떤 무엇인가가 그것에 의존하는 경우의 것'이 원래의 의미이다. 그것은 자기 존재가 의지하는 곳이며, 신체와 마음으로 이루어진 인격적 개체를 말한다. 근본불교 이래의 술어로 말하면 '五蘊'이고, 식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唯識思想에서 말한다면 8식의 근본인 알라야식을 가리킨다.401) 따라서 전의란 자기존재를 染汚의 상태에서 청정한 상태로 변화시키는 과정 혹은 그 결과를 말하며, 唯識思想의 입장에서는 8識의 본질을 변화시켜 4가지의 智를 얻는 轉識得智를 말하는 것이다. 그 4가지의 智는 成所作智·妙觀察智·平等性智·大圓鏡智이다.
修習位는 通達位에서 얻게 된 無分別智를 닦아 익혀 몸에 배이게 하는 단계이다. 俱生起의 我·法 二執은 끊기가 어려우므로 완전히 제거할려면 菩薩十地와 十波羅蜜을 닦아 나가야 한다. 10地의 과정에서 각 地마다 한 종류씩의 바라밀을 닦으므로 10種이 되며, 10勝行이라고도 한다. 초지에서 제10지 金剛喩定까지는 각각의 지에서 각각에 속하는 俱生의 소지장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남은 극히 미세한 소지장의 종자를 끊는다.402) 10波羅蜜行으로써 번뇌장과 소지장을 완전하게 정화할 수 있게 된다. 10지와 10바라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403)
歡喜地 …… 施波羅蜜多
離垢地 …… 戒波羅蜜多
發光地 …… 忍辱波羅蜜多
焰慧地 …… 精進波羅蜜多
極難勝地 … 靜慮波羅蜜多
現前地 …… 般若波羅蜜多
遠行地 …… 方便波羅蜜多
不動地 …… 願波羅蜜多
善慧地 …… 力波羅蜜多
法雲地 …… 智波羅蜜多
잠시 살펴본 바와같이 10波羅蜜多는 菩薩이 의지하는 修行이며, 뒤의 4波羅蜜多는 앞의 6波羅蜜多를 얻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특히 方便波羅蜜多 이하의 4波羅蜜多는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利他行으로서 大乘佛敎의 위대성이 돋보이는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唯識思想이 대승불교인 근거를 드러내는 부분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發心에서 成佛하기 까지의 수행과정에는 모두 3아승기겁이 걸린다. 발심에서 加行位의 마지막, 곧 世第一法位까지가 제1아승기겁, 初地[通達位·見道]에서 제7地 끝까지가 제2아승기겁, 제8地에서 제10地 끝, 곧 金剛喩定까지가 제3 아승기겁이다. 보살은 오랜 기간의 수행도정에서, 초지와 제8지와 佛地의 3가지 단계에서 질적인 변혁을 이루기 때문에 이처럼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 초지 이전에는 有漏心만이 일어난다. 견도에 와서 처음으로 無漏智[무분별지]가 일어나 진여를 본다. 그 이후 제7지 끝에 이르기까지 무루심과 유루심이 서로 섞여서 생긴다. 그리고 제8지 이후는 어떤 것도 대상으로 삼지 않고, 더구나 아무런 의도적인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무분별지가 생기고 오직 無漏心만 일어난다.404) 10지에서는 계위가 올라갈수록 利他의 활동이 활발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自利의 깨달음과 利他의 慈悲行을 원만히 이루는 단계가 究境位[佛地]인 것이다.
3. 修行의 結果
修行에 있어서도 因果의 이치는 엄연해서, 보살은 반드시 수행의 因에 의해서 깨달음의 果를 얻게 된다. 실천수행상의 因果關係에서 因位는 發心에서부터 金剛喩定의 마지막 찰나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기간이며, 果位는 成佛이라는 결과를 얻은 뒤의 佛果의 단계를 말한다. 수행이 원인이 되어 성불이라는 결과가 생기기 때문에, 보살이 佛이 되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因位라 하고, 수행을 달성해서 얻은 佛의 단계를 果位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의 목표는 붓다가 되는 것에 있다. 보살은 수행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질적으로 변화시키고[轉依], 완전하게 轉識得智를 이룬다. 佛果의 내용은 大菩提와 大涅槃이며, 붓다는 自利와 利他를 원만히 성취하여 大慈大悲의 실천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佛位가 수행의 5위에서는 마지막의 구경위인데,『유식30론송』에서는 이 단계를 '無上正等覺에 안주하여 俱生起의 번뇌장과 소지장을 완전히 제거하고, 미래세가 다 하도록 유정들을 교화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究境位의 양상을 최후의 제30송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보리와 열반]은 無漏이고, 界이며, 不思議이며, 善이며, 常住하는 것이며, 安樂이고, 解脫身이며, 大牟尼이며, 法身이라고 이름한다네.405)
無漏라는 것은 所依를 변화시켜 모든 惡種子를 없애 버렸기 때문에 漏[ srava], 곧 번뇌가 없는 것을 말한다. 界[dh tu]는 이 경우에 있어서는 원인[hetu]이라는 의미로서 聖法, 곧 붓다가 설한 모든 敎法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유가행유식학파에서는 붓다의 교법은 근원적인 진실계에 그 존재근거를 갖는다고 간주하며, 그 진실계를 '法界'라 부르고, 붓다의 가르침은 이 법계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하여 '法界等流의 法'이라고 보는 것이다.
'不思議'라는 것은 범부의 언어로써는 표현할 수 없고, 범부의 개념적 사고로써는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善이라는 것은 보리와 열반은 청정한 것이며, 安穩한 것이며, 번뇌가 없는 無漏法에서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善性이라 고 한다. 常住한다는 것은 그것은 다하여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常이라고 한다. 安樂이란 무상한 것은 괴로움[苦]이지만 그것은 상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락이라고 한다.406)
解脫身이라는 것은 붓다는 아직 聲聞이나 獨覺에게 남아있는 重[번뇌장·소지장]까지 버리고 얻은 轉依이므로 해탈신이라고 한다. 大牟尼라는 것은 붓다[覺者]는 번뇌장 뿐만아니라 소지장마저 끊어 크게 고요해졌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牟尼[muni]는 寂默의 뜻이며, 聖者라는 말이다. 성문과 독각의 二乘人들은 번뇌장을 끊어 해탈만을 얻는데 비해, 大乘人들은 소지장도 끊어서 보리까지 증득하므로 '大'牟尼라고 표현하고, 대열반·대보리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大乘의 수승함을 나타낸다. 법계의 본질은 淸淨이다. 전의한다는 것은 淸淨法界를 얻는 것이며, 자기 내면에서부터 번뇌장과 소지장을 완전히 소멸하여 법계가 본래의 청정성을 회복하고 법계와 하나가 되는 것, 곧 법계를 몸으로 하기 때문에 法身이라고 한다.407) 이러한 내용들이 전의한 붓다의 성질이고, 열반과 보리의 양상이며, 수행의 결과이다.
唯識의 입장에서 轉依는 轉識得智라고도 정의된다. 구체적으로는 8가지의 識을 변화시켜 4가지의 智를 증득하는 것이다. 4가지의 智는 成所作智·妙觀察智·平等性智·大圓鏡智이다. 成所作智는 有漏의 前五識을 淨化하여 無漏智가 된 것으로,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해야할 것을 성취하는 智慧이다. 이 지혜는 중생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기위해 여러 장소에서 갖가지의 變化身을 나타내어, 중생구제를 위해 해야 할 것을 성취하는 작용이 있다. 妙觀察智는 유루의 제6意識을 정화하여 무루지가 된 것으로, 중생들의 근기를 妙하게 관찰할 수 있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중생들의 근기를 묘하게 관찰하여 설법하고 그들의 의혹을 끊어주는 작용을 한다. 平等性智는 유루의 末那識을 정화하여 무루지가 된 것으로, 自他가 平等하다고 보는 지혜이다. 말나식이 유루로 있는 한, 언제나 알라야식을 향하면서 實體적인 自我라고 집착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慈悲心이 전개될 수 없다. 말나식이 평등성지로 변한다면, 모든 존재와 자기는 平等一味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大慈悲心이 일어나 보살의 바람[願]에 응하여 他受用身과 他受用土408)를 시현하는 작용을 한다. 大圓鏡智는 有漏의 알라야識을 정화하여 無漏智가 된 것이다. 비유적으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크고 밝은 거울처럼, 마음의 本體인 알라야식에서 완전히 染汚가 제거된 상태를 말한다. 청정한 큰 거울이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듯이, 대원경지는 모든 존재, 곧 法界 전체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고,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으며, 自受用身과 自受用土409)를 시현하고, 그외의 三智를 생기게 하는 작용이 있다.410)
四智 중에서 묘관찰지와 평등성지의 두 가지는 見道[通達位]에서 처음 일어나고, 대원경지와 성소작지의 두 가지는 佛果[究境位]에서 비로소 일어난다. 唯識思想에 따르면 사람마다 唯識이 있으며, 자기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전체는 각자 자기의 알라야식에서 전개된 것이다. 따라서 알라야식이 유루에서 무루로 변하여 대원경지가 되는 것은 우주전체가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4智와 眞如法界가 완전하게 冥合하는 단계가 바로 佛位, 곧 구경위이다. 이와같이 불교의 목적은 지혜를 증득하여 진여[법계]와 계합하는 것이므로, 다양한 禪定과 수많은 戒律은 모두가 智慧[般若]를 계발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手段的인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Ⅵ. 結 論
世親은 5세기 경의 人物로서, 처음에는 部派佛敎로 출가했다가 뒤에 大乘으로 전향하게 된다. 그는 그 당시까지의 印度佛敎 1000年의 역사를 경험하고 부파와 대승에 걸쳐 수많은 저술을 남기므로, 후세에 그를 千部論師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본논문 제Ⅱ章에서는 먼저 그의 生涯와 著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부파불교의 교리를 집대성한 불후의 名著인『俱舍論』을 저술했으며, 唯識論師로서 兄 無着이 세운 唯識思想의 體系를 敎理的으로 종합하여 그 理論體系를 완성한다. 敎學上으로 근본불교와 아비달마의 6識說을 '8識說'로 확대하여 정립하고,『大乘五蘊論』에서 五蘊說을 대승적으로 해석했으며,『大乘百法明門論』에서는 '5위100법 사상'을 대승적으로 확립시켰다. 나아가『唯識20論』을 통해 '唯識無境說'을 논증하고,『唯識30頌』을 통해서는 '識轉變說'을 創案하고, 心所說을 중요시 했으며, 三性·三無性說을 이전보다 더욱 발전시켰다. 물론 그의 이러한 사상들은 근본불교나 부파불교에 그 淵源을 두고 있으며, 대승초기의 般若思想이나 중기의 中觀哲學을 배경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착의 唯識思想에 직접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그러므로 제Ⅲ章에서는 '世親 唯識思想의 淵源'에 대해서 근본불교·부파불교 및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 결과 唯識思想의 연원을 크게 세 가지의 흐름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唯識思想은 根本佛敎이래의 唯心論의 系譜를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 본래 불교는 唯心論的 傾向이 강하며, 이러한 경향의 頂點에서 唯識思想이 형성된다. 불교의 목적이 수행을 통해 煩惱를 지워나가 輪廻의 苦로부터 解脫하는데 있으므로, 불교는 근본적으로 心識爲主의 사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흐름이 識一元論에 입각한 唯識無境說의 淵源이 되었다. 둘째, 部派佛敎에서 문제가 되었던 輪廻의 主體·業力의 保存·業의 果報와 責任의 소재·無心位에서 意識의 회복·生命의 持續·미세한 마음의 連續·記憶과 想起의 문제 등에 관한 여러 가지의 교리가 唯識思想에 繼承되어 인격의 주체 속에 潛在心·無意識의 영역으로서 알라야識이 想定되고, 거기에 수많은 種子[업력]가 저장된다는 사상으로 확립되는데, 이것이 唯識思想의 알라야식과 種子說의 淵源을 이룬다. 셋째, 부파불교의 阿毘達磨思想과 大乘의 空思想이 唯識思想의 또 하나의 연원이 되는데, 唯識思想은 부파의 아비달마사상에 대해서는 내용상의 오류를 시정하고 보완하며, 대승의 空思想에 대해서는 虛無主義로 흐를 위험성을 제거할 이론을 확립하게 된다. 前者의 대표적인 것이 8識說 중에서도 알라야識說이며, 後者로는 識轉變說이나 三性·三無性說을 들 수가 있다. 唯識思想은 부파의 아비달마사상을 많이 채용하지만 空의 입장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大乘의 空思想과 아비달마의 有思想을 종합하고 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말나식은 근원적인 我執의 근거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그 淵源은 부파불교의 隨眠說과 種子說 그리고 意根說을 들 수가 있고, 가까이는『攝大乘論』의 染汚意에서 찾을 수 있다. 我執은 수행과정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근원을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種子說과 알라야識說의 淵源과 成立에는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다. 8識說은 근본불교 이래의 心意識에 대한 心體一說을 心體別說로 하여 6식설을 확대한 것이다. 8識의 根本識인 알라야식은 사실 第6意識을 확장하여 해석한 것이며, 第7末那識도 그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근본불교의 十二緣起說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부파불교의 업감연기설에서는 業力의 저장과 果報가 문제되기 때문에, 前者의 문제에는 알라야식이 상정되고 後者의 문제에는 種子가 설정된다. 나아가 알라야식은 업력(종자)보존의 장소로서 경량부의 色心互熏說의 불합리한 점까지 해결한다.
