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수선님 2018. 8. 5. 13:03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잠농 통프라스트 지음/ 이마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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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개요와 역자의 소견

 

이 논문은 태국의 불교학자 잠농 통프라스트(Chamnong Tongprasert)가 쓴, "My Political Thought on the life of the Buddha" Overseas Going Buddhist Missionary Monks Class V, (Bangkok: Dhammaduta Bhikkhus Going Abroad, 2000)를 완역한 것이다.

원제를 직역하면 "붓다의 생애에 관한 나의 정치적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로 옮겼다.

 

이 논문은 붓다의 생애를 순전히 정치적 시각에서 재조명한 것이다.

붓다의 생애를 정치적 시각에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이 논문은 붓다의 혈통이 아리얀계가 아닌 몽고계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붓다의 가계인 석가족은 몽고계였다.

그 증거로 {32상경(三十二相經)}에 묘사된 붓다의 신체적 특성과, 석가국이 있었던 지금의 네팔을 포함한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서 분포된 민족의 대부분이 몽고계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수 천년 전 인도에 침입해 온 아리얀족은 대부분 전제 군주제였고, 몽고계는 공화제였다.

붓다시대 석가족은 아리얀계인 꼬살라에 예속되어 있었다.

석가국은 꼬살라국에 비교하면 너무나 작은 나라였다.

석가족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꼬살라국에 대항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다.

싯닷타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다.

그가 최고의 군주가 되어 꼬살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무력으로는 꼬살라국과 싸워 독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는 유혈 없는 평화적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우선 자신의 마음 속 적을 정복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의 왕국과 백성들을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깨달음은 첫 번째 목표를 이룬 것이었다.

그 후 그는 45년간 정복자인 아리얀족을 상대로 지적인 전쟁을 전개했다.

불교바라문교와의 대립은 몽고족아리얀족의 종교간의 논쟁이었다.

이 싸움에서 마지막 승리자는 붓다였다.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과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자기 왕국을 정복한 군주들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그들을 개종시킴으로써 정복자들의 정복자, 즉 절대적인 정복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정복당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붓다께서 열반에 들고자 할 무렵, 그는 자신이 완전한 정복자, 우주의 군주 즉 전륜성왕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붓다께서 굳이 말라족의 수도인 구시나가라에서 열반하게 된 것도 자신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붓다는 열반함으로써 비로소 바라문의 개념에서 최고의 군주인 전륜성왕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다.

 

이 글을 번역 소개하는 목적은 붓다를 마치 절대자 혹은 '신(神)' 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의 지적처럼, 이러한 이해는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며, 또 붓다 그 분의 뜻에서도 빗나간 생각임이 명백하다.

 

우리가 붓다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해한다고 해서 그 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를 정확히 이해할 때, 그 분을 향한 존경심은 더욱 우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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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수 천년 전 아리얀족이 침입해 들어오기 전, 현재 '인도(India)'로 불리는 나라는 흑색·갈색·황색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의 땅이었다.

그들은 흑인계몽고계 혈통의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약 2,000년경 아리얀족 침입 이후, 패배한 이러한 토착민들은 아리얀족에 의해 'Milakkha[미개인(未開人)]'라고 불렸다.

 

토착민들은 히말라야 산맥의 기슭을 따라서 인도의 북부 쪽, 동북부 쪽 및 남부 쪽에 흩어져 살았다. 갈색과 황색 피부의 민족, 즉 몽고계의 대부분은 북부 쪽과 동북부 쪽에 살았고, 흑색 피부의 민족들은 남부 쪽에 살았다.

그들 가운데 몇몇 종족은 독립해 있었으나, 몇몇은 아리얀 왕국에 종속되었다.

 

우리는 붓다시대 이전의 인도 역사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붓다 당시에 삭까(Sakka)꼴리야(Koliya)와 같은 몽고계 왕국들 중의 일부는 꼬살라(Kosala) 왕국의 속국이었음을 알고 있다.

밧지(Vajji)말라(Malla) 왕국과 같은 다른 왕국들은 독립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공화제로 통치되었다.

비록 그들 중 몇몇 종족은 아리얀족에 예속되었지만 완전히 식민화되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석가국 국민들의 정치적 지위


히말라야 산맥 기슭 근처의 인도 북쪽에서는 황색 피부의 국민, 즉 석가족의 왕국이 있었다.

<32상경(三十二相經, Lakkhana Sutta)>에 의하면, 그들의 안색은 청동 빛과 같았으며, 그들의 피부는 우아하게 부드럽고, 그들의 눈과 머리칼은 흑색이었다.[1]

그 당시에는 석가족이 꼬살라국의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석가족들은 빠세나디 왕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존경의 인사를 했다.

그들은 일어서서 왕에게 순종을 표시했으며, 예의를 갖추어 맞았다.[2]

 

석가 왕국이 설립되었던 네팔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히말라야 산맥 기슭을 따라서 분포된 민족의 대부분은 몽고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석가족들은 틀림없이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이다.

