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마경연구-이대성

수선님 2018. 8. 5. 12:43

博 士 學 位 論 文  

 

 

維摩經 硏究

 

 

 

 

 

 

 

指導敎授  崔 昌 述(玄覺)

 

 

 

 

 

 

 

 

 

東國大學校 大學院 禪學科

李   大   聖

 1 9 9 9

博 士 學 位 論 文  

 

 

維摩經 硏究

 

李  大  聖

 

指導敎授   崔  昌  述(玄覺)

 

이 論文을 博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1999 年   12月    日

李大聖의 哲學 博士學位論文을 認准함.

1999 年   12月    日

 

       委員長              (印)

       委  員              (印)

       委  員              (印)

       委  員              (印)

       委  員              (印)

 

東國大學校 大學院

目    次

 

Ⅰ. 序  論 1

   1. 硏究의 目的 1

   2. 硏究의 範圍와 方法 4

 

Ⅱ. 『維摩經』의 成立과 展開 6

   1. 成立時期와 場所 6

     1) 成立 時期 6

     2) 場所 12

   2. 『維摩經』의 成立背景 14

   3. 傳譯 15

   4. 註釋 19

     1) 印度 및 中國의 註釋書 19

     2) 僧肇의 『註維摩詰經』 20

 

Ⅲ. 大乘佛敎上의 『維摩經』의 位置 25

   1. 般若思想과 『維摩經』 25

     1) 般若思想 25

     2) 『般若經』의 '心非心' 27

     3) 『維摩經』의 '心非心' 33

     4) 『維摩經』과 大乘經典과의 關係 35

   2. 唯識思想과 『維摩經』 38

     1) 唯識思想 38

     2) 法相宗과 『維摩經』 44

   3. 如來藏思想과 『維摩經』 46

     1) 如來藏思想 46

     2) 如來藏思想과 『維摩經』 49

   4. 在家菩薩思想 51

     1) 大乘佛敎의成立 51

     2) 在家中心의 菩薩思想 52

   5. 淨土思想 54

     1) 淨土敎의 相承과 敎說 54

     2) 『維摩經』의 淨土思想 55

 

Ⅳ. 中道思想 57

   1. 眞俗二諦說 57

     1) 眞俗二諦의 中道的 相卽 57

     2) 『般若經』의 眞俗二諦說 60

   2. 中道思想 67

     1) 中道說 67

     2) 中道思想 75

   3. 緣起思想 81

     1) 空思想 81

     2) 緣起思想 92

 

Ⅴ. 禪思想 108

   1. 『維摩經』의 第一義諦 110

     1) 初期佛敎의 第一義諦 110

     2) 大乘佛敎의 第一義諦 112

     3) 『維摩經』의 淸淨心 123

   2. 『維摩經』의 科段에 드러난 禪思想 131

     1) 3分14品의 科段 132

     2) 3分14品의 核心的 禪思想 137

   3. 不可思議解脫의 禪的 意義 141

     1) 「不思議品」의 不可思議解脫과 神變 141

     2) 不可思議解脫의 禪的 意義 145

   4. 中國禪宗의 『維摩經』觀 148

 

Ⅵ. 不二思想 158

   1. 『維摩經』의 不二思想 158

     1) 「入不二法門品」의 禪思想 158

     2) 維摩一默의 禪的 意義 168

   2. 『維摩經』의 禪淨雙修 172

     1) 禪淨雙修의 源流 172

     2) 『維摩經』 佛國品의 禪淨雙修 176

 

Ⅶ. 結論 188

 

參考文獻 192

 

ABSTRACT 198

 

Ⅰ. 序  論

1. 硏究의 目的

 

大乘佛敎經典으로서의 『維摩經』(原名은 Vimalak rti-nirde a)은 그 成立以來 約 2000年에 걸쳐 原作地인 印度에서 西域·中國·Tibet·蒙古·韓國 그리고 日本에 걸쳐 특이한 流傳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그 敎理와 思想面에 있어서의 特質은 文學的 내지 藝術的 表現面의 特色 및 社會的 乃至 宗敎的 諸特徵과 더불어 일찍부터 內外의 깊은 注意를 받으면서 現在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오늘날 이 經은  禪經으로서 여겨지고 있는 것이 一般的 경향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실제로 이 經의 敎理上의 가장 예리한 一面이 大乘佛敎의 代表的 一宗인 禪宗에 의하여 유감없이 發揮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여겨지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1) 따라서 禪과 禪觀 그리고 禪宗과의 關係를 떠나서 이 經의 流傳史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維摩經』은 大乘佛敎文獻중에서 보석과도 같은 存在이다. 活力이 넘치고 諧謔으로 充滿해 있지만, 이 經에는 다른 大乘經典들의 장황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佛敎論書들의 전문적인 성질이 없으면서도 또한 이 經은 여러 가지 知識과 智慧를 共有하고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과 같은 大乘佛敎 經典들 가운데서도 『維摩經』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경전이다. 이 『維摩經』은 超越的 智慧인 般若經典類와 不可思議解脫經典類인 『華嚴經』사이에 위치하며, 바라보는 이들에게 온갖 지혜의 빛을 발하고 있다. 大乘敎理의 深奧함과 그것의 광범위한 범주의 眞髓를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專門學者의 硏究對象으로서의 審美的인 德目까지 내포함으로써 그에 대한 硏究의 有用性으로 인하여 論者는 평소에 『維摩經』의 독특한 思想을 정밀하게 다듬어 정리하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維摩經』은 釋尊의 在世時(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일어났던 사실들을 기록한 것으로 주장되고 있으나, 印度에서는 그 동안 그 어떤 텍스트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다가 龍樹菩薩(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이 大乘의 전통을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大乘에 관한 梵語經典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維摩經』의 텍스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 原典은 그후 3세기에 시작하여 7차에 걸쳐 서로 다른 시기에 中國語로 飜譯되었는 바, 서기 406년에 完譯된 鳩摩羅什 번역본이 가장 인기가 있으며, 서기 650년에 완역된 玄  번역본은 학술적으로 가장 정확하다. 또한 이 原典은 Tibet語로 두 번에 걸쳐 번역되었는데, 결정적인 최종의 번역본은 서기 9세기에 저명한 번역가인 Chos id Tshul Khrims에 의해 完譯되었다. 이 原典은 또한 Sogdian語·Khotanese語 그리고 Uighur語로도 번역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大乘佛敎의 哲學的인 論書들 가운데서 발견된 몇몇 단편들 이외에 일체의 根本的인 이 經의 梵語 原本들은 현재 사라져 버리고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현대의 번역은 鳩摩羅什의 번역본을 底本으로 삼아 왔으나, 최근에 E. Lamotte박사는 이러한 사정을 수정할 것을 밝히면서 Tibet본과 玄 본을 底本으로 하여 그의 탁월한 프랑스어 번역판을 출간하였다.

또한 E. Bangert師가 최초로 Tibet본을 현대 태국어로 번역하였고, 그후에 Sanskrit語로 번역함으로써 마침내 역사는 한바퀴 돌아서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2) 

眞理를 깨닫는 동시에 그 眞理에 隨順하여 實在하는 生活속에서 如法하게 實踐할 수 있는 方便을 提示하고 있는 經이 바로 이 『維摩經』의 核心的인 內容이라고 論者는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그러한 絶對的인 眞理의 本質은 무엇이며, 그 다음으로 그와 같은 眞理의 本質에 입각한 維摩居士의 方便 內容은 어떤 것인가를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이 本稿의 硏究의 目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佛敎에 있어서「中」또는 「中道」의 思想은 釋尊의 正覺과 더불어 확고히 자리하고 있고, 「法」과 「緣起」를 說하는 根本佛敎以來의 諸思想도 이것에 由來하는 同時에 그 發達과 展開가 全 佛敎를 뒤덮고 있으며, 이것을 一貫하는 理法도 이미 論證되어 있다.

大乘佛敎의 哲學的 根底는 말할 필요도 없이 「般若」(praj )와 「空」( nya)의 眞理에 있는데, 그것은 또 「中觀」이라고도 表現되고 있는 것처럼 한결같이 「中」의 思想의 繼承이며 그 發展인 것이다. 現代에 이르기까지 그 指導性으로 인하여 不滅의 權威와 不朽의 意義에 빛나는 一大敎學을 남긴 바로 그 龍樹도 「緣起는 空·假·中이다」·「空과 緣起를 同一한 義로 說하시는 最勝比丘이신 저 부처님께 歸命한다」등으로 表現하였는데, 龍樹의 이러한 思想統攝과 그것에 根據하는 中觀佛敎로서의 獨自的 立場 設定은 마침내 그를 「八宗의 祖」라고도 하며, 그 이후의 佛敎 發達에 대해 決定的 位置를 갖게 되는 바, 이러한 事實에 비추어 오늘날 새삼 그 以前에 나타난 初期 大乘 經典의 實相과 眞義를 究明하는 것은 佛敎 硏究에 새로운 成果를 約束함과 더불어 이것에 無窮한 學術的·思想的 意義를 賦與하는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維摩經』은 그러한 時期에 成立된 大乘經典으로서 諸宗의 思想的 特色을 統攝하고 있지만, 그 中心思想은 어디까지나 中道實相의 說에 그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3)

"色은 空性때문에 空하지 않다. 왜냐하면 空性은 그 色을 떠나서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色은 곧 空이요, 空이 곧 色이다."4) 大乘經典 上에 흔히 나타나는 이 말은 中道의 眞髓를 나타내고 있다. 이 말은 또한 維摩詰의 傳言에 대해서도 그 基本이 되고 있다. 이 말은 지극히 深奧하면서도 너무도 단순하여 그 놀라운 含蓄의 의미를 看過할 정도로 매우 평이한 말이기도 하다. "色"은 相依相關性의 世界인 서로 관계되는 世界를 나타내는데 반하여, "空"은 窮極的이고 超越的이며 無限하고 永遠한 것을 精神的으로 熱望하는 目標임을 나타낸다.

龍樹(N g rjuna)는 그의 『廻諍論』(Vigrahavy vartan )에서 이와 같은 主題를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즉, "나는 空·相依相關性(緣起) 및 中道의 의미의 동등함을 선언하신, 無比의 完全한 正覺者이신 부처님께 경례 드린다" 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色"대신에 中道哲學의 또 다른 주요한 用語인 "相依相關性" 즉 緣起라는 用語를 발견하게 된다. 이 말은 一切의 有限한 事物은 相互 依存的이고 關聯的이며 相互 條件的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어떤 獨立的이고 自給自足的이며 永遠한 實體의 가능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어떤 實在物은 오직 다른 實在物들과 관련하여 存在하게 된다. 그것이 生成될 때 합쳐졌다가 消滅될 때 분해되는 要素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現代는 물론 古代의 수많은 學者들은 維摩詰이나 龍樹 그리고 大乘의 부처님들이 說하신 이 中道를 世俗的이거나 精神的인 모든 가치를 廢棄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本稿의 硏究의 目的은 이와 같은 불행한 오해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놓으려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오해를 푸는 열쇠는 空의 개념에 달려있다고 여겨진다. 空이란 이 말은 주의 깊게 선택된 말로서 虛無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色"을 "空"과 同一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色의 상태에 관한 어떤 것을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이지, 결코 色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空"을 "色"과 同一視 하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이 결코 虛無主義的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虛無主義에 대한 治癒法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維摩經』은 참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많은 眞理를 內包하고 있으므로, 論者는 이 經의 第一義諦(勝義諦)가 무엇이며, 그러한 眞理를 實在의 生活에서 活用할 수 있는 維摩居士의 方便內容이 무엇인가를 究明해야할 必要性을 切實하게 느끼고 있다.

 

2. 硏究의 範圍와 方法

 

以上과 같은 硏究를 體系的이고 一貫性 있게 展開하기 위해서 硏究의 範圍를 다음과 같이 設定하여 정리하려고 한다.

 

제Ⅱ장에서는 '『維摩經』의 成立과 展開'라는 題下에 成立時期와 場所를 소상히 밝히고 나서 本經의 成立背景을 상술한 다음에 本經의 傳譯과 註釋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論하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大乘佛敎上의 『維摩經』의 位置'라는 題目下에 般若思想과 『維摩經』의 核心的인 內容을 밝히고자 하며, 또한 本經과 初期 大乘經典과의 關係도 살펴보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般若思想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唯識思想의 核心的인 내용은 물론 中國의 法相宗과 『維摩經』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이어서 如來藏思想과 『維摩經』과의 관계도 고찰해봄으로써 『維摩經』의 深奧한 哲學的 根源을 把握할 수 있을 것이며, 在家中心의 菩薩思想과 淨土思想의 核心的인 내용도 整理하고자 한다.

 

제Ⅳ장에서는 '中道思想'을 論하는 가운데서 眞俗二諦說과 中道思想 그리고 空思想과 緣起思想을 차례로 詳述하여 禪思想의 哲學的 基礎를 정리하고자 한다.

제Ⅴ장에서는 '禪思想'을 展開하는 가운데 『維摩經』의 第一義諦인 淸淨心의 내용을 밝히고, 本經의 科段에 드러난 禪思想과 不可思議解脫의 禪的 意義를 考察한 뒤에 中國禪宗의 『維摩經』觀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Ⅵ장에서는 '不二思想'을 展開함에 있어서 처음에 「入不二法門品」의 禪思想을 考察하는 가운데 「維摩一默」의 禪的 意義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禪淨雙修의 源流를 밝히고, 「佛國品」의 禪淨雙修의 思想을 考察하고자 한다.

 

 

Ⅱ. 『維摩經』의 成立과 展開

 

1. 成立 時期와 場所

 

1) 成立 時期

 

『維摩經』의 梵本名은 Vimalak rti-nirde a이고, 이 가운데  Vimalak rti를 漢譯에서는 「維摩羅詰」·「毘摩羅詰利帝」·「維摩詰」혹은 간단히 「維摩」라고 音寫하며, 또 意譯하여 「離垢稱」·「無垢稱」혹은 「淨名」등으로 稱하여 왔다. 그리고 nirde a는 論議·論斷·義記·宣說·所說등의 意味로 쓰이는데, 羅什은 이 말을 「所說」이라고 번역하였고, 玄 은 「說」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nirde a의 形을 취한 大乘經典은 「所說」(parip cch )의 形을 취한 것과 함께 經典文學으로서 그 數가 가장 많고, 게다가 兩者 모두 對話의 形式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經典文學도 그 대부분은 一般的으로 思想에 관한 對話篇이나  Drama와 같으며, 對話에 의한 思想論斷이나 信仰對決을 이루어 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고, 이것에 의하여 宗敎·思想·文化 등에 共通된 人間普遍의 表現形式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維摩經」은 維摩居士를 中心人物로 하여 그와 함께 文殊·舍利弗등이 對論하는 形式으로 空性( nyat )·不二(advaya)등의 大乘의 深意를 表明하려고 試圖한 것이지만, 이러한 對話形式에 의한 思想의 表現法이 그 特異한 戱曲文學的 構想에 조화를 이루어서 이 經의 流傳을 현저히 독특하게 만들어 왔던 사실을 우선적으로 注目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5) 또한 經典의 特質을 理解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梵語原典을 考察해야 할 必要가 절실하지만, 不幸히도 『維摩經』의 梵本이 散失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서기 7·8世紀에 在世했던 寂天( ntideva)이 그의 ik samuccaya (宋, 法護·日照 等譯『大乘集菩薩學論』)에 이 經을 약간이나마 引證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소중한 資料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印度에 있어서 『維摩經』의 成立 時期는 대략 西紀 1世紀頃으로 여겨지는데, 600∼700년 후에 역시 이와 같은 援用을 보게 되는 것은 印度 本國에서의 流傳의 實際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깊이 注意하여 살펴 볼만한 것이다. 『大乘集菩薩學論』은 本來 大乘菩薩의 實踐項目을 諸經中에서 拔萃編集한 體栽의 것이므로, 그러한 觀點에서 이 經의 實踐的 趣意에 대한 着眼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維摩經』은 그 成立이래 龍樹의 『大智度論』에 있어서의 引釋을 시작으로 하여 世親의 諸著述에서도 이 經에 대한 깊은 關心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思想과 實踐上의 影響외에도 이 經이 갖는 對話文學의 特異性에서 발전하여 여러 가지 維摩에 관한 傳說을 낳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은 7世紀 前半의 時期에 印度에 留學하여 西域을 旅行했던 玄 의 『西域記』 卷7의 記事에 보이고 있다. 즉,「中印度 Vai l 의 西北 5·6里의 곳에 菴羅樹園( mrap li- r ma)이 있는데, 이곳은 옛날 釋尊께서 『維摩經』을 說하셨던 場所이다」라는 내용이나 또 「園에서 東北으로 三里되는 곳에 維摩居士의 옛집이 있고, 그가 說法한 方丈室이 지금도 남아 있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6)

『維摩經』에 나타난 維摩居士를 어떻게 理解하고 解釋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問題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歷史的 實在의 人物로 간주하려고 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것을 大乘佛敎敎理에 근거하는 理念的인 存在로만 해석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維摩經』의 原型에 關한 問題로서 그 文學的 構成上의 내용에 더하여 이 經의 敎理內容이 大乘菩薩의 實踐項目으로서 重要視되고 있었던 同時期에 다른 한편에 있어서 이러한 庶民的인 친근함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은 印度의 宗敎文學一般이 갖는 文化的 特色이 如實히 發露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對話文學이 갖는 戱曲的 效果가 뇌리에 새겨지는 人格的 映像이 되어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서 마침내 實在의 人物로까지 具象化된 結果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7) 印度의 大乘佛敎가 國外로 퍼져 나갈 즈음에 西域에서 中國의 雲岡과 龍門에 걸쳐서 수 없이 제작된 「變相」의 圖像中에 「觀經」·「法華」·「淨土」·「地獄」等의 諸變에 섞여있는 維摩變이 特色있는 存在였다는 사실은 이 經의 經典文學的 由來와 함께 그 宗敎的 感化力의 偉大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 『維摩經』의 年代

 

『維摩經』과 관련된 모든 事件들은 釋迦牟尼佛의 在世時 즉 紀元前 5∼6世紀에 일어났었던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佛敎의 傳說에 由來한 文獻的인 fiction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8)

7世紀경의 中國人들은 支謙에 의해 222∼229年 사이에 번역된 『佛說維摩詰經』을 가장 오래된 譯本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維摩經』의 原本 편찬 時期로부터 支謙의 번역본이 나오는 사이에 상당한 時間이 경과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支謙의 譯本은 오늘날까지 傳해오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佛說維摩詰經』二卷(T.474)인 것이다. 그것이 허위가 아닌 歷史的 眞實性을 띠고 있다는 것은 異論의 여지가 없다. 이 T.474의 이름은 모든 中國의 目錄에 言及되어 있으며, 그 目錄들은 이 『維摩經』이 吳의 黃武時代(222∼229)에 편찬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維摩經』의 원본 편찬의 年代的 下限은 A.D.222∼229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 최초의 漢譯本을 통해서 成立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時期에 『維摩經』은 印度에서 이미 權威가 있었는데, 그 당시 印度에서는 中論學派(M dhyamikas) 또는 空論學派( nyav dins)라는 大乘學派가 형성되고 있던 중이었다. 이 時期에 이 學派의 巨匠인 龍樹(N g rjuna)는 445頌으로 된 『中論』(M lamadhyamakak rik , 즉 Madhyamaka stra)과 26頌으로 된 『十二門論』(Dv da amukha stra)과 『十住毘婆沙論』(Da abh mikavibh )과 또한 다른 저서들을 출판했던 때와 멀지 않았다. 그의 弟子인 提婆( ryadeva)도 그의 유명한 『廣百論本』을 出版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維摩經』은 너무도 간결해서 인용할 여지가 없는 그 龍樹의 偈頌들 가운데에서는 전혀 引用된 사실이 없다. 반면에 『維摩經』은 『中論』계통의 방대한 百科辭典인 『大智度論』(Mah praj p ramitopade a, 略稱 Upade a)속에 풍부하게 援用되어있다. 402년부터 404년 사이에 이 책을 번역한 羅什은 『大智度論』을 龍樹 자신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9)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볼 때, 『維摩經』은 늦어도 紀元後 2世紀경의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또한 『維摩經』은 般若部(Praj p ramit s)·寶積部(Ratnak a)·華嚴部(Avata saka)와 大集部(Mah sa nip ta)의 가장 오래된 부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哲學的인 동시에 神秘的인 성향을 띄고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2) 『維摩經』의 分科

 

 ① Tibet本은 단지 12品으로 構成되어 있는데, 그 題目은 아래와 같다.

 

1. Sa s rgyas kyi i  yo s su dag pa gle  g i : 佛國淸淨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序品.    

2. Thabs la mkhas pa bsam gyis mi khyab pa : 不思議方便力品.

3. an thos da  bya  chub sems dpa  gta  bar rmas pa : 聲聞僧과 菩薩      의 質問에 대한 不應答

4. Na ba ya  dag par dga  bar bya ba : 病의 問安

5. Rnam par thar pa bsam gyis mi khyab pa bstan pa : 不思議解脫에 관한      敎說

6. Lha mo : 天女

7. De b in g egs pa i rigs : 如來의 家族

8. G is su med pa i chos kyi sgor jug pa : 不二法門에 관한 序品

9. Spul pas al zas bla s pa : 應現 菩薩에 의하여 養食을 取하는 일

10. Zad pa da  mi zad pa es bya ba i chos kyi rdzo s : 滅과 非滅에 관       한 敎說

11. jig rten gyi khams m on par dga  ba bla s pa da  de b in g egs pa       mi khrugs pa bstanpa: 增上意樂國(Abhirati)에 도달하여 阿 佛을 보는       일

12. S on gyi sbyor ba da  dam pa i chos gta  ba : 法供養 및 囑累品

 

 

 

 

 

② 現在까지 전해오는 세 개의 漢譯 異譯本에 있어서, 『維摩經』은 14品으로 構成되어 있다. H. Hashimoto의 'A Study of the True Character of the Vimalak rti-nirde a' (印度學佛敎學硏究, Ⅶ, 1958, p. 216)에 실려 있는 各品의 對照表를 여기에 그대로 引用하면 다음과 같다.

 

 

對照表(A)

     譯

 品

支         謙

羅         什

玄          

XIII

XIV

     +-佛    國-+  

   | 善    權 |

  卷 | 弟    子 |卷

  上 | 菩    薩-+上

     | 諸 法 言-+

     +-不 思 議 |

     +-觀 人 物 |卷

     | 如 來 種 |中

   | 不 二 入-+

  卷 | 香 積 佛-+

  下 | 菩 薩 行 |

     | 見阿 佛 |卷

     | 法 供 養 |下

     +-囑累彌勒-+  

 佛        國-+

 方        便 |卷

 弟        子 |上

 菩        薩-+

 文殊師利門疾-+

 不   思   議 |卷

 觀   衆   生 |中

 入不二 法 門-+

 香   積   佛-+

 菩   薩   行 |

 見 阿    佛 |卷

 法   供   養 |下

 囑        累-+

 序              -+卷

 顯不思議方便善巧-+一

 聲            聞-+卷

 菩            薩-+二

 門            疾-+卷

 不     思     議-+三

 觀     有     情-+卷

 菩     提     分 |四

 不   二   法  門-+

 香     台     佛-+卷

 菩     薩     行 |五

 觀     如     來-+

 法     供     養-+卷

 囑            累-+六

大藏

正本

pp.519 a∼536 c

pp. 537∼557 b

pp. 557 c∼588 a

 

 

 

 

 

 

對照表(B)

Kanjur

Chih Ch'ien(支謙)

Kum raj va(羅什)

Hsuan-tsang(玄 )

Ⅰ.Buddhak etrapari o-

   dhananid nam.

Ⅱ.Acintyam

   up yakau alyam.

Ⅲ. r vakabodhisattv -

   n  pra naty ga .

Ⅳ.Gl nasa modanam.

Ⅴ.Acintyavimok a-

   nirde a .

Ⅵ.Dev .

Ⅶ.Tath gatagotram.

Ⅷ.Advayadharma-

   mukhaprave a .

Ⅸ.Nirmitena

   bhojan d nam.

Ⅹ.K ay k ayam iti

   dharmavisarjanam.

.Abhiratilokadh tor

   graha am,

   Ak obhyasya

   tath gatasya

   dar anam.

.P rvayoga ,

   saddharmasya

   par ndan .

Ⅰ.Buddhak etram.

Ⅱ.Up yakau alyam.

Ⅲ. r vak .

Ⅳ.Bodhisattv .

Ⅴ.Dharmavacanam.

Ⅵ.Acintyam.

Ⅶ.Sattvasa -

   dar anam.

Ⅷ.Tath gatagotram.

Ⅸ.Advayaprave a .

Ⅹ.Sugandhak as

   tath gata .

.Bodhisattvacary .

.Ak obhyas

   tath gata .

Ⅰ .Dharmap j .

Ⅴ .Maitreye

   par ndan .

 

 

 

 

 

 

 

Ⅰ.Buddhak etram.

Ⅱ.Up y .

Ⅲ. r vak .

Ⅳ.Bodhisattv .

Ⅴ.Ma ju riyo

   gl nap cch .

Ⅵ.Acintyam.

Ⅶ.Sattvasa dar-

    anam.

Ⅷ.Tath gatagotram.

Ⅸ.Advayadharma-

   mukhaprave a .

Ⅹ.Sugandhak as

   tath gata .

.Bodhisattvacary

.Ak obhyas

   tath gata .

Ⅰ .Dharmap j .

Ⅴ . Par ndan

 

 

 

 

 

 

Ⅰ.Nid nam.

Ⅱ.Acintyam

  up yakau alyam.

Ⅲ. r vak .

Ⅳ.Bodhisattv .

Ⅴ.Gl nap cch .

Ⅵ.Acintyam.

Ⅶ.Sattvasa dar-

    anam.

Ⅷ.Bodhya g ni.

Ⅸ.Advayadharma-

   mukham.

Ⅹ.Sugandhak as

  tath gata

.Bodhisattvacary

.Tath gatasya

   dar anam.

Ⅰ .Dharmap j .

Ⅴ . Par ndan .

 

 

 

 

 

 

 

③ 바로 위의 對照表(B)는 Tibet本과 3개의 漢譯本에 依據하여 『維摩經』의 各各의 品들을 Sanskrit語로 復原시킨 互照錄이다.

 

2) 場所

 

初期의 經典註釋學者들은 經이 說해진 場所와 會衆을 상당히 重要視하였다. 『維摩經』안에서는 사람들의 行動이 庵婆羅園( mrap l vana)과 Vai li에 있는 維摩詰의 집(Tirhut의 Muzaffarpur지역인 Basarch)사이에서 오고 가는 일과 Sarvagandhasugandh  世界로의 잠시동안의 여행으로 한정되어 있다.

 

(1) 毘舍離의 庵婆羅園(Ch. I)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無數한 聲聞僧과 菩薩과 帝天에 둘러싸여 그곳에서 說法하신다.

寶積(Ratn kara)은 500명의 젊은 Licchavi족 청년들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을 親見하러 온다(Ⅰ,§7).

 

(2) 維摩詰의 居處(Ch.Ⅱ) : 維摩詰은 그의 집에서 稱病을 한다(Ⅱ,§1). 또한 그 마을의 著名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問病하러 온다(Ⅱ,§7).

 

(3) Vai li의 庵婆羅園(Ⅲ∼Ⅳ,§1) : 釋尊께서 열명의 聲聞僧과 세분의 菩薩과 한명의 優婆塞(Up saka)를 차례차례로 초대하여 維摩에게 病問安할것을 권하지만, 그들은 모두 辭讓하고, 文殊舍利(Ma ju ri)만이 訪問할것을 受諾한다.

 

(4) 維摩詰의 居處(Ⅳ,§2∼Ⅸ,§4) : 文殊舍利는 수 많은 聲聞·菩薩·帝天을 동반하여 庵婆羅園을 떠나서 維摩詰의 집으로 간다(Ⅳ,§2). 會衆은 須彌相世界의 如來이신 須彌燈王께서 보내주신 거대한 玉座위에 坐定한다(Ⅴ,§7).

 

(5) Sarvagandhasugandh  世界(Ⅸ,§5∼8) : 維摩詰의 命令에 따라서 한명의 應現菩薩은 문제의 衆香國(Sarvagandhasugandh )世界에 가서 香積(Sugandha-k a)如來에게 약간 남은 如來의 양식을 요청하여 얻어 갖고서 만족한다.

 

(6) 維摩詰의 居處(Ⅸ,§9∼18) : 應現菩薩은 衆香國 世界의 無數한 菩薩과 함께  다시 維摩詰의 居處로 되돌아온다(Ⅸ,§9).

 

(7) Vai l 의 mrap l vana(Ⅹ∼) : 維摩詰의 집에 모인 全 會衆은 釋尊이 계신 庵婆羅園으로 移動한다(Ⅹ,§2). 어느 때 衆香國 世界의 菩薩들은 그들 자신의 世界로 되돌아가기 위해 mrap l vana를 떠난다(Ⅹ,§20). 阿 佛 如來의 增上意樂國(Abhirati)이 기적적으로 庵婆羅園에 나타났다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간다(,§4∼7).

印度의 著述家들의 마음속으로는 이러한 모든 移動은 순전히 虛構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그러한 行動과 對話를 강조하기 위한 무대장치의 변화들일 뿐이다. 그러나 적극적이고도 주의깊은 中國人들은 그런것들을 文字그대로 받아들여서 中國의 巡禮僧들이 Vai l 에 갈 때마다, 그들은 『維摩經』에서 言及된 여러 장소를 잊지 않고 알아보았던 것이다. 여행 안내인들은 모든 장소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대답해 주었으며, 그들이 전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서 꾸며대기도 하였다. 中國의 巡禮僧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전해진 그러한 場所들을 충실하게 수집하였던 것이다.

① 402∼411년에 걸쳐서 印度에 머물러있었던 法顯은 414∼416년 사이에 그의 여행담을 썼다. 이 『法顯傳』속에서 Vai l  城에 관한 報告는 매우 짧은 것이다(T.2085, p.861 c 13∼15).

② 635년경에 Vai l 를 방문했던 玄 은 『維摩經』에서 言及하고 있는 聖地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었다. 646년에 간행된 辯機의 『西域記』(T.2087, ch.7, p.908 b)와 664년에 慧立과 彦悰에 의해 발행되어 688년에 교정된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T.2053, ch.3, p.235)에 玄 이 수집한 資料들이 記載되어 있다.

③ 方丈에 관한 상세한 것이 어떻든 간에 方丈이라는 表現은 維摩詰의 집을 묘사하기 위해서 中國에서 傳統的으로 使用되었다. 이 方丈이라는 말은 義淨(635∼713)이 쓴 『大唐西域求法高僧傳』(T.2066, ch.2, p.8 b 8), 湛然(711∼782)의『維摩經略疏』(T.1778, ch.7, p.669 c 13-14), 慧琳(737∼820)의 『一切經音義』(T.2128, ch.6, p.342 b 11), 道原(약 1004년)의 『景德傳燈錄』(T.2076, ch.6, p.251 a 8∼9)等에 나타나고 있다. 方丈이라는 말은 Sanskrit語에 해당하는 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現代 中國語에서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寺刹의 祖室을 表現하는데 쓰이고 있다.10)

 

 

 

2. 『維摩經』의 成立背景

 

世尊께서 入滅한지 100년 후 出家敎團이 上座部와 大衆部의 둘로 나누어졌다. 그 뒤 다시 各部는 異說과 異議를 낳아 분열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 분열이 끝난 것이 대체로 기원전 1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때 생긴 部派를 小乘12部라고 한다. 각 部派는 저마다 自派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그 정통을 권위 있게 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 결과 自派의 해석을 가미한 經典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가 部派마다 世尊의 敎說을 정리한 經과 교단의 규율 운영에 관한 규정을 정리한 律, 그리고 敎說의 解說, 註釋을 정리한 論의 三藏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 중에서 후대에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說一切有部」라고 하는 上座部계통의 部派가 있다. 그 이름이 나타내고 있듯이 「일체의 존재는 실재한다」고 설하는 部派로서 존재하는 것이 時間的으로 실재하는 한 空間的으로도 實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大衆部 계통에서도 과거와 미래에 있어서는 「無」이지만 현재는 「有」라고 하여 일체의 존재를 현재의 시점에서 實在하는 것으로 생각한 部派도 있었다. 이와 같이 世尊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다른 생각을 갖게 된 이들 出家敎團으로부터 일반의 在家信徒들이 떨어져 나간 것은 注目할만 하다. 自派의 주장을 내세우며 파벌을 조성한 出家敎團은 모든 衆生을 濟度하고자 깨달음을 얻은 世尊의 理想을 따르기보다는 왕과 부호 등이 보내는 경제적 원조로서 부유해지고, 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으로서 권위와 전통을 삼았다. 그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다만 自派의 敎理의 硏究에 종사하고 본래의 使命을 잊고 있었다. 在家信徒의 경제적 원조만을 바라면서 그들을 제도하는 일은 포기한 상태로 敎團이라고 하는 온실 속에 갇혀 있었다.

러나 出家敎團 내부에서 이와 같이 그릇된 敎條主義와 權威主義 그리고 傳統을 중요시하는 保守主義에 대한 자기비판의 소리가 나오게 되어 世尊의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싹트게 되었다. 一般信徒의 지지를 받은 이와 같은 운동이 大乘佛敎로서 展開된 것이다. 大乘佛敎의 運動은 世尊을 단순한 역사적 인물로서 취급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理想的인 存在로서 把握하고, 信仰의 對象이 되는 동시에 무수한 사람에게 초인적인 「부처」로서 신봉하게 하는 사고방식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깨달음을 구하는 求道者로서의 菩薩이 대두하고 이것이 더욱 확대되어 衆生을 濟度하기 위해 노력하는 무수한 菩薩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 佛菩薩의 信仰이 생겼고, 여러 佛菩薩의 加護를 祈願하기에 이르러 이것은 일반의 생활과 밀착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世尊의 無我思想을 바르게 파악하고, 空의 思想을 고취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조건(因緣)의 결합으로 해서 성립된 것일 뿐으로 그것 자체로서의 實體的인 本性은 없는 것, 즉 「無自性」이라고 하였다. 또 無自性이기 때문에 空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空이 단순한 이념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의 실천을 그들은 「六波羅蜜」로서 구체화하였고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실천해 나가고자 하였다. 현실생활 그 자체가 진실의 기반이며 이것을 떠나서 별도로 淸淨한 生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것은 出家敎團의 權威와 保守主義에 대한 비판이며 저항이었다. 이것은 在家佛敎의 동기가 되었다. 在家信徒를 주축으로 하는 佛敎가 점차 그 思想을 정리하고 實踐하기에 이르러 空의 實踐理念인 반야바라밀이 『般若經』의 성립을 촉구하였다. 따라서 이 『般若經』의 思想을 이어 받아 성립한 것이 『維摩經』인 것이다. 이와 같은 時代的, 思想的 背景을 가지고 태어난 『維摩經』의 성립과 내용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서 지리적 요소를 간과할 수가 없다. 이 經에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世尊이 說法을 한 「바이샤아리」지방과 維摩詰의 出身族인 「릿챠비」족을 내용에서 들고 있다. 그러므로 이 經의 고향은 릿챠비족이 사는 바이샤아리 城이다. 부유한 상인과 기품이 높은 귀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기풍이 넘치는 도시였다. 이와 같이 自由精神이 넘치고 批判精神이 풍부한 자유로운 도시에서 이 『維摩經』이 성립되기에 이른 것은 이 경의 주인공인 維摩詰이 얼마나 자유분방한 자유인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며, 그의 통쾌한 說法은 당시 大乘佛敎의 初期에 맞서야 했던 다른 部派와의 심각한 對立關係를 알게 한다.   

 

3. 傳譯

 

語의 原典은 逸失되고 없다. 그러나 그 經의 이름이 Vimalak rti-nirde a인 것은 분명하다. 원전은 逸失되었지만 그 일부는 月稱의 『中論釋』이나 또는 寂天의 『大乘集菩薩學論』에서 引用되고 있다.

 經은 무역이 번창했던 당시의 추세를 몰아 중앙 아시아를 거쳐 中國으로 건너 왔고, 중아 아시아의 天山南路을 거쳐오는 도중에 그 곳의 고오탄 語로도 번역되어 지금은 그 단편이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몽고·중국에서도 국제어로서 쓰이고 있던 페르샤의 한 方言인 소구드語(Sogdian)로도 번역되어 그 단편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완전하게는 漢譯과 티베트譯이 전해지고 있다.

漢譯으로는 後漢 靈帝의 中平 5년(기원188년)에 嚴佛調가 古 『維摩詰經』을 번역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밖에 吳의 손권 시대(223∼252)에 大月氏國의 귀화인 支謙이 번역한 『維摩詰經』2권이 있고, 姚秦의 弘始 8년(406)에 구자국의 귀화인 구마라집이 번역한 『維摩詰所說經』3권이 있으며, 이 번역에는 「不可思議解脫」이라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또한 唐의 高宗 永徽 元年(650)에 현장이 「說無垢稱經」 6권을 번역하였다.

티베트譯으로는 「거룩한 無垢稱의 가르침이라고 이름하는 대승경전」11)이라하였고, 번역관이 번역하였다. 번역한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대개 8세기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이 티베트譯은 산스크리트語를 번역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번역은 가장 충실한 번역으로 원전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漢譯과 티베트譯에 다른 점이 있다고 해서 漢譯에 誤譯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原典에 異本이 있으면 다른 번역이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維摩經』의 漢譯은 前後 7回에 걸쳐 行하여 졌는데, 그 가운데 現存하는 것은 다음의 三譯뿐이다.12)

 

 (1) 吳의 支謙 譯 『佛說維摩詰經』 二卷

 (2) 姚秦의 鳩摩羅什 譯 『維摩詰所說經』 三卷

 (3) 唐의 玄  譯 『說無垢稱經』 六卷

 

이 가운데서도 羅什 譯本이 널리 이용되고 있고, 그 影響이 甚大하다. 現代的 硏究로서는 原典究明이 基本的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維摩經』의 梵語原典이 없어졌으므로 自然히 그 硏究는 藏譯외에는 漢譯을 中心으로 하는 방법이외에 다른 代案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飜譯이라고 하는 일을 단순히 原作이나 原文의 模倣을 反復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그 나름대로 文化的·創作的 意義를 지니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때때로 훌륭한 번역의 出現이 思想界에 革新을 가져왔던 例도 전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 飜譯에는 譯者가 生存했던 時代의 生活이 如實히 반영되어 文化的 生命이 鮮明히 옮겨져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羅什이 『維摩經』을 漢語로 바꾸어 옮기려고 하였을 때의 中國에는 이미 老莊思想이 퍼져서 知識人들 사이에서는 隱逸을 사랑하고 淸談을 즐기는 風이 存在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 데, 이에 대하여 『維摩經』에는 이미 思想的으로나 表現的으로 이 時代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요인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더불어 譯場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僧肇나 道生등과 같은 걸출한 思想家들이 많았으므로 羅什 譯 『維摩詰所說經』이 나오자마자 신속하고도 널리 크게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僧肇 등은 따로 『註維摩』를 著述하여 그것에 師說이나 各個의 所見을 정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維摩經』을 解釋하는데 하나의 基準이 될 정도로 높이 評價되는 동시에 또한 중요시되고 있다.

漢譯을 토대로 한 『維摩經』 硏究는 그후 수없이 나타났지만, 그 중에서도 天台의 『維摩經疏』, 淨影의 『維摩經義記』, 嘉祥의 『淨名玄論』, 慈恩의 『說無垢稱經疏』 및 聖德太子의 『維摩經義疏』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것들 가운데 慈恩의 『說無垢稱經疏』가 新譯에 의한 것이고, 나머지 硏究書들은 모두 羅什의 舊譯에 의한 것들이다.

漢譯三本을 대비해 볼 때, 興味를 끄는 것은 이른 바 ‘維摩의 一默響, 우뢰와 같도다’라고 하며 세상에 알려진 「入不二法門品」 第九의 最後의 一段이 第一譯인 支謙 譯本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支謙本에서는 (1) 法作(什·  兩譯에서는 「法自在」)菩薩以下 三十一菩薩이 各自의 所見으로 不二의 境과 그것으로 進入의 次第를 나타낸 뒤, (2) 文殊가 「無言·無說·無示·無識·離諸問答」이라고 말하며 끝난 것에 대해, 羅什·玄 의 兩本에서는 계속해서 (3) 文殊의 권유에 의해 維摩居士가 登場하게 되고, 게다가 그 自身은 默然無言으로 發言하지 않고 오히려 文殊의 「乃至, 無有文字語言」이라고 하는 讚歎에 의해 그 眞意가 명백해져 가는 것이다.

支謙 譯本에는 아직까지 없었던 이러한 소위 「默不二」라는 一段이 다음의 什·  兩譯本에 이르러 揷入付加된 事實은 단순히 經典의 發達段階를 아는 것 이상으로 重要할 뿐만아니라, 後世의 禪家에서 특히 『維摩經』을 중요시한 理由가 이러한 對論의 極致를 나타낸 一段에 있음을 認知할 때, 더욱 뜻깊은 일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劇的 場面이 대부분 文化·藝術·社會 等 各方面에 크나큰 影響을 줄 수 있었음을 想起할 때, 漢譯經本의 流布範圍에 있어서의 歷史的 思想的 硏究가 重要한 意義를 갖는 것이 사실이지만, 現代的 硏究로서는 더욱 異譯本 相互間의 譯語나 思想表出의 方法의 相違나 그 出入에 注意할 필요가 있다.

『維摩經』에는 漢譯외에도 Tibet語譯이 있다. 이것은 8世紀 前後에 活躍한 Ti-bet의 飜譯官인 法戒(Chos- id tshul-khrims)가 번역한 것으로 『聖無垢稱所說大乘經』( phags-pa dri-ma-med-par-grags-pasbstan-pa shes-bya-ba theg-pa-chen-po i mdo)이라고 불리며, 現存最古의 Tibet 譯經目錄인 『덴칼마』에도 記載되어 있다.13) 

梵文完本이 未發見된 오늘날 한편으로는 漢譯經本에 依據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梵本의 直譯態인 Tibet語 譯本을 참조하면서 漢·藏 兩種의 譯本을 相互 對照 硏究를 함으로써  現存하는 資料가 最大限으로 活用되는 『維摩經』 硏究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近代에 들어서면서 네번에 걸쳐 이 經의 歐美語譯이 기획되었다. 첫번째는 大原嘉吉氏가 明治三十年에서 同三十一年(1897∼1898)에 걸쳐 歐文雜誌 The Hansei Zasshi(反省會雜誌)에 連載한 것(英文), 두번째는 泉芳璟師가 大正十三年에서 昭和三年에 걸쳐 똑같이 Eastern Buddhist(東方佛敎)에 連載한 것(英文)이 있는데, 이것은 全十四品 完譯이었지만, 大原氏의 것은 사정상 菩薩行品 第十一까지만 연재되고 그 뒤는 中斷되었다. 세번째는 昭和 十九年에 前 新瀉高校 敎授인 Jakob Fisher氏가 故 橫田武三氏 등의 도움을 받아 獨逸語로 完譯한 것, 그리고 네번째는 昭和 三十七年에 tienne Lamotte 敎授가 Tibet譯本에 玄 의 漢譯本을 參照하여 譯出한 佛語本이 있다.

 

위에서 언급된 四書의 題名을 列擧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大原譯 The Vimalak rti nirde a s tra (The Discourse of the

            Wonderous Law of Emancipation)

 (2) 泉 譯 The Vimalak rti S tra,Vimalak rti's Discourse on Emancipation

 (3) 獨 譯 Das S tra Vimalak rti, Das S tra uber die Erlosung

 (4) 佛 譯 L'Enesignement du Vimalak rti (Vimalak rti-nirde a)

 

위의 (1), (2), (3)이 모두 羅什 譯 『維摩詰所說經』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진 것에 비하여, (4)의 佛語譯은 藏譯을 基底로 한 것이다. 이 佛語譯은 확실히 『維摩經』 硏究書로서 敬歎할만한 著述로 여겨지고 있다. 譯者인 Lamotte교수는 단순히 이 經을 프랑스語로 옮기는 작업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書題에도 「飜譯과 註解」(Traduite et Annot )라는 부록이 들어있는 것처럼, 이 經에 관한 硏究資料를 內外에서 찾고, 또한 縱橫으로 이것을 驅使하여 이루어진 가장 훌륭한 硏究書이다.

Lamotte敎授가 漢譯三本中에 특히 玄  譯本을 參照한 것은 東洋의 佛敎學者들이 본받을 만한 態度로 여겨지는데, 『維摩經』 全體의 思想史的 硏究로서는 羅什 譯本을 中心으로 하는 流行에 대하여 重要한 位置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羅什 譯이 一名 「不可思議解脫」(acintyavimok a)로 經題한 것에 대해 英·獨 譯者들이 이에 注目하여 'The Wonderous Law of Emancipation’또는 'Das S tra uber die Erlosung’으로 書題를 붙인 것은 羅什 譯의 特色에 의한 經에 대한 理解로 생각되며, 印度에서 宗敎的 理想으로 삼는 「解脫」(vimok a)을 가리켜서 「自由」 또는 「自在」라고 표현한 것에 대하여 歐美語인 freedom 이나 liberty의 譯語로서도 또한 「自由」라는 在來語를 사용한 사실을 참조하더라도 飜譯文化의 歷史性과 社會性을 無視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佛敎文化는 이미 世界共有의 宗敎的·思想的 資産이므로 이것이야말로 自由로운 討議와 硏究에 의해 실제로 이것을 全 人類의 것으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方策을 講究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維摩經』에 나오는 維摩居士는 저 『華嚴經』의 善財와 함께 佛敎的 自由人의 典型的 人物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14) 

 

4. 註釋

 

1) 印度 및 中國의 註釋書

 

印度에 있어서는 많은 經과 論에 『維摩經』이 인용되고 註釋을 하고 있으나 『維摩經』을 위한 특별한 註釋書는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유가파의 世親이 註釋書를 저술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印度에 있어서 『維摩經』과 관련을 갖고 있는 經論을 보면, 『大乘集菩薩學論』(寂天 著, 法護·日照 共譯), 『中論釋』(月稱 著), 『善見律毘波沙』, 『佛說大方等頂王經』(竺法護 譯), 『佛說月上女經』( 那 多 譯), 『佛說乳光佛經』(竺法護 譯), 『大智度論』, 『中論』, 『寶 經四法憂波提舍』,『彌勒菩薩所問經』, 『入大乘論』등으로 대부분이 『維摩經』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어 당시 인도에서 얼마나 『維摩經』이 유행했었는가를 알 수 있다.

 

印度에서 中國으로 넘어와 『維摩經』은 禪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그 빛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玄 의 번역이 나오기까지 羅什의 『維摩經』번역본은 『維摩經』의 대표적인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연구되었고, 羅什 스스로가 『維摩經疏』를 지었다. 羅什과 玄 의 번역을 중심으로 연구된 註釋書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註維摩詰經』(後秦의 僧肇 撰), 『維摩經記』(隨 慧遠 撰), 『維摩經玄義』(隨 智  撰),『維摩經 略疏』(唐 智  說, 湛然 略),『維摩經略疏 垂裕記』(京 智圓 述), 『淨名玄論』(隨 吉藏 著), 『維摩經義疏』(隨 吉藏 撰), 『說無垢稱經疏』(唐 窺基 撰)등으로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羅什의 說과 道生의 說에다 자기의 해설을 함께 실은 僧肇의 『註維摩詰經』이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維摩經』연구의 지침이 되어 있고, 가장 기본적인 권위를 지닌 註釋書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智圓의 『略疏垂裕記』는 湛然의 『維摩經略疏』를 評釋한 것이다.15)

이 밖에도 『維摩經無我疏』(明 傳燈), 『維摩經 評註』(揚 起元), 『維摩詰經饒舌』(淸 淨挻) 등이 있다.    

 

2) 僧肇의 『註維摩詰經』

 

鳩摩羅什의 『維摩詰所說經』三卷이외에도 그 前後 數回의 飜譯이 있었는 바, 그것들 가운데 羅什 譯 以前에는 吳의 支謙 譯 『佛說維摩詰經』二卷과 그 以後에는 唐의 玄  譯인 『說無垢稱經』六卷이 모두 現存하고 있다. 그러나 『維摩經』이 실제로 中國, 韓國, 그리고 日本등으로 普及되어 영향을 준 것은 주로 羅什 譯本이기 때문에 이 羅什 譯本의 이름으로 행해진 『維摩經』이 中國古代의 佛敎以來 소위 敎相判釋에 있어서 어떠한 地位를 부여받았는지 考察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敎相判釋(略하여 敎判 혹은 判釋 또는 判敎라고도 한다)은 現代의 歷史學的 立場에서는 一顧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事實性 그 자체를 근거로 하여 經典에 대한 宗敎的인 史眼 혹은 諸經典中에 있어서 宗敎的 自覺의 經路를 明瞭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中國에서는 西紀 1世紀 중엽에 이미 佛敎를 수용하기 시작했는데, 그후 2∼3백년 중에 大小乘의 經典이 經律論의 諸部에 걸쳐 주로 西域을 통하여 印度本土에서 中國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中國本土에서는 그것들이 번역되어 中國語로 옮겨져서 점차 流布되고 硏究되어 實修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大小經典들이 그들 經典에 나타난 敎說과 內容을 모두 一元的 視野로 統制하여 보고 說明해보려는 欲求와 必要性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要求에 따라 생겨난 것이 바로 「敎相判釋」인 것이다.

普通 劉宋의 慧觀에 의한 「頓敎·漸敎」의 敎判 및 漸敎에 대한 「五時敎」의 說로 일컬어진다. 그 중 「頓敎」는 『華嚴經』의 說을 가리키고, 「오직 菩薩을 위해 구체적으로 理를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漸敎」中의 第一時는 「有相敎」인데, 이것은 「聲聞을 위해 四諦를,  支佛(緣覺)을 위해 十二因緣을, 그리고 菩薩을 위해 六度로써 三乘을 각각 說하는 것」이라고 하고, 第二時는 「無相敎」로서 이것은 「三乘을 변하게 하는 般若經典을 說하는 것」으로 한다. 즉 「有相敎」가 「行因各別 得果不同」인 相對有相의 說인데 비하여, 「無相敎」는 「空·無相」의 絶對說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第三時는 「抑揚敎」인데 大乘을 찬양하고 소승을 貶하는 것으로서 당연히 『維摩經』의 입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아가서 第四時는 「同歸敎」로서 구체적으로 「萬善同歸敎」로 칭하며, 『法華經』의 說을 가리킨다. 그것은 「三乘을 모두 一佛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最後의 第五時 「常住敎」는 구체적으로 「雙林常住敎」로 칭하며, 「衆生의 悉有佛性과 如來法身의 常住를 說하는 것」으로서 『涅槃經』의 立場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判釋을 했던 慧觀은 처음에 羅什에게 師事하였고, 그의 門下生이었던 僧肇와 함께 큰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즉 僧肇와 거의 同年配인 인물이었다.16)

그런데 慧觀이 涅槃義를 중요시하고 또 『法華』나 『華嚴』그리고 『般若』등과 함께 『維摩』에 정통하고 諸經의 敎說을 일관하는 思想的 解明의 說로서 「二敎·五時」의 敎判을 한 것은 당시 羅什의 譯業과 이에 따라 일어난 佛敎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動機가 되어 中國佛敎思想界에 內面的으로 一轉機에 도달해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욱이 「五時敎」의 全容을 보면, ①有相→ ②無常에서 ④同歸→ ⑤常住로의 思想的 展開와 함께 第三時 「抑揚敎」에 『維摩經』을 배대한 것은 이 經의 特色을 남김없이 취한 것이라고 칭찬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註維摩』를 考察해 보고자 한다.

『註維摩詰經』 혹은 『注維摩詰經』17)等으로 쓰며, 줄여서 『註維摩』라고도 부른다. 또 『淨名集解』로도 통하지만, 구체적으로 『維摩詰所說經註』라고 칭하기도 하는 바, 이것은 『維摩經』 즉 Vimalak rti-nirde a의 漢譯의 하나인 『維摩詰所說經』三卷에 대해 역자인 羅什과 그의 弟子들이 이루어 낸 註釋書이다.

什이 姚興弘始8年(406)에 이 經의 번역을 완성한 후, 『維摩經』은 그때까지 2∼3백년간 通用되어오던 소위 古維摩(그 중 吳의 支謙 譯 『維摩詰經』二卷이 現存함)대신 通用되기 시작하여 唐代의 玄 이 維摩新譯으로서 『說無垢稱經』六卷을 완성한 후에도 今日에 이르기까지  譯에 依한 法相宗系 以外에는 오랜 세월동안 羅什의 『維摩詰所說經』이 사실상 그 代表가 되어 通用되어 왔던 것이다. 羅什이후에 慧遠·智 ·吉藏 等의 中國佛敎를 代表하는 巨匠들이 한결같이 『維摩經』에 대하여 註釋을 했지만, 그것들 거의 모두가 이 羅什 譯에 의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諸師의 『註維摩』 參照는 必然的이었으며, 이 書에 의해 『維摩經』 硏究의 指南을 얻었고 또한 『維摩經』 解釋의 基準을 定할 수 있었던 것이다.18) 

흔히 『註維摩』로 약칭되는 이 書는 鳩摩羅什(344∼413)이 『維摩經』을 번역할 때, 그 장소에 같이 있었던 僧肇가 스승의 說을 道生·道融의 說과 합하여 自身의 說로 삼아 서술함으로써 『維摩經』의 思想을 발휘하는데 힘쓴 책이다. 실제로 『維摩詰所說經註』10卷은 中國에 전해진 佛敎에 대하여 가장 큰 思想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실제로 『維摩經』이 그 眞價를 發揮하게된 것은 中國에 羅什 譯이 流布되고 나서이다. 羅什의 名譯이 나타나자, 敎界의 人氣는 갑자기 『維摩經』에 集中되어 많은 學者들이 이 經典을 硏究하였다. 그 중에서도 羅什의 거대한 에너지를 직접 목격했던 弟子인 僧肇는 情熱을 쏟아 『維摩經』의 註釋書인 『註維摩』를 썼다. 이 書는 『維摩經』 硏究의 指南이 되고, 後世에 오래 依用되기에 이르렀다.

中國佛敎의 各宗의 祖師들도 이 經典에 情熱을 갖고 注釋을 썼다. 天台宗의 開祖인 智 도, 三論宗의 大成者인 吉藏도, 法相宗의 開祖인 慈恩大師도 注釋書를 著述하였다.

그런데 『維摩經』은 學者들에 의해서 硏究된 것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維摩經』은 讀誦되고 信仰되었다. 維摩의 超脫한 風格에 매료된 南朝의 士大夫는 竹林의 七賢과 維摩와의 이미지를 一致시켰다. 維摩를 脫俗한 賢者로서 捕捉하여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維摩는 그들의 理想的 人間으로 보여져 왔던 것이다. 唐代의 詩人이자 南畵의 始祖로서 中國繪畵史에 이름을 남긴 王維는 깊이 維摩에게 私淑하여 스스로 王摩詰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維摩經』을 믿고 열심히 읽고 있던 사람이 空中에서 微妙한 音樂을 듣기도 하고, 『維摩經』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惡魔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도 한다.

日本에 있어서 이 經典에 최초로 注目한 사람은 聖德太子였다. 聖德太子의 스승은 高句麗에서 온 스님들이었다. 이 朝鮮의 스님들도 『維摩經』의 훌륭한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朝鮮의 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은 聖德太子는 이 經典을 注釋하여 『維摩經義疏』를 著述하였다.19)  在家의 居士인 維摩가 主役이었던 이 經典이야말로 眞俗一貫을 지향하여 이 世界에 佛國土를 建設하려고 한 聖德太子의 悲願과 一致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맨 앞에 僧肇 자신의 序文을 달고 있는 이 『注維摩詰經』의 중간에서 서술한 「本地·垂迹」의 見解는 『維摩經』의 本義를 잘 통찰한 것인 한편, 이 經典과 『法華經』등의 사이에 敎理的으로 깊이 상통하는 것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중요하다. 本文은 經文의 순서에 따라 해석한 것으로서 漢譯本을 근본으로 하는 『維摩經』 註釋書로서는 최초의 것인 동시에 매우 기본적인 것이다. 智 의 『玄疏』6卷과 『文疏』28卷, 慧遠의 『義記』8卷, 吉藏의 『義疏』8卷과 『略疏』5卷 등은 모두 羅什의 번역을 근거로 한 『維摩經』 註釋書들이다.20)

『維摩經』은 그 원래의 成立 本土인 印度에 있어서 이미 龍樹와 世親으로부터 注目을 받았고, 특히 後者에게는 獨自의 『維摩經論』이 있었다.21) 아마도 羅什의 『維摩經』번역과 그 註釋說上의 實義에 있어서 Sanskrit 原典을 參照하면서 世親의 『維摩經論』을 접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古維摩에 의해 佛門에 들어와서 그 후 羅什 門下에서 維摩의 眞意를 추구한 僧肇는 師의 說을 충실하게 받아들이면서도 老莊學의 素養에 기초를 두어 維摩를 理解한 뒤에 新天地를 開拓하였다. 그 영향에 의해 『註維摩』의 本迹思想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므로, 智 의 『法華玄義』·『法華文句』·『摩訶止觀』等을 一讀하게 되면 그것의 思想이 더욱 明瞭해 질 것이다.22)

『註維摩詰經』은 羅什 譯 『維摩詰所說經』의 基本的인 理解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폭넓게 維摩硏究를 指向하고 있다.

 

 

 

 

 

Ⅲ. 大乘佛敎上의 『維摩經』의 位置

 

1. 般若思想과 『維摩經』

 

1) 般若思想

 

大乘經典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경전은 다름 아닌 『般若經』이고, 이 『般若經』이 문자화된 것은 大乘佛敎의 發生과 거의 같은 시기인 서력기원 전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佛敎史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당시의 印度佛敎는 소위 大乘佛敎運動이라고 하는 새로운 佛敎思想이 일어나서 변혁의 국면을 맞고 있던 시기였다. 이렇게 불교가 새롭게 변모되어 가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大乘佛敎 이전에 고정화되어 있었던 部派佛敎 소위 小乘佛敎의 敎義와 修習이 일반대중의 신앙과 동떨어진 전문적인 것이 되었고, 또 출가 후에 僧院에서 집단 생활을 하고있던 스님들이 사실상 일반신도들의 救濟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향이 농후했다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大乘佛敎는 이렇게 小乘敎團이 부처님의 根本精神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前提로 해서 小乘敎團이 안고있는 여러 모순을 지적하면서 부처님의 根本精神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새로운 佛敎運動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불교운동의 先驅的인 경전이 『般若經』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大乘佛敎는 『般若經』의 성립과 함께 그 걸음마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라서 최초의 大乘思想인 동시에 또한 모든 大乘思想의 기초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般若經』의 思想을 우선 언급하려고 한다. 『般若經』은 般若波羅蜜이라고 불리는 종교경험을 이론적으로 해명한 책이 아니라,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그것을 획득하려면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책이다. 이것은 지식을 얻는 책이 아니라 智慧의 完成을 추구하는 책이다. 理論의 책으로서 『般若經』을 본다면 반복이 많고 지루해서 읽어 나가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行을 가르치는 책으로 볼 경우에 반복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한 行의 기본이 거기에 설하여져 있음도 알게 된다.

若波羅蜜을 행하는 菩薩이 心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것을 보지 않는 것은 실재하는 대상을 억지로 보지 않으려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물의 自性이 空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지 않는 것이 사물의 自性과 일치하는 길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眞如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에서는 色(物質的인 形相이 있는 것)이나  心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相(外界事物의 形相도 心內의 觀念의 形相도)이 보이지 않으므로 無相이라고 말하고, 心의 대상으로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므로 不可得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것들을 보는 心도 작용하지 않으므로 無心이라 한다. 無心은 不見과 同義이다. 그러므로 空·無相·不見은 각기 다른 말로써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空이 이들 諸개념과 同義語라 하는 것은 空이 원래 認識論的 性格이 강한 槪念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종래의 存在論的 解釋(空이란 存在하는 것에 實體가 없이 因緣에 의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은 空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인 '無相'·'不見'을 빠뜨렸기 때문에 오해에 빠져 있다. 不見은 일체의 대상을 보지 않는 것으로서 心이 모든 대상화의 작용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無心·無分別이라고 한다. 유가행파의 無分別智도 그런 智이다. 반야바라밀은 般若(智)이므로 사물을 아는 작용을 하는데, 이 智에 일체의 대상이 없다(無相)는 것은 이 智에 의해 알아진 것은 이 智 자신 외에는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菩薩의 主體가 일체의 대상화작용을 떠나서 主體 自體를 직접 아는 것이며, 참된 자기의 自覺인 것이다. 그리고 이 智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알뿐만 아니라 諸法의 實相을 안다. 이 智는 일체의 대상화작용을 떠나서 만물(諸法)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아는 것이다. 이 智에는 자기 외의 대상이 없으므로, 그것이 사물을 안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에서 여실하게 사물을 아는 것과 여실하게 자기를 아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로서 성립한다. 그것이 '諸法의 實相을 안다'라든지 '眞如를 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實相이나 眞如는 般若에 의해 보여진다는 의미에서는 일종의 境(認識의 對象)이므로 勝義 또는 第一義라 한다. 最勝(第一)의 智의 義(境)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궁극이라는 의미로 實際라고 하며, 일체가 존재하는 세계라는 뜻으로 法界라 한다. 유가행파에서는 眞如·空·實際·無相·眞實(第一義)·法界를 동의어로 하며, 이것을 '本來自性淸淨'이라 한다.23)

前述한 것처럼 般若가 어떤 것을 알 때는 동시에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안다. 반야라는 智에서는 알아지는 것(所緣)과 아는 智(能緣)가 하나이다. 이것을 유가행파의 술어에서는 알아지는 對象과 아는 智는 둘로 나뉘어 있고, 知를 중심으로 하여 소위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여 만물을 안다. 그런데 般若는 일체의 대상화를 떠나 있어서 알아지는 만물의 하나 하나가 아는 智와 不二이므로, 하나 하나의 알아지는 것은 동시에 아는 智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 하나의 사물이 각각 세계의 중심이 되고 한 사물이 중심이 될 때는 그 외는 주변이 된다는 相互關係가 성립된다. 그러나 空의 정확한 이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첫째로, 『般若經』에 왜 모든 법이 空한가에 대한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지만 열반을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다. 왜 그럴까? 『金剛經』은 그 이유를 '菩薩에게 我相과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般若經』에서 좀 더 구체적인 空의 이유가 제시된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衆緣이 합하면 있고 衆緣이 멸하면 없어진다. 마치 空 의 소리가 그렇게 生滅하되 온 곳이 없고 간 곳이 없는 것과 같다."24) "모든 法은 화합해서 生한 까닭에 自性이 있을 수 없다."25) "모든 法의 이름 또한 화합 때문에 있는 것이니, 그러한 이름은 生하지도 않고 滅하지도 않는다."26) 이런 因緣和合의 說은 『阿含經』에 이미 無我의 이유로 제시된 것으로, 大乘佛敎는 그것을 繼承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7) 특히 『維摩經』은 이와 같은 空의 實踐修行을 통하여 般若思想을 강조하는 大乘經典으로 여겨진다.    

