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워낙 분별의 기제라는 것이 불교의 언어관이다.
게다가 그 분별은 진상을 충실히 가려내는 분별이 아니라 우리의 탐욕이 반영된 자의적인 분별이라고 본다. 더욱이, 일단 어떤 사물에 자의적인 분별을 담은 말을 갖다 붙으면 우리는 그만 그 말에 휘둘려서 그 말을 통해서 사물을 재단해 버린다. 선불교는 그런 입장을 아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으며 그것을 단적으로 표명한 것이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구호이다.
사물에 이름이 없었을 때를 상상해보자. 17세기 영국 시인 존 밀턴(John Milton)의 서사시 <실락원(Paradise Lost)>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하고 거기에 낙원을 마련하고는 인간을 만들어 거기에서 살게 하였다. 모든 것이 처음인지라 사물에도 이름이 없었으리라고 밀턴은 상상하였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 완벽한 낙원에서 편안히 지내며 낮에는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온갖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로 소일한다.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 함은 사물을 서로 구분하는 일이다. 다르게 생긴 꽃을 보고 각자 장미라는 이름과 국화라는 이름을 붙였을 텐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장미라는 이름의 꽃과 국화라는 이름의 꽃이 서로 다르다는 인식이 고착된다. 이름 붙이기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그런 단순한 구분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 인간 의식이 지어내는 한 없이 복잡한 분류체계를 반영한다. 장미, 국화, 민들레, 개나리, 진달래 등은 꽃이라는 개념으로 묶이고, 버드나무, 참나무, 소나무 등은 나무로 분류된다. 꽃과 나무, 풀은 모두 식물에 속하고 동물 및 광물과 구분된다.
그러고 보면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의사소통은 모두 그런 분류체계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분류체계와 이름이 사물의 진상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학습된 분류체계와 이름, 나아가 거기에 관습적으로 부여된 의미라든가 가치판단을 그대로 철석같이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것이 더 큰 문제이다. 적어도 불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본다.
우리는 대개 언어란 우리의 체험과 인식, 판단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여긴다. 한 마디로 우리의 사유를 표현하는 도구로 본다. 그러나 현대 언어학에서는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을 역설한다. 언어는 우리의 사유를 규정하는 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 사물에 어떤 특정의 이름이 붙은 것은 필연적이 아니라 다분히 임의적이라는 점, 이름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고유한 특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이름과의 구별에서 나온다는 점도 현대 언어학에서 역설한 바이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말은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버드나무를 가리키며 ‘저건 나무야’라고 말할 때에는 산이나 물, 건물 같은 것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나무를 말한다.
한편, 책상을 가리키며 ‘저건 나무야’라고 할 때에는 철제나 플라스틱이 아닌 목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그 자체가 사물의 진상을 그대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분류체계의 문맥 속에서만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한정된 역할을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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