석가족은 인도의 북부에 흩어져 있던 많은 몽고계 민족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아리얀족과는 다른 특별한 통치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리얀족은 전제 군주제로 다스렸으나, 몽고계는 공화제였다.

밧지족과 말라족 등과 같은 몽고계의 몇몇 종족은 붓다시대에도 자신들의 독립을 지속할 수 있었다.

석가족과 꼴리야족 같은 다른 종족은 아리얀 왕국에 예속되었다.

이와 같이 석가족의 정치적 지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활동 단계는 언제나 꼬살라족에 의해 감시를 받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석가 왕국은 꼬살라국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았다.

석가족은 전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당시 꼬살라국은 가장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하나였으며, 오직 마가다국에만 뒤질 뿐이었다.

비록 꼬살라국이 석가족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기를 허용했을지라도, 그것은 섭정과 다를 바 없었다.

석가족은 경제, 통상과 재판에 있어서 만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석가족이 독립을 원하긴 했지만 대군을 가진 적이 없으니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겠는가?

꼬살라국은 물론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았다.

 

석가족은 오직 꼬살라국에서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의 생각은 독립으로 가득해 있었다.

그들의 통치의 주체는 여러 큰 종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석가족의 수령들을 자신들은 "캇띠야[Khattiya]"(Kshatriya)"전사(戰士)", 혹은 때로 "라자(Raja)"라고 불렸는데, 서양 개념의 왕은 아니다.

그들은 대개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 그들은 의장직을 수행할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직위를 매우 잘 실행했다면 그는 석가족의 숫도다나(Suddhodana)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의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때때로 의장직은 밧지족의 경우와 같이 윤번제로 하기도 했다.

 

 

싯닷타의 세속적 지위


싯닷타(Siddhattha)숫도다나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몽고계 민족의 다른 부족인 꼴리야족, 시리 마하 마야(Siri Maha Maya)였다.

싯닷타는 까삘라밧투와 데와다하 사이의 룸비니 동산에서 기원전 623년에 태어났다.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다.

그는 초인의 32 가지 징표를 소유했었다.

점성가들은 만일 그가 세속에 살면 초인적인 군주,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지만, 세속 생활을 버리고 출가한다면 세상에서 무지를 끊어 낼 아라한, 즉 지고의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3]

그러므로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목표"였다.

그의 아버지와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최고의 군주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것은 그들이 꼬살라국의 지배의 굴레를 벗어버리기를 원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꿈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것이었다.

 

싯닷타는 호화로운 환경에서 호의호식하며 성장했다.

그는 세 곳의 궁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많은 아름다운 소녀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불과 16세에 야소다라(Yasodhara)라는 매우 아름다운 사촌과 결혼했다.

그는 많은 유명한 스승으로부터 통치술을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군사와 정치의 양면에 있어서 석가족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았다.

그는 모든 호사스러움을 누렸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치스러운 물건들에 오랫동안 집착하지는 않았다.

 

싯닷타는 자신과 자기 씨족의 지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비록 강건함과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싸움에 의해 꼬살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와 몇몇 유능한 친구들과 작은 군대는 잘 훈련된 꼬살라국의 거대한 군대와 싸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전혀 현명한 방법도 아니었다.

이것은 곤충이 불 속으로 날아드는 것과 같다.

다른 방법, 즉 유혈 없는 평화적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들이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꼬살라국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을까?

 

 

세상을 포기함[출가]


그는 네 가지 사건, 즉 늙은 사람 ·병든 사람·죽은 사람·유행자(遊行者)를 보고 난 후 그의 나이 29세 때, 자신의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날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들이 슬퍼하고 통곡하는 동안에 머리를 깎고 황색 가사를 수하고 집을 나와 출가했다.[4]

 

만일 그가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면 출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재산과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목과 손발을 묶고 있는 적들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들은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그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은 독립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망치게 된다.

만일 그가 자신의 마음 속 적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외부의 적을 정복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가 부모와 아내 및 아들 그리고 재산을 사랑했지만 그보다는 자기 왕국의 독립과 백성들을 더욱 사랑했었다.

 

바라문들이 예언했던 바와 같이 그가 깨달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개인적인 번뇌로부터 벗어났었을 뿐만 아니라, 꼬살라국의 지배로부터 자신의 왕국과 백성들이 독립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싯닷타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그는 지금까지 세상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출가하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디로 제일 먼저 갈 것인가였다.

 

 

마가다 왕국에서 싯닷타의 수행


까삘라밧투에서 싯닷타는 곧장 마가다 왕국으로 갔다.

왜 그는 꼬살라국, 까시국(Kasi)과 같은 왕국으로 가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오직 두 가장 강력한 왕국들, 마가다국과 꼬살라국이 있었다.