 

2) 『般若經』의‘心非心’

 

'心非心'(Non-Thought Thought)에 관한 內容은 이미 『般若波羅蜜經』등에 명확히 記述되어 있는데도 다만 우리가 주목하지 않고 지나쳐 왔던 것인데, 실제로 이에 대한 內容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는 『道行般若經』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또 『放光般若經』(Pacavi atis hasrik )속에도28) 充實하게 表現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心非心' 理論은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 眞實性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29) 

그러면 이와 같은 淸淨心의 實體가 무엇인지를 『大智度論』에서 考察해보기로 한다.

 

大智의 마음을 證得한 菩薩은 慢心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게 깨달은 마음은 항상 淸淨하기 때문이다. 虛空이 항상 淸淨하여 연기나 구름·먼지·안개 그리고 그것을 덮고 있는 다른 우연한 것들에 의해 汚染되지 않는 것과 같이, 마음은 그 자체로서 영원히 淸淨하여, 無明이나 그것을 뒤덮고 있는 다른 우연한 번뇌에 의하여 汚染되지 않는다. 일단 煩惱가 제거되면, 마음은 처음과 똑같이 淸淨하다. 修行者의 능력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마음의 淸淨性은 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마음'은 絶對的으로 空한 것이기 때문이다.

舍利弗은 생각이라는 특성이 결여된 이 마음이 存在하는지 혹은 存在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실제로 만일 그 마음이 存在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것을 非心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또한 그것이 存在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이 마음을 菩提를 이루게하는 無比의 것이라고 찬양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須菩提존자는 대답하기를, '생각이 없는 絶對的 純粹性에서는 存在도 非存在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舍利弗은 '생각이 없다는 것'(actittat )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須菩提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순수한 空(atyanta nya)이며, 一切의 法을 생각하지 않는 것(avikalpanat , 無分別)'이라고 말한다. 30) 

 

以上에서 살펴본 內容은 가장 오래된 『般若波羅蜜經』들에서 확인된 것으로서 이와 같은 句節은 『勝天王般若波羅蜜經』(Suvikr ntavikr min, pp.85, 15-86,5)에서 확인되는 다음과 같은 內容과 비교해 보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菩薩은 衆生의 편견, 즉 그릇된 생각에서 나온 편견을 잘 알고 있으나, 그는 결코 이러한 邪惡한 妄執에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 그런가? 智慧의 完成, 즉 般若波羅蜜은 생각이 없는 까닭에, 타고난 마음의 光明性 즉 본래 淸淨한 마음에는 어떤 마음의 生함도 存在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속물들이 생각을 일으킴은 바로 어떤 對象 앞에서이다. 對象을 아는 菩薩은 또한 생각을 일으키는 구조도 알고 있다. 그러면 생각은 어디서 생기는가? 菩薩은 마음이 본래 光明으로 차 있음을 알고서 스스로 말하기를 '對象때문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對象이 그릇된 것임을 認知하고 나서 菩薩은 어떠한 생각도 生滅하게 하지 않는다. 그자신의 마음은 光明으로 차 있고, 染汚되어 있지 않으며, 慈悲로우며, 완전히 淸淨하다. 菩薩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어떠한 法도 生함이 없고 또한 滅함도 없다.31) 

 

이러한 淸淨心은 『金剛般若波羅蜜經』에서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그 淸淨心은 世尊이 證得하신 '無上正等正覺'(anuttara-samyak-sa bodhi)의 實體임을 認知 할 수 가 있게된다.

我相등의 一切相을 여이어서 淸淨心인 無所住心등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釋尊께서 깨달으신 '無上正等正覺'을 成就하게 된다는 內容이다. '無上正等正覺'의 體라고 볼 수 있은 '淸淨心'을 회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內容으로 ⑴ 無所住心 ⑵ '四果'에 대한 思念拂拭 ⑶ 一切相 拂拭등을 說明함으로써32) 『般若波羅蜜經』들에 나오는 '淸淨心'이 『維摩經』에 나타난 '淸淨心'의 根源임을 本稿가 밝히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1) 無所住心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 世尊이시여, 善男子·善女人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니, 어떻게 마땅히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善男子·善女人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면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낼지니, 내가 응당 一切衆生을 멸도 하리라. 一切衆生을 멸도하고 나서는 한 衆生도 滅度함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須菩提야 만약 菩薩이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 있으면 곧 菩薩이 아니기 때문이다.33) 

 

菩薩이 아무리 큰 善行을 베풀더라도 我相을 갖고 있으면 菩薩이라고 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 內容은 『金剛經』의 第3分에 밝혀져 있고, 이러한 內容은 第17分에도 보인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菩薩'은 모든 衆生을 涅槃에 이르게 했을지라도 자기에 의해서 행복을 얻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생각해야 함을 說하신 것이다.

만약 '自己'에 의해서 한 사람이라도 涅槃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즉 我相( tma-sa j , 我, '나' 라는 관념)·人相(pudgala-sa j , 補特伽羅, man, 人間이라는 생각)·衆生相(sattva-sa j , 衆生, 有情 즉 生命을 지닌 存在라는 관념)·壽者相(jiva-sa j , 活命이라는 생각) 등의 四相 가운데 하나라도 갖게되면, '菩薩'의 자격을 잃게 됨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金剛經』은 이러한 四相을 끊어 없애버리기를 거듭거듭 강조한다. 특히 위에서처럼 我相(常一主宰한 實 性을 지닌 것으로 보는 自我관념)을 떼어버린 '無我의 眞理'(根本佛敎의 特徵的인 主張)를 깨닫도록 하는 가르침이 『金剛經』敎說의 기조가 되고 있다.

또 '無我'의 眞理性을 모르고,

 

"만약 色(육신)을 我(나)라고 보거나 聲(음성)에서 我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邪道를 行함이어서 如來를 볼 수 없다."34) 

 

라고 하여 육신(色)이나 음성(聲) 등의 六境(客觀的 對象世界)과 같은 것들에서 自己(我)가 存在한다고 보고 찾는 사람은 邪道를 行하고 있는 것이며, 如來를 보지 못함(成佛하지 못함)을 깨우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無我法'을 잘 이해할 경우를 살펴보면,

 

"如來가 과거 然燈佛이 계시는 곳에서 法에서 얻은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께서는 然燈佛 회상에서 法에서 실로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淸淨心을 낼지니, 응당 色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聲香味觸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35)

 

라고 說하여 있다. 요컨대 부처님은 諸法에 無所得이었고 我相을 갖지 않았던 것처럼, 菩薩도 我相등의 一切相을 여이고 淸淨心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며, 그 결과 稀有한 공덕을 얻고 깨달은 사람이 된다고 說하신다. 여기서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거나 '應生無所住心'이 바로 須菩提의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無我法을 通達하여 諸法은 無所得·不可得임을 알고, 我相등의 一切相을 여이어서 淸淨心인 無所住心의 境地에 이르게 되면, 부처님께서 깨치신 無上正等正覺을 成就하게 되는 것이다. 釋尊의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은 '緣起'라는 法則性을 깨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法則性은 '一切法無我’또는‘諸法無我'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金剛般若經』은 이러한 眞理를 깨친 마음을 '淸淨心'이라고 찬양하면서, 諸法은 無我요 無所得인 것으로 보고 집착하지 않는 '깨끗한 마음'을 회복할 것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2) '四果'에 대한 思念拂拭

 

無我法을 통달하여 我相등을 없애도록 說하는 『金剛經』의 가르침은 또한 四果를 實有視하거나 실제로 證得했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四果란 大乘佛敎의 成立 당시에 여러 修行을 통해 도달되는 경지를 단계별로 나누어 설정한 네 가지 聖者位인바, 아무리 어려운 修行을 통해 얻은 결과인 '四果'라 할지라도 永久不變하게 實在實有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無我' 나 '緣起'라는 佛敎의 근본진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金剛般若經』은 이점을 깨우치고자 四果 하나 하나를 거론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固定觀念을 없애고자 하고 있음이 보인다.(一相無相分 第九)

   

우선 '四果'의 개념을 下位부터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須陀洹(srot panna, 入流·預流) : 煩惱를 끊고 처음으로 聖者의 무리에 든 사람.

둘째는 斯陀含(sak d g min, 一往來·一來) : 天上이나 人間界에 한번 태어나 깨닫고, 死後에는 天上이나 人間界에 태어나지 않는 사람. 즉 人間界에서 이 果位를 얻으면 반드시 天上에 갔다가 다시 人間界에 되돌아와 涅槃에 들고, 또 天上에서 이 果位에 이르면 人間界에 갔다가 다시 天上으로 되돌아가 涅槃에 드는 사람으로서, 天上과 人間界를 한번만 왕래하므로 '一住來'라 이름한다.

셋째는 阿那含(an g min, 不來·不還) : 欲界에서 번뇌를 다 끊고 死後에는 色界나 無色界에 태어나 결코 다시 欲界에 돌아와 태어나지 않는 사람.

넷째는 阿羅漢(arhat, 應供·無諍·殺賊·不生·尊敬받는 사람) : 煩惱를 영원히 끊어버린 사람, 四果 중 최고 자리에 도달한 사람.

 

이러한 네가지단계의 果位에 각각 도달한 사람이 자기는 그 聖者位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벌써 我相등에 빠지게 됨을 가르치고 있다. 첫째인 '須陀洹'이 그 果位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 我相·人相등에 집착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四果中 제일 윗자리인 阿羅漢果에 대해서도 '아라한'이 阿羅漢果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역시 잘못이 됨을 지적하고, 須菩提 자신도“阿羅漢果를 얻어 無諍三昧가 第一이다”라고 부처님으로부터 칭찬 받았지만, 이것을 얻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主觀과 客觀世界의 모든 것들을 實體가 實有한 것으로 보는 思惟·判斷·觀念이나 이것들에 住着하지 않는 마음, 즉 '無所住' '無所着'인 淸淨心을 가져야 '大乘의 菩提心'을 일으켜 갖는 것이 됨을 『金剛般若波羅蜜經』에서 敎說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6)

 

(3) 一切相 拂拭

 

"我相·人相등을 없애고 一切相을 여의면 諸佛이라 이름한다.”라거나 “반드시 一切相을 없애고 發菩提心 해야 한다.”든지 또는“菩薩은 반드시 無所住心을 일으켜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一切相이 없어진 淸淨한 無所住心을 일으켜야 菩薩心에 접근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須菩提에게 말씀하신다. "모든 相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相을 相아닌 것으로 보면,

곧 바로 如來를 보리라.”(如理實見分 第五)37) 

 

따라서 이 세상에 存在하는 것은 어떤 것일지라도 모두가 因緣和合되고 無我인 것이어서 永久不變한 實體性이 없는 虛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相이 非相임을 알게 되면, 그 즉시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般若波羅蜜經』들, 예를 들면 『道行般若經』(A as hasrik )·『放光般若經』(Pacavi atis hasrik )·『勝天王般若波羅蜜經』(Survikr ntavikr min)·『金剛般若波羅蜜經』(Vajracchedik praj p ramit )등과 『中論』(Madhyamaka)에 있어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淸淨心은 '心의 순수하고 단순한 非存在'(pure and simple inexistence of thought) 즉 '心非心'인 것이다.38)

 

3) 『維摩經』의 '心非心'

 

여기서 우선 絶對的인 眞理에 관한 『維摩經』의 立場을 硏究하여 整理해 보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불가피한 일로 여겨지므로 『維摩經』의 第一義諦에 관한 核心思想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維摩經』 弟子品 第三의 'Up li와 戒律'에서 '衆生은 마음의 染汚에 의해 더럽혀지고, 마음의 淨化에 의해 淨化된다'고 說하신 부처님의 說法을 인용하면서, 바로 이와 같은 말씀에서 '마음의 성질은 본래 淸淨하고 無染하다'고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즉 '戒와 淸淨心에 대한 維摩詰의 說法'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제가 그 두 사람을 위하여 法대로 解說해 주었습니다. 그때에 維摩詰이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바리 존자여, 이 두 比丘의 罪를 더 무겁게 하지 마시오, 마땅히 (그들의 죄를) 덜어 없애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흔들리지 말게 하시오. 왜냐하면 그 죄의 성품은 안에(나에게)도 없고 밖에도 없고, 중간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늘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음이 더럽기 때문에 衆生이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衆生이 깨끗해진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아서, 마음은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고, 중간에도 없습니다. 마음이 그러하듯 죄도 더러움도 그러하며, 모든 法도 그러하니, 그것은 如如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바리여, 당신이 마음의 自性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解脫을 얻었을 때에도 아직 더러운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

제가 대답하기를 '없습니다'하였더니, 維摩詰이 다시 말했습니다.39) 

 

그러면 이제 淸淨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維摩詰의 說法을 통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一切衆生의 心相에 더러움이 없는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우바리여, 妄想이 바로 더러운 때요, 妄想이 없는 것이 바로 깨끗한 것입니다. 顚倒(잘못된 이해)가 바로 때이며, 전도가 없는 것을 깨끗하다고 하며, 取我('我'의 存在를 무작정 認定하는 것)가 바로 때이며, 取我가 없는 것을 깨끗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바리여, 一切의 法은 生하고 滅하여 일정하게 머물지 아니함(不住)이 마치 幻과 같고 번개와 같아서 조용히 머물러 있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모든 것은 서로 기다리는 일이 없이 한 순간도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法은 다 허망한 소견이어서 꿈과 같고 불꽃과 같으며, 물 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형상(像)과 같은 것이어서, 모두 허망한 생각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줄을 아는 것이 참다운 계율을 받드는 것이며, 이러한 줄을 아는 것이 잘 깨달은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40)

 

이상의 經說을 살펴 볼 때, 淸淨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日常生活 속에서 우선 戒를 잘 지켜 나아가야 하는데, 戒를 잘 지켜 나아가기 위해서는 正見의 능력을 갖춰야 할 것이며, 正見을 갖추기 위해서는 妄想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역시 八正道에 의거하여 항상 正定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優波離는 罪의 모양만을 말하고, 罪의 體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維摩詰에게 가책을 당했던 것이다. 우바리의 戒律觀은 防非·止惡의 消極的인 면에서 그치고, 그는 결코 戒의 體를 알아서 본래부터 罪를 범하지 않는 미묘한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微妙한 境地란 바로 淸淨心을 회복한 바로 그러한 境地가 아닐까 하고 論者는 생각한다.

요컨대, 本來 자연히 淸淨한 마음은 결코 染汚되지 않았고, 眞如와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維摩經』에서 說하고 있는 이러한 淸淨心도 바로 이와 같은 眞如로서 단순한 非存在(abh vam tra)라는 것이다. 실제로 『維摩經』은 『般若波羅蜜經』과 『中論』의 思想을 內包하고 있으며 空을 實體化하는 것을 拒否하고, 經驗에 어떠한 根據를 두는 것을 인정치 않고 있음을 우리는 차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維摩經』은 "諸法은 根據 없는 根源에 依據한다."라고 說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維摩經』의 眞如(Tathat )가 단순한 非存在라면, Tathat 와 다르지 않은 바로 이러한 淸淨心은 오로지 'Non-Mind Mind' 또는 'Non-Thought Thought' 혹은 '心非心(cittam acitttam)'인 것이다.41)

 

4) 『維摩經』과 大乘經典과의 關係

 

『維摩經』은 佛典梵語의 文法과 特別한 文型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大小乘의 諸經典에 관습적인 句節과 慣用語와 常套語, 比喩와 反復의 語法이 풍부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慣用語나 常套語가 많은 經典속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維摩經』이 어느 經典에서 그런 語彙를 借用해 왔는지를 알아내기란 실제로 불가능하다. 『維摩經』의 著者는 諸經典에 능숙했을 것이므로 그와 같은 語彙들을 어떤 특정한 經典들을 參照하지 않고서도 그의 기억 속에서 이끌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佛敎의 經典들은 參照文獻의 이름을 대는 慣習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出處의 問題를 유난히 미묘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本稿는 『維摩經』이 어떤 理論이나 觀念을 借用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몇몇 經典을 指摘하는 것으로 제한 하고자 한다.

 

『維摩經』과 다른 大乘經들과의 關係는 특히 미묘하다. 왜냐하면 서로 관계되는 年代가 불확실하여 어느것이 그 어느 것을 借用하여 引用했는지를 결정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① 印度의 文學史에서는 大乘經의 맨 첫머리에 『般若波羅蜜經』을 位置시킨다. 실제로 支婁迦讖(Lokak ema)과 그의 共譯者인 朔佛이 『道行般若經』(T.224)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A as hasrik 를 번역하였고(179年 11月 24日부터), 또 3세기와 4세기에 中國의 高僧들인 朱子行(203∼282)과 道安(313∼385) 그리고 Che Tao-lin(314∼366)은 이 A as hasrik 를 보다 긴 90卷의 『般若波羅蜜經』의 縮小本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90卷 『般若波羅蜜經』은  印度僧에 의하여 "佛滅後"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졌다.

만일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222∼229년 사이에 번역된 支謙의 한 譯本(T.474)이 『維摩經』의 가장 오래된 譯本이라면, 이것은 E. Conze가 "Basic Praj p ramit "라고 부르는 그것보다 後代의 것이 되며, 아마도 그것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부처님께서 無垢稱(維摩詰)을 위하여 甚深法을 說하실때에 말씀하신 '淸淨心'을 잠깐 살펴보았다. 그것은 『般若波羅蜜經』의 "心非心"이라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더욱이 『維摩經』 Ⅶ章17項에서는 空이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般若經』의 有名한 語句를 자유롭게 引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② 『大寶積經』(Mah ratnak a, T.310)과 藏譯(OKC, No.760)은 49개의 s tra가 集大成된 것이다. 菩提流志(Bodhiruci, 一名 達磨流志 Dharmaruci)는 8세기초(706∼713)에 이 經의 漢譯本을 편찬하였는데, 이전에 번역된 23개의 經을 그대로 다시 收錄하였고, 49개의 經중에 15개의 經은 약간 수정해서 내었으며, 나머지 11개의 經은 스스로 번역하였다. 改譯하지 않고 다시 번역해낸 23개의 經中에는 Tath gataguhyanirde a 혹은 Tath gataguhyaka(『如來不思議秘密大乘經』)라고 불려지는 文獻이 있는데, 이 經은 西晋의 竺法護에 의해서 서기 280년 11월 16일에 번역된 것이다.

『維摩經』은 이 經에 대해 두 번 씩이나 언급하고 있다. ① 『維摩經』은 "부처님의 秘密"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鳩摩羅什자신도 이 句節을 통하여 『密迹經』(Guhyakas tra ; Cf.Ⅳ,§1, n.3)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② 더욱이 바로 이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바, 『維摩經』은 主張하기를 無數한 부처님들께서 『如來不思議秘密大乘經』(Tath gataguhyaka)을 說하기위해 維摩居士(Vimalak rti)집에 오신다고 說한다(Ⅵ,§13, n.36).

③ 年代的 見地에서  살펴볼 때, 『維摩經』이 『華嚴經』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이 방대하게 편찬된 經의 많은 부분이 『維摩經』과 同一한 시기에 漢譯되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出三藏記集』(T.2145, ch.2, p.6 b20 ; 6c 19)에 의하면, A.D.167∼186의 時期에 활약했던 支婁迦讖이 『佛說兜沙經』(T.280)을 번역하였고, 223∼253의 時期에 활동했던 支謙이 『佛說菩薩本業經』(T.281)을 번역하였다.

『歷代三寶記』(T.2034, ch.6, p.63 b5 ; 62a 2 ; 62c 10; 62a 23 ; 62a 18)에는 『華嚴經』中 5개의 經, 즉 「菩薩十住行道品」(T.283)·「漸備一切智德經」(T.285)·「等目菩薩所問三昧經」(T.288)·「佛說如來興顯經」(T.291)·「度世品經」(T.292)을 번역한 것이 竺法護라고 기록되어 있다. 『維摩經』 譯本들이 支謙과 竺法護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想起해야 할 것이다.

④ 어느 것이 어느 것을 引用했는지를 決定하기가 불가능 하지만, 『維摩經』과 『大方等大集經』(Mah sa n p ta, T.397)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Vimalak rti와 그의 家族과 不可分의 관계가 있는 7개의 文獻들(T.474∼480), 즉 ①『佛說維摩詰經』②『維摩詰所說經』③『說無垢稱經』④『佛說大方等頂王經』⑤『大乘頂王經』⑥『善思童子經』⑦ 『佛說月上女經』이외에 『大方等大集經』은 Vimalak rti에게 하나의 役割을 부여한 매우 드문 大乘經典中의 하나이다(T.397, ch.31, p.217a 25∼26 ; ch.35, p.240c 17∼21 ; ch.48, p.312b 17과 312c 25).

요컨대, 『維摩經』은 『般若經』(Praj p ramit )·『寶積經』(Ratnak a)·『華嚴經』(Avata saka)과 『大集經』(Mah sa nip ta) 등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일찍 알려진 文獻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동일하게 哲學的이고도 神秘主義的인 경향을 띄고 있다.42)

 

 

2. 唯識思想과 『維摩經』

 

1) 唯識思想

 

『般若經』은 一切를 不可得·空이라고 說하고 있으며, 龍樹의 中觀學派와 이를 계승한 僧朗의 三論宗은 그러한 空觀을 根本立場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空觀에서는 衆生과 부처의 차이, 修行의 必要性 등이 모호해지지 않을 수 없다. 因緣관계에 있는 두 法은 한결같이 차별적인 自性이 否定(空)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自性이 부정된다고 하더라도, 衆生들은 그 두 法을 分別執着하고 있으며, 그런 無明에서 生死의 괴로움이 緣起하고 있다. 衆生들의 이런 분별집착을 어찌 망각할 수 있겠는가? 空이 菩薩의 견지라면, 有(分別執着)는 중생의 견지이다. 전자와 후자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般若·中觀은 그런 혼동에 흐를 위험성이 없지 않다. 따라서 그것은 완벽한 理論體系라고 보기가 어렵다.

彌勒(Maitreyan tha, 270∼350)·無着(Asa ga, 310∼390)·世親(Vasubandhu, 320∼400) 등에 의해 전개된 唯識思想은 般若·中觀의 그러한 空思想에 이어, 그 결점을 시정코자 일어난 것이다. 唯識學의 근본경전인 『解深密經』의 三法輪說은 그런 흥기 동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生死와 涅槃의 有를 설하는 四諦說(第1法輪)은 진정한 뜻(了意)이 아니요, 그 둘의 空을 설하는 般若經(第2法輪)도 了意가 아니다. 有와 空을 갖춰 설하는 『解深密經』(第3法輪)만이 더 이상 쟁론이 있을 수 없는 최상의 了意라는 것이다.43) 따라서 唯識學은 무엇보다도 먼저 衆生의 分別妄執을 문제로 삼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阿賴耶識( laya-vij na)이라고 부르고(第1能變), 衆生存在의 기초가 되는 몸(有根身)과 外界(器世間)는 그것이 轉變한 것이라고 설한다.

                                                 

阿賴耶識이 因緣力으로 자체가 生할 때 內變하여 種子와 有根身이 되고, 外變하여 器(世界)가 되며, 그 所變을 所緣(對象)으로 하여 行相(作用 즉 vij apti ,了別)이 그것을 짚고 일어난다.44)

 

그런 阿賴耶識이 있게 되면 그것을 대상으로 '나'라는 생각과 집착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런 2차적 思量分別을 末那識(mana-vij na)이라 부른다(第2能變). 그리고 그런 末那識이 있게 되면, "根本識( laya 또는 d na)에 의해서 여섯 경계(vi aya)를 식별하는 六識이 있게 된다."45)는 것이다.

觀的 心識의 이런 展開課程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阿賴耶識이다. 따라서 그것을 根本識(m lavij na)이라 하고, 나머지(第7末那識과 前6識)를 轉識이라 한다. 生死輪廻하는 과정에서 善惡業(轉識)이 뿌린(薰習) 종자가 간직되었다가 다음 생에 果報를 받게 하는 것도 阿賴耶識이라 할 수밖에 없다.46) 

따라서 그것을 藏識이나 異熟識(vip ka-vij na)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종자(習氣)는 薰習으로만 生한다는 뜻이 되어 原初的인 業의 存在를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種子에도 轉識의 熏習으로 生하는 것(習所成種)과 본유하는 것(本性住種)과의 두 가지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唯識學의 八識說은 이론에 이론을 거듭하여 걷잡을 수 없는 복잡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이론을 여기서 자세히 살펴볼 여유는 없지만, 龍樹 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국면인 것이다.

圓測은 이상과 같은 新唯識의 8識說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존 저술에서 8識에 관한 그의 저술은 『解深密經疏』卷3  第3 心意識相品에 나오는 것이 가장 체계적인데, 그곳에서 그는 心識의 ①數種多少 ②名字 ③體性 ④所依根 ⑤所緣境 ⑥心所相應 등을 要領있게 논하고 있다.47) 『成唯識論』의 내용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眞諦三藏(舊唯識의 傳譯者)의 9識說에 대해서는 혹평을 가하고 있다.

 

(1) 圓成實相에 대한 見解  

 

圓測의 이러한 第9識觀과 관련해서 다시 주목되는 것은 圓成實相에 대한 견해이다. 『解深密經』은 모든 법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自性(sva-bh va)이 있다고 설한다.

 

①遍計所執相…일체법의 假名安立. 自性을 차별하고 言說을 일어나게 한다.

②依他起相…일체법의 緣生自性. 無明을 緣하여 行이 있고, 내지 큰 苦蘊이     있게 됨을 가리킨다.

③圓成實相…일체법의 평등眞如. 이 眞如에서 보살들이 용맹정진하고(資糧位),    올바로 思惟하여(加行位), 통달한 다음(見道位), 점차로 수습하여(修道位), 마    침내 正覺을 이뤄 원만케 된다.(究竟位).48)

 

遍計所執相은 무엇이겠는가? 衆生의 分別妄執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第8阿賴耶識이고, 7識은 그것이 轉變한 것이다. 따라서 8識은 모두 分別(vikalpa)의 기능을 다소라도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思量의 성질이 강력한 것은 第7 末那識과 第6 意識이다. 따라서 遍計所執을 일으키는 分別을 『攝大乘論』은 '意識'이라고 말하고, 『成唯識論』은 그것을 "오직 第6, 第7 心品만이 能變計가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

그러나 能變計 하나만으로 遍計所執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별의 대상, 다시 말하면 所遍計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으로 봐야 할까. 말할 것도 없이 依他起相으로 봐야 할 것이다.49) 分別妄執이란 원래 因緣으로 生한 法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識說의 견지에서 그런 依他起相에 해당되는 것은 緣生하는 8識이다. 따라서 『攝大乘論』은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어떤 것이 依他起인가? 阿賴耶識을 種子로 하고 虛妄한 分別에 포섭되는 모든 識이다."50) 『成唯識論』은 한 걸음 더 나아가 "衆緣으로 生한 心·心所의 體와 相分·見分 및 有漏·無漏가 모두 依他起"51)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分別(vikalpa)은 阿賴耶識이 轉變한 것이고 그런 분별에 의해 이것저것이 '分別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衆生들은 그렇게 분별된 것을 실재하는 사물로 집착하고 있다(遍計所執相). 따라서 그런 것은 自性이 있을 수 없다. 환언하면 '唯識(vij aptim traka)'일 따름이다.52) 圓成實相은 依他起相에서 우선 그러한 變計所執相을 떠나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기에 『攝大乘論』은 "依他起相에서 變計所執相(似義相)이 영원히 없는 性이라."53)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依他起相 자체는 어떨까? 궁극적으로는 그것도 떠나야만 할 것인가? 阿賴耶識이 染汚識인 이상, 依他起는 染汚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諸法의 實性을 圓滿成就'키 위해서는 그것도 마침내는 멸해야만 할 것이라고 『解深密經』은 圓成實相을 그런 각도에서 설하고 있다. 圓成實相은 '一切法의 平等眞如'54)라고 설하고, "雜染相法(依他起)을 끊을 수 있으면 淸淨相法(圓成實)을 證得할 수 있다."55)든가, "三智에 의해 依他起는 相을 끊을 수 있다."56)는 등의 說이 보인다.

 

(2) 三無性에 대한 見解

 

般若經』에서는 지금까지 살펴온 바와 같이 "모든 法은 自性이 없고(空), 生滅이 없으며 본래 寂靜하여 自性涅槃이라."고 설한다. 용수의 中觀學派와 僧朗의 『三論學』은 이런 空의 體系的 理解를 뜻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無得正觀으로써 근본을 삼고 있다. 이런 '空(無自性)'에 대해 唯識學은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解深密經』의 '세 가지 無自性性'의 說은 唯識學의 그런 空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敎說이다. 그 내용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세 가지 自性에 입각해서 다음과 같은 無自性性을 설하는 것이다.

 

① 遍計所執相은→가명의 安立으로 相(lak a a)을 삼은 것이지 自相의 安立으    로 相을 삼은 것은 아니므로→相無自性性이다.

② 依他起相은→ⓐ 他緣의 힘으로 있는 것이지 自然有(svayambh va)가 아니    므로→生無自性性이다. ⓑ 또한 緣生法이요, 淸淨所緣의 경계가 아니므로→勝    義無自性性이다.(勝義가 아니다, 또는 없다는 뜻)

③ 圓成實相은→一切法의 勝義諦요 無自性性(空)의 所顯이라는 점에서→勝義    無自性性이다.(勝義요, 無性所顯의 理라는 뜻)57)

 

譬喩하면, 相無自性性은 空花와 같고, 生無自性性은 幻像과 같고, 勝義無自性性은 虛空과 같은 것이다.58) 

唯識學의 空觀은 용수계의 中觀派나 승랑의 三論學과 크게 다르다. 종래 막연했던 空의 槪念이 主觀的 分別妄執(八識)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를 중심으로 명석하게 空·有의 분석이 이뤄지고 있다. 分別妄執된 것(遍計所執相)만이 空이요(相無自性性), 緣起(依他起相)나 眞如(圓成實相)는 否定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둘을 空이라고 설하는 것은 집착을 막기 위한 密意說에 불과하다. 따라서 空이라는 槪念에는 '自性이 없다(相無性)'는 否定的인 것과, '自性이 否定(空)됨으로써 나타나는 진리(勝義無性)'라는 긍정적인 것과의 2종이 있게 된다. 그러기에 圓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梵音(sanskrit)에 의하면 空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舜若( unya, 空)와 舜若多( nyata, 空性)이다. 전자는 無의 뜻이고 후자는 空所顯의 眞性(理)이다."59) 空의 이런 이중적 해석은 中觀派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實有的 槪念(約理二諦說과 비슷함)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60)

 

(3) 中觀·唯識의 和會     

 

識의 空觀과 中觀의 空觀은 서로 용납할 길이 없다. 前者는 遍計所執만을 버리고 依他起와 圓成實을 버릴 수가 없는데, 後者는 三相을 전부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解深密經』은 『般若經』(第2無相法輪)을 未了義로 단정하고, 일체 無自性(空)을 설하는 것은 三無性에 의한 密意說에 불과하다고 설한다. 唯識의 이런 입장은 般若·中觀의 空觀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용수계의 中觀思想은 5세기경에 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이런 中期 中觀學派가 唯識學의 그런 도전에 가만히 있을 까닭이 없다. 中觀派의 淸辨(Bh vaviveka, 500∼570)은 護法계의 唯識學에 맞서 論戰을 편 대표적인 學僧으로 알려져 圓測의 저술에는 청변과 호법계의 그런 논전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두 학파 사이에는 대립이 발생할 수밖에 없어, 圓測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년 전 佛法은 一味이더니 불멸 천년 후 南印度 健至國에 청변·호법 두 보살이 일시에 출세하여 空·有의 乖諍이 있게 되었다."

中國에서도 그런 대립이 발생하고 있다. 三論宗의 三重·四重 二諦說은 舊唯識의 三相·三無性說을 차례로 논박한 바가 있다.

測은 中觀·唯識의 그런 대립을 누구보다도 깊이 의식한 사람이다. 그의 저술에 끊임없이 그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그가 속해 있는 것은 唯識學派이다. 따라서 그는 唯識의 了義性을 강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中觀과 唯識이 다같이 부처님의 뜻을 이룬다는 동등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圓測의 말을 읽어보자.

 

청변은 空을 잡고 有를 부정하여 有執을 제거하고, 護法은 有를 세우고 空을 부정하여 空執을 제거하였다. 그러니 空은 '有 곧 空'이라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有(非無)는 '空 곧 色'이라는 설에 어긋나지 않음이 저절로 이뤄진다. 空이면서 또한 有인 것은 二諦를 順成하고, 空도 아니고 有도 아닌 것은 中道에 契合한다. 불법의 큰 뜻이 어찌 이것이 아니겠는가!61)           

 

이런 견지에서 그는 청변의 '曆法遣相觀空門’과 호법의‘在識遮境空觀門’을 평등하게 소개하고 있다.62) 『般若心經』의 본문 주석에도 두 空觀을 나란히  擧하고 있는 것이다.63)

이러한 圓測의 태도는 唯識家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그가 왜 그런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가를 묻게 된다. 상기 인용문에서 圓測은 두 사상이 다같이 佛意를 이룬다는 평가의 기준을 二諦와 中道說에 두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봐도 좋은 것인가? 같은 二諦·中道의 說이라고 해도 학파에 따라 내용이 다르다. 『阿含經』은 緣起의 還滅(非有)과 流轉에 의해 中道를 說하고 있지만 용수는 緣起 그 자체에 입각해서 空·假·中을 설하고 있다. 중국 三論學은 二諦의 인연관계에 의해 중도(體)를 설하고 있다.

唯識學은 어떤가? 『成唯識論』에 "我法(遍計所執)은 有가 아니요 空(圓成說)·識(依他起)은 無가 아니다. 有·無를 떠났으니 中道에 契合한다."64)고 설하고 있다. 唯識의 이런 中道說은 依他起와 圓成實相을 有로 보고 있어 中觀의 中道說과 내용이 크게 다르다. 따라서 단순히 표면적인 말만 갖고는 두 사상의 동등성을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圓測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다같이 佛意를 이룬다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두 사상이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용수는 모든 것이 空이라면 세간의 因果나 三寶 등도 무시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空과 空의 因緣과 空義를 모르는 까닭에 그런 苦惱가 생긴다. 왜 그런가 하면 空義가 있기에 실로 일체가 이뤄지는 것이다." 中國의 三論學은 이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無所得의 道(中道)를 實體로 삼을 때 일체가 俗이라는 無碍의 작용이 발생한다."65)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唯識學 또한 그의 전의설에서 "2障(煩惱·所知)이 끊어질 때(金剛喩定) 열반과 보리(有爲四智)를 얻는데, 보리는 無漏有爲의 4智(依他起의 淸淨分)로 구성된다."고 한다. 이런 4智의 발생은 三論宗에서 말하는 일체 俗用의 발생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두 思想體系는 여러 면에서 대립성을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뜻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中觀의 空(無得正觀)은 궁극적으로 空에 집착치 않고 無碍의 俗用을 발생하고, 唯識의 有(依他·圓成) 또한 궁극적으로는 有(無爲眞如)에 집착치 않고 衆生敎化의 業을 발생시킨다. 그러니 空은 '有 곧 空'의 것이요, 有는 '空 곧 色'의 것이다. 더구나 두 思想體系는 다같이 緣起(依他起)의 도리에 입각해 그런 有·無 相卽의 관계가 논리적으로 뒷받침된다. 따라서 "二諦와 中道가 自成하고 佛意를 共成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2) 法相宗과 『維摩經』

 

(1) 『維摩經』 新譯과 『窺基註』    

 

唐의 玄 은 前後 17년에 걸친 印度여행에서 귀환하여 太宗貞觀 19年(645年)부터 몸소 가져온 多數의 新佛典을 번역하여 中國語로 옮기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번역작업은 師가 入寂하기까지 前後 20年間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새롭게 역출된 經論數는 76部 1347卷의 방대한 양에 달하였다.66)

그의 譯出經論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고찰해 보면,

 

① 서기 645∼649年 前半 : 唯識·因明을 주로 한 時期

② 서기 649後半∼660 : 小乘과 般若의 時期

③ 서기 661年∼664年 : 大小乘 혼합의 時期                                                                                                          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는 제2기에 포함되어 있는 『維摩經』의 新譯인 『說無垢稱經』 六卷(大正藏 第14卷에 수록되어 있음)이 高宗 永徽 元年(650年) 2月 8日부터 8月 1日까지 약 半年동안에 大乘光(普光)의 筆受로 漢譯을 끝마친 以來로 마침내 사람들의 注意를 끄는 가운데 玄 正系의 학자로서 唯識法相의 學을 大成한 慈恩大師 窺基가 그의 特色있는 註釋書를 만들었다. 玄 의 維摩新譯당시에 19세의 靑年이었던 窺基가 후에 이 經의 新譯書 그 자체에 대하여 『說無垢稱經疏』 六卷(大正藏 第38卷에 수록됨)의 註釋書를 만든 사실은 『維摩經』의 思想 및 歷史的 발달을 고찰해 볼 경우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2) 窺基의 『維摩經』觀

 

窺基의 『說無垢稱經疏』의 序說이라고도 할만한 「玄談」의 槪要는 ①經旨 ②改譯次第 ③六門分別 ④經의 宗緖 ⑤經의 體性 ⑥科段 등으로 되어 있다.

 

①經의 趣旨(大乘佛敎와 『維摩經』) : 慈恩大師는 『維摩經』의 註釋에 즈음하여    우선 大乘佛敎의 幽意를 말하고 나서 『維摩經』의 本旨로 들어간다.

③改譯의 理由(玄 譯의 特色) : 玄 이 『維摩經』을 새롭게 번역하는 사정에    대한 所見을 피력한다.

③六門分別(『維摩經』의 해석) : 『經疏』에서는 다음과 같이 六門의 分別에 의    해 이 經을 解釋하고 있음을 말하는데, 經起所因·經之宗緖·明經體性· 經    不同·科品所從·釋本文意 등이다.

④經의 從緖 : 三敎와 八宗이 있다고 말한다. 그 다음으로

⑤經의 體性과 ⑥科段을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는 玄 ·窺基의 唯識法相의 敎學이 급속하고도 풍부하게 移植되고 學習되었다. 中國佛敎로서도 가장 독특한 維摩新義의 紹介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空理義에 근거하는 舊譯維摩를 轉回시켜서 應理圓實의 新宗旨를 顯揚하려고 한 窺基의 希望과 抱負는 그 전체로서 마침내 奈良佛敎 70年의 期間중에 舊譯의 계보에 있었던 天台의 學과 宗旨를 그의 一大支柱인 舊譯維摩와 함께 沮止하려고 한 所以가 아닐까 여겨진다.67) 이 문제와 그 발전에 대해서는 새삼 깊이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如來藏思想과 『維摩經』

 

1) 如來藏思想

 

(1) 佛性 및 如來藏의 意味

 

佛性이란 佛의 本質 혹은 本性과 같은 말이다. 모든 衆生에게는 佛과 같은 本性이 있으며, 이것은 衆生이 장차 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意味로서 곧 佛의 因 또는 佛이 되는 因이라고 설명된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如來의 胎兒」라고 일컬어지며, 「如來藏」으로 漢譯되고 있다. 이 말은 원래 漢譯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如來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서 衆生을 가리켜서 부른 일종의 說明語이다. 如來를 안에 감추고 있다는 것은 譬喩的인 表現으로 실제로는 衆生이 如來가 될 수 있는 要因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며, 衆生속에 있는 그 要因이 如來의 胎兒라고 일컬어지고, 또한 보다 이론적으로는 佛의 因=佛性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말이다(如來=佛). 「一切衆生은 如來藏이다」라고 하는 주장은 『如來藏經』이라고 하는 작은 경전에서 최초로 선언되고 있다. 이러한 敎說을 이어받아 『涅槃經』의 '一切衆生悉有佛性'의 敎說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涅槃經』에서도 밝히고 있다. 如來藏에는 또한 이러한 如來와 동등한 本質 또는 佛性이 감추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있고, 또 無智와 煩惱에 덮여있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는 衆生의 狀態를 나타내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 오히려 佛性보다도 如來藏이라는 말을 印度人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용어의 역사적 成立順序와, 用語가 가지고 있는 내용의 풍부함, 그리고 印度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들도 오늘날 이것을 如來藏思想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來藏思想을 大乘佛敎안에서 하나의 學說로 정착시킨 사람은 中國 華嚴宗의 確立者인 賢首法藏이다. 法藏은 『大乘起信論義記』에서 『起信論』의 敎理內容을 해석하면서 「如來藏緣起宗」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것을 小乘·中觀·瑜伽唯識의 敎說과 구분하고 있으며, 또 『入楞伽心玄義』에서는 이 敎說을 「實相宗」이라고 하면서 小乘등의 각각을 有相·無相·法相에 對比하고 있다. 法藏의 이러한 분류는 『華嚴經』의 敎義를 圓敎로 보고, 다른 것을 그보다 아래에 두는 敎判論에 근거하고 있지만, 如來藏思想은 大乘終敎로서 圓敎 및 頓敎의 다음가는 位置가 주어지고 있다.  

 

(2) 『如來藏經』의 內容

 

『            『大方等如來藏經』은 大正大藏經에 겨우 4페이지 정도의 작은 經典이다.68) 그 내용은 「一切衆生은 如來藏을 갖추고 있다」라고 하는 선언이며, 이것을 佛이 神變으로 나타낸 무수한 蓮華의 자리 위에 여래가 앉아 계신다는 情景을 비롯한 아홉 개의 비유로 설명하고, 끝 부분에서 이 가르침이 過去世에 常放光明如來에 의해 설해진 것이라고 하는 것과, 그 如來는 胎중에 있을 때부터 涅槃에 든 후까지 계속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過去世 이래의 法門인 동시에 이 經의 功德은 가장 殊勝한 것이므로 이러한 經典을 수지해야 한다는 것을 권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敎說의 核心은 神變을 보고 이상스럽게 여기는 청중을 향해 부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다음의 한 구절이다.

 

善男子여, 시들은 연꽃의 꽃받침 위에 如來가 坐禪을 하고 앉아 光明을 발하며 빛나고 있는 것을 그대들은 보았으리라. 그와 같이 如來도 또한 그 智慧와 如來의 눈을 가지고 貪慾, 憤怒, 無智등의 渴愛나 無明에 근거한 한량없는 煩惱에 유혹된 모든 衆生들의 내부에 같은 智慧를 가지고 같은 눈을 가진 如來가 坐禪을 하며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輪廻를 계속하는 衆生속에 있으면서도 如來의 本性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을 보고, 그 如來들은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如我無異)고 말한다.

또 天眼을 가진 사람은 시들은 꽃잎 속의 如來를 들어내기 위해 방편을 써서 꽃잎을 제거하고, 안에 있는 如來를 깨끗이 하고 맑히리라.

그와 같이 如來도 또한 佛眼을 가지고 一切衆生은 如來를 그 안에 갖추고 있다고 관찰하고, 그 중생들의 渴愛와 無智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많은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法을 설한다. 그것이 완성되면 여래에 있는 그대로 여래로서 그 활동을 드러낸다.

善男子여, 이것은 보편 타당한 진리(諸法의 法性, 法爾道理)이며, 여래들이 세상에 출현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衆生들은 항상 如來를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

이 法을 듣고 修行한 菩薩은 모든 煩惱로부터 해방되어 如來가 되고 如來의 활동을 세상에 베풀게 될 것이다.69)

 

이 일단에 如來藏思想의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중요한 개념은 거의 다 포함되어 있다. 다음에 설해지고 있는 여덟 개의 비유도 비유로 삼은 재료만 다를 뿐, 내용은 위의 일단과 동일하며, 더욱이 뒤의 『寶性論』도 여기에서 如來藏說의 기본을 찾아내고 있다.

위에서 설하고 있는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煩惱所纏의 중생 속에 如來智, 如來眼을 갖춘 여래가 端坐하고 있다.

(2) 如來는 그 오염되지 않는 如來의 法性을 관찰하여 내 몸 그대로이다라고       말한다.

(3) 그리고 法을 설하고, 안에 있는 如來를 淨化하여 如來의 활동을 顯現시킨       다.

(4) 이 「一切衆生이 안에 如來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은 普遍妥當한 眞理       이고, 「如來가 세상에 출현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항상 변함이 없다」라       고 하는 것이 『大方等如來藏經』의 내용이다.

 

(3) 『究竟一乘寶性論』

 

來藏說이야말로 大乘이며 究竟一乘이라는 것을 『勝 經』은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이어받아, 그리고 모든 大乘經典을 참고하여 如來藏思想을 조직화하고 大成시킨 것이 『究竟一乘寶性論』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寶性論』의 일부 내용에서는 如來藏의 構造를 밝힘과 동시에 如來藏·佛性에의 信解를 설하고도 있으며, 如來·佛에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如來藏 3部經의 仰信의 의미를 이어받음과 동시에 아비달마나 唯識論者의 믿음의 三相도 받아들여 특징 있는 믿음의 意義를 설하고 있다.

 

寶性論』외에 異譯的인 것으로 보이는 『佛性論』이나 『無上依經』 및 기타의 如來藏系의 經論, 예를 들어 『大乘十法經』이나 『楞伽經』, 『大乘莊嚴經論』등에 대해서도 考察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믿음을 最勝으로 하는 如來藏說에 대해서는 거의 『寶性論』에서 다 설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大乘起信論』도 如來藏 論書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 如來藏思想과 『維摩經』

 

(1) 大乘 以前의 心淨說

 

佛敎의 修行 目標인 「마음을 깨끗이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實例는 이른바 七佛通誡偈에서 볼 수가 있다. 그 「自淨其意」(sacitta-pariyodapana= svacitta-paryavad pana)는 현실 상황에서는 마음이 오염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淨化가 가능하다는 것을 前提로 하고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비구들이여,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觀察해야 한다. 길고 긴 어두운 시간 속에서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무지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더러워지면(citta-sa kiles  = citta-sa kle t) 중생은 더러워진다. 마음이 깨끗해지면(citta-vodan  = citta-vyavad n t) 중생도 깨끗해진다.70)

 

라고 하는 敎說에서 볼 수가 있다. 더 나아가 이 오염은 마음속에 있는 본래적인 것은 아니며, 따라서 마음 자체는 淸淨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밝게 빛나고 있다(pabhassara  citta ). 단지 일시적인 오염(客塵煩惱)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여기에 대한 가르침을 아직 듣지 못한 범부들은 여실히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들은 마음의 수련이 없다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밝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일시적인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여기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여실히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마음의 수련을 쌓았다고 말하는 것이다.71)

 

로 나타나고 있다.

 

(2) 大乘의 心性淸淨說

 

大乘經典에서는 『般若經』을 비롯하여, 『法華經』·『維摩經』등의 많은 經典에서 自性淸淨心이 客塵에 의해 汚染되어 있다고 하는 敎說이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大乘의 根本的인 觀點중의 하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여기에는 「마음의 본성」(cittasya prak ti )이라든가 「諸法의 本性」(dharm  prak ti )등이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 自性(svabh va)과 같은 의미로 「空」이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곧 밝게 빛나고 있는 淸淨이 空이라고 하는 의미로 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러한 觀點은 마음의 染淨에 의해 衆生의 染淨이 결정된다고 하는 相關論과도 쉽게 연관된다. 사실 『維摩經』은 「弟子品」에서 優婆離로 하여금 앞에서 기술한 經文을 말하도록 하고, 마음의 本性은 전혀 더럽혀진 일이 없으며, 또 無分別, 無顚倒한 無我야말로 마음의 本性이며, 淸淨이라고 설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의 自相, 마음의 雜染相, 마음의 淸淨相이라고 하는 세 가지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唯識說의 三性說 쪽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마음의 自相은 緣起한 것, 空인 것(無自性인 것)으로서의 아뢰야식(無記心)이고, 마음의 淸淨相은 空性(眞如·法界)이다. 이에 대해 如來藏說에서는 自性淸淨心은 空性에 해당되며, 그것은 본래적인 것이라고 하는 특색을 보이고 있다. 이 주장이 도입된 근거는 自性淸淨心을 허공에 비유한 것에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없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根底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비유는 『보적경』의 「가섭품」에서도 보이고 있으며, 또 『大集經』의 모든 品들72)에서도 빈번하게 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에 『寶性論』의 典據로서 인용되고 있다.73) 

 

4. 在家菩薩思想

 

1) 大乘佛敎의 成立

 

大乘佛敎가 성립된 시기는 대략 B.C. 1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최초의 大乘經典은 現存하는 『般若經』의 원시 형태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승경전이외에 大乘의 成立을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어떤 시기에 어떠한 불교도가 그때까지의 모든 불교를 일괄하여 小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이 믿는 불교를 그것과 구별하여 大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많은 학자들의 學說에 의하면, 종래의 出家中心의 소극적인 전통교단에 만족하지 못한 在家信者와 진보적인 比丘들이 在家者까지도 出家者와 똑같이 구원된다는 적극적인 불교를 일으키려고 시도하였고, 원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신이었던 大乘菩薩思想을 신봉하면서 시작했던 운동이 바로 이 大乘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들은 釋尊의 眞意라고 확신한 사상을 그분께 가탁하여 지은 것이 大乘經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大乘이란 出家者 뿐만 아니라 在家者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구제될 수 있는 '크고 넓은 수레'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大乘은 小乘에 맞서는 말로서 '큰 수레'를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小乘은 '열등한 승물' 의 뜻이며, 大乘佛敎가 처음 성립될 무렵에 그 이전의 모든 불교를 일괄하여 小乘이라고 낮추어 부른 것이다. 그러므로 小乘敎徒들은 이러한 명칭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大乘의 길을 걷는 사람을 菩薩(bodhisattva)이라 하고, 小乘의 길을 가는 사람을 聲聞( r vaka) 및 緣覺(pratyekabuddha, 獨覺)이라 한다. 小乘에는 이처럼 두 길이 있으므로 小乘을 二乘이라고도 한다. 大乘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聲聞과 緣覺이라는 구별은 결국 二乘이 궁극의 길이 아님을 의미하며, 그들도 역시 大乘의 길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佛敎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一乘이라고 일컬어 진다.

 

2) 在家中心의 菩薩思想

 

菩薩精神의 특색은 자신이 깨달음의 세계인 彼岸으로 건너기 전에 먼저 다른 모든 존재들을 彼岸으로 건너게 한다는 利他精神에 있다. 二乘은 자기자신이 生死의 세계인 此岸을 버리고 彼岸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면서도 此岸에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로서 돌이켜보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나 大乘은 自利냐 아니면 利他냐 하는 二元的 對立의 차원을 넘어서 自利와 利他가 함께 成立하는 根底에까지 이르게 된다. 즉 自利와 利他가 하나가 되어 成立하게 된다. 따라서 大乘의 菩薩은 二乘처럼 此岸을 버리고 彼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此岸의 모든 사람을 彼岸으로 건너게 도와준다. 즉 此岸과 彼岸을 왕래하는 나룻배의 뱃사공 역할의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大乘佛敎 特徵의 하나인 이른바 在家主義도 이와 동일한 정신의 발로인 것이다. 在家主義란 在家本位라는 의미가 아니다. 在家와 出家라는 二元的  對立중 어느 한쪽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입장에서 出家와 在家를 차별하지 않는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維摩經』을 위시한 印度의 大乘經典에 잘 나타나 있다.

또 다른 대승의 특징으로 꼽히는 것은 佛說로 되어있는 大乘經典이 B.C. 1세기경부터 기원 7세기경까지의 장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게다가 동일한 經典상에서도 增廣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小乘의 經典은 釋尊의 說法을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기억을 살려서 편집한 것이며, 그것이 佛說로서 傳持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소승경전에는 뒤이어 나타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대승경전은 기원 前後 경까지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다가 釋尊이후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大乘敎徒는 '누구든지 스스로 正覺하여 그것을 說하고 그 說이 佛說로서 성립한다면 그것을 설하는 사람은 佛陀이다' 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대승경전은 석가이외의 사람이 쓴 것이면서도 佛說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釋尊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佛說로서의 經典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大乘佛敎思想의 根本이 되는 正覺은 大智와 大悲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74) 正覺자체는 하나여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뉘어 있지 않지만, 知性과 感性이 서로 다른 정신작용으로서 작용하는 不覺者의 言語를 사용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다른 말로 說한데 불과한 것이다. 不覺者에 있어서는 둘로 나뉘어 있으므로 不覺에서 正覺으로 나아가는 길은 智的인 것과 悲的인 것이 있다. 본래 智와 悲는 하나이므로 智的인 길이라 해도 悲的인 면을 포함하며, 悲的인 길도 智的인 면을 갖추고 있다. 어느 길을 갈지라도 참된 자기에 눈뜸으로써 참된 인간이 되고 동시에 자기자신과 우주만물이 하나라는 마음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해도 大乘佛敎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大乘佛敎는 一名 菩薩佛敎이다. 小乘佛敎는 比丘中心의 佛敎이며, 大乘은 菩薩이 阿 多羅三 三菩提心을 일으켜서 自利利他行法인 六波羅蜜을 행하는 것이다. 四阿含中에 長·中·雜의 三阿含에는 이러한 菩薩思想이 이미 있었다. 또한 後에 成立된 문헌인 本生譚·佛傳·譬喩·因緣 등 南方所傳 중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 思想은 주로 釋尊의 과거 因行時 修道者로서의 이름을 菩薩이라 하여 그 成佛道의 敎說로 波羅蜜行·發菩提心·十地說 등의 菩薩思想의 內容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상은 部派佛敎中 西北印度의 上座部 계통과 일부학파간에도 유행되던 典籍이다. 즉 菩薩思想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大乘菩薩思想으로 發展한 것이다.75)

『維摩經』은 佛國·方便·弟子·菩薩의 四品은 序分이요, 問疾·不思議·觀衆生·佛道·入不二法門·香積佛·菩薩行·見阿 佛·法供養 등의 九品은 正宗分이며, 囑累品은 流通分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本經의 敎理的 기초는 『般若經』의 空思想에 두고 있다. 그러나 空은 完空完無의 空이 아니라 眞空妙有의 空(不思議品)이라는 취지를 밝히는 동시에 眞理는 有와 空 어느 한편도 아닌 中道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다.76)

그런데 大乘佛敎의 理想인 成就衆生과 嚴淨佛國의 目的을 투철히 인식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二乘이 아닌 大乘菩薩이며, 그 중에서도 在家와 出家의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在家菩薩인 維摩居士가 시범적인 인물이 되어 出家爲主의 小乘佛敎人들을 論破하는 것이 本經의 가장 두드러진 特徵이다.

 

5. 淨土思想

 

1) 淨土敎의 相承과 敎說

 

北魏의 曇鸞은 중국 淨土敎의 開祖인데, 그의 가르침을 계승한 인물이 道綽이다.

道綽은 담란이 입적한 후 20년 되는 해에 태어난 사람으로 14세에 출가하여 經論을 배우고 후에 太原의 開化寺에서 慧瓚(532∼603)을 모시면서 空理를 연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涅槃에 정통하여 이를 24遍이나 강의하였다. 그는 담란이 주했던 石壁 玄中寺에서 담란의 비문을 보고, 隨의 大業 5년(609)에 48세의 나이로 淨土敎에 귀의하여 오직 阿彌陀佛을 염하며 날마다 7만편씩을 정해놓고 항상 예배 공양하였다. 唐의 貞觀이래 『觀無量壽經』을 200여편 이상이나 강의하여 널리 念佛을 권장하였다.

善導(613∼681)는 어려서 출가하여 일찍이 淨土의 往生을 기원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 妙開律師와 더불어 『觀經』을 읽고 唐의 貞觀중에 幷州에서 道綽에게서 念佛往生의 법을 받았다. 이어서 장안에 들어가 민중을 교화하며 『阿彌陀經』을 수 만권이나 書寫하였으며, 極樂淨土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300포나 보급하였다. 善導는 종남산 悟眞寺와 長安 光明寺에 住하였다.

그그 밖에 慈愍流의 開祖인 慈愍三藏 慧日(680∼748)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후에 義淨三藏을 만나 스스로 서역으로 갈 뜻을 세워 남해를 경유하여 인도에 갔다. 그는 13년 동안 印度를 편력한 뒤에 다시 4년동안 雪領胡鄕을 방문하여 학자들로부터 극락에 왕생할 것을 권유받았다. 북위의   羅에서는 觀音의 示現에 의하여 淨土의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 이와 같이 中國의 淨土敎는 唐의 善導에 의하여 대성하였으나 蓮宗九祖는 慧遠·善導·承遠·法照·少康·延壽·省常· 宏·實賢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中國의 淨土敎를 대성시킨 것은 善導이다. 善導계통의 특색은 口稱念佛을 성립시킨 것과, 阿彌陀佛을 報身으로 본 것과, 極樂淨土를 報土라고 한점, 또한 凡夫身의 往生을 本意로 한 점이다. 또한 왕생을 稱名의 숫자에 의해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신심에 의해서 판단하려 한 것 등도 특색이다. 염불에는 觀像·觀想·實相·口稱의 4종이 있는데, 앞의 3종은 그 중에 自力的 要素가 있기 때문에 他力敎로서의 念佛은 口稱念佛 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曇鸞은 難行道와 易行道로 나누고, 道綽은 聖道門과 淨土門으로 나누었으며,善導는 正行과 雜行으로 나누었다. 正行에는 禮拜·讚嘆·觀察·讀誦·稱名의 5종이 있고, 이 5종 가운데 稱名을 正業이라 하고, 다른 4종을 助業이라고 하였다. 5종의 正行說은 세친의 『淨土論』의 5念門중에서 3門에다가 讀誦과 稱名의 2行을 더한 것이다. 淨土敎는 所衣經典으로서 康僧鎧 譯의 『無量壽經』·畺良耶舍 譯의 『觀無量壽經』·羅什 譯의 『阿彌陀經』의 3經과 『往生論』등의 3經1論에 근거를 두고 있다.77)

 

2) 『維摩經』의 淨土思想

 

『維摩經』의 在家菩薩思想이외에 또 하나의 현저한 특징이 되는 것은 바로 菩薩心淨土說·唯心淨土說·此方淨土說 등이 어우러진 淨土思想이다. 佛國品 第1에 「衆生之類가 是菩薩淨土」라는 말씀이 있다. 菩薩은 따로 淸淨한 佛國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一切衆生類를 그 佛國土로 삼는다는 것이다.

衆生은 원래 我執으로 인하여 善惡을 짓게되고, 그러한 業力으로 말미암아 淨穢의 國土를 招感하여 이것으로써 자기의 국토로 삼는다. 그러나 菩薩은 능히 不二의 진리를 전달하여 我他彼此의 執着이 없다. 그러므로 別定의 자신의 國土가 없이 다만 一切衆生의 機에 응하여 化를 다루므로 중생이 있는 곳에 보살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중생의 類가 곧 보살의 淨土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菩薩心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直心이 是菩薩淨土요, 深心이 是菩薩淨土며, 菩提心이 是菩薩淨土」라고 하였다. 즉 直心·深心·菩提心만 가지면 그 곳이 곧 淨土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보살이 淨土를 얻고자 한다면 그 마음을 조촐히 해야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若菩薩이 欲得淨土인댄 當淨其心하라. 隨其心淨하여 則佛土淨이니라」 하는 것이 唯心淨土說이다.

그러나 현실의 世界는 역시 穢土가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佛陀는 日月의 光明을 보지 못하는 것은 盲者의 허물이며, 日月의 過失이 아닌 것과 같이 此方이 淨土인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衆生의 죄요, 如來의 허물이 아니다. 「如來의 此土는 淨而汝不見이니라」 하신 후에 「佛은 足指按地하여 즉시에 三千大千世界가 百千珍寶로써 嚴飾되었으니 비유컨대 寶莊嚴佛의 無量功德寶莊嚴土와 같은지라 一切大衆은 未曾有를 찬탄하고 모두 스스로 寶蓮華에 앉아 있음을 보았다. 佛이 舍利弗에게 말씀하시되 '너는 이 佛土의 嚴淨을 보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에, '예! 그렇습니다. 本所不見이요, 本所不聞이니이다. 今佛國土의 嚴淨이 悉現이니이다.' '舍利弗아, 我佛國土가 常淨하기 若此하나 爲欲度斯下劣人故로 示是衆惡不淨土耳니라'」 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此方淨土說이다. 요컨대, 『維摩經』의 이러한 唯心淨土說과 此方淨土說 및 菩薩心淨土說등을 고찰해 볼 때, 이것은 本經의 根本的인 立場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는 大乘菩薩道의 精神을 來世가 아닌 現世에 바로 지금 이 땅에 실현하려는 강한 意志를 表出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5세기경의 世親에게 『維摩經論』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傳記인 『婆藪槃豆法師傳』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의 저서인 『淨土論』의 說相에 비추어 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曇鸞은 世親에 그리 늦지않는 시대의 사람인데, 淨土敎를 연구하고 그 선포에 힘썼으며, 世親의 『淨土論』에 대해 『淨土論註』二卷을 지어 如來淨土의 因果를 說하며, 衆生往生의 因果도 如來의 本願力에 의함을 밝혔다.

