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불교에서는 언어를 불신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 이유는 언어라는 것이 분별의 기제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분별이 왜 문제가 되는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 온갖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분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보면 분별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불교에서 문제 삼는 분별은 보다 근본적인 분별이다. 즉 나 자신을 세상의 다른 모든 존재와 철저히 구별해서 독립되고 고유한 개체로만 보는 의식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아상(我相)이라든가 아집(我執) 등의 개념이 그것을 가리킨다.
내가 나 이외의 개체와 구별되는 존재임은 엄연한 사실이 아닌가? 내가 나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불가피한 일이 아닌가? 한 개체로 태어난 이상 그 이외에 살아가는 방법은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것을 문제로 삼는가?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항변이다.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현실의 양상에서는 다 옳은 항변이다. 불교에서도 그 엄연한 현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다만,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그런 개체성 너머 또 다른 면의 진상을 담고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 또 다른 면의 진상이란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연기(緣起)라는 개념으로 지칭된다. 즉, 다른 개체들과 서로 철저히 구별되어 독립된 존재로만 보이는 나 자신이 사실은 다른 모든 개체들, 나아가 세상 전체에 철저하게 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개체가, 세상 전체가 그런 존재라고 본다. 모든 것을 구별하는, 특히 나를 중심으로 해서 주객(主客)의 관계로만 보는 분절적인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애초부터 우리에게 너무나 깊이 박혀있어서, 우리는 그것만이 세상의 진상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들이미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경전에 보면 “연기(緣起)를 보는 이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이는 곧 연기를 본다”고 했고,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법을 볼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법이란 세상의 온갖 존재와 현상, 또는 그 진상을 가리키며, 둘째 구절에서 ‘나’란 부처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세상의 진상인 연기법을 보는 이가 부처라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란 연기법을 깨달은 이라는 얘기이며, 성불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나 자신이,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와 세상 전체에 의존하는 연기적인 존재라는 그 진상을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 분별을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꼽으면서 분별의 기제인 언어를 불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언어를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했다. 불교도 엄청나게 많은 말을 쏟아냈고 엄청나게 많은 문서를 남겼다. 경전이 어찌나 많은지 하다못해 팔만 사천 법문이라는 말까지 있다. 언어문자에 대한 불신을 가장 극명하게 표명하는 선종에서조차 엄청나게 많은 기록이 생산되었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다음 회의 글에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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