까시국은 꼬살라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만일 싯닷타가 까시국이나 꼬살라국으로 갔다면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꼬살라국의 빠세나디 왕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며, 자기 왕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마 꼬살라국 이상의 강력한 힘을 가진 다른 왕국인 마가다국으로 갔다.

 

그가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의 궁궐을 지날 때, 빔비사라(Bimbisara)왕이 그를 보고는 만나기 위해 나와서 면담하고 라자가하에서 함께 살자고 그를 초대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싯닷타는 빔비사라왕의 호의를 거절하고, 자신은 세속을 포기하고자 원하며, 왕위를 바라지 않는다고 정중히 왕에게 말하고는 왕의 곁을 떠났다.

 

빔비사라왕은 만일 그가 깨달음을 이룬다면 자기에서 와서 설법해 주기를 당부했다.

우리는 빔비사라왕의 초대가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아마 정치적 시험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싯닷타가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그가 왕에게 말했던 바와 같이, 세속을 포기하겠다는 진정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의 신변에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생명을 잃고, 그의 왕국이 독립을 성취할 기회를 더 이상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싯닷타의 거절은 많은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먼저 빔비사라왕이 그를 신뢰했으며, 자기의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싯닷타는 그곳에서 행복하게 숨김없이 지낼 수 있었다.

빔비사라왕과의 친목의 유대는 이렇게 형성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매우 슬기로운 방법으로 힘의 균형을 세웠다.

그 결과,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은 그에게 감히 어떠한 위험한 짓도 하지 못했다.

비록 두 왕국은 서로 가까운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정치와 무력에 있어서는 비밀리에 경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싯닷타의 정치적 행위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아리얀의 군사적 무력과 다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리얀 신앙의 힘과도 겨루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왕국 내에서 아리얀의 군사적, 신앙적 힘 모두를 파괴시키기를 원했다.

아리얀들의 신앙인 바라문교를 뒤엎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그 종교에 의거해서 공부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그가 스스로 그것을 시험해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그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는 아리얀들이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알 때까지 알라라 까라마(Alara Kalama)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 [5] 문하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철저히 그리고 신속하게 바라문교를 소화했으나 이것이 완전한 지혜구제를 전도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떠나 가버렸다.

 

 

고행과 깨달음


싯닷타는 모든 종류의 지식과 당시 유행하던 요가를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매일 음식은 쌀 한 톨로 줄이고 씨앗과 풀에 의존해 살면서 호흡의 완전한 정지가 수반되는 명상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자후대경(師子吼大經, Mahasihanada Sutta)>[6]에서 그는 다른 종교에서 수행되었던 수많은 종류의 자기-고행의 수행에 대해서 사리뿟따(Sariputta)에게 말했다.

그는 자기-고행의 한계에 도달했지만,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렸을 때 한번 실천해 보았던 명상의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보다 강해야 하는데, 강한 체력을 얻기 위해서는 먹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명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원전 588년 비사카(Visakha; 4-5월)의 보름날 마지막 밤샘에서 그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즉, 그는 괴로움의 본질,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해했다.

무지는 파괴되었고 지혜가 일어났다.

그는 이제 정등각자(正等覺者, Samma-sambuddha), 즉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에 도달한 이가 되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 내부의 적인 번뇌로부터 벗어났다.

그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성공적이었지만 다른 목표, 그의 백성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목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더욱 더 조심스럽게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최초의 설법과 최초의 제자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붓다는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설하는 것을 단념했다.

그는 자신의 교리는 난해하고, 인간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원인과 결과의 사슬, 또는 열반과 욕망의 소멸에 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의 지혜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깊은 것이었다.

이것은 바라문교와 같은 다른 교설들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침묵하고 설법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만일 자신의 새로운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의 백성들과 친척, 그리고 부모가 독립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출가 목적은 자신의 왕국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이제 그 목표 가까이 접근했는데 왜 자포자기하겠는가?

오직 그 자신만이 그의 백성, 그의 친척, 그의 부모, 그의 아내와 자식을 도와 줄 수 있다.

 

아무튼 삼장(三藏)은 娑婆主梵天(Brahma Sahampati)이 붓다 앞에 나타나서,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소하며, 진리를 설해 주기를 간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7]

그래서 그는 마음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다보고, 세 가지 종류의 연꽃과 같이 인간의 성품도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즉, 어떤 연꽃은 물 속에서 태어나 물 속에서 자라서 물위에는 나오지 못하지만 물 속에 감춰진 채 만발한다.

어떤 연꽃은 물 속에서 태어나 물 속에서 자라서는 표면에 도달한다.

한편, 세 번째 종류의 연꽃은 물 속에서 자라서 물 밖으로 나와 섰지만 연꽃에 물이 닿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붓다는 세계를 인식하고 범천에게 말했다.

 

"법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려 있다.