曇鸞의 『論註』에 의해서 가장 큰 影響을 받은 사람은 唐의 善導인데, 그의 스승은 『安樂集』을 저술한 道綽이다. 道綽도 曇鸞에 이어서 『維摩經』에 注意를 기울렸던 인물이었다. 『安樂集』上下二卷은 道綽禪師 유일의 遺著인 것이다.78)

道綽의 『安樂集』은 曇鸞의 『淨土論註』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諸經論에 敎證을 구하면서 淨土信仰을 권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 첫째는 명확한 時代觀과 淨土敎의 性格규정이다.79) 즉, 道綽은 불교의 史的 衰退를 天台宗의 慧思와 같이 「正法五百年·像法一千年·末法一萬年」으로 잡고, 『大集經』月藏分에 바탕하여 그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佛滅後 제4의 五百年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懺悔하고 福을 닦으며, 진정 佛의 名號를 칭할 시기」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의 배경에는 가르침이란 시대와 인간의 자질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말세의 중생에게 열려진 가르침이란 무었인가? 道綽에 의하면 그러한 가르침은 聖道에 대하는 淨土의 一門과 往生淨土의 一門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聖道의 一種은 금시에는 證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道綽의 思想을 통하여 末法時代 宗敎로서 淨土敎가 그 像을 보다 선명히 하였음을 인식할 수가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Ⅳ. 中道思想

 

1. 眞俗二諦說

 

眞俗二諦는 佛敎의 중요한 敎義이기 때문에  世俗과 勝義의 語義를 엄밀하게 理解할 必要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처님께서 證得하신 窮極的인 眞理를 올바르게 理解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維摩經』의 勝義諦로서 여겨지는 中道思想및 禪思想의 核心인 '心非心' 즉 '淸淨心'을 理解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1) 眞俗二諦의 中道的 相卽

 

요컨대 世俗諦를 現象으로 생각하고, 勝義諦를 本體로서 간주하는 二諦說이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형태의 二諦說인 것이다.80) 그렇다면 現象을 世俗諦로 간주하고 本體를 勝義諦로 생각하는 것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형태의 眞俗二諦說이라면, 이러한 二諦說에 있어서 양자는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일까? 生死卽涅槃을 주장하는 大乘佛敎에 있어서 世俗諦와 勝義諦는 相卽的인 意義를 갖게 된다고 論者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世俗諦와 勝義諦가 凡俗의 立場에서의 眞實과 聖者의 立場에서의 眞實로서 단절하면서도 동시에 相卽的으로 결합하는 데에서 生死卽涅槃의 이론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世俗諦와 勝義諦가 완전히 단절한다면, 般若中觀의 勝義空論도 虛無論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二諦의 相卽은 勝義空論을 虛無論과 식별하기 위한 中觀二諦說의 敎義的인 근본과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方便과 目的이라는 二諦의 관계도 勝義空論을 虛無論과 식별하기 위한 二諦說의 중요한 敎義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二諦의 相卽的 關係 또한 二諦說의 理論으로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敎義라고 여겨지며, 二諦說은 二諦의 相卽에 의해서 확고한 哲學的 意義를 갖게 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二諦의 相卽은 經驗的인 世俗의 有의 立場과 超越的인 勝義의 空性(無)의 立場과의 相卽이므로, 소위 '非有非無'의 中道思想인 것이다.81) 

 

(1) 世俗諦의 如幻性

 

中觀學派의 勝義諦는 經驗的인 世俗言說을 초월한 不可言說의 空性이지만, 空性의 超越性은 空性이 世俗世界를 否定한 바깥에 놓인 다른 어떤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므로 緣起의 道理에 의해 성립하는 世俗諦는 空性의 現實的인 바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世俗諦는 獨立自存性이 없는 無自性·無實體인 空의 형태를 內包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世俗諦는 實體가 없는 幻化(m y , nirm a)와 같은 것으로서 如幻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空性이 단지 虛無가 아니라 世俗의 如幻性을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中論』 第24章 第18偈에 잘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緣起인 것, 그것을 우리는 空性이라고 한다. 그것은 因緣에 의한

假名(prajapti)이며, 그것(空性)은 바로 中道이다. 82) 

 

위의 『中論』 第24章 觀四諦品 第18偈는 勝義諦인 空性을 緣起(幻化)로, 또는 이와 같은 假名(prajapti)으로서 말하고 있는 대표적인 偈頌이다. 勝義의 空性은 無가 아니라 世俗의 存在가 幻化와 같은 '緣起'라는 의미이며, 이러한 世俗·勝義의 二諦의 道理로써 空性인 것이다. 그런데 勝義의 '空性'이 世俗存在의 幻化와 같은 '緣起'라는 뜻이라면, 勝義의 '空性'은 '無'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단순한 有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勝義의 空性은 世俗과 勝義 二諦의 眞理를 동시에 內包하기 때문에 非有非無의 中道인 것이다.

그러므로 '緣起'·'幻化'·'假名'은 모두 非有非無를 의미하는 同義語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며, 勝義空性의 中道的 眞實을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經驗的 限定을 초월한 否定的 勝義空性은 緣起·幻化·假名이기 때문에 非有非無의 中道이며, 勝義卽世俗의 立場에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83) 

 

(2) 世俗諦의 本來空性

 

中觀學派의 勝義에 대한 認識은 世俗의 認識內에서 本來空을 直觀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中觀學派의 勝義의 認識은 卽世俗的이며, 世俗의 空한 眞實에 철저한 實踐性을 지니고 있다. 中觀學派의 勝義의 空은 世俗의 有를 없다고 하는 그러한 相對的인 否定의 原理가 아니라, 有의 空한 본래의 모습을 바로 알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中觀學派에 있어서의 世俗諦와 勝義諦의 관계는 철저하게 否定卽肯定의 相卽關係이다. 여기에 中觀學派의 非有非無의 中觀說의 立場이 있으며, 이것이 一切의 世俗的 存在를 緣起無自性空이라고 보는 中觀學說에 의거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中觀學派의 勝義의 空은 有인 世俗을 없다고 하는 相對的 否定이 아니라, 世俗有의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는 非有非無的인 中道의 眞實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84)

이와 같이 世俗內에서 絶對否定的으로 勝義의 空을 行證하려고 하는 龍樹의 二諦相卽의 中觀思想은 다음의 『般若經』의 經文에서도 같은 思想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때 帝釋天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世尊이시여, 須菩提는 假名과 矛盾없이 法性을 說합니다.' 이때 世尊은 帝釋天에게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色은 假名뿐이며 假名 뿐인 것은 法性이다." 85)

 

"須菩提여, 世間世俗과 勝義는 서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世間世俗의

眞如가 곧 勝義(第一義諦)의 眞如(tathat )이기 때문이다.”86)

 

위의 散花品의 經文과 道樹品의 經文은 世俗의 言說과 勝義法性이라는 二諦의 相卽을 說하는 內容인데, 이것 역시 동일한 中道思想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考察한 바와 같이 二諦가 相卽하는 非有非無의 中道는 理論的으로는 역시 不斷不常, 不一不異의 中道와 동일하다. 世俗의 存在가 獨立自存的으로 存在하지 않고, 그와 다른 것의 否定을 매개로 해서 성립한다고 하는 龍樹의 緣起無自性 空論의 立場에서는 世俗의 緣生法은 不斷不常, 不一不異이며 非有非無로서 모순적인 相卽이 眞實인 것이다. 그러므로 二諦相卽의 中道理論은 龍樹의 論書들의 도처에 많이 보이고 있지만, 生死卽涅槃을 說하는 龍樹의 말은 二諦相卽의 中道思想을 바로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涅槃은 世間과 조금도 差別이 없다. 世間은 涅槃과 역시 조금도 分別이

없다.87)

 

위의 經說은 生死가 곧 涅槃이라는 中道義를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生死를 떠나서 따로이 涅槃이 存在하지 않음이 實相의 뜻이라면, 어찌 分別과 差別이 있을 수 있겠는가? 88) 

 

2) 『般若經』의 眞俗二諦說

 

『般若經』은 가장 오래된 大乘經典이며, 龍樹의 中觀思想의 직접적인 원천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般若經』에는 각가지의 『般若經』이 있지만, 그 中에서도 『八千頌般若(小品般若)』가 最古의 텍스트이며, 이것이 확대되거나 축소된 것이다. 『八千頌般若』는 A.D. 172년에 漢譯되었으므로 印度에서는 紀元以前에 이미 存在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般若의 大乘思想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1) 『般若經』의 空說

 

無我에 대하여 考察해 보면, 人은 無我이며 空이라고 否定될 뿐만 아니라, 法인 客觀的 모든 요소도 역시 空이고 無我라고 否定된다. 人·法二無我라는 말은 中期와 後期의 大乘經典에 나타나는 술어로서 『般若經』에는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般若經』은 人·法二無我의 意義를 깊이 반성한 不可得의 敎說을 강조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般若經』은 一切가 오직 이름뿐이며, 無實體인 言說이므로 一切를 空不可得이라고 생각하며, 夢幻같은 存在라고 생각한다.

 

知見諸法如夢如焰如影如響如幻如化.89)

 

위의 經說은 '諸法은 꿈과 같고, 불꽃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환상과 같고, 化生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般若經』의 空說은 客觀的인 實在的 諸法에 대한 主觀의 관념만이 空無我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客觀的 요소인 諸法의 空도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一切가 無實體인 世俗의 言說이며, 空이라고 하는 『般若經』의 空說은 人도 法도 모두 否定하는 一切皆空說이다. 그런데 現代는 물론 古代의 수많은 사람들은 維摩詰이나 龍樹 그리고 大乘의 부처님들이 說하신 이러한 空說을 世俗的이거나 精神的인 一切의 가치를 폐기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오해 해온 것이 사실이다. 사실상 本稿는 그러한 오해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놓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이미 序論에서 밝혀 놓은 바가 있다. 실제로 그러한 오해를 푸는 열쇠는 空의 개념에 달려 있다고 論者는 생각하고 있다. '色은 그 空性으로 인하여 空하지 않다. 왜냐하면 空性은 色을 떠나서 어딘가 다른 곳에 存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色이 곧 空이요, 空이 곧 色이다.'90) 大乘經典에 자주 나타나는 이 말은 中道의 眞髓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空이란 이 말은 주의 깊게 선택된 표현으로서 '공허함'이나 '虛無主義'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色'을 '空'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色의 상태에 관한 어떤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결코 色이 存在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한 '空'을 '色'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이 결코 虛無主義的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虛無主義에 대한 治癒法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事物에 너무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여 利己心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色이 空함을 이해시킨다면, 그는 이 世界의 相依相關性에 의한 緣起의 法則을 깨닫고 욕심을 줄이면서 사회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며,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로 실패한 나머지 크게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또한 空에서 有가 창조될 수 있음을 이해 시켜서 다시 再起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줌으로써 역시 이 世界의 相依相待의 緣起法을 깨달아 智慧를 회복하여 自利利他의 참된 人生을 재창조 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般若經』의 二諦說

 

『般若經』에서는 人·法 모두 世俗의 言說(世俗諦)이며, 無我無實體인 空으로서, 言說을 초월한 不可言의 空性이외에 勝義의 眞實(勝義諦)은 없다고 說한다. 『八千頌般若』에서는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수보리여, 一切法은 다 不可說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一切法의 空相은     言說 될 수 없기 때문이다.91)

 

위의 『八千頌般若』의 經說에서는 一切의 存在를 表象(samj ),觀念(samaj ), 名稱, 言說등의 世俗諦로 하고, 表象·觀念·名稱·言說등을 超越한 不可言說의 空性을 勝義諦로 하는 大乘佛敎의 二諦說의 의미를 엿 볼 수 있다.

그런데 『二萬五千頌般若』에서는 言說(世俗)과 不可言說(勝義)의 二諦說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記述되어 있다.

 

수보리여, 世俗諦를 근거로 하여 善惡의 果가 건립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勝義諦를 가리고서는 善惡의 果가 건립된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法(勝義諦)은 관찰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說 할 수 없기 때문이다. 92)

 

위의 25,000頌 『摩訶般若經』의 經說은 一切의 槪念的 施設을 世俗諦로 하고, 槪念的 施設을 초월한 不可言性을 勝義諦로 하는 二諦를 명확한 형태로 記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八千頌 『小品般若經』으로부터의 발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二諦說은 大乘佛敎二諦說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서 人을 世俗으로 하고 法의 實在를 勝義諦로 했던 部派佛敎의 二諦說에 대한 새로운 大乘的 體系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二諦說에 의거하게 되면, 法의 實在를 勝義諦로 한 아비달마불교의 眞理觀은 완전히 否定됨과 동시에 궁극적인 勝義의 眞實의 소재는 不可言空性이라는 經驗的 의식을 초월한 內面的인 고도의 精神性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緣起의 道理에 의한 佛陀의 無我說을 깊이 考察해보면, 『般若經』의 二諦說은 오히려 佛陀의 참된 정신을 발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佛陀의 無我說은 法有의 立場을 띤 그런 學說이 아니라, 無我에 철저한 絶對의 否定的인 空觀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佛陀께서 成道하신 후에 說法하시기를 주저 하셨던 일이나 혹은 世界는 常인가 無常인가 라는 등의 질문에 대해 無記로 임하신 자세는 佛陀께서 깨치신 勝義의 眞實이 經驗的 의식을 초월한 絶對 否定的인 不可言空性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般若經』의 二諦說이 갖는 정신을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오히려 佛陀의 정신에 대한 올바른 전통이지 결코 새롭고 혁신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法의 實在를 주장하는 아비달마불교의 立場에서 보면, 그러한 二諦說의 精神이 革命的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① 『般若經』 二諦說의 基本的인 性格

勝義諦가 不可言說인 한, 無言이야말로 眞實이며 최대의 웅변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勝義諦의 立場에서 보면, 如來는 한마디 말씀도 說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佛說을 초월하여 佛說의 眞實을 보려고 하는 『般若經』의 자세는 佛身에 대한 見解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만약 色(r pa)으로써 나를 보고, 音聲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邪道를 行하는 것이며, 如來를 볼 수 없다. 93)

 

위와 같은 『般若經』의 佛身觀은 阿含經典에서 말하는 '肉身을 보는 자는 나를 올바로 보지 못하며, 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라는 敎說의 발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佛身觀은 不可言空性을 勝義諦로 하고, 不說이 곧 佛陀의 말씀이라고 하는 『般若經』의 철저한 空觀의 發顯인 것이다. 『般若經』에서는 言說보다도 不可言說에, 肉身보다도 法身에, 다시 말해서 有相을 초월한 無相不可言의 空性에 勝義의 眞實이 있다고 보는 立場이다. 이러한 『般若經』의 철저한 空觀은 또한 龍樹의 中觀學說로 이어지고 있다. 『中論』 第18章 第9偈에서94) '他에 의해서 알 수 없고 寂靜하며,  論에 의해서  論되지 않고, 分別을 떠나고, 잡다한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實相이다.'라고 말하며, 第25章 觀涅槃品 第24偈에서95) '諸法은 不可得이어서 모든  論을 寂滅한다. 사람도 없고 장소도 없으며, 부처님은 어떠한 法도 說하신 바가 없다'라는 말은 전적으로 위에서 말한 『般若經』의 不可言說의 空인 勝義諦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般若經』의 二諦說의 立場에서는 一切가 모두 다 假名이며 無實體한 世俗의 言說인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般若經』에서 佛陀·菩薩·五蘊등에 관한 一切의 敎說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否定만 하고 있지는 않다. 무릇 一切 存在에 대한 世尊의 敎說은 世俗諦인 世間의 言說의 立場에서 說해진 敎說이며, 勝義諦의 立場에서 볼 때는 不可說이라고 할만하지만, 世俗言說의 立場에서 說해진 佛陀의 敎說은 一切衆生을 攝受하기 위한 敎說로서 意義를 갖는 것이며,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勝義諦는 一切의 表現을 超越한 無相·不可言의 眞實이므로 世間言說의 立場에 있는 敎說에 의해서 점차 了解되어지고 開示되어지는 것으로서 世間의 言說에 의하지 않고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世間言說의 立場에서 佛陀의 敎說은 사람들에게 勝義를 了解 시키고 사람들을 攝受하기 위한 道로서 意義와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佛陀의 敎說은 假名無實體인 世俗의 言說임에도 불구하고 不可言空인 勝義의 眞實을 밝혀줌으로써 勝義인 不可言空의 眞實로 悟入케 하는 方便(up ya)으로서 그 存在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世俗言說의 敎說이 一切衆生을 攝受하고 救濟하기 위한 方便이라고 하는 敎義는 『般若經』에서 되풀이하여 강조된다. 그런데 이러한 方便은 뗏목과 같은 것으로 최후에는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뗏목의 比喩는 『金剛般若波羅蜜經』에서도 說하고 있다.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衆生이 만약 마음에 相을 취하면, 곧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에 집착함이 되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法相을 취하더라도 곧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에 집착함이며, 만약 法 아닌 相을 취하더라도 곧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에 집착함이 되느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法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러한 뜻인 까닭에 如來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희 比丘들은 나의 說法을 뗏목으로 비유함과 같이 알라"하셨으니, 法도 오히려 응당 버려야 하거늘, 어찌 法아님이겠는가! 96)

 

相에 매달리지 않으면 무한한 自由를 누릴 수 있고, 相에 집착하지 않으면 眞理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法이니 眞理니 하는 것에도 집착할 일이 아닌데, 하물며 法이 아니고 眞理가 아닌 것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므로 佛陀께서는 "나의 說法을 물을 건널 때 필요로 하는 뗏목으로 알라!"고 力說하신 內容이다.

그러나 이러한 方便이 없이 目的地에 도달하는 것은 不可能하다. 이에 『般若經』은 佛陀의 敎說마저 초월한 不可言說인 空을 勝義諦로 함과 동시에, 佛陀의 敎說을 그러한 勝義諦를 추구하기 위한 方便的 言說로서 世俗諦로서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般若經』二諦說의 基本的 성격인 것이다. 또한 龍樹의 『中論』 第24章 觀四諦品 第10偈에서

 

"만약 俗諦에 의존하지 않으면 第一義(勝義)를 얻지 못하고, 第一義를

얻지 못하면 涅槃을 얻지 못한다."97)

 

 라고 하는 말도 이러한 『般若經』의 二諦思想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② 佛陀의 敎說形式에 의한 二諦說

以上에서 『般若經』은 不可言空性을 勝義諦로 하고, 佛陀·菩薩·五蘊·十二處·十八界등에 대한 모든 佛陀의 敎說을 不可言空性인 勝義諦를 이해시키기 위한 方便이 되는 言說인 世俗諦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二諦說이 佛陀의 敎說形式에 의해 記述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世俗諦와 勝義諦는 모두 敎說(dharma-de an ,說法)의 形式에 의하게 된다. 본래의 二諦說은 眞理(satya)의 形式이지 단순한 敎說의 形式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世俗諦는 "世俗諦를 말하는 敎說" 卽 未了義敎의 의미이고, 勝義諦는 "勝義를 말하는 敎說" 卽, 了義敎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般若經』에 있어서는, 勝義諦는 "不可言空性을 말하는 敎說"을 뜻하며, 世俗諦는 "五蘊·十二處등 言說的인 世俗의 存在를 말하는 敎說"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二諦는 眞理의 形式임과 동시에 이러한 眞理를 말하는 敎說의 形式으로서도 사용되는 것이다.

『中論』 第24章 觀四諦品 第8偈에서98) "모든 부처님께서는 二諦에 의거하여 衆生을 위하여 說法하신다. 하나는 世俗諦로써이고, 또 하나는 第一義諦로써이다."라고 記述한 것은 이러한 敎說形式으로서의 二諦說이다.

 

③ 二諦의 相卽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般若經』에서는 不可言空性을 勝義諦로 하고, 佛陀의 敎說을 不可言空性에 대한 方便的 世俗諦로 하는 二諦說과, 勝義諦와 世俗諦를 敎說의 形式으로 간주하는 二諦說이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다음과 같은 世俗諦와 勝義諦와의 相卽을 說하는 二諦說을 발견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르시되,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世間世俗을 취하기 때문에 衆生에게 有나 無를 보여주신다. 勝義로서는 그렇지 않다. 須菩提가 말하되, 世尊이시여, 世間世俗과 勝義와는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世尊께서 이르시되, 수보리여, 世間世俗과 勝義와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世間世俗의 眞如(tathat )는 勝義의 眞如이기 때문이다. 99)

 

위의 經說에 의하면, 二諦는 世俗諦(言說,方便)와 勝義諦(不可言說, 目的)의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同一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世俗諦는 勝義諦로의 과정적인 方便인 동시에 그 存在자체가 勝義諦와 相卽하고, 勝義諦는 世俗의 言說을 超越한 不可言 空性인 동시에 世俗諦와 相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二諦가 서로 相卽하게 되는가? 그것은 世俗諦가 緣起의 道理에 의해서 성립하는 緣生法으로서 그 자체가 勝義諦인 不可言 空性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二諦의 相卽은 般若 中觀의 勝義空論을 無論으로부터 구별하는 敎義로서 中觀學派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다.100) 

요컨대, 『般若經』은 龍樹의 中觀思想의 源泉이긴 하지만, 緣起·二諦·中道의 敎說을 전개시키고, 이것을 하나의 체계로서 佛敎의 空論을 확립시킨 것은 바로 龍樹라고 할 수 있으며, 『般若經』도 龍樹에 의해서 그 심오한 思想이 整備되고 完成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以上에서 言及된 『般若經』의 眞俗二諦의 相卽說은 『維摩經』의 中道思想과 禪思想의 基礎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維摩經』의 思想的 根源이 되고 있다고 論者는 생각한다.

 

2. 中道思想

 

1) 中道說

 

佛敎의 全 思想의 특징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그것은 中道思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原始佛敎의 思想的 특징이 이 中道思想에 있다고 金東華 博士는 그의 『原始佛敎思想』에서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中道思想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八正道로써 대변되는 實踐行으로서의 中道行이고, 다른 하나는 緣起說로서 대변되는 思想的 理論으로서의 中道說이다.

佛陀는 正見에 토대를 두고 있는 '八正道'라는 實踐行으로서의 中道行을 眞正한 가치추구의 길로 제시하고 있으며, 正見으로써 '緣起說'을 제시하고 있다. 實踐的 中道로써 제시된 八正道와 理論的 中道로써 제시된 十二緣起說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八正道와 十二緣起說은 佛陀가 『箭喩經』에서 義와 法에 相應하며, 梵行의 근본이 되는 동시에 智와 覺으로 나아가고 涅槃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哲學이므로 항상 그것을 說하셨던 四聖諦를 구성하는 核心的 敎理이다.

十二緣起說의 流轉門은 四聖諦의 苦聖諦와 集聖諦를 구성하고, 還滅門은 滅聖諦와 道聖諦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으며, 八正道는 바로 道聖諦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佛陀의 理論的 中道와 實踐的 中道는 四聖諦라는 하나의 體系로 통일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佛陀는 四聖諦가 認識論·存在論·價値論등 철학의 모든 영역을 충족시켜주는 완벽한 思想 體系임을 『箭喩經』에서101) 시사하고 있다.

우선 八正道를 살펴보면, 八正道는 價値實現의 方法임과 동시에 認識論的 要素를 갖고 있다. 八正道의 첫 支인 正見은 眞理에 대한 바른 認識 곧 緣起法에 대한 認識을 의미한다. 따라서 八正道를 說하신 佛陀는 분명히 緣起法을 認識하게 된 認識論的 方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有無中道의 내용을 살펴보면, 佛陀는 암시적으로 그것을 밝히고 계신다. 世間의 集과 滅을 여실히 正觀함으로써 有無二見을 떠나 中道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곧 그것이 緣起法을 發見하는 認識論的 方法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李仲杓 교수는 그의 『阿含의 中道體系』에서 그것이 바로 佛陀의 禪定이라고 여기고 있다. 즉 有無二見을 떠난 中道에서 現實 世界의 實相을 如實히 正觀 할 때, 世間의 緣起하는 모습을 發見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관찰은 禪定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八正道가 價値 實現의 方法이라면 眞理를 認識하는 것도 지극히 가치 있는 일이므로 八正道는 眞理 認識의 方法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正定은 이와 같은 眞理 認識의 方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八正道는 涅槃이라는 궁극적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며, 그 가운데서도 正定은 가장 직접적인 方法이다. 佛陀에게 있어서 涅槃은 곧 眞理를 認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無明이 滅하면 곧 生死도 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八正道, 그 中에서도 正定은 '價値實現의 方法'임과 동시에 '眞理認識의 方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102)

이에 비하여 緣起說은 存在論的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轉變說과 積聚說이 外道들의 存在論으로서 現實世界의 本質과 構造를 說明하는 것이라고 볼 때, 緣起說은 中道의 立場에서 現實世界의 成立을 說明하는 것이므로 轉變說이나 積聚說에 대한 佛陀의 存在論的 敎說로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中'의 뜻에 대하여 대체로 'Middle·Central·Golden mean·Moderate'등으로 번역하며, 兩極端을 배척하고, 中正의 意義를 채용하고 있다. 또한 '中道'는 'the middle path·the golden mean·moderation·strike averages·the right path·the path of the Buddha leading to the bless of Nibb na'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穩健 中正의 佛道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中'은 '한가운데·中間·치우치지 않음·바름(正)·極端이 아닌 것' 등의 뜻이며, '中道'도 위와 같은 뜻을 實踐함에 있어서 '치우치지 않고 兩極端이 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103)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佛陀는 實踐的 側面에서는 苦樂中道를 說하시고, 理論的 側面에서는 有無中道를 說하시면서, 그 구체적인 내용은 八正道와 十二緣起說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理論的인 中道說에도 ① 離有無二邊의 中道說 ② 離身命一異의 中道說 ③ 離斷常의 中道說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本稿의 論理의 展開上 큰 흐름에 理解를 돕고 번거로움을 제거하기 위해 우선 첫째로 苦樂中道와 有無中道만을 간추려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苦樂中道

 

苦樂中道를 이야기 할 때 흔히 거문고의 비유를 든다. 尊者 소오나(二十億耳)比丘가 잠을 자지 않고 精進하였으나 欲漏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자책한 나머지 환속할 생각을 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거문고의 줄을 너무 죄거나 지나치게 늦추면 그 소리가 아름답지 못하듯이, 修行에 있어서도 극단적인 精進이나 懈怠를 피하여 그 中間에서 修行할 것을 권하신다.104) 이와 관련하여 苦樂中道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說해져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凡夫들이 行하는 극히 하천한 業인 欲樂을 구하지 말고, 聖者의 行이 아니어서 아무 의미도 없이 괴로움에 이르는 苦行을 추구하지도 말라. 이 二邊을 떠나면, 眼目과 智慧를 이루고, 자재로이 禪定에 들어 智慧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涅槃으로 나아가는 中道가 있나니 ··· 正見에서 正定에 이르는 成道八支가 있느니라."105)

 

부처님은 이 經에서 自身은 快樂主義와 苦行主義를 둘 다 버리고 八正道를 修行法으로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修行의 목적은 涅槃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成就하는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佛陀께서 中道로 제시하신 八正道는 그분의 世界觀과 人生觀 그리고 價値觀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八正道의 內容을 살펴보면, 맨 끝의 支가 正定이다. 다시 말하면 八正道의 다른 支들은 올바른 禪定인 正定을 위한 예비적인 修行임을 시사하고 있으므로 佛陀께서 추구하신 최고의 가치는 결국 禪定을 통하여 成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中道의 認識論的 근거를 밝혀 보고자 한다. 佛陀께서 苦樂中道의 修行을 통해 八正道를 發見하게 된 과정과 그로 인하여 四聖諦를 확립하게 되는 과정을 『雜阿含經』에서 자세히 說하고 계신다.10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머무시었다. 이때 世尊께서 모든 比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正覺을 얻기 전에 홀로 禪定을 통한 思惟에 전념하면서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어떤 法이 있기 때문에 老死가 있는 것일까? 生이 있기 때문에 老死가 있다. … 이와 같이 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이 있다. 어떤 法이 있기 때문에 名色이 있고 어떤 法을 緣하여 名色이 있는가를  正思惟한 결과 識이 있기 때문에 名色이 있고, 識을 緣하여 名色이 있다는 여실하고 無間等한 認識이 생겼다. 내가 이렇게 思惟했을 때, 이 識은 名色으로 돌아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말하자면 항상 識을 緣으로 하는 名色이고, 名色을 緣으로 하는 六入處이며, … 生을 緣으로 하는 老死憂悲惱苦로서 이와 같이 純大苦聚가 集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어떤 法이 없으면 老死가 없고, 어떤 法이 滅하면 老死가 滅할까? 곧 正思惟 해보니 生이 없으면 老死가 없고, 生이 滅하면 老死가 滅한다는 여실하고 無間等한 認識이 생겼다. (이와 같이 生·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識·行을 두루 說하시고서) 나는 다시 이렇게 思惟하였다. 어떤 法이 없게 되면 行이 없고, 어떤 法이 滅하면 行이 滅할까? … 無明이 멸하면 行이 滅하고, 行이 滅하면 識이 滅하고…生이 滅하면 老死憂悲惱苦가 滅한다. 이와 같이 純大苦聚가 滅한다. 나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옛 仙人의 道와 逕과 道跡을 얻었다. 옛 仙人은 이 발자취를 따라갔다. 나는 이제 그 길을 따라가리라. … 말하자면 그 길은 八正道로서 … 나는 그 길을 따라 老病死와 老病死의 集과 老病死의 滅과 老病死가 滅하는 道의 자취를 보았고, … 行과 行의 集과 行의 滅과 行이 滅하는 道의 자취를 보았으며, 나는 이 法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正覺을 이루었다."

 

 위의 經說에서 釋尊은 自身의 思惟가 禪定속에서 이루어 졌으며, 思惟의 內容은 十二緣起이며, 十二緣起를 바탕으로 하여 八正道를 修行하여 四聖諦를 깨달아서 正覺을 成就하셨음을 說하신 것이다. 釋尊은 生老病死가 不斷히 전개되고 있는 世間은 無明에서 緣起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無明이 滅하면 生老病死도 함께 滅하는 十二緣起의 還滅門을 또한 깨달았다. 이와 같이 生死를 벗어날 수 있는 참된 길이 八正道라는 사실도 역시 깨닫게 된 것이다. 즉 八正道가 十二緣起의 還滅門이라는 사실은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곧 확인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無明의 滅은 正見이고, 行의 滅은 正思惟(意行滅), 正語(口行滅), 正業(身行滅)이며, 識과 名色의 滅은 正命과 正精進이며, 六入에서 有까지의 滅은 正念이고, 生老死의 滅은 正定이라 할 수 있다.107) 苦樂中道의 修行의 결과로 이와 같이 八正道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를 實踐하신 결과로서 不斷히 生死가 전개되는 世間은 괴로움뿐이라는 사실(苦聖諦)과 無明을 緣하여 集起한다는 사실(集聖諦)과 無明을 滅하고 보니 寂靜하고 安樂하더라는 사실(滅聖諦)과 이처럼 안락하고 평화로운 涅槃은 八正道를 통하여 成就된다는 사실(道聖諦)을 明證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釋尊의 깨달음은 理論的 中道인 十二緣起를 근거 삼아 實踐的 中道인 八正道의 實踐 修行을 거쳐 드디어 四聖諦의 틀을 확립하게 된 것이라고 볼 때, 十二緣起·八正道·四聖諦는 釋尊의 깨침을 통하여 동시에 얻어진 結果일 것이라고 論者는 생각하고 있다.

 

(2) 有無中道

 

八正道說은 中道思想을 實踐하는 行法爲主의 中道說이지만, 그 中에 正見의 內容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라고 表面化 되어있지는 않다. 그러면 思想的 理論으로서의 中道說은 과연 어떤 것일까? 八正道의 實踐에 있어서 그 출발이 되는 正見이 문제 될 경우에 理論的 측면에서 一異中道·斷常中道·自作他作中道 등은 그 內容이 緣起法이었다.

有無中道는 이러한 理論的 側面에서 說해진 中道를 통섭 할 수 있는 中道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一異·斷常·自作他作의 모순적 대립은 본질적으로 有無의 모순적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一異의 모순 대립은 영혼이라는 存在에 대한 二見의 모순 대립이고, 斷常의 모순 대립은 不滅하는 自我의 存在에 대한 有無二見의 모순 대립이며, 自作他作의 모순 대립은 常住하는 苦의 作者에 대한 有無二見의 모순 대립인 것이다. 따라서 釋尊은 外道의 모든 思想을 有無二見으로 분류하고 있고, 이러한 思想은 邪見이므로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신다.108)

 

어느 때 世尊께서는 여러 比丘들에게 말씀하셨다. "두 가지 見解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둘인가? 이른바 有見과 無見이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이 두 가지 見解를 익히고 외우면서 마침내 바른 法은 따르지 않는다. 만일 이것을 참답게 알지 못하면 그는 곧 沙門이 아니요, 婆羅門이 아니다. 그는 사문으로서 沙門의 法을 범하고, 바라문으로서 婆羅門의 法을 범하는 것이다. …

 

위의 經說에서 엿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佛陀의 中道는 이와 같이 어떤 存在를 상정하여 그 存在의 有無를 문제삼아 모순 대립하는 모든 邪見의 破棄를 의미하며 동시에 緣起說을 바탕으로 하여 正見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有無中道는 또한 다음과 같이 說해지고 있다.109) 

 

세상 사람들이 顚倒되어있는 것은 有無二邊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 境界를 취하여 마음으로 計著한다. 迦 延이여, 만일 받아들이지 않고 취하지 않으며 머무르지 않고 我를 헤아리지 않으면 이 괴로움은 생길 때에는 생기지마는 멸할 때에는 멸할 것이다. 迦 延이여, 여기에 있어서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남을 의지하지 않고도 능히 알 수가 있느니라. 이것을 正見이라고 하며, 如來가 說하는 것은 이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迦 延이여, 世間의 集을 여실하게 正觀하면 世間의 無見은 생기지 않고, 世間의 滅을 여실하게 正觀하면 世間의 有見은 생기지 않으므로, 迦 延이여, 如來는 二邊을 떠나 中道에서 說하나니, 소위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기 때문에 저것이 나나니, 즉 無明을 因緣하여 行이 있고 … 내지 生老病死와 근심·슬픔·번민·괴로움이 모이는 것이다. 이른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滅하기 때문에 저것이 滅하나니, 이른바 無明이 滅하면 行이 滅하고, …내지 生老病死와 근심·슬픔·번민·괴로움이 滅하느니라.

 

위의 經說을 살펴보면, 世尊께서는 모든 邪見은 有無二邊에 의지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버려야 할 邪見이 바로 有無二邊의 모순이다. 有와 無는 가장 근본적인 矛盾關係에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矛盾이 있게 된 까닭은 境界를 취하여 계탁(計度)하기 때문이라고 說하고 계신다. 즉 우리 인간이 外部에 實在한다고 생각하는 存在는 우리의 마음이 취사선택하여 허구적으로 꾸며낸 것일 뿐으로 客觀的인 對象으로서의 存在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의 마음속으로 구성한 허구적인 觀念일 뿐이다. 自我의 存在도 마찬가지다. 自我라는 명칭은 동일하지만, 그들이 取著하여 꾸며낸 內容은 각기 다른 것이다. 常見을 주장하는 이는 自我는 不滅의 存在로 計度하고 있고, 斷見을 주장하는 이는 自我는 斷滅하는 存在라고 計度하고 있을 뿐, 不滅의 自我나 斷滅하는 自我가 實在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제각각 달리 계탁한 存在를 두고서 그것이 有인가 無인가를 論하므로 모순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有無中道가 발견되는 과정을 考察하지 않을 수 없다. 世尊께서 禪定을 통하여 緣起法을 깨달으셨다면, 그 禪定의 內容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分別六界經』110)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內容을 시사하고 있다.

 

만약 比丘가 이 세 가지 느낌(苦·樂·捨)에 물들지 않고 解脫하면, 그 比丘는 지극히 청정한 '苦·樂의 감정을 떠난 마음(捨)'에 있게 되느니라. 比丘여, 그 比丘는 '나는 이 淸淨한 捨로 無量空處에 移入하리라'고 생각하여 그것에 의지하고 머물며…묶여서 空處에 따르는 마음을 닦고…無量識處, 無所有處, 非有想非無想處에 移入하리라고 생각하여 이와 같은 마음을 닦느니라…그 比丘는 다시 '내가 이 淸淨한 捨로 의지하고 있는 無量空處, …非有想非無想處는 有爲이다. 有爲라면 이것은 無常하고, 無常한 것이라면 이것은 苦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만약 이 苦가 苦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이를 버리고, 다시는 無量空處,…非有想非無常處에 移入하지 않게 된다. 比丘여, 만약 어떤 比丘가 이 四處에서 智慧로 그것을 관하여 그것을 참되게 알아, 마음이 '그것을' 成就하지 않고, '그곳으로' 移入하지 않으면, 그는 이때에 다시는 有나 無와 같은 有爲를 조작하지 않고, 妄念을 구성하지도 않게 되나니 …이것을 比丘의 제일이 되는 바른 智慧라 하느니라.…漏盡比丘는 그곳에서 第一 正慧處를 성취하느니라. 比丘여, 이 解脫은 眞諦(眞理)에 머무는 것으로서 이동하지 않나니, 眞諦란 如法함을 이름이요, 妄言이란 虛妄法을 말하는 것이니라. 比丘여, 그는 그 제일의 眞諦處를 成就하게 되느니라.

 

위의 經說에서 世尊께서는 苦樂의 감정으로부터 淨解脫을 成就하신 뒤에, 소위 四無色定을 닦아서 無色界四處가 無常한 有爲의 世界임을 自覺할 때, 有無를 벗어나 第一正慧處를 成就하게 된다고 說하신다. 즉 有無中道는 無色界四處를 초월함으로써 自覺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有無中道가 이른바 九次第定을 통해서 自覺되는 것임을 시사한다.111)

예컨대 淨解脫은 色界 四禪을 통하여 證得되는 解脫이며, 色界를 초월하여 無色界에서 行하여지는 禪定이 四無色定이며, 無色界를 벗어나 生死의 世界에서 완전히 解脫한 究竟의 境地가 滅盡定(想受滅盡定)으로서 이것들을 段階的으로 닦는 것을 九次第定이라고 한다. 따라서 世尊께서 有無中道를 깨치신 것은 滅盡定의 成就를 통해서라고 論者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九次第定은 이와 같은 中道를 自覺할 수 있는 근본적인 修行이라고 여겨진다.

 

 2) 中道思想

 

지금까지 佛陀의 中道說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것과 龍樹의 中道說과의 관련된 內容을 考察해보고, 이어서 龍樹의 中觀思想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樹菩薩이 世尊의 中道說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中論』頌에 나타나고 있다.

 

迦 延에 대한 敎訓중에서 有와 無를 바르게 아시는 世尊께서는 有와 無    를 둘 다 否定하셨다.112)

 

위의 『中論』頌은 다음과 같은 佛陀의 敎說에 의거한다고 여겨진다.

 

迦 延이여, 이 世間은 有와 無 두 가지에 의지한다. 迦 延이여, 바른 般若에 의해서 如實히 世間의 集(samudaya)을 보면, 世間에 無인 것은 없다. 迦 延이여, 바른 般若(正慧)에 의해서 如實히 世間의 滅(nirodha)을 보면, 世間에 有인 것은 없다. 迦 延이여, '一切는 有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 된다. '一切는 無다'라고 말하는 것은 제2의 극단이 된다. 迦 延이여, 如來는 이들 兩極端을 떠나서 中에서(majjhena) 法을 說한다.113)

 

위의 經說은 緣起의 道理에 의해서 中道를 말하고 있다. '世間의 集'이란 因緣에 의해서 世間이 生起 하는 것이며, '世間의 滅'이란 因緣이 없을 때 世間이 獨立自存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世間의 集'이란 관점에서 말하면, 世間은 無가 아니다. 그러나 '世間의 滅'이란 관점에서 말하면, 世間은 有가 아니다. 世間은 因緣에 의한 生이며, 因緣의 條件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因緣이 붕괴함에 따라 消滅하는 獨立自存性이 없는 存在이다. 一切의 存在는 客觀的 原因에 依存하여 生起하는 것으로 相對的인 存在이며, 獨立性이 전혀 없는 空한 假象이며 無我이다. 이 世間(loka)은 이처럼 獨立性이 없고, 空하며, 無我인 緣生法이며, 無를 의미하는 듯한 有에 불과 하기 때문에, 非有非無의 中道의 立場에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人間의 經驗的 立場은 '이것은 진실이며, 다른 것은 허망하다'라는 相對的 固執과 執着의 限定的 立場임에 비하여, 中道는 相對的으로 超越하지 않으면 안 된다. 相對的인 '하나의 立場'을 취하지 않는 絶對的인 不可得에 바로 진실이 있으며, 이것이 中道이다.114)

"世間은 常인가 無常인가, 常이면서 無常인가, 非常非無常인가?", "世間은 有邊인가 無邊인가, 有邊이면서 無邊인가, 非有邊非無邊인가?", "我와 身은 一인가 異인가?", "如來는 死後에 存在(有)하는가, 存在하지 않는가(無), 有이면서 無인가, 非有非無인가?"하는 질문에 대답을 주지 않았던 이른바 世尊의 無記의 태도에서 中道의 참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도 있다. 經說에 의하면, "이것은 올바른 도리에 맞지 않고, 法에 맞지 않으며, 근본적인 梵行이 아니고, 離欲과 滅에 인도되지 않고 , 寂靜·正覺·涅槃에 인도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나는 無記로 대한다."115)라고 說하고 있는데, 無記는 形而上學的 탐구가 精神生活에 불필요하고 有害한 것임을 보이는 자세라고도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無記란 經驗的이고 相對的인 立場을 否定한 不可得의 意味로서, 근원적으로 말하면 釋尊은 無記에 의해서 不可得인 中道의 眞實을 보여주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中觀思想(m dhyamika)은 龍樹(N g rjuna, A.D.150∼250)菩薩이 주장한 思想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佛敎 전체가 中觀思想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여하튼 대표적인 인물이 龍樹菩薩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佛滅後 6,7百年경의 南印度사람이었다. 그의 著書로는 『大智度論』100卷, 『十住毘婆沙論』17卷, 『中論』4卷, 『十二門論』1卷등이 있다. 이 中에서도 『中論』과 『十二門論』은 그의 弟子인 堤婆( ryadeva,A.D.170∼270)가 지은 『百論』2卷과 함께 中觀思想의 核心을 이루고 있다. 이 思想은 印度 中觀派로 전해 내려오다가 中國에 들어와서 三論宗이라는 宗派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中중wnd중觀思想은 分別心을 淨化하여 올바른 眞理觀을 확립해 주는 思想이다. 分別心(vikalpa)은 對象을 認識할 때 집착하는 마음을 가리키며, 偏見과 邪見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을 淨化하는 것이 바로 中觀思想이다. 中觀은 곧 正觀 또는 中道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서 有·無, 斷·常등의 극단에 치우치는 邪見을 是正하고, 中道의 眞理를 올바로 관찰하는 智慧를 말한다. 그러므로 '中'은 認識의 對象을 의미하고, '觀'은 對象을 올바로 관찰하는 智慧이며, 그 결과 破邪顯正과 통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中道의 原理는 龍樹菩薩의 八不中道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八不中道는 龍樹의 『中論』에 나타나 있는 思想으로 生·滅·常·斷·一·異·去·來 등의 八種의 迷妄을 제거해 주는 思想이다. 즉 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 不去·不來 등의 八不로 八迷의 兩 極端的인 思想을 破斥하는 것이다.

요컨대 龍樹의 中觀思想은 마음의 집착을 불식하고 (無著), 無所得과 無所住의 空思想으로서 現象界에 대한 집착인 有의 固定觀念을 타파하여 준다. 그런데 現象界는 여러 原因이 和合한 存在로서 그 이면을 살펴보면 無自性·無我·無所有의 眞理性이 存在하므로 이를 空( nya)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空은 전혀 內容이 없는 偏空이 아니라 現象界의 有를 포용하는 空이므로 中道的인 空이다. 그러므로 有라 해도 空을 내포한 有요, 空이라 해도 有를 내포한 空이므로 이를 有空의 中道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存在하는 것은 實體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假有이다. 그러나 因緣에 의해 모여서 생긴 假有이긴 하지만,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非空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現象界는 有와 空이 동시에 포함되어 치우침이 없이 中道를 이룬다는 의미에서 有空中道라고도 한다. 이처럼 中道思想은 모든 事物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치우친 見解를 矯正하고, 眞理의 바탕을 올바로 관찰할 수 있는 智慧를 개발하여 준다.

또한 龍樹의 中觀思想은 직접적으로는 般若經典類의 空性敎義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佛陀의 緣起·中道·無記의 敎說에 보이고 있는 不可得空의 眞實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中觀思想에서는 "一切의 知覺이 寂滅하고, 戱論이 寂滅하여 吉祥하다. 世尊은 어느 곳에서도, 누구에게도, 어떠한 法도 說하지 않으신다"116) 라고 말하고, 혹은 "他에 의해서 알 수 없고, 寂靜하고, 戱論에 의해서 戱論되지 않고, 分別을 떠나 잡다한 의미가 없다. 이것이 眞實相이다."117)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中觀思想은 佛陀의 中道思想을 배경으로 한 자연스런 발전이다. 經驗的인 모든 分別를 否定한 寂靜으로서 안온한 絶對的 中道의 境地야말로 佛陀가 보여준 眞實이라고 여겨진다. Ud na 第8品은 經驗的인 相對의 立場을 否定한 佛陀의 깨달음의 境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比丘들이여, 흙도 없고, 물도 없으며,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空間의 無限한 영역도 없고, 識의 無限한 영역도 없으며, 無一物의 영역도 없다. 相非相을 否定한 영역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달도 태양도 없는 바, 比丘들이여, 나는 이것을 온다고도 말하지 않고 간다고도 말하지 않으며, 머문다고도 죽는다고도 生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依處가 없고, 生起가 없으며, 對象이 없는 바, 이것이 苦의 終局이라고 나는 말한다."118)

 

위에서 든 Ud na의 敎說은 苦惱가 없는 涅槃의 境地를 經驗的인 相對의 立場을 초월한 中道의 境地에서 實踐的으로 敍述하고 있으므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佛陀의 中道說은 이와 같이 實踐的 의미를 지닌 것이 분명하며, 이러한 中道說이 다시 中觀思想의 背景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의 經驗的인 相對的 認識을 否定한다는 의미에서, 佛陀의 中道說과 우파니샤드의 梵我思想과는 共通性을 지닌 體系이다. 양자는 똑같이 超經驗的인 특별한 直觀的 예지에 의해 眞理를 知覺하려고 하는 絶對主義이다. 그러면 兩者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이 문제에 대하여 각종의 異論이 있다고 여겨지지만, 여하튼 우파니샤드 철학이 有我論( tma-v da)임에 반하여 佛敎는 無我論(an tma-v da)인 것이 兩者의 근본적인 차이점일 것이다. 즉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은 相對的 經驗的인 認識을 초월한 하나의 精神的 主體이지만, 佛敎는 이러한  精神的 主體를 인정하지 않는다. 佛敎의 立場에서는 이러한 정신적 주체인 '아트만'은 잘못된 我見이며, 我見의 否定이야말로 眞實을 드러내는 길이 된다. 비록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이 相對的 我見을 초월한 絶對的 純粹我인 것은 사실이지만, 佛敎는 이러한 超越的인 純粹我를 肯定하지 않고 오히려 我見의 철저한 否定을 통하여 絶對的 眞理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一切는 客觀的인 他의 因緣에 의해 生起하는 相對的인 觀念이라고 여기며, 我라는 觀念을 否定하는데 철저한 동시에 그러한 否定속에서는 我도 없고 無我도 없으며, 모든 固定觀念을 否定한 絶對的인 眞實을 추구하는 것이 佛陀의 立場이며, 이것이 釋尊의 中道일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에서는 主觀主義的 경향이 강하지만, 이에 비하여 釋尊의 中道說은 主觀主義的이지도 않고 또한 客觀主義的이지도 않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의 有我論에 대하여 佛敎는 無我論이기 때문에 佛敎에서는 主觀的인 我見을 否定하는 동시에 客觀的 因緣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無我는 客觀主義的인 것이 아니며, 我도 아니고 無我도 아닌 中道이다.

釋尊은 '我는 有인가 無인가?'라는 질문에 결정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我가 있다고 하면 常見에 떨어지고, 我가 없다고 하면 斷見에 떨어진다"119)라고 說하신다.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 釋尊의 中道說은 양자 모두 絶對主義的 思想이지만, 以上과 같은 점에서 근본적으로 相異하다고 생각된다. 佛敎의 思想史的 발전의 도상에서는 客觀主義的인 경향이나 主觀主義的인 경향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적어도 中觀思想은 釋尊의 緣起說의 취지를 잘 계승하여, 我도 없고  無我도 없는 絶代否定的인 中道思想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120) 

 

그럼으로 中觀思想의 本質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認識에 의한 理論의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며, 이에 더하여 禪定修行의 實踐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中觀思想은 世尊께서 四禪과 四無色定을 거쳐 滅盡定에 이르는 禪定修行의 결과로 얻어진 中道라는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世尊의 심오한 眞理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中觀思想을 이해하려면, 마땅히 禪定修行의 實踐이 수반되어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中道思想의 本質을 正確히 把握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認識에 의한 理論의 理解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선 '緣起의 意義와 位相'을 살펴보는 동시에 '『維摩經』의 緣起思想'을 考察해봄으로써 '『維摩經』의 中道思想'을 보다 더 명확히 理解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3. 緣起思想

 

1) 空思想

 

『廻諍論』(Vigrahavy vartan )121)은 「모든 存在는 無自性인 까닭에 空이다」122)라고 하는 龍樹의 空에 대하여, 正理(Ny ya)派 및 Abhidharma論者로부터의 論難과 그에 대한 龍樹의 反批判에 의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龍樹의 空思想을 이해하기에 알맞은 자료로 여겨진다. 우선 이 論을 근거로 하여 空思想을 說明해 보려고 한다.

空에 대하여 龍樹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解說을 行하고 있다.

 

存在가 緣起된 것은 空性이다. 왜냐하면 無自性이기 때문이다. 실로 緣起된 存在는 自性이 없으므로 自性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因과 緣에 依支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自性으로서 어떤 存在가 存在하고 있다면, 그것은 因과 緣이 없어도 存在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은 存在하지 않는다. 따라서 存在는 無自性이고, 無自性인 까닭에 空이라고 論해지는 것이다.123) 

 

   여기서 空性이 緣起이고 無自性인 것이 명확히 論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同論의 末尾의 歸敬偈에서 「空性과 緣起와 中道는 同一한 意味이다」124)라고 佛陀께서 말씀하신 것을 指摘하고, 나아가서 三諦偈로서 알려진 『中論』의 「여러 因緣으로 생긴 法, 이것을 나는 空이라고 說한다. 또한 이것을 假名이라 하고, 또한 이것은 中道의 意味이다」라는125) 內容과도 同一한 內容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因緣에 의해 生起하지 않고 因緣과 無關係하게 獨立하여 存在하고 있는 것에 대해 龍樹는 이것을 自性의 問題로서 「만약 自性을 갖고서 어떤 存在가 存在하고 있다면, 因과 緣이 없어도 存在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論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것 스스로 成立하는 것은 다른 것에 依支하지않는다'라는 말과 동일한 內容이며, 因緣에 依支하지 않고 成立하고 있은 것을 自性의 구체적인 內容으로서 표명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自性에 대해서 「自性을 지니고 있는 것은 緣起된 것이 아닌 것이고, 因이 없는 것이며, 常住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因이 없는 것은 常住하는 것이기 때문에」126)라고 말하고 있고, 또 「因이 實在하지 않을 때에는 生住滅이 없어져 버리고, 生住滅이 없을 때에는 有爲의 相이 없는 것이 되므로 모든 有爲가 無爲가 되어버린다」127)라고 말하고 있다. 즉 自性은 因緣에 의하지 않고 독립하며, 그 스스로 完結된 것이고, 常住하는 것인데 비하여, 空은 無自性이고, 因緣에 의해 生起 되어 無常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128)

사실 空이란 이 말은 주의 깊게 선택된 말로서 "空虛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色"을 "空"과 同一視하는 관점은 色의 상태에 관한 어떤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며, 결코 色이 存在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空"을 "色"과 동일시하는 것도 이러한 가르침이 결코 虛無主義的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虛無主義에 대한 治癒法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129)

『菩薩瓔珞經』을 빌려서 龍樹는 말하기를, "문법학자들이 우리에게 文法을 읽어서 알 수 있게 해주듯이, 如來는 제자들의 根器에 맞추어 法을 說하신다. 如來께서는 法을 說하시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공덕을 쌓도록 하시며, 또 어떤 이에게는 二元論에 依支하게 하시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 二元論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신다. 그러나 마침내 어떤 사람들에게는 如來께서 심오하고 경외심을 일으키며, 그 본질이 慈悲와 空인 깨달음을 修行할 것을 가르치신다."130)

실제로 空은 어떤 실체가 아니다.131) 『般若波羅蜜經』과 『中論』은 諸形態의 一元論을 거부한다, 이들 經論들은 諸法은 存在하지 않는다고 主張할뿐만 아니라 또한 非存在를 實體化하는 것도 거부한다.

『中論』에서는 空性을 강을 건너고 난 뒤에 버리는 뗏목(kaula)에 비유하고, 病을 치료한 뒤에 버리는 藥에 비유하고, 잘 다루어야 되는 財寶를 지니고 있는 뱀(alagarda)에 비유하며, 정확히 발음해야 되는 呪文(vidy )에 비유하고 있다.

『維摩經』에서도 空을 實體化하기를 거부하며, 經驗에 대한 근거를 無明이외의 다른 것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132) 모든 생각(想)은 空性으로서 비어 있다. 생각(想)은 곧 空이다. 그러므로 空은 空을 생각할 수 없다. 空은 62種類의 邪見속에 있고, 그러한 邪見들은 諸佛의 解脫 속에 있고, 諸佛의 解脫은 一切衆生의 최초의 생각이 활동하는 가운데서 발견된다.

以上의 空에 대한 見解는 E. Lamotte의 『維摩經』 Chapter Ⅳ§8. Universal Emptiness에서 文殊師利와 維摩居士간의 對話속에 表出되어 있다.

 

[모든 것은 空하다]

 

文殊師利가 물었다.

①"居士시여, 그대의 집은 이렇게 텅 비어있고, 시자(侍者)도 없습니까?"

   維摩가 대답하였다.

  "文殊菩薩이시여, 모든 부처님의 國土가 역시 다 空합니다"

②"무엇을 空하다 하는 것입니까? "

  "空을 空하다 하는 것입니다."

③"어째서 空이 空한 것입니까? "

  "分別함이 없는 空이므로 空한 것입니다"

④"空은 分別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

  "分別하는 일, 그것도 역시 空합니다"

⑤"그 空을 어디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까? "

  "62見 中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⑥"62見은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

  "모든 부처님들께서 解脫하신 그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⑦"모든 부처님들의 解脫은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

  "一切 衆生의 최초의 마음가짐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⑧"또한 그대가 왜 侍者도 없느냐고 물었지만, 나에게는 모든 마구니와

   모든 外道가 다 나의 시자(侍者)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마구니는 生死

   를 좋아하지요. 그런데 菩薩은 生死를 버리지 않거든요

   또 外道들은 갖가지 主義·主張(見解)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菩薩은 이런 온갖 見解에도 不動하기 때문이요."  

 위위의

위의 問答에서 維摩詰은 常見과 斷見 및 이 두 가지 그릇된 見解에서 생겨나는 一切의 邪見(62見)을 空觀으로써 타파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空이라는 생각, 그것이 法界라든가 法性이라든가 또는 眞如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것으로서 空을 實體化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維摩經』에 나타난 이러한 空觀이야말로 순수한 形態의 『中論』의 思想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133)

이와 관련하여 『維摩經』은 諸法의 非存在性을 每章마다 빈번히 되풀이하고 있다. 우선 肉身의 덧없음을 나타낸 『維摩經』의 十喩를 中心으로 하여 살펴보자.

 

長者 維摩詰은 이와 같은 한량없는 方便들을 가지고 모든 중생들을 饒益하게 하였다. 그는 특별한 方便으로 몸에 병이 있음을 보였다. 그가 病이 있음으로 인하여 國王·大臣·長者·居士·婆羅門과 王子와 그 나머지 官屬들, 셀 수 없는 천백의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問病을 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問病하러 찾아온 사람들에게 維摩詰은 몸의 병에 대하여 널리 說法하기를, "여러 仁者들이여, 이 몸은 덧없고 힘이 없어 堅固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빨리 썩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니 참으로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 몸은 고통이 되고 煩惱가 되며, 모든 病이 모이는 곳입니다. 仁者들이여, 이와 같은 몸을 智慧가 밝은 분들은 믿고 의지하지 않습니다."134)

 

問病하러 온 사람들은 대개 '몸이 중요하니 잘 보살피라'고 말한다. 이처럼 문병하러 온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維摩詰 居士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饒益을 받은 대상이 많음을 나타낸다.

問病하러 온 사람들이 몸을 중요시 한데 대해서 維摩詰은 그와는 반대로 이 몸은 덧없고 힘이 없으며 견고하지 못하여 빨리 썩어버리는 것이니 믿고 의지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의 몸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번뇌에 시달리며 온갖 병이 모이는 것이므로 지혜가 밝은 이들은 이러한 몸을 믿고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의 몸을 고통의 근본으로 본 것은 維摩詰의 높은 所見이라 할 수 있다.

佛敎에서는 우리의 몸으로 인하여 四苦八苦와 아홉 가지의 煩惱가 있다고 가르친다. 이와 같은 몸에 대한 見解는 佛敎的 人生觀의 核心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人間의 身體가 飛沫과 같다고 한 比喩와 함께 人間의 身體는 空하며 無常한 것임을 說하기 위한 열 가지 比喩, 즉 「十種喩身」이 뒤이어 나오는데 羅什 譯本에는 「聚沫」·「泡」·「炎」·「芭蕉」·「幻」·「夢」·「影」·「響」·「浮雲」·「電」의 열 가지가 列擧되어 있다.

 

① 이 몸은 聚沫과 같아서 만져 잡을 수가 없으며

② 이 몸은 물거품과 같아서 오래 있을 수가 없으며

③ 이 몸은 아지랑이와 같아서 渴愛로 좇아 생긴 것이며

④ 이 몸은 芭蕉와 같아서 그 속이 견고치 못하며

⑤ 이 몸은 幻과 같아서 迷惑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며

⑥ 이 몸은 꿈과 같아서 허망한 것이 진실인양 보이는 것이며

⑦ 이 몸은 그림자와 같아서 業緣으로 좇아 나타난 것이며

⑧ 이 몸은 메아리와 같아서 여러 가지 인연에 속한 것이며

⑨ 이 몸은 뜬구름과 같아서 잠깐사이에 변하여 없어지는 것이며

⑩ 이 몸은 번개와 같아서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 것이다.

 

위의 글은 比喩를 들어서 이 몸이 無常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예로부터 「維摩經의 十喩」라 하여 높이 평가되어 왔다. 이 몸은 '聚沫과 같다', '물거품과 같다', '아지랑이와 같다', '芭蕉와 같다', '幻과 같다' 라고 말한 다섯가지 비유는 我가 空한 것임을 밝힌 것이며, 다음에 든 나머지 다섯 가지의 비유는 '나의 소유' 즉 我所가 空함을 밝힌 것이다. 이어서 維摩詰이 역시 比喩를 들어 問病온 사람들에게 이 몸이 我가 없음을 밝히는 내용을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이 몸은 땅[地]과 같아서 實體로서의 主體가 없으며, 이 몸은 불[火]과 같아서 自我가 없으며, 이 몸은 바람[風]과 같아서 生命으로서의 個體[壽]가 없고, 이 몸은 물[水]과 같아서 實體로서의 個我[人]가 없습니다. 이 몸은 영원히 변치않는 實體가 아니라 四大로 되어있어 이를 집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몸은 自我와 自我에 소속하는것[我所]을 여읜 것이어서 空한 것입니다. 이 몸은 풀과 나무와 기와와 조약돌과 같아서 無知합니다. 이 몸은 지음이 없으므로[無作] 바람의 힘에 따라 인연따라 굴려집니다. 이 몸은 깨끗하지 아니하여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거짓인 것입니다. 비록 목욕을 시키고 옷을 입히고 밥을 먹여 기르더라도 결국 마멸되고 말 것이며, 이 몸은 災殃투성이어서 백한가지의 병에 시달리며, 이 몸은 낡은 언덕의 우물[丘井]과 같아서 늙음의 핍박을 받으며, 이 몸은 덧없어서 반드시 죽고 마는 것이며, 이 몸은 독사와 같고 원수와 같고 도적과 같고 빈 마을과 같으니, 五陰과 十八界와 十二入등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비유는 땅·물·불·바람[地水火風]의 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이 '無我'임을 밝힌 것이다. 즉 이 몸은 四大에 의하여 생긴 것인데, 우리 인간 밖의 四大가 이미 主體가 없고 我가 없고 壽命이 없고 사람됨이 없듯이 이 몸도 역시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여러 仁者들이여, 이 몸은 싫어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佛身을 좋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의 몸은 곧 法身이어서 한량없는 功德과 智慧로 좇아 생긴 것이며, 戒·定·慧와 解脫과 解脫知見으로 좇아 생긴 것이며, 慈·悲·喜·捨로 좇아 생긴 것이며, 布施·持戒·忍辱柔和·勤行精進·禪定解脫三昧·多聞智慧등의 六波羅蜜로 좇아 생긴 것이며, 方便을 좇아 생긴 것이며, 六神通으로 좇아 생긴 것이며, 三明으로 좇아 생긴 것이며, 三十七道品으로 생긴 것이며, 止觀으로 좇아 생긴 것이며, 十力·四無所畏·十八不共法으로 좇아 생긴 것이며, 一切不善法을 끊어버리고, 一切善法을 모아 이룸으로써 생기는 것이며, 眞實로부터 생기는 것이요, 放逸하지 않아야 생기는 것이며, 이와 같은 無量한 淸淨法으로부터 如來의 몸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 仁者들이여, 佛身을 얻어서 一切衆生의 病을 끊어 없애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阿 多羅三 三菩提心을 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長者 維摩詰은 문병하러온 사람들을 위하여 알맞는 說法을 하시어 헤아릴 수 없는 수천의 사람들에게 阿 多羅三 三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135)

 

위에서 살펴본 『維摩經』 方便品 第二의 核心은 무엇인가? 이 몸은 無常하고 無我이며,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싫어할 존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몸을 좋아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부처님의 몸(佛身)'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佛敎의 人生觀과 維摩詰居士의 진실된 禪觀이 나타나 있다고 論者는 생각한다.