제Ⅳ章 '世親 唯識思想의 成立'에서는 크게 '世親의 五蘊說'과 '世親의 心識思想'으로 나누어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世親은『大乘五蘊論』에서 오온설을 대승적으로 확장해석하여 5위100법설의 터전을 마련한다. 내용에 있어서 부파의 5온설이나 大乘의 五蘊說은 모두 色法을 먼저 다루고 있으며, 그 해설의 순서도 같다. 심왕·심소설에 있어서는 약간 견해를 달리하지만 설명상의 표현이 조금 다를 뿐 크게 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친이 識蘊을 心·意·識으로 분류하여 心은 알라야識이며, 意는 4根本煩惱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여 제7말나식임을 암시하는 점은 그가 대승적인 識觀으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大乘百法明門論』에서는 5위100법 사상의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대승백법명문론』과『유식30송』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51심소설에 있어서는 서로 같다. 그러나 전자에는 色法과 不相應行法은 있지만 三性說이 없고, 후자에는 색법과 불상응행법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삼성설이 있어서 그 점에서는 서로 다르다.
世親의 心識思想은 唯識思想의 체계적인 완성으로서, 唯識思想을 하나의 위대한 철학으로 자리잡게 한다. 먼저『唯識20論』의 唯識無境說은 우리들의 삶의 양상은 外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業力에 따라 전개되어 가는 것임을 역설하여, 각 개인들은 업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든지 결코 동일하게 보거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음『唯識30頌』의 識轉變說은 일상적인 認識과 經驗은 無始以來로 알라야식에 간직되어 있는 업력의 종자들이 現行한 것이며, 我와 法도 識轉變에 의거하여 主觀的으로 假立된 것임을 설명한다. 나아가 無我나 空性을 자기의 구체적인 인식영역으로 끌어들여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알라야식설은 부파불교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던 업력의 보존·심상속·윤회의 주체 문제를 합리적이고 명쾌하게 해결한다. 무상·무아설이나 刹那滅論 등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人格의 주체나 생명의 지속 그리고 微細心의 계속과 업력의 보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업력의 보존장소 문제까지 잘 해명하는 것이다. 특히 알라야식설이 해결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輪廻論과 無我論에 대한 오해이다. 윤회는 變化이며 변화를 떠나서 생명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삶의 흐름속에는 변치않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비슷한 業力으로 해서 아주 유사한 相續은 가능하지만 불변의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윤회는 無我라야 가능한 것이며, 無常과 無我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변화인 윤회는 불가능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무상과 무아에 대한 無知로 해서, 인류는 영혼이나 不變의 我를 상정하고 어리석은 믿음을 견고히 하면서 일시적인 慰安을 받아왔다. 윤회의 주체가 常住不變하는 것이라면 윤회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던 나와 저녁에 퇴근하는 나는 불변의 동일인물이 아니다. 나의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다. 퇴근하는 집도 출근하던 그 집이 아니다.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고 그 집이 바로 그 집이라면, 그 나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고, 그 집을 지을 수도 부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아론과 윤회론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상·무아가 아니면 윤회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전혀 문제될 수 없는 것이 불교사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이다.
末那識說은 부파불교의 교리중에서 大衆部의 隨眠說과 經量部의 種子說, 그리고 부파불교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意根說에 그 淵源을 두고 있었다. 수면설과 종자설은 근본번뇌의 生起문제를 해결할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부파불교에 있어서는 心體一說에 입각하여 前찰나의 6識作用을 가리켰던 의근설이 대승불교에 이르러 독립된 識體로 발전하게 되는 萌芽가 된다는 점에서 각각 말나식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말나식설은 無我의 진리를 망각하게 되는 근본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根本煩惱를 발견하고, 그 근본번뇌의 근원이 바로 제7말나식임을 알게 됨으로써 성립되었다. 불교수행에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我執의 煩惱障과 法執의 所知障도 恒審思量하는 말나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第7識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識體로서, 그리고 말나식이라는 명칭으로 정착되는 것은 世親의『大乘百法明門論』에서 이므로, 이러한 말나식을 중요시하여 제7식으로 확정짓는 사람은 바로 世親이었던 것이다. 그리고『唯識30頌』이 心所論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實踐修行이 결국 마음의 문제임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三性·三無性說은 般若 空思想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확립된 것이며, 세 가지의 존재방식은 인식주체의 면에서 본다면 세 가지 마음의 형태[존재방식]이다. 이 說들은 유가행파가 空을 논리의 세계에서 자기체험의 세계로 끌어올려서 識이라는 구체적인 인식활동의 場에서 체험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며, 현실의 수행생활을 통해서 얻은 인식체험에 입각하여 이론화한 것이다. 또한 반야 공사상을 잘못 이해하여 惡取空의 虛無主義로 흐를 위험성을 제거하고자 하는 목적이 깔려있다. 또 삼성·삼무성설은 근본불교의 緣起說이나 初期 大乘佛敎의 空思想과 中觀學派의 二諦說보다 마음의 존재방식을 더욱 자세하게 분석하여 설명하고, 수행 가능성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삼성설은 緣起에 대한 재해석임을 알 수 있다. 根本佛敎의 十二緣起說에는 流轉門과 還滅門이 있는데, 流轉門은 依他起가 분별과 집착으로 흘러 遍計所執性이 되는 것으로, 還滅門은 遍計所執에서 의타기로 환원하는 圓成實性이 되는 것으로 설명하여 그 구조를 더욱 자세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대승초기 般若思想에서의 空[ nya]은 의타기이고, 空性[ nyat ]은 원성실성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생들의 존재방식으로서의 변계소집성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中觀學派의 二諦說에서 俗諦는 의타기의 세계를 변계소집으로 일으키는 것으로, 勝義諦는 변계소집에서 의타기로 복귀하는 원성실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그 분석이 삼성설보다는 단순하고 불충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三無性說은 삼성설에 대한 집착마저 경계하여 唯識思想이 실천수행에 근거하고 있으며, 수행을 지향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唯識30頌』에 보이는 '種子生現行·現行熏種子' 및 '種子生種子'라는 기초적인 構圖의 확립은 알라야식설과 더불어 세친 이전에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던 거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잠재적인 상태로 이어지는 '種子生種子'라는 구도는 異時因果를 나타내며 時間의 성립 그리고 업력보존의 지속·기억의 유지·생명의 지속·번뇌의 지속 등의 문제를 해결한다. '現行熏種子'의 구도는 기억이나 업력이 보존되는 것과 수행 향상 의 가능근거 등의 문제를 해결한다. '種子生現行'의 구도는 현행되는 것들은 모두 熏習된 자기 업력의 종자가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業대로 살아가는 중생들의 다양한 삶의 형태와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 그리고 想起의 문제나 전찰나의 마음과 다른 마음이 현재에 생기할 수 있는 이유와 滅盡定 등의 無心位에서 다시 의식의 회복이 가능한 점 등의 문제를 해결한다. '종자생현행·현행훈종자·종자생종자'의 단순한 구도로써 거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이러한 이론의 확립은 人類 哲學史上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일 것이다. 世親의 偉大性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제Ⅴ章 '世親의 修行思想'에서는 그가 자신의 唯識思想을 토대로 하여 대승사상을 수행이론에서는 어떻게 구체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유식의 모든 교리는 요가의 실천에 근거하고 있다. 瑜伽行派의 修行理論은 대승의 기본이념을 충실히 계승하되 그것을 실천수행에 합당하게끔 체계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輪廻의 主體인 알라야식에는 有漏種子와 無漏種子가 함께 있으므로 人格의 質的인 轉換의 根據도 알라야식에 있다. 我와 法은 識轉變에 의해 생성되고, 識變現[見分·相分]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我와 法은 識變現일 뿐인데, 범부는 인격적 실체나 心外의 境으로 집착한다. 識은 의타기의 것으로 無自性[空]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智로 전환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바라밀행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근본불교에서 緣起는 流轉과 還滅의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 緣起가 唯識思想에서는 三性 중의 의타기성인데 我[aham]의 성립이 他에 근거하므로, 의타기성을 회복한 자는 利他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알라야식의 의타기성은 필연적으로 보살의 바라밀행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이론적으로는 三性說이 뒷받침 해주고, 실천적으로는 波羅蜜行이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唯識思想의 대승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원성실성은 空性이며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佛性으로서, 인격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를 말해주는 것이다.