범천이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믿음을 표출하게 하라.
범천이여, 무용한 수고로 간주해서 숭고하고 탁월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법하지 않았다."[8]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적당한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

붓다가 설하게 될 가르침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만일 그가 처음에 성공을 얻을 수 없다면, 이것은 그에게 절망을 가져다 줄 것이며, 사람들은 앞으로도 그의 가르침에 흥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처음 그의 두 스승 알라라 까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생각했다.

그러나 둘 다 최근에 타계했다.

그래서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이 엄격한 자기-고행을 포기하고 음식을 취했을 때, 자신과 함께 있다가 떠나 버린 다섯 고행자 혹은 오비구(五比丘)를 생각했다.

그들은 지금 녹야원 "이씨빠따나"(仙人住處)의 베나레스에 있었다.

"왜 그가 처음 라자가하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혹은 "라자가하에서 150 마일이 넘는 베나레스까지 꼭 갈 필요가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야만 했었다.

그 이유는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그 베나레스바라문교자이나교의 중심지였으며, 꼬살라국빠세나디왕의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그 다섯 고행자를 개종시킨다면, 이것은 자신의 깨달음이 쓸모 없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 역시 달성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만일 그의 목적이 성공하면, 그는 쉽게 자신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파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 왕국의 왕과 백성을 개종시킨다면, 자기 왕국의 독립이라는 목표를 명백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루벨라에서 잠깐 체류한 다음, 그는 베나레스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도중에 한 나체 고행자를 만났지만 그를 가르치지는 않았다.[9]

그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일해야만 했다.

 

그가 녹야원의 이씨빠따나에 도착했을 때, 다섯 고행자들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태도로 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고행이야말로 깨달음의 길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붓다는 그들에게 자기는 이제 깨달은 자이며, 어떻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지 가르치기 위해 왔음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마침내 그들은 붓다를 믿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붓다께서 다섯 고행자들에게 설했던 최초의 설법은 <전법륜경(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이었다.

그 설법의 요점은 누구나 자기-고행이든 자기-탐닉이든 극단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누구나 팔정도(八正道)로 이루어져 있는 "중도(中道)"를 실천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괴로움의 본질,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그 소멸을 가져오는 방법인 네 가지 고귀한 진리[4성제(四聖諦)]를 선언했다.[10]

설법의 마지막에 다섯 고행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곤다냐(Kondanna)는 청정한 즉 티없는 진리의 눈[法眼]을 얻음으로써 설법을 이해했다.

이 고행자가 법안 즉 청정한 진리의 눈을 얻은 최초의 제자였다.

 

 

무신(無神), 무최고아(無最高我), 무아(無我)


그 다음 붓다는 승단(僧團)의 첫 회원들로서 이 다섯 고행자들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붓다는 그들에게 영구히 불변하는 실재(實在)로서의 "자아""영혼"과 같은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오직 행위만이 있을 뿐 행위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라문교물활론(物活論 ; 목석 등도 생물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있다고 믿음)의 전성시대였던 당시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선언이었다.

 

바라문교에서는 모든 것의 근원인 최상의 자아, "최고아(最高我, Paramatman)"가 있으며, 이 세상과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했던 최상의 신, "범천(梵天, Brahma)"가 있다.

모든 것들은 범천에 의존한다.

하지만 붓다는 "자아" 앗따(atta)아뜨만(atman)을 부정했다.

이것은 또한 최고아 혹은 이나 창조주를 부정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에도 범천은 있으나,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의미의 최고아나 범천은 없다.

오직 신격이나 보다 높은 세계의 존재들일 뿐이다.

존재들은 영육(靈肉)의 유기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자아나 최고아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것은 비록 그 각각이 찰나동안 존재하지만, 서로 의존적인 일련의 육체적 상태들이며 또 잇달아 생성된 의식의 상태들이다.[11]

 

<무아상경(無我相經, Anatta-lakkhana Sutta)>에 의하면, 붓다는 무아(無我)에 관해서 명료하게 설명했다.

그는 자아를 다섯 가지 요소, 즉 신체[色]·감각[受]·지각[想]·의지[行]·의식[識]으로 분석했다.

이들 각각은 변화나 질병과 고통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아라고 부를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자아라면, 질병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신체 등이 그렇게 되라거나 그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요소 모두는 덧없고, 고통스럽고 변화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다섯 가지 요소는 무엇이든지 과거·현재·미래, 안이나 밖, 거칠거나 섬세하거나, 낮거나 높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는 나의 것이 아니며, "나"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12]

 

만약 영원한 영혼이나 자아가 없다면, 누가 행위의 결실을 받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행위는 반응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무엇이든 자신이 뿌린 것의 결실을 수확해야 한다.

모든 것이 무아일 때, 어떻게 그 행위의 결과를 얻게 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행위의 법칙" 업설(業說)에 달려있다.

 

 

업설(業說)


왜 어떤 사람은 열등하고 다른 사람은 우등한가?