그러면 佛身이란 무엇인가? 이는 곧 法身을 말한다. 宇宙의 眞理를 人格化한 것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萬有의 本體를 '法身'이라고 하며, 아미타불과 같이 한량없는 願과 行의 果報로 나타난 萬德이 원만한 佛身을 '報身'이라고 하며, 報身을 이룬 뒤에 法身의 眞理를 널리 衆生에게 보이기 위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應身'으로 볼 수 있다.

應身에는 生과 死가 있지만, 法身에는 生도 없고 死도 없다. 그러므로 維摩詰은 大乘을 선양하려는 뜻에서 生死가 있는 '이 몸을 싫어해야 할 存在로 보고, 生도 없고 死도 없는 法身을 좋아해야 한다'고 說法했던 것이다. 이러한 佛身은 '한량없는 功德과 智慧로 좇아 생겼다' 함은 戒·定·慧 三學으로부터 내지 放逸하지 않는 여러 가지 원인들과 온갖 善行이 모두 法身의 因이 됨을 말한 것이다. 功德과 智慧는 온갖 善行의 첫문이요, 涅槃에 들어가는 관문이므로 처음 밝혔으며, 다음으로 五分法身과 四無量心과 六波羅蜜과 三明·六通·三十七道品·止觀·十力·四無所畏·十八不共法등 한량없는 淸淨法의 證得과 實踐을 통하여 佛身을 이루게 됨을 說하신 것이다.

따라서 佛身을 얻어서 一切衆生의 心身의 온갖 질병을 끊어 없애고자 하는 大乘의 菩薩은 마땅히 阿 多羅三 三菩提心을 일으켜 無上正等正覺을 成就하려는 큰 願을 세우고 不斷히 精進해야 함을 力說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方便品 第二에 나오는 '禪定'은 흔히 四禪을 일컫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요컨대 우리 몸은 無常하고 無我이며 實體가 없는 空한 것이므로 이 몸에 집착하여 貪·瞋·癡의 三毒에 빠져 어리석은 삶으로 虛送歲月할 일이 아니라, 眞理의 法身을 부단히 추구하는 동시에 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는 大乘佛敎의 精神을 되찾아 실천할 것을 維摩詰居士는 오늘의 韓國佛敎徒들에게 또한 온 인류에게 외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以上에서 살펴본 것처럼, 肉身의 無常함을 밝힌 것 이외에도, 諸法의 空함을 밝혀놓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法은 本性이 없다(Ⅲ,§6). 六境은 實體를 갖고 있지 않다(Ⅲ,§12). 諸法의 本性은 幻化相과 같다(Ⅲ,§19). 五蘊은 自性이 空하다(Ⅲ,§26). 마음(心)은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그 둘 사이에 存在하는것도 아니다(Ⅲ,§34). 諸法은 想像에서 빚어진 그릇된 妄想이다(Ⅲ,§35). 菩提樹處(bodhima a)는 一切法의 자리이다. 왜냐하면 菩提樹處(覺)는 諸法의 空性에 비추어서 오로지 완전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Ⅲ,§59). 蘊(skandha)은 殺生者와 같고, 계(dh tu)는 毒蛇와 같고, 處( yatana)는 텅빈 마을과 같다(Ⅲ,§64). 法에 대한 觀念은 事物에 대한 왜곡인 것이다(Ⅳ,§12). 法을 찾는자는 蘊·界·處를 찾지 않는다(Ⅴ,§2). 諸法은 根없는 곳에 依據한다(Ⅳ,§6). 諸法은 非實際的이며, 幻影에의해 만들어진 性質의 것이다(Ⅳ,§14). 五取縕은 本質的으로 원래 空하다(Ⅷ,§17). 諸法은 空하고, 헛되며, 無價値하고, 相互依存的이며, 住함이 없다(Ⅹ,§18).136)

 

요컨대 釋尊께서는 우리 衆生들을 涅槃으로 引導하는 길(m rga), 즉 中道(madhyam  pratipad)를 가르쳐 보여주셨던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維摩經』은 그 成立年代가 비교적 최초기에 속하며, 이 經이 발전시킨 理論들만큼이나 그 不思議한 靈感을 根據로 삼았던 까닭으로 보아서 가장 오래된 大乘經典 中의 하나로 생각되고 있다. 『維摩經』은 『般若經』이나 『華嚴經』등과 같이 龍樹學派의 토대가 되는 初期 形態의 『中論』思想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①諸法은 無自性이며, 自性은 空한 것이다. ②諸法은 無生하고 無滅한다. 自性이 空한 諸法은 生成도 없고 消滅도 없다. 왜냐하면 空한 事物에서 생기는 空한 事物은 실제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空한 事物들은 생기지 않으므로 消滅함도 없다. 따라서 緣起하는 諸現象의 生成은 非生成이다. ③諸法은 本來 寂靜하며, 그 本性이 涅槃되어 있다. 無生이므로 諸法은 처음부터 그 성질상 寂靜하며 寂滅되어 있다. 요컨대 小乘에서는 "事物의 存在樣式"인 眞如는 緣起였다. 이에 반하여 『中論』에서 眞如는 空( nyat )이다. 이와 同一한 主題가 『維摩經』에 의해서도 명확히 서술되어 있다. 輪廻와 涅槃은 흔히 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涅槃의 自性을 원래 空한 것으로 보신 菩薩들은 輪廻하지도 않고 涅槃에 들지도 않는다. 이것이 入不二이다(『維摩經』 Ⅷ,§13). 涅槃에 들어서 즐거워함이 없고, 輪廻에 대해서도 厭惡함이 없는 것이 不二를 구성한다(Ⅷ,§29). ④諸法은 無相이므로 그 결과 不可說이요, 또한 不可思議이다. 諸法은 非存在이므로 相이 없다. 諸法에 관하여 말할 수 없으며, 만일 말을 한다면, 오직 世俗諦(sa v ti)에 의해서 일 뿐이다. 諸法을 認識하려면, 諸法에 관하여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維摩經』도 이와 같은 見解를 보여준다. 一切의 觀念이 滅한 것이 入不二이다(Ⅷ,§3). ⑤諸法은 平等하고 不二이다. 空하고 非存在이므로 諸法은 平等하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不二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共通的인 非存在를 구성하고 있는 이러한 不二는 어떠한 종류의 一元論도 내포하지 않는다. 『維摩經』의 第8品(漢譯本은 第9品)은 전체가 不二性에 할애되고 있다. 32菩薩이 차례로 外樣的인 二律背反의 간격을 메꾸고, 不二性(advaya)을 主張하기 위해 發言한다. ⑥ 空은 어떤 實體가 아니다. 『維摩經』에서도 空을 實體化하기를 거부하고, 경험에 대한 근거를 無明이외의 다른 것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요컨대 一切는 客觀的인 他의 因緣에 의해 生起하는 相對的인 觀念으로 여기며, 我라는 觀念을 否定하는데 철저한 동시에 그러한 否定속에서는 我도 無我도 없으며, 一切의 固定觀念을 否定한 絶對的인 眞實을 추구하는 것이 佛敎의 立場이며, 이것이 世尊의 中道일 것이다.

그렇다면 『維摩經』에서 說하는 中道는 과연 어떤 것일까? 만일 「入不二法門品」이 「理」를 說하고 있다면, 「香積佛品」은 「事」를 記述했다고 理解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維摩經』은 그 이름과 같이 「維摩의 經」인데 大乘佛敎의 一般性에서 보면 그 實質은 오히려 「文殊의 經」인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미 維摩의 「現疾」도 文殊의 「問疾」을 보지 않고서는 그 眞義를 밝힐 수가 없다. 그러한 사실은 「入不二法門品」에 이르러 가장 명료하며, 31명의 菩薩이 각자의 所得을 述懷한 뒤에, "文殊師利님, 당신의 入不二法門은 어떤 것입니까?"하고 묻자, "내 생각 같아서는 一切法에 대하여 無言無說하며, 가리키는 일도 없고, 認識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질문과 대답을 떠나는 것이 入不二法門이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文殊師利가 維摩詰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자가 나름대로 다 說했습니다. 居士님, 당신이 說할 차례요. 무엇을 菩薩의 入不二法門이라 하겠소?" 그때에 維摩詰이 默然히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文殊師利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과연 옳습니다! 과연 옳아요! 文字와 말과 說明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없는 것이 진짜 入不二法門입니다"라고 찬탄하였다. 137)

註釋家는 이 최후의 한 문장이 있음에 의해서 文殊에게 維摩를 超出하는 바가 있다고 評하고 있는데, 그러한 見解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優劣이 없는 점이 오히려 不二의 眞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138) 

이제 『維摩經』의 香積佛品 第十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그때에 維摩詰이 곧 三昧에 드시고 神通力으로써 여러 대중에게 (한 부처님의 나라를) 보여 주었다. 上方으로 42항하사 불국토를 지나 衆香國이란 나라가 있고, 거기에 香積이라는 부처님이 계시는데, 지금 현재 그 나라의 향기는 十方의 諸佛世界의 人天의 향기에 비해 가장 뛰어난 향기를 뿜고 있고, 그 佛國土에는 聲聞이나  支佛의 이름이 없고, 오직 淸淨한 大菩薩들만 있는데, 香積부처님이 그들을 위해 說法하신다.139) 

 

위의 經文은 衆香國의 香積佛이 香飯을 수단으로써 敎化함에 비하여, 釋迦如來의 娑婆世界가 새삼스럽게 言說을 사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世界의 衆生을 敎化함이 容易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維摩의 一流의 逆說로 理解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僧肇는 말하기를,

 

"앉을 자리를 베풀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손님을 맞이하는 主人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사리불이 손님으로 와서 먼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첫째로 사리불은 그때 모임의 우두머리였으므로 대중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게 된 것이요, 둘째로 이 經의 구성이 小乘의 이념에 충실한 사리불의 생각보다 大乘의 理念을 갖춘 維摩詰의 思想 즉 出家本位의 佛敎에서 大衆本位의 佛敎로 확산하려는 思想이 優位임을 나타내는 구상을 表出한 것이다."라고 하였다.140) 

 

以上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維摩經』의 思想的 立場은 大乘佛敎一般과 마찬가지로 般若思想에 근거하는 中道的 世界觀에 있음이 분명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禪家에서는 中道를 어떻게 說明하고 있을까?

 

" 어떤 것이 中道입니까? "

" 中間도 없고, 또한 二邊도 없음이 곧 中道이니라 "

" 어떤 것이 二邊입니까? "

"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음이 二邊이니라. "

" 어떤 것을 저 마음, 이 마음이라고 합니까? "

" 밖으로 色과 소리에 얽매임을 저 마음이라 하며, 안으로 妄念이 일어나      는 것을 이 마음이라 하느니라. 만약 밖으로 色에 물들지 아니하면, 곧       저 마음이 없음이요, 안으로 妄念이 나지 아니하면 곧 이 마음이 없음이      니, 이것은 二邊이 없는 것이니라. 마음에 이미 二邊이 없음이니 中間이      어찌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음을 얻는 것을 곧 中道라 하는 것이니 참된      如來의 道이니라. 如來의 道란 곧 一切에 깨친 사람의 解脫이니, 經에        이르기를 '虛空에 가운데와 가장자리가 없으니, 모든 如來의 몸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느니라. 그리하여 一切色이 空한 것은 곧 一切處에 無心      함이요. 一切處에 無心함은 곧 一切色의 性品이 空함이니, 두 가지 뜻이      다르지 아니하여 이것을 또한 色이 空함이라 하며, 또한 色이 法이 없음      이라 하느니라. 너희가 만약 一切處에 無心함을 떠나서 菩提·解脫과 涅      槃·寂滅과 禪定·見性을 얻는다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一切處에 無心      함이란 곧 菩提·解脫과 涅槃·寂滅과 禪定 내지 六波羅蜜을 닦음이니,      모두 性品을 보는 곳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金剛經』에 이르기를 '조그      마한 法도 얻을 수 없음을 阿 多羅三 三菩提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느      니라.141)   

위에서 考察한 바와 같이 禪家의 中道는 '內外의 二邊을 떠나서 一切處에 無心함'을 밝히고 있으며, 그러한 中道의 無心을 維持하는 가운데 菩提·解脫·涅槃·寂滅·禪定을 닦으며 동시에 六波羅蜜을 修行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으니, 馬祖의 '平常心是道'에 根據하여 生活이 곧 道임을 밝힌 禪家의 中道야 말로 진정한 修行의 道라고 論者는 생각하고 있다.

 

2) 緣起思想

 

(1) 緣起의 意義 

緣起의 原語는 Sanskrit語로는 prat tya-samutp da  혹은 P li語로는 pa icca- samupp da이다. 그러나 西洋에는 이에 해당하는 적절한 譯語가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緣起를 表現할때,  chain of causation· formula of causal origin· causal laws·causal genesis·dependent origination·conditioned or conditional origination 等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각각의 번역을 嚴密히 檢討해 보면 모두 基礎的인 動的 內容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첫째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으로서 이 原語는 prat tya와  samutp da의 二語를 連結하고 있고 前者는 後者에 대한 形容詞이다. 月稱(Candrak rti)142)에 의하면 prat tya라는 말은 「相待하다」의 意味로 解釋하고 있다. 그래서 諸法이 '因과 緣으로 相待'하며 生起하는 것이 緣起의 뜻이다.143)

緣起는 보통 12支로 나뉘어지지만, 그 數가 반드시 固定되어 있지 않고, 佛敎經典에는 1支에서 12支까지 여러 가지 說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전형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原始經典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支緣起의 敎說이다.

 

比丘들이여, 緣起(pa iccasamupp da)란 무엇인가? 比丘들이여, 生에 緣하여 老死가 있다. 如來가 世上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이 界(dh tu, 法界, 法性)는 정해져 있다. 이 緣起性은 眞理로서의 常住性(dhamma- hitit )이며, 眞理로서의 決定性(dhamma-niy mat )이다.144)

 

위의 支緣起의 敎說에서 이른바 '緣起性'(idappaccayat )은 '相依性'으로 번역되고 있다.145) 그러므로 緣起란 '生'이라는 緣에 緣해서 '老死'라는 果(phala)가 生起하는 것(samutp da), 혹은 '有'라는 緣에 緣해서 '生'이라는 果가 生起하는 것, 내지 '無明'이라는 緣에 緣해서 '行'이라는 果가 生起하는 것을 意味한다. 즉 緣起란 果가 '緣에 緣해서 生起하는 것'(pratyaya-prat tya-samutp da)이다. 그러나 緣은 또한 因(hetu)이다. 그러므로 緣起는 다시 果가 '因緣에 緣해서 生起하는 것'(hetupratyaya-prat tya-samutp da)이라고도 할 수 있다.146) 또는 '모든 存在의 生起는 因緣에 觀待한다'(hetu-pratyaya-apek o bh van m utp da )라고도 할 수 있다.147) 緣起가 통상 因緣生起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果가 '因緣에 緣해서 生起한다'라고 하는 경우에 因을 직접원인, 緣을 간접원인이라고 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種子에서 싹이 나올 때에 種子는 싹의 직접원인이지만, 간접원인이 되는 것으로 물·흙·햇빛등 각종의 조건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싹은 직접적인 種子라는 因과 간접적인 여러 가지 緣에 緣해서 生起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大乘稻芽經』과 『入楞伽經』에 의하면, 十二支緣起와 같이 有情에 관한 緣起를 '內緣起'라 하고, 種子에서 싹이 生하는 것과 같은 一切法에 관한 緣起를 '外緣起'라고 說하고 있지만, 그 어느 쪽이든지 果가 '因緣에 緣해서 生起한다'라고 하는 理論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緣起는 항상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型으로 표현된다.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저것이 生하므로 이것이 生한다.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저것이 滅하므로 이것이 滅한다.148)

 

支緣起의 敎說에서 말하면, 이 공식의 前半은 '無明에 緣해서 行이 있고····내지 ····生에 緣해서 老死가 있다'라는 緣起의 生起를 보이고, 後半은 '無明의 滅로부터  行이 滅하고····내지····生의 滅로부터 老死가 滅한다'라는 緣起의 止滅을 보이고 있다. 月稱(Candrak rti)은 『中論』 第1章 第10偈에 대한 주석에서 '저것이라고 하는 因性', '이것이라고 하는 果性'이라고 說하고 있다.149)

그러므로 緣起의 공식에서 '저것'은 원인이고 '이것'은 결과이다. 이와같이 考察해 볼 때, 緣起性은 '원인이 있을 때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을 때 결과가 없다'는 因果法則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龍樹에 의하면, 緣起는 無常·無我·空·中道의 意味이며,150) 이러한 의미하에서 龍樹의 中觀思想이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考察에 의해 緣起說은 '원인이 있을 때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을 때 결과가 없다'라는 因果律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며, '存在의 無常性'을 말하는 학설임이 분명하게 되었다. 우선 싹(芽)의 경우를 말하면, 싹은 種子로부터 生하며, 種子가 없으면 生할 수 없다. 직접적인 원인인 種子만이 아니라, 햇빛·수분·흙등 많은 간접적인 원인인 '緣'도 結果인 싹의 生成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들 인연이 화합하는 곳에서 싹이 成立하는 것이다. 따라서 싹은 그 存在를 原因인 種子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싹은 原因인 種子에서 야기되는 것이며, 他者인 원인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기 스스로 生하는 것이 아니다. 저것(種子·햇빛등의 原因)이 없을 때, 이것(싹)은 있을 수 없다. 싹은 種子나 햇빛·흙·물 등 여러 가지 原因에 의해 지배되며, 固定된 常住性을 갖지 못한다. 즉 싹은 無常한 存在하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도자기(甁)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자기는 흙·물·도공의 노력등의 原因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도자기는 그러한 原因들에 依存하는 存在이지 자기스스로 生하는 獨立 自存의 存在가 아니다. 도자기는 그러한 原因들의 사정여하에 지배되는 無常한 存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인이 있을 때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을 때 결과가 없다'라고 하는 소위 '因緣에 의해서 果가 生起한다'라고 하는 緣起說은 이처럼 싹이나 陶瓷器등 일체의 存在가 原因에 依存하고 지배되는 無常한 存在이며 結果임을 말하는 學說이라고 여겨진다.151)

一切는 獨立性이 없는 相對的인 假像이며 空이다. 一切가 緣起하는 것이며, 無常·無我·變易의 法이란 이와같은 意味일 것이다. 우리의 主觀的인 觀念도 客觀的인 原因에  依存하여  生起한다고 하는  緣起의 理致는  中部(Majjhima-nik ya)의 『愛盡大經』(Mah ta h sa -khaya-sutta)에도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比丘들이여, 각각의 緣에 緣해서 識이 生할 때에 識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즉 眼과 色에 緣해서 識이 生할 때에 眼識이라는 명칭을 얻게되며, 내지 意와 法에 緣해서 識이 生할 때에 意識이라는 명칭을 얻게된다. 비구들이여, 각각의 緣에 緣해서 불이 탈 때에 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됨도 이와 같다. 즉 섶(薪)에 緣해서 불이 탈 때, 섶불(薪火)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고, 나무에 緣해서 불이 탈 때, 나뭇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며, 풀에 연해서 불이 탈 때, 풀불(草火)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고, 왕겨에 緣해서 불이 탈 때, 왕겨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며, 티끌에 緣해서 불이 탈 때, 티끌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152) 

 

위의 經典에서도 '명칭을 얻게 된다'(sa kha  gacchati)라는 文字가 쓰이고 있으며, 특히 이 經典에서는 섶·나무·풀 등의 차별에 따라서 섶불·나뭇불·풀불 등의 차별을 초래하고 있듯이, 客觀的인 原因의 차별에 의해서 主觀의 觀念에 차별을 초래하고 있음이 제시되고 있으며, 主觀의 觀念은 客觀的 原因에 依存한다고 하는 緣起說의 意味가 잘 드러나고 있다. 위의 經典은 識이 自己同一性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常住하는 輪廻의 主體가 아님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데, 불이 연료에 의존하는 相對的인 觀念(sa kh  , 명칭)이듯이, 識은 根과 境에 의존하는 상대적인 觀念으로서, 常住하는 것으로 고집되는 그러한 絶對的인 獨立自存의 存在가 아닌 것이다. 즉 우리의 主觀的인 觀念은 客觀的인 原因에 依存해서 生起하는 것이다.

또한 雜阿含의 이른바 『無我相經』에 의하면, 주관적인 고집이나 집착의 원인이 되는 客觀的인 모든 요소인 五蘊도 無我인 것으로 說해지고 있다.

 

比丘들이여, 色(受想行識)은 無我다. 比丘들이여, 만약 色이 我라면, 이 色은 병들지 않을 것이다. 또 色에 대해서 '우리의 色은 이와같이 있고, 우리의 色은 이와같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比丘들이여, 色은 無常하기 때문에 병들게 된다. 또 色에 대해서 '우리의 色은 이와 같이 있고, 우리의 色은 이와같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153)

 

위의 『無我相經』은 五蘊이 實體的으로 고집·집착되지 않는 無我·無實體인 存在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以上에서 考察한 緣起는 곧 無我라는 理致에 의해 이해하게 되면, 色 등 五蘊도 역시 客觀的인 實在的 諸要素(因緣)에 依支하여 施設된 獨立自存性이 없는 觀念이며, 無我無實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以上에서 考察한 것처럼 佛陀는 緣起·無我의 敎說에 의해서 우리들의 모든 自我的인 고집의 觀念을 空한 것으로 否定한다. 佛陀께서는 '我도 我所도 空하기 때문에 世間은 空하다(S.N.,Ⅳ, p.54.)'라고 說하신 것이다.154)

 

(2) 緣起의 位相

 

① 甚深難解의 法

阿難은 佛法에 歸依하여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 에서 오랫동안 侍奉하면서도 緣起法의 깊은 뜻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大緣經』에 나타난 阿難과 世尊의 對話를 살펴보면,

 

"世尊이시여, 緣起란 깊은 것이며, 깊은 곳에서 빛난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눈앞의 것처럼 보입니다."

"阿難아, 그런 말 하지말아라. 緣起는 깊은 것이고, 깊은 곳에서 빛나니라. 阿難아, 사람들은 이 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엉킨 실타래 같이, 종기로 뒤덮힌 듯이, 문자풀이나 바바자풀이 꼬인 것 같이 苦處·惡趣·墮處로의 輪廻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라."155) 

 

라고 되어 있다. 이 對話는 緣起法의 甚深함과 더불어 生死輪廻의 原因과 過程이 緣起法과의 관련하에 說해지고 있으므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런데 輪廻와의 관련은 잠시 미루어 두고, 緣起甚深의 선언에 주목해 보면 緣起法의 位相을 잘 理解 할 수 있다.

이러한 緣起 甚深難解의 선언은 『大緣方便經』의 한 句節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若欲思量觀察分別其義者. 則皆荒迷無能見者." 156) 

 

緣起의 뜻을 思量觀察하고 分別하려 한다면, 즉시 모두 荒迷해져 그 뜻을 능히  이해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 句節은 緣起法의 不可思議함을 內含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不可思議한 緣起法은 단순한 思索에 해당하는 思量이나 觀察 또는 分別로써 證得 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직 깨달음과 꿰뚫음으로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157) 이처럼 甚深難解하고 不可思議한 緣起法은 오로지 『維摩經』과 『般若經』 그리고 『中論』에서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빛을 발하는 淸淨心' 즉 '心非心'(cittam acittam, Non-mind Mind, Non-thought Thought)에 의해서만 證得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② 空性相應의 法

緣起의 甚深難解함은 그것이 空性에 相應하는 데서도 살펴 볼 수 있다. 緣起 자체가 일반적으로 空性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을 다음과 같은 初期經典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修行僧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如來가 說하신 모든 經典은 심오하고 뜻이 깊고 出世間的이며, 空과 相應하는 것이므로, 그것들을 說할 때에 우리는 잘 듣고 귀를 기울이고 슬기로운 마음을 내고 파악되어야 하고 통달되어야 할 이 法에 관해 思惟하리라'하면서…."158) 

 

如來가 說한 모든 가르침은 그의 깨달음인 緣起說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空과 相應하는 것, 즉 空相應性이라는 것은 곧 緣起의 속성을 지칭하는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初期經典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포말(泡沫), 물거품(水泡), 아지랑이(陽炎), 파초(芭蕉), 환영(幻影)등은 無所有, 無實體, 空虛 등으로 定義되는 데, 그러한 定義는 緣生的 存在 즉 色과 精神의 存在要素(五蘊)의 空性(suat )을 두고 하는 말이다.

, "물질(色)은 포말과 같고, 감수(受)는 물거품과 같고, 知覺(想)은 아지랑이와 같고, 形成(行)은 芭蕉와 같고, 意識(識)은 환영과 같다."(phe api pamam r pam,  vedan  bubbu pam ,  mar cik pam  saa.  sa kh r  kadal pam , m y pamaca vi am)159) 라고 說하고 있다.

렇다고 하여 空性(suat )의 哲學은 단지 無를 說하여 存在를 否定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存在하고 있는 것은 단지 허구적 假의 存在이다. 즉, 因緣에 의해 存在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緣生的 存在의 因果的 連續性도 역시 空性으로 定義되고 있다. 즉, "이것(五蘊)의 相續도 이와 같다. 이것은 幻影이며, 愚說이며, 살인자(또는 腫氣)라고 불리며, 여기에 實體는 없다."(etadisayam santano mayayam balapini. vadhako eso akkhato saro ettha na vijjati)160) 라고 說하고 있다. 여기서 相續이라고 表現된 因果的 連續性은 緣生뿐만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緣起 자체의 空性을 잘 대변하는 것이다.161)

 

③ 正覺成道의 法

甚深難見이며 空性相應하는 緣起法은 바로 佛陀께서 正覺하여 成道하신 그 內容임이 說해져 있다. 相應尼柯耶(Sa yutta-nik ya)와 雜阿含 및 增一阿含162)등에는 正覺을 아직 얻지 못한 菩薩이 緣起法을 觀함으로 인하여 眼·智·慧·明·光이 生하는 동시에 正覺成道 했다는 취지의 有名한 經들이 說해져 있다. 또한 부처님의 成道는 降魔成道라고 불리고 있는데, 魔에 대하여 緣起法이 결정적인 對治의 功能이 있음을 암시하는 經說들이 보인다

 

내가 처음 佛道를 이루었을 때, 12因緣을 깊이 思惟했기 때문에, 악마의 권속들을 항복 받고, 無明을 없애어 智慧의 밝음을 얻어 온갖 어두움이 아주 없어지고, 티끌과 때가 없어졌느니라. 그리고 나의 아난다야, 나는 四聖諦를 세 번 說明하고, 이 12因緣法을 말하여 곧 道를 깨닫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서도 12因緣法은 매우 깊고 깊은 것으로서 보통 사람이 능히 밝혀 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아난다야, 매우 깊은 이 12因緣法을 생각하여 받들어 가지고 그와 같이 공부하며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아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行하였다. 163)

 

以上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緣起法 특히 12緣起說이 부처님께서 成道하신 구체적인 內容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緣起法은 十力, 四無所畏를 成就한 如來의 獅子吼164)로도 說해지고, 成道의 如實知見165)의 法으로도 說해지며, 如性(tathat )·不離如性·不異如性166)의 法으로도 說해진다.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十二緣起를 菩提(Bodhi)로 言表하고 自利利他의 法으로 선언하고 있는 經說이 바로 그것이다.

 

"我今於此世.作佛如來…………說法寂滅 涅槃 菩提正向善逝等正覺.

所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緣行識.乃至純大苦聚集.

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當如是學.自利利他自他俱利."167) 

 

緣起法이 空性과 相應함도 다분히 大乘的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위의 經說은 더욱 더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즉, 上求菩提·下化衆生의 大乘的 旗幟가 緣起法을 깨닫고 배우는 데서 說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緣起法은 初期佛敎의 어떤 敎說도 미칠 수 없는 가장 심오하고 고유한 位相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緣起法이야 말로 諸敎說을 종합하여 完成하고 있는 敎說이기 때문일 것이다.168)

論者의 見解로는, 緣起法이야 말로 諸法의 實相 그 자체인 바로 眞如 그 자체이며, 智慧와 福德을 원만히 갖추신 佛陀만이 證得할 수 있는 無上正等正覺의 내용인 동시에, 오로지 淸淨心으로 충만한 金剛三昧의 경지에서만 證得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④ 法住性·法定性의 界

相應尼柯耶에서 살펴보면,

 

"緣起란 무엇인가? 生에 緣하여 老死가 있다. 如來가 出世하든 出世하지 않든 관계없이 이 界(dh tu)는 머물고 있으니, 法으로서 머물고 있는 것이며(dhamma hitat ), 法으로서 擇定된 것이다(dhammaniy mat ). 곧 이것을 緣하는 것이다(idappaccayat ).169)

 

라고 說해져 있다. 緣起라는 道理는 如來에 의해서 조차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위의 經說에서 界(dh tu)나 法은 眞理의 世界정도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는 술어들이다. 界는 眞如實相界의 의미를 法相的으로 內含하고 있다. 그리고 法은 無人爲性(nissatta-nijj vat )의 法則이다. 이러한 界 혹은 法은 머무는 것이며 定해진 것이다. 生·住·異·滅170)의 不斷한 과정속에 있는 有爲法의 성질에 비하여 住性·定性을 지니는 界나 法은 확실히 眞理 그것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不斷히 生滅變化하며 緣起하는 그 자체가 항상 存在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은 영원히 변치 않는 眞理일 것이므로, 이러한 사실도 역시 住性·定性을 內含하는 것이라고 論者는 생각한다. 또한 無明을 除去하여 緣起의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涅槃을 證得함으로써 永遠하고 淸淨無垢한 眞理의 世界에 悟入하는 일이야말로 常住不滅하는 眞如의 世界에 悟入하는 것이며, 釋尊께서 깨치신 緣起法의  活用의 結果인 동시에, 이 역시 緣起法의 位相을 더한층 高揚시킨 역사적 사건으로 評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增支尼柯耶에서는 法住立性과 法決定性의 界(dh tu)로 說해지는 것이 緣起法외에도 하나 더 提示된다.

 

"如來가 出世하던 出世하지 않던 關係없이 이 界는 머물고 있으니

法으로서 머물고 있는 것이며 法으로서 決定된 것이다.

곧 一切의 行은 無常하다(sabbe sa kh r  anicc ).···

一切의 行은 苦이다(sabbe sa kh r  dukkh )···

一切의 法은 無我이다(sabbe dhamm  anatt )."171)

 

위의 이른바 三法印說이 緣起法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眞理로 說해지는 것이다. 흔히 三法印說이 佛敎를 전통적인 印度思想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可視的인 特徵으로 유명하며, 그러한 三法印의 窮極的인 論理根據가 緣起說에 있음을 오늘날 많은 學者들이 注目하고 있는 關心事이다. 이러한 無常·苦·無我의 선언은 머물고 정해진 것이 없다는 의미인데, 그러한 無常·苦·無我의 法則이 항상 그침이 없이 계속하여 머무르며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緣起法의 屬性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겨진다.

 

⑤ 離端中道의 法

三法印說과 더불어 주요한 비중을 갖는 學說로서 中道說(majjhima-pa ipad -v da)이 있다.  苦樂의 自作·他作,  命身의 一·異와 함께  斷·常,  一·多, 有(atthi)·無(natthi)등의 짝은 兩極端의 思想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언제나,

 

"이들 兩極端에 가지 않고 中(najjhena)으로 如來는 法을 說하나니,

 곧 無明을 緣하여 行이 있고 行을 緣하여 識이 있고 …"

 

라고 가르치신다. 여기서 中으로 說해지는 法은 언제나 緣起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하게 中道를 說하되 法의 내용이 다른 한 두가지의 例가 있다. 우선 有名한 『初傳法輪經』에서,172)

 

"이 두가지 極端은 出家者가 닦아서는 안 된다. 어떤 것이 둘인가? 諸愛欲에 貪着하는 … 無着한 것과, 自我를 괴롭히는 … 無益한 것이 그것이다. 이 양 극단에 가지 않고 如來는 中道를 깨달았으니 … 그것은 곧 八支聖道(a ha gika-ariya-magga)이다. 즉 定見 乃至 正定이 그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增支尼柯耶(A guttara-nik ya)의 Acelaka品에는173) 

 

" 세가지 道가 있다. … 强暴道·放棄道·中道가 그것이다."

 

라고 하여 다시 한번 中道를 說하고 있다. 여기서 强暴道는 諸愛欲에 빠져 지내는 것을 말하고, 放棄道란 73鍾의 苦行을 修行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中道는 四念處·四正勤·四神足·五根·五力·七覺支·八正道등 이른바 37助道法으로 說해지고 있다. 앞의 「初傳法輪經」의 八支成道가 여기서의 37助道法에 포섭되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緣起法이 연결되는 경우에는 中으로 되어 있고, 中道는 八支成道를 포함한 37助道法에 본격적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後者의 中道를 行의 中道라고 부르며, 前者의 中을 思想見解상의 中道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보편적인 思想을 내세우는 것이 佛敎인 까닭에, 行의 中道로서의 37助道法이나 解의 中道로서의 緣起法이나 모두 높은 位相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離端中道의 法으로서의 位相을 緣起法은 37助道法과 共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74)

 

⑥ 四諦說과 共有하는 位相 

緣起法의 位相을 제시하는 經說 가운데 '緣起를 보는 자는 法을 보고 法을 보는 자는 緣起를 본다'(yo pa iccasamupp dam passati so dhamma  passati; yo dhamma  passati so pa iccasamupp da  passati)175)고 한 經說만큼 적극적인 表現도 드물 것이다. 이 經說은 緣起法이야 말로 佛法 또는 佛敎의 全部임을 당당히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의 經說이 緣起法외에 四諦說과 結合한 것이 있어서 주목된다. 즉 '四諦의 각각에 疑惑이 없는 者는 佛·法·僧의 三寶에 疑惑이 없는 것이다'(yo duhk o ni k k o nirviciktso buddhe'pi saiti)176)라는 趣旨의 經說이 說해져 있다. 이것은 곧 '四諦를 알면 佛法 또는 佛敎를 아는 것이다.' 라고 단언하는 말에 해당된다.

따라서 緣起法과 四諦說은 모두 佛敎 전체를 대변할만한 位相을 지니게 되어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암시되고 있다. 실제로 緣起法이 說해지는 곳에는 四諦의 형식이 종종 발견된다. 부처님의 成道 당시 觀했던 緣起法도 그 各 支分에 四諦의 형식을 동반하고 있다.177) 이것은 緣起法을 四諦의 관점에서 보는 좋은 예이며, 아울러 緣起法의 四諦說的 構成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지만 部派佛敎時代에는 四諦說의 位相이 거의 最上의 法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비하여 緣起說은 제 位相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金東華 博士는 '最初의 說法인 八正道說이 이 四諦中의 道諦下에 예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以上에서 論明한 十二因緣과 三法印 思想등이 모두 이 四諦下에 隸屬될 성질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以上의 諸敎理를 總網羅한 것이 四諦說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釋尊 早期의 說法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善巧한 說敎案이기 때문이다. 四諦說은 原始佛敎 全 敎理의 網格으로서 少少뒤져서 佛陀敎說의 全部를 總網羅하기 爲하여 構想된 精巧를 다 한 敎網이라 보는 것이 自然스러울 것이며, 後世 大乘佛敎의 복잡한 敎理도 그 根源은 모두 이 四聖諦에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이와 같이 보아 오면 經·律上 엄연히 四聖諦에 의하여 啓導하였다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上述에서 論證한 四諦 早期說에 대한 疑問과 어떻게 會釋해야 할 것인가가 그 문제이다. 그것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만약 四諦 後期 構想說을 인정한다면, 이 四諦說中에는 이미 緣起의 原理나 이 原理上에서 斷案된 三法印思想 및 八正道說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으니, 四聖諦의 理를 알면 그것이 곧 正覺을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하여도 無妨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라고 論證하고 있다.178) 

요컨대 金東華 博士의 論證을 考察해 보면,

'釋尊 早期의 說法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善巧한 說敎案이기 때문이다. … 즉 만약 四諦 後期 構想說을 인정한다면 …' 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四諦說을 後期 構想說로 認定하는 면이 강하게 表出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論者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즉 釋尊은 理論(解)에 해당하는 敎說을 베푸실 때마다 그에 相應한 實踐(行)의 方法을 반드시 함께 說해 주신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十二緣起說이 인간에게 왜 生死의 괴로움(苦蘊)이 發生(集)하며, 또 滅할 수 있는가를 밝혀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完備된 理論임에 비하여, 四諦說은 이러한 苦蘊의 集과 滅에 대하여 베풀어진 본격적인 實踐的 修行의 길을 제시한 敎說이라고 확신하는 관점에서, 緣起說과 四諦說은 同時에 成立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한 緣起說의 位相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면, 緣起說을 四諦說보다 下位의 敎說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우선 舍利弗이 說한 『正見經』에는 緣起說이 가장 甚深한 것으로 說해져 있다. 그리고 四諦法이 諸佛이 칭찬한 法이라면, 緣起法은 諸佛이 尊敬하는 法으로 묘사되고 있다. 長尼柯耶에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諸佛이 稱讚하는 法의 說示가 있으니 毘婆尸佛은 그것을 드러내셨다. 곧    苦·集·滅·道이다."(y  buddh na  s mukka sik  dhammadesan     ta  pak sesi-dukkha  samudaya  nirodha  magga )179)

 

이에 비하여 雜阿含은 佛陀의 成道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은 마음을 전하고 있다.

 "成佛未久.爾時世尊 獨靜思惟作是念.不恭敬者 則爲大苦.···唯有正     法. 令我自覺.···我當於彼 恭敬宗重奉事供養."180) 

 

이라고 說해져 있는데, 여기서 世尊이 自覺하셨던 正法이 緣起法이었음은 再論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緣起法은 佛陀께서 尊敬하는 法인 것이다. 이와 같이 佛陀가 칭찬하는 法이 四諦說이고 恭敬하는 法이 緣起法이라면 적어도 그 의미상으로는 緣起法의 우위를 논할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緣起法이 四諦說에 우선 함은 大乘經典에서도 인정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면 華嚴經類의 『十地經』에서도 第5難勝地(sudurjay -bh mi)菩薩은 四諦를 닦는데 비하여, 第6現前地(abhimukh -bh mi)菩薩은 十二緣起를 觀하는 것으로 說하고 있음을 볼 때, 일반적으로 緣起法 優位의 思想을 엿 볼 수가 있다.181)

끝으로 初期佛敎의 諸敎說中에 최상의 位相을 지닌 緣起法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다시 한 번 緣起法의 重要性을 强調하고자 한다.

 

"실로 내가 到達한 이 法은 甚深하고, 難見이고, 깨닫기 어렵고, 寂靜하고, 高尙하고, 단순한 思索과 思慮를 넘어섰고, 微妙하고, 賢者가 알만한 것이다. 執着을 즐기고 집착을 즐거워하고 집착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 때문에 이 道理를 보기 어려우니 이것이 곧 緣性·緣起이다. 그리고 또 이 道理를 보기 어려우니 곧 一切行의 寂止·一切依의 捨斷·愛의 滅盡·離貪·滅·涅槃이 그것이다."182)

 

(3) 『維摩經』의 緣起思想

 

요컨대 實踐的 측면에서의 苦樂中道이든 혹은 理論的 側面에서의 有無中道이든간에, '涅槃으로 引導하는 길'로서183) 提示하신 것이 바로 中道(madhyam - pratipad, the Middle Path)이며, 이러한 中道는 世尊의 禪定修行에 의해 證得된 無上正等正覺의 결과인 동시에 理論的 中道인 十二緣起를 근거로 하고 實踐的 中道인 八正道의 實修를 거쳐서 얻어진 正見의 結果일 것이라고 論者는 생각한다.

그러면 『維摩經』에서는 이러한 緣起(prat tyasamutp da)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A : 菩提樹處(bodhima a, 覺)는 無明의 滅盡으로부터 老死의 滅盡으로  

    되어가는 까닭에 緣起(prat tyasamutp da)의 자리이다.

   [It(bodhima a) is the seat of the dependent co-production(prat tya-

   samutp da) because it goes from the exhaustion of ignorance(avidy        sravak aya) to the exhaustion of old age and death.] 184)

B : 緣起가 도량이니 無明으로부터 늙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緣起是道場 無明乃至老死 皆無盡故.]185) 

  [It is the twelve-limbed dependent co-production because ignorance is

  inexhaustible, etc., and because old age, death, sorrow, lamentation,

  pain, grief and despair are inexhaustible.〕

 

위의 A는 西藏 譯本을 底本으로하여 英譯한 것이고, B는 羅什 譯本인 『維摩詰所說經』에서 引用하여 英譯한 것인데, 언뜻 보면 A가 B보다 훨씬 더 논리성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 Lamotte는 그런 分別을 하지 않고 脚註를 붙여서 大家답게 상세히 解說해 놓고 있다. 즉 "緣起가 도량이니 無明으로부터 老死에 이르기까지 十二支緣起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說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還滅門인 "無明의 滅로부터 行등등의 滅"은 無意味하다. 왜 그런가 하면 不生이기 때문이다. 즉 十二緣起는 결코 消滅될 수 없기 때문이다. 中國語 譯本에 따르면 緣起는 다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티벼譯本에 의하면 그것은 이미 滅盡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諸法은 원래 寂滅하고 본질적으로 涅槃되어 있으므로, 緣起의 作用을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緣起가 道場이다.'하는 것은 十二因緣의 道理를 밝힌 것이니, 人間의 生·老·病·死의 原因을 열두 가지로 나누어 說明한다. 그것들은 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이다. 그런데 人間의 生에는 과거·현재·미래가 있고, 人間의 行動에는 혹(惑) 즉 眞理를 모르는 것과, 眞理를 모르기 때문에 짓게 되는 나쁜 行動인 業과, 나쁜 행동의 결과로 받게 되는 고통(苦)이 있게 된다. 즉 우리가 받는 늙음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은 그 원인으로서 나쁜 행위에서 緣由된 것이며, 그 나쁜 행위는 眞理를 모르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小乘佛敎에서는 人生을 苦로 보았는데, 惑과 業과 苦를 없애는 것을 修行의 要諦로 보았다.

그그그런데 維摩詰은 人生자체가 道場이기에 十二緣起를 그대로 修行의 對象으로 보았던 것이다. 唐代의 永嘉玄覺(665∼713)大師도 같은 뜻으로서 '無明實性卽佛性'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人生을 苦로 보는 小乘과 人生을 부처로 보는 大乘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6) 이러한 관점에서 論者는 『維摩經』이 가치관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은 현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修行方便을 제시하여 주는 동시에 中道的 智慧의 길을 열어 줌으로써 淸淨心을 회복하여 새로운 人間으로 거듭나게 해 줄 수 있는 탁월한 經典임을 새삼 느끼고 있는 바이다.

     緣緣起의 原語는 Sanskrit語로는 prat tya-samutp da이고, P li語로는 pa icca- samupp da이다.  첫째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이  原語는 prat tya와 samutp da의 二語를 연결하여 前者는 後者에 대해 形容詞 역할을 하고 있다. 月稱에 의하면 prat tya는 「相待하다」의 意味로서 諸法이 因과 緣으로 相待하여 生起하는 것이 緣起의 의미이다. 이것은 오히려 佛敎의 根本思想인 四聖諦의 범위에서 논해져야 한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目的이 없는 人生觀은 결코 成立되지 않으며, 단순한 理論이나 論理上의 장난이 되어 그것이 진정한 人生觀을 확립하는 데에 限界가 되기 때문이다. 四聖諦 中에 苦와 集은 佛陀가 現世界의 참모습을 깨닫고 표현한 思想임에 틀림없다. 이것들을 기초로 한 것이 世界의 無常한 상태이고, 無常을 극복하여 佛敎가 언제나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뒤의 滅과 道諦인 것이다. 無常은 自然의 動的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我」라고 할만한 實體的 槪念을 否定한다. 또 이러한 動的 自然을 극복하는 길은 소위 涅槃인데, 涅槃은 항상 無對(appa ibh ga, P li語로 '비할 바 없는, 無敵의'라는 뜻)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涅槃만이 動的인 自然가운데에서 連續性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느껴진다.187) 

緣起는 理論을 뒷받침하는 思索的인 特殊用語로서 中道나 八正道보다 한층 더 심오한 性格을 갖고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처럼 理論을 뒷받침한다고 하는 意味는 우리들의 體驗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理論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眞理」를 의미한다. 그 위에 또한 理論과 實踐을 연결하는 것이 中道라고 여겨진다. 여기서 말하는 理論이란 刹那的 現世界를 나타내는 어떤 면에서 본 法(dharma) 바로 그것으로 느껴지며, 또 「理論定立」이란 말의 限界를 알면서도 그것을 超越한 어떤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188) 

요컨대, 緣起는 곧 中道의 立場에서 把握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Ⅴ. 禪思想

 

一般的으로 禪家에서는 文字를 세우지 않고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性品을 보는 것을 窮極目的으로 삼기 때문에 예로부터 以心傳心을 그 傳統으로 여겨왔다. 그러므로 禪이나 禪思想에 있어서 애초부터 문자로써 說明하거나 論理的 敍述로써 그 實相을 論함에 있어서는 상당한 無理가 수반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人間의 생각이나 마음의 表象을 남에게 전하려면 적어도 文字나 言語의 論理로써 전하기 마련인데, 禪에 있어서는 그러한 形式的인 方法을 否定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禪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不立文字·敎外別傳·直指人心·見性成佛한다는 말은 禪이 文字와는 거리가 먼 敎外別傳의 思想임을 역설하고 있는 적절한 표현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世尊이 傳法하신 內容 역시 言語나 文字에 依存하지 않고 以心傳心하고 拈華微笑하였음을 생각해 볼 때, 확실히 '道'라는 것은 言語나 文字를 뛰어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言行과 思想은 결국 文字로써 八萬四千의 敎說로 表現되었음을 想起할 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上求菩提·下化衆生하는 大乘佛敎를 實踐해야 한다는 次元에서 그 限界를 벗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 禪에 있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傳達하는 方法이 과연 文字나 論理的인 說明을 떠나서 實行되어 왔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禪에 관한 語錄들이 있으며, 또한 그 敍述과 說明에 있어서 分明히 文字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說明은 역시 日常的 論理 體系와는 무언가 다른 論理的 構造를 지니고 있다. 오히려 文字나 言語를 쓰되, 그 메시지는 文字나 言語를 超越한 眞理의 實相을 傳達한다.189)

따라서 禪에 있어서도 우리는 어떤 形式으로든 傳達構造 또는 傳達體系를 갖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한 次元에서 禪의 文字 및 言語的 表現을 우리가 理解할 수 있도록 體系있게 整理하여 硏究할 必要가 切實한 것이다.

禪은 精神界와 物質界의 眞理를 깨닫게 해주며 人間의 마음을 安定시키고 智慧를 啓發해주는 源泉이 되기도 한다. 同時에 끝없이 일어나는 煩惱妄想과 無明을 除去해주고, 外部의 온갖 誘惑에 끌리지 않고 動搖하지 않는 마음을 길러주며, 淸淨한 心性과 無限한 可能性을 啓發해 주는 것이 禪이다.

現代는 物質文明의 危機로 因해 惹起되는 人間性喪失의 時代로 特徵지워진다. 따라서 孤獨한 群衆속에서 살아가는 人間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들은 極度의 利己主義에 陷沒되어 心性은 날로 荒廢해지고 있다. 禪의 修行은 이와 같이 彷徨하는 現代人들에게 깨끗한 心性과 存在의 根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어준다.

그러므로 眞理의 究極原理인 眞如 그 자체를 직접 보여주고 提示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眞如의 世界에 도달하는 里程標만은 감히 그려서 보여줄 수 있고 또 그것을 衆生濟度에 活用할 수 있다고 思料되기 때문에, 言語와 文字를 통한 禪思想의 解說이 必須的인 것으로 여겨진다.

 

禪思想에서는 이미 앞에서 論考된 '心非心'의 根源을 『維摩經』의 經說을 통하여 다시 한번 論證함으로써 淸淨心의 實體를 확실하게 밝혀보려고 試圖하였고, 또한 '『維摩經』의 科段에 드러난 禪思想'에서 이 經의 全體的인 槪要를 밝히는 가운데 『維摩經』의 核心的인 禪思想을 考察함과 동시에 '維摩一默의 禪的 意義'와 '不可思議解脫의 禪的 意義'를 밝히고자 한다.

『維摩經』(Vimalak rti-nirde a)은 『般若經』다음에 나타난 初期의 大乘經典중에서도 그 成立이 오래된 經典가운데 하나이다. 이 經典은 中印度의 Vai l 를 背景으로 하여 그곳의 菴羅樹園을 說處로 삼고 있다. 간혹 바이샬리의 長者요 居士인 Vimalak rti(維摩羅詰, 維摩詰, 維摩, 淨名)의 方丈을 說處로 삼기도 한다.

維摩詰이 病이 들었으므로 世尊께서는 舍利弗등에게 問病을 가도록 권하지만, 그들은 일찍이 維摩居士에게 어떤 문제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고 말하며 問病가기를 주저한다. 마지막으로 文殊舍利(Maju r )菩薩이 問病을 가게된다. 維摩의 方丈에서 두 大士가 快談을 나누리라고 기대하여 世尊의 주변에 있던 大衆들도 文殊菩薩을 따라간다. 文殊菩薩이 주로 질문하지만, 가끔 維摩居士도 질문을 한다. 維摩詰은 菩薩에게는 病이 없으나, 衆生이 병든 탓으로 菩薩도 병이 들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세상에서 자식이 병든 것을 본 부모가 病이 없음에도 아프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說明한다. 또한 그의 家族의 소재를 묻자, 智慧가 母요 方便이 父라는 등으로 대답한다.

특히 『維摩經』에서 가장 중요한 品은 「入不二法門品」 第九이며, 이 品에서 菩薩의 入不二(悟入)에 관하여 各各의 菩薩들은 '一切의 觀念이 滅한 것이 入不二'이며, 또는 '더러움과 깨끗함을 不二로 생각하는 것이 入不二'라는 등으로 說함에 대하여, 文殊菩薩은 無言無說이 入不二라고 말한다. 이에 維摩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있을 때, 文殊菩薩은 이것이야말로 참된 入不二라고 말한 內容은 後代의 禪家에서 관심을 갖게된 有名한 場面이다. 이러한 思想은 敎理的으로 般若皆空의 思想에 의해 大乘菩薩의 慈悲行의 實踐을 昻揚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在家信者의 宗敎的 德目을 闡明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 特色으로 注目된다.

또한 이 『維摩經』을 「不可思議解脫法門」이라고 달리 부르고 있다는 점을 參照할 때, 깨달음을 얻은 菩薩들이 衆生濟度를 위해 入出自在함을 說하는 것이 이 經의 根本 趣意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理致를 직접 밝히고 있는 「不思議品」 第六도 또한 「入不二法門品」 第九 못지 않게 중요한 내용이다.

維摩詰의 경우도 그러한 大乘菩薩의 慈悲行의 實踐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維摩의 方丈이라는 場所와 동시에 菴羅樹園에서 釋尊이 직접 說法하고 계신다는 점에서도 이 經의 중요성이 엿보인다. 또한 이 經의 序頭인 「佛國品」 第1에서 '마음이 淨하면 곧 土도 淨이다'라고 말한 것은 『維摩經』의 根本的인 立場을 端的으로 드러낸 것으로서 '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는 大乘菩薩道의 精神을 來世가 아닌 現世에 實現하려는 강한 意志를 表出하고 있는 것으로 論者는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維摩經』을 一名 『不可思議解脫經』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소위 「禪經」190) 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시되고 있음은 周知의 事實이다.

 

1. 『維摩經』의 第一義諦

 

1) 初期佛敎의  第一義諦

 

初期佛敎는 V r as 에서 釋尊이 說하신 四聖諦를 根幹으로 삼고 있다.

(1) 諸法은 無常(anitya)하고, 苦(du kha)이며, 無我(an tman)인 것이다. 즉 諸法은 我가 아니며, 我에 소속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諸法이 自性(svabh va)이나 特殊한 樣相(lak a a)을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191)

 

(2) 諸法은 條件지워져 있으며, 原因인 동시에 結果가 되는 것이다. 諸法의 生起와 壞滅은 그 괴로운 輪廻의 過程에서 우연히 生滅하는 것이 아니라, 十二支로 상호 의존하는 緣起(prat tyasamutp da)라는 嚴格한 法則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緣起는 諸法의 眞如(tathat )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P li語 및 Sanskrit語로 된 다양한 文獻속에서 되풀이되고있는 經句가운데에서 立證되고 있다.

如來께서 이 世上에 나오시든 안나오시든 간에  諸事物의 性質, 이러한 因果의 法則, 이러한 因果의 必然性, 이것이 저것에 대한 關係등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192) 

(3) 태어나지 않는 것(aj ta), 生成되지 않는 것(abh ta), 만들어지지 않는 것(akata), 形成되지 않는 것(asa khata)이 있다.193) 이것이 바로 涅槃(Nirv a)이다. 이러한 涅槃은 條件지워져 있지 않으며(asa sk ta), 어떤 原因들에 依存하지 않으며, 緣起의 메카니즘에서 벗어나 있다.

 

(4) 釋尊은 涅槃으로 引導하는길(m rga), 즉 中道(madhyam  pratipad)를 가르쳐 보여주셨다. Tathat (여기서는 眞如緣起)를 四聖諦안에 位置시키기는 容易하다. ① 輪廻하는 諸法의 苦는 認識되어야 한다. ② 緣起의 過程인 集의 原因은 消滅되어야 한다. ③ 苦의 消滅 즉 涅槃은 成就되어야 한다. ④ 그리고 涅槃에 이르는 길은 修行되어야 한다.194)

 

2) 大乘佛敎의 第一義諦

 

바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初期佛敎는 我 또는 個我의 存在를 實體로 認定하는 것을 명확히 否定하면서도 存在의 諸現象의 客觀的인 現實 혹은 諸法의 客觀的인 現實을 믿고 있다. 部派佛敎의 諸論書 특히 說一切有部의 論書들은 75法의 리스트를 열거하고, 그것들이 實際的인 性質을지닌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說一切有部의 論書들은 添言하기를, 條件지워진 72개의 法들은 相(lak a a)을 부여받아서 그로 인하여 不變하는 緣起의 메카니즘에 따라 그것들이 生하고 住하며 또 滅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小乘部派들은 이와 같은 實在論에 반발하였고, 그들 小乘部派들은 그러한 實在論은 誇張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經量部(The Sautr ntikas)는 간결함과 理性의 이름하에 法의 목록들을 지나칠 정도로 삭제하였고, 그 法들이 극히 짧은 기간동안 나타났다가 原因없이 사라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部派들은 그들의 판단에 의해서 그대로 두는 것이 價値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몇개의 法들은 實際로 存在하는 것으로 인정하였다.

大乘의 思想家들과 學者들에 의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그들은 웅장하면서도 반면에 위약한 阿毘達磨의 體系를 기꺼이 무너뜨렸다. 그들은 그들의 先驅者들과 마찬가지로 靈魂의 實體를 否定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나아가 經驗的인 事物들,즉 어떤 결과로서 나타나거나 혹은 相關的인 事物들의 非存在性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個人의 非存在性(pudgalanair tmya)과 事物들의 非存在性(dharmanair tmya)을 同時에 주장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追從者들에게 "諸法이 生起하지 않는다는 확신" 즉 無生法忍(anutpattikadharmak nti)을 심어주려고 努力하였다.

諸事物의 空性은 西曆紀元初부터 增加되어 크게 발전된 『大方廣經』들의 근본적인 敎說이다. 즉, 『般若波羅蜜經』·『妙法蓮華經』(Saddharmapu ar ka)·『華嚴經』(Avata saka)·『寶積經』(Ratnak a)·『大般涅槃經』(Mah parinirv a) ·『大方等大集經』(Mah sa nip ta)과 多數의 單獨經들이 있다. 이러한 經들은 각각 그들 특유의 觀點을 지니고 있으나 諸事物이 本質的으로 空하다는데에 견해를 같이한다. 이 點이 바로 그 經들의 實際的인 觀念인 것이다.

『方廣經』(Vaipulyas tra)속에 解說되어있는 理念들은 아마 3세기경에 體系化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것은 유명한 『中論頌』(Madhyamakak rik )의 著者인 龍樹(N g rjuna)에 의해서 였는데, 이 『中論頌』은 온갖 知的인 諸觀念의 不合理性과 어떠한 感覺的 혹은 精神的 體驗도 論理的으로 不可能한 것임을 보여준다. 龍樹의 『中論』(Madhyamaka)은 數世紀에 걸쳐 다음과 같은 著名한 학자들에 의해 명성을 얻게되었다. 즉 ryadeva(聖天), Pi gal k a (Ch'ing-mu,靑目), Buddhap lita(佛護), Bh vaviveka(淸辨), Si hara mi, J naprabha(慧光 혹은 智光), Candrak rti (月稱), ntideva(寂天), ntarak ita(寂護), Kamala la, Praj karamati, Advayavajra 등이 그와 같은 大家들이었다.

『維摩經』은 그 成立年代가 비교적 최초기에 속하며, 또한 이 經이 발전시킨 理論들만큼이나 그 不思議한 靈感을 根據로 삼았던 까닭으로 보아 가장 오래된 大乘經典類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維摩經』은 『般若經』(Praj p ramit )·『華嚴經』(Avata saka)·『寶積經』(Ratnak a)·『大方等大集經』등과 같이 龍樹學派의 토대가 되는 初期形態의 『中論』임을 나타내고 있다.

『維摩經』은 5世紀中葉에 中國語로만 번역되었던 『解深密經』(Sa dhinirmocana)·『入楞伽經』(La k vat ra)·『勝 經』( r m l dev si han da)등과 같이 認識論的인 唯識學派에의해 權威를 인정받았던 觀念主義的 傾向을 지닌 經들과는 명확히 區別된다.

 그러므로 本稿는 우선 『中論』의 가장 중요한 主題들의 윤곽을 밝히고, 적절한 句節들을 引用함으로써, 『維摩經』이 『中論』의 核心的인 論旨를195) 어떻게 敎說하였는가를 밝혀보려고 한다.

 

(1) 諸法은 無自性(ni svabh va)이며, 自性은 空한 것이다(svabh va nya).

“菩薩은 我( tman)를 sattva(人, 衆生, 有情),  j va(壽者, 壽命, 活命),  po a, puru a(靈魂, 個人의 本體, 最高精神), pudgala(我, 靈魂, 個人), manuja, m nava, k raka, vedaka, j naka, pa yaka등의 어떤말로 나타낸다 할지라도 그 我를 感知하지 않는다. 菩薩은 諸事物, 즉 蘊(skandha)·界(dh tu)·處( yatana)를 感知하지 않으며, 또한 諸事物의 緣起(prat tyasamutp da)도 感知하지 않는다. 菩薩은 四聖諦, 즉 苦(du kha)·集(samudaya)·滅(nirodha)·道(m rga)를 感知하지 않는다. 菩薩은 三界, 즉 欲界(k ma)·色界(r pa)·無色界( r pyadh tu)를 感知하지 않는다. 菩薩은 無量相(apram a)·禪定(dhy na),그리고 無相三昧( r pya-sam patti)등의 神秘한 境地를 感知하지 않는다. 菩薩은 三十七菩提分法(三十七道品), 즉 四念處·四正斷·四神足·五根·五力·七覺支·八正道를 感知하지 않는다. 菩薩은 佛의 德性, 즉 十力(da abala)·四無所畏(caturvai radya)·十八不共法(a da ve ika)을 感知하지 않는다. 菩薩은 須陀洹(預流, srot panna)·斯陀含(一來, sak d g min)·阿那含(不來, 不還, an g min)·阿羅漢(arhat)·緣覺(pratyekabuddha)·菩薩(bodhisattva)·佛(buddha)등의 聖人들의 部類를 感知하지 않는다. 菩薩이 위의 내용을 感知하지 않는 것은  그의 완전무결한  淸淨性(atyantavi uddhit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淸淨性은 무엇인가?  그것은 無生起(anutp da)·不顯現(apr durbh va)·非存在(anupalambha)·不動(anabhisa s-k ra)이다.”196)

『維摩經』은 諸法의 非存在性을 每章마다 빈번히 되풀이하고 있는데, 諸法의 空함을 밝혀놓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法은 本性이 없다(Ⅲ,§6). 六境은 實體를 갖고 있지 않다(Ⅲ,§12). 諸法의 本性은 幻化相과 같다(Ⅲ,§19). 五蘊은 自性이 空하다(Ⅲ,§26). 諸法은 非實際的이며, 幻影에 의해 만들어진 性質의 것이다(Ⅳ,§14). 五取縕은 本質的으로 원래 空하다(Ⅷ,§17). 諸法은 空하고, 헛되며, 無價値하고, 相互依存的이며, 住함이 없다(Ⅹ,§18).197) 

 

(2) 諸法은 無生(anutpanna)하고, 無滅(aniruddha)한다. 自性이 空한 諸法은 生成도 없고 消滅도 없다. 왜냐하면 空한 事物에서 생기는 空한 事物은 실제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空한 事物들은 생기지 않으므로 消滅함도 없다. 따라서 緣起하는 諸現象의 生成은 非生成이다.

 

"緣起, 우리는 그것을 空이라고 부른다. 즉 그것은 '∼때문에'라는 意味이다. 이것이 中道이다."198) 

 

『維摩經』은 不生 즉 諸法의 無生을 강조하며, 作用하지 않는 '깊은 意味에서의' 緣起(prat tyasamutp da)를 강력히 주장한다.

