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27. 견성성불(見性成佛) 14

수선님 2018. 7. 2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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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의 글에서, 본각(本覺)을 강조하느냐 시각(始覺)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의 수행론이 다르게 전개되었다고 하였다.


본각을 강조한다 함은 모든 중생이 있는 그대로 이미 깨달음을 성취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오래 전에 이미 언급한 적이 있는데, 선사들이 흔히 하는 말로 ‘번뇌 하나 덜고 말고 할 것 없이 중생이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입장을 표현한다.


처음에 그 표현을 언급할 때, 번뇌라는 것이 워낙 실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 말이 성립한다고 설명하였다. 중생은 번뇌 속에 살기 때문에 중생이다. 번뇌란 온갖 탐욕과 어리석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번민과 고뇌, 괴로움이다. 중생에게 번뇌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중생에게는 번뇌가 아무리 엄연한 현실로 여겨진다고 해도 번뇌란 실상은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불교, 적어도 대승불교 교리의 입장이다. 번뇌를 엄연한 현실로 여기는 것 그 자체가 근본적인 어리석음이요 번뇌이다.


중생은 언제부터라 할 것도 없이 오래도록 꿈속에 빠져있다는 표현이 경전에 자주 나온다. 중생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이 현실이요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이 기실은 꿈일 뿐이니, 꿈을 현실이라 여기는 어리석음까지도 깨어난 진짜 현실에서 보면 꿈속의 일이다.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에서 꽃을 본다는 비유도 자주 등장한다. 허공에 꽃이 춤추니 신기하여 저것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해 한다.


그러다가 꽃이 안 보이면 어디로 갔을까 의아해한다. 옆에 눈이 멀쩡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아니라 네가 잘못 보았을 뿐이라고 일러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너무도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허상이라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이 꿈 또는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사건이 필요하다. 깨어보면 사람이 바뀐 것도 아니요 장소가 바뀐 것도 아닌 채로 그냥 원래 제 자리일 뿐이지만, 아무튼 깨어나는 사건이 필요하다. 이른바 임제종 전통에서는 그 깨어나는 사건을 중시한다. 이를테면 시각(始覺)을 중시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꿈속에 있건 깨어나 있건 내내 그 사람이 그 사람일 뿐임을 강조할 수도 있다. 꿈이나 착각은 실체가 없고 허망하니 깨어나니 어쩌니 할 것도 없다. 이미 모두가 본래 깨쳐 있는 부처님이니, 부처가 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성불하겠다고 작정하고 좌선하는 것은 도통 잘못이다. 그냥 무작정, 즉 뭘 어쩌겠다는 의도 없이, 부처님으로서 턱하니 앉아있는 것이 좌선이다. 일본에서 조동종을 일으킨 도겐(道元)은 그것을 일컬어 지관타좌(只管打坐)라고 하였다. 그리고, 본래 이미 깨쳐 있는 이가 행하는 수행이라고 해서 증상(證上)의 수(修)라고 일컬었다. 이것은 이를테면 본각(本覺)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두 수행론이 정반대되는 양극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전제를 두고 지금 당장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한 결과로 나온 수행론이다. 깨친 이들의 입장에서야 이러쿵 저러쿵 할 것 없이 하나의 실상일 뿐이지만, 꿈과 착각 속의 중생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자니 이런저런 처방이 나왔을 터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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