왜 어떤 사람은 병들고 허약하며 다른 사람은 튼튼하고 건강하며, 어떤 사람은 잘 생겼고 다른 사람은 못생겼는가? 등의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것은 맹목적 기회나 우발적 사건에 기인하는가?

이 세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이것은 신이나 범천에 의존하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신이나 범천 혹은 창조주는 없다.

 

"불교에 의하면, 이러한 변화는 유전과 환경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업(業), 즉 다른 말로 우리들 자신들이 물려받은 과거의 행동과 현재의 행위에 기인한다.

바로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행복과 불행에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지옥을 구축한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하늘을 창조한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운명의 창조자이다."[13]

 

붓다께서는 수바(Subha)라는 젊은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젊은 바라문이여, 행위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것이다.

존재는 행위의 상속자이며, 행위는 모체이고, 행위는 혈족이며, 행위는 운명의 결정자다.

행위는 존재를 바로 낮음과 높음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나눈다."[14]

 

변화에 관련하여 앗타살리니(Atthasalini)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에 의해서 세계가 운행되고,
업에 의해서 인간이 존립하며,
그리고 업에 의해서 인간들이 속박된다.
마치 구르는 전차의 바퀴가 축으로 고정되듯이
업에 의해서 우리는 영광과 칭송을 얻고,
업에 의해서 구속과 파멸과 폭정도 얻는다.
업이 복합적임을 알면서
왜 그대는 "세상에 업은 없다고"고 말하는가?"[15]

 

합당한 효과를 산출하는 힘은 업에 고유한 것이다.

원인결과를 낳고, 결과는 원인을 설명한다.

결과는 이미 원인 안에서 피고 있다.

이러한 업력이 있는 한, 존재는 단지 이 눈에 보이는 업력의 명백한 표명이기 때문에 재생이 있다.

죽음은 이 일시적인 현상의 일시적인 종말에 불과하다.

이것은 소위 존재의 완전한 절멸이 아니다.

타고난 생명은 중지되지만, 지금까지 작용했던 업력은 소멸됨이 없다.

업력은 덧없는 신체의 분해에 의해서 완전히 방해받지 않고 남아 있는 것처럼, 현재 의식의 죽음은 다른 탄생에서 새로운 의식의 조건을 설정한다.[16]

이것이 지금까지의 바라문교 교의(敎義)에 반대되는 업설이다.

 

 

불교는 바라문교를 반대한다.


불교와 바라문교를 대조하는 아주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바라문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적 교의는 영혼의 윤회 혹은 환생이다.

바라문교는 죽음에 이르러 신체가 해체되었을 때, 어떤 것이 옮겨가서 다른 똑같이 일시적인 거처로 이주한다고 믿고 있다.

윤회설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은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모든 상태는 반드시 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바라문들은 소멸하는 형태로 그 자체를 드러내지만 소멸하지 않는 것은 마치 주전자가 부수어졌을 때, 물은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고 믿고 있다.

 

불교의 윤회설은 내가 앞에서 언급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생명은 불과 같고 그 본성은 연료를 태우는 것이다.

한 몸이 죽었을 때, 그것은 마치 하나의 연료가 타버린 것과 같으며, 그 생명의 과정은 지나가고, 또 다른 생명이 다시 시작되며, 생명의 욕망[갈애(渴愛, tanha)]가 있는 한 연료의 공급은 떨어지지 않는다.

개별적 영혼이 들어갈 우주적 영혼[최고아, Paramatman]는 없다.

오직 무아(無我)이다.

바라문들은 아뜨만이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 반면, 불교도들은 극도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것이 불교와 바라문 사이의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본질적인 차이는 그 바라문교는 범천, 최고신이나 만물의 창조주를 믿고, 기도하며, 우리의 삶은 범천이 표시한 운명의 선(線)에 의존한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점이다.

그러나 불교는 반대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의 고유한 행위[Kamma, 業]를 믿고, 우리들 자신이 우리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우리 자신들의 삶은 내가 앞의 "업설"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고 가르친다.

 

다른 대비의 관점은 계급 제도(Caste system)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이다.

바라문교에서는 국민들을 네 가지 계급, 즉 성직자(Brahmans)·무사(Kshatriyas)·평민(Vaisyas)·노예(Sudra)로 나누었지만, 불교에서는 전혀 계급 제도가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그들은 오직 업에 의해 달라진다.

누구나 자신의 행위와 소망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향상시킬 기회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바라문 사회에서의 여성은 오직 남자의 소유물로 평가됐다.

이러한 후반의 관점 두 가지는 다음 항목에서 언급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불교와 바라문교, 엄밀히 말하자면 도덕사회 복지 분야에서 몽고족과 아리얀족의 종교간의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줄곧 서로 싸웠다.

 

 

무계급(無階級), 무인종(無人種) : 우주적 평등


붓다는 최초로 노예제도를 폐지했고, 인도에서 견고하게 뿌리내렸던 바라문교의 비열한 계급제도에 반대하여 격렬하게 항의했던 사람이었다.