菩薩은 깊은 意味의 緣起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菩薩은 緣起라는 金剛杵를 거부한다(Ⅰ,§3). 維摩는 諸法이 不生함을 확신하였다(Ⅱ,§1). 法은 잡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法은 生成과 消滅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Ⅲ,§6). 活動과 生成과 破壞를 부여받은 諸法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게 되어있다. 실제로 어떤 것도 生成된 적이 없었고, 生成되어 있지도 않으며, 미래에 生成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것도 消滅된 적이 없었고, 消滅되어 있지도 않으며, 앞으로 消滅되지도 않을 것이다(Ⅲ,§26). 諸法은 幻影·변화·구름이나 번개처럼 生成과 消滅과 持續이 없는 것이다. 諸法은 꿈과 妄想과 乾 婆의 마을처럼 거짓된 妄相이다. 諸法은 물속의 달처럼 또는 거울속의 그림자처럼 想像에서 나타난 것이다(Ⅲ,§35). 過去에 생긴 것은 이미 壞滅되었고, 未來에 생길 것은 아직 오지 않았고, 現在에 생기고 있는 것은 그 依止處가 없다(Ⅲ,§50). 菩提樹處(bodhima a,覺)는 無明(avidy )의 破壞로부터 老死의 파괴로 되어 가는 까닭에 緣起(prat tyasamutp da)의 자리이다(Ⅲ,§58). 菩薩의 領域은 不生과 不滅을 諸法의 特徵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영역이다(Ⅳ,§20, No.31). 法을 追求하는 者는 生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滅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Ⅴ,§3). 菩薩은 無生과 不滅에 관하여 올바르게 精進한다(Ⅵ,§5). 諸法은 만들어져 있지도 않고 변화되어 있지도 않으며, 모두가 현재의 상태 그대로이다(Ⅵ,§15).  諸法은  空( nyat )과 無相( nimitta)과  無願(apra ihita)과  無作(anabhisa sk ra)과 無生起(anutp da)와 關聯되어있다(,§11). 存在에 대한 不退轉의 信心의 結果를 마땅히 十二緣起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이러한 十二緣起에 따라서 "無明을 消滅시킴으로써 老·死·哀·苦·悲·惱가 또한 消滅되기 때문이다."(,§12).  

 

(3) 諸法은 本來 寂靜( di nta)하며, 그 本性이 涅槃되어 있다. 無生이므로 諸法은 처음부터 그 성질상 寂靜하며 寂滅되어 있다. 空을 말하는 자는 涅槃을 말하는 것이다. 初期佛敎에 의하면,  輪廻(Sa s ra)는  緣起(prat tyasamutp da)의 지배를 받는 것이며, 涅槃(Nirv a)은 이러한 緣起의 과정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中道論者에게 있어서 諸法은 不生이며, 諸原因으로 인하여 生成되지도 않고, 輪廻하지도 않는다(na sa sarant ). 따라서 諸法은 涅槃되어 있는 것이다. 中道論者에게 있어서 輪廻가 涅槃이고 涅槃이 곧 輪廻이다. 즉 空·輪廻·涅槃은 한가지로 생각된다.

 

"모든 進化의 停止를 그 특성으로 갖는 空은 涅槃(Nirv a)이라고 일컬어진다.199) 要컨대 如來는 法이 바로 不傷害(즉 戒)이고, 空이 곧 涅槃이라고 말한다. 佛敎에서는 戒와 空 두가지 만이 解脫을 보장하는 유일한 것들이다.200) 輪廻와 涅槃사이에는 어떤 差異도 없다. 또한 涅槃과 輪廻사이에도 아무런 差異가 없다."201)

요컨대 小乘에서는 "事物의 存在 樣式"인 眞如는 緣起(prat tyasamutp da)였다. 이에 반하여 『中論』에서 眞如는 空( nyat )이다.

 

이와 同一한 主題들이 『維摩經』에 의해서도 明確히 敍述되어 있다. 無自性이며 동시에 다른 성질도 없는 것은 불에 타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 것은  진정시킬 수도 없다. 어떠한 滅盡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꺼져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盡( nta)이란 말의 意味이다(Ⅲ,§26). 이미 涅槃되어있지 않은 것은 단 한가지도 없다.  如來(Tath gata)께서는  眞實한 眞如란  般涅槃(Parinirv a)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존재는 본래 寂靜하고, 般涅槃되어있다고 보았으므로, 부처님은 眞實한 眞如가 般涅槃이라고 말씀하셨다(Ⅲ,§51). 輪廻와 涅槃은 둘 다 空하다. 왜 그런가? 단순한 名稱(n madheya)으로서 둘다 空하고 實際的인 것이 아니다(Ⅳ,§12). 法을 追求하는 者는 生과 滅(즉 輪廻와 涅槃)을 追求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法은 寂靜하기 때문이다(Ⅴ,§3). 輪廻와 涅槃은 흔히 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涅槃의 自性을 원래 空한 것으로 보신 菩薩들은 輪廻하지도 않고 涅槃에 들지도 않는다. 즉 이것이 入不二이다(Ⅷ,§13). 涅槃에 들어서 즐거워함이 없고, 輪廻에 대해서도 厭惡함이 없는 것이 不二를 구성한다.(Ⅷ,§29).

 

(4) 諸法은 無相(alak a a)이므로 그 결과 不可說이요 또한 不可思議이다.

諸法은 非存在이므로 相이 없다. 諸法에 관하여 우리는 말할 수 없으며, 만일 말을 한다면, 오직 世俗諦(sa v ti)에 의해서 일뿐이다. 諸法을 認識하려면 諸法에 관하여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諸法은 結合되어 있는 것도 分離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즉 諸法은 定形이 없으며, 非可視的이며, 非抗拒的이며, 唯一한 相은 곧 無相이다.202)

 諸法에는 眞實한 自性이 存在하는가? 그러한 성질은 存在한다고도 할 수 없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世俗諦를 통하여 또한 根據없는 肯定을 통하여 그러한 性質이 存在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世尊께서는 말씀하셨다. "不可說法에 대하여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根據없는 肯定으로 이러한 不可說法은 들려지고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中論頌』(ⅩⅩⅡ , 11)에서도 역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諸法이 空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혹은 非空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혹은 空인 동시에 非空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혹은 諸法이 空도 아니고 非空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말로 나타내기 위해서 부득이 이렇게 말해지는 것이다."203)

 菩薩이 자신을 훈련시켜야 함은 바로 諸法으로부터의 分離와 諸法의 非實際性을 깨닫는 데에 있는 것이다. 菩薩이 一切의 法을 認識하게 되는 것은 一切의 思量分別을 없앤 곳에 근거를 둠으로써 이다.204)

 그러므로 空의 觀點에 住할 때 요가 수행자는 蘊·界·處를 存在하는 事物로서 인식하지 않는다. 요가 수행자들은 蘊·界·處를 事物로서 認知하지 않음으로 그것들에 관련된 一切의  論을 避하게 된다. 그들은 또한 事物에 관한 一切의  論을 피하므로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며···· 諸觀念이 消滅되는 것은  論을 滅함으로써 이루어지고···· 따라서 一切의  論의 滅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空은 涅槃(Nirv a)이라고 불리어진다.205)   

 

『維摩經』도 이와 同一한 見解들을 나타내어 보여주고 있다. 法에는 標徵이 없다. 諸法의 標徵들을 追求하는 者들은 法을 찾는 것이 아니라, 標徵들만을 찾은 것이 된다.… 法은 보여질 수도 없고, 들려질 수도 없으며, 생각되어질 수도 없고, 혹은 認識될수도 없다(Ⅴ,§4). 想과 受를 滅한 寂靜한 상태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명상의 방법이다. 마음이 內部에 머물지도 않고 外部로 퍼지지 않도록 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瞑想의 方法이다(Ⅲ,§3). 法은 諸事物의 특성을 壞滅시키므로 寂靜하다.… 法은 言說을 버리기 때문에 아무소리도 없다. 法은 모든 마음의 "흐름"을 버리므로 不可說의 것이다(Ⅲ,§6). 法은 一切의  論을 끊었으므로 모든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Ⅲ,§6). 賢者는 言說에 집착하지 않으며 言說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言說은 고유한 성질이나 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言說은 이와 같이 고유한 성질이나 相을 갖지 않는 까닭에 言說이 아닌 一切가 解脫이다(Ⅲ,§19). 想像하는것, 바로 이것이 煩惱이다. 想像과 識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自性이다(Ⅲ,§35). 覺은 모든 標徵이 寂靜하게된 것이다. 覺은 對象에 대하여 근거 없는 主張을 하지 않는 것이다. 覺은 一切의 思量分別의 作用을 끊어버린 것이다. 覺은 모든 想像을 버린 것이다(Ⅲ,§52). 對象의 참된 把握은 內的 主體와 外的 客體라는 두 가지의 그릇된 見解를 벗어난 파악 아닌 어떤 것이다(Ⅳ,§14). 天女(Dev )의 慧와 辯才는 어떤 것도 얻음이 없고 어떤 것도 성취함이 없는 그것에 기인한다(Ⅵ,§10). 一切의 觀念이 滅한 것이 入不二이다(Ⅷ,§3). 어떤 근거 없는 肯定도 혹은 정당치 못한 否定도 存在하지 않는 것에 가져다가 적용시킬 수는 없다(Ⅷ,§6).

 

(5) 諸法은 平等(sama)하고, 不二(advaya)이다.

空하고 非存在이므로 諸法은 平等하다. 바로 이러한 意味에서 不二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共通的인 非存在를 構成하고 있는 이러한 不二는 어떤 종류의 一元論도 내포하지 않는다.

 

"絶對的인 見地에서 生成이 없는 까닭에, 諸法은 또한 絶對的인 見地에서     平等하다."206)

 

이 部分에 대하여 『維摩經』은 不斷히 모든 事物의 平等性과 非二元性(不二)으로 歸着한다.

모든 存在에 대하여 平等하게 慈悲로우신 부처님은 諸法의 平等性을 洞察한다(Ⅰ,§10, st. 8). 올바로 乞食하기 위해서 諸法의 平等性을 洞察해야 할 필요가 있다(Ⅲ,§11). 邪惡의 平等性을 통하여 正法의 平等性을 洞察해야만 한다(Ⅲ,§13). 須菩提(Subh ti)가 물질적인 對象들의 平等性을 통하여 諸法의 平等性을 洞察할 수 있게 된다면, 諸法의 平等性을 통하여 부처님의 모든 德性의 平等性을 洞察할 수 있다면, 직접적인 應果가 기다리는 五惡의 平等性을 통하여 解脫의 平等性을 洞察할 수 있다면, 須菩提에게는 좋은 果報가 약속된다(Ⅲ,§16).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이 둘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에 관해서 이러하듯이 罪果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罪果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諸法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諸法은 眞如(Tathat )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Ⅲ,§34). 菩提는 諸法의 平等性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分別이 없다(Ⅲ,§52). 菩提樹處(bodhima a)는 一切衆生에 대한 마음이 平等함으로 慈悲의 자리이다(Ⅲ,§57). 我의 平等性으로부터 涅槃의 平等性에 이르는 完全한 平等性이 있다(Ⅳ,§12). 性은 平等하므로, 諸法은 男性도 女性도 아니다(Ⅵ,§15).

『維摩經』의 第八品(漢譯本은 第九品에 該當됨)은 전체가 不二性에 割愛되고 있다. 32菩薩이 차례로 外樣的인 二律背反의 간격을 메우고, 不二性(advaya)을 主張하기 위하여 發言한다.

 

(6) 空은 하나의 實體가 아니다.

『般若波羅蜜經』과 『中論』(Madhyamaka)은 공공연히 혹은 僞裝하는 諸形態의 一元論을 排擊한다. 이 經論들은 諸法은 存在하지 않는다고 主張할 뿐만아니라 또한 非存在를 實體化하는 것도 거부한다."生成하지 않는"(anutp d tmaka) 諸法의 自性(svabh va)은 단순한 非存在(abh vam tra)가 아니다.

 

"空性 때문에 色이 空한 것이 아니다. 色을 떠나서 空性이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色이 곧 空이요, 空이 곧 色이다. 실제로 色은 言說일 뿐이다."207) 

 

『般若波羅蜜經』은 이런 主題를 不斷히 반복하고 있으며, 이런 論理는 物質 즉 色에 有效할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蘊에도 적용되며, 또한 一切의 法에도 差別없이 적용되는 것임을 附言하고 있다.

또한 『中論』에서도 空( nyat )은 어떤 存在로서 認知하지 않는다.

 

"恒久的인 非生成은 그것이 다른 것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人爲的인 것이 아닌 까닭에 諸法의 自性이라고 불리어진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無知라는 錯亂된 視覺의 힘에 의해 認識된 이런 종류의 自性은 그러한 視覺의 錯亂이 치유된 聖者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보여지지 않는 것으로 認知되며, 내가 언급할 경우에 이러한 性質을 諸法의 固有한 形態 즉 諸法의 自性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特性은 諸佛이 그것을 定義하였듯이 "非人爲的이며 他者에서 獨立된 自性"으로서 認知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存在도 아니며, 단지 非存在인 까닭에 非生成을 本質로 하는 이와 같은 自性은 오로지 無自性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事物의 自性은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世尊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러 性質을 性質아닌 것으로 認知하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性質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떠한 性質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標徵도 없는 禪定(三昧)에 도달한다.'208)

 

『中論』은 空性을 江을 건너고 난 뒤에 버리는 뗏목(kaula)에 비유하고, 病을 치료한 뒤에 버리는 藥(bhai ajya)에 비유하고, 잘 다루어야 되는 財寶를 지니고 있는 뱀(alagarda)에 비유하며, 정확히 發音해야되는 呪文(vidy )에 비유하고 있다.209)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結論을 내린다.

 

"勝利者들은 空을 一切의 邪見의 排出口라고 宣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空性을 믿는 者들을 不治의 사람들이라고 宣言하였다."210)

 

이러한 不可知論的 立場을 채택함으로써 『中論』은 說一切有部(Sarv stiv din)의 實在論과 瑜伽學派(Yog c ra)의 觀念論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

"여기서 一部의 사람들은 세 가지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들 즉 空間과 知에 기인하지 않는 寂滅과 涅槃을 고안해 내었다.211) 또 다른 일부의 사람들은 事物들의 眞如로서 定義된 空을 條件지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212)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明白하다. 그 까닭은 條件지어진 것은 存在하지 않기 때문이다."213) 그렇지만 『中論』의 不可知論的 立場을 진부한 虛無主義와 混同해서는 아니 된다.214)

 

『維摩經』에서도 空을 實體化하기를 拒否하고, 經驗에 대한 根據를 無明이외의 다른 것으로 認定하기를 拒否한다.

生함이 없고 滅함이 없는 眞如(tathat )는 生하지도 않으며, 滅하지도 않는다. 一切衆生의 眞如, 諸法의 眞如, 諸菩薩의 存在樣式, 바로 이것은 또한 당신 자신의 存在樣式이다. 오! 彌勒(Maitreya)이여····  그러한 眞如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혹은 多數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Ⅲ,§51). 如來 (Tath gata)께서 말씀하시기를 참된 存在樣式(眞如)은 바로 般涅槃(Parinirv a)이라고 하셨다(Ⅲ,§51). 모든 想은 空性으로서 비어있다. 想은 곧 空이다. 그러므로 空은 空을 생각하지 않는다. 空은 62種類의 邪見속에 있고, 그러한 邪見들은 諸佛의 解脫속에 있고, 諸佛의 解脫은 一切衆生의 최초의 생각이 활동하는 가운데 있다(Ⅳ,§8). 諸法은 惡法이든 善法이든 生하지도 않고 滅하지도 않는다. 諸法은 根源으로서 集積(聚)을 가지며, 集積의 根源은 渴愛이며, 渴愛의 根源은 妄想이며, 妄想의 根源은 왜곡된 認識이며, 왜곡된 認識의 根源은 無所依이며, 無所依는 어떠한 根源도 갖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一切의 法이 無所依에 根據하는 이유이다(Ⅵ,§5-6).

至高의 覺은 無所依에 根據한다. 어떤 根據가 없다면, 그 누가 至高의 覺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나는 얻을 바가 없었기에 賢聖의 상태를 얻었다. 覺에 이르는 것도 이와 똑같다. 성취할 아무 것도 없었기에 覺을 성취했던 것이다.(Ⅵ,§16). 色과 그 밖의 다른 蘊들은 空하다. 空이 존재하는 것이 色의 파괴에 의한 것은 아니다. 色의 自性이 空인 것이다(Ⅷ,§17).

 

絶對的인 것이 순수하고 단순한 非存在로서 認識되든 혹은 眞實한 存在樣式으로서 認識되든 간에 一群의 類似한 同義語들이 佛典속에 明示 되어있다.215) 『維摩經』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語彙는 "存在樣式"을 의미하는 眞如,  法界(Dharmadh tu), 空( nyat ), 眞實際(Bh tako i), 平等性(Samat ), 不二, 般涅槃(Parinirv a), 無所依(Aprati h na)이다.216)

『維摩經』의 觀點에서 이러한 絶對的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3) 『維摩經』의 淸淨心

 

『維摩經』, 弟子品 第三의 '戒와 淸淨心에 대한 說法'(ChⅣ,§34)에서 '衆生이 마음의 染汚에 의해 더럽혀지고, 마음의 淨化에 의하여 淨化된다'고 說하신 부처님의 말씀에서 '마음의 性質은 본래 淸淨하고 無染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瑜伽學派는 阿賴耶識과 唯識의 存在를 說明하기 위하여  『維摩經』의 바로 이와 같은 句節에 근거를 삼았었다. 그렇다면, 『維摩經』을 『解深密經』이나 『入楞伽經』이나 『勝 經』등과 같이 觀念論的 傾向을 지닌 大乘經들속에 위치시켜야 되는 것일까?  論者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維摩經』이 說하는 淸淨心(the Pure Mind)은 『維摩經』의 文脈에서 살펴볼 때, '마음이 아닌 것'으로 解釋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217)

 

이제 여기에 佛敎哲學에서 "마음(Mind)"에 관한 槪念이 發展해온 內容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正統的 佛敎의 "心"

 

전통적으로 佛敎는 마음(citta)을 主題로 하여 諸 敎說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端緖를 雜阿含經에서 考察해보려고 한다.

 

侍者 比丘 羅陀(Radha)가 여쭈었다. 世尊이시여, 이른바 衆生이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라아다에게 말씀하셨다. 物質에 執着하고  얽매이는 것을 衆生이라 하며, 느낌·생각·지어감·意識에 執着하고 얽매이는 것을 衆生이라 하느니라.(以上은 122經)

 

라아다여, 너는 마땅히 存在의 몸과 그 모임과 그 멸함과 그 멸하는 길의 자취를 알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을 存在의 몸(有身)이라 하는가? 이른바 五陰이니 色陰·受陰·想陰·行陰·識陰이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그의 모임(集)이라 하는가? 이른바 未來의 存在에 대한 사랑과 貪慾과 기쁨이 함께 어울린 것이니라. 어떤 것을 存在의 몸의 滅함이라 하는가? 이른바 未來의 存在에 대한 사랑과 기쁨이 함께하는 것을 남김없이 끊어버리고 다하여 涅槃함이니라. 어떤 것을 存在의 몸을 滅하는 길의 자취라 하는가? 이른바 八正道이니 곧 正見·正志·正語·正業·正命·正方便·正念·正定이 그것이니 라.(以上은 123經)

 

위의 經說에서218) 우리는 人間의 本質的인 構造 및 마음의 狀態를 읽을 수 있다. 衆生 즉 人間은 五蘊에 執着하여 얽매인 存在임을 意味하는데, 人間이 五蘊으로써 構成되는 것은 바로 人間의 愛貪心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人間=五蘊=愛貪心의 關係가 成立되는데, 이중에 愛貪心은 마음의 여러 가지 作用가운데의 하나이다. 愛貪心 때문에 人間은 五蘊으로써 構成되고 거기에 執着하고 있는 것이다.

 

『雜阿含經』卷2에,219)

 

尊이시여, 그 五蘊은 무엇을 根本으로 하고, 무엇을 原因으로 하며, 무엇으로써 나고, 무엇으로써 부디치(觸)나이까? 世尊은 그 比丘에게 말씀하셨다. 五蘊은 慾心이 根本이 되고(欲爲根), 慾心이 原因이 되며(欲集), 慾心에서 나며(欲生), 慾心으로써 부디치느니라(觸).

 

위의 經說을 살펴보면, 마음이란 五蘊으로 構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雜阿含經 卷2의 所說에 立脚한 崔昌述 敎授의 圖表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色(r pa, 물질) -----------四大 -+   名色(n ma-r pa) ←+    

        │   受(vedan , 느낌)  ------+       |                     |      

   心 ─┤   想(sa j , 생각)        +- 觸 --+                     |      

   ↑   │   行(sa sk ra, 지어감) ---+                             |        

   └→ └─ 識(vij na, 인식) ←----------------------------------+

 

시 여쭙겠나이다. 世尊이시여, 무슨 因緣으로 色陰이라 하며, 무슨 인연으로 受·想·行·識陰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그 比丘에게 말씀하셨다. 四大를 因緣함으로써 色陰이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色陰은 四大를 인연하는 까닭이니라. 그리고 觸을 인연함으로써 受陰·想陰·行陰이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受·想·行陰은 觸을 因緣하는 까닭이니라. 또한 名色을 인연함으로써 識陰이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識陰은 名色을 因緣하는 까닭이니라.

위의 經說을220) 살펴보면, 觸(spar a)이 注目된다. 내용상으로 觸은 우리의 日常的인 精神作用인 知(mind), 情(heart), 意(will)를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受는 본래 느끼는 感覺作用을 뜻함으로 情的인 마음(heart)이고, 想(sa jna)은 知覺的 作用이므로 知的인 마음(mind)이며, 行(sa k ra)은 衝動·意志的 形成力 같은 것이므로 意志的 마음(will)인데, 위의 圖表에서는 이 세 가지를 觸이라 일컫고 있다. 즉 觸을 因緣함으로써 受·想·行(情·知·意)이 成立되고 있다. 觸(spar a)이란 '닿다, 接觸하다'에서 온 말이므로 對象(色)에 닿아 作用되는 精神的인 機能을 의미한다. 이때 그 精神的인 것, 즉 觸을 名(n ma)이라고도 하므로 결국 名色이라는 것은 '精神+物質'을 뜻하는 用語이다. 그런데 識은 좁게는 觸이나, 名에 該當하는 精神的인 것이기도 하며, 넓게는 名色 모두를 의미한다. 色·受·想·行을 총괄적으로 명칭하는 것으로서 識은 다시 心(citta)과 同格으로 쓰인다.221)   

 

 ① 위의 經說을 살펴 볼 때, 經典의 一般的인 傾向은 明白하며, 心(citta)·意(manas)·識(vij na)은 同義語들이다. 識은 다섯번째의 集積(蘊, skandha)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蘊들과 마찬가지로 識은 無常하고 苦이며 無我이다.

 

"心·意·識이라 불려지는 것은 밤과 낮의 不斷한 變化속에서 生하고 滅한다. 마치 원숭이가 숲속에서 뛰놀며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다시 버리고 또 다른 나뭇가지를 잡듯이, 心·意·識이라고 불려지는 것도 밤과 낮의 끊임없는 變化속에서 生滅하는 것이다."222)

 

緣起의 過程가운데서 識(vij na)은 行(sa sk ra)에 의해 條件지어지며, 識 그 자체는 名色(n mar pa) 즉 存在에 대한 心理的·肉體的 現象의 條件인 것이다.

'만일 識이 어머니의 품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名色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며, 만일 識이 어머니의 품속에 들어간 뒤에 그 識이 사라져버린다면 名色은 태어나지 않을 것이며, 만일 識이 어린이나 젊은 남녀에게서 사라진다면 名色은 더 커지지도 않고 자라거나 발전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理解하여야 한다.223)   

 

 ② 그러나 經典속에서 마음(心)에 좀더 확고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句節들을 우리는 찾아볼 수가 있는데, Sa yutta-nik ya (相應部), I, p.39, 10∼11등에 "世界는 마음에 의하여 引導되고 마음에 의해 조종된다. 모든 것은 이 唯一한 法 즉 마음(心)에 복종한다"하고 說하여 있다.

한 A guttara-nik ya(增支部), I, p.10, 5∼8등에 "이 마음(心)은 光明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때때로 偶發的인 煩惱에 의해 汚染된다. 또한 때때로 偶發的인 煩惱에서 解脫한다"라고 설하여 있다.

시Sa yutta-nik ya,Ⅲ,pp.151,31∼32,152,8∼9와 Vimalak rti-nirde a,Ⅲ,§34와 Siddhi(唯識頌), p.214, 421등에도, "마음의 汚染으로 인하여 一切衆生은 汚染되었다. 比丘들이여, 마음의 淨化에 의하여 一切衆生은 淸淨하게 되었다"라고 說하여 있다.

 

(2) 『維摩經』의 "淸淨心"

 

다시 『維摩經』으로 돌아와서 살펴보면, 우리는 Ch.Ⅲ,§34에서 다음과 같이 說해지고 있음을 注目해야 할 것이다. 즉 본래 자연히 淸淨한 마음은 결코 汚染되지 않았고 眞如와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維摩經』에서 淸淨心과 다르지 않은 이러한 眞如는 단순한 非存在(abh vam tra)이다. 실제로 『維摩經』은 『般若波羅蜜經』과 『中論』을 본받아서 空을 實體化하는 것을 拒否하며, 經驗에 어떤 根據를 두는 것을 인정치 않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즉 "諸法은 根據없는 根源에 依據한다"라고 『維摩經』은 說하고 있다.

 

『維摩經』의 眞如(Tathat )가 단순한 非存在라면, Tathat 와 다르지 않은 바로 이러한 淸淨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淸淨心은 오로지 'Non-mind Mind' 또는 'Non-thought Thought', 즉 '心非心'인 것이다.224)

그런데  '心非心'(Non-thought Thought)의 理論은 이미 『般若波羅蜜經』들에 의해 명확히 서술되어 있었는데, 단지 사람들이 注目하지 않고 지나쳤던 것이며, 사실상 이 句節이 이미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는 『道行般若經』(A as hasrik )225)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또한 『放光般若經』(Pa cavi atis hasrik )226)속에도 충실히 표현되어 있으므로 이 '心非心' 理論은 확실히 信賴할 수 있는 眞實性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須菩提(Subh ti, 善現)가 말하기를 '智慧의 完成(般若波羅蜜)을 追求하는 菩薩摩訶薩은 諸法과 色등을 認識해야 하고, 菩薩心 즉 無等의 고귀한 마음인 覺心을 認識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에 執着해서는 안된다.227) 왜 그런가? 이러한 覺心은 非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心의 본래의 性質은 빛을 發하는것(覺)이기 때문이다.'228)

舍利弗( riputra)이 須菩提(Subh ti, 善現)에게 묻기를, ' 須菩提여, 그러면 이 마음이 빛을 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 須菩提가 대답하기를, '이 마음이 貪·瞋·癡와 煩惱의 엄습과 諸障碍와 그밖에 다른 邪見들과 結合된 것도 遊離된 것도 아닌 그 사실, 이것이 舍利弗이여, 바로 이 마음이 光明에 차 있다는 것이다.'

舍利弗이 묻기를, '須菩提 尊者여, 그러면 心非心(Non-thought Thought)인 이 마음은 도대체 存在하는 것인가요? '

須菩提가 다시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舍利弗 尊者여, 마음(心)이 없는 곳에 마음의 有·無의 槪念이 있으며, 또는 그것이 知覺되는 것일까요? '

舍利弗이 대답하기를, '진정 그렇지 않습니다. '須菩提 尊者여.'

須菩提가 다시 말하기를, '만약 마음이 없는 그곳에서 마음의 有·無의 개념을 찾을 수 없고, 知覺할 수도 없다면,  舍利弗이여, 心非心(Non-thought Thought)이라는 그 마음이 存在하는지를 묻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舍利弗이 다시 묻기를 , '須菩提 尊者여, 그렇다면 마음이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

須菩提(Subh ti, 善現)가 다시 대답하기를, '變異도 槪念도 없이 생각이 없는 것, 一切의 諸法의 法性, 舍利弗이여, 그것이 바로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요.'229)

위에서와 같이 가장 오래된 『般若波羅蜜經』들에서 확인되고 있는 이와같은 句節은 『勝天王般若波羅蜜經』(Suvikr ntavikr min, pp.85, 15∼86,5)에서 확인되는 다음과 같은 句節과도 비교해 보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認知할 수가 있다.

 

菩薩은 衆生의 偏見, 즉 그릇된 생각에서 나온 偏見을 잘 알고 있으나, 그는 결코 이러한 邪惡한 妄執에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智慧의 完成, 즉 般若波羅蜜은 생각이 없는 까닭에, 타고난 마음의 光明性 즉 본래 淸淨한 마음에는 어떤 마음의 生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俗物들이 생각을 일으킴은 바로 어떤 對象앞에서이다. 對象을 아는 菩薩은 또한 생각을 일으키는 '메카니즘'도 안다. 그러면 생각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菩薩은 마음이 본래 光明으로 차있음을 알고서, 스스로 말하기를 '對象때문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한 對象이 그릇된 것임을 認知하고 나서 菩薩은 어떤 생각도 生滅하게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마음은 光明으로 차 있고, 汚染되어 있지 않으며, 慈悲로우며, 완전히 淸淨하다. 菩薩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어떤 法도 生함이 없고 또한 滅함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般若波羅蜜經』과 『中論』(Madhyamaka)에 있어서 스스로 빛을 發하는 마음은 淸淨하고 순수하게도 마음이 存在하지 않는 것이다. 現象世界에 대한 어떠한 根據도 否定하는 『維摩經』에 있어서(Ⅵ,§5∼6), 第3章 34項에서 말하는 '빛을 發하는 마음' 즉 覺心은 결국 一切의 마음의 不在함 즉 非心 또는 無心인 것이다. 『維摩經』은 말하기를, "마음은 物質이 아니고, 볼 수도 없고, 依支하는 바 없으며, 不可了知(avij aptika)인 것이다"230) 라고 說하고 있다.

러한 '心의 순수하고 단순한 非存在'(pure and simple inexistence of thought)인 淸淨心 즉 '心非心'은 現象世界에 대한 어떠한 根據도 否定하는 『維摩經』의 禪觀의 核心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根據가 될만한 經說이 E. Lamotte의 『維摩經』, Chapter 6,§4∼6의 'Baselessness'에 잘 나타나 있으며, 羅什譯인 漢譯 『維摩詰所說經』, 觀衆生品 第7의 '無住라는 根本'이 이에 該當된다.

 

〔無住라는 根本〕231)

 

4. 文殊師利가 또 묻기를, "生死輪廻에 두려움이 있는 菩薩은 무엇에 依支

   해야 합니까?"

   維摩詰이 대답하기를, "菩薩이 生死輪廻에 두려움이 있을 때에는 마땅

   히 如來의 功德의 힘에 依支해야 합니다."

   文殊사리가 또 묻기를, "菩薩이 如來의 功德의 힘에 依支하고자 할 때

   에는 어디에 住해야 합니까?"

   維摩詰이 대답하기를, "菩薩이 如來의 功德의 힘에 依支하고자 할 때에

   는 마땅히 一切衆生을 濟度하여 解脫케 하는 일에 住해야 합니다."

5. 또 묻기를, "衆生을 濟度하고자 원하면 마땅히 무엇을 除去해야 합니         까?"

   대답하기를, "衆生을 濟度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그 煩惱(kle a,

   passions)를 除去해야 합니다."

   또 묻기를, "煩惱를 除去하고자 하면 마땅히 무엇을 行해야 합니까?"

   대답하기를, "마땅히 正念을 行하여야 합니다."

   또 묻기를, "正念을 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하기를, "不生不滅하도록 行해야 합니다."

   또 묻기를, "무엇이 不生이고 무엇이 不滅입니까?"

   대답하기를, "不善이 不生이고 善法이 不滅입니다."

   또 묻기를, "善과 不善은 무엇을 根本으로 삼습니까?"

   대답하기를, "身(k ya, accumulation, 모이고 쌓인 것)을

   根本으로 삼습니다."

   또 묻기를, "身은 무엇을 根本으로 삼습니까?"

   대답하기를, "貪慾이 根本이 됩니다."

   또 묻기를, "貪慾은 무엇이 根本이 됩니까?"

   대답하기를, "虛妄分別이 根本이 됩니다."

6. 또 묻기를, "虛妄分別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顚倒되는 妄想이 根本이 됩니다."

   또 묻기를, "顚倒되는 妄想의 根本은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無住232) (依支할 곳이 없는 狀態, aprati h na,

   the absence of a basis)가 根本이 됩니다"

   또 묻기를, "無住는 무엇을 根本으로 삼습니까?"

   대답하기를, "無住는 곧 根本이 없습니다. 文殊師利여, 無住라는 根本으

   로부터 一切法이 成立되는 것입니다."라고 維摩詰이 말했다.

 

以上의 經說에서 살펴볼 때, 『維摩經』에서는 空을 實體化하기를 거부하고, 經驗에 대한 根據를 無明이외의 다른 것으로 認定하기를 拒否하고 있음을 우리는 감히 看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現象世界에 대한 어떤 根據도 否定하는 『維摩經』에 있어서 '빛을 발하는 마음' 즉 覺心인 '淸淨心'은 결국 一切의 마음의 不在함, 다시 말하면, 非心 또는 無心인 것이다.  

 

2. 『維摩經』의 科段에 드러난 禪思想

 

以上에서 드러난 『維摩經』의 淸淨心 즉 '心非心'을 證得하게 하고, 그로 인한 維摩詰의 方便을 통하여 衆生을 濟度하려는 이른 바 大乘佛敎의 上求菩提·下化衆生의 願力을 示顯하려고 하는 것이 이 經의 根本 趣意라고 論者는 생각하고 있는 바, 이러한 雄大한 스케일의 構成을 內含하고 있는 『維摩經』의 禪思想을 洞察하기 위해서 부득이 이 經의 科段을 통하여 우선 全體의 構成을 보여주고 나서 점차 『維摩經』의 禪思想의 核心內容을 考察해 보려고 한다.

 

 

1) 3分14品의 科段

 

대개 一經을 序分, 正宗分, 流通分의 三段으로 나누어보는 것이 佛典註解의 通則으로서 이러한 三分에 의해 一經의 主旨를 쉽게 把握할 수가 있다.

이 經의 構成을 살펴보면, 全部 3分 14品으로 나누어진다. 3分이라 함은 이 經의 序論에 該當하는 것을 序分이라 하고, 本論에 該當하는 것을 正宗分이라고 하며, 結論에 該當하는 것을 流通分이라고 하는데, 이를 圖表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通序

序分 -+        +- 原起序          

      +- 別序 -+- 述德序

               +- 顯德序

 

        +-- 方丈會

正宗分 -+      

        +-- 庵羅會

 

        +-- 流通緣由

流通分 -+                  

        +-- 附囑流通

 

그리고 『維摩經』의 14品은 다음과 같다.

 

① 佛國品 ② 方便品 ③ 弟子品 ④ 菩薩品 ⑤ 問疾品

⑥ 不思議品 ⑦ 觀衆生品 ⑧ 佛道品 ⑨ 入不二法門品

⑩ 香積品 ⑪ 菩薩行品 ⑫ 見阿 佛品 ⑬ 法供養品 ⑭ 囑累品

 

따라서 聖德太子가 撰述한 『維摩經義疏』에 의해 3分 14品을 서로 結付시키면 다음과 같다.233)

 

       +-- 通序  --------------------- 佛國品①

序分  -+          +--  原起序 -------- 佛國品①

       +-- 別序  -+--  述德序 -------- 方便品②

                  |                +-- 弟子品③

                  +--  顯德序  ----+    

                                   +-- 菩薩品④

 

                                   +-- 文殊師利問疾品⑤

                      +--化上根 ---+                    

                      |            +-- 不思議品⑥

         +- 方丈會 ---+                                    

         |            |            +-- 觀衆生品⑦

         |            +--化中根 ---+                    

         |            |            +-- 佛道品⑧

正宗分  -+            |                                

         |            |            +-- 入不二法門品⑨

         |            +--化下根 ---+                      

         |                         +-- 香積佛品⑩

         |                                              

         |            +--維摩來詣 ---- 菩薩行品⑪        

         +- 庵羅會 ---+                                

                      +- 維摩示本 ---- 見阿 佛品⑫

 

                                   +-- 見阿 佛品⑫

         +- 流通緣由 --------------+  

         |                         +-- 法供養品⑬

流通分  -+

         +- 附囑流通 ----------------- 囑累品⑭

                                       

以上과 같이 『維摩經』은 全部 3分 14品으로 構成되어 있는데, 그 內容을 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① 佛國品 : 부처님께서 어느날 毘耶離城의 菴羅樹園에서 說敎하실 때, 이곳에 寶積이라는 한 長者의 아들이 五百長者의 아들들과 함께 각각 손에 天蓋를 들고 와서 이것을 부처님께 供養하며 가르침을 청하자, 부처님은 佛國의 莊嚴을 나타내시면서 「心淨하면 佛土淨한다」는 說法을 하신다.

이 經의 序文에 該當하는 品들은 「佛國品」외에도 「方便品」·「弟子品」·「菩薩品」이 있다. 이 「佛國品」의 첫머리에 六成就(信·聞·時·主·處·衆)가 들어 있다. 이 六成就는 모든 佛經에 共通으로 쓰이는 內容이므로 이를 通序라고 한다. 그리고 寶積이 나오는 대목부터는 이 經을 말씀하게되는 특별한 動機를 말한 것이므로 여기서부터는 別序가 된다.

② 方便品 : 本經의 主人公인 維摩詰이 登場하는데, 方便으로 病이 들어 問病오는 사람들을 接見하며 法을 說한다. 方은 智慧의 極致를, 便은 그러한 智慧로써 衆生을 제도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 經의 主人公인 維摩居士가 根機를 따라 衆生을 饒益하게 해주는 手段과 方法을 말한 것이다. 이 品도 序分에 해당하며, 別序중의 述德序로서 維摩詰의 德을 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이 몸은 無常하고 無我이며 싫어할만한 存在이기 때문에, 維摩詰은 좋아해야할 存在로서 佛身을 얻는 方法을 說하고 있다.

③ 弟子品 : 부처님께서 弟子들을 보내어 問病하도록 권하시지만, 舍利弗과 目連등을 비롯하여 十大弟子들 거의 모두가 問病가기를 주저한다. 이 「弟子品」과 다음의 「菩薩品」을 합쳐서 顯德序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弟子 및 菩薩들이 모두 維摩詰에게 苛責을 당함으로써 維摩詰의 德을 더욱 빛내주기 때문이다.

④ 菩薩品 : 十大弟子는 물론 五百의 大弟子들이 모두 問病가기를 辭讓하므로 부처님께서는 彌勒菩薩을 비롯하여 八千의 菩薩에게 問病가기를 권하시지만 모두다 감당할 수 없으므로 辭讓하게된다. 이 「菩薩品」도 역시 菩薩들의 말을 통하여 維摩詰의 學識과 德을 드러내었으므로 顯德序에 속한다.

⑤ 文殊師利問疾品 : 마침내 智慧第一인 文殊菩薩이 부처님의 命을 받고 問病을 가기 위해 떠나간다. 維摩居士와 文殊菩薩사이에 마치 龍虎相搏하는 大問答이 展開되면서 큰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을 豫想하고 수많은 菩薩과 佛弟子들이 모두 따라간다. 왜냐하면 文殊師利菩薩은 부처님의 弟子들 가운데 智慧와 辯才가 첫째가는 큰 菩薩이기 때문이다. 이 經의 正宗分가운데 이 「問疾品」과 「不思議品」은 上根의 사람들을 敎化하기 위해서이고, 「觀衆生品」과 「佛道品」은 中根의 사람들은 敎化하기 위해서이며, 「入不二法門品」과 「香積佛品」은 下根의 사람들을 敎化하기 위해서 說해진 法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經의 眞髓는 이 正宗分가운데에 전부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된다.

⑥ 不思議品 : 그런데 維摩居士의 方丈은 너무나 狹小하여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維摩가 不思議를 나타내어 須彌燈王佛의 須彌燈國에서 높이 八萬 四千 由旬이나 되는 廣大한 高座를 三萬二千개 정도나 빌려와서 이 작은 방에 넣고, 또한 須彌山을 芥子안에 넣기도 하고, 大海水를 毛孔속에 넣는 등의 재미있는 內容이 들어있다. 이와 같이 『維摩經』은 始終一貫 思議할 수 없는 解脫을 說하고 있지만, 특히 이 品은 上根의 자들을 위하여 가지가지의 思議 할 수 없는 일들을 밝히고 있으므로 「不思議品」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마음의 本性은 淸淨하며 本來 無一物이다. 그런데 이 肉體를 實有한 것으로 보고 그것에 執着함으로 인하여 煩惱가 일어난다고 한다. 본래 淸淨한 마음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더러운 것을 거울에 비추어도 거울자체는 더러워지는 일이 없다. 維摩는 이처럼 無相한 眞理의 立場에 서서 事物은 본다. 維摩는 아무 것에도 拘束되지 않는 자유로운 境地에서 살아간다.

彌山과 芥子씨는 極大와 極小의 不同함이 存在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表面의 모습에 지나지 않으며, 그 本性에서 보면, 須彌山도 法界속에 있고 芥子씨도 法界속에 있다. 本性에서 보면 모든 것이 法界속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法界를 華嚴哲學에서는 事事無碍法界라고 부른다.

우리는 瞬間속에서 無限의 時間을 느낄 수 있고, 一微塵中에 全 宇宙가 內包되어 있음을 實感할 수도 있다. 또한 無限大와 無限小가 하나인 것도 感知할 수 있는데, 그것은 一切가 空이라는 것을 直觀하였을 때, 즉 不可思議解脫에 들어갔을 때이다.234) 不可思議라고 하는 말은 凡夫의 생각이나 말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深奧하고 神秘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法(眞理)은 無念·無相·無住의 心非心 즉 淸淨心의 境地로서 見聞覺知의 對象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不可思議解脫의 境地에서 일어나는 神變을 說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不思議品」인 것이다.

⑦ 觀衆生品 : 以上에서 不可思議解脫을 說한 維摩는 이제 眞理란 무엇인가를 밝혔으므로 그 다음에 이 「觀衆生品」에서는 人間이란 무엇인가를 說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佛敎를 修行하는 菩薩이 衆生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說한 것이 「觀衆生品」이다. 一切가 空인 가운데 人間이란 어떤 存在인가가 문제로서 대두된다. 특히 天女를 登場시켜서 小乘佛敎의 男尊女卑思想을 批判하고, 大乘佛敎에서 提唱하는 男女平等의 思想을 高揚시키는 내용은 注目할만한 것이라고 論者는 생각한다. 요컨대 佛敎는 人間學이라고 해도 좋으며, 人間學이라고 해도 經驗을 통하여 人間이 人間을 分析하여 理解하려는 것이 아니라, 人間이 人間을 超越한 佛의 世界에서 人間을 보려고 하는 것이 佛敎의 立場이다.235) 無限의 時間과 空間에서 보면, 人間存在는 大海에 떠 있는 물거품과 같은 存在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 人間은 永遠한 眞理의 길을 찾아서 그러한 眞理에 부합되는 眞實한 삶을 營爲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⑧ 佛道品 : 부처님의 道라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微妙한 깨달음의 內容으로서 이 品에서는 이러한 道理를 밝혔으므로 「佛道品」이라고 일컫는다. 凡夫들은 부처님의 道理가 아닌 것을 옳다고 믿고 그곳에 머문다. 이것을 '부처님의 도가 아니다'고 일컫는다. 菩薩들은 衆生을 濟度하기 위하여 三惡道의 衆生世界에 머무르면서도 그 根本을 잃지 아니한다. 따라서 부처의 道가 아닌데 있으면서도 부처님의 道를 드날린다.

⑨ 入不二法門品 : 大乘佛敎의 眞髓인 不二의 道理를 說한다. 게다가 究極의 眞理는 말로써 說할 수 없다고 하면서, 維摩는 沈默으로써 一語도 發하지 않았다. 이것이 有名한 「維摩의 一默, 聲雷와 같다」고 일컫는 것이다.236) 이 品에서 32人의 훌륭한 菩薩들이 不二에 대하여 각각의 깨달은 見解를 說했는데, 최후에 維摩의 一默에 의해 不二의 絶對境地를 보여주었다. 絶對의 境地는 말로 表現할 수 없고, 다만 沈默에 의해서 나타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둘이 아닌 法門은 佛法의 最高의 要諦이며, 不二의 論理的 根據는 바로 空思想임을 쉽게 看破할 수 있다. 空이란 緣起論的으로 一切의 事物이 存在하기 때문에 非有非無의 中道的 立場에서 說明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香積佛品 : 이러한 問答중에 食事時間이 되자, 이에 維摩는 不思議를 나타내어 香積佛의 衆香國에서 香飯을 얻어와서 이것을 會衆에게 대접한다. 위의 「入不二法門品」과 더불어 이 品은 下根의 사람들을 敎化하는 내용이다. 沈默이 眞空이라면, 이러한 眞空에서 妙有의 「不可思議解脫」이 自由自在로 作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같은 妙有의 作用을 縱橫無盡하게 說하는 것이 이 「香積佛品」의 課題이다.237)

⑪ 菩薩行品 : 維摩가 方丈을 나와서 文殊菩薩과 함께 菴羅樹園에 계시는 부처님의 處所에 이른다. 이 品을 특히 「菩薩行品」이라고 이름한 것은 부처님께서 衆香國에서 온 여러 菩薩들을 위하여 菩薩이 행하여야할 道理를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앞의 「香積佛品」에서는 維摩居士의 方丈에서 가지가지의 不思議한 光景을 나타내 보였으나, 이 「菩薩行品」에서는 場面이 바뀌어 菴羅樹園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說法하신다. 그것은 世俗의 維摩居士가 說한 內容이 부처님의 말씀과 같은 뜻임을 證明하여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見阿 佛品 : 維摩居士가 가히 思議할 수 없는 神通의 힘으로써 大衆들로 하여금 維摩의 本據인 妙喜國의 無動부처님과 그 나라를 보게 하였으므로 「見阿 佛品」이라고 이름하였다. '阿'는 梵語의 音譯으로 '無'의 뜻이며, ' '은 '動'의 뜻이므로 阿 佛은 곧 無動佛을 의미한다.

⑬ 法供養品과 ⑭ 囑累品은 이 經의 流通을 나타낸 것이다.

 

위의 十四品에 대해 그 場面을 나누면, 第1 「佛國品」에서 第4 「菩薩品」까지는 菴羅樹園의 場, 第5 「問疾品」에서 第10 「香積品」까지가 維摩方丈의 場, 그 以下는 다시 菴羅樹園의 場으로, 1曲 3場의 觀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維摩方丈의 場으로서 이것과 第11 「菩薩行品」과 第12 「見阿 佛品」의 一部分을 正宗分이라고 하여 一經의 眼目으로 하고, 그 앞의 4品은 序分이며, 끝의 2品은 流通分으로 一經의 結辭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238)

 

2) 3分14品의 核心的 禪思想

 

『維摩經』의 梵語 經題인‘Vimalak rti-nirde a’가 含蓄하고 있는 뜻은 무엇인가? Vimala는‘淨·無垢·離垢·淸淨’의 뜻이고, k rti는‘稱·稱讚·讚嘆’의 의미이며, nirde a는‘說·所說·宣說’의 뜻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梵語 原題인‘Vimalak rti-nirde a’가 含蓄하고 있는 뜻은 ‘淸淨을 讚嘆하여 그 뜻을 宣說한다’는 것으로 論者는 이미 그 核心的 禪觀을 把握하고 있다. 要約하여 말하자면, 經題 그 自體에 이미 이 經의 核心的 禪觀이 內包되어 있다고 해도 誇言이 아닐 것이다. 종종 國內外의 여러 學者들이 『維摩經』을‘名聲을 깨끗이 하는 經典’이라고 誤譯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解釋은 좀더 깊은 省察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k rti’에 名聲(fame)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經題에서는 ‘稱·稱讚·讚嘆’의 뜻으로 理解해야 옳은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論者의 이와 같은 主張은 다음과 같은 글 속에서도 立證되고 있다.

"淨名이라는 二字에 대해 『宗鏡錄』에서 '淨'字를 풀이하여 「卽 이것은 一切衆生의 自性淸淨心으로, 이러한 心은 맑히지 않아도 저절로 맑고, 닦지 않아도 저절로 빛나며, 凡夫에 있어서도 때묻지 않고, 聖賢에 있어서도 더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自性이 淸淨하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名'字에 대해서 「이른바 名이란, 心은 본래 形體가 없고, 단지 이름뿐인 까닭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淨名'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本來 갖추고 있는 自性淸淨의 本心을 이르는 것으로, 멀리 無動佛이 계시는 妙喜世界를 찾거나 또는 印度의 毘耶離城을 찾지 않고도 가까이 우리들 本心에 維摩居士가 存在하는 것은 아닐까?239)"라고 말하고 있다.

                      이經題의 禪的 趣意와 관련하여 어떻게 하면 理想的인 國土를 建立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佛國品」의 主題이다. 이에 대하여 心을 淨하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心이 淸淨해지면 그 國土 즉 環境도 맑아진다고 하는 것이 「佛國品」에 있어서 佛의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毘耶離城의 長者                                                   아들인 寶積은 이 世上에 佛國土를 建立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衆生의 類, 이것이 菩薩의 佛土이다」라고 喝破하신다. 苦惱에 찬 衆生이야말로 菩薩의 佛土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思想이다. 이것은 곧 衆生의 마음속에 佛土가 存在한다고 하는 것이 이 「佛國品」이 指向하는 思想이다. 淨土라든가 理想의 佛國土라 하면 그것은 西方極樂國과 같은 理想國에 存在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다. 바로 이 穢土의 한가운데야말로 理想의 國土가 存在하는 것이다. 조금만 잘못하면 惡魔가 될 수 있는 우리들 心中에 理想의 國土가 存在하는 것이다.240)

그러므로 本稿에서 始終一貫하여 不斷히 追究해온 淸淨心을 回復하는 일은 理想的인 佛國土를 建立할 수 있는 土臺가 되는 동시에 大乘佛敎의 上求菩提하고 下化衆生한다는 雄大한 願力을 實現할 수 있는 原動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不思議品」第6은 維摩가 不可思議解脫에 대하여 說하는 部分이다. 우리의 分別을 超越하여 우리 凡夫들이 思議할 수 없는 世界를 說하는 것이 이「不思議品」이다. 그것은 維摩居士의 自由自在하고 無 한 境地를 나타내고 있다.

러면 維摩가 말하는 法 즉 眞理란 무엇인가? 法을 구하는 것 그 자체가 法에 反하는 것이 된다. 우선 法은 寂滅이지 生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生滅하는 法을 구한다면, 그것은 生滅을 구하는 것이 되어 法을 구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또한 法은 無染한 것이다. 이 無染한 法에 染着하면 法을 구하는 것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깨끗하고 汚染되지 않은 眞理라 하더라도 그것에 染着하면 法을 구하는 것이 되지 않는다.

또한 法에는 行處 즉 對象이 없다. 對象을 갖게되면 主客이 둘로 나눠지게 되어 그것은 分別이 된다. 法은 絶對 不二인 것이다. 그것을 主客의 對立으로 보는 것은 法을 求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또한 法에는 取捨가 없다. 取捨選擇하는 것은 絶對平等의 法에서 보면 我見의 作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法에는 處所 즉 場所 또는 存在가 없다. 어딘가의 場所에 있다고 생각하며 場所에 執着하면, 우리는 法을 얻을 수 없다.

法은 또한 無相이다. 相이 없는 法(眞理)을 對象으로서 認識할 수는 없다. 法은 또 無住이다. 無住인 것을 固定的인 것으로 捕捉하려한다면, 法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法은 또 見聞覺知의 對象이 되지 않는다. 見聞覺知에 의해 捕捉된 것은 진정한 法이 아니다. 法은 또 無爲이다. 有爲인 것을 아무리 구한다 해도 法은 구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維摩는 法을 寂滅, 無染, 無行處, 無取捨, 無處所, 無相, 無見聞覺知, 그리고 無爲로 보았던 것이다. 요컨대 法은 無相인 것으로, 一切의 對立을 超越한 곳에 存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無相인 것을 對象化하여 이것을 구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說하고 있는 것이다.241) 

흔히 『維摩經』의 禪思想의 中心은 「入不二法門品」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入不二法門品」에서는 많은 菩薩들에게 不二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게 한다. 우리는 生과 死, 善과 惡, 是와 非, 美와 醜, 長과 短등 서로 對立하는 모든 槪念을 내세워 이 둘은 절대로 하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維摩經』에서는 서로 對立하는 이것들을 不二로 본다. 우리의 知性은 事物을 항상 둘로 區別하기를 무척 좋아한다. 이처럼 分別하는 것이 知性의 作用임에 틀림이 없다. 확실히 事物을 區別하거나 差別하는 知性의 機能에 의해 우리의 知性은 고도로 발달하여 오직 人間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文化와 文明을 創造해온 것이 사실이다.

런데 佛敎에서는 이러한 知性의 作用을 分別이라고 부른다. 佛敎에서는 이러한 分別의 作用을 成立시키는 또 하나의 領域을 생각한다. 즉 無分別의 世界가 바로 그것인데, 無分別의 世界속에 分別의 領域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分別의 世界에 있어서는 生과 滅은 相反하는 槪念이지만, 無分別의 世界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가 不二인 것이다.242) 예를 들면, 植物의 種子가 滅하는 그 瞬間에 싹이 나오게 되는 것이므로, 싹(芽)이 生할 때와 種子가 滅하는 때는 同一하여 거기에는 前後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前의 心이 滅할 때 同時에 後의 心이 生하는 것이므로 眞實의 참모습에서 보면 生하는 것도 滅하는 것도  前後가 있을리 없고, 生과 滅은 같은 現象으로 한쪽에서는 生이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滅이라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生滅不二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眞理를 如實히 바라볼 수 있는 이러한 無分別智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證得할 수 있는 것일까? 『維摩經』에서는 '一切의 觀念이 滅한 것이 入不二이다(Ⅷ,§3)'라고 說하고 있다.243) 요컨대 '心非心' 즉 淸淨心을 證得함으로써 그러한 無分別智에 到達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境地는 不斷한 禪定을 통한 철저한 修行과 적어도 六波羅蜜을 통한 大乘菩薩行을 통해서만 可能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釋迦牟尼 부처님의 一生을 통한 禪定修行과 菩薩行을 한순간이라도 忘却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3. 不可思議解脫의 禪的 意義

 

1) 「不思議品」의 不可思議解脫과 神變

 

不可思議解脫(Acintyavimok a)을 說하고 있는 部分이 바로 「不思議品」 第6의 內容이다. 다음의 經說은 『維摩經』 「不思議品」 第6의 一節에 依據한 것이다.

 

維摩詰은 말하기를, "그와 같습니다. 舍利弗尊者여, 모든 부처님과 菩薩이 얻는 깨달음(解脫)을 不可思議라고 이름합니다. 만약 菩薩이 이러한 깨달음에 들면, 높고 廣大한 須彌山을 겨자씨 속에 넣고도 겨자씨가 불어나거나, 須彌山이 줄어드는 일이 없어서 須彌山이 으뜸 되는 산으로서의 본래 모양도 전과 같습니다. 그리고 四天王이나  利天은 자신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다만 장차 깨달음(解脫)을 얻을 수 있는 사람만이 須彌山이 겨자씨 안에 든 것을 알뿐입니다. 이것을 不可思議한 깨달음(解脫)의 境界에 住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244) 

 

위의 經文을 考察해 볼 때, 깨달음을 얻은 菩薩들이 衆生濟度를 위해 入出自在한 神通力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解脫하지 못한 우리들 衆生은 各者 자신이 思惟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一切의 事物에 대하여 斷定을 내리게 되고,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는 靈妙한 神通力을 갖춘 諸佛菩薩의 世界를 쉽사리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信心이 약하여 잘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만큼 精進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眞理의 世界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니, 굳건한 信心으로써 우리는 매일매일 精進力을 발휘하여 본래 갖추고 있는 淸淨心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橋本芳契는 私見임을 전제로 하여, 이 「不思議品」이 포함된 羅什 譯本의 卷中( 譯에서는 第3, 第4 兩卷)部分은 禪의 趣意임을 밝히고 있는데,245)  이 말은 「入不二法門品」 第9까지를 포함하여 禪的 趣意가 강한 것으로 보는 見解이고, 또한 「不可思議解脫」이라는 經題에도 禪的 趣意가 內包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Acintyavimok a를 이해하려면, 우선 이 「不思議品」 第6의 構成 內容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Lamotte의 科分은 매우 合理的인 것으로 생각된다. Lamotte의 「不思議品」 第6의 科分은 아래와 같다.246) 

 

 

   「不思議品」 (The Inconceivable Liberation) 第6의 科分

Ⅰ. 求法〔The Search for the Law〕··········(1∼5)

Ⅱ. 獅子座의 기적〔The Miracle of the Thrones〕····(6∼9)

Ⅲ. 不可思議解脫〔The Inconceivable Liberation〕····(10∼18)

Ⅳ. 가섭의 讚嘆〔K yapa's Wonder〕·· ·······(19)

Ⅴ. 魔王이 된 菩薩〔The Tempter-Bodhisattvas〕····(20) 

 

 

위의 科分을 「不可思議解脫」에 좀더 초점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金浩星敎授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科分을 하였다.247) 

 

                          ┌─── 床座의 不在 …… (1)

             ┌─ 序分  ─┤                  

             │           └─── 求法  …………… (2∼5)

             │        

             │           ┌──   神變  …………… (6∼9)

「不思議品」 ─┼─ 正宗分─┤                      

             │           └──   不可思議解脫 ……(10∼18)

             │    

             │           ┌─ ─  가섭의 讚嘆 ………(19)

             └─ 流通分─┤

                          └─── 魔王이 된 菩薩 …(20)

 

위의 科分은 Lamotte의 科分과 비교해 볼 때, 正宗分을 좀더 세분해 놓은 점에 차이가 있으며, 이렇게 세분해서 놓고 보면, 「不思議品」에서 意圖하고 있는 것이 바로 '獅子座를 매개로 한 ①神變과 ②不可思議解脫'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神變의 意味이다. 不可思議解脫과 神變은 不可分의 關係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玄 이 이 經의 副題를 「說無垢稱不可思議自在神變解脫法門」이라고 부른 데서도 살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神變이 示現되는 때가 維摩에 의해 不可思議解脫이 說明되기 전에 示現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不可思議解脫이 언어로써 說明될 수 없는 勝義諦의 眞如 그 자체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不可思議解脫은 깨달음 그 자체와 같은 位相을 갖는 것으로 여겨지며, 언어로써 解脫을 說明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不可思議解脫 그 자체를 言語가 아닌 神變으로 보여주며, 衆生救濟의 自在로운 活動을 통하여 示現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解脫의 世界를 神變을 통하여 보여주지만, 그것을 理解하지 못하는 衆生들을 위해서 또 다른 시도가 행해져야 하는 것인데, 「14神變」이 그것들이다. 그 부분이 바로 「不可思議解脫」의 章에 나오는데, 「獅子座의 기적」(6∼9)을 제외하고, 「不可思議解脫」의 章에만 국한하여 모두 14가지의 다양한 神變이 示現되고 있으며, 論者는 이것을 '「不可思議解脫」章의 14神變'으로 이름하여 아래에 정리하고자 한다. 14가지의 神變은 결코 譬喩가 아니며, 모든 부처님의 經說이 어리석은 衆生들을 최대한 理解시키기 위해 거듭거듭 반복하듯이, 「獅子座의 기적」 한가지로 충분치 못함을 看破한 維摩居士는 '「不可思議解脫」章의 14神變'을 示現하여 一切衆生에게 不可思議解脫의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不可思議解脫章의 14神變」

① 須彌山을 겨자씨 속에 넣기 ⑽

② 四大海의 바닷물을 하나의 털구멍 속에 넣기 ⑾

③ 三千大千世界를 오른쪽 손바닥 속에 움켜쥐기 ⑿

④ 七日을 一劫으로 연장하기 ⒀

⑤ 一切의 佛國土를 한나라 안에 모아 놓고 보여주기 ⒁

⑥ 一佛土의 衆生를 오른쪽 손바닥 안에 놓고 十方世界를 보여주기 ⒁

⑦ 모든 供養具를 하나의 털구멍 속에서 바라보기 ⒁

⑧ 十方國土의 日月星宿을 하나의 털구멍 속에 나타나게 하여

   보여주기 ⒁

⑨ 十方世界의 모든 바람·태풍과 폭풍 등을 菩薩의 입으로

    들여 마시기 ⒁

⑩ 十方世界의 모든 불[火]을 菩薩의 배[腹] 속으로 끌어들이기 ⒂

⑪ 一佛國土를 한 頂上에 올려놓기 ⒂

⑫ 佛身· 支佛·聲聞·帝釋天·梵王·世主·轉輪聖王으로 變身하기

⑬ 十方世界의 모든 소리를 佛聲으로 바꾸어 無常·苦·空·無我之音으로

   바꾸기

⑭ 十方諸佛의 說法의 소리를 언제 어디서나 듣게 하기  

 

以上에서 살펴본 '獅子座의 기적'과 '不可思議解脫章의 14神變'을 考察해 보면, 이러한 神變을 示現하는 '不可思議解脫'의 思想은 華嚴思想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華嚴經』의 주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入法界品」의 別名이 「不可思議解脫經」인 것도 『維摩經』과 『華嚴經』과의 類緣關係를 나타내고 있다.248) 이와 관련하여 Lamotte는 菩薩의 不可思議解脫을 說하고 있는 「不思議品」第6가운데 '不可思議解脫'章249)은 너무도 중요한 나머지 『維摩經』의 세 가지 經題 中에 하나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Lamotte는 '不可思議解脫'章 가운데 §18에 제시된 內容, 즉 "舍利弗이여, 내가 지금 菩薩의 不可思議한 解脫의 힘에 관해서 說한 것은 극히 간략한 그 일부일 뿐입니다. 만약 자세히 말하자면 劫이 다할 때까지 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250)라고 말한 維摩詰의 說法을 단서로 하여, 『不可思議解脫經』(Acintyavimok as tra)이라는 經題가 달려 있는 『大方廣經』이 存在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것이다.251) 

 

以上에서 「不思議品」 第6의 不可思議解脫과 神變을 考察해 보고, 깨치지 못한 衆生의 立場에서 解脫과 神變에 대해서 어떤 斷定을 내리려고 애쓸 일이 아니라, 오히려 不可思議解脫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부단히 줄기차게 精進하여 '心非心'의 境地인 淸淨心을 회복하여 眞如를 證得 할 수 있도록 大乘菩薩道를 修行하는 것만이 最善의 方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不可思議解脫에 住하는 佛菩薩만이 오로지 衆生을 위하여 이러한 自在로운 神變을 示現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2) 不可思議解脫의 禪的 意義

 

『不可思議解脫經』이라는 또 다른 經題目을 『維摩經』이 保有하고 있음을 볼 때, 維摩는 不可思議, 즉 眞諦든 俗諦든 一切諸法의 窮極的 不可解性이라는 主題를 크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維摩는 空性을 適用하여 가장 深奧하고 含蓄된 意味를 똑똑히 說明한다. 즉 有限하고, 自我中心的인 이 마음은 事物의 窮極的인 性質을 認知할 수조차 없으며, 또한 그러한 마음과 관련되어 있는 한, 諸法의 窮極的인 實在 그 自體가 不可解性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不可思議解脫의 境地는 '諸法이 窮極的으로 無生함을 아는 靈妙한 能力', 즉 無生法忍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으로서, 維摩居士의 청중들이 너무나 빈번히 도달하게 되는데, 菩薩이 證得하는 階位와 일치한다.