唯識은 스스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依他起性의 것이다. 현실적으로 虛妄分別의 識에서 無分別의 智로 방향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菩薩의 波羅蜜行이다. 무분별은 利他行으로 이어지고, 이 이타행이 無住處涅槃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利他가 곧 自利가 된다. 특히 10바라밀 중에서 뒤의 4바라밀은 모두 중생구제를 위한 무분별의 순수한 이타행으로서 轉識得智한 後의 보살행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보살행의 완성이 究境位[佛地]이며, 원성실성의 완전한 구현이 無上正等覺이다. 唯識思想은 알라야식으로 모든 것의 근거를 설명하고, 識轉變說을 통하여 현상의 다양성을 드러내고, 三性說을 통하여 8식이 가지고 있는 轉識得智[轉依]의 전환구조를 말하고, 이러한 전환으로부터 근본 無分別智에 의한 보살의 波羅蜜行을 제시하고, 무분별의 後得智로써 현실세계에서 佛國淨土의 구현이 가능함을 밝히고 있다.
唯識思想은 존재 그 자체 보다는 개인의 인식을 통한 존재형태를 말하고자 한다. 유식도 개인 마다의 唯識을 말하는 것이며, 수행을 위한 것이므로 唯識思想은 결코 觀念論이 아니다. '내 마음 밖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문제보다는,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 들이고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그것과 어떻게 관계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삶의 문제이다. 불교는 근본불교 시대로부터 그것을 말해왔고, 唯識思想은 그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세친은 그러한 唯識思想을 체계적으로 완성하여 수많은 문제점을 해결한 위대한 哲人이었다. 그의 唯識思想은 수행자의 체계적인 指針으로서 완비된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수행의 길을 오류없이 갈 수 있도록 정확한 방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일만이 남아있다. 그러한 修行만이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편안하고 따뜻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참다운 삶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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尊者法勝造 僧伽提婆·慧遠譯,『阿毘曇心論』, 大正藏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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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無相論出 眞諦譯,『顯識論』, 大正藏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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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阿賴耶識의 淵源에 대한 考察」,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佛敎學報』제11집, 1974.
「唯識學의 五位百法에 대한 考察」,동국대학교 대학원『硏究論集』 제4집, 1974.
「十代論師 및 諸家論師에 대한 小考」, 동국대학교『東國思想』제7 집,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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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那識의 名稱과 所依說에 대한 考察」,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 원『佛敎學報』제19집,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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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f the Origin and the formation of Vasubandhu's vij aptim tra(perception only).
Kim, Jin-Tae
Department of Buddhist Studies
Graduate School, Dongguk University
Vasubahdhu( around the 5th century A. D.), the author of the Abhidharmako a and its commentary is said to have been converted to Mah y na Buddhism by his elder brother Asa ga. He succeeds in systematizing the philosophical views of the Yog c ra school and designates the tenet of the school as vij aptim tra(perception only). In theory he extends the doctrine of the six types of consciousness in the Abhidharmic school to theory of the eight types of consciousness. He interprets the five aggregates in Daeseungoonron in terms of Mah y na Buddhism. He formulates the system of "five categories one hundred dharms" in Daesungbaekbeobmyeongmunron. He demonstrates "the perception only without objects" in Vi atik . He expounds the transformations of consciousness in Tri atik . As Vasubahdhu has written a number of Abhidharmic commentaries before becoming a propounder of vij aptim tra(perception only) school in the Mah y na tradition, it should be logical to suppose that we trace the origin of his vij aptim tra- thought back to Abhidharmic Buddhism, and even further back to early Buddhism.
Vasubandhu's vij aptim tra(perception only) is to be understood in the background of the M dhy mika teaching, the Praj p ramit thought, and the teachings prior to Mah y na Buddhism. He is directly influenced by his bother. The origin of the cittam tra thought is traced back in the three ways. First of all, the cittam tra thought finds its perfection in the tradition of Buddhist psychology since early Buddhism which focuses upon the matter of mind in order for practitioners to free mind from defilements such as desire. Second, in Abhidharmic Buddhism the problem of how to explain the agent of sa s ra helps the cittam tra thought to formulate the idea of l ya consciousness, and of b ja(seeds). Third, the cittam tra thought refutes the two metaphysical extremes of existence and non-existence; one is the Sarv stiv din theory of self-nature or substance(svabh va) while the other is the nihilistic understanding of Madhyamaka's emptiness. In order to correct the former, the idea of l ya consciousness is presented while to counteract the latter, the teaching of the Three Aspects(trisvabh va), or the three transformations of consciousness is explained. In other words, the cittam tra thought finds its perfect position between the theory of Abhidharmic substantialism and that of M dhy maka's non-substantialism. It firmly adheres to the doctrine of the Middle Way. It adheres neither to the doctrine that all things exist because it takes the view that nothing outside the mind exists, nor to the doctrine that nothing exists because it asserts that perception does exist
Vasubandhu's thought is applied to solve many controversial problems in the history of Buddhism. His idea of l ya consciousness, or of b ja(seeds), which avoids the metaphysical entity like tman in the Brahmanical tradition explains the doctrinal problems: the conflict between the teaching of non-self(an tman) and transmigration, the continuity of personality, the maintenance of life-process, latent defilements, the recovery of consciousness from the meditative state, the process of memory.
His idea of manana(self-consciousness) explains how the feeling of oneself(self-attachment) arises. Self-love( tma-sneha) is due to manana, the second formation of consciousness which originates in l ya consciousness. His manana shows the origination and the eradication of egoism, a major hinderance to religious practices in Buddhism.
Vasubandhu's Vi atik teaches the theory of perception only without objects; All this is only perception, since consciousness manifests itself in the form of nonexistent objects. The idea of "only a flow of perceptions" puts a heavy emphasis on the consciousness which plays an important role in epistemology and shows that the past karma is a major factor in the foundation of recognition by sentient beings. When he finishes an examination of philosophical issues in Vi atik , he moves to an analysis of the psychology of perception in the Tri atik .
The Tri atik is a verisified text on the theory of mere ideation in thirty stanzas, of which the first twenty-four are devoted to the special character(svalak a a) of all dharmas, next to the nature(svabhava) of all dharmas, and the last four to the stages of the noble personages. In this fundamental text of he Yog c ra school, he advocates the theory of the three transformations of consciousness, which expounds that ordinary experiences are manifestations of the seeds(b ja) of past karma. He also teaches that subjects and objects are results of the formations of consciousness.
He intends to explain 'non-self' and 'emptiness-nature' in terms of consciousness. The teaching of the three transformations(pari ma), though it is based upon the theory of emptiness is established to correct the weak points in the theory of emptiness. The three mode of existence are merely the 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 from the point of view of a subject.
As the term Yog c ra, another name for the consciousness-only school shows, this school is founded upon the experience of deep meditation, not just upon the logical reasoning of emptiness. In the system of practices, the five stages are presented; p ramit practice are the most important. l ya contains seeds, both pure and impure so that the transformation of personality is base upon this fundamental consciousness.
The dependent aspect(paratantrasvabh va) of the three aspects(trisvabh va) shows "self" depends upon others; the realization of this aspect have the enlightened ones do benefits for others, which is the p ramit deeds of a Bodhisattva in the Mah y na tradition. Among the ten p ramit deeds, the four p ramit ones such as means-p ramit (up yap ramit ) are pure beneficial actions which a bodhisattva undertakes after he transform his consciousness to obtain wisdom.
Vasubandhu, a master of the Buddhist tradition before him, organizes and formulate the idea of vij aptim tra(perception only) to settle down the theoretical controversies in the Buddhist history. As an earnest practitioner, he provides the right way of practising for us to achieve the Buddhist goal.
1)제6의식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極睡眠·極悶絶·無想天·無想定·滅盡定의 다섯가지 상태를 말한다.
2)三枝充悳 편, 김 진무 옮김, 『인간론·심리학』, (서울:불교시대사,1996),p.165
3)權五民,『有部阿毘達磨와 經量部哲學의 硏究』, (서울:경서원,1994), p.232참조.
4)眞諦는 499년 중인도 서쪽에 위치한 웃쟈이니의 바라문 집안에서 출생했다. 535년梁의 武帝에게 초빙되어 중국으로 와서, 양의 말기로부터 陳代에 걸쳐 활동한 번역승이다. 그는『俱舍論』의 漢譯者의 한 사람이며, 38부 118권을 번역하여 구마라집·현장·不空과 함께 중국의 4대 번역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569년 이국 땅 중국에서 22년 동안의 파란과 불운의 불행한 삶을 향년 70세로 생을 마친다. 진제의『婆藪槃豆法師傳』은『大正新脩大藏經』(이하『大正藏』으로 略稱함)제50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婆藪槃豆法師傳』은 진제의 번역이라고 되어 있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진제의 창작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이것은 전체가『大正藏』50권 pp.188∼191에 수록된 3쪽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며, 그나마 세친과 관련되는 내용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5)玄 이 17년에 걸쳐 인도를 여행하며 저술한『大唐西域記』에도 世親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婆藪槃豆法師傳』의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자면『俱舍論』을 지은 것은 뿌루샤뿌라에서 이며, 형 無着의 권유로 대승에 귀의한 것은 아요디야에서 라고 한다. 또한 세친이 무착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6)三枝充悳, 송인숙譯,『세친의 삶과 사상』(서울:불교시대사,1993), pp.21∼22 참조.
7)현재의 라크노 동쪽 120킬로미터 지점, 고그라 강변이다.
8)眞諦 譯, 『婆藪槃豆法師傳』(『大正藏』50, p.188上中下). 三枝充悳, 앞의 책, p.32 참조.
9)진제 역, 같은 책, P.190上中. 삼지충덕, 같은 책, pp.42∼43 참조.
10)진제 역, 같은 책, P.190中下. 삼지충덕, 같은 책, pp.43∼44 참조.
11)무착의 탄생년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異說이 있다. 곧『辯中邊論述記』卷上과『成唯識論了義燈』第一本 및『瑜伽論記』第一上 등에 의하면 佛滅後 900년으로 되어 있고,『대당서역기』卷五에는 불멸후 1000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攝大乘論序』에는 불멸후 1100년으로 전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력하게 인용하는 것은 불멸후 900년說이다. 무착의 출가교단에 대해서도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婆藪槃豆法師傳』에서는 '說婆多部[說一切有部]'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반면에『대당서역기』에서는 '化地部'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화지부의 교의 가운데 窮生死蘊說·種子相續說 등 唯識敎義의 선구적인 사상이 보인다는 점에서 화지부 출가설이 합리적일 것 같다. 그는 世壽 75세에 왕사성(Rajagrha)에서 입적하였다.