불교에서는 단순한 태생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나 업에 의하여 누구나 하층민이나 성직자가 될 수 있으며, 피부색이나 인종은 불교도가 되거나 승단에 입단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불교의 정문은 인종, 계급, 피부색, 계급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널리 열려 있었다.

마치 여러 강들의 물이 같은 대양으로 흘러가서 오직 하나가 되듯이, 다른 계급과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동일한 불교에 들어와서 모두 평등한 불교도들이 된다.

특히 승단에서 그들은 계급, 인종 또는 민족이 아닌 계율과 학식 및 능력 면의 선임자를 따르며 서로 존경한다.

마치 큰 대양은 오직 하나의 맛, 즉 소금의 맛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역시 하나의 맛, 즉 해탈의 맛을 가지고 있다.

 

바라문교에서처럼 서로를 분리하는 모든 장벽을 부수기 위해 시도된 것이 바로 불교의 자비(Metta)이다.

그들이 다른 계급이나 다른 국적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냉담할 이유는 없다.

불교는 어느 국가나 어느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주적이다.

불교에는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과 형제의 연분(緣分)을 맺는다는 개념이 없다.

불교는 주로 그 합리성, 실용성, 효율성 보편성 때문에 유일무이한 것이다.

불교는 모든 통합하는 영향력 중 가장 숭고하며, 세계의 정신을 앙양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따라서 불교바라문교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여성 지위의 향상


붓다 재세(在世) 이전의 여성의 지위를 상상해보자.

여성은 노예와 다르지 않았고, 단지 남성의 소유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누법전에 의하면, 그들은 재산을 가지지 않았다고 공표 되었으며, 그들이 얻은 재산은 그들이 속한 남자들을 위해 획득되었다.[17]

그들은 사회에서 아무 권리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공부할, 특히 세 가지 베다(Veda)를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붓다시대의 여성들은 붓다의 주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붓다는 여성도 아라한과에 이를 수 있다고 공인했다.

음식과 의복을 승단에 공급하는 작업은 자연히 독실한 기혼 부인들에게 주로 배당되었으며, 그들은 주의 깊은 배려로 승려들이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이게 되는 안락을 준비하는 것을 즐겨했다.

그러한 시주자들 가운데 두드러진 사람은 승단에 사찰을 보시했던 비사카(Visakha)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을 승단에 입단하도록 허락했다는 점이다.

처음 붓다는 그들의 입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성의 출가를 허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붓다께서 두 번째로 삭까(Sakka) 왕국의 수도인 까삘라밧투를 방문했을 때, 마하빠자빠띠(Mahapajapati)라는 그의 이모이자 양모가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붓다께 세 번이나 호소했다.

그녀는 세 번이나 거절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그 다음에 그녀와 다수의 석가족 여성들은 삭발하고 황색 가사를 두르고 베살리로 붓다를 따라가서, 발이 부은 채 온갖 먼지를 뒤집어쓰고 매우 슬픈 모습으로 꾸따가라(Kutagara) 강당의 정문에 서 있었다.

그녀를 불쌍히 여긴 아난다(Ananda)는 그녀의 요구를 붓다께 아뢰었으나, 세 번이나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인될 수 없었으며, 붓다가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는 여성들을 공인할 것과 붓다께 젖을 먹였던 사람에게 종교의 축복을 거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붓다는 양보했다.

 

이것은 붓다에게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였지만, 그는 여성의 출가를 허가하는 것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다면, 그에게 전혀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첫째, 붓다는 여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라한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둘째, 여성은 위험, 특히 나쁜 남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승려들에게 부담을 더하게 된다.

비구니들은 비구들의 사찰에서 떨어져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그들이 비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불교를 반대했던 다른 종교, 특히 바라문교에게 불교를 공격하도록 기회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이지만 가장 덜 중요하지는 않은 점은, 이것이 바라문교의 사회 제도를 뒤엎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바라문 사회에서 여성들은 점점 더 불교도가 되어 갔다.

이것은 바라문의 제도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바라문들은 온갖 수단으로 방해할지도 모르며, 자신의 새로운 교리를 전파하는데 어려움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또한 자기 왕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같이 그는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갔다.

마침내 그의 속도 조절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를 낳았다.

 

사실, 붓다는 먼저 바라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기를 원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성직을 요청했다는 빠자빠띠(Pajapati)의 소문은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바라문들은 어떻게 했는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붓다는 그녀가 요청했던 것과 같이, 그녀와 석가족 여성 일행의 입단을 허가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팔중법(八敬法, Attha-garudhamma)"이라는 비구니의 낮은 지위에 대한 규정을 마련해 두었다.

빠자빠띠와 그녀의 일행은 그 규정을 서약했다.

이것은 붓다께서 승단에 여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라문의 제도를 뒤엎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반대편의 마음을 너무 혼란하게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능한 한 공격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바라문들은 그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룸으로써 붓다께 화를 내지 않았으며, 여성들은 비구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붓다는 비구로서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칭찬했으며, 남자신도는 물론 여자신도도 칭찬했다.