世尊께서는 그의 가르침을 소화해 낼 수 있는 弟子들에게만 이러한 유형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說하셨다. 龍樹 자신도 좀처럼 그러한 심오한 眞理를 밖으로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여러 가지 수단과 방편을 제시하는데 국한하여 철저한 修行을 통하여 智力을 갖춘 자들만이 眞理 그 자체에 대한 觀念과 관습적인 思念을 제거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維摩居士는 그러한 眞理의 메시지가 훨씬 더 많은 大衆에게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維摩經』에 記述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경우에 대해 명확히 그 자신의 思想을 피력하여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本稿는 그의 message의 精髓를 파악해 냄으로써, 그의 思想이 虛無主義나 궤변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잘못 이용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그의 思想의 趣意를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하여 왔다.

不可思議解脫에 住하는 菩薩이  어떻게 수미산이나 혹은 온 우주를 하나의 겨자씨 속에 옮겨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維摩의 說法은 『佛說一切如來金剛三業最上秘密大敎王經』 (T.885) 가운데서 발견되는데, 時間과 空間의 次元을 변화시키기 위한 요가修行을 암시한다. "秘義의 修行"에서 偈頌으로 노래한 維摩詰의 說法,252) 智慧를 어머니로 解脫方便을 아버지로 同一視하여 노래한 維摩詰의 偈頌은 정확히 男性과 女性을 金剛과 鐘등으로 묘사되어 있는 주요한 密敎의 상징과 일치된다는 것,253)  위 속에서 불이 탈 수 있는 능력과 같은 요가의 힘을 不可思議解脫을 얻은 菩薩에게 돌리는 일,254) 維摩詰의 方丈에서 無動如來·阿彌陀如來·寶莊嚴如來·一切義成如來등을 포함하여 많은 如來들이 出現하여 諸如來가 秘義를 敎說함을 언급한 일,255) 그리고 無動如來의 통찰력으로 이 經의 극치에 이르는 일256)등, 이 모든 일은 이 經에 密敎의 어떤 미묘한 분위기를 부여한다. 그것과 관련된 일이 무엇이든 간에, 菩薩의 不可思議解脫에 기초를 둔 入不二法門이라는 維摩詰의 方便은 그 타고난 권위로 어떤 敎法을 形成하게 되는데, 다시 말하면 至高의 정도에 이르기까지 智慧와 大慈大悲를 동시에 계발시키는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方便이 된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257)

「不可思議」를 意味하는 梵語 Acintya는258) 원래 形容詞로서 'inconceivable, surpassing thought'의 意味이며, 羅什 譯本 「菩薩行品」 第11에,

 

부처님께서 舍利弗 尊者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여러 큰 菩薩들이 自在한 神力으로 하는 것들을 보았느냐?"고 물으시니, 舍利弗이 대답하기를  "예, 이미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하시니, 舍利弗이 대답하기를, "世尊이시여, 제가 그 菩薩들이 하는 것을 보니, 너무나 不可思議해서 저의 뜻으로는 생각지도 못하겠으며, 또한 저의 도량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259) 

 

라는 內容에 나오는 意味의 것이다.260) 

中國以來의 『維摩經』연구에 있어서 「不可思議解脫」이 諸學匠에 의해서 經의 根本命題로서 중요시 되어온 것은 그 만큼 깊은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解脫」이라는 말에만 依支해서 『維摩經』을 보려고 한다면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解脫은 결코 對象的 혹은 固定的인 槪念이 아니라, 宗敎的 實踐으로서 가장 적극적인 社會救濟의 菩薩慈悲行인 것이 바로 그 大乘佛敎的 意義이기 때문이다.261)

또한 「解脫」에 지나치게 현혹된다면, 그것 또한 자신을 繫縛하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六波羅蜜과 八正道의 修行을 生活化하여 菩薩道를 實踐하는 동시에 부단히 三昧를 닦아 감으로써 解脫이 成就되고 神變이 자연스럽게 發顯하는 것이 그 순서일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상 神變은 어디까지나 三昧를 통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昧는 곧 定이며, 神變은 그러한 定에서 發顯하는 慧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神變자체보다는 神變이 發顯되기 전에 三昧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論者는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三昧는 不可思議解脫의 體이고, 神變은 不可思議解脫의 用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神變이전의 三昧는 言語를 떠난 침묵 그 자체라는 점에서 「入不二法門」에서 보여진 維摩의 '默然無言'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維摩의 沈默 역시 不可思議解脫의 한 側面으로 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維摩의 一默」은 不可思議解脫의 體이며, 그의 神變은 不可思議解脫의 用이다. 「入不二法門品」은 不可思議解脫의 體를 說하는 것이며, 「不思議品」은 不可思議解脫의 用을 說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262) 그렇다면, 神通力을 意味하는 神變은 어떤 意味를 지니고 있는가? 神變은 用이면서 동시에 方便의 意味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方便을 강조하는 神秀의 北宗禪이 『維摩經』의 不可思議解脫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北宗禪의 『大乘無生方便門』에서는 五方便門중에 第3門인 '顯不思議門'으로 『維摩經』을 提示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初期 禪宗을 '解脫宗'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禪思想에 미친 不可思議解脫의 영향을 否定할 수는 없을 것이다.263)

이에 더하여 華嚴의 大家들은 보석으로 장식된 파라솔에서264) 우주의 幻影을 지적하고, 山憧國에서 수입한 獅子座들을265) 가리키며, 다함이 없는 음식266)을 보여주고, 歡喜國을 보여주고, 축소하기도 하는 등의 서로 방해되지 않는 現象의 原理인 事事無碍原理의 완벽한 예증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維摩詰은 華嚴의 '肯定的인 接近方法'과 般若의 '否定的인 接近方法'으로 효과적인 補完性을 보여주며, 그러한 神變이 空性과 等價를 이루면서 상호 침투하는 宇宙들의 눈부신 相依相關性을 보여주게 된다.

以上과 같이 「不可思議解脫」에 住하는 菩薩이 몸을 나투는 것도 소리를 觀하고 듣는 것도 모두 大宇宙의 生命體의 作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大宇宙를 꿰뚫는 生命體를 感得한 釋迦牟尼 부처님께서 그러한 實相을 說하신 것이 佛敎이며, 佛敎의 經典도 역시 그 相을 다양한 場面을 통하여 大宇宙의 生命體를 여러 가지 角度에서 說明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267) 이러한 觀點에서 「不思議品」 第六은 維摩가 이처럼 神秘한 不可思議解脫에 대해 說하는 부분이다. 不可思議라고 하는 말 그 自體가 보통사람의 생각이나 말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深奧하고 神秘하다는 意味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法(眞理)은 無念·無相·無住의 心非心의 境地로서 이러한 淸淨心은 見聞覺知의 對象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凡夫가 思議할 수 없는 世界로서 이러한 境地와 그에 따르는 神變을 說한 것이 바로 이 「不思議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六波羅蜜을 不斷히 修行할지언정 섣불리 不可思議解脫의 境地를 分別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4. 中國禪宗의 『維摩經』觀

 

禪宗史에 나타나 있는 維摩에 관한 것으로는 ① 『維摩經』의 敎理와 思想을 말하는 경우와 ② 한 人物로서 維摩(淨名)居士를 말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 두가지 경우를 區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他經에서는 그러한 예를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 경우이다.

中國佛敎가 大乘佛敎的 特色을 갖추어 表面化된 것은 隋·唐期에 있어서 三論·天台·華嚴등의 諸宗의 勃興이래의 것으로, 以前에는 毘曇(Abhidhamma)·成實등 小乘論의 硏究와 大小乘의 禪觀的 實修 및 戒律의 硏究와 實踐이 있었다. 三論등의 諸宗은 經論의 理論的 硏究에 근거하여 自宗의 體系的 樹立에 努力했지만, 거기에는 「敎相判釋」이 根底가 되고 敎宗인 것을 共通의 特色으로 하였다. 佛敎는 소위 大乘一 倒이전의 大小乘兼修의 時期中에 理論과 實踐으로서 中國에 移植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中國固有의 思想과 文化와의 접촉과 對決·融合·統攝의 문제도 포함되었지만, 佛敎가 진정으로 民衆化되고 民族生活中에 융화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시기에 淨土敎와 함께 禪思想이 새롭게 일어나 가장 實際的인 特色을 發揮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게다가  維摩는 三論등에 대한 것을 비롯하여 禪流行의 時期까지 長期間에 걸쳐 依用되었으므로 中國에 있어서의 그 流轉에 대해서는 그것이 「敎」로서 理解된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禪」의 特色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일단 區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問題의 考察에 들어가기 전에 比較를 하기 위해서 印度에서의 維摩流行에 대하여 다시 말한다면, 龍樹와 世親의 維摩硏究는 잠시 별도로하고,7세기의 寂天( ntideva,대략650∼750)의 『大乘集菩薩學論』( ik samuccaya)에 있어서의 이 經의 引用(괄호의 숫자는 인용횟수임)은 問疾品(1), 觀衆生品(3), 佛道品(2), 香積佛品(2), 菩薩行品(1)등 그 범위가 經初의 四品을 제외한 問疾品 第五 이하에 한정되고, 그리고 어느 것이나 「戒」目的의 實修的 特色이 풍부한 事項에 관해서 였던 것에 注意해야 할 필요가 있다.268)

그런데 이 經의 漢譯이 시작된 2∼3世紀부터 6∼7世紀에 이르는 4∼5백년동안에 前後 6회의 異譯이 나왔지만, 그 가운데 주로 사용되어온 것은 5세기초(409년)에 羅什에 의해 번역된 『維摩詰所說經』三卷이다. 그리고 이 經의 어느 부분이 특히 注意를 받게 되었는가는 時代와 그 사람의 立場에 의해 相違하였다.

原典의 成立면에서는 維摩가 般若에 버금가고, 法華보다 더 오래 되었다고269) 하지만, 中國佛敎에서는 후에 法華硏究가 훨씬 더 維摩硏究를 압도함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도 嘉祥같은 사람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예를 들면 그의 主著인 『三論玄義』에는 佛國品(1), 不思議品(1), 觀衆生品(2), 入不二品(1)등의 引用이 있고, 그 외에 『淨名經』으로서의 關說도 있는 등, 引用이나 關說의 模樣은 前記한 寂天의 경우와 상당히 相違한 점이 注意해야 할 만한 것이다. 즉 吉藏의 경우에는 維摩가 「抑揚敎」의 趣意로 볼 수 있는 것이 主였으므로, 敎의 論理가 중요시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敎의 論理만으로는 필경 維摩의 反面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270)

마침내 禪門의 勃興과 함께 維摩의 다른 一面인 「禪」的인 特色이 공공연히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우선 慧海(A.D. 800∼830년경에 寂)의 『頓悟要門』에서는 佛國品(5), 方便品(2), 弟子品(2), 菩薩品(5), 不思議品(1), 觀衆生品(5), 入不二法門品(3), 菩薩行品(1), 見阿 佛品(1) 및 淨名居士(1)등 計26의 다수를 引用하고 있다. 또한 弟子·菩薩 兩品을 비롯하여 方便品·見阿 佛品에 이르기까지 所引 범위를 넓히고 있고, 『維摩經』에 대한 理解를 급속히 확대하여 이 經의 全面으로 넓혀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앞에서 말한 『三論玄義』에서는 諸品으로부터의 引用이외에 『淨名經』으로서의 지적이 있었던 것에 대해 慧海의 引用에서도 똑같은 「淨名居士」로서의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결국 「敎」法으로서의 維摩에서 「禪人」으로서의 維摩로의 관점의 변화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것이 곧 敎와 禪의 對立이나 相違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禪家에 있어서의 維摩의 활달한 人間性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希運의 「傳心法要』를 注意해 보면, 『維摩經』의 佛國品(2), 方便品(4), 弟子品(3), 菩薩品(4), 問疾品(6), 不思議品(3), 香積佛品(1), 見阿 佛品(1) 그리고 淨名居士(1)등 計25의 다수의 引用이 있었다.271)

그런데 다음 시기를 代表할 義玄의 『臨濟錄』에서는 弟子品(1), 不思議品(2)외에 「維摩詰」(1)등의 引用이 있을 뿐이고, 나아가 園梧克勤의 『碧巖錄』에서는 한번도 維摩에 관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어쩔 수 없는 時代的 推移의 反映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단지 『維摩經』에서의 引用이 없다든가, 혹은 維摩居士나 淨名에 대한 言及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의 이유로 禪苑에 있어서 維摩에 대한 關心이나 注意가 쇠퇴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維摩 그 자체가 이미 大衆化된 것을 意味하며, 一般的인 흥미밖에 끌지 못하게 된 것으로서 그 만큼 禪人으로서의 維摩가 明確히 實在化하고 個性的 存在가 된 것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玄 이 印度를 旅行할 당시에 維摩는 이미 傳說上의 人物이 되어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遊學記錄인 『西域記』에 의해 明瞭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傳說化의 傾向은 이 經이 西域地方에 전해져서 이른바 「維摩變」으로서 圖上化되어 확대되는 동안에 한층 더 현저하게 되었고, 玄 보다도 거의 1世紀 뒤진 같은 唐의 詩人 王維같은 사람은 維摩를 매우 찬양하여 스스로 王摩詰이라고 불렀을 정도였으므로, 당시에 維摩가 民衆化되어 文化人들 사이에서 특히 환영받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한 庶民的 또는 脫俗的인 인물로서 敎團의 內外에서 이미 충분히 친자(親炙)되어있던 宗敎的 人格體가 그대로 禪苑人의 理想的 人物로써 채택되어 上記한 禪語錄類中에 引用되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그런 전통이 現代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믿어진다.272)

『維摩經』의 根本趣意라고 하는 「心淨則土淨」의 說에 비추어 볼 때, 'Vimala'(離垢, 淸淨)라는 大乘的 理念은 가장 意義깊은 것이다. 즉 維摩詰(Vimalak rti)과 같은 명칭은 「淨心人」으로서 象徵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淨心人이란 換言하면 菩薩(bodhisattra)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菩薩이 머무는 境地'가 『維摩經』에 의하면 「不可思議解脫」의 境地이고, 그러한 法門을 배우고 修得하는 것이 바로 禪學의 基本的 意味인 것이다. 그리고 心淨則土淨說은 換言하면 心土相則說이고, 그것이 가장 根源的인 意味에 있어서의 禪的 唯心說의 立場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禪家에서는 佛心宗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心土相卽이란 淨穢不二의 理論을 包含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形而上學的 戱論에 빠지는 것을 克服하고, 實在하는 生活속에서 그것을 具現하려고 하는 것이 원래 大乘經典의 共通된 정신이며, 특히 『維摩經』의 眞面目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論者는 생각한다. 나아가 敎外別傳·不立文字로서의 禪의 立場을 端的으로 나타내는 것들이 『維摩經』에는 수 없이 存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夫說法者 無說無示. 其聽法者 無聞無得.」273)이라고 維摩詰이 大目 連에게 說法하는 내용인바, "法은 空을 順하고 無相을 따르고 無作에 응하는 것이며, 法은 곱고 추함을 벗어났으며, 法은 더하고 덜함이 없으며, 法에는 生·滅이 없으며, 法은 ……"라고 說하면서, "大目 連존자여, 法의 모양이 이와 같으니, 어찌 말로써 說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法을 說하는 자는 說하고 보여 줄 것도 없으며, 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또한 維摩는 「言說文字 皆解脫相」274)이라고도 말한다. 이 구절은 「觀衆生品」의 解脫章에 나오는 것으로서 舍利弗존자께서 "解脫(Vimukti)이란 말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므로 내가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소"라고 말씀하셨을 때, 天女가 말하기를, "노스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말씀은 다 解脫의 相입니다. 왜냐하면 解脫이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文字와 言說도 마찬가지로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舍利弗존자여, 文字를 떠나서 解脫을 말하는 그런 일을 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一切諸法이 곧 解脫의 相인 것이요"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 의지하여 실제로 禪門에는 수많은 禪書와 語錄이 存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論者는 생각하는 것이다.

禪은 人間의 靈性的 自覺과 宗敎的 自由에 관한 根源的인 實踐理法이므로, 無限의 形成力을 거기에 內含하고 있다. 「不可思議 解脫」이 바로 그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文化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러한 形成力은 어느 정도 制約을 받게 된다. 中國文化는 「禪」에 있어 禮의 傳統과 實義를 발견하게 된다. 후에 그것은 作法의 形으로서 各種의 淸規가 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禪林의 最後의 生命은 僧伽로서 敎團內에서 師資의 人格的 접촉상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傳統과 師承을 중요시하는 中國文化 本來의 모습에 따른 것이지만, 思想的·內面的으로는 전적으로 佛敎의 배양에 힘을 입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禪宗은 현저하게 佛敎로서의 참된 特色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면,  「經文에 대해 解釋하는 것을 보면, 原經文의 元來의 意味를 명확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活用的으로 禪的 修養에 이바지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점은 禪家가 敎家와 다른 점으로서, 敎家에서 때로는 禪家가 無學者라고 批評하는 점이기도 하다」275)라고 말한다.

그러나 禪門의 宗敎的·實踐的 意義는 오히려 이러한 점에 存在한다고 보며, 中國佛敎중에 禪宗이 禪宗으로서 確立된 文化史的 意義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어느 意味에서 佛敎는 禪에 이르기 시작하면서 歷史形成的인 側面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76)

그러면 이제 中國佛敎史에 있어서 禪宗의 이러한 歷史形成的 側面에 어떤 것이 있었는가를 考察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維摩經』은 達摩의 『二入四行論』의 低流가 되었으며, 이 經을 禪經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처럼, 達摩로부터 비롯된 大乘禪의 般若思想的인 立場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柳田聖山의 論文인 「語錄の歷史」277)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특히 『維摩經』의 引用이 많이 보인다.

또한 『二入四行論』중 四行의 세 번째 「無所求行」의 實踐思想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도 『維摩經』 「不思議品」의 「若求法者. 於一切法 應無所求.』278)라고 說한 一節이라고 여겨진다. 즉 世俗的인 事物에 집착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法 그것에 대한 執着心까지도 떨쳐버릴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無所求行」이란 '法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무엇을 밖에서 찾고 求하려고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마음의 자세를 說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네번째 「稱法行」이란 性淨의 理致에 契合된 삶을 만든다는 뜻이다. 性淨의 理致란 『涅槃經』에서 말하는 佛性說로서 大乘經典에 많이 說해있는 「自性淸淨心」의 理致를 가리키는 것이다. 自性淸淨心이란 汚染되어 더럽혀진 것을 제거하여 淸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자체가 淸淨한 마음인 것이다. 여기서 「性淨의 理」의 淨은 空을 意味하며, 達摩는 그것을 法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 法에 계합된 적합한 實踐行을 稱法行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말하자면 稱法行이란 空의 實踐 바로 그것인 것이다.279) 바로 이 「稱法行」에서 「經에 말하기를 法에는 衆生이 없다. 衆生이라는 집착(垢)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法에는  我라는 存在가 없다. 法은 我라는 집착(垢)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라고 引用한 것은 『維摩經』 弟子品의 一節인 것이다. 즉 『維摩經』 弟子品에 「夫說法者 當如法說. 法無衆生 離衆生垢故. 法無有我 離我垢故. 法無壽命 離生死故. 法無有人 前後際斷故……」280)라고 說하여 있는데, 이것은 維摩詰이 大目連에게 말하는 내용에서 引用한 것이다. 以上은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즉 四相을 여읜 法의 實相을 말하는 내용으로서 『金剛經』의 내용과도 일치되고 있는 것으로 論者는 생각한다.

達摩는 여기에서 說한 『維摩經』의 法의 意味를 가지고 「稱法行」의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維摩經』에서 說하는 法은 분명히 空의 입장에서 說하고 있다. 「垢」는 집착하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維摩經』의 自性淸淨心이라는 것은 法의 實相을 입증하는 空의 세계, 즉 法界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로, 佛敎의 出家僧의 敎團에 있어서 作務 혹은 勞動이 집단적으로 실행된 사실은 아마 初期禪宗의 東山法門이 그 최초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傳法寶紀』에서 勞動과 坐禪이 竝行되고 있는 敎團生活의 一面을 傳하고 있는 것처럼 勤勞가 坐禪과 거의 똑같은 修行僧의 生活의 一部였다는 사실을 注目해야 할 것이다.

그 후에 祖師禪의 禪宗에 있어서 勞動과 坐禪이 동등한 입장에서 勞動이 精神的 宗敎修行의 하나로서 意味를 갖게되는데, 이미 東山法門의 敎團에서 그러한 思想의 發端이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百丈淸規』의 成文化와 함께 禪宗敎團에서는 普請法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全 大衆이 함께 勞動에 참여하는 普請法의 源流를 東山法門의 敎團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고 여겨진다.281)

그런데 弘忍을 비롯하여 그의 스승인 道信 門下의 東山法門의 修行僧들이 모두 함께 生産的인 勞動에 참가하여 자급자족할 수 있는 生産物로써 修行僧들에게 供給資養하게 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이것은 바로 生産敎團의 實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바, 『維摩經』 「菩薩品」의 말인 「四儀皆是道場 三業咸爲佛事」282)라는 말을 引用하여 修禪과 勞動, 즉 人間의 일상생활 전체를 佛事로서 意味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말은 人間의 一常生活인 行·住·坐·臥의 一切의 動作이 眞實의 世界가 되는 것이며, 身·口·意 三業의 행위 전부가 모두 佛法의 作用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것은 최선의 現實主義的 生活佛敎를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禪經으로서의 『維摩經』의 眞價를 發揮하게 된 것은 『大乘無生方便門』 혹은 『大乘五方便』이라는 北宗禪의 禪籍을 통해서 『維摩經』이 자리하고 있는 그 위치인데, 이에 관해서 요약하여 말한다면, 北宗禪의 『大乘五方便門』은 ①佛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고, ②佛知見으로 開示悟入하게 하며, ③不思議解脫法門을 『維摩經』에 의거하여 開顯하고, ④一切諸法의 正性을 闡明하여, ⑤諸法의 無異, 無差別인 진실을 깨달아 無 한 解脫의 道를 成就하게 하는 方便法門을 說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을 考察해본 결과, 北宗禪의 기본입장이 「心不起」와 「離念」에 있음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283) 

끝으로, 祖師禪과 『維摩經』과의 관계를 간략하게 考察해 보려고 한다. 盛唐의 宗敎와 文化가 長安과 洛陽의 二京을 中心으로 展開되어 왔었지만, 8世紀 中期에 돌발한 安史의 大亂(755∼763)을 계기로 하여 급변하는 時代와 함께 江西와 湖南등의 지방을 중심으로 새롭게 일어난 馬祖, 石頭系의 新佛敎運動을 일컬어 祖師禪이라고 부른다.

菩提達摩로부터 시작된 中國禪宗은 祖師禪 思想의 展開와 더불어 새로운 차원의 中國佛敎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印度에서 傳來된 佛敎를 中國人의 生活宗敎로서 昇華시킨 것이었으며, 中國人의 思考와 智慧에 의한 中國的인 佛敎의 完成을 意味하였다. 이러한 祖師禪 思想의 특성은 종래의 二京을 中心으로 한 傳統的인 中央 貴族佛敎의 權威主義와 형식을 탈피하여 大地의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地方性과 日常生活과 밀착된 生活宗敎로서의 禪思想으로 發展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祖師禪은 馬祖道一의 有名한 「平常心是道」와 「卽心是佛」이라고 하는 名句가 나타내주고 있는 것처럼, 人間의 구체적인 일상의 生活에 철저하면서 그러한 평범한 生活속에서 佛敎의 참된 정신을 찾아보려고 하는 일종의 生活宗敎運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84)

祖師禪에서 「道不用修」와 「無修無證」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방적으로 一切의 修證을 뿌리에서부터 배척하고 부정하는 安易한 思考의 所産이 아닌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보다 큰 스케일의 修證論을 구상하고 있는 禪의 기본적인 論題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禪의 生命은 修와 證에 있다. 中國佛敎에 있어서 禪宗은 종래의 敎學佛敎에 대한 實踐佛敎의 立場에서 出發한 것이었다. 그것은 祖師禪의 禪修行에 있어서도 똑같은 立場이었다. 馬祖의 示衆도 끝없는 修道를 必要로 하고 있는 것임에는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修行에 사로잡히고 집착하지 않는 修行인 것이며, 證悟인 것이었다. 그것은 「다만 汚染하지 않도록 하라」고 한 것이며, 또한 ‘自性은 本來  具足하고 있다. 다만 善惡의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者를 修道人이라고 부른다.’라고 설하고 있는 그런 뜻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修行과 證悟, 善과 惡, 一切의 差別的인 事象이나 觀念에 執着하지 않는 것이 바로 汚染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곳에서도 分別心을 일으키지 않고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自由無 한 것이며, 더욱이 平常心으로서 人間의 日常生活 가운데에서 全體作用으로 具現하는 것이었다.

祖師禪의 禪僧들이 주장하고 實踐하는 새로운 佛敎運動은 이와 같이 사로잡히고 집착함이 없는 修行과 證悟에 의해서 自身의 無限의 可能性을 追求하면서 人間性의 탐구와 思想을 深化하여 스스로 人格完成을 위한 不斷한 精進을 加行하는 것이었다. 「道不用修」나 「無修無證」의 주장은 宗敎로서의 佛敎的 人間觀에 있어서 自性淸淨心이라고 하는 성스러운 佛性說을 전제로 하고 있는 思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러한 自性淸淨心에 단지 汚染되지 않은 修道와 證悟를 要하고 있는 것이다.

馬祖의 示衆에 「무엇을 汚染이라고 하는가? 다만 生死의 마음으로 造作하고 趣向하면 이것이 모두 汚染이다」라고 말하며, 또 「善을 취하고 惡을 버리며, 空을 觀하여 定에 드는 것은 造作에 속한다」라고 말하면서, 汚染이란 造作하는 마음·作爲性·分別心등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事物에 사로잡힌 마음이며, 祖師禪의 「道不用修」와 「無修無證」의 主張은 汚染되지 않는 本來性의 입장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285) 이러한 本來性에 입각한 祖師禪의 實踐的 구조에 대해서 馬祖는 「凡夫行이 아니며, 賢聖行도 아닌 것이 바로 菩薩行인 것이다」라고 하는 『維摩詰所說經』卷中 「文殊舍利問疾品」 第五 가운데 菩薩行의 一節을 引用하여 祖師禪의 實踐思想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286)

또한 荷擇神會도 『南陽和上頓敎解脫禪門直了性壇語』에서 『維摩經』의 「非垢行 非淨行 是菩薩行」이라는 一節에 주목하여 南宗禪의 實踐思想으로 삼고 있었다.287)

'뱃사공은 이쪽 언덕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하여 저쪽 언덕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中流에도 머물지 아니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 바로 大乘菩薩이 추구하는 上求菩提·下化衆生의 中道行일 것이라고 論者는 생각하고 있다. 不斷히 是非와 分別妄想의 執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凡夫들의 行을 바로 잡아주고 淨化해주는 것이 菩薩의 行이요, 이와는 반대로 分別妄想과 是非가 뚝 끊어진 無念·無相·無住의 眞如의 世界에 菩薩이 들어앉아 있다면, 혼탁한 凡夫衆生의 社會는 누가 濟度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凡夫의 行도 아니요, 賢聖의 行만도 아닌 것이 菩薩의 行이요, 동시에 더러운 行도 아니요, 그렇다고 하여 깨끗한 行만도 아닌 것이 菩薩의 行'이라고 說한 것으로 論者는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大乘菩薩의 中道行은 한편으로는 「自性淸淨心」을 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淸淨心에 입각하여 不斷히 衆生을 濟度하려는 願力과 그에 따른 實踐的 修行이 隨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Ⅵ. 不二思想

 

1. 『維摩經』의 不二思想

 

1) 「入不二法門品」의 禪思想

 

『維摩經』의 禪思想의 중심은 「入不二法門品」에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 有名한 '維摩一默'이 이 品에 包含되어 있기 때문이다.

菩薩들은 二乘과 마찬가지로 空을 觀하면서도 有를 버리지 않고 능히 온갖 敎化를 이루어간다. 그러므로 空은 有에 卽하는 동시에 有는 空에 卽하는 것이니, 空과 有는 본래 둘이 아님을 밝혔으므로 이 「入不二法門品」은 예로부터 『維摩經』의 眞髓로 여겨져 왔다.

사람들은 어떠한 事物이든지 相對的으로 보는데 익숙해 있어서 生과 死·옳은 것과 그른 것 ·善과 惡·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長과 短 등과 같이 항상 두 가지로 차별하여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事物의 眞相을 제대로 把握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된다.

本稿의 제Ⅳ장에서 '眞俗二諦說'을 論考함에 있어서, 이미 '二諦의 相卽'을 論하면서 二諦의 相卽은 經驗的인 世俗의 有의 立場과 超越的인 勝義의 空性 즉, 無의 立場과의 相卽이기 때문에 이른바 '非有非無'의 中道思想임을 闡明하였다.

또한 本質的인 형태의 二諦說은 世俗諦를 現象으로 생각하고, 勝義諦를 本體로서 간주하는 것이 根本的이라는 것도 밝혔으며, 二諦說은 二諦의 相卽에 의해서 확고한 哲學的 意義를 갖게 된다고 밝혔었다.

이러한 世俗諦와 勝義諦의 中道的 相卽의 原理를 論者는 이미 世俗諦의 如幻性을 論할때에 『中論』 第24章 第18偈를 인용하여 밝혀 놓은 바가 있었다.

 

緣起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因緣에 의한 假名    이며, 그것(空性)은 바로 中道이다.288)

 

위의 글은 勝義의 空性이 世俗과 勝義의 眞理를 동시에 內包하기 때문에 非有非無의 中道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世俗諦와 勝義諦와의 相卽을 說하고 있는 二諦說에 관한 經說을 『摩河般若波羅蜜經』 卷第22에서도 發見할 수가 있다.

 

須菩提가 말하되, 世尊이시여, 世間世俗과 勝義와는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世尊께서 이르시되, 수보리여, 世間世俗과 勝義와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世間世俗의 眞如(tathat )는 勝義의 眞如이기 때문이다.289) 

 

위의 經說에 의하여, 二諦는 世俗諦(言說, 方便)와 勝義諦(不可言說, 目的)의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同一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論理的 根據를 바탕으로 하여 論者는 『維摩經』의 「入不二法門品」의 全體的인 哲學的 意味와 禪的 意義를 考察해 보는 것이 合當하리라고 생각한다.

萬法이 하나로 돌아가지만, 그러나 眞·俗 二諦를 떠나서 따로 獨立自存性을 지닌 다른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둘이 아닌 法門은 佛法의 最高의 要諦인 것이다. 天台宗의 해석을 빌리자면 '入'은 能觀으로 假觀과 空觀과 中道觀의 세가지의 觀을 말하는 것이며, '不二法門'이라고 함은 所觀으로 假諦와 空諦와 中道諦의 세 가지 諦인 것이다. 이 세상의 온갖 法이 그 本體로 보면 空이다. 그러나 그 現象인 森羅萬象은 그것이 假이니, 假이면서 空이요·空이면서 假인 宇宙의 妙用 그것이 바로 中道인 것이다.

勝義諦는 經驗적인 世俗言說을 超越한 不可言說의 空性이지만, 空性의 超越性은 그러한 空性이 世俗世界를 否定한 그 외의 바깥에 놓인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緣起의 道理에 의해 成立하는 世俗諦는 空性의 現實的인 바탕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世俗諦는 獨立自存性이 없는 無自性·無實體인 空의 형태를 內包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世俗諦는 實體가 없는 幻化(m y , nirm a)와 같은 것으로서 如幻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緣起', '幻化', '假名'은 모두 非有非無를 의미하는 同義語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며, 勝義空性의 中道的 眞實을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經驗的인 限定을 超越한 勝義空性은 緣起·幻化·假名이기 때문에 非有非無의 中道이며, 勝義卽世俗의 立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道理를 마음으로 觀하는 것이 위의 「空·假·中」 세 가지의 觀이다. 그러기에 마음의 밖에 따로 境界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能觀과 所觀은 둘이면서 둘이 아니니 이를 '둘이 아니다(不二)'라고 말한다. 또한 '法'이라 함은 軌則을 말함이요, '門'이라 함은 通達한다는 뜻이다. 凡夫들은 生死에 머물고, 二乘들은 涅槃에 그쳐 머문다. 그러나 菩薩들은 이제 生死와 涅槃이 둘이면서 둘이 아닌 道理를 밝히고 있으니, 이는 곧 佛法의 眼目으로서 이 經의 眞髓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90) 

本稿에서 이미 記述한 바와 같이 '色은 그 空性으로 인하여 空하지 않다. 왜냐하면 空性은 그러한 色을 떠나서 어딘가 다른 곳에 存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色이 곧 空이요, 空이 곧 色이다.' 大乘經典上에 흔히 나타나는 이 말은 中道의 眞髓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維摩詰의 禪的인 傳言에 대해서도 그 根源이 되고 있다. 龍樹도 역시 그의 『廻諍論』에서 이러한 主題에 대해 상세히 解說하여 놓았다. '나는 空·緣起·中道의 의미의 同等함을 宣言하신 無比의 正覺者이신 世尊께 敬禮 드린다.'라고 龍樹는 讚揚하고 있다. 이러한 中道를 가르치는 스승들은 空을 활용하여 우리들의 一切의 思念이 妄想임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中道의 가르침은 一切衆生에게 適用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世尊과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大家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놀랄지도 모르는 衆生들의 精神을 啓發하기 위해 그리고 空과 緣起를 同一視하는 그 훌륭한 道理를 理解할 수 있는 境地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意圖的으로 다른 敎說들을 考案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小乘의 가르침은 오직 어느 지점까지만 개인의 精神啓發에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서 中道라는 窮極的 메시지를 그런 개인에게 確信시켜주게 될 維摩居士를 만나게 되는 그 지점까지만 該當되는 것이다. 『菩薩瓔珞經』의 말씀을 빌려서 龍樹는 말하기를, "文法學者들이 우리에게 文法을 읽어서 알게 해주듯이, 如來는 弟子들의 根機에 맞추어 法을 說하신다. 如來는 法을 說하시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功德을 쌓도록 하시며, 또 어떤 이에게는 二元論에 의지하게 하시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러한 二元論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신다. 그러나 마침내 어떤 사람들에게는 如來께서 深奧하고 敬畏心을 일으키며 그 본질이 慈悲와 空인 깨달음을 修行할 것을 가르치신다."라고 이야기한다.

『不可思議解脫經』이라는 또 다른 經題를 이 經이 保有라고 있음을 볼 때, 維摩는 不可思議 즉 眞諦든 俗諦든 一切諸法의 窮極的 不可解性이라는 主題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空性을 適用한 가장 深奧하며 含蓄된 意味를 똑똑히 說明한다. 즉 有限하고 自我中心的인 이 마음은 事物의 窮極的인 성질을 認知할 수조차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마음과 관련되어 있는 한, 諸法의 궁극적 實在 그 自體가 不可解性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不可思議解脫의 境地는 '諸法이 窮極的으로 無生함을 認知하는 能力' 즉 '無生法忍'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一切諸法의 無生無滅의 理致를 體得하여 거기에 安住하는 것'을 일컫고 있다. 이것은 菩薩의 第8地에서만 생기게 되는 無生法忍을 證得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象徵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言說上의 槪念으로서의 不可解性은 空性 혹은 無限에 대한 言說上의 槪念처럼 마음에 適用되는 原理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世尊께서는 그분의 가르침을 소화해 낼 수 있는 弟子들에게만 이런 유형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說하셨다. 龍樹자신도 좀처럼 그것을 밖으로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그 스스로 여러 가지 수단과 方便을 제시하는데 局限하여 철저히 修行하여 智力을 갖춘자들 만이 眞理 그 자체에 대한 관념과 관습적인 思念을 제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維摩居士는 그러한 眞理의 메시지가 훨씬 더 많은 大衆에게 이용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한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 『維摩經』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경우에 대하여 명확히 그 자신의 思想을 피력하여 놓았기 때문이다.291) 

흔히 「理事不二」라는 表現을 우리는 듣고 있는데, 理는 平等의 本體요, 事는 差別的인 現象을 일컫는 바, 이 둘은 둘이 아니라는(不二) 뜻이다. 또한 「理事相資」라는 말이 있는데, 本體와 差別的인 現象은 서로 依支하는 關係에 있다는 뜻이다.

만일 『維摩經』의 「入不二法門品」이 「理」를 說하고 있다면, 「香積佛品」은 「事」를 說하고 있다고 理解해도 좋을 것이다.292) 그렇다면 이제 眞俗不二요, 理事不二라는 側面에 있어서 『維摩經』의 第一義諦를 說해놓은 「入不二法門品」의 禪思想을 考察해 보기로 한다.

 

그 때에 維摩詰이 여러 菩薩들에게 말하기를, "여러 仁者들이여, 어떠한 것을 일러 菩薩이 '不二法門'에 들어간다고 하겠습니까? 각각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들어서 說明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會중에 法自在라는 이름의 菩薩이 말하기를, "여러 仁者들이여, 生과 滅을 둘로 여깁니다만, 法은 본래 生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새삼 滅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無生法忍을 얻는 것을 '不二法門'에 들어간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293)

 

위의 經說은 生과 滅이 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즉 凡夫들의 生死와 부처님의 涅槃이 둘이 아님을 說한 것이다. 諸法은 본래 寂靜하며, 그 本性이 涅槃되어 있다. 無生이므로 諸法은 처음부터 寂靜하여, 寂滅되어 있다. 空을 말하는 자는 涅槃을 말하는 것이다.

初期佛敎에 의하면, 輪廻(Sa s ra)는 緣起(prat tyasamutp da)의 지배를 받는 것이며, 涅槃(Nirv a)은 이러한 緣起의 과정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中道論者에게 있어서 諸法은 不生이며, 諸原因으로 인하여 生成되지도 않고, 輪廻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諸法은 涅槃되어 있는 것이다. 中道論者에게 있어서 輪廻가 涅槃이고, 涅槃이 곧 輪廻이다. 다시 말하면 空·輪廻·涅槃은 한가지로 생각된다.

요컨대, 小乘에서는 '事物의 存在 樣式'인 眞如는 緣起였다. 이에 반하여 『中論』에서 眞如는 空( nyat )이다. 이와 同一한 主題들이 『維摩經』에도 명확하게 記述되어 있다.294) 

輪廻와 涅槃은 둘 다 空하다. 왜 그러한가? 단순한 名稱(n madheya)으로서 둘 다 空하며 實際的인 것이 아니다.295)

輪廻와 涅槃은 흔히 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涅槃의 自性을 원래 空한 것으로 보신 菩薩들은 輪廻하지도 않고 涅槃에 들지도 않는다. 이렇게 깨닫는 것이 入不二이다. 296) 

存在(bh va,有)는 假設(prajaptiv da)이다. 有는 언제나 人間에 의해 가정된 것이므로 一切의 分別과 妄想의 根源이다. 그런데 非存在(abh va,無)는 無一物로서 無相(nirnimittat )이다. 그러므로 不二는 有·無를 벗어난 특성을 지닌 法으로서 알려진 것이다. 또한 이러한 不二는 中道(madhyam  pratipad)이며, 有·無의 兩極端이 없으므로 不二는 "無上·無比·微妙"인 것이다.297) 

以上에서 『維摩經』의 經文을 통하여 살펴보면, 『維摩經』의 不二의 思想的 立場은 大乘佛敎一般과 마찬가지로 般若思想에 根據하는 中道的 世界觀에 있음이 분명하다. 佛陀의 中道는 어떤 存在를 상정하여 그 存在의 有·無를 문제 삼아서 모순 대립하는 一切의 邪見을 破棄하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緣起說을 바탕으로 하여 正見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有·無를 超越한 中道的 世界觀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諸法은 無相이므로 그 결과 不可說이요 또한 不可思議이다. 諸法은 非存在이므로 相이 없다. 諸法에 관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으며, 만일 어떤 사람이 말을 한다면, 오직 世俗諦에 의해서 일 뿐이다. 諸法을 認識하려면, 諸法에 관하여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298)

 

諸法은 結合되어 있는 것도 分離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즉 諸法은 定形이 없으며, 非可視的이며, 非抗拒的인 것이며, 唯一한 相은 곧 無相이다.299) 

 

『維摩經』의 經說도 위와 같은 見解들을 보여주고 있다.

 

德頂菩薩이 말하기를, "垢(煩惱에 물든 것)와 淨(淸淨함)을 둘이라 합니다. 그런데 垢의 實性을 보건대 淨相도 없습니다. 一切의 觀念이 滅한 것이 入不二입니다."라고 하였다.300) 

 

실제로 垢와 淨이 둘이 아닌 것이 眞如의 참 성품이기에 『般若心經』에서도 不垢不淨의 眞理를 說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一切의 觀念이 滅한 것'은 바로 無念·無相·無住의 禪思想으로서 般若의 智慧이며, 『金剛般若波羅蜜經』과 『維摩經』등에서 說한 般若空思想의 核心이라고 論者는 생각한다. 그 中에서도 無念思想이 中心이 되고 있는바, 『六祖壇經』에서는 無念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善知識들이여! 나의 法門은 종래 모두 無念을 세워서 宗으로 삼고(無念爲宗), 無相을 體로하며(無相爲體), 無住를 根本으로 삼는다(無住爲本). 어떤 것을 無相이라고 하는가? 無相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相)에 있어서 모양을 여읜 것이다. 無念이란 생각(念)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無住란 사람의 性品이 본래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 생각이 相續하여 斷絶됨이 없다. 만약 一念이 斷絶되면 法身은 곧 이 色身을 여의게 된다. 순간 순간 생각할 때에 一切法上에 머무름이 없다. 一念이 만약 머무른다면 念念이 곧 머무는 것이니 이를 繫縛이라 한다. 一切의 法上에서 念念에 머무르지 않으면 곧 無縛인 것이니 그러므로 無住를 根本으로 삼는 것이다.301)

 

無念이란 一切處에 無心함을 말하는데 一切處란 時.空의 意味가 內包되어 있기 때문에 無念은 一切處 . 一切時에 모두 無心함을 뜻한다. 이러한 無念.無心은 眞念이요, 菩提요, 眞如正念이라 한다.302) 

어떤 事物의 모습이 없는 根本바탕까지 窮究해야 하는 것이 無相의 禪思想이며, 이를 無相三昧라고 한다. 無相三昧는 無相까지도 破壞하여 完全한 眞如自性을 證得하는 것으로 『金剛經』 如理實見分에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의 句節도 法眼和尙은 '若見諸相非相 卽 不見如來'라고 뒤집어엎는다.303) 왜냐하면 諸相非相이 거짓인 것은 아니지만 諸相非相을 보고 안다면 그것도 또한 人間의 主觀에 의하여 認識되어진 心緣相이 되고 마는 것이요, 眞理에 대한 執念인 理障이 되는 까닭이다.

『壇經』의 「定慧品」에는 無住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說해져 있다.

 

無住는 사람의 本性이 世間의 善이나 惡이나 밉거나 곱거나 親하거나 모질고 거친 말을 하거나 속이고 다툼을 당하거나 할 때 그 모두를 空으로 돌려버리고, 相對하여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생각中에 앞境界를 생각하지 않음이다. 만약 먼저 생각, 지금 생각, 뒷생각이 생각마다 相續하여 끊임이 없으면 이것을 얽매임(繫縛)이라 하는 것이요, 만약 모든 境界를 對함에 생각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無住를 本으로 삼는 것이다.304)

 

以上에서 살펴본 無念·無相·無住의 般若思想은 後代에 中國의 南宗頓敎의 實踐的인 禪思想이 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禪思想은 결국 우리 나라의 實踐的인 禪思想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周知의 사실이다.

이와 같이 展開되는 「入不二法門品」에서 32菩薩이 제시한 入不二論의 가치를 過小評價해서는 안되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32菩薩의 入不二論은 바로 '維摩 一默'의 哲學的 基礎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32菩薩의 入不二論을 모두 다 考察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中에서 가장 중요한 入不二論을 몇 가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喜見菩薩이 말하기를, "色(r pa)과 色空(r pa nyat )을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色(r pa)은 그 자체가 空( nya)합니다. 色(r pa)이 滅함으로써 空( nya)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色의 自性이 스스로 空한 것입니다. 受 ·想·行·識도 이와 같아서 識(vij na)과 空을  둘이라 합니다. 그러나 識 그 자체가 空하며, 識의 滅이 空한 것이 아닙니다. 識의 自性이 스스로 空한 것이니, 이러한 사실을 通達하는 것, 이것을 入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305) 

 

위의 『維摩經』의 經說은 「入不二法門品」 第九에서 17번째로 등장하는 喜見菩薩의 入不二法門으로서 『般若經』에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유명한 空思想을 說하고 있는 內容이다.

실제로 '空性 때문에 色이 空한 것이 아니다. 色을 떠나서 따로 空性이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色卽是空이요, 空卽是色이다. 실제로 色은 言說일 뿐이다.' 『般若經』들은 이러한 主題를 부단히 반복하고 있으며, 이러한 論理는 物質 즉 色에만 유효할 뿐 아니라 그 밖의 受·想·行·識 등 다른 蘊에도 적용되며, 또한 一切의 法에 差別 없이 적용되는 것임을 附言하고 있다.

또한 『中論』에서도 空( nyat )을 어떤 存在로서 認知하지 않는다.

 

"恒久的인 非生成은 그것이 다른 것들에 依存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人爲的인 것이 아닌 까닭에 諸法의 自性이라고 불리어진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無知라는 錯亂된 視覺의 힘에 의해 認識된 이런 종류의 自性은 그러한 視覺의 錯亂이 治癒된 聖者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보여지지 않는 것으로 認知되며, 내가 언급할 경우에 이러한 성질을 諸法의 固有한 形態 즉 諸法의 自性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特性은 諸佛이 그것을 定義하였듯이 「非人爲的이며 他者에서 獨立된 自性」으로서 認知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存在도 아니며, 단지 非存在인 까닭에 非生性을 本質로 하는 이와 같은 自性은 오로지 無自性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事物의 自性은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世尊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러 性質을 성질 아닌 것으로 認知하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성질에도 執着하지 않는다. 어떤 性質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標徵도 없는 禪定(三昧)에 도달한다.'"306) 

 

『維摩經』에서도 空을 實體化하기를 거부하며, 經驗에 대한 根據를 無明이외의 다른 것으로 認定하기를 拒否한다.

「至高의 覺은 無所依에 根據한다. 어떠한 根據가 없다면, 그 누가 至高의 覺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라고 天女가 물었을 때, 「나는 얻을 바가 아무 것도 없기에 賢聖의 상태를 얻었다」라고 舍利弗은 대답한다. 이에 대하여 「覺에 도달하는 것도 이와 똑 같다. 成就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覺을 成就하는 것이다」라고 天女가 말한다.307)

그러므로 『維摩經』의 觀點에서 이러한 絶對的인 것, 즉 覺은 아무것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論者는 이제 維摩詰을 제외한 32菩薩中에서 28번째인 月上菩薩의 入不二論을 考察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維摩經』의 禪思想을 敍述함에 있어서 「入不二法門品」은 바로 不可思議解脫의 體에 해당되는 內容인바, 그 中에서도 禪定에 대한 內容을 考察해 보고 싶은 것이다.

 

"어둠(闇)과 밝음(明)을 둘로 여깁니다만,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으면 곧 둘이 없어집니다. 그 이유는 滅受想定에 들어가면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습니다. 온갖 法相도 또한 이와 같아서 그 가운데서 평등하게 들어가게 되면 이것을 入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라고 月上菩薩이 말했다.308) 

 

위의 『維摩經』의 經文中에 나오는 滅受想定은 滅盡定이라고도 일컬어지는 三昧로서 受와 想등 一切의 所緣에 의한 心理作用을 멈춘 最高의 禪定이다. 原始佛敎의 주된 禪定說로서 四禪, 八等至 그리고 九次第定을 들 수가 있는데, 이것들은 四禪을 중심으로 하여 四禪에 四無色定을 합하여 八等至라 부르고, 거기에 滅盡定을 더하여 九次第定이라고 부르고 있다.

滅盡定, 즉 滅受想定은 眼·耳·鼻·舌·身·意의 六識作用이 완전히 滅하여 다해버린 三昧를 말한다. 그러므로 修行者가 受와 想의 작용이 완전히 滅한 狀態의 滅盡定을 成就하게 되면, 分別的인 마음의 작용인 想과 苦를 일으키는 受로부터 벗어나서 解脫의 境地에 이르게 된다. 滅盡定은 모든 感覺的 作用과 思惟分別 作用이 滅盡하여 無心 곧 無意識狀態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309)  여하튼 四禪과 四無色定의 體系위에 滅盡定을 더하여 九次第定의 形式으로 敍述되고 있는 滅受想定은 初期佛敎의 禪定說 가운데 가장 발달된 體系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評價된다.

 

이러한 最高의 禪定에 의해서 證得하게 되는 眞理의 實相은 과연 어떤 內容일까? 「入不二法門品」에서 31번째로 등장하는 樂實菩薩이 이제 깨달음(覺)의 實體를 說明할 차례이다.

 

樂實菩薩이 말했다. "實(satya)과 不實(m )을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眞實이라는 것의 실상을 보는 사람은 眞實이라는 것 자체를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물며 眞實 아닌 虛僞를 보겠습니까? 왜냐하면 肉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慧眼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慧眼은 보는 것이 없기에 보지 못하는 것도 없으니, 이것을 入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310) 

 

以上의 經說을 통하여 살펴볼 때, 『維摩經』에서는 現實世界에 대한 어떤 根據도 否定하고, 空을 實體化하기를 거부하며, 결국 一切의 마음의 不在함, 다시 말하면 非心 또는 無心의 境地에 다다름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維摩經』에서는 "마음은 物質이 아니며, 볼 수도 없고, 依支하는 바 없으며, 不可了知인 것이다"라고 說하고 있다.311) 

이러한 無念·無相·無住의 境地는 禪定修行을 포함한 六波羅蜜을 不斷히 實踐함으로써 스스로 證得 할 수 있는 境地인 만큼, 輕擧妄動하며 言說로써 함부로 定義를 내릴 수 없는 境地인 것으로 여겨진다.

 

2) 維摩一默의 禪的 意義

 

이제 「入不二法門品」의 최후의 語句를 考察해 볼 順序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菩薩들이 제각기 說하였다. 그러나 文殊師利에게 다시 물었다. "文殊師利님, 당신의 入不二法門(절대 평등한 境地에 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文殊師利가 대답하였다. "'저의 생각으로는 모든 것에 있어서 말이 없고, 說함도 없으며, 가리키는 일도, 認識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질문과 대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 평등한 境地에 드는 것(入不二法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文殊師利가 維摩詰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자가 나름대로 다 說했습니다. 居士님, 당신이 說할 차례요. 무엇을 菩薩의 入不二法門이라 하겠습니까?" 그때에 維摩詰은 오직 默然하여312)  아무런 말이 없었다. 文殊師利가 감탄하여 말하였다. "과연 옳습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文字도 言語도 전혀 없는 것, 이것이야말로 眞實로 '절대 평등한 境地에 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入不二法門品」을 說했을 때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오천명의 보살들이 모두 다 不二法門에 들어가  '眞理를 깨달은 편안함'(無生法忍)을 얻었다. 313) 

 

僧肇의 『注維摩詰經』에서 鳩摩羅什은 馬鳴이 改宗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維摩의 一默」을 說明하고 있다.314)

脇(P r va)尊者는 大辯才의 所有者였다. 異敎徒인 馬鳴(A vagho a)은 脇尊者에게 자신을 소개함과 동시에 온갖 論理로써 論破하기 시작했다. 脇尊者는 그가 論破하는 것을 다 들었으나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馬鳴은 충분히 그를 論破했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그는 반성하였다. '저 比丘는 매우 심오한 智慧를 갖추고 있다. 패배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說한 모든 말은 論破 당할 수 있으므로 나는 내 자신을 論破해버린 셈이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했으므로 論破 당할 것이 없다.' 그때 馬鳴은 脇尊者에게 되돌아가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의 머리를 약속한 대로 斬首하도록 제의했다. 이에 脇尊者는 삭발식을 行함이 더 좋을 거라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삭발하여 出家하는 일도 과거의 自身을 없애는 죽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馬鳴은 僧團에 들어가서 脇尊者의 제자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鳩摩羅什은 言語와 文字로써 說明할 수 없는 眞如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 沈默의 優越性을 說明하면서 자신의 이야기의 結論을 맺으며 말하기를, "沈默이야말로 最上의 論破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入不二法門品」을 考察해본 결과, 不二의 論理的 根據가 空思想임을 쉽게 간파 할 수 있으며, 空은 緣起論的으로 一切의 事物이 存在하므로 非有非無의 中道的 立場에서 說明되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32菩薩의 各各의 說과 「維摩一默」은 어느 쪽이 더 훌륭한 것일까? 우리 衆生들은 언제나 어떤 事物을 대할 때에, 對立的으로 分別하여 思惟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제 「入不二法門品」을 공부한 우리들은 그러한 差別的인 思惟를 벗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32菩薩의 各各의 說이 敎라면, 「維摩의 一默」은 禪이다. 물론 32菩薩의 各各의 說도 禪觀에 입각하여 說해진 것이지만, 言說을 사용한다는 면에서 볼 때, 敎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敎는 전적으로 否定되고, 禪만 宣揚된 것으로 보아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32菩薩의 入不二論은 바로 「維摩一默」의 禪的 根源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文殊師利가 「維摩의 一默」을 讚嘆하고 있는 것은 思想的 側面보다는 修行的 側面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後代에 維摩만이 正答을 提示한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修行論에 입각한 평가일 뿐임을 認識해야 할 것이다. 그 같은 修行論的 評價에 共感하면서도, 32菩薩이 제시한 入不二論의 가치가 過小評價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維摩一默」의 哲學的 基礎가 되기 때문이다.315)  또한 文殊는 言說에 依支하여 入不二가 無言의 世界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維摩는 入不二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默然히 沈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言表할 수 없는 入不二의 眞理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無言의 世界를 無言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런 면에서 文殊는 아직 敎이지만, 維摩는 이미 禪인 것이다. 文殊와 維摩의 차이는 眞理에 대한 理念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行動에서 보이는 有言과 無言의 차이일 뿐이다. 原理論의 立場에서 볼 때, 禪·敎一致이므로 文殊와 維摩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優劣이 없는 점이 오히려 不二의 眞相일지도 모른다.316) 

東洋的 思惟의 世界가 歷史的으로 형성된 實踐過程에 있어서 禪宗이 이루어 놓은 역할은 매우 크다. 그러나 禪과 敎는 본래 不二一切이어야만 全 佛敎에 대한 綜合的 理解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維摩經』은 法的으로나 人的으로도 顯著한 特色을 지니고 있으므로 禪·敎의 구별 없이 流行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 후에 두드러진 維摩의 禪的 特色에 가려져서, 그 전체적인 모습을 잘못 보게 되면, 이 經의 人·法 不二의 眞正한 趣意를 損傷시킬 뿐만 아니라, 大乘禪의 普遍的 眞義 그 자체에도 背馳되는 것이다.317) 

結論的으로 要約해서 말하면, 大乘佛敎의 모든 經典중에서 『維摩經』이 우리에게 가장 큰 魅力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의 주된 理由는 『維摩經』의 뛰어난 文學的 特色뿐만 아니라 또한 이 經이 大乘佛敎의 根本原理를 가장 明確히 把握하여 描寫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根本原理중의 하나가 煩惱卽菩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維摩經』에서는 「不二法門」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는 모든 事物을 對立的으로 생각한다. 煩惱와 菩提· 理想과 現實· 善과 惡 등을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思惟作用을 佛敎에서는 分別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差別하여 생각하는 것이 分別인 것이다. 煩惱와 菩提에 대해서도 우리는 分別하여 煩惱는 괴로운 것이고 執着하는 것이며, 菩提는 깨달음으로서 一切의 事物에 執着하지 않는 境地로 認識하며 差別하고 分別한다. 이 둘을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들 人間의 삶의 모습을 直視할 때, 진정 强烈하게 어떤 일에 執着했던 사람은 그러한 執着에서 벗어난 自由로운 境地를 認識할 수가 있는 법이다. 强烈한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야말로 愛慾의 虛無함을 알 수 있게 되는 법이다.

러므로 '不二法門'은 對立되어 있는 둘을 하나로 보는 高次元的인 立場의 世界觀인 것이다. 요컨대 『維摩經』 全體의 思想은 이 不二의 世界觀으로 一貫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advaya-prave a'에서 advaya는 '不二·無二'의 뜻이고, prave a는 '證入·悟入'의 의미이므로, 支謙의 「不二入品」이나 羅什의 「入不二法門品」 모두 다 '不二를 悟入'하는 것, 즉 '空을 깨닫는 것'으로 解釋해야 옳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支謙과 羅什의 『維摩詰所說經』보다는 玄 의 『說無垢稱經』이 梵語 經題인 Vimalak rti-nirde a의 원래의 뜻에 훨씬 더 적합한 것으로 思料된다.

예를 들어 말하면, 물(水)과 파도(波)의 비유가 어쩌면 '不二法門'에 어느정도 合當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물의 本性을 떠나 파도가 존재할 수 없으며, 파도의 本性을 떠나서 물은 存在할 수 없기 때문이다. 波濤의 本性은 어디까지나 물인 것이다. 또한 물의 本性은 波濤로서 起動하고 있다. 그러므로 물(水)과 파도(波)는 바로 不二의 關係인 것이다.318)

렇다면 眞理를 如實히 觀할 수 있는 入不二의 境地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證得할 수 있는 것일까? 『維摩經』에서는 '一切의 觀念이 滅한 것이 入不二이다'(Ⅷ,§3)라고 說한다. 그러므로 淸淨心을 證得함으로써 그러한 境地에 到達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境地는 不斷히 禪定을 修行함과 동시에 六波羅蜜을 통한 大乘菩薩道의 實踐을 통해서만 證得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 『維摩經』의 禪淨雙修

 

1) 禪淨雙修의 源流

 

敎가 宗敎로서 窮極的으로 指向하는 바를 安心立命 혹은 安身立命이라 할 때, 安心 내지 安身의 方法으로는 自心의 本源性을 禪을 통해서 追究하려하고, 立命을 위해서는 理想世界를 겨냥한 來世의 幸福으로서 淨土를 追求하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의 차이라기보다는 相補性의 관계로 보는 것이 禪淨雙修의 修行의 立場이었다. 따라서 前者가 己事究明의 證悟를 추구하는 自己洞察의 입장이라면, 후자는 祈禱와 念佛등의 방법을 통한 自己救濟의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비교적 일찍부터 이러한 禪과 淨土의 둘은 서로 相補的인 關係에서 修習되어왔다.319)

이러한 禪淨雙修의 源流는 東晋時代 竺僧顯에게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그는 出家하여 禪定을 닦은 후에 다시 淨土의 業行을 닦았다. 그의 念佛은 일종의 觀想念佛이었다. 한편 竺僧顯보다 약 80년 후에 禪定과 淨土를 雙修한 사람은 廬山의 慧遠이었다. 慧遠은 般若台精舍의 無量壽佛像앞에서 123인과 함께 西方願生의 무리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행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행한 念佛은 實相念佛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龍舒의 「淨土文」속의 寄瑞의 설명에서 보면 觀想念佛에 해당하여 禪定三昧속의 見佛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以後의 禪淨雙修로는 鳩摩羅什의 弟子인 僧叡를 들 수 있다. 僧叡는 「關中出禪經序」에서 羅什으로부터 禪法을 받고 『坐禪三昧經』의 禪觀을 修習하여 淨土往生을 願求하였다. 특히 『坐禪三昧經』의 내용은 이후 禪宗의 成立期에 있어서 4祖 道信을 비롯하여 5祖 弘忍 등 소위 東山法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경전이기도 하다. 바로 이 經에 의해서 禪宗의 승려로서 念佛을 依用했던 사람은 第4祖 大醫道信으로서 『文殊說般若經』을 引用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善男子 善女人이 一行三昧에 들고자 하거든 마땅히 조용하고 한적한 곳

에 자리하여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버려 모습에 끄달리지 말고, 마음을 한 부처

님에게 두어 오로지 부처님의 名字를 부르며, 부처님 계신 곳을 따라 端正한 몸

으로 바로 향하여 그 一佛을 끊임없이 念하면 그 念속에서 過去 現在 未來의 부

처님을 親見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 부처님의 功德은 無量無邊하기 때문이다.320)

 

곧 『文殊說般若經』의 一行三昧의 念佛은 곧 念心이다. 念心이란 心 그 自體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直心의 體得이다. 心 그 自體를 달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心이 心으로서 본래부동의 상태임을 말한다. 따라서 道信의 『文殊說般若經』에 의한 一行三昧는 念佛임과 동시에 念心이다. 이 念心 곧 念佛心이란 다름아닌 無所念이다. 無所念이 念佛이고 念心이므로 念佛하지않고 念心하지않는 그것이 곧 念佛의 意味이다. 곧 卽念無念이다. 소위 禪的인 念佛로서 禪과 念佛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바로 禪淨의 兼修가 나타나 있다. 곧 道信의 사상적인 핵심은 五門의 禪要가 열거되고 있는 바, 그 가운데 第五門의 守一不移의 禪定이 강조되어있다. 이것은 一行三昧의 실천으로서 그 方便으로 念佛이 사용되고 있다. 이 一行三昧에서는 『文殊說般若經』을 敎 으로 하여 念佛이 강조되고 있어 『坐禪三昧經』의 五門 가운데 第5의 等分行에서 말하는 念佛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道信의 一行三昧에 의하자면 念佛하는 마음은 곧 부처이고 妄念은 곧 凡夫이다. 이로써 보면 더욱이 道信의 念佛은 般若思想에 根據한 '念佛卽是念心'으로서 '識無形· 佛無形· 佛無相貌'를 아는 것이 安心法門이다. 여기에서는 佛의 32相과 80種好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觀하는 것이 아니라 念佛을 자기의 心識에서 主體的으로 捕捉하려는 態度라 할 수 있다.