12) 櫻部 建 外1, 정호영 역, 『아비달마의 哲學』(서울:민족사,1989), P.139 참조.
13)진제 역, 앞의 책, PP.190下∼191上. 삼지충덕, 같은 책, PP.43∼45 참조.
14)櫻部 建 外1,앞의 책, p.138 참조.
15)三枝充悳, 앞의 책, p.53 참조.
16)진제의 『婆藪槃豆法師傳』과 『成唯識論述記』에 인용된 진제의『중변불별론소』, 그리고 慧祥의『법화전기』에 인용된 진제의 기술에 각각 흩어져 기록되어 있다.
17)현장의『대당서역기』와『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18)규기의『成唯識論述記』와 진제가 번역한『섭대승론석』의 서문에서 보인다.
19)櫻部 建 外1, 앞의 책, p.141 참조.
20)유가행파의 시조는 미륵이라고 한다. 그러나『유가사지론』의 저자로 알려진 미륵이 역사상의 실존인물인가, 아니면 단지 전설상의 인물인가의 문제는 예로부터 논란거리였다. 근대에 와서 우정백수 박사 등이 그 시대에 생존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다. 유가행파의 개조로서의 미륵논사를 옛부터 장래불로서 도솔천에 살고 있다는 미륵보살과 동일시 하는데에는 신앙을 넘어 유가행파의 唯識思想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唯識思想은 석존 교설의 가장 완벽한 해설이자, 미래불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21)뒷날 즉위하여 新日王으로 불린다.
22)앵부 건,「フうウワルナ-氏の 世親年代論 について」, 『인도학불교학연구』1-1, P.202 이하.
23)平川彰, 이호근 譯, 『印度佛敎의 歷史』下(서울:민족사,1991), p.95 참조.
24)같은 책, pp.95∼96 참조.
25)세친을 4세기의 인물로 간주하는 설과 5세기의 인물로 간주하는 설이 대립되어 해결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고 하지만, 아비달마로 부터 대승불교 나아가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사상활동을 1인의 세친에게 귀일시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었다.
26)예를 들자면, 구마라집이 번역한 제바의 『백론』은 바수개토의 주석을 달고 있는데, 프라우발너는 이 바수개토를 세친으로 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바수개토는 세친과 다른 사람으로 생각된다. 또 프라우발너는 보리류지역의『금강선론』권10의 권 末 [『대정장』25, p.874 下]에 설해져 있는 師資相承說을 사실로 인정하고 이를 채용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을 가지는 학자가 많다. 프라우발너가 세친2인설을 취하였으나, 세친의 저작으로 알려진 모든 저작이 古·新의 세친 중 누구에게 귀속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27)平川彰, 앞의 책, p.97 참조.
28)우파제사는 경전의 형태를 형식과 내용에 따라 12종으로 구분한 12部經[十二分敎]의 一支이며, 대승에 와서는 경전의 주석에 이 이름이 사용되었다.
29)平川彰, 앞의 책, P.100 참조.
30)같은 책, PP.101∼102 참조.
31)같은 책, pp.102∼103 註46). ( S. L vi: Vij aptim trat siddhi Vi atik et Tri ik , Paris, 1925. 日譯 荻原雲來, <安慧造 三十唯識の釋論和譯>·<二十頌唯識論和譯>,《荻原雲來文集,》p.628 이하;宇井伯壽,《安慧唯識護法有識三十頌釋論》, 1952. 同,《四譯對照二十論硏究》, 1953. 山口益·野澤靜證,《世親唯識の原典解明》, 1953. 이 책에는《유식삽십송》《유식이십론》, 진나의《觀所緣論》에 대한 調伏天의 疏 및 일역이 수록되어 있다. 위의 여러 학자들의 일역에는 범문 정오표가 붙어 있다. 寺本婉雅,《西藏文世親造唯識論》, 1923. 이 책에는《이십론》《삽십송》의 게문의 일역 및 티베트문이 실려 있다. 梶山雄一,《唯識二十論》·荒牧典俊,《唯識三十頌》,《大乘佛典》15, 1976.《유식이십론》의 한역텍스트에 관해서는 佐佐木月樵,《唯識二十論の對譯硏究》, 1923이 있다.)를 재인용.
32)宇井伯壽,「成唯識寶生論硏究」,『大乘佛典の 硏究』, p.607 이하.
33)平川彰,앞의 책,p.103 참조. 三枝充悳, 앞의 책, pp.114∼115 참조.
34)宇井伯壽, [『印度哲學史』, p.364 ]와 結城令聞[『世親唯識の 硏究』 상, p.176 이하] 은 세친이 지었다고 본다. 鈴木宗忠 [「俱舍論の 心所說に關する 硏究」,『宗敎硏究』新제8권]은 세친의 저작이 아니라고 본다.
35)동북목록 4063.
36)평천창, 앞의 책, pp.103∼104 참조.
37)동북목록 4022·4023.
38)山田龍城,『梵語佛典の 諸文獻』, p.136.
39)平川彰, 앞의 책, pp.104∼105 참조.
40)金東華,『佛敎敎理發達史』. (대구:삼영출판사, 1983), p.49 참조.
41)櫻部建 外1, 앞의 책, p.51 참조.
42)『잡아함경』(대정장2, p.87下).
"此四無色陰 眼色此等法名爲人 於斯等法作人想."
43)이중표,『아함의 중도체계』(서울:불광출판부, 1991), p.163 참조.
44)三枝充悳 편, 심봉섭 譯,『인식론·논리학』(서울:불교시대사, 1995), p.27 참조.
45)이중표, 앞의 책, p.132 참조.
46)같은 책, pp.134∼135 참조.
47)삼지충덕 편, 앞의 책, pp.39 참조.
48)이중표, 앞의 책, pp.154∼155 참조.
49)같은 책, p.155 참조.
50)앵부건 外1, 앞의 책, p.51 참조.
51)平川彰, 앞의 책, p.61 참조.
52)같은 책, p.62 참조.
53)平川彰, 앞의 책 上, p.72
54)이중표, 앞의 책, p.185 참조.
55)같은 책, p.185 참조.
56)같은 책, p.186.
57)앵부건 外1, 앞의 책, p.51∼52 참조.
58)金東華,『原始佛敎思想』(서울:보련각,1988), pp.194∼195 참조.
60)『雜阿含經』36(『大正藏』2, p.264 上).
"誰持世間去 誰拘牽世間 何等爲一法 制御於世間."
61)같은 책, 같은 쪽.
"心持世間法 心拘引世間 其心爲一法 能制御世間."
62)金東華,『原始佛敎思想』, p.196 참조.
63)『잡아함경』10 (『대정장』2, p.69 下).
"諸比丘 當善思惟觀察於心 所以者何 長夜心爲貪欲使染瞋 愚癡使染故 比丘 心惱故衆生惱 心淨故衆生淨...... 譬如 師 師弟子 善治素地 具衆彩色 隨意圖 種種像類."
64)80『大方廣佛華嚴經』19 (『大正藏』10, p.102 上).
"心如工 師 能 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65)『中阿含經』27 (『大正藏』1, p.600 上).
"云何知業 謂有二業 思已思業 是謂知業."
66)『雜阿含經』12 (『大正藏』2, p.80 中下).
"何法有故老死有 何法緣故老死有 卽正思惟 生如實無間等 生有故老死有 生緣故老死有. …… 何法緣故名色有 卽正思惟 如實無間等生 識有故名色有 識緣故有名色有 我作是思惟時 齊識 而還不能過彼."
67)이중표, 앞의 책, p.113 참조.
68)金東華,『佛敎 唯心思想 發達史』, p.44 참조.
69)『雜阿含經』12 (『大正藏』2, p.81上).
"有老不 答言有 尊者舍利佛 復問 有死不 答言有 復問 云何老死自作耶 爲他作耶 爲自他作 耶 爲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 尊者舍利佛 老死非自作非他作 非自他作 亦非非自他作無因作 然彼生緣故有老死……然彼名色緣識生……然彼識緣名色生".
70)이 중표, 앞의 책, p.114 참조.
71)『장아함경』16 (『大正藏』1, p.102下).
"何由無四大 地水火風滅 何由無 細 及長短好醜 何由無名色 永滅無有餘 應答識無形 無量 自由光 此滅四大滅 細好醜滅 於此名色滅 識滅餘亦滅".
72)三枝充悳 編, 『인간론·심리학』, pp.167∼169 참조.
73)金東華,『原始佛敎思想』, p.198 참조.
74)平川彰, 앞의 책, pp.183∼184 참조.
75)三枝充悳 編, 앞의 책, pp.187∼188 참조.
76)『雜阿含經』12(『大正藏』)2, p.82 上.
"彼心意識 日夜時剋 須臾不停 種種轉 異生異滅 譬如 遊林樹間 須臾處處 攀捉枝條 放一取一 彼心意識 亦復如是 種種 易 異生異滅."
77)『雜阿含經』21(『大正藏』2, p.150 上中).
"想思是意行 依於心 屬於心 依心轉 是故想思是意行 …… 想思是心數法 依於心 屬於心 相轉 是故想思名爲意行."
78)吳亨根,『唯識과 心識思想 硏究』(서울:佛敎思想史,1989), p.20 참조.
79)金東華,『佛敎 唯心思想 發達史』, p.36 참조.
80)『잡아함경』47(『대정장』2, p.341 中下).
"如鑄金者 積聚沙土 置於槽中 然後以水灌之 上煩惱剛石堅塊 隨水而去 猶有 沙纏結 復 以水灌 沙隨水流出 然後生金 猶爲細沙黑土之纏結 復以水灌 沙黑土隨水流出 然後眞金 純淨無雜 如是淨心 進向比丘 煩惱纏 惡不善業 諸惡邪見漸斷令滅 如彼生金淘去剛石堅 塊"
81)覺은 산스끄리뜨 vitarka의 舊譯이며, 新譯은 尋이다. 觀은 산스끄리뜨 vicara의 舊譯이며, 新譯은 伺이다. 覺과 觀은 細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저것은 무엇일까?'라고 추구하고 헤아리는 마음, 곧 대상에 대한 知覺과 思惟이다. 그러나 覺과 觀 모두가 추구하고 헤아리 는 마음이지만, 覺은 사물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인데 비 해, 觀은 보다 깊이 자세하게 사물을 추구하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覺은 마음을 바깥으로 향하게 하는 心所이며, 觀은 이미 작용이 끝난 대상을 言表하는 心所이다. 그리고 覺·觀 은 제6意識과만 相應하는데, 언어작용을 일으키고, 分別이며, 散地와 定地에 다 있으며, 欲 界뿐만 아니라 色界의 初禪에도 통하는 禪支이다.