그는 편파적이지 않았다.

붓다는 그들의 이전 계급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그들의 능력만이 중요했다.

이것은 붓다가 바라문교를 뒤엎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방법이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간의 지적 전쟁


비록 붓다는 정치인이 아니었지만, 그의 활동은 정치가들의 활동처럼 보였다.

비록 그는 전사(戰士)는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은 전사들의 행동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꼬살라국의 속박에서 자기 왕국과 자기 백성들을 해방시키려는 목표를 품고 있었다.

만일 그가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싸움에 의한 승리는 덧없는 것일 뿐이다.

피정복자는 정복자의 세력을 뒤엎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복자는 편안하게 잠잘 수가 없고, 모든 시간을 경계에 바쳐야만 한다.

 

승리자는 보복을 만나게 되고, 패배자는 편안하게 잠자지 못한다.

붓다는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왕국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에게 안전한 유일한 방법은 다른 방법, 즉 무력이 아닌 지적인 방법으로 해방을 시키는 것이었다.

오직 이러한 방법만이 정복자가 정복당했다고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붓다는 자신의 첫 번째 설법을 위해 베나레스로 갔다.

베나레스는 당시 꼬살라국의 일부였던 까시국의 수도였다.

이시빠따나에서 다섯 고행자 외에 그는 야사와 그의 친구들과 같은 많은 걸출한 젊은이들을 개종시킬 수 있었다.

라자가하(왕사성)로 돌아오는 도중에 그는 빠세나디왕의 이복형제들인 왕자 30명을 개종시켰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이것은 그가 꼬살라국, 즉 이 토착 왕국의 정복자의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단계였다.

 

한편 붓다는 오랫동안 인도 땅에 깊이 뿌리 내려져 있던 바라문교와 싸워야만 했다.

이것은 진정한 지적 전쟁이었다.

그는 전 생애를 모든 수단을 다해 바라문교를 뒤엎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많은 바라문들과 바라문 여인들을 불교도로 개종시킬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비구와 비구니가 되기 위해 승단에 들어왔으며, 그의 가르침을 포교함에 있어서 붓다의 중요한 원조자들이었다.

그는 바라문들끼리 싸우도록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인도 땅에 불교를 확립시켰다.

바라문이었던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사리뿟따(舍利弗)목갈라나(目?連)였다.

 

 

정복자들 가운데 정복자


붓다가 라자가하로 돌아가기 전, 그의 60명의 제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가서 설법하라고 이르고, 그들 중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않도록 했다.[18]

붓다 자신은 라자가하 근처의 우루벨라로 갔다.

이것은 인간의 적과 번뇌로부터 자신의 나라와 다른 사람들을 해방시킬 자신의 중요한 계획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사에서 본 바와 같이 지적인 투쟁의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매우 짧은 기간에 베나레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바라문교를 뒤엎을 수 있었다.

붓다 자신이 바라문교의 한 부파의 중심지였던 우루벨라로 돌아갔다.

이곳은 우루벨라 강의 둑 옆에 위치해 있었다.

1,000명과 3명의 은둔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삼 형제가 그 은둔자들의 우두머리였다.

맏형은 우루벨라 깟사빠(Uruvela Kassapa)였다.

 

붓다는 이들 은둔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그곳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는 그들 모두를 개종시켰다.

이것은 그가 마가다 왕국의 왕과 백성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빔비사라왕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은둔자들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은둔자들은 아라한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만약 붓다께서 그들 은둔자들을 추종자로 만들 수 있다면, 왜 그가 백성들을 개종시키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그는 모든 은둔자들을 개종시킨 다음, 라자가하로 갔다.

그러나 그는 도시에 들어가지 않고, 다만 수도에서 약 6마일 떨어진 야자수 숲에 머물렀다.

빔비사라왕은 한때 붓다께 그가 깨달음을 이룬다면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오라고 말했다.

이제 그는 돌아왔으니 빔비사라왕은 어떻게 할까?

만일 빔비사라왕이 진실로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서 붓다를 초청했다면, 그는 분명 붓다를 만나기 위해 올 것이다.

마침내 붓다께서 수많은 승려들과 함께 자기의 수도 근처 야자수 숲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빔비사라왕은 그의 각료들과 많은 백성들이 함께 붓다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왔다.

사람들은 붓다와 깟사빠를 보았을 때, 그들은 누가 스승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깟사빠가 자신이 제자임을 보여줬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붓다께 집중했다.

그가 왕과 사람들을 개종시키기에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마가다국의 왕과 백성들을 개종시킨 후에, 붓다는 꼬살라 왕국으로 갔다.

이것은 자신의 왕국과 백성의 해방이라는 그의 목표였다.

꼬살라왕은 결혼에 의해서 마가다왕과 친척간이었다.

