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대목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불립문자는 직역하자면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말인데,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함은 문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여기에서 문자라고 한 것은 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말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불교문헌에 보면 흔히 둘을 붙여서 ‘언어문자’라고 하여 하나의 단어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면 말과 문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함은 무슨 뜻일까? 말이고 글이고 간에 도무지 믿을 것이 못되므로 글을 전혀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겠다거나, 말을 전혀 안 하고 듣지도 말고 살아야 한다거나, 글을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는 뜻일까? 단단히 작심을 한다면 말과 글을 전혀 안 하고 안 쓰고 살 수도 있긴 있을 터이다. 실제로 스님들이 묵언수행(默言修行)을 하는 예도 종종 본다.
그러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글을 읽지 않고 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기는 깊고 깊은 산속에서 평생 혼자서만 산다면야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이다. 아마 선의 종지에 극단적으로 충실하고자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이들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세상에서 기억되지 않으며 불교의 역사에서도 기억되지 않는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불의 요건에도 맞지 않는다. 부처님이라면 중생과 함께 하게 마련이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교리이다.
언어문자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함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자리에서 언어문자를 배척한다는 뜻은 아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전하는 일에서는 언어문자가 아무런 쓸모가 없고 거기에 의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중생의 망상망념을 쓸어버리고 그것에 가려있던 부처님으로서의 본래 정체를 발현하는 것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보면 무심(無心) 무념(無念) 무주(無住)를 선의 종지로 삼는다고 했는데, 망령된 마음과 생각이 없고 그런 마음과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망령된 마음과 생각이 없으며 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생의 방식으로 마음을 쓰고 생각을 일으키고는 그것을 악착같이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방식으로 마음과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선종에서는 망상망념을 한 마디로 분별이라고 일컫는다. 분별이 중생적인 사고방식의 핵심이라는 얘기이다. 분별이란 개체를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체를 구별하기만 하고 그것들이 서로 불이적(不二的)인, 연기적(緣起的)인 관계 속에 있다는 면은 알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언어문자는 워낙 그 속성과 기능의 핵심이 분별에 있다. 분별하는 의식과 판단을 표현하는 도구이자, 한편으로는 분별 의식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언어문자이다.
하기는,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일단 분별부터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물을 분별하는 데에는 곧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는 이름 붙이기가 함께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기, 말을 가져다가 붙인다는 것은 곧 분별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엇을 가리켜서 ‘나무’라고 하면 나무가 아닌 것들과 나무를 분별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인간의 정신 작용인데, 이것을 두고 왜 선종에서는 그리도 심각하게 문제를 삼을까?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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