82)正受는 산스끄리뜨 sam patti의 번역이다. 음역은 三摩鉢底·三摩拔提로 했으며, 意譯은 等 至·正定現前으로 했다. 삿된 생각을 멀리 떠나 바르게 所緣의 境을 받아 들이는 상태이 다. 또 定에 들었을 때 定의 힘으로써 몸과 마음을 평등하고 안온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다. 또한 定心으로 삿됨과 산란함을 여읜 것을 '正'이라 하고, 無念無想의 경지에서 法을 받아 들여 마음에 두는 것을 '受'라고 한다.(『불광대사전』)
83)『잡아함경』47(『대정장』2, p.341 下), p.2989.
"復次比丘 離諸覺觀 乃至得第二第三第四禪 如是正受 純一淸淨 離諸煩惱 柔軟眞實 不動於 彼 彼入處欲求作證悉能得證 如彼金師陶鍊 生金極令輕軟 光澤不斷 任作何器 隨意所欲 如 是比丘 三昧正受 乃至於諸入處 悉能得證".
84)『사리불아비담론』27(『大正藏』28, p.697 中).
"心性淸淨 爲客 染 凡夫未聞故 不能如實知見 亦無修心, 聖人聞故 如實知見 亦有修心 心性淸淨 離客 垢 凡夫未聞故 不能如實知見 亦無修心 聖人聞故 能如實知見 亦有修心"
85)平川彰, 앞의 책, p.178 참조.
86)三枝充悳 編, 앞의 책, pp.184∼186 참조.
87)같은 책, pp.186∼187 참조.
88) 橫山紘一, 『唯識とは何か』(東京:春秋社, 平成2年), p.130 참조.
89)平川彰, 앞의 책, p.184 참조.
90)世友 造,『阿毘達磨品類足論』1(『大正藏』26, p.692 中下).
"心云何 謂心意識 此復云何 謂六識身 卽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 心所法云何 謂若法心相 應 此復云何 謂受想思觸作意欲勝解念定慧信勤尋伺放逸不放逸善根不善根無記根 一切結縛隨 眠 隨煩惱纏 諸所有智 諸所有見 諸所有現觀 復有所餘如是類法與心相應 總名心所法."
91)吳亨根, 앞의 책, pp.21∼23 참조.
92)世友 造, 앞의 책, p.698 中.
"十大地法云何 謂受想思觸作意欲勝解念定慧 十大善地法云何 謂信勤慙愧無貪無瞋輕安捨不 放逸不害 十大煩惱地法云何 謂不信懈怠失念心亂無明不正知非理作意邪勝解掉擧放逸 十小 煩惱地法云何 謂忿恨覆惱嫉 諂 害 五煩惱云何 謂欲貪色貪無色貪瞋痴."
93)오형근, 앞의 책, p.22 참조.
94)平川彰, 앞의 책, p.182 참조.
95)같은 책, 같은 쪽.
96)大目乾連 造,『아비달마법온족론』5(『大正藏』26, p.473 下).
"此中心者 謂依出家遠離所生善法 所起心意識 是名心."
97)註90) 참조.
98)法勝,『阿毘曇心論』1(『大正藏』28, p.810 中).
"心者意 意者識 實同而異名."
100)같은 책, p.371中.
"復有說者 心意識三亦有差別 謂名卽差別 名心名意名識異故 復次世亦差別 謂過去名意 未來名心 現在名識故 復次施設亦有差別 謂界中施設心 處中施設意 蘊中施設識故 復次義亦有差別 謂心是種族義 意是生門義 識是積聚義 復次業亦有差別 謂遠行是心業 …… 前行是意業 …… 續生是識業 …… 復次滋長是心業 思量是意業 分別是識業 脇尊者言 滋長分割是心業 思量思惟是意業 分割解了是識業 應知此中滋長者是有漏心 分割者是無漏心 思量者是有漏意 思惟者是無漏意 分別者是有漏識 解了者是無漏識 心意識三是謂差別".
101)金妙注,『唯識思想』(서울:경서원,1997), p,163 참조.
102)權五民,『有部阿毘達磨와 經量部哲學의 硏究』(서울:경서원,1994), pp.152∼153.
103)『成唯識論』卷3(『大正藏』31, p.11下).
"此觸等五 與異熟識 行相雖異 而時依同 所綠事等 故名相應".
104)『成唯識論述記』卷3末(『大正藏』43, p.331上)참조.
105)『俱舍論』4 (『大正藏』29, p.21 下).
"集起故名心 思量故名意 了別故名意 復有釋言 淨不淨界 種種差別 故名爲心 卽此爲他 作 所依止 故名爲意 作能依止 故名爲識 三名所詮 義雖有異 而體是一".
106)金東華,『俱舍學』(서울:백상원,1982), pp.88∼89 참조.
107)『구사론』1 (『大正藏』29, p.4上).
"各各了別 彼彼境界 總取境相故 名識蘊 此復差別 有六識身 謂眼識身 乃至意識身".
108)김 동화, 앞의 책, p.89 참조.
109)『구사론』2 (『大正藏』29,p.12下).
"由所依勝及不共因故 識得名隨根非境".
110)김 동화, 앞의 책, p.90 참조.
111)같은 책,pp.90∼91 참조.
112)三枝充悳 編, 『인간론·심리학』, p.193 참조.
113)김 동화, 앞의 책, pp.93∼94 참조.
114)三枝充悳 編, 앞의 책, p.193 참조.
115)심소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6류의 심소법에 관하여서만 간단히 설명한다. 제1의 대지법이란 모든 유정의 心王에 반드시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俱起하는] 심소로서, 만약 어떤 심왕이 있다면 거기에는 항상 대지법의 10심소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한다. 제2의 대선지법이란 모든 善心에는 반드시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心所가 있어서, 三界와 출세간의 선심에는 항상 대선지법의 10심소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한다. 제3의 대번뇌지법이란 모든 번뇌심에 반드시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심소로서, 삼계의 번뇌심은 언제나 대번뇌지법의 6심소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제4의 대불선지법이란 모든 불선심에 반드시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심소로서 욕계의 불선심은 언제나 대불선지법의 2심소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제5의 소법뇌지법이란 이것에 속한 10심소는 각기 단독으로 발생하지 않으며, 다른 소번뇌지법과 함께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 10심소의 하나가 발생할 때에 대번뇌지법의 6심소와 10대지법도 동시에 함께 일어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제6의 부정지법이란 앞의 다섯 가지의 분류에 들어가지 않는 정해지지 않은 심소법을 말한다.(三枝充悳 編, 앞의 책, pp.194∼195 참조).
116)『구사론』4, p.20上.
117)三枝充悳 編, 앞의 책, p.194 참조.
118)같은 책, PP.196∼196 참조.
119)『佛說大生義經』(『대정장』1, p.844 下)의 전체적인 내용 참조.
120)金東華, 『佛敎敎理發達史』(대구 : 삼영출판사, 1977), pp.86∼87, pp,188∼192, p.198 참조.
121)吳亨根, 『唯識思想硏究』(서울 : 불교사상사, 1983), p.123.
122)世友 造, 『異部宗輪論』(『대정장』49, p.45下).
"心性本淨 客塵煩惱之所雜染 說爲不淨."
123)『異部宗輪論』, pp.15下∼16上.
"隨眠非心 非心所法 亦無所緣 隨眠異纏 纏異隨眠 應說隨眠 與心不相應 纏與心相應."
124)金東華, 『俱舍學』, p.256 참조.
125)『구사론』19(『대정장』 29, p.98下)
"卽諸煩惱說名隨眠 由此隨眠是相應法 何理爲證知正相應 以諸隨眠染惱心故 覆障心故 能違善故 謂隨眠力能染惱心 未生善不生 已生善退失 故隨眠體非不相應".
126)같은 책, p.99上.
"然隨眠體 非心相應 非不相應 無別體故 煩惱睡位說明隨眠 於覺位中卽明纏故 何名爲睡 謂不現行種子隨逐 何名爲覺 謂諸煩惱現起纏心 何等明爲煩惱種子 謂自體上差別功能 從煩惱生煩惱 如念種子是證智生 能生當念功能差別 右如芽等有前果生 能生果後功能差別".
127)吳亨根, 앞의 책, p.121 참조.
128)吳亨根, 앞의 책, p.122 참조.
129)窺基, 『成唯識論述記』5, (『대정장』43, p.412上)
"胸中色物爲其意根."
130)無性, 『섭대승론석』1(『대정장』31, p.384中)
"經部所立 色爲意識俱生別依."
131)같은 책, 같은 쪽.
"經部所立 色爲意識俱生別依 此成就不應道理 由此道理餘部所位 胸中色物意識別依 亦不成就."
132)『俱舍論』3, p.13 下.
"了自境者 謂六識身 眼等五根於能 了別各別境識有增上用 第六意根於能了別一切境識有增上用 故眼等各立爲根."
133)吳亨根, 앞의 책, p.125 참조.
134)金東華,『佛敎學槪論』(서울:보련각,1984), pp.145∼147 참조.
135)權五民, 앞의 책, p.211 참조.
136)權五民, 앞의 책, p.213 참조.
137)世友의 '位不同說'에 의한 三世實有說의 定義이다. 三世實有의 현상적 차별에 대하여, 婆 沙의 4大論師인 法救·妙音·世友·覺天에 의해 네 가지의 학설이 주장되고 있는데, 有部 에서는 세우의 위부동설을 正說로 받아 들인다. 자세한 내용은『大毘婆沙論』제77卷에 실 려있다.
138)權五民, 앞의 책, pp.184∼185 참조.
139)불교성전 중 가장 오래된『숫따니빠다』나『법구경』에서도 고찰된다.
140)석존 당시에 브라만교는 제사 등의 종교적 행위만을 중시하여 형식주의로 흐르고, 육사외 도들은 극단적인 고행의 수행법 등으로 外的 行爲만을 중요시 하는 경향이었으므로, 그것 에 대한 불교의 철학적인 반성으로 보인다.
141)『順正理論』2 (『大正藏』29, p.335 下)
"作等 心等 及無心有記 無對所造性 是名無表色"
142)같은 책.36, p.545 中.
"無表有通善不善性無有無記 所以者何 是强力心所等起故 無記心劣無有功能 爲因等起引强 力業 令於後後餘心位中及無心時亦恒續起."
143)權五民, 앞의 책, p.114.
144)『俱舍論』19 (『大正藏』29, p.98下).
"阿毘達磨依實相說 卽諸煩惱說名隨眠 由此隨眠是相應法."
145)梶山雄一, 權五民 譯,『인도불교철학』(서울:민족사,1990), p.77 참조.
146)權五民, 앞의 책, p.217 참조.
147)같은 책, p.176 참조.
148)심불상응행법의 하나인 중동분[nik ya-sabh ga]을 동분[sabh gat ]이라고도 하는데, 여기 서의 동분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중동분은 유정을 유정이게끔 하는 일반성 내지 보편성이 나 유사성을 말한다.
