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26. 견성성불(見性成佛) 13

수선님 2018. 7. 29. 11:49

관련 이미지


견성이란 개별자로서의 자신을 죽이고 연기적인 존재로서의 자기의 정체를 깨닫는 것이다.
 
개별자로서의 자신을 죽인다는 표현과 관련해서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한다는 비유를 소개하였다. 부처와 나 사이의 분별을 포함한 모든 분별의 원천은 개별자로서의 자아(自我) 의식이니,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데에서부터 온갖 분별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교의 박성배 교수가 또 다른 흥미로운 비유를 제시한 것이 있다(<깨침과 깨달음>(예문서원)). 불교의 깨달음을 일컬어 중국에서는 ‘오(悟)’라든가 ‘각(覺)’이라는 말을 쓰고 특히 선종에서는 ‘견성’이라고 하는데, 한국 선찰(禪刹)에서는 깨친다는 말을 쓴다. 깨친다는 말은 깬다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깬다는 말은 우선 부순다는 뜻이다. 또 한편으로는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태가 된다는 뜻도 있다. 잠에서 깬다거나 술에 취했다가 깬다거나 알에서 깨어난다거나 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이 두 번째 뜻도 우선은 무엇을 부수어 버린다. 기존의 상태가 깨져버린다는 뜻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에서 궁극적인 종교체험에 대해서 ’깨친다’는 말을 쓰는 것은 거기에 무엇인가가 부수어지는 체험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수어지는 것, 깨지는 것은 한 마디로 분별심(分別心)과 아집(我執)이라는 것이 박 교수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박교수는 공안(公案) 타파(打破), 즉 공안을 깨는 것과 연관해서 설명해 나가지만, 여기서는 그 얘기는 접어두기로 한다. 아무튼 요지는, 중생이 부처라는 가르침, 달리 말하자면 바로 내가 부처라는 가르침을 도저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분별심과 그 분별심을 낳는 아집 때문이고, 그것이 철저하게 부수어져야만 비로소 부처님으로서의 자기를 찾는다는 얘기이다.

 

중생이 곧 부처님이라고 하면서도 아집과 분별심을 지닌 중생으로서의 자아를 철저히 부수어야 한다고 하는 말은 좀 아리송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중생이 곧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즉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교리와 본각(本覺) 개념을 그렇게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흔히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중생으로서의 자아를 부수는 것을 비롯해서 무엇인가를 어떻게 해야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 한편 중생이 엄연히 중생으로 살고 있지 부처님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중생이 그야말로 그대로 부처일 수는 없고 뭔가 일이 벌어져야만 부처가 된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것은 선의 교리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딜레마라고 할 만한 문제이다.

 

사실 이에 대한 견해에 따라 선종 안에서도 종파가 갈렸을 정도로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른바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이 그것이다. 임제종 전통에서는 간화선(看話禪)을 개발하고 공안타파라는 ‘시각(始覺)’의 사건을 강조했고, 한편으로 조동종에서는 모든 작위적인 수행을 부인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해서 ‘본각(本覺)’ 쪽을 강조하였다. 아무튼 양쪽 모두 그 근본적인 딜레마를 붙들고 씨름해왔다. 그 이야기는 다음 회의 글에서 더 잇기로 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