러나 弘忍에게 있어서는 一字觀과 日想觀이 있어 이와 유사하기는 하나 염불 그 자체를 직접 언급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 문하에 배출된 南山念佛門과 淨土宗의 無相과 牛頭宗의 法持 등이 있다. 이들에게서 보이는 念佛은 후대의 본격적인 念佛修行과 같다는 점에서 『坐禪三昧經』에서 보는 禪定方法으로서의 念佛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弘忍의 『修心要論』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만약 처음 坐禪을 공부하는 자는 『觀無量壽經』에 依支하여 端正히 앉아 마음을

바르게 지니고 눈을 감고 입을 다물며 마음으로는 앞에 멀고 가까움을 凝視하면

서 日想觀을 지어 眞心을 지켜서 생각 생각을 머물러 두지 말라.321)

 

위의 글은 『觀無量壽經』에 의한 觀法을 初心者에게 권유하고 있다. 대개 坐禪의 初入者는 마음이 散亂하기 쉽기 때문에 그 散亂한 마음을 막기 위하여 마음을 한 곳에 專注시키기 위하여 특히 『觀經』의 觀法을 依用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아직 話頭의 參究法이 形成되기 以前의 時代에 日想觀을 依用하여 眞心을 지켜 나아가는 것이 꼭 念佛이라고 보기에는 見解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觀想法이라는 意味에서 淨土修行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322) 이것은 『觀無量壽經』에 의하여 하나의 對象을 設定하고 그것을 통하여 소기의 목적에 이른다는 점에서 淨土의 念佛과 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禪觀思想 내지 念佛禪의 성격은 智詵-處寂-無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無相은 南山念佛禪者이다. 無相은 無憶·無念·莫忘의 三句로써 引聲念佛을 가르쳤다. 그 방법은 高聲으로 한 호흡에 염불하여 길게 끌어 점차 작은 소리로 하여 마침내는 無聲으로 한다. 無聲이 된 후에 念을 멈추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을 佛心에 통하게 하고 소리로써 밖에 드러나게 된 佛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자기 자신의 心中에 있게 한다. 곧 소리를 勝緣으로 하여 자기의 마음에 佛心을 全現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引聲念佛이 지향하는 것은 無念이 되어 결국 三昧에 들어가는 것이다. 無相의 계통에서는 無念을 가장 중시한다.

그런데 禪·淨의 相關關係에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다. 즉 ① 禪으로부터 淨土敎로 접근하는 것과 ② 淨土敎로부터 禪으로 접근하는 것이 그것이다. 前者의 경우는 禪에 중점을 두면서 淨土敎의 信仰을 갖는 것과, 淨土敎를 禪的으로 융화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後者의 경우에는 4種念佛이 있는데, 觀像·觀想·實相의 3種念佛과 念佛三昧를 말한다. 3種의 念佛은 坐禪에 의한 觀法이므로 廣義의 禪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念佛三昧는 念佛에 의해서 三昧를 성취하는 것이므로 결국 그것도 廣義의 禪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廣義의 禪이긴 하지만 淨土行業과 修習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禪淨雙修의 領域으로 看做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前者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永明延壽를 들 수가 있다. 특히 延壽의 百八佛事에 의하면 禪과 淨土 이외에 華嚴·天台·眞言·法華 등 諸宗의 信仰에 입각하고 있으며, 그 숭배와 귀의의 대상은 諸佛로부터 天部에 이르고 있다. 그의 願生의 淨土는 彌陀淨土·藥師淨土·兜率淨土 등 다양하다. 그리고 『萬善同歸集』에서는 卽心是佛思想·唯心思想·見性思想 혹은 一心의  解 등이 표명되어 있다. 그리고 『自行錄』의 百八佛事에서는 自心을 깨치는 것을 宣示하고 있다. 그리고 禪의 實踐으로는 天台山 天柱峰에서 90일 동안 선정을 닦고 뒤에 法眼宗의 第2祖인 天台德韶에게 참하여 사법하였다.

延壽에게는 禪과 淨土의 문제가 동일한 것이었다. 곧 말할 나위도 없이 禪은 此土에서 自心을 깨치는 것이고, 淨土는 彼土인 淨土에 往生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왜 淨土에 往生하려 하는가에 대해서는 淨土에 往生하면 菩薩위에 들어가 煩惱를 끊어 윤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요컨대 佛道成就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淨土의 業行은 末世에는 自力이 難行임에 비하여 他力은 成就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淨土에 가는 것에만 전념하면 될 터인데 왜 하필 禪을 함께 修習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자세하고 명료한 설명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렇지만 「受菩薩戒法」에서 살펴보면 上根機의 사람은 受戒習禪으로 往生하여 菩薩初地를 證得한다. 게다가 上根機의 사람은 習禪뿐만 아니라 菩薩戒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어서 延壽의 여기에서의 주장은 習禪보다는 오히려 菩薩戒를 받는 것을 더 중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中下根機의 사람은 佛戒를 믿지 않고 단지 念佛만 하기 때문에 往生의 得益이 上根機의 사람보다 下劣하다는 것이다 결국 延壽의 禪淨雙修라는 것은 往生得益에 훌륭한 것인데 淨業만 닦는 것은 得益이 下劣하다는 立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證果를 배경으로 하여 禪淨修習을 四句로 區別하고 있는 것이 「參禪念佛四料揀」의 네 偈頌이다. ① 第一句의 有禪無淨土는 십중팔구 道를 그르친다. ② 第二句의 無禪有淨土는 설령 今生에 開悟하지는 못할지라도 모든 淨土에 往生하여 彌陀를 親見하고 生死를 出離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③ 第三句의 有禪有淨土는 最上으로서 今生에는 人師가 되고 來生에는 佛祖가 된다고 讚嘆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④ 第四句의 無禪無淨土는 最下位로서 永遠히 得道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요컨대 延壽에 의하면 禪淨雙修야말로 現世와 來世의 二世를 일관하여 最上의 佛敎修行이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323) 

 

2) 『維摩經』 佛國品의 禪淨雙修

 

以上에서 考察한 바와 같이, 흔히 禪思想과 淨土思想간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心淨과 唯心淨土說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維摩經』 佛國品 第一의 '佛國土의 淸淨'에 관한 思想을 考察해 볼 때, 적어도 『維摩經』에서는 禪淨雙修의 論理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論者의 이러한 論理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佛國品 第一의 '佛國土의 淸淨'章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때에 長者의 아들 寶積은 이러한 偈頌을 다 읊고 나서 부처님께 사뢰    어 말씀드렸다. "世尊이시여, 이 500명의 長者의 아들들은 이미 다 '아뇩다    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나이다. 바라옵건대 佛國土의 淸淨에 대해서 오직    말씀을 듣기를 원하옵니다. 世尊이시여, 諸菩薩의 淨土의 修行方法을 說하    여 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寶積아! 네가 여러 菩薩들을 위해 如    來의 淨土에 대한 修行方法을 묻는구나.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고 念하여    라. 너를 위해 말하여주겠다."

이에 寶積과 500長者의 아들들은 그 가르침을 받고 열심히 들었다.324)

 

위의 經說에서 阿 多羅三 三菩提는 梵語인 aunttara-samyak-sa bodhi의 音譯으로서 '가장 높고 보편성 있는 바른 깨달음'의 뜻을 지닌 '無上正等正覺'을 일컫는 말인 동시에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眞理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훌륭하다. 寶積아! 그대가 모든 菩薩들을 위하여 如來의 淨土에 대한 修行方法을 묻는구나.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고 念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의 내용은 무엇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세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듣는 것이요, 둘째는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닦아 행하는 것이다. 듣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자기의 것으로 昇華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듣고 생각하기만 하고 실제로 實踐하지 않는다면 또한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다. 마치 배고픈 사람이 밥에 관해서 듣고 생각만 하고, 그 밥을 실제로 먹지 않는다면, 자기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자세히 듣거라'라고 함은 듣는 자세를 말함이요, '잘 생각하라'함은 생각하는 자세를 말함이요, '念하라'함은 실제로 행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325)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寶積아. 衆生의 종류가 곧 菩薩의 佛土이니라. 왜냐하면 菩薩은 그 衆生을    敎化하는 바에 따라서 佛國土를 취하게 되며, 調伏받을 衆生들을 따라 佛國土를 취하게 되며, 衆生들이 응당 어떤 國土로써 부처님의 智慧에 들어가는 가에 따라 佛國土를 취하게되며, 衆生들이 응당 어떤 국토로써 菩薩의 根機를 일으키는가에 따라 부처님의 淨土를 취하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菩薩이 淸淨한 國土를 취하는 것은 모두 衆生들을 饒益하게 하기 위함이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여기 어떤 사람이 궁전을 지으려고 한다고 하자. 빈땅에다 궁전을 지으려고 하면, 뜻대로 아무런 障碍없이 지을 수 있지만, 만약 虛空에 궁전을 지으려고 하면, 결국 成功하지 못할 것이다. 菩薩도 이와 같이 衆生을 成就시키기 위해 佛國土를 취하려고 願하는 것이니, 佛國土를 取하기를 願하는 것은 저 虛空에서가 아닌 것이다.326)

 

위의 經說은 大乘佛敎의 妙理를 잘 表現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小乘佛敎의 궁극적인 목적은 涅槃을 證得하는 것이며, 衆生敎化의 의지는 약해 보인다. 그러나 大乘의 菩薩은 上求菩提·下化衆生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淨土를 건립해서 衆生을 敎化하여 이익을 주려고 애를 쓴다.

菩薩이 淨土를 取하는 것은 自利를 위함이 아니고, 一切衆生을 饒益하게 하려는 利他의 行인 것이다. 菩薩이 위로 菩提를 구하는 것을 虛空에 비유하고, 아래로 衆生을 敎化하는 것을 땅에 비유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 만일 위로 菩提를 구하는 虛空만 있고, 下化衆生할 수 있는 땅이 없으면, 淨土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虛空을 부처님의 智慧에 비유하고, 땅을 衆生에 비유하며, 궁실을 지을 수 있은 材木을 온갖 修行에 비유한다면, 이 세 가지가 합해져야 淨土가 이루어 질 수 있음을 說하고 있는 것이다.327)

 

寶積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① 정직한 마음(直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부처가 될 때에 아첨하지 않는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② 깊은 마음(深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부처가 될 때에 공덕을 고루 갖춘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③ 菩提의 마음(菩提心)이 부처의 淨土이니, 菩薩이 부처가 될 때에 大乘의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328)

 

① 直心이란 '眞如를 향하는 마음'이다. 『起信論』의 信成就發心을 말씀한 대목에 '直心·深心·大悲心'등 세 가지 마음을 들고, 直心을 설명하여 '眞如를 생각하는 한 마음'이라 하였다. 요컨대, 直心이란 거짓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는 마음인 것이다.

② 深心이란 '온갖 善行을 모으는 마음'으로 疑心이 없는 깊은 信心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온갖 공덕을 심어서 깊고 튼튼하여, 온갖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인 것이다.

③ 菩提心이란 '佛의 마음으로 大慈悲의 마음을 일으켜 一切衆生의 苦를 없애어 濟度하려는 마음'으로 『起信論』에서 풀이하고 있다.

이상에서 말한 '直心·深心·大悲心'등 세 가지는 淨土의 根本原因이 된다. 그러므로 僧肇는 말하기를, "큰 道를 널리 펴려고 하면, 먼저 그 마음에 정직하게 眞如를 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마음이 참되고 정직한 뒤에 修行에 들어가기를 깊이 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 마음이 깊어지면 널리 운전하여 모든 衆生을 제도하기 가이 없다. 이를 菩提心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鳩摩羅什은 말하기를, "정직한 마음이라 함은 성실한 마음이다. 發心의 처음이 성실하면 道에 들어감이 더욱 밝아지니, 이를 深心이라 한다. 이러한 深心이 더하고 넓어져서 바로 부처님의 智慧에 들어가는 것이 菩提心이다."라고 하였다.329)

 

④ 보시(布施)가 곧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온갖 것을 능히 희사하는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⑤ 持戒가 곧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十善道를 행하여 願이 이루어진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⑥ 忍辱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三十二相으로 장엄된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⑦ 精進을 하는 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온갖 공덕을 부지런히 닦은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⑧ 禪定을 닦는 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마음을 한군데 모아 산란하지 않은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⑨ 智慧를 밝히는 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올바로 마음을 가다듬은 衆生(正定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330)

 

위의 經說은 六波羅蜜이 淨土의 原因이 됨을 밝히고 있다.

① 布施에는 財施·法施·無畏施가 있다. 요컨대 貪慾을 버리고 慈悲의 마음으로 세상을 서로 돕고 이익 되게 살아감을 말한다.

② 持戒라 하는 것은 惡한 짓을 그치게 하는 止惡과 善을 實踐하는 行善과 社會를 淨化하는 攝衆生의 뜻이 포함된다.

③ 忍辱이라 함은 人間이 修行함에 있어서 順境이든 逆境이든 참고 견디지 못하면 菩薩行을 成就할 수 없으므로 특히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것을 참아야 한다는 데서 辱을 참음이 强調된다.

④ 精進이라 함은 하나의 목표를 정해놓고 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⑤ 禪定이라 함은 梵語인 dhy na 혹은 P li語의 jh na에서 최후의 母音이 탈락하여 jh n이라고 發音되는 것을 音寫한 것으로 思惟修·定·靜慮·禪那등으로 표현되는데, 마음을 한 곳에 集中시켜서 散亂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⑥ 智慧에 있어서, 智는 거울의 맑음과 같고, 慧는 거울의 맑음이 온갖 형상을 비추는 것과 같다.

위의 六波羅蜜은 우리들 衆生이 迷한 生死苦海를 벗어나서 깨달음의 세계인 涅槃의 彼岸에 이르게 해주는 大乘佛敎의 修行方便인 것이다.

 

⑩ 四無量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慈悲喜捨를 成就한 衆生들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⑪ 四攝法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解脫을 얻은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⑫ 方便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모든 일에 있어서 方便이 無 하게된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⑬ 三十七道品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四念處·四正勤·四神足·五根·五力·七覺支·八正道를 닦은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 331)

 

四無量心이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인데, 慈는 衆生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요, 悲는 衆生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이요, 喜는 衆生의 즐거움을 기뻐해 주는 것이요, 捨는 衆生들에게 대하여 원수와 친함이 없이 평등하게 대함이니, 이 네 가지 마음은 衆生을 대함에 제한이 없으므로 한량없는 마음이라 한다.

四攝法이라 함은 布施·愛語·利行·同事이다. 布施에는 財施·法施·無畏施가 있으며, 탐욕을 버리고 慈悲心으로 서로 돕고 이익 되게 살아감을 말한다. 愛語는 衆生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利行이라 함은 衆生들을 이익 되게 하는 행동이다. 同事라 함은 衆生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三十七道品이란 四念處·四正勤·四神足·五根·五力·七覺支·八正道를 일컫는다. 四念處란 ①觀身不淨 ②觀受是苦 ③觀心無常 ④觀法無我이다. 四正勤이란 ①아직 생기지 않은 惡은 생기지 않게 하고(未生惡令不生) ②이미 생긴 惡은 참회하여 없어지게 하고(已生惡令永斷) ③아직 생기지 않은 善은 새로 생기게 하고(未生善令生) ④이미 생긴 善은 더 增長하게 함(已生善令增長)을 의미하는 행위이다. 四神足이란 ①欲如意足 ②精進如意足 ③心如意足 ④思惟如意足을 말하며, 각각 깨달음에 대한 欲求·精進과 努力·精神統一의 禪定·올바른 思惟가 마음대로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五根이란 ①信根 ②精進根 ③念根 ④定根 ⑤慧를 일컫는다. 五力이란 앞의 五根을 닦으면 그에 의하여 다섯 가지 힘이 생김을 말한다. 七覺支란 깨달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부분이란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①念 ②擇法 ③精進 ④喜 ⑤輕安 ⑥定 ⑦捨등을 말한다. 八正道란 ①正見 ②正思惟 ③正語 ④正業 ⑤正命 ⑥正精進 ⑦正念 ⑧正定을 말한다.

以上의 六波羅蜜에서 八正道에 이르는 온갖 禪定과 修行方便이 모두 다 大乘菩薩의 淨土의 根本原因이 되고 있음을 살펴 볼 때에, 적어도 『維摩經』에서는 心淨과 唯心淨土說에 기초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禪과 淨土는 對立的인 측면이 사라지고 오히려 相助의 측면이 부각되면서 禪淨雙修의 論理가 成立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佛國土의 淸淨'章을 끝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⑭ 廻向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온갖 功德이 具足된 國土를 얻게 된다.

⑮ 八難을 말하여 제거하는 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데 장애가 되는 여덟가지 어려움과 三惡道가 없느니라.

 스스로 戒行을 지키고 남의 그릇됨을 헐뜯지 않는 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그 國土에는 禁戒를 범했다는 이름조차 없느니라.

 十善을 닦는 것이 菩薩의 淨土이니, 菩薩이 成佛할 때에 수명이 중간에 요절되지 않으며, 큰 富를 누리고 梵行이 淸淨하며, 말하는 것이 성실하고 참되며, 항상 부드러운 말을 써서 眷屬들이 흩어지지 않고 諍訟을 잘 화합시켜서 말하는 것이 모두 상대방에게 이익을 주며, 질투하지 않고 성내지 않는 바른 소견을 가진 衆生이 그 國土에 태어나느니라.332)

 

위의 經說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菩薩淨土의 原因으로서 우리 衆生들의 心行을 든 것이 大乘經典으로서의 『維摩經』의 특색이다. 곧 부처님의 道에 들어가는데, 八難을 덜어 없애고, 十善을 닦는 것을 根本思想으로 강조한 것이다.333)

 

이와 같이 寶積아, 菩薩은 그 直心에 따라서 능히 行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發心하는 만큼 深心을 얻게 되고, 그 深心을 따라서 곧 뜻을 調伏하게 되고, 그의 뜻을 調伏함에 따라서 곧 말과 같이 행하게 되고, 그의 말과 같이 行함을 따라서 곧 능히 廻向하게 되고, 곧 그의 廻向함을 따라서 곧 方便이 있게 되고, 그의 方便을 따라서 곧 衆生을 成就하게 되고, 그의 衆生을 成就함을 따라서 곧 부처님의 國土가 淸淨하게 되고, 부처님의 國土가 淸淨함을 따라서 곧 法을 說함이 淸淨하게 되고, 說法이 淸淨해짐에 따라서 곧 智慧가 淸淨하게 되고, 智慧가 淸淨해짐에 따라서 곧 그의 마음이 淸淨하게 되고, 그 마음이 淸淨해짐에 따라서 곧 一切功德이 淸淨해진다. 그러므로 寶積아, 만약 菩薩이 淨土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淸淨하게 하여라. 그 마음이 맑아짐에 따라서 곧 佛國土가 淸淨하여 지느니라.334)

 

以上의 經說의 核心은 바로 이 끝 부분 즉 '만약 菩薩이 淨土를 얻으려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淸淨하게 하여라. 그 마음이 淸淨해짐에 따라서 곧 佛國土가 淸淨해진다.'라는 내용이라고 思料된다. 佛國土에 태어나는 이는 벌써 菩薩의 境地에 到達한 사람이다. 그러한 境地는 直心에서 출발하여 온갖 功德을 쌓고 마음이 淸淨해짐으로써 凡夫가 곧 菩薩이 된 것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菩薩은 곧 凡夫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리라고 여겨진다. 또한 마음이 淸淨해진 境地는 菩薩과 凡夫의 分別이나 差別相이 없어진 境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위의 經說은 禪的 淨土觀으로서 唯心淨土說에 該當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唯心淨土說은 禪思想의 立場에서 他方淨土說을 受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로서 생긴 禪的 淨土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他方淨土說은 예컨대 阿彌陀佛과 極樂世界가 마음밖에 實在하는 것으로 보고, 阿彌陀佛의 名號를 稱念함으로써 阿彌陀佛의 來迎에 힘입어서 極樂世界에 往生할 수 있다는 實在論的인 淨土觀이다. 他方淨土說은 이 世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부처님이 계시는 淨土가 있다고 생각하고 西方 또는 東方등의 특정의 方位에 淨土가 存在하는 것을 밝히는 것과 十方에 淨土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335) 

그렇지만 他方淨土說의 입장에서는 밖으로 求하게 되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禪思想과 對立하게 되는데, 여하튼 禪宗에서는 대체로 淨土宗의 哲學的 기반을 實在論으로 看做하고 批判하면서 동시에 唯心論으로 轉換하고자 試圖하게 된다. 더구나 阿彌陀佛의 西方淨土의 信仰이 널리 퍼짐에 따라 中國의 禪家에서는 西方淨土를 批判하고 열심히 心性淨土說을 주장하였다.336)  慧能의 『六祖壇經』337)에서는 心性이 본래 淸淨한 것을 了知하고 깨달음을 열면 이 사바세계가 그대로 淨土라고 말한다. 또한 永明寺 延壽는 그의 著書 『萬善同歸集』338)에서 唯心의 淨土는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라고 말하고, 自心의 淸淨함을 깨달으면 一切의 現象이 自心으로부터 나타나게됨을 알게된다고 말하면서, 唯心의 道理를 이해하면 唯心淨土에 태어날 수 있지만, 西方淨土에 집착한다면 그 淨土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동시에 境界에 집착하면 오로지 所緣의 境界中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물론 『維摩經』에는 現世를 있는 그대로 佛國土로 보면서 現世의 佛國土를 淸淨하게 가꾸어 간다는 此方淨土說이나 禪的 淨土觀인 唯心淨土說이 主流를 형성하여 禪淨雙修의 입장에서 展開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他方淨土說을 완전히 排除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維摩經』 역시 他方佛의 存在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他方佛과 그 世界는 다음과 같다.

 

① 寶莊嚴佛의 無量功德寶莊嚴土339)

② 須彌相世界의 須彌燈王如來340)

③ 衆香國의 香積如來341)

④ 一切樂莊嚴國342)

⑤ 妙喜國의 無動如來343)

以上과 같이 여러 他方佛의 存在가 說해지고 있음을 볼 때, 『維摩經』은 唯心淨土說과 此方淨土說을 크게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他方淨土의 存在를 암시함으로써 폭넓은 思惟力을 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본래 參禪하여 悟道함을 宗旨로 삼는 禪宗에서 淨土思想을 導入하는 것은 어떤 理由에서일까? 그것을 우리는 念佛禪 혹은 念佛公案禪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敎義는 唯心淨土와 己身彌陀이다.

唯心이라고 하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은 妄心이 아닌 佛心을 말한다. 그러한 佛心은 각자의 色身 즉 肉身에 있을 뿐만 아니라, 宇宙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佛心은 西方의 極樂世界에도 있으며,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現實世界에도 遍滿해 있다. 따라서 그것은 唯心法界라고도 말하여지는 것이다.

다음에 己身彌陀란 自性의 阿彌陀佛이라는 의미인데, 이 阿彌陀佛의 眞身은 三世·十方에 두루 해 있다. 그래서 각자에게 자각된 阿彌陀佛은 언제라도 應化하여 出現한다. 그러므로 이 몸이 곧 阿彌陀佛임을 自覺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 有名한 『觀無量壽經』에도 '是心作佛 是心是佛'이라고 說하여 있듯이,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들며,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信心의 一念이 바로 佛心이며 부처인 것이다. 이러한 淸淨心의 一念은 각자가 眞心을 가지고 願을 發하는 곳에 存在한다. 이것을 自性의 阿彌陀佛이라고 한다. 이러한 一心밖에 淨土는 없으며, 一念이외에 부처가 되는 길은 없다. 오직 一心으로 깊이 믿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바로 念佛公案禪의 본래의 뜻이다.

彌陀를 의지하면 南無阿彌陀佛이 主가 된다. 그것은 信心을 얻는 것이고, 이러한 信心은 佛心이다. 六字名號를 부르며 佛心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念佛이 公案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他者的인 阿彌陀佛에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부르는 자기는 누구인가?' '念해지고 있는 阿彌陀佛은 무엇인가?' '이 唱名念佛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참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에는 각각의 名號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名號라도 좋지만, 法體는 오직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선 南無阿彌陀佛의 六字로 歸入하는 것이다. 이것을 唯心淨土, 己身彌陀라고 하는 것이다.344)

永明延壽(904∼975)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을 받은 普照知訥(1158∼1210)도 唯心淨土說의 입장을 분명히 취하고 있음을 엿 볼 수가 있다.

 

『淨名經』에 이르기를 「佛國土를 깨끗이 하려면 그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 마음이 깨끗해짐에 따라 佛國土가 깨끗해진다.」라고 하였고, 또 『法寶記壇經』에 이르기를 「마음의 바탕이 더럽지 않으면 西方이 여기서 멀지 않겠지만, 더러운 마음을 일으키면 어떤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또한 壽 禪師는 이르시기를 「마음을 알면 바로 唯心淨土에 나고, 境界에 집착하면 다만 반연하는 바의 境界가운데 떨어진다」고 하셨다. 以上의 부처와 祖師들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淨土에 나기를 구하는 뜻은 다 제 마음을 떠나서 말하지 않았으니, 제 마음의 근원을 떠나 깨닫지 못하고 어디로 좇아 나아가 들어가겠는가? 345)

 

以上에서 考察한 바와 같이, '만약 菩薩이 淨土를 얻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淸淨하게 하여라, 그 마음이 淸淨해짐에 따라서 곧 佛國土가 淸淨하여진다.'라는 「佛國土의 淸淨」章 최후의 한 문장은 『維摩經』이 강조하는 唯心淨土說의 核心인 동시에 또한 『維摩經』이 시종일관하여 보여주고 있는 淸淨心의 根源을 이루고 있다고 여겨지며, 禪과 淨土의 對立的인 側面이 사라지고 오히려 '禪淨雙修'의 禪思想이 바로 『維摩經』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橋本芳契씨는 「禪과 念佛의 兩道는 矛盾的으로 相互 對立하는 것이 아니라, 兩者는 그 根底에 있어서 깊이 하나로 相通하고 있는 것이며, 成道·淨土 兩法門에 걸쳐 내실을 갖춘 이 經에는 그 만큼의 깊이와 높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46)라고 記述함으로써 『維摩經』의 '禪淨雙修'의 論理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으로 思料된다.

우리 人間의 '心'은 좁게는 自身의 身體 內에만 存在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心'은 곧 온 宇宙의 生命力이 物理的 및 化學的 反應을 일으키며 우리의 身體 內에서 作用하고 있는 동시에 온 宇宙와 相通하며 相依相資의 關係를 維持하고 있음을 우리는 認識할 수가 있다. 찬란한 햇빛과 맑은 空氣와 땅의 에너지와 깨끗한 물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들 人間과 萬物이 存在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身體 그리고 온 宇宙는 하나인 것이다. 大自然과 마찬가지로 우리 人間도 肉體와 精神이 모두 淸淨할 때, 우리는 오래오래 幸福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彼土인 淨土에 往生하기만을 원하는 凡夫衆生의 立場에서 보면, 禪과 淨土는 분명히 둘이지만, 此土에서 自心을 깨쳐 淸淨心을 證得한 菩薩이 一切衆生을 濟度하여 理想的인 淨土를 바로 지금 此土에 實現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적어도 『維摩經』에서는 '禪淨雙修'의 立場을 提示하고 있는 것으로 論者는 생각한다. 더욱이 念佛修行대신에 禪定修行을 중요시하는 六波羅蜜과 三十七道品등의 修行方便이 具體的으로 提示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思料된다.

요컨대 淸淨心의 回復을 促求하는 동시에 一切衆生을 濟度하려는 大乘菩薩道의 雄大한 願力과 그에 隨伴하는 實踐的 修行의 方便을 提示함으로써 『維摩經』은 이 世界에 곧바로 理想的인 佛國土를 實現하고자하는 强力한 메시지를 우리들 人類에게 傳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 結 論

 

Vi는 分離의 뜻이고, mala는 垢·不淨의 意味로서 vimala는 "淨·無垢·離垢·淸淨"의 뜻이다. 그리고 k rti는 "稱·稱讚·稱揚·讚歎"의 意味로 보아야 하며, nirde a는 "說·所說·說法·宣說·敎·釋義·解"의 뜻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Vimalak rti-nirde a'가 의미하는 것은 '淸淨을 讚歎하여 그 뜻을 宣說한다'는 것으로 論者는 把握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本稿는 始終一貫하여 '淸淨心'의 根源을 추구하여 왔다. 그러므로 '淸淨心을 讚歎하여, 그 뜻을 宣說한다'는 『維摩經』에 면면히 스며있는 禪思想을 本稿에서 考察해온 것은 너무도 適切한 硏究였음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支謙과 羅什의 『佛說維摩詰經』이나 『維摩詰所說經』보다는 唐 玄 의 『說無垢稱經』이 梵語 經題인 Vimalak rti-nirde a의 원래의 뜻에 훨씬 더 適合한 것으로 여겨진다.

 

『維摩經』 弟子品 第三의 '戒와 淸淨心에 대한 說法'(ChⅣ,§34)에서 '衆生이 마음의 染汚에 의해 더럽혀지고, 마음의 淨化에 의하여 淨化된다'고 說하신 부처님의 말씀에서 '마음의 性質은 本來 淸淨하고 無染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瑜伽學派는 阿賴耶識과 唯識의 存在를 설명하기 위하여  『維摩經』의 바로 이와 같은 句節에 근거를 삼았었다. 그렇다면, 『維摩經』을 『解深密經』이나 『入楞伽經』이나 『勝 經』등과 같이 觀念論的 傾向을 지닌 大乘經들속에 위치시켜야 되는 것일까? 論者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維摩經』이 說하는 淸淨心(the Pure Mind)은 『維摩經』의 文脈에서 살펴볼 때 '마음이 아닌 것(a Non-mind Mind)'으로 解釋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본래 자연히 淸淨한 마음은 결코 汚染되지 않고 眞如와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維摩經』에 있어서 淸淨心과 다르지 않은 바로 이러한 眞如는 단순한 非存在(abh vam tra)이다. 실제로 『維摩經』은 『般若波羅蜜經』및 『中論』과 마찬가지로 空을 實體化 하는 것을 拒否하며, 經驗에 어떤 根據를 두는 것을 認定하지 않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즉 "諸法은 根據없는 根源에 依據한다"라고 『維摩經』은 說하고 있다.

따라서 瑜伽學派의 Siddhi(唯識頌)에서 阿賴耶識과 唯識의 存在를 내세우기 위해 『維摩經』의 권위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근거 없는 방편일 뿐이다. 『維摩經』의 眞如(Tathat )가 단순한 非存在라면, Tathat 와 다르지 않은 바로 이러한 淸淨心은 무엇으로 이루어질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淸淨心은 오로지 'Non-mind Mind' 또는 'Non-thought Thought' 즉 '心非心(cittam acittam)'인 것이다.

 

『維摩經』의 禪思想의 中心은 「入不二法門品」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維摩一默'이 이 品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菩薩들은 二乘과 마찬가지로 空을 觀하지만, 有를 버리지 않고 능히 온갖 敎化를 이루어간다. 그러므로 空은 有에 卽하는 동시에 有는 空에 卽하는 것이니, 空과 有는 본래 둘이 아님을 밝혔으므로 이 「入不二法門品」은 예로부터 『維摩經』의 眞髓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入不二法門品」을 考察해본 결과, 不二의 論理的 根據가 空思想임을 쉽게 看破 할 수 있으며, 空은 緣起論的으로 一切의 事物이 存在하므로 非有非無의 中道的 立場에서 說明되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32菩薩의 各各의 說과 維摩의 一默은 어느 쪽이 더 훌륭한 것일까? 우리 衆生들은 언제나 어떤 事物을 대할 때에, 對立的으로 分別하여 思惟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入不二法門品」을 工夫한 우리는 그러한 差別的인 思惟를 벗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32菩薩의 各各의 說이 敎라면, 維摩의 一默은 禪이다. 물론 32菩薩의 各各의 說도 禪觀에 입각하여 說해진 것이지만, 言說을 사용한다는 면에서 볼 때, 敎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敎는 전적으로 否定되고, 禪만 宣揚된 것으로 보아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32菩薩의 入不二論은 바로 '維摩一默'의 禪的 根源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文殊師利가 '維摩一默'을 讚嘆하고 있는 것은 思想的 측면보다는 修行的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後代에 維摩만이 眞如의 實相을 제시한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修行論에 입각한 評價일 뿐임을 認識해야 할 것이다. 그 같은 修行論的 평가에 공감하면서도, 32菩薩이 제시한 入不二論의 가치가 過小評價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維摩一默'의 哲學的 基礎이기 때문이다. 또한 文殊는 言說에 의지하여 入不二가 無言의 世界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維摩는 入不二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默然히 沈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言表할 수 없는 入不二의 眞理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無言의 世界를 無言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런 면에서 文殊는 아직 敎이지만, 維摩는 이미 禪인 것이다. 文殊와 維摩의 差異는 眞理에 대한 理念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行動에서 보이는 有言과 無言의 차이일 뿐이다. 原理論의 입장에서 볼 때, 禪·敎 一致이므로 文殊와 維摩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優劣이 없는 점이 오히려 不二의 眞相일지도 모른다.

 

中國以來의 『維摩經』 硏究에 있어서 「不可思議解脫」이 諸學匠에 의해서 經의 根本命題로서 重要視되어온 것은 그 만큼 깊은 理由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解脫」이라는 말에만 依支해서 『維摩經』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解脫은 결코 對象的 혹은 固定的인 槪念이 아니라, 宗敎的 實踐으로서 가장 積極的인 社會救濟의 菩薩慈悲行인 것이 바로 그 大乘佛敎的 意義이기 때문이다.

또한 「解脫」에 지나치게 眩惑된다면, 그것 또한 자신을 繫縛하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六波羅蜜과 八正道의 修行을 生活化하여 菩薩道를 實踐하는 과정에서 不斷히 三昧를 닦아 감으로써 解脫이 成就되고 神變이 自然스럽게 發生하는 것이 그 順序일 것이므로, 積極的인 社會救濟의 菩薩慈悲行을 不斷히 實踐하는 것이야말로 「不可思議解脫」과 神變을 成就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神變은 어디까지나 三昧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昧는 곧 定이며, 神變은 그러한 定에서 發現하는 慧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神變자체보다는 神變이 發現되기 전에 三昧를 指向해야 한다는 점을 論者는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三昧는 不可思議解脫의 體이고, 神變은 不可思議解脫의 用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神變以前의 三昧는 言語를 떠난 沈默 그 자체라는 점에서 「入不二法門品」에서 보여진 維摩의 '默然無言'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維摩의 沈默 역시 不可思議解脫의 한 측면으로 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維摩一默'은 不可思議解脫의 體이며, 그의 神變은 不可思議解脫의 用으로 看做된다. 「入不二法門品」이 不可思議解脫의 體를 說하는 것이라면, 「不思議品」은 不可思議解脫의 體와 用을 동시에 說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神通力을 의미하는 神變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神變은 用이면서 동시에 方便의 意味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方便을 강조하는 神秀의 北宗禪이 『維摩經』의 不可思議解脫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北宗禪의 『大乘無生方便門』에서는 五方便門중에 第3門인 '顯不思議門'으로 『維摩經』을 提示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初期 禪宗을 '解脫宗'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想起해볼 때, 禪思想에 미친 不可思議解脫의 영향을 否定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維摩經』을 一名 『不可思議解脫經』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소위 禪經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시되고 있음도 周知의 事實이다. 이러한 觀點에서 「不思議品」 第六은 維摩가 이처럼 神秘한 不可思議解脫에 대해 說하는 부분이다. 不可思議라고 하는 말 그 自體가 보통사람의 생각이나 말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深奧하고 神秘하다는 意味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法(眞理)은 無念·無相·無住의 心非心의 境地로서 이러한 淸淨心은 見聞覺知의 對象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凡夫가 思議할 수 없는 世界로서 이러한 境地와 그에 따르는 神變을 說한 것이 바로 이 「不思議品」인 것이다. 그러면, 眞理를 如實히 바라볼 수 있는 이러한 無分別智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證得할 수 있는 것일까? 『維摩經』에서는 '一切의 觀念이 滅한 것이 入不二이다(Ⅷ,§3)'라고 說하고 있다. 그러므로 '心非心' 즉 淸淨心을 證得함으로써 그러한 無分別智에 到達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境地는 不斷한 禪定을 통한 철저한 修行과 적어도 六波羅蜜을 통한 大乘菩薩行의 實踐을 통해서만 證得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經의 序頭인 「佛國品」 第1에서 '마음이 淨하면 곧 土도 淨이다'라고 말한 것은 『維摩經』의 根本的인 立場을 端的으로 드러낸 것으로서 '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는 大乘菩薩道의 精神을 來世가 아닌 現世에 곧바로 實現하려는 강한 意志를 表出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參 考  文 獻

 

1. 經·論·疏·語錄

 

支謙 譯, 『佛說維摩詰經』(二卷), 大正藏 14, 474.

鳩摩羅什 譯, 『維摩詰所說經』(三卷), 大正藏 14, 475.

玄  譯, 『說無垢稱經』(六卷), 大正藏 14, 476.

D gha-nik ya Ⅰ,Ⅱ,Ⅲ, P.T.S 本.

Majjhima-nik ya Ⅰ,Ⅱ,Ⅲ, P.T.S 本.

Sa yutta-nik ya Ⅱ,Ⅲ, Ⅳ,Ⅴ, P.T.S 本.

A guttara-nik ya Ⅰ, P.T.S 本.

J. May, Prasannapad , Paris, 1959.

N. Dutt, Pacavi atis hasrik , Calcutta Oriental series, 28, London, 1934.

龍樹菩薩造, 後秦 鳩摩羅什 譯, 『大智度論』 (百卷), 大正藏 25, 1509.

菩提流支 譯, 『彌勒菩薩所問經論』(九卷), 大正藏 26, 1525.

法稱菩薩 造, 宋 法護 等譯, 『大乘集菩薩學論』(二十五卷), 大正藏 32, 1636.

玄裝 譯, 辯機 撰, 『大唐西域記』(十二卷), 大正藏 51, 2087.

僧就 合, 『大方等大集經』(六十卷), 大正藏 13, 397.

般若 譯, 『大乘本生心地觀經』(八卷), 大正藏 3, 159.

竺法護 譯, 『佛說乳光佛經』(一卷), 大正藏 17, 809.

菩提流志 譯, 『大寶積經』(百二十卷), 大正藏 11, 310.

僧祐 撰, 『出三藏記集』(十五卷), 大正藏 55, 2145.

支婁迦讖 譯, 『佛說兜沙經』(一卷), 大正藏 10, 280.

支謙 譯, 『佛說菩薩本業經』(一卷), 大正藏 10, 281.

費長房 撰, 『歷代三寶紀』(十五卷), 大正藏 49, 2034.

慧立本·彦悰箋,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十卷), 大正藏 50, 2053.

義淨 撰, 『大唐西域求法高僧傳』(二卷), 大正藏 51, 2066.

智  說·湛然 略, 『維摩經略疏』(十卷), 大正藏 38, 1778.

慧琳 撰, 『一切經音義』(百卷), 大正藏 54, 2128.

道原 纂, 『景德傳燈錄』(三十卷), 大正藏 51, 2076.

龍樹菩薩 造, 梵志靑目 釋, 姚秦 鳩摩羅什 譯, 『中論』(四卷), 大正藏 30, 1564.

安慧 造, 宋 惟淨 等譯, 『大乘中觀釋論』(九卷), 大正藏 30, 1567.

分別明(淸辯) 釋, 唐 波羅頗蜜多羅 譯, 『般若燈論釋』(十五卷), 大正藏 30, 1566.

瞿曇僧伽提婆 譯, 『增壹阿含經』(五十一卷), 大正藏 2, 125.

求那跋陀羅 譯, 『雜阿含經』(五十卷), 大正藏 2, 99.

瞿曇僧伽提婆 譯, 『中阿含經』(六十卷), 『箭喩經』, 大正藏 1, 26.

瞿曇僧伽提婆 譯, 『中阿含經』卷第43, 『拘樓瘦無諍經』, 大正藏 1, 26.

佛陀耶舍共竺佛念 譯, 『長阿含經』卷第3, 『遊行經』, 大正藏 1, 1.

佛陀耶舍共竺佛念 譯, 『長阿含經』卷第12, 『淸淨經』, 大正藏 1, 1

彌勒菩薩 說, 唐 玄  譯, 『瑜伽師地論』(百卷), 大正藏 30, 1579.

鳩摩羅什 譯, 『摩訶般若波羅蜜經』, 散花品 第29, 大正藏 8, 223.

鳩摩羅什 譯, 『摩訶般若波羅蜜經』, 道樹品 第71, 大正藏 8, 223.

鳩摩羅什 譯, 『摩訶般若波羅蜜經』, 無作品 第43, 大正藏 8, 223.

鳩摩羅什 譯, 『摩訶般若波羅蜜經』, 四攝品 第78, 大正藏 8, 223.

鳩摩羅什 譯, 『小品般若波羅蜜經』, 大正藏 8, 227.

鳩摩羅什 譯, 『金剛般若波羅蜜經』, 大正藏 8, 235.

無羅叉 譯, 『放光般若經』, 大正藏 8, 221.

僧肇 撰, 『注維摩詰經』, 大正藏 38, 1775.

眞諦 譯, 『婆藪槃豆法師傳』(一卷), 大正藏 50, 2049.

 

2. 單行本

 

金東華,『大乘佛敎思想』, 寶蓮閣, 1992.

金東華, 『原始佛敎思想』, 宣文出版社, 1983.

金東華, 『禪宗思想史』, 寶蓮閣, 1985.

崔昌述(玄覺) 譯, 『印度의 禪·中國의 禪』, 民族社, 1991.

崔昌述(玄覺), 『宗敎學·宗敎心理學』, 佛敎時代社, 1993.

崔昌述(玄覺), 『禪學資料論攷』, 東國大 佛敎大學院, 1993.

崔昌述(玄覺), 『印度禪定思想』, 東國大 禪學科, 1994.  

蔡印幻, 『韓國佛敎戒律思想硏究』(Ⅰ), 圖書出版 土房, 1997.

韓普光 著, 『新羅淨土思想の 硏究』, 大阪: 東方出版社, 1991.

坪井俊映, 韓普光 譯, 『淨土敎槪論』, 弘法院, 1990.

藤吉慈海, 韓普光 譯, 『禪定雙修의 展開』, 民族史, 1991.

柳田聖山, 韓普光 譯, 『禪과 日本文化』, 佛光出版社, 1995.

高翊晋,『韓國의 佛敎思想』, 東國大學校出版部, 1991.

權奇悰,『Paramit  硏究』, 東國大學校出版部, 1969.

金妙柱,『唯識思想』, 經書院, 1997.

睦楨培,『戒律論』, 불지사, 1988.

吳亨根,『印度佛敎의 禪思想』, 한성, 1992.

曺勇吉 譯,『根本佛敎倫理』, 佛光出版部, 1994.

全海住,『義湘의 華嚴思想史』, 民族社, 1990.

李道業,『華嚴經思想硏究』, 民族社, 1998.

鄭性本, 『中國禪宗의 成立史 硏究』, 民族社, 1993.

鄭性本, 『禪의 歷史와 禪思想』, 三圓社, 1994.

宗浩, 『臨濟禪 硏究』, 經書院, 1996.

平川彰·梶山雄一·高崎直道 編, 宗浩 譯, 『如來藏思想』, 經書院, 1996.

睦楨培 譯註, 『維摩經』, 大韓佛敎法師會, 1999.

大珠慧海·性徹 譯解, 『頓悟入道要門論 講說』, 藏經閣, 佛紀 2537.

李英茂 譯解, 『維摩經 講說』, 月印出版社, 1989.

李箕永 譯解, 『維摩詰所說經』, 韓國佛敎硏究院, 1994.

李仲杓, 『阿含의 中道體系』, 佛光出版部, 1992.

金仁德, 「中論의 重要思想과 論理形式」, 『佛敎學報』第19輯, 1982.

橋本芳契, 『維摩經の 思想的 硏究』, 京都: 法藏館, 昭和 41년.

橋本芳契, 『維摩の 再發見』, 大藏出版, 昭和 30年.

鎌田茂雄, 『維摩經 講話』, 佛典講話叢書④, 月刊ペン社, 昭和57年.

加藤 堂,『維摩經 講話』, 東京:大東出版社, 昭和19年.

安井廣濟, 『中觀思想の 硏究』, 京都, 法藏館, 1961.

安井廣濟·金成煥 譯, 『中觀思想 硏究』, 弘法院, 1989.

柳田聖山, 『初期禪宗史書の 硏究』, 京都, 法藏館, 昭和56年.

宇井伯壽, 『禪宗史 硏究』, 東京, 岩波書店, 1982.

鎌田茂雄, 『中國佛敎史』, 東京, 岩波書店, 1979.

關口眞大, 『禪宗思想史』, 東京, 山喜房佛書林, 昭和 39.

上田義文·朴太源 譯, 『大乘佛敎의 思想』, 民族社, 1992.

印順, 『中國禪宗史』, 「從印度禪到中華禪」, 廣益印書局, 民國67年.

普照知訥, 『普照全書』, 「勸修定慧結社文」, 佛日出版社, 1989.

胡適, 『神會和尙遺集』, 胡適記念館, 1967.

駒澤大學禪宗史硏究會 篇, 『慧能硏究』(東京:大修 書店, 1978)

tienne Lamotte·Sara Boin tr., The Teaching of Vimalak rti, The P li Text     Society, London, 1976.

Robert A. F. Thurman, The Holy Teaching of Vimalak rti,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76.

Johnston & Kunst ed., The Vigrahavy vartan  of N g rjuna, M langes          chinois et bouddhiques, vol.9.

F. L. Woodward, The Minor Anthologies of the P li Canon, Part Ⅱ, Ud na:     Verses of Uplift, The P li Text Society, Londin, 1985.

Dumoulin, H., A History of Zen Buddhism, London: Faber & Faber, 1963.

Suzuki, D.T., Manual of Zen Buddhism, London: Rider 1950.

Kalupahana, David J., Buddhist Philosophy: A Historical Analysis, Hawaii,      The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82.

Alan W. Watts, The Way of Zen, Random House, New York, 1957.

Mark Epstein, M. D., Thoughts Without A Thinker, Basic Books, New York,     1995.

Sung Bae Park, Buddhist Faith and Sudden Enlightenment,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Albany, N.Y., 1983.

Yong-pyo Kim, Hermeneutics of the Scriptural Word in the Praj -            M dhyamika System, Temple University Ph. D. Dissertation,         1992.

 

 

3. 論文

 

李箕永 譯解, 『維摩詰所說經』, 韓國佛敎硏究院, 1994.

崔昌述,「鏡虛의 禪淨思想」,『德崇禪學』(創刊號), 韓國佛敎禪學硏究院·無佛禪院.

崔昌述, 『禪의 實踐哲學 硏究』, 博士學位論文, 東國大, 1986.

崔昌述,「禪學資料論攷(Ⅰ)」,『申法印스님 華甲紀念佛敎思想論叢』, 論叢刊行委         員會, 1991.

崔昌述,「禪學資料論攷(Ⅱ)」,『佛敎學報』, 第29輯, 東國大學校, 1992.

崔昌述,「根本禪定觀 小考」,『佛敎學報』,第28輯, 東國大學校, 1991.

崔昌述,「順之의 成佛觀」,『韓國佛敎文化思想史』(智冠스님回甲紀念論叢), 卷上,          論叢刊行委員會, 1992.

崔昌述,「看話禪의 形成過程」, 善友道場, 第5號, 大韓佛敎曹溪宗禪友道場, 1993.

                                    c촤최최최최                             蔡印幻, 『禪思想의 成立과 展開--禪中心의 自力信仰의 歷史』, 佛敎學報26, 1989.

成桓基, 『印度佛敎의 三學 硏究』, 博士學位論文, 東國大, 1997.

李法山, 「楞伽經의 禪思想硏究」, 『印度哲學』 第4輯, 民族社, 1994.

姜文善, 『北宗神秀의 禪思想硏究』, 博士學位論文, 東國大, 1988.

金容彪,『宗敎言語의 問題와 經典解釋學』-Candrak rti의 眞理와 方法의 不可分         性論을 中心으로, 韓國佛敎學 18, 1994.

金鎬貴, 『默照禪에 關한 硏究』, 博士學位論文, 東國大, 1997.

李大聖, 「『金剛般若波羅蜜經』의 '卽非의 論理'」, 大學院硏究論集, 第28輯, 東國大          大學院, 1998.

崔鳳守, 『初期佛敎의 緣起思想 硏究』, 博士學位論文, 東國大, 1989.

全在星, 『初期佛敎의 緣起性 硏究』, 博士學位論文, 東國大, 1995.

金浩星, 『禪觀의 大乘的 淵源 硏究』, 博士學位論文, 東國大, 1995.

橋本芳契, 「禪經としての 維摩經」, 『印度學佛敎學硏究』 第2卷 2號.

高崎正芳, 「維摩經 硏究の 一面」, 『印度學佛敎學硏究』 第29卷 2號.

橋本芳契, 「維摩經の 空觀と 淨土義」, 『印度學佛敎學硏究』 第31卷 2號.

稻田ケネス, 「緣起の 一考察」, 『印度學佛敎學硏究』 第6卷 2號.

原田覺, 「空( nya)に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 第23卷 2號.

小島誠一, 「無我の 一考察」, 『印度學佛敎學硏究』 第13卷 2號.

平川 彰, 「諸法無我の 法」, 『印度學佛敎學硏究』 第16卷 2號.

春日禮智, 「中道の 根本思想」, 『印度學佛敎學硏究』 第14卷 1號.

八力宏喜, 『中論』と中觀派, 『印度學佛敎學硏究』 第29卷 2號.

高橋壯, 『中論』の 二諦說, 『印度學佛敎學硏究』 第21卷 2號.

野澤靜證, 「淸辯의 二諦說」, 『日本佛敎學會年報』 第18號.

Shoson Miyamoto, The Middle Way from the Standpoint of Dharma, 『印度學          佛敎學硏究』 第17卷 2號.

 

 

 

 

 

 

 

ABSTRACT

 

A Study on the Thought of the Vimalak rti-nirde a                                                   

 

                                     Lee, Dae Sung

                                     Department of Seon(Dhy na)

                                     Graduate School of Dongguk Univerty

 

 

   The Vimalak rti-nirde a (The Holy Teaching of Vimalak rti) is ranked as one of the developed S tras (Vaipulyas tra,方廣經 or 方等經) of the Great Vehicle in Buddhism. The Holy Teaching of Vimalak rti stands out like a masterfully faceted diamond among the glittering profusion of the jewelry of the Mah y na Buddhist Scriptures. The Vimalak rti-nirde a seems to be located between the Transcendent Wisdom(Praj p ramit ) Scriptures and the Garland (Avata saka) or Inconceivable Liberation (Acintyavimok a) Scriptures. It contains a quintessence of Mah y na doctrines both of the profound and of the extensive categories, and its aesthetic virtue as an object of the connoisseur's religious exultation. For this reason, a great many generations of Mah y na Buddhists in India, Central Asia, China, Korea, Japan, and South East Asia were disposed to study, revere, and enjoy this Scripture, attaining enlightenment, inspiration, and finding the grace of pleasant humor.

   The Vimalak rti-nirde a is composed of twelve chapters in Sanskrit prose, in which there are two groups of stanzas (g th ) in mixed or hybrid Sanskrit. In the course of time it underwent some alterations and enlargements which concern only secondary points. Nothing concrete is known about the original text of the Vimalak rti-nirde a. Tradition says that it purports to record events that took place during Gautama Buddha's time (sixth to fifth century B.C.), but no text was apparent in India until after N g rjuna had revived the Mah y na traditions, discovering the Mah y na Sanskrit Scriptures, in which there was the Vimalak rti text. This text was subsequently translated into Chinese seven different times. The oldest state of the text is represented by the Chinese translation of Chih Ch'ien(支謙, third century); the intermediate state by the translation of Kum raj va(鳩摩羅什, A.D. 406) being the most popular; and the version of Hsuan Tsang(玄 , A.D. 650) the most technically accurate. It was translated into Tibetan twice, and the definitive version was completed in the ninth century by the eminent translator Chos id Tshul Khrims.

   Unfortuantely all basic Sanskrit texts are now lost, except for some fragments found in Mah y na philosophical works. Of the original Sanskrit there only remain a few brief quotations in the Prasannapad (淨明句論) or Madhyamakav tti(中論疏) of Candrak rti(月稱, 600-650), the ik samuccaya (大乘集菩薩學論) of ntideva(寂天, 650-750), and the Bh van krama of Kamala la(蓮華戒, 745-795).

   The majority of modern translations have been based on Kum raj va's version for their translation. But recently, E. Lamotte set forth to rectify this situation by basing his fine French translation on the Tibetan and the Hsuan Tsang versions. History runs its cycle, as the Rev. E. Bangert first translated the Tibetan into modern Thai and then into current Sanskrit. In addition, Robert A. F. Thurman translated the Tibetan version into the modern English one: The Holy Teaching of Vimalak rti.     

 

   It is not my intention to go into all the philosophical ideas of the Vimalak rti-nirde a. My main goal in this thesis is to present the authentic teaching of Vimalak rti, and so my main focus ought to be philosophical. Consequently, it is indispensable to determine the position of the Vimalak rti-nirde a with regard to the Absolute.

   Early Buddhism is contained in the four noble truths expounded by kyamuni in the sermon of V r as :

   First, all dharmas are impermanent, painful and impersonal: they are not a Self and do not belong to a Self. This does not prevent them from having a self-nature and specific marks.

   Second, these dharmas are conditioned, causes and caused simultaneously. Their arising and extinction, during the course of the painful round of rebirth, are not left to chance, but ruled by the strict laws of the twelve-limbed dependent co-production of prat tyasamutp da. This dependent co-production contitutes the Suchness(tathat ) of dharmas.

   Third, "There is an unborn, unbecome, unmade, unformed": this is Nirv a. It is unconditioned, does not depend on causes and evades the mechanism of the dependent co-production.

   Fourth, the Buddha showed the Way, the Middle Path which leads to Nirv a.

   A new thought was formed by the thinkers and scholars of the Mah y na, who delightedly destroyed the grandiose, but fragile, structure of the Abhidharmas. Since they were not satisfied in denying, as their predecessors had been, the substantiality of the soul, they further proclaimed the inexistence of things of experience, which were caused or relative. They claimed both the inexistence of the individual (pudgalanair tmya) and the inexistence of things (dharmanair tmya); they sought to implant in their followers the "conviction of the non-arising of dharmas" (anutpattikadharmak nti, 無生法忍).

   The Vimalak rti-nirde a ranks among the oldest Mah y nas tras because of its relatively early date and on account of its sources of inspiration as much as the theories it develops. Like the Praj paramit (般若經), the Avata saka(華嚴經), the Ratnak a(寶積經), the Mah sa nip ta(大方等大集經), the Vimalak rti-nirde a represents the Madhyamaka(中論) in the raw state which served as the foundation for N g rjuna's school.

   In short, I'd like to outline here the most important propositions of both the Madhyamaka and the Vimalak rti-nirde a.

   1. All dharmas are without self-nature, that is, empty of self-nature.

   2. All dharmas are unarisen and unextinguished. Empty of self-nature, dharmas are without production and disappearance, for empty things arising from empty things in reality do not arise. Not arising they are not extinguished. Consequently, the dependent co-production of phenomena is a non-production.

   3. All dharmas are originally calm and naturally Nirv a-ised. Being without arising, dharmas are, from the start and by nature, stilled and extinguished. He who says emptiness says Nirv a. According to early Buddhism, that which is Sa s ra is that which is subject to the prat tyasamutp da, and that which is Nirv a is that which eludes this process. But for the Madhyamaka, dharmas, which do not arise at all, are not produced by reason of causes and do not enter the round of rebirth: thus they are Nirv a-ised. For them, Sa s ra is intermixed with Nirv a. Emptiness, Sa s ra and Nirv a are intermixed. The same propositions are formulated by the Vimalak rti-nirde a.

   4. Dharmas are without marks (alak a a) and, in consequence, inexpressible and unthinkable.

   5. All dharmas are the same (sama) and without duality (advaya). Empty and inexistent, all dharmas are the same. It is in this sense that there is non-duality (advaya). However, this non-duality consisting of a common inexistence does not imply any kind of monism whatsoever.

   The whole of Chapter Ⅷ (Chinese version, Chapter Ⅸ) of the Vimalak rti-nirde a is devoted to non-duality. Thirty-two Bodhisattvas intervene in it in turn to bridge the gap separating the purely apparent antinomies, and proclaim advaya.

   6. Emptiness is not an entity. The Praj p ramit  and the Madhyamaka reject all forms of monism, whether overt or disguised. They assert that dharmas are inexistent, but refuse to hypostatize inexistence. The Vimalak rti-nirde a also refuses to hypostatize emptiness and allows no other basis for experience than ignorance.

   In Chapter Ⅲ, §34, of the Vimalak rti-nirde a, it expounds an originally and naturally pure mind which has never been defiled and which is not separated from Tathat . In fact, the Vimalak rti-nirde a lies between the H nay nist Sects which talk of the Luminous Mind and the relatively recent Mah y nas tras, which liken this Luminous Mind to the Tath gatagarbha, the Buddha Nature present in all beings.

   However, in the thought of the Vimalak rti-nirde a, this Tathat , from which the pure mind is not separated, is a plain non-existence (abh vam tra, 非存在). As a matter of fact, we have seen that, after the model of the Praj p ramit s and the Madhyamaka, the Vimalak rti-nirde a refuses to hypostatize emptiness and does not allow of any basis to experience: "All dharmas", it says, "rest on a baseless root."

   Therefore, for the Praj p ramit  and the Madhyamaka, the luminous thought or mind is the inexistence of thought. And for the Vimalak rti-nirde a which denies any basis to the phenomenal world, the Luminous Mind, to which it refers in Chapter Ⅲ, §34, returns to the absence of all thought: "The mind", it says, "is immaterial, invisible, without support and without intellect."

   N g rjuna expounds the theme in his Vigrahavy vartan (廻諍論): "I salute the incomparable, perfect Buddha, who made the declaration of the equivalence in meaning of voidness, relativity, and the Middle Way." Here we may find, instead of "matter," the term "relativity"(prat tyasamutp da), which is another key term of the Middle Way philosophy. It means that all finite things are interdependent, relative, and mutually conditioned, and implies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any independent, self-sufficient, permanent thing or entity. An entity exists only in relation to other entities. It must be made up of parts, which come together when it is produced and which become separate at the time of its dissolution.

 

   "Matter is not void because of voidness, for voidness is not elsewhere from matter. Thus matter itself is voidness and voidness itself is matter." This statement, common in Mah y na Scriptures, expresses the quintessence of the Middle Way. It is also fundamental to the message of Vimalak rti.

   In reality, a lot of scholars, ancient as well as modern, have mistaken the Middle Way taught by Vimalak rti, N g rjuna, and the Mah y na Buddha as leading to the annihilation of all values, mundane and spiritual. Viewed in this light, the main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avert this disastrous mistake. The most important key lies in the concept of "voidness." This word is carefully chosen, and does not imply "nothingness." Therefore, the equation of "matter" with "voidness" tells us something about the condition of matter, and at the same time it does not mean that matter does not exist at all. And the equation of "voidness" with "matter" stresses the fact that this teaching is, far from being nihilistic, the very cure for nihilism.  

 

   We may call the truth of the middle way the middle path, that is, the path between two extremes. There are several elucidations of the middle path: The first is the true method of training or meditation which avoids the two extremes of suffering and happiness. This is a sort of practical madhyama-pratipad(中道) which is composed of the noble eightfold path. The second is the principle of non-emptiness and non-existence which avoids the two extreme views of emptiness and existence. The third is the middle path which is taught in the Vij nav da School(唯識學派). This is the true wisdom which avoids the two extremes of existence and emptiness. The fourth is the middle path of the eightfold negation. This doctrine of middle path is taught in the Sanron Sect(三論宗). The fifth is the doctrine of the truth based upon emptiness and temporality, a teaching of the Tendai Sect(天台宗). The middle truth of the three truths and the middle meditation of the three meditations represent this kind of middle path.

   The Buddha showed us the Middle Path (madhyama-pratipad) which leads to Nirv a. It is easy to place Tathat  (here, dependent co-production) in the four noble truths. Suffering (the dharmas of Sa s ra) should be known; its origin (the process of dependent co-production) should be extinguished; its extinction (Nirv a) should be achieved; the Path of Nirv a should be practised.