149)『불광대사전』3, p.2243 참조.
150)權五民, 앞의 책, p.203 참조.
151)같은 책, p.203 참조.
152)같은 책, pp.203∼204 참조.
153)『異部宗輪論』(『大正藏』49, PP.15下∼16上).
"此中大衆部一說部說出世部鷄胤部 本宗同義者 隨眠非心 非心所法 亦無所緣 隨眠異纏 纏 異隨眠 應說隨眠與心不相應 纏與心相應."
154)權五民, 앞의 책, pp.221∼223 참조.
155)『大乘成業論』(『大正藏』31, p.783中).
"若爾, 應許由善不善身語二業, 蘊相續中引別法起. 其體實有, 心不相應行蘊所攝. 有說:「 此法名爲增長.」有說:「此法名不失壞.」由此法故, 能得當來愛非愛果. 意業亦應許有此法. 若不爾者, 餘心起時, 此便斷滅. 心相續中, 若不引起如是別法, 云何能得當來世果 是故定應 許有此法. 若於先時誦習文義, 後經久遠, 復生億念;又於先時, 於諸境界數見聞等, 後經久遠, 於彼境中還生億念;於何刹那引起何法, 由此後時還生億念.
156)權五民, 앞의 책, p.226 참조.
157)같은 책, pp.228∼229 참조.
158)『俱舍論』권19 (『大正藏』29, p.99上).
"若執煩惱別有隨眠心不相應名煩惱種 應許念種 非但功能別有不相應 能引生後念 此旣不 爾 彼云何然 差別因緣不可得故."
159)權五民, 앞의 책, pp.229∼230 참조.
160)같은 책, p.230 참조.
161)『俱舍論』권19 (『大正藏』29, p.99上).
"彼說 欲貪之隨眠義 然隨眠體非心相應 非不相應 無別物故 煩惱睡位說名隨眠 於覺位中卽 名纏故 何名爲睡 謂不現行種子隨逐 何名謂覺 謂諸煩惱現起纏心 何等名爲煩惱種子 謂自 體上差別功能 從煩惱生 能生煩惱 如念種子是證智生 能生當念功能差別 又如芽等有前果生 能生後果功能差別."
162)權五民, 앞의 책, pp.231∼232 참조.
163)『俱舍論』4 (『大正藏』29, p.22下).
"此中何法名爲種子 謂名與色於生自果 所有展轉隣近功能 此有相續轉變差別 何名轉變
謂相續中前後異性 何名相續 謂因果性三世諸行 何名差別 謂有無間生果功能."
164)같은 책, 같은 쪽.
"如是二種[得·非得]亦假非實 故所依中唯有種子 未拔未損增長自在於如是位 立成就名 無有 別物."
165)權五民, 앞의 책, pp.234∼241 참조.
166)『阿毘達磨界身足論』上 (『大正藏』26, p.614中).
"有十大地法 十大煩惱地法 十小煩惱地法."
167)平川彰, 앞의 책 上, p.184 참조.
168)같은 책, p.189 참조.
169)같은 책, pp.189∼190 참조.
170)世親,『大乘成業論』(『大正藏』31, p,785上).
171)『大毘婆沙論』151 (『大正藏』27, p.772下, p.774上).
172)無心位라 함은 마음이 작용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五位無心은 極睡眠·極悶絶·無想天 ·無想定·滅盡定을 말한다. 오늘날의 사정을 보탠다면, 전신마취나 극도의 최면상태도 이 무심위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173)有部는 心不相應行法으로서 14종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법에 無想定·滅盡定·無想天이 포함되어 있다. 무상정은 想이 소멸한 禪定이며, 이 定에서는 마음의 想의 단계까지 멸해 버린다. 멸진정은 滅受想定이라고도 하듯이, 想뿐만이 아니라 受의 단계까지 멸하는 것이 며, 무상정보다도 더욱 깊은 선정이다. 두 정은 모두 無心의 상태이기 때문에 心不相應行 으로 보며, 유부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실체시 한다.
174)『俱舍論』29 (『大正藏』29, p.151中).
"第八解脫卽滅盡定 彼自性等如先已說 厭背受想而起此故 或總厭背有所緣故 此滅盡定得解 脫名."
175)『雜阿含經』21 (『大正藏』2, p.150中).
"復問尊者有幾法
若人捨身時 彼身屍臥地
棄於丘塚間 無心如木石
答言長者
壽暖及與識 捨身時俱捨
彼身棄塚間 無心如木石
復間尊者 若死若入滅盡定受有差別不 答捨於壽暖 諸根悉壞 身命分離 是名爲死 滅盡定者 身口意行滅 不捨壽命 不離於暖 諸根不壞 身命相屬 此則命終入滅正受差別之相."
176)根과 境을 緣으로 識이 생기하는데, 이 三事의 和合이 觸이며, 이러한 촉을 緣으로 하여 受·想·思가 있게 된다.
177)經量部에서는 種子의 보존장소로서 잠재심을 상정하지 않고 色心互熏說을 주장했다.
178)『大毘婆沙論』152 (『大正藏』27, p.774上).
"謂譬喩者分別論師執 滅盡定細心不滅 彼說無有有情而無色者 亦無有定而無心者 若定無心 命根應斷 便名爲死非謂在定."
179)황순일,『經量部 世親의 layavij na 연구』,석사학위논문(서울:동국대학교 대학원,1994), pp.54∼55 참조.
180)『大乘成業論』(『大正藏』31, p.784下).
"心有二種 一集起心 無量種子集起處故 二種種心 所緣行相差別轉故 滅定等位第二心闕故 名無心 如一足床闕餘足故亦名無足."
181)황순일, 앞의 논문, pp.101∼110 참조.
182)『雜阿含經』13 (『大正藏』2 pp.87下∼88上).
"眼色緣生眼識 三事和合觸 觸俱生受想思 此四無色陰 眼色 此等法名爲人 於斯等作人想 衆生 那羅 摩 摩那婆 士其 福伽羅 耆婆 禪頭 又如是說 我眼見色 我耳聞聲.……是 則爲想 是則爲誌 是則言說."
183)權五民, 앞의 책, p.394 참조.
184)『雜阿含經』2 (『大正藏』2, p.11下).
"諸覺相是受受陰 何所覺 覺苦 覺樂 覺不苦不樂 是故名覺相是受受陰.……爲作相是行受陰 何所爲作 於色爲作 於受想行識爲作 是故爲作相是行受陰."
185)『雜阿含經』13 (『大正藏』2, p.92下).
"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 如是眼不實而生 生已盡滅 有業報而無作者 此陰滅而異陰 相續."
186)吳亨根,『唯識과 心識思想 硏究』(서울:佛敎思想史,1989), pp.40∼41 참조.
187)『異部宗輪論』(『大正藏』49, p.16下).
"補特伽羅非卽蘊離蘊 依蘊處界假施說名.……諸法若離補特伽羅 無從前世轉至後世 依補特 伽羅可說有移轉."
188)『俱舍論』권29 (『大正藏』29, pp.152下).
"有補特伽羅 其體與蘊不一不異.……非我所立補特伽羅 如仁所徵實有假有 但可依內現在世 攝有執受諸蘊 立補特伽羅.……此如世間依薪立火."
189)權五民, 앞의 책, pp.403∼404 참조.
190)『攝大乘論』上(『大正藏』31, p.134上).
"化地部中亦以異門密意說 此名窮生死蘊 有處有時見色心斷 非阿賴耶識中彼種有斷."
191)世親, 『攝大乘論釋』2(『大正藏』31, p.327上).
"化地部中異門說爲窮生死蘊 爲釋此因說有處等言有處者 謂無色界無有諸色 言有時者 謂無想等諸定位中無有諸心 非阿賴耶識中彼種有斷者 謂阿賴耶識中色心熏習 由此爲因色心還有."
192)無性, 『攝大乘論釋』2(『大正藏』31, p.386上).
"化地部等者於彼部中有三種蘊 一者一念頃蘊 謂一刹那有生滅法 二者一期生蘊 謂乃至死恒隨轉法 三者窮生死蘊 謂乃至 得金剛喩定恒隨轉法 此若除彼阿賴耶識 餘不應有 但異名說阿賴耶識 如名諸蘊決定無有窮生死故."
193)窺基, 『異部宗輪論述記』(『新纂卍續藏經』71, pp.589下∼590上).
"一味者 卽無始來展轉和合 一味而轉卽細意識曾不間斷 此具四蘊 有根邊蘊者 根謂向前細意識住生死根本故 說爲根 由此根故有五蘊起 ……然一味蘊是根本故不說言邊 其餘間斷五蘊之法是末起故名根邊蘊."
194)吳亨根, 앞의 책, p.45 참조.
195)櫻部建 外1, 앞의 책, P.48 참조.
196)『俱舍論』, p.4下.
"此蘊處界別義云何 頌曰 聚生門種族 是蘊處界義 論曰 諸有爲法和合聚義是蘊義 如契經言 諸所有色 若過去 若未來 若現在 若內若外 若 若細 若劣若勝 若遠若近 如是一切略爲一 聚說名色蘊 由此聚義蘊義得成."
197)世路[adhvan]란 時의 의미이다. 유위법이 생멸변화하는데, 과거·현재·미래 三世의 시간 이 있게 되므로, '시간의 길'이란 뜻에서 유위법을 世路라고도 한다.
198)言依[kath vastu]란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能詮의 名과 所詮의 義[의미]에 의해 詮表되며, 그 유위법의 명과 의는 모두 言[말·음성]에 依止한 것이므로 言表라고 한다.
199)有離[sani s ra]란 번뇌로부터 出離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離는 무여의열반을 의미하며, 유위법은 결국 떠나야 열반을 얻게 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곧 열반[離]에 이를 수 있 다[有]라는 의미이다.
200)有事[savastuka]란 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事는 因의 의미이다. 유위법은 많은 緣 들의 화합에 의해서 성립되기 때문에 事[因]를 가지고 있다[有]라고 이름붙인다.
201)『俱舍論』, p.2上.
"何謂有爲 頌曰 又諸有爲法 謂色等五蘊 亦世路言依 有離有事等 論曰 色等五蘊謂初 色蘊乃至識蘊 如是五法具攝有爲 衆緣聚集共所作故 無有少法一緣所生 是彼類故 未來無 妨 如乳如薪."
202)같은 論, p.2 中.
"色者唯五根 五境及無表."
203)같은 論, p.3 中下.
"如世尊說…由變壞故名色取蘊……有說 變碍故名爲色."
204)金東華,『俱舍學』, p.58 참조.
205)『俱舍論』,PP.3下∼4上.
"受領納受觸 想取像爲體
四餘名行蘊 如是受等三
及無表無爲 名法處法界
論曰 受蘊謂三 領納受觸 卽樂及苦不苦不樂 此復分別成六受身 謂眼觸所生受乃至意 觸所生受 想蘊謂能取像爲體 卽能執取靑黃長短男女怨親苦樂等相 此復分別成六想身 應如 受說 除前及後色受想識 餘一切行名爲行蘊 然薄伽梵於契經中說六思身爲行蘊者 由最勝故 所以者何 行名造作 思是業性造作義强 故爲最勝是故佛說若能造作有漏有爲名行取蘊 若不 爾者 餘心所法及不相應 非蘊攝故…… 是故定應許除四蘊餘有爲行皆行蘊攝 卽此所說受想 行蘊及無表色 三種無爲 如是七法 於處門中立爲法處 於界門中立爲法界."
206)같은 論, P.5中.
"諍根生死因 及次第因故
於諸心所法 受想別爲蘊
論曰 諍根有二 謂著諸欲及著諸見 此二受想 如其次第爲最勝因 味受力故貪著諸欲倒想力故 貪著諸見 又生死法以受及想爲最勝因 由眈著受起倒想故 生死輪廻 由此二因及後當說次第 因故 應知別立受想爲蘊."
207)『俱舍論』, p.5下.
"隨 染器等 界別次第立
論曰 色有對故諸蘊中 無色中 唯受行相 故世說我手等痛言 待二想 男女等想易了知 故 行 過識 貪瞋等行易了知故 識最爲細 總取境相難分別故 由此隨 立蘊次第 或從無始 來生死已 男女於色更相愛樂 此由耽著樂受味故 耽受復因倒想生故 此倒想生由煩惱故 如 是煩惱依識而生 此及前三皆染汚識 由此隨染立蘊次第 或色如器 受類飮食 想同助味 行似 廚人 識喩食者 故隨器等立蘊次第 或隨界別立蘊次第 謂欲界中有諸妙欲 色相顯了 色界靜 慮有勝喜等 受相顯了 三無色中取空等相 想相顯了 第一有中思最爲勝 行相顯了 此卽識住 識住其中顯似世間田種次第 是故諸蘊次第如是 由此五蘊無增減過 卽由如是諸次第因 離行 別立受想二蘊 謂受與想 於諸行中相 生染 類食同助 二界中强故別立蘊."
208)金東華, 앞의 책, pp.61∼62 참조.
209)『俱舍論』, P.4.
"識謂各了別 此卽名意處
及七界應知 六識轉爲意
論曰 各各了別彼彼境界 總取境相故名識蘊 此復差別有六識身 謂眼識身至意識身 應知如 是所說識蘊 於處門中立爲意處 於界門中立爲七界 爲眼識界至意識界 卽此六識轉爲意界."
210)택멸·비택멸·허공무위를 가리킨다.
211)『俱舍論』, P.5中.
"何故無爲說在處界 非蘊攝耶 頌曰
蘊不攝無爲 義不相應故
論曰 三無爲法不可說在色等蘊中 與色等義不相應故 謂體非色乃至非識 亦不可說爲第六蘊 彼與蘊義不相應故."
212)吳亨根,『唯識思想硏究』, P.333 참조.
213)같은 책, 같은 쪽.
214)『大乘五蘊論』, (『大正藏』31, P.848中).
215)같은 論, p.848下.
"云何行蘊 謂除受想 諸餘心法及心不相應行."
216)같은 論, p.848下∼p.849中
217)같은 論, p.849中下.
"云何心不相應行 謂依色心心法分位 但假建立不可施設 決定異性及不異性 彼復云何 謂得無 想等至滅盡等至無想所有 命根衆同分 生老住無常 名身句身文身異生性如是等類."
218)『俱舍論』, p.22上.
219)『大乘五蘊論』, pp.849下∼850上.
"云何識蘊 謂於所緣境了別爲性 亦名心意 有採集故 意所攝故 最勝心者 謂阿賴耶識 何以 故 由此識中諸行種子皆採集故……阿賴耶識者 謂能攝藏一切種子故 又能攝藏我慢相故 又復緣身爲境界故 卽此亦名阿陀那識 能執持身故 最勝意者 謂緣阿賴耶識爲境 恒與我癡 我見我慢及我愛等相應之識 前後一類相續隨轉 除阿羅漢果及與聖道滅盡等至現在前位."
220)吳亨根, 앞의 책, p.340 참조.
221)『大乘五蘊論』, p.850上
"問以何義故說名爲蘊 答以積聚義說名爲蘊 謂世相續品類趣處差別色等總略攝故."
222)같은 論, 같은 쪽.
"言法處者 謂受想行蘊無表色等及與無爲."
223)같은 論, p.850中.
"問以何義故宣說蘊等 答爲欲對治三種我執."
224)吳亨根, 앞의 책, p.107 참조.
225)『成唯識論述記』(『大正藏』43, p.239下).
"法謂軌持 軌謂軌範 可生物解 持謂住持 不捨自相."
226)吳亨根, 앞의 책, P.108 참조.
227)같은 책, P.109 참조.
228)部派佛敎의 유부에서 所依의 論藏으로 삼는 6部의 論으로서, 각 논마다 '足'字가 있으므로 六 足論이라 한다.『阿毘達磨集異門足論』『阿毘達磨法蘊足論』『阿毘達磨識身足論』『阿毘達磨 品類足論』『阿毘達磨界身足論』『阿毘達磨施設足論』을 말한다.
229)吳亨根, 앞의 책, P.110 참조.
230)『阿毘達磨品類足論』1 (『大正藏26, P.692中』).
"色云何 謂諸所有色 一切四大種及四大種所造色 四大種者 謂地界水界火界風界 所造色者 謂眼根耳根鼻根舌根身根色聲香味觸所觸一分及無表色."
231)註90 참조.
232)『阿毘達磨品類足論』, P.692下.
"心不相應行云何 謂若法心不相應 此復云何 謂得無想定滅定 無想事命根衆同分 依得事得 處得生老住無常性 名身句身文身 復有所餘如是類法 與心不相應 總名心不相應行."
233)같은 論, 같은 쪽.
"無爲云何 謂三無爲 一虛空 二非擇滅 三擇滅."
234)같은 論, P.693上中.
235)같은 論, P.693中下.
236)吳亨根, 앞의 책, P.111 참조.
237)註92 참조.
238)吳亨根, 앞의 책, pp.111∼112 참조.
239)『瑜伽師地論』(『대정장』30, p.280中)
"云何義自性 謂心意識 心謂一切種子所隨依止性 所隨依附性 體能執受 異熟所攝阿賴耶識 意謂 恒行意及六識身無間滅意 識謂現前了別所緣境界."
240)같은 論, p.280中
"彼助伴者 謂作意觸受想思 欲勝解念三摩地慧 信 愧無貪無瞋無痴 精進輕安不放逸捨不害 貪 無明慢見疑 念恨覆惱嫉 諂 害 無 無愧 沈掉擧 不信懈怠放逸 邪欲邪勝解忘念散亂不正知 惡作睡眼尋伺 如是等輩 俱有相應心所有法 是名助伴."
241)같은 論, p.290上.
"問一切法生 皆從自種而起 云何說諸大種能生所造色耶 云何造色依彼 彼所建立 彼所任持 彼所長養耶. 答由一切內外大種又所造色種子 皆悉依附內相續心 乃至諸大種子未生諸大以來 造色種子終不能生 造色要由彼生 造色方從自種子生 是故說彼能生造色."
242)같은 論, p.290中.
"復次於諸色聚中 略有十四種事 謂地水火風 色聲香味觸 及眼等五根."
243)같은 論, p.283下
"不相應行有二十四種 謂得無想定滅盡定無想異熟 命根衆同分異生性 生老住無常 名身句身文身 流轉定異相應 勢速次第時方數 和合不和合 無爲有八事 謂虛空非擇滅擇滅 善不善無記法 眞如不動想受滅."
244)吳亨根, 앞의 책, p.114 참조.
245)『瑜伽師地論』, p.878 下.
246)『大乘阿毘達磨集論』(『대정장』31, p.667上中).
247)金東華, 앞의 책, pp.55∼56 참조.
248)『顯揚聖敎論頌』(『대정장』31, p.583下)
"心心所有色 不相應無爲."
249)『顯揚聖敎論』(『대정장』31, pp.480下∼481上).
250)吳亨根, 앞의 책, p.116 참조.
251)『顯揚聖敎論』, p.483上中.
252)『顯揚聖敎論』, p.484上.
253)같은 論, p.484中下.
254)吳亨根, 앞의 책, p.116 참조.
255)같은 책, p.117 참조.
256)『大乘百法明門論』 (『大正藏』31, p.855中下).
259) 方倫, 앞의 책, p.64 참조.
260) 金仕業,『現象의 成立에 관한 唯識學的 硏究』, 박사학위논문(서울:동국대학교 대학원,1996), pp.155∼156 참조.
262) 方倫, 앞의 책, PP.70∼71 참조.
269)『成唯識論述記』 (『大正藏』43, p.237中下).
270) 深浦正文,『唯識論解說』(京都:龍谷大學出版部, 昭和9), p.78 참조.
271) 安慧, 박인성 譯,『唯識三十頌釋』(서울:민족사,2000), pp.151∼160 참조.
272) 深浦正文, 앞의 책, p.78 참조.
273)『成唯識論』 (『大正藏』31, p.48中).
"如是所成唯識相性 誰於幾位如何悟入".
274) 앞의 論, p.59上.
"此論三分成立唯識".
275) 深浦正文, 앞의 책, p.79참조.
276) 元義範,『現代佛敎思想』(서울:集文堂,1985), p.374 참조.
277) 吳亨根,「圓測法師의 三種自性論」, 천태종 전운덕 총무원장 화갑기념『佛敎學論叢』(충북: 天台佛敎文化硏究院,1999), pp654∼655 참조.
278) 深浦正文, 앞의 책, p.79 참조.
279) 같은 책, 같은 쪽.
280) 高崎直道, 李芝洙 譯,『유식입문』(서울:시공사,1997), p.119 참조.
281) 橫山紘一,「世親の 識轉變」,『講座 大乘佛敎8-唯識思想』(東京:春秋社, 昭和57), p.114 참조.
282)『雜阿含經』12 (『大正藏』2, p.82上).
"彼心意識 日夜時剋 順臾不停 種種轉變 異生異滅."
283) 高崎直道, 앞의 책, p.115 참조.
284) 橫山紘一, 앞의 책, p.117 참조.
285) 李芝洙,『印度 佛敎哲學의 몇 가지 問題들』,『韓國佛敎學』제11輯(서울:한국불교학회, 1986), p.377 참조.
286) 『阿毘達磨大毘婆沙論』39 (『大正藏』27, pp.201下∼ 202上).
"彼執諸行相續轉時 前位不滅 轉變爲後 如薪成灰乳爲酪等 今說諸行 相續轉時 前滅後生 而有轉變."
287) 金妙注, 앞의 책, pp.192∼194 참조.