   Thus the teachers of the Middle Path use "voidness" to remind us that all such false notions are delusive. In other words, they use it to free us from our own conceptualizations. "Matter is voidness" does not negate matter as a relative phenomenon, but it negates any false notion of matter as an ultimate thing, as having any independent, substantial being, as having any ultimately true status. In reality, were matter to have any sort of independent, ultimate status, it would become obstructed in its functional roles of independency since an independent "thing" cannot be dependent. Therefore, all negative statements in the teachings of the Middle Path do not negate relative things per se, but only their ultimate existence.

 

   When we are to expound the Seon Thought  of the Vimalak rti-nirde a, we ought to keep it in mind that 'The doctrine of the entry into non-duality'(入不二法門品) is very essential for us because it includes the well-known 'philosophical silence'. If we gave careful consideration to 'The doctrine of the entry into non-duality', we would perceive that the logical basis for non-duality is voidness. Consequently, since all things exist on the basis of 'Doctrine of production by causation'(緣起論), voidness is able to be explained from the viewpoint of 'the middle path of non-existence and non-emptiness'(非有非空中道).

   Then, which is better of the two, that is, the Bodhisattvas' explanations or the silence of Vimalak rti ? We human beings are always accustomed to discriminating all things. Now that we have already studied the teaching of the entrance into the principle of nonduality, it is high time that we should free ourselves from such dualism. Therefore, I believe that if each explanation of 32 Bodhisattvas could be considered as the Buddha's teaching, the silence of Vimalak rti might be considered as Seon(Dhy na). Even though each explanation of 32 Bodhisattvas was expounded on the basis of the Seon Thought, it may be considered as the Buddha's teaching because 32 Bodhisattvas gave utterances to their opinions. By the way, if we would disregard the explanations of 32 Bodhisattvas and admire only the silence of Vimalak rti, it might not be impartial because the explanations of 32 Bodhisattvas must be the truth on the teaching of the entrance into the principle of nonduality.

   And yet, it seems that it might not be in a theoretical aspect but in a practical one that Maju r  applauded the silence of Vimalak rti. Although we would like to assent to such a practical valuation, we should not underestimate the value of the explanations of 32 Bodhisattvas because they construct the philosophical foundation on the silence of Vimalak rti.

   The crown prince Maju r  also explained that the entrance into nonduality should be an unspoken world. On the other hand, the Licchavi Vimalak rti kept his silence, saying nothing at all. He really revealed the truth of the entrance into the nonduality of the Bodhisattvas. For this reason, we may conclude that while Maju r  expounded the Buddha's teaching, Vimalak rti revealed Seon(Dhy na). Nevertheless, it is true that between Maju r  and Vimalak rti there is no difference because Dhy na and the teaching of the Buddha accord with reason. In short, I believe that not making any discrimination between them may be the truth of the entrance into the principle of nonduality.

   When we inquire into another title of the Vimalak rti-nirde a or "Inconceivable Liberation", Vimalak rti lays great emphasis on the theme of inconceivability, in other words, the ultimate incomprehensibility of all things. He spells out the furthest implication of the application of voidness. This accords with the degree of attainment of the Bodhisattva called "the tolerance of the ultimate birthlessness of all things"(無生法忍).

   It is very significant that the term "tolerance"(k nti,忍) is used here, rather than "conviction", "understanding", or "realization" ; it emphasizes the fact that where the ultimate is concerned, the mind is unable to grasp anything in the pattern of dualistic knowledge, for there is no finite object in this case and only relative objects can be grasped with relative certainty in the mundane sense. Therefore, inconceivability as a verbal concept is only a principle to be applied to the mind, just like the verbal concept of voidness, or of infinity.

   Vimalak rti makes it clear that the sole function of wisdom, gnosis, or any state of liberation is its function as a necessary complement to the indispensable great compassion that has no object and is not a sentimentally conceived emotion. Wisdom as a solitary possession, not integrated with liberative technique, is plainly declared to be bondage; even meditation, trance, concentration, and the like, are declared to be vain if they do not aid in reconciliation of the basic dichotomy of world versus liberation, Sa s ra versus Nirv a. Accordingly, it is extremely important to practise an effective method of simultaneously developing wisdom and great compassion.

   In conclusion, 'vimala' implies the meaning of 'spotless or pure', 'k rti' has that of 'admire', and 'nirde a' stands for that of 'preach.' Accordingly, I am sure that 'Vimalk rti-nirde a' implies the meaning of 'the s tra which admires and preaches the Pure Mind.' In connection with the meaning, this thesis has consistently traced "the Pure Mind' to its source. Thus, it has become clear that it is very pertinent for me to have studied "the Seon Thought of the Vimalak rti-nirde a" which admires and preaches "the Pure Mind."

   Then, what is "the Pure Mind"? As stated above, for the Vimalak rti-nirde a which denies any basis to the phenomenal world, the Luminous Mind, to which it refers in Chapter Ⅲ, §34, stands for the absence of all thought: "The mind", it says, "is immaterial, invisible, without support and without intellect."

   And what is the best way to get at the Luminous Mind, that is, "the pure and simple inexistence of thought"? I believe that if we practised an effective method of developing wisdom and great compassion by the eight-fold noble path and the six kinds of practice, we could surely attain enlightenment and that if we got at "the pure and simple inexistence of thought", we could achieve the Inconceivable Liberation and the Supernatural Powers. And I also believe that wisdom (praj ) and great compassion (mah karu ) are the essence of the Great Vehicle (Mah y na), and of the Middle Way.

   If so, what is the ultimate aim and good of attaining enlightenment, that is, of getting at "the pure and simple inexistence of thought"? Probably the answer is that "The Bodhisattva who wishes to purify his Buddhak etra should, first of all, skillfully adorn (ala kartum) his own mind (svacitta). And why ? Because to the extent that the mind of a Bodhisattva is pure is his Buddhak etra purified."

   What is the Pure Mind ?


1) 橋本方契, 『維摩經の 思想的 硏究』, (京都: 法藏館, 昭和 41年), p.13.

2) Robert A. F. Thurman, The Holy Teaching of Vimalak rti,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 1976) , Preface ix.

3) 橋本芳契, 前揭書, p.43.

4) Robert A. F. Thurman, The Holy Teaching of Vimalak rti,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 1976) , p.1.

5) 橋本芳契, 前揭書, pp.25∼26.

6) 『大唐西域記』 卷第7, (大正藏,51), p.908 中.

7)  橋本芳契, 前揭書, p.27.

8) E. Lamotte·Sara Boin tr., The Teaching of Vimalak rti, (The P li Text  Society, London, 1976), p.LXXXⅦ.

9) E. Lamotte·Sara Boin tr., ibid, pp.XCI∼XCⅧ.

10) E. Lamotte·Sara Boin tr., ibid, pp.C∼CⅣ.

11) 『維摩經』, (서울:東國譯經院, 1988), pp.4∼7.

12) 그 외의 四譯은 (1) 後漢의 嚴佛調 (『維摩經』 二卷), (2) 西晋의 竺法護 (『維摩詰所      說法門經』三卷), (3) 西晋의 竺叔蘭 (『維摩詰經』三卷), (4) 東晋의 祇多密(『維摩      詰經』四卷)의 所譯이며, 現存의 것은 第二, 第五, 그리고 第六譯에 該當된다.

13) 橋本芳契, 前揭書, p.29.

14) 橋本芳契, 『維摩의 再發見』, (昭和30, 大藏出版, 「佛敎神話と 維摩道」參照)

15) 『維摩經』 (서울:東國譯經院, 1988), p.11.

16) 橋本芳契, 『維摩經の 思想的 硏究』, (京都: 法藏館, 昭和 41年), pp.106∼107.

17) 大正藏, 第38卷, pp.327∼420에 걸쳐서 手錄되어 있다.

18) 橋本芳契, 前揭書, p.109.

19) 鎌田茂雄, 『維摩經 講話』(佛典講話叢書④, 月刊ペン社, 昭和57年), pp.26∼27.

20) 鄭承碩 編, 『佛典解說事典』, p.260.

21) 眞諦 譯, 『婆藪般豆法師傳』, (大正藏, 50), p.191 上7.

22) 橋本芳契, 前揭書, p.116.

23) 上田義文 著·朴太源 譯, 『大乘佛敎의 思想』, (民族社, 1992), pp.214∼216.

24)『小品般若』卷10, (大正藏,8, p.584·c) : "衆緣合則有 衆緣滅則無.…譬如  音聲        無所從來去無所至."

25)『大品般若』卷7, (大正藏,8, p.269·b):“諸法和合生 無自性."

26) 上揭書, 卷 2, (大正藏,8, p.230·c): " 是名字…和合故有. 是名不生不滅."

27) 高翊晋, 『韓國의 佛敎思想』, (東國大學校 出版部), pp.116∼117.

28) 『放光般若經』(大正藏,8), p.13 中24∼下7.

29)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p. LⅩⅩⅧ ∼LⅩⅩⅨ.

30)『大智度論』, 卷 第41, (大正藏,25, p.363 上20∼中6) : 復次菩薩得如是大智心亦不高    心. 相常淸淨故. 如虛空相常淸淨.………心亦如是常自淸淨. 無明等諸煩惱客來覆蔽故    以爲不淨.………舍利弗復問. 何等是無心相. 須菩提答曰. 畢竟空一切諸法無分別. 是    名無心相.

31)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p.LⅩⅩⅩ∼LⅩⅩ.

32) 拙稿,「金剛般若波羅蜜經의 卽非의 論理」, (『大學院硏究論集』, 第28輯, 東國大學校      大學院, 1998), pp.140∼143.

33)『金剛般若波羅蜜經』第17分, (大正藏,8, p.751上):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 善男子善      女人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云何應住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提 善男子善女人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則非菩薩.

34) 『金剛般若波羅蜜經』, (大正藏,8, p.752上):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35) 『金剛般若波羅蜜經』, (大正藏,8, p.749 下16∼23):如來昔在然燈佛所 於法有所得         不世尊 如來在然燈佛所 於法實無所得····是故須菩提 諸菩薩摩訶薩應如是生淸       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36) 金仁德, 『天台思想과 東洋文化』(大蓮 李永子博士 華甲紀念論叢, 1997), pp.451-463.

37)『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藏,8, p.749上): 佛告 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38)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LⅩⅩⅩ.

39)『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41, 中15-22): 我卽爲其如法解說 時維摩詰來謂我        言 唯優波離 無重增此二比丘罪 當直除滅勿擾其心 所以者何 彼罪性不在內不在外      不在中間 如佛所說 心垢故衆生垢 心淨故衆生淨 心亦不在內不在外不在中間 如其      心然 罪垢亦然 諸法亦然 不出於如如 優波離 以心相得解脫時 寧有垢不 我言 不也     維摩詰言.

40)『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41, 中22-29): 一切衆生心相無垢亦復如是 唯優波        離 妄想是垢無妄想是淨 顚倒是垢 無顚倒是淨 取我是垢 不取我是淨 優波離 一切      法生滅不住 如幻如電諸法不相待 乃至一念不住 諸法皆妄見 如夢如炎如水中月如       鏡中像以妄想生 其知此者是名奉律 其知此者是名善解.

41)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 LⅩⅩⅧ.

42) E. Lamotte·Sara Boin tr., ibid, pp.LXXXⅣ∼LXXXⅦ.

43) 高翊晋, 『韓國의 佛敎思想』, (東國大學校出版部, 1991), pp.142∼143.

44) 圓測 撰,『解深密經疏』卷3, (韓國佛敎全書, 東國大學校出版部,1, p.224·b);『成唯識     論』第二卷(大正藏,31, p.10·a) : 阿賴耶識因緣力故 自體生時 內變爲種及有根     身 外變爲器 卽以所變爲自所緣 行相杖之而得起故.

45) 護法 等造, 『成唯識論』卷7, (大正藏,31, p.37·a) :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三十頌      頌 15)…意識常現起…(頌 16). 論曰 根本識者阿陀那識 染淨諸識生根本故. 依止者謂      前六轉識.

46)『成唯識論』卷2, (大正藏,31), pp.7·c∼8·c.

47)『韓國佛敎全書』,1, pp.217·b∼222.b.(以後 韓佛全으로 略稱)

48)『解深密經』卷2, (大正藏,16), p.693·a.

49)『攝大乘論』卷中, (大正藏,31, p.139·b) : 又依他起自性名所遍計.

50)『攝大乘論』卷中, (大正藏,31, pp.137·c∼138·a) : 何者依他起相 謂阿賴耶識爲種        子 虛妄分別所攝諸識.

51)『成唯識論』卷8, (大正藏,31, p.46·b): 衆緣所生心心所體及相見分有漏無漏皆依他起.

52) 護法 等造,『成唯識論』 卷第7, 「唯識三十頌」 頌17, (大正藏,31, p.38·c) :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53)『攝大乘論』卷中, (大正藏,31), p.138·a.

54)『解深密經』卷2, (大正藏,16), p.693·a.

55) 上揭經, (大正藏,16), p.693·c.

56) 上揭經, (大正藏,16, p.699·a): 三智는 ① 言說不熏習智 ② 言說不隨覺智 ③ 言說離      熏習智를 가리킴.

57) 上揭經 無自性相品 第5, (大正藏,16), p.694·a.

58) 同經, (大正藏,16), p.694·b.

59)『仁王經疏』卷上末, (韓佛全,1), p.47·b.

60) 高翊晋, 前揭書, pp. 148∼159.

61)『般若心經撰』, (韓佛全,1, p.3·a) : 淸辨菩薩 執空撥有 令除有執. 護法菩薩立有撥       空 令除空執. 然則空不違有卽空之理 非無不違空卽色之說自成·亦空亦有 順成二諦.       非空非有 契會中道. 佛法大宗 豈不斯矣.";『解深密經疏』卷1, (韓佛全,1, p.123·b):       亦同說.

62) 上揭書,1, p.3·a∼b.

63) 高翊晋,「三國時代 大乘敎學에 대한 硏究」, (pp.127∼130) ;  西明唯識의 基本立場,     (東國思想 10·11 合輯,1978).

64)『成唯識論』卷7, (大正藏,31), p.39·b.

65) 吉藏 撰,『二諦義』卷中, (大正藏,45), p.95·c.

66) 橋本芳契 著, 『維摩經の 思想的 硏究』, (法藏館, 昭和41年), p.167.

67) 橋本芳契, 前揭書, p.191.

68) 『大方等如來藏經』, (大正藏,16), pp.457上∼460中.

69) 『大方等如來藏經』, (大正藏,16, p.457中∼下): 善男子. 如佛所化無數蓮花忽然萎變.       無量化佛在蓮花內. 相好莊嚴結跏趺坐………善男子. 一切衆生. 雖在諸趣煩惱身中. 有      如來藏常無染汚. 德相備足如我無異……….

70) Sa yutta-nik ya, Ⅲ, p.151.

71) A guttara-nik ya, I, p.10.

72) 平川彰·梶山雄一·高崎直道 編, 宗浩 譯, 前揭書, pp.31∼34.

73) 『大集經』, 「陀羅尼自在王品」, (大正藏, 13), p.11 下.

74) 上田義文·朴太源 譯, 『大乘佛敎思想』,(民族社, 1992), pp. 207∼213.

75) 金東華, 『大乘佛敎思想』, (寶蓮閣, 1992), pp.24∼25.

76) 金東華, 上揭書, p.122.

77) 鎌田茂雄 著·鄭舜日 譯, 『中國佛敎史』, (經書院, 1989), pp.228∼232.

78) 橋本芳契, 前揭書, pp.77∼78.

79) 木村淸孝 著·朴太源 譯, 『中國佛敎思想史』, (經書院, 1988), p.157.

80) 安井廣濟 著·金成煥 譯, 前揭書, p.226.

81)  安井廣濟 著·金成煥 譯, 前揭書, pp.226∼227.

82) 『中論』卷第4, (大正藏, 30, p.33中11∼12) :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       中道義.

83) 安井廣濟 著·金成煥 譯, 前揭書, pp.237∼242.

84) 安井廣濟 著·金成煥 譯, 前揭書, pp.247.

85) 『摩訶般若波羅蜜經』, 散花品第29, (大正藏,8, p.277,中8∼11) : 釋提桓因白佛言. 世尊大      德須菩提云何不壞假名而說諸法相. 佛告釋提桓因. 色但假名. 須菩提不壞假名而說諸法相.

86) 『摩訶般若波羅蜜經』, 卷第22, 道樹品 第71, (大正藏, 8, p.378, 下 11∼13) : 須菩提.       世諦第一義諦無異也.何以故.世諦如.卽是第一義諦如.

87) 『中論』 第25章 觀涅槃品, 第19偈, (大正藏, 30, p.36, 上4∼5) : 涅槃與世間 無有少分別       世間與涅槃 亦無少分別

88)  安井廣濟 著·金成煥 譯, 前揭書, p.252.

89) 『摩訶般若波羅蜜經』, 無作品 第43, (大正藏, 8), p.309, 下18∼19.

90) Pacavi atis hasrik , p.38.

91) 『小品般若波羅蜜經』, 卷第7, 深功德品 第 17, (大正藏, 8, p.566, 下24∼25) : 須菩提.      一切法皆不可說.須菩提.一切法空相不可得說.

92) 『麻訶般若波羅蜜經』, 卷第24, 四攝品 第78, (大正藏, 8, p.397, 中16∼19) : 佛告須菩        提.世諦故分別說有果報.非第一義.第一義中不可說因緣果報.何以故.是第一義.實無       有相無有分別亦無言說.

93) 『金剛般若波羅蜜經』, (大正藏, 8, p.752,上17∼18):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94)『中論』卷第3, (大正藏,30, p.24,上): 自智不隨他 寂滅無 論 無異無分別 是則名實相

95)『中論』卷第4, (大正藏,30, p.36,中): 諸法不可得 滅一切 論 無人亦無處 佛亦無所說

96) 『金剛般若波羅蜜經』, 正信稀有分 第6, (大正藏,8, p.749, 中6∼11):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則爲著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卽著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卽著我      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      喩者. 法尙應捨何況非法.

97) 『中論』卷第4, (大正藏,30, p.33,上2∼3):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       涅槃

98)『中論』卷第4, (大正藏,30, p.32 下16∼17): 諸佛依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      一義諦

99) 『摩訶般若波羅蜜經』, 道樹品 第71, (大正藏, 8, p.378, 下9∼13): 佛言.菩薩摩訶薩以世       諦故.示衆生若有若無.非以第一義.世尊.世諦第一義諦有異耶.須菩提.世諦第一義諦       無異也.何以故.世諦如.卽是第一義諦如.

100) 安井廣濟 著·金成煥 譯, 前偈書, p.83.

101) 『中阿含經』 卷第60(221), 『箭喩經』 (大正藏, 1), pp.804 上∼805下.

102) 李仲杓, 『阿含의 中道體系』 (佛光出版社, 1992), pp.73∼75.

103) 春日禮智, 「中道の 根本思想」, 『印度學佛敎學硏究』 第14卷1 , p.301.

104) 『增壹阿含經』 卷第13, (大正藏,2, p.612 b 18∼21): 世尊告曰. 此亦如是. 極精進者猶     如調戱. 若懈怠者此墮邪見. 若能在中者此則上行. 如是不久當成無漏人.

105) 『中阿含經』 卷第四十三, 『拘樓瘦無諍經』 (大正藏,1, p. 701 b 28∼c 15): 佛言.莫求   欲樂極下賤業爲凡夫行.亦莫求自身苦行至苦 非聖行無義相應.離此二邊則有中道.成眼    成智自在成定.趣智趣覺趣於涅槃.···有聖道八支.正見乃至正定.

106) 『雜阿含經』 卷第12, (大正藏,2, pp.80 b 24∼81 a 4): 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   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我憶宿明未成正覺時.獨一靜處.專精禪思.作是念.何法   有故老死有.何法緣故老死有.卽正思惟.生如實無間等.生有故老死有.生緣故老死有.   如是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有故名色有.何法緣故名色有.卽正思惟.如實無間等生.識   有故名色有.識緣故有名色有我作是思惟時.齊識而還.不能過彼.謂緣識名色.緣名色六   入處.緣六入處觸.緣觸受.緣受愛.緣愛取.緣取有.緣有生.緣生老病死憂悲惱苦.如   是如是.純大苦聚集.我時作是念.何法無故則老死無.何法滅故老死滅.卽正思惟.生如   實無間等.生無故老死無.生滅故老死滅.如是生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識行廣說.我復作   是思惟.何法無故行無.何法滅故行滅.卽正思惟.如實無間等.無明無故行無.無明滅故   行滅.行滅故識滅.識滅故名色滅.名色滅故六入處滅.六入處滅故觸滅.觸滅故受滅.受   滅故愛滅.愛滅故取滅.取滅故有滅.有滅故生滅.生滅故老死憂悲惱苦滅.如是如是.純   大苦聚滅.我時作是念.我得古仙人道.古仙人逕.古仙人道跡.古仙人從此跡去.我今隨   去.····謂八聖道.····我從彼道.見老病死.老病死集.老病死滅.老病死滅道   跡.····行行集行滅行滅道跡.我於此法.自知自覺.成等正覺.

 

107) 李仲杓, 前揭書, pp.62∼64; pp.89∼91.

108) 『增壹阿含經』卷第7, 有無品 第15 (大正藏,2, p.577 a 16∼20): 爾時世尊告諸比丘. 當     知有此二見. 云何爲二. 所謂有見無見. 諸有沙門婆羅門. 於此二見習已誦已終不從其法.       如實而不知此則非沙門婆羅門. 於沙門則犯沙門法. 於婆羅門則犯婆羅門法.····

109) 『雜阿含經』 卷第10, (262)『闡陀經』(大正藏,2, pp.66 c 26∼67 a 8): 世人顚倒依於二     邊. 若有若無. 世人取諸境界. 心便計著. 迦 延. 若不受不取不住不計於我. 此苦生時        生. 滅時滅. 迦 延. 於此不疑不惑. 不由於他. 而能自知. 是名正見. 如來所說. 所以者       何. 迦 延. 如實正觀. 世間集者. 則不生世間無見如實正觀. 世間滅則不生世間有見. 迦      延. 如來離於二邊. 說於中道. 所謂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謂緣無明有行. 乃至生老病死     憂悲惱苦集. 所謂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謂無明滅則行滅. 乃至生老病死憂悲惱苦滅.

110) 『中阿含經』 卷第42(162) 『分別六界經』, (大正藏,1, pp.691 c 4∼692 a 15): 若比丘    不染此三覺而解脫者. 彼比丘唯存於捨極淸淨也.···眞諦者謂如法也. 妄言者謂虛妄法.     比丘. 成就彼第一眞諦處.

111) 李仲杓, 前揭書, p.70; pp.91∼93.

112) 『中論』 第15章 第7偈(大正藏,30, p.20): 佛能滅有無 如化迦 延 經中之所說

     離有亦離無.

113) Sa yutta-nik ya, Ⅱ, p.17; Ⅲ, p.211.

114) 舟 一哉, 『原始佛敎思想の 硏究』, p.8.

115) D gha-nik ya,Ⅰ, p.189.

116) 『中論』 第25章, 第24偈.

117) 『中論』 第18章, 第9偈.

118) F. L. Woodward, The Minor Anthologies of the P li Canon, Part Ⅱ, Ud na :

     Verses of Uplift, The P li Text Society, London, 1985, p.97. [‘Monks, there exists that condition wherein is neither earth nor water nor fire nor air: wherein is neither the sphere of infinite space nor of infinite consciousness nor of nothingness nor of neither-consciousness-nor-unconsciousness; where there is neither this world nor a world beyond nor both together nor moon-and-sun. Thence, monks, I declare is no coming to birth; thither is no going (from life); therein is no duration; thence is no falling; there is no arising. It is not something fixed, it moves not on, it is not based on anything. That indeed is the end of Ill.’]

119) Sa yutta-nik ya, Ⅱ, p.17 ; Ⅳ, p.400.

120) 安井廣濟 著. 金成煥 譯, 前揭書, pp.34∼43.

121) The Vigrahavy vartan  of N g rjuna, Johnston & Kunst ed., M langes chinois     et bouddhiques, vol. 9, (以下. VN.으로 略稱함).

122) VN. P. 121, し.15∼16.

123) VN. P. 122, し. 3∼8.

124) VN. P. 151, し. 14∼15.

125) 『中論』, 第24章 第18偈 (大正藏,30, p.33 中 11∼12) :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    是假名 亦是中道義.

126) VN. P. 141, し. 12∼13.

127) VN. P. 142, し. 3∼6.

128) 原田覺, 「空( nya)に ついて」(『印度學佛敎學硏究』 第23卷 2 ), pp.748∼749.

129) Robert A. F. Thurman, 前揭書, Introduction, p.1.

130) Robert A. F. Thurman, 前揭書, Introduction, p.4.

131)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Introduction, p.LⅩⅨ.

132)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Introduction, p.LⅩ.

133)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119, 脚註 10번 參照.

134) 『維摩詰所說經』上卷 方便品 第二(大正藏 卷14, p.539 中); E. Lamotte·Sara Boin       tr., The Teaching of Vimalak rti , The P li Text Society, London, 1976, pp.32∼       34: 長者維摩詰. 以如是等無量方便 饒益衆生. 其以方便現身有疾. 以其疾故.        國王大臣長者居士婆羅門等.  及諸王子 餘官屬. 無數千人 皆往問疾. 其往者.       維摩詰因以身疾 廣爲說法. 諸仁者. 是身無常無强 無力無堅 速朽之法 不可信也.       爲苦爲惱 衆病所集. 諸仁者. 如此身 明智者所不 .

135) 『維摩詰所說經』上卷 方便品 第二(大正藏,14, p.539 中15∼下13);  E. Lamotte·Sara Boin tr., The Teaching of Vimalak rti, (The P li Text Society, London, 1976, pp.35∼41): [是身如聚沫 不可撮摩. 是身如泡 不得久立.是身如炎 從渴愛生.是身如芭蕉 中無有堅. 是身如幻 從顚倒起. 是身如夢 爲虛妄見.是身如影 從業緣現. 是身如響 屬諸因緣. 是身如浮雲 須臾變滅. 是身如電念念不住.〕〔是身無主爲如地. 是身無我 爲如火. 是身無壽 爲如風.是身無人 爲如水.是身不實 四大爲家.是身爲空 離我我所.是身無知 如草木瓦礫.是身無作 風力所轉.是身不淨 穢惡充滿.是身爲虛僞.雖假以 浴衣食 必歸磨滅.是身爲災 百一病惱.是身如丘井 爲老所逼.是身無定 爲要當死.是身如毒蛇 如怨賊 如空聚.陰界諸入 所共合成.〕〔諸仁者.此可患厭 當樂佛身.所以者何.佛身者 卽法身也.從無量功德 智慧生.從戒定慧 解脫 解脫知見生.從慈悲喜捨生.從布施 持戒 忍辱柔和 勤行精進 禪定解脫三昧 多聞智慧 諸波羅蜜生. 從方便生.從六通生.從三明生.從三十七道品生.從止觀生.從十力四無所畏 十八不共法生.從斷一切不善法 集一切善法生.從眞實生.從不放逸生.從如是無量淸淨法 生如來身.諸仁者.欲得佛身斷一切衆生病者.當發阿 多羅三 三菩提心.如是 長者 維摩詰.爲諸問疾者 如應說法.令無數千人 皆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136)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LXIII.

137) 『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51 下16∼24): 如是諸菩薩各各說已 問文殊師利 何    等是菩薩入不二法門 文殊師利曰 如我意者 於一切法無言無說 無示無識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於是文殊師利 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        不二法門 時維摩詰默然無言 文殊師利歎曰善哉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         不二法門.  

138) 橋本芳契, 『維摩詰の 思想的硏究』 (京都:法藏觀, 昭和41), p.52.

139) 『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52 上7∼12): 時維摩詰卽入三昧 以神通力示諸大衆 上方    界分過四十二恒河沙佛土 有國名衆香 佛號香積 今現在 其國香氣比於十方諸佛世界人天之    香最爲第一 彼土無有聲聞 支佛名 唯有淸淨大菩薩衆 佛爲說法.

140) 李英茂 譯解, 前揭書, p.389.

141) 大珠慧海·性徹 譯解, 『頓悟入道要門論 講說』, (藏經閣, 佛紀2537, pp.194∼196):[問: 云何是中道.答: 無中間亦無二邊 卽中道也.問: 云何是二邊.答: 爲有彼心 有此心 卽是二邊.問: 云何名彼心此心.答: 外縛色聲名爲彼心 內起妄念名爲此心.若於外不染色卽名無彼心 內不生妄念卽名無此心.此非二邊也.心旣無二邊 中亦何有哉.得如是者.卽名中道 眞如來道.如來道者 卽一切覺人解脫也. 經云 虛空無中邊 諸佛身亦然.然一切色空者卽一切處無心也.一切處無心者 卽一切色性空.二義無別亦名色空亦名色無法也.汝若離一切處無心得菩提解脫涅槃寂滅禪定見性者 非也.一切處無心者卽修菩提解脫涅槃寂滅禪定乃至六道 皆見性處.何以故.金剛經云 無有少法可得是名阿 多羅三 三菩提也.]

142) M lam dhyamakak rik s(M dhyamika S tras) de N g rjuna ; avec la

    Prasannapad  Commentaire de Candrak rti. Publie par Louis de la Vallee

    Poussin. p.7.

143) 稻田ケネス, 「緣起の一考察」, 『印度學佛敎學硏究』 第6卷 2 , p.466.

144) Sa yutta-nik ya, Ⅱ, p.25.

145) 宇井伯壽, 『印度哲學硏究』 第2, p.224, p.335.

146) 『梵文月稱中論註』, p.368.

147) 山口益, 『中論釋』Ⅰ, p.8.

148) Sa yutta-nik ya,Ⅱ, p.65,70 ; Majjhima-nik ya,Ⅰ, p.264,265 ; Majjhima-nik ya,      Ⅱ, p.32 ; Majjhima-nik ya,Ⅲ, p.63: imasmi  sati ida  hoti, imass' upp d  ida       uppajjati ; imasmi  asati ida  na hoti, imassa nirodh  ida  nirujjhati)

149) 『梵文月稱中論註』, p.87.

150) 『中論』 第24章 第21偈: '存在가 緣起하지 않을 때, 어떻게 苦가 있을 것인가? 無常      이 苦라고 하는 것은 自性을 가진 것에서는 있을 수 없다.' ; 『中論』 第22章 第3偈:      '他인 存在에 緣하는 存在는 無我이다'. ; 『廻諍論』 第72偈, 『中論』 第24章 第18偈:       '空性과 緣起와 中道를 同一한 意味라고 宣說하신 最上無等의 부처님께 나는 敬拜      한다.'

151) 安井廣濟 著·金成煥 譯, 『中觀思想硏究』 (弘法院, 1989), pp.21∼27.

152) Majjhima-nik ya,Ⅰ, p.259.

153) Sa yutta-nik ya,Ⅲ, p.66.

154) 安井廣濟 著, 金成煥 譯, 前揭書, pp.30∼33.

155) D gha-nik ya,Ⅱ, p.44.

156)『長阿含經』卷第10, 『大緣方便經』 (大正藏, 1), p.60 中 11∼12.

157) 崔鳳守, 『初期佛敎의 緣起思想 硏究』 (東國大大學院 博士學位論文,1989),pp.113∼114.

158) Sa yutta-nik ya,Ⅱ, p.267.

159) Sa yutta-nik ya,Ⅲ, p.142

160) Sa yutta-nik ya,Ⅲ, p.143

161) 全在星, 『初期佛敎의 緣起性 硏究』, (東國大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5), pp.71∼72..

162) Sa yutta-nik ya,Ⅱ, pp.89∼90. ; 『雜阿含』, 2卷, 5經. ; 『增一阿含』, 38卷, 4經.

163) 『增一阿含經』卷第四十六(大正藏,2, p.798 上 18∼24): 我初成佛道思惟十二因緣降伏魔    官屬 以除無明而得慧明 諸闇永除無塵垢 又我阿難 三轉十二說此緣本時卽成覺道 以此方    便知十二緣法極爲甚深 非常人所能宣暢 如是阿難 當念甚深奉持此十二因緣之法 當念作是    學 爾時阿難聞佛所說 歡喜奉行.

164)『雜阿含經』卷第14 (大正藏, 2), p.98上.

165)『雜阿含經』卷第30 (大正藏, 2, p.216上.

166) Sa yutta-nik ya,Ⅱ, p.26 〔P.T.S.〕

167)『雜阿含經』卷第14 (大正藏, 2), p.98 中9∼17.

168) 崔鳳守, 前揭書, pp.115∼116.

169) Sa yutta-nik ya,Ⅱ, p.26.

170) A guttara-nik ya, I, pp.139∼140.

171) A guttara-nik ya, I, p.266.

172) Mah vagga I, p.6. ; Sa yutta-nik ya,Ⅳ, pp.360∼364.

173) A guttara-nik ya,I, pp.275∼276.

174) 崔鳳守, 前揭書, pp.116∼119.

175) Majjhima-nik ya, I, p.241.

176)『雜阿含經』卷第16 (大正藏, 2), p.111 上.

177) Sa yutta-nik ya,Ⅱ, p.49.

178) 金東華, 『原始佛敎思想』, (宣文出版社, 1983), pp.130∼132, p.160參照.

179) D gha-nik ya,Ⅱ, p.33.

180)『雜阿含經』卷第44 (大正藏, 2), pp.321 下19∼322上3.

181) 崔鳳守, 前揭書, pp.120∼124.

182) D gha-nik ya,Ⅱ, p.29.

183)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LⅩⅠ.

184)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97.

185) 『維摩詰所說經』 (大正藏, 14), p.542 下27∼28.

186) 李英茂 譯解, 『維摩經 講說』 (月印出版社, 1989), pp.196∼197.

187) 稻田ケネス, 「緣起の 一考察」, (『印度學佛敎學硏究』 第6卷 2 ), p.466.

188) 稻田ケネス, 上揭書, 第6卷 2 , p.467.

189) 崔昌述(玄覺),「禪學資料論攷(Ⅰ)」,『申法印스님華甲紀念佛敎思想論叢』(論叢刊行委員會,1991), pp.681∼704 參照.

190) 橋本芳契, 「禪經としての 維摩經』, 『印度學佛敎學硏究』 第4號(1954年 3月)參照.

191) E. Lamotte·Sara Boin tr., The Teaching of Vimalak rti, The P li Text Society,  London, 1976, p.LⅩ.[All dharmas are impermanent, painful and impersonal: they are not a Self and do not belong to a Self. This does not prevent them from having a self-nature and specific marks.]

192) Upp d  v  tath gat na  anupp d  v  tath gat na   hit  va s  dh tu dhamma hitat  dhammaniy mat  idappaccayat : Sa yutta-nik ya, Ⅱ, p.25,18; A guttara-nik ya, Ⅰ, p.286,6.   [These dharmas are conditioned, causes and caused at the same time. Their arising and extinction, during the course of the painful round of rebirth, are not left to chance, but ruled by the strict laws of the twelve-limbed dependent co-production. This dependent co-production constitutes the Suchness of dharmas. This is affirmed in a canonical passage often repeated, with some variations, in P li and Sanskrit texts: Whether or not the Tath gatas appear in the world, that Nature of things, that causal Status, that causal Certainty, the Relation of this with regard to that prevails.]

193) F. L. Woodward, The Minor Anthologies of the P li Canon, Part Ⅱ,  Ud na:   Verses of Uplift, The P li Text Society, London, 1985, p.98. [There is an unborn, unbecome, unmade, unformed: this is Nirv a.  It is unconditioned, does not depend on causes and evades the mechanism of the dependent coproduction.]

194) Vinaya,Ⅰ,p.11; Sa yutta-nik ya,Ⅴ, p.422; Ko a,Ⅵ,p.248; Madh. v tti, p.516, 17-18;Cf. E. Lamotte·Sara Boin tr.,The Teaching of Vimalak rti,The P li Text Society, London, 1976, pp.LⅩ∼L.   [The Buddha showed the Way, the Middle Path which leads to Nirv a.

     It is easy to place Tathat  (here, dependent co-production) in the four noble truths. Suffering (the dharmas of Sa s ra) should be known; its origin (the process of dependent co-production) should be extinguished; its extinction (Nirv a) should be achieved; the Path of Nirv a should be practised.]

195) J. May, Prasannapad , Paris, 1959, pp.22∼45에  The M dhyamaka or M dhya-mika School(中觀派)에 관한 完全한 文獻目錄이 들어있다.Prasannapad 는月稱(Candra-k rti)造 『中論疏』이며, 龍樹이후 400년쯤 지나 南印度의 브라만 출신인 月稱에 의해 『中論』의 偈頌을 梵語로 해석한 註釋書로서 본래의 이름은 'Prasannapad  n ma M lama-dhyamakav tti’즉 '淨明句論이라 이름하는 根本中論註釋書'이다.

196) Pa cavi atis hasrik s hasrik s hasrik 〔Praj p ramit , 二萬五千頌 『般若波羅       蜜多經』〕, ed. N. DUTT (Calcutta Oriental Series, 28, London, 1934), p.146.

197)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LXIII.

198) Ya  prat tyasamutp da

      nyat  t  pracak mahe,

     s  praj aptir up d ya

     pratipat saiva madhyam .

     Cf. Madh. v tti, p.503, 10 ; Madh. avat ra, p.228, 17.

199) nyataiva sarvaprapa caniv ttilak a atv n nirv am ity ucyate :

     Madh. v tti, p. 351, 11.

200) Dharma  sam sato 'hi s  var ayanti tath gat , nyat m eva

     nirv a  keval  tad ihobhayam. Cf. Madh. v tti, p.351, 13.

201) Na sa s rasya nirv t ki cid asti vi e a am,

     na nirv asya sa s r t ki cid asti vi e a am.

     Cf. Madh. v tti, p.535, 2.

202) Pa cavi atis hasrik , p.164,8 ; 225, 23 ; 244, 7 ; 258, 16 ; 261, 19 ; 262, 24.

203) Madh. v tti, p.264, 2 sq.

204) Pa cavi atis hasrik , p.164, 9.

205) Madh. v tti, p.351, 4 sq.

206) Madh. v tti, p.374, 15에 引用된 Satyadvay vat ras tra는 細部的인 敍述을 하는 가운데 다섯 가지의 無間罪過와 62異見과 凡夫·有學·無學·正等覺者의 德性과 涅槃과 輪廻, 雜染과 淸淨등의 一切의 法을 絶對的으로 同等視한다.

207) Na nyatay  r pa   nya , n nyatra r p c ch nyat , r pam eva nyat  

      nyataiva r pam···tath  hi n mam tram ida  yad ida  r pam :

     Cf. Pa cavi atis hasrik , p.38, 2∼8 ; atas hasrik , p.118, 18 ; 812, 3∼5; 930,       11∼16 ;T220, ch.402, p.11 c1 ; T221, ch.1, p.4c 18 ; T222, ch.1, p.152 a 16 ; T2       23, ch.1, p.221 b 25∼221 c 10 ; T1509, ch.35, p.318 a 8∼22.

208) Madh. v tti, p.265, 1∼8.

209) L. de La Vall e Poussin, Madhyamaka, MCB, 11, 1932∼33, P.31∼32.

210) nyat  sarvad n  prokt  ni sara a  jinai ,

     ye  tu nyat d is  t n as dhy n babh ire.

     Cf. Madh. v tti, p.247, 1∼2 ; Madh. avat ra, p.119, 6∼9.···Madh. v tti,

     p.248, 4∼249, 2에 引用된 Ratnak a와 比較해 볼 것 ;  La k vat ra,

     p. 146, 11∼13 ; Ratnagotra, p.28, 11∼12 ; K yapaparivarta, p.95.

211) 이러한 主張을 하는 사람들은 the S rv stiv din-Vaibh ikas들이다.

     Cf. Ko a, I, p.8.

212) 이러한 主張을 하는 사람들은 the Vij nav din-Yog c ras들이다.

     Cf. Siddhi, p.75.

213) Madh. v tti, p.176, 9∼11.

214) 虛無主義者는 그가 보는 現實을 否定하고, 따라서 戒律의 根據를 破壞한다.

     (Cf. Madh. v tti, p.159, 10). M dhyamika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現實에 대해          沈默한다. M dhyamika는 俗諦와 眞諦에 相應시켜서 말한다. 因緣으로 인하여 생       긴 一切의 것(俗諦)은 그 自性으로 말하면 存在하지 않는 것이다(眞諦). 이와 關聯       하여 Madh. v tti, p.153, 159, 188, 222∼224, 231, 273∼274, 368∼369, 490∼491,

     495 ; Madh. avat ra, p.292 ;  N g rjuna, Trait ,  p.1090-1094를 參照하기 바람.

215) 이러한 同義語들의 目錄은 Pa cavi atis hasrik , p.168, 14∼17 ; atas hasrik .,       p.1262, 13-7 ;T220, vol. VI, ch.360, p.853 c 11 ;Madh. v tti, p.264, 11; Upade a,       T1509, ch. 44, p.382 a 등에서 찾아 볼수 있음.

216) E. Lamotte,  L'Enseignement de Vimalak rti (Vimalak rti-nirde a),  1962,

     Louvain, ch,Ⅲ,§6, 16, 52 ; Ⅳ,§1, 8, 12 ; Ⅵ,§2, 4, 6, 16 ; Ⅷ (Advaya에

     관한 것) ; Ⅹ,§16.

217)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 LⅩⅩⅢ .

218)『雜阿含經』卷第6, (大正藏, 2), p.40 上∼中.

219)『雜阿含經』卷第2, (大正藏,2, p.14, 中20∼22) : 世尊. 此五受陰. 以何爲根. 以何集.       以何生. 以何觸. 佛告比丘. 此五受陰. 欲爲根. 欲集欲生欲觸.

220)『雜阿含經』卷第2, (大正藏, 2), p.14 下.

221) 崔昌述(玄覺), 「根本禪定觀一攷」 (『佛敎學報』 第28輯), pp.157∼160.

222) Sa yutta-nik ya, Ⅱ, p.95, 1∼9.

223) Cf. D gha-nik ya, Ⅱ, p.63, 2∼14 ; Ko avy khy , p.669, 1∼8.

224)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 LXXⅧ.

225) E. Conze, The Composition of the Astas hasrik  Praj p ramit , BSOAS, XIV,      1952, p.251∼262 ; The Oldest Praj p ramit , The Middle Way, XXXⅡ, 1958,       p.136∼141 ; The Praj p ramit  Literature, The Hague, 1960, p.9∼17.

226) Pa cavi atis hasrik , p.121, 12∼122, 11 ; T221, ch.2, p.13 b 24∼c 7 ;T222, ch.      3, p.166  b21∼c10 ; T223, ch.3, p.233 c 20 ∼234 a 5 ; T220, vol. Ⅶ, ch.408, pp.      44c 20∼45a 7.

227) A as hasrik 에 있는 Na ca tena mantavyam ten pi bodhicittena na manyeta.       또한 The loka, p.38, 6에서 abhinive a  na kury t를 "그에게 同調하지 않게 한      다"라고 玄 도 同一한 解釋을 하고 있으며, Kum raj va는 "慢心을 일으키게 하지      않는다"라고 理解하고 있다.

228) The loka, p.38, 24∼26에서 다음과 같이 說明한다. 이 心(citta)은 실제로는 非心      (acitta)이다. 왜냐하면 하나 또는 다수의 自性이 없고, 또 스스로 생겨나지 않는        이 心性(cittasya prak ti )은 빛을 發한다. 즉 邪見의 결과에서 생기는 그림자가        없는 것이다.

229) acittam이란 citt bh vam tram 즉 '心의 순수하고 단순한 非存在'를 말한다

     ( loka, p.40, 6). T.1509, 『大智度論』, ch.41, p.363 a 20行 以下의 이 글에 대한 解說을 參照하기 바람. 大智의 마음을 證得한 菩薩은 慢心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게 깨달은 마음은 항상 淸淨하기 때문이다. 虛空( k a)이 항상 淸淨하여 연기나 구름·먼지·안개 그리고 또 그것을 덮고있는 다른 우연한 것들에 의해 汚染되지 않는 것과 같이, 마음은 그 자체로서 영원히 淸淨하며, 無明(avidy )이나 그것을 뒤덮고 있는  다른 우연한 煩惱에 의하여 汚染되지 않는다. 일단 煩惱가 除去되면, 마음은 처음과 똑같이 淸淨하다. Yoga 行者의 능력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마음의 淸淨性은 그의 공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Yoga 行者는 그것에 대해 慢心을 가져서는 안되며, 혹은 그것에 執着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마음'은 絶對的으로 空한 것이기 때문이다.

     舍利弗은 생각이라는 특성이 缺如된 이 마음이 存在하는지 혹은 存在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실제로, 만일 그 마음이 存在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것을 非心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또한 그것이 存在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이 마음을 菩提를 이루게 하는 無比의 것이라고 讚揚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須菩提 尊者는 대답하기를, '생각이 없는 絶對的 純粹性(atyantavi uddhi)에서는 存在(astit )도 非存在(n stit )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舍利弗은 생각이 없다는 것(acittat )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須菩提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순수한 空(atyanta nya)이며, 一切의 法을 생각하지 않는 것(avikalpanat )'이라고 말한다.

230)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93.

     As for the mind, it is immaterial(ar pin), invisible(anidar ana),

     without support(ani raya) and without intellect(avij apti).

231) E. Lamotte·Sara Boin tr., 前揭書, PP. LⅩⅨ∼LⅩ. Proposition F:

    '空은 어떤 實體가 아니다.' 以下를 參照하기 바람.

232) 無住 : ① 대부분의 譯者들은 '머무는 데가 없는 것'으로 解釋함으로써 佛敎의     眞意를 誤解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비하여 한글대장경의 『維摩經』(東國譯經院) p.102를 보면, '無住'에 대한 풀이가 비교적 잘 說明되어 있다. 즉 '依支할 곳이 없는 狀態'를 의미하는 말로서, 玄 은 「無住」·「無所住」, Tibet譯은 「依支하는 곳이 없는 것」의 의미이다. 羅什의 說明에 의하면, 「存在하는 것[法]에는 그 자체의 本性 즉 自性이 없다. 緣으로 해서 생기며, 생기지 않는 한은 그것이 依支하는 곳인지를 알 수 없다. 그 依支하는 것을 모르므로 住하는 곳이 없다. 住하는 곳이 없으므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의 本을 이루고 잇다. 依支할 곳이 없는 것[無住]은 그 根源을 캐 보아도 그 出處가 없으므로 本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本이 없이 事物의 本이 되므로 一切의 存在를 成立시킨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② Sir Monier Monier-Williams, A Sanskrit-English Dictionary, p.58에는 [having no solid ground](확실한 根據가 없는 것)의 의미로 되어 있고, ③『梵和大辭典』(講談社), p.94에는 [aprati ha] (形) 根據なき, 滅ぶべき, 不安定なる; 價値なき ; (漢譯) 不住, 無住; 無所著, 無所染으로 記述되어 있다.

233) 加藤 堂, 『維摩經講話』, (東京: 大東出版社, 昭和19年), pp.6∼7.

234) 鎌田茂雄, 前揭書, p.136.

235) 鎌田茂雄, 『維摩經講話』, (月刊ぺン社, 昭和57年), p.143.

236) 鎌田茂雄, 上揭書, pp.21∼22.

237) 鎌田茂雄, 上揭書, p.197.

238) 加藤 堂, 前揭書, p.6.

239) 加藤 堂, 前揭書, pp.10∼11.

240) 鎌田茂雄, 前揭書, p.33.

241) 鎌田茂雄, 前揭書, p.125; pp.128∼129.

242) 鎌田茂雄, 前揭書, pp.179∼180.

243) E. Lamotte·Sara Boin tr., op. cit., p.190: The Bodhisattva r k a said: Ideations concerning defilement(sa kle a) and purification(vyavad na) are two. If Bodhisattvas understand the identity(advaya) of defilement and purification, they no longer have this ideation. To destroy for ever these ideations(vikalpa) and follow the path of extinction(nirodha), this is penetrating the doctrine of non-duality.; 『維摩詰所說經』卷中, (大正藏,14, p.550 下8∼10): 不 菩薩曰. 受不受爲二. 若法不受則不可得. 以不可得故無取無捨無作無行. 是爲入不二法門.

244)『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46 中24∼29) : 維摩詰言. 唯舍利弗. 諸佛菩薩有解脫       名不可思議.若菩薩住是解脫者.以須彌之高廣內芥子中無所增減.須彌山王本相如故.而四       天王 利諸天.不覺不知己之所入.唯應度者乃見須彌入芥子中.是名住不思議解脫法門.

245) 橋本芳契, 前揭書, p. 40.

246) E. Lamotte·Sara Boin tr., op. cit., pp.134∼152.

247) 金浩星, 前揭書, p.105.

248) 橋本芳契, 前揭書, p. 97.

249) E. Lamotte·Sara Boin tr., The Teaching of Vinialak rti,Ⅴ,§10∼18, pp.141∼148.

250)『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47 上1∼3) : 舍利弗. 我今略說 菩薩不可思議解脫之       力 若廣說者 窮劫不盡.

251) E. Lamotte·Sara Boin tr., 上揭書, p.141 脚註1.

252) Robert A. F. Thurman, 前揭書, p.106, Note 20.

253) Robert A. F. Thurman, 上揭書, p.106, Note 22.

254) Robert A. F. Thurman, 上揭書, p.106, Note 23.

255) Robert A. F. Thurman, 上揭書, p.106, Note 24.

256) Robert A. F. Thurman, 上揭書, p.106, Note 25.

257) Robert A. F. Thurman, 上揭書, p.8.

258) Sir Monier Monier-Williams, 前揭書, p.9.

259)『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53 中26∼29): 佛語舍利弗.汝見菩薩大士自在神力之       所爲乎.唯然已見.於汝意云何.世尊.我覩其爲不可思議.非意所圖.非度所測.

260) 橋本芳契, 前揭書, p.38.

261) 橋本芳契, 前揭書, p.39.

262) 金浩星, 前揭書, pp.110∼111.

263) 鄭性本, 前揭書, pp.420∼421.

264) Robert A. F. Thurman, 前揭書, p.12.

265) Robert A. F. Thurman, 前揭書, p.51.

266) Robert A. F. Thurman, 前揭書, p.81.

267) 鎌田茂雄, 前揭書, p.139.

268) 橋本芳契, 前揭書, pp.55∼76 參照.

269) 宇井伯壽, 『印度哲學史』, p.274.

270) 橋本芳契, 前揭書, p.161.

271) 橋本芳契, 前揭書, p.162.

272) 橋本芳契, 前揭書, pp,162∼163.

273)『維摩詰所說經』(大正藏, 14), p.540. 上14∼19.

274)『維摩詰所說經』(大正藏, 14), p.548. 上10∼15.

275) 宇井伯壽 和譯, 『頓悟要門』 「譯者後記」, (岩波文庫, p.152 參照)

276) 橋本芳契, 前揭書, p.164.

277) 柳田聖山, 「語錄の歷史」, 『東方學報』, (京都, 第57號)

278)『維摩詰所說經』(大正藏, 14), p.546, 上25∼26.  

279) 鄭性本, 『中國禪宗의 成立史 硏究』, (서울:民族史, 1993), p.81.

280)『維摩詰所說經』(大正藏, 14), p.540, 上4∼6.

281) 鄭性本, 前揭書, pp.319∼320.

282)『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42 下): 이 구절은 원래 『維摩經』 菩薩品, 光嚴童子    章에 依據한 것으로, 이와 똑같은 구절은 없다. 이것은 아마 『維摩經』의 말을 引用    하여 觀心釋한 것으로 여겨진다.

283) 鄭性本, 前揭書, p.425.

284) 鄭性本, 前揭書, p.840.

285) 鄭性本, 前揭書, pp.864∼866.

286)『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45, 中29∼下1): 非凡夫行 非賢聖行. 是菩薩行. 非垢    行 非淨行. 是菩薩行.

287) 胡適, 『神會和尙遺集』, (胡適記念館, 1967), p.249.

288)『中論』卷第4, (大正藏,30, p.33 中 11∼12):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    是中道義

289) 『摩河般若波羅蜜經』 卷第22, 道樹品 第71, (大正藏,8, p.378, 下 9∼13)

290) 李英茂 譯解, 前揭書, p.360.

291) Robert A. F. Thurman, The Holy Teaching of Vimalak rti,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76), pp.1∼5.

292) 橋本芳契, 『維摩經の 思想的 硏究』 (京都:法藏館, 昭和41年), p.52.

293)『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50 中29∼下4): 爾時維摩詰.謂衆菩薩言.諸仁者.云    何菩薩入不二法門.各隨所樂說之.會中有菩薩名法自在.說言.諸仁者.生滅爲二.法本    不生今則無滅.得此無生法忍.是爲入不二法門.

294) E. Lamotte·Sara Boin tr., The Teaching of Vimalak rti, The P li Text Society,

     London, 1976, p.LⅩⅥ.

295) E. Lamotte·Sara Boin tr., 上揭書, p.123.

296) E. Lamotte·Sara Boin tr., 上揭書, p.193.

297) E. Lamotte·Sara Boin tr., 上揭書, pp.188∼189의 脚註1.

298) E. Lamotte·Sara Boin tr., 上揭書, p.LⅩⅦ.

299) Pa cavi atis hasrik , p.164, 8; 225, 23.

300) E. Lamotte·Sara Boin tr., op. cit., p.190.;『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50 下     11∼12): 德頂菩薩曰.垢淨爲二.見垢實性則無淨相.順於滅相.是爲入不二法門 .

301)『慧能硏究』, 駒澤大學禪宗史硏究會 編, (東京:大修 書店, 1978), p.295.

302) 性徹, 『頓悟入道要門論講說』(海印寺 白蓮庵, 1986), p.163.

303) 無衣子 (慧諶), 『禪門拈頌集』 第55則 參照.

304) 『慧能硏究』, pp.295-296.

305)『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51上19∼22) : 喜見菩薩曰.色色空爲二.色卽是空非      色滅空 色性自空. 如是受想行識識空爲二.識卽是空非識滅空 識性自空. 於其中而通      達者.是爲入不二法門.

306) Madh. v tti, p.265, 1∼8.

307) E. Lamotte·Sara Boin tr., op, cit., pp.171∼172.

308)『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51下1∼4) : 月上菩薩曰. 闇與明爲二. 無闇無明則無      有二. 所以者何. 如入滅受想定無闇無明 一切法相亦復如是. 於其中平等入者 是爲入不      二法門.

309) 『中阿含經』 卷58, (大正藏,1, p.789上); 南傳大藏經10, 『中部經』 2, p.18.

310)『維摩詰所說經』, (大正藏,14, p.551 下12∼15) : 樂實菩薩曰. 實不實爲二. 實見者尙      不見實何況非實. 所以者何. 非肉眼所見慧眼乃能見. 而此慧眼無見無不見. 是爲入不二      法門.

311) E. Lamotte·Sara Boin tr., op. cit., p.93.

312) 오직 默然하다 : 이것을 「維摩의 一默」, 또는 「默不二」라고 하며, 이것을 讚嘆하        여 禪家에서는 흔히 「維摩의 一默은 雷聲과 같다」고 말한다.

313)『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51 下16∼26) : 如是諸菩薩各各說已. 問文殊師利. 何       等是菩薩入不二法門. 文殊師利曰. 如我意者. 於一切法無言無說. 無示無識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於是文殊師利. 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       二法門. 時維摩詰默然無言.文殊師利歎曰. 善哉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不二       法門. 說是入不二法門品時. 於此衆中五千菩薩. 皆入不二法門得無生法忍.

314) 『注維摩詰經』 卷第8 (大正藏, 38), p.399.

315) 金浩星, 『禪觀의 大乘的 淵源 硏究』(東國大大學院 博士學位論文,1995), p.117, p.129.

316) 橋本芳契, 前揭書, p.52.

317) 橋本芳契, 「禪經としての 維摩」, (『印度學佛敎學硏究』 第2卷 第2號), p.663.

318) 鎌田茂雄, 前揭書, pp.13∼16.

319) 崔昌述,「鏡虛의 禪淨思想」,『德崇禪學』(創刊號,韓國佛敎禪學硏究院·無佛禪院), p.26.

320) 『楞伽師資記』, (大正藏,85, p.1286下): 善男子善女人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諸亂    意 不取相貌 繫心一佛 專稱名字 隨佛方便 所端身正向 能於一佛 念念相續 卽是念中    能見過去現在未來佛 何以故 念一佛功德無量無邊.

321) 『修心要論』, (大正藏,48, p.378上∼中): 若有初心學坐禪者 依觀無量壽經

     端坐正念閉目合口 心前平視隨意近遠 作日想觀 守眞心 念念莫在.

322) 崔昌述, 前揭書, pp.26∼29.

323) 崔昌述, 前揭書, pp.32∼34.

324)『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38, 上15∼21): 爾詩長者子寶積. 說此偈已白佛言. 世尊.    是五百長者子. 皆已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願聞得佛國土淸淨. 唯願世尊. 說諸菩薩淨土    之行. 佛言. 善哉寶積. 乃能爲諸菩薩問於如來 淨土之行. 諦聽諦聽善思念之. 當爲汝說. 於    是寶積及五百長者子. 受敎而聽.

325) 李英茂 譯解, 『維摩經講說』, (月印出版社, 1989), pp.63∼64.

326)『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38, 上21∼29): 佛言.寶積.衆生之類是菩薩佛土. 所以者    何. 菩薩隨所化衆生而取佛土. 隨所調伏衆生而取佛土. 隨諸衆生應以何國入佛智慧而取佛     土. 隨諸衆生應而何國起菩薩根而取佛土. 所而者何. 菩薩取於淨國. 皆爲饒益諸衆生故. 譬    如有人欲於空地造立宮室隨意無 . 若於虛空終不能成. 菩薩如是.爲成就衆生故 願取佛國.    願取佛國者非於空也.

327) 李英茂 譯解, 前揭書, pp.67∼68.

328)『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38,上29∼中4): 寶積. 當知直心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不諂衆生來生其國. 深心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具足功德衆生來生其國. 菩提心是菩薩淨     土. 菩薩成佛時大乘衆生來生其國.

329) 李英茂 譯解, 前揭書, pp.68∼70.

330)『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38, 中4∼12): 布施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一切能捨衆    生來生其國持戒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行十善道滿願衆生來生其國 忍辱是菩薩淨土. 菩    薩成佛時 三十二相莊嚴衆生來生其國 精進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勤修一切功德衆生來生    其國 禪定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攝心不亂衆生來生其國 智慧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正定衆生來生其國.

331)『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38, 中12∼19): 四無量心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成就    慈悲喜捨衆生來生其國. 四攝法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解脫所攝衆生來生其國. 方便是菩    薩淨土. 菩薩成佛時 於一切法方便無碍衆生來生其國. 三十七道品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念處正勤神足根力覺道衆生來生其國.

332)『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38, 中19∼26): 廻向心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得一切    具足功德國土. 說除八難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國土無有三惡八難. 自守戒行 不譏彼闕     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國土無有犯禁之名. 十善是菩薩淨土. 菩薩成佛時 命不中夭. 大富    梵行所言誠諦. 常以軟語 眷屬不離. 善和諍訟言必饒益. 不嫉不 正見衆生 來生其國.

333) 李英茂 譯解, 前揭書, p.74.

334)『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p.538, 中26∼下5): 如是寶積. 菩薩隨其直心則能發行. 隨其    發行則得深心. 隨其深心則意調伏. 隨意調伏則如說行. 隨如說行則能廻向. 隨其廻向則有方    便. 隨其方便則成就衆生. 隨成就衆生則佛土淨. 隨佛土淨則說法淨. 隨說法淨則智慧淨. 隨    智慧淨則其心淨. 隨其心淨則一切功德淨. 是故寶積. 若菩薩欲得淨土當淨其心. 隨其心淨則    佛土淨.

335) 韓普光 譯·坪井俊映 著, 『淨土敎槪論』, (弘法院, 1990), p.22.

336) 韓普光 譯·坪井俊映 著, 上揭書, pp.36∼37.

337)『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 48), p.352.

338)『萬善同歸集』卷上, (大正藏, 48), p.966.

339)『維摩詰所說經』佛國品 第一, (大正藏,14, p.538, 下20∼24): 於是佛以足指按地. 卽     時三千大千世界若干百千珍寶嚴飾. 譬如寶莊嚴佛無量功德寶莊嚴土. 一切大衆歎未曾    有. 而皆自見坐寶蓮華. 佛告舍利弗. 汝且觀是佛土嚴淨.

340)『維摩詰所說經』不思議品 第六, (大正藏,14, p.546, 中1∼3): 文殊師利言. 居士. 東方    度三十六恒河沙國有世界. 名須彌相其佛號須彌燈王.

341)『維摩詰所說經』香積佛品 第十, (大正藏,14, p.552, 上21∼25): 於是維摩詰. 不起于座    居衆會前化作菩薩. 相好光明威德殊勝蔽於衆會. 而告之曰. 汝往上方界分度如四十二    恒河沙佛土. 有國名衆香. 佛號香積. 與諸菩薩方共坐食.

342)『維摩詰所說經』香積佛品 第十, (大正藏,14, p.552, 下18∼19): 其諸菩薩聲聞天人食    此飯者. 身安快樂. 譬如一切樂莊嚴國諸菩薩也.

343)『維摩詰所說經』見阿 佛品 第十二, (大正藏,14, p.555, 中5∼下): 是時佛告舍利弗.     有國名妙喜. 佛號無動. 是維摩詰於彼國沒而來生此.……現妙喜國無動如來及諸菩薩聲    聞之衆. 衆皆欲見. 於是維摩詰心念.……

344) 韓普光 譯·藤吉慈海, 『禪淨雙修의 展開』, (民族史, 1991), pp.207∼209.

345) 『普照全書』, 「勸修定慧結社文」, (佛日出版社, 1989, p.24, 6∼10):  淨名經云 「欲淨佛    土 當淨其心 隨其心淨 卽佛土淨」 法寶記壇經云 「心地但無不淨 西方去此不遠 性起不淨    之心 何佛卽來迎請」 壽禪師云 「識心 方生唯心淨土 着境只墮所緣境中」 如上佛祖所說 求    生淨土之旨 皆不離自心. 未審 離自心源 從何趣入.

346) 橋本芳契, 前揭書, pp.40∼41.

 

출처 : 불교인드라망
글쓴이 : 연화덕/부루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