288) 『俱舍論』4 (『大正藏』29, p.22下).
"此中何法名爲種子 謂名與色於生自果 所有展轉隣近功能 此由相續轉變差別."
289) 같은 論, p.69中.
"於後施主心雖異緣而前緣施思所熏習 微細相續漸漸轉變差別而生 由此當來能感多果."
290) 같은 論, p.158下.
"從業相續轉變差別 如種生果."
291) 橫山紘一, 앞의 책, pp.119∼120 참조.
292)『俱舍論』5, p.25下.
"彼先代諸軌範師咸言 二法互爲種子 二法者 謂心有根身."
293) 橫山紘一, 앞의 책, pp.120∼121 참조.
294) 『大乘成業論』 (『大正藏』31, p.783上).
"如何得果 爲由相續轉變差別 如稻種等而得果耶."
295) 같은 論, p.783下
"但應由思差別作用熏心相續令起功能 由此功能轉變差別當來世果差別而生."
296) 같은 論, p.784下.
"彼諸識種被損伏位 異熟果識刹那刹那轉變差別……由此相續轉變差別 隨種力熟隨遇助緣 便 感當來愛非愛果."
297) 같은 論, p.785中.
"夫熏習者 今彼所熏相續變成功能差別……若無熏習則無轉變差別功能."
298) 橫山紘一, 앞의 책, p.121 참조.
301) 橫山紘一, 앞의 책, p.123 참조.
302) 같은 책, 같은 쪽 참조.
303) 같은 책, pp.124∼125 참조.
305) 橫山紘一, 앞의 책, p.126 참조.
306) 같은 책, pp.126∼128 참조.
308) 橫山紘一, 앞의 책, pp.128∼129 참조.
310) 橫山紘一, 앞의 책, pp.129∼131 참조.
311) 같은 책, p.131 참조.
312) 吉熙星,『印度哲學史』(서울:민족사,1988), p.150참조.
313)尹浩眞,『無我·輪廻問題의 硏究』(서울:민족사,1992), p.13 참조.
314)橫山紘一,『唯識の哲學』(京都:平樂寺書店,1984) pp.116∼117 참조.
315)橫山紘一, 앞의 책, p.118 참조.
316)『解深密經』1 (『大正藏』16, p.692中).
"亦名阿賴耶識 何以故 由此識於身攝受欌隱同安危義故."
317)橫山紘一, 앞의 책, pp.119∼120 참조.
318)『唯識三十論頌』, p.60中.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319)深浦正文, 앞의 책, p.126 참조.
321)곧 제8식이 善趣라면 종자나 유근신도 善趣[安]이며, 惡趣라면 더불어 惡趣[危]가 되는 것 을 뜻한다.
322)深浦正文, 앞의 책, pp.167∼170 참조.
323)『唯識三十論頌』, p.60中.
"常與觸 作意受想思相應."
324)같은 論頌, 같은 쪽.
"唯捨受."
325)같은 論頌, 같은 쪽.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326)『成唯識論』, p.12 上.
327)같은 論, p.12 中.
328)『唯識30論頌』p.60中.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329)『成唯識論』3, p.13 下.
330)橫山紘一, 앞의 책, p.202 참조.
331)같은 책, p.204 참조.
332)같은 책, p.205 참조.
333)같은 책, pp.205∼207 참조.
334)같은 책, p.189 참조.
335)『唯識三十論頌』, p.60 中.
"依彼轉緣彼."
336)같은 論頌, 같은 쪽.
"思量爲性相."
338)橫山紘一, 앞의 책, pp.193∼198 참조.
339)앞의 論頌, .60 中.
"有覆無記攝."
340)같은 論頌, 같은 쪽.
"隨所生所繫."
341)深浦正文, 앞의 책, pp.243∼244 참조.
342)앞의 論頌, 같은 쪽.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344)煩惱가 生起하는 두 가지의 형태로서, 俱生起는 몸이 生함과 동시에 일어나는 선천적인 번뇌를 말하며, 分別起는 邪師나 邪敎 등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세력이나 스스로의 부당한 추리분별에 의해 일어나는 후천적 번뇌를 말한다. 후자는 성질이 강렬하지만 오히려 끊기 가 쉽고, 전자는 미세하지만 끊기가 매우 어렵다.(佛光大辭典5, p.4027)
345)平川彰, 앞의 책, p.132 참조.
346)같은 책, pp.132∼133 참조.
347)같은 책, p.133 참조.
348)이 표현은 玄 의 번역이다. 眞諦는 分別性·依他性·眞實性으로 번역했다.
349)服部正明 外1, 李萬 譯,『인식과 초월』(서울:民族社,1991), pp.128∼129 참조.
350)竹村牧男, 鄭承碩 譯,『유식의 구조』(서울:民族社,1989), p.60 참조.
351)竹村牧男, 앞의 책, pp.59∼60 참조.
352)같은 책, pp.60∼61 참조.
353)竹村牧男, 앞의 책, pp.57∼58 참조.
354)『解深密經』2 (『大正藏』16, p,693 上中下와『瑜伽師地論』64 (『大正藏』30, p.656 下, pp.703上∼706中)에 있는 내용들이다.
355)三枝充悳, 앞의 책, pp.104∼105 참조.
356)『中邊分別論』에서 미륵이 지은 것은 게송뿐이다.『중변분별론』上 (『大正藏』31,pp.451 上∼458上)의 제1「相品」내지 제3「眞實品」에서 주로 三性의 내용이 나온다.
357)같은 책, pp.105∼106 참조
358)『攝大乘論』上中 (『大正藏』31, pp.118中∼124上)에서 三性·三無性說의 내용을 설명하 고 있다.
359)같은 책, pp.106∼107 참조
360) yena yena vikalpena yad yad vastu vikalpyate/
parikalpita ev sau svabh vo na sa vidyate 20
이런 저런 여러 분별에 의해서 이런 저런 여러 사물이 분별되는데,
그것이 바로 변계소집성이네. 그것은 있지 않네. (20)
362) ni pannastasya p rve a sad rahitat tu y 21-2
원성실성은 그것이 앞의 것을 항상 원리하는 性이네.
(註 339 내지 341은 安慧 著, 박인성 譯註,『唯識三十頌釋』(서울:民族社,2000), p.21 참조.)
363)ata eva sa naiv nyo n naya paratantrata /
anityat divad v cyo n d e min sa d yate 22
364)安慧, 박인성 譯註, 앞의 책, pp.155∼156 참조.
365)같은 책, pp.107∼108 참조.
368)平川彰, 앞의 책, p.123 참조.
369)三枝充悳, 앞의 책, p.224 참조.
370)같은 책, p.225 참조.
371)같은 책, p.226 참조.
373)三枝充悳, 앞의 책, p.226 참조.
374)같은 책, pp.228∼229 참조.
375)『唯識30頌』제28頌의 내용이다.
376)三枝充悳, 앞의 책, p.229 참조.
377)『成唯識論』, p.1上.
"今造此論爲於二空有迷謬者生正解故 生解爲斷二重障故 由我法執二障具生故 若證二空彼 障隨斷 斷障爲得二勝果故 由斷續生煩惱障故證眞解脫 由斷 解所知障故得大菩提 又爲開 示謬執我法迷唯識者 今達二空於唯識理如實知故……爲遮此等種種異執 今於唯識深妙理中 得如實解故作斯論."
378)橫山紘一, 앞의 책, p.224 참조.
379)같은 책, p.226 참조.
380)같은 책, pp.226∼227 참조.
381)服部正明 外1, 앞의 책, p.173 참조.
382)같은 책, 같은 쪽.
383)三枝充悳, 앞의 책, p.231 참조.
384)『唯識三十論頌』, p.61上中.
"(如是所成)唯識性相 誰依幾位如何悟入 謂具大乘二種種性 一本性種性 謂無始來依附本識 法爾 所得無漏法因 二謂習所成種性 謂聞法界等流法已 聞所成等熏習所成 具此二性方能 悟入."
385)竹村牧男, 앞의 책, p.158 참조.
387)三枝充悳, 앞의 책, pp.231∼232 참조.
389)三枝充悳, 앞의 책, pp.232∼233 참조.
390)橫山紘一,『唯識とは何か』, pp.369∼370 참조.
391)橫山紘一, 앞의 책, p.370 참조.
392)임시로 현상된 것일 뿐이며,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393)橫山紘一, 앞의 책, pp.370∼371 참조.
394)같은 책, pp.370∼373 참조.
396)三枝充悳, 앞의 책, pp.234∼235 참조.
398)三枝充悳. 앞의 책, p.236 참조.
399)같은 책, p.237 참조.
400)橫山紘一, 앞의 책, pp.375∼376 참조.
401)三枝充悳, 앞의 책, p.237 참조.
402)橫山紘一, 앞의 책, p.391 참조.
403)10波羅蜜에 대한 언급은『華嚴經』「十地品」의 제7遠行地를 說하는 부분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菩薩의 10地에 10波羅蜜을 배대하는 것은 구마라집 譯의『莊嚴菩提心經』이 처음이지만 그 순서가 약간 다르며, 10지와 10바라밀을 判然하게 대응시키는 것은『十地經論』(보리류지 譯)의 本文에 이르러서이다. 나아가『成唯識論』제9卷에서는 거기에다가 10眞如까지 대응시키고 있다.
404)같은 책, p.396 참조.
406)三枝充悳, 앞의 책, p.239 참조.
407)같은 책, pp.239∼240 참조.
408)他受用身은 4身의 하나이며, 平等性智에 의해 시현한 미묘한 淨功德身이다. 이 붓다는 純淨土[他受用土]에 거주하면서, 10지의 보살들을 위해 대신통을 발휘하고 正法輪을 굴린다고 한다. 타수용신은 다른 者를 교화하기 위하여 利他의 편에서 활동하는 佛身, 곧 정확하게는 초지 이상의 보살들을 교화하기 위해 나타내는 불신이다. 타수용토는 4土의 하나이며, 報土라고도 한다. 타수용신이 있는 淨土인데, 초지 이상의 보살로 하여금 大法樂을 받고, 수승한 行을 닦게 하기 위하여 다양하게 장엄한 利他의 국토이다.
409)自受用身은 4身의 하나이며, 붓다가 3아승기겁 동안 수행한 결과로 얻은 功德[福]이 원만하여 4智가 완전하게 밝아져서, 항상 報土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法樂을 향수하는 佛身을 말한다. 이것은 正覺을 성취한 붓다가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며, 그 청정하게 깨달은 마음이 그대로 붓다인 까닭에, 이 붓다는 우주에 편만한 色身의 붓다이다. 自受用土는 4土의 하나이며, 붓다의 절대경계인 大圓鏡智에 의해 나타난 無限의 境地로서 붓다 자신이 스스로 법락을 받는 不思議한 佛土이다.
410)橫山紘一, 앞의 책, pp.347∼34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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