따라서 붓다께서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과 백성들을 개종시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꼬살라국의 수도 사밧티(Savatthi, 舍衛城)는 당시 불교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백만장자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給孤獨)비사카(Visakha, 毘舍伽)는 가장 유명한 수행원들이었다.

 

"이제, 마치 석가족은 여래(붓다)로 대접한다.

사문 고따마는 잘 태어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나는 잘 태어나지 않았다.

사문 고따마는 건강하지만 나는 허약하다.

그는 매혹적이지만 나는 잘 생기지 못했다.

사문 고따마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미약한 영향력밖에 갖고 있지 않다라고 그가 생각했기 때문이다."[19]

 

비록 빠세나디왕은 석가족의 왕국의 정복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족의 아들인 붓다는 지금 그와 인도의 많은 왕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정복할 수 있다.

빠세나디왕과 빔비사라왕은 자기들의 왕국 내의 정복자들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전 정복자들의 정복자였다.

이것이 절대적인 정복이었다.

그는 인도 국민들을 정복시킨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력은 전세계에 널리 퍼져가고 있다.

 

 

설법과 논쟁의 45년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 이후, 35세부터 80세까지 이곳에서 저곳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다니며 자신의 교법 혹은 새로운 교리, 즉 업설연기설을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친척과 인류의 부흥을 위해 싸웠다.

그는 그가 알았고 실천했던 것은 무엇이든지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인간 이해 능력의 한계를 넘지 않았다.

누구나 생각하고, 믿고, 실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는 누구나 먼저 생각하고, 그런 다음에 믿고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오직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으므로 자기 자신을 청정하게 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야지, 이나 범천다른 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20]

 

붓다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자기 자신의 등불로 삼기를 원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진리만이 자기 자신의 영원한 귀의처이다.

부모와 친척 등과 같은 다른 것들은 임시적인 의지처인 것이다.

 

45년 동안 붓다는 자신의 법을 가르치면서, 그리고 동시에 아리얀족들의 신앙의 힘을 지우면서 인도의 북부 혹은 중부지역에 있는 거의 모든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는 모든 카스트와 계급으로부터, 왕들과 바라문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킬 수 있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설법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는 대체로 여러 종교 공동체의 수장들 및 왕들과 족장들을 개종시켰다.

 

이것은 무사들과 바라문들은 언제나 서로 경쟁자였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왕들은 통치와 싸움에 있어서는 국민들의 최고 지도자들이었다.

하지만 바라문들은 의식 집행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또한 왕들의 스승들이었다.

그리고 바라문들은 세계의 창조주 범천의 후예인 가장 순수한 계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붓다시대에서는 무사계급이 가장 높고 가장 힘있는 계급이었다.

 

붓다께서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Agganna Sutta)>에서 바셋타(Vasettha)바라드바자(Bharadvaja)에게 말했던 바와 같다.

"캇띠야(무사)는 이 백성 중 최고다.
그들의 혈통은 믿을 만하다." [21]

 

붓다께서 바라문교를 뒤엎기를 원했을 때, 그는 대체로 빠세나디왕과 빔비사라왕 등과 같은 무사계급들에게 접근했다.

그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나 공동체, 특히 무사들의 적으로 만드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보통 법이나 자비의 방식으로만 사람들의 마음을 항복시켰다.

그는 모든 계층과 계급의 사람들의 마음을 획득하는 수완에 있어서 매우 현명했었다.

그는 제자들에 의해서 찬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회원들도 그를 칭찬했다.

중부경전의 <살차가소경, 薩遮迦小經(Culasaccaka Sutta)>에 의하면, 자이나의 아들 삿짜까(Saccaka)가 붓다께 자백했다.

 

"훌륭한 고따마시여, 내가 대화로 사문 고따마를 공격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었다는 점에서 주제넘었습니다.

훌륭한 고따마시여, 발정기 코끼리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안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사문 고따마를 공격하는 사람이 안전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고따마시여, 타오르는 불덩이를 …… 치명적인 독을 가진 뱀을 공격하는 사람이 안전할 수는 있겠지만, 사문 고따마를 공격하는 사람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22]

 

단지 그의 설법 45년에, 붓다는 예상 외로 인도의 여러 바라문의 땅에 가장 크고 가장 견고한 불교 왕국의 공동체를 성립시켰다.

 

 

열반에 들다


붓다의 나이 79세 때, 그는 꼬살라국의 수도 사왓티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일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이 곧 그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는 자기 친척의 독립 왕국, 즉 꾸시나라말라 왕국에서 열반에 들기로 결심했다.

어떤 사람은 왜 그가 자신의 출생 왕국인 석가국으로 가지 않았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것은 석가 왕국이 꼬살라의 속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붓다께서 그곳에서 열반에 드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

비록 말라족은 자기의 직계 친척은 아닐지라도, 붓다와 같은 몽고계 인종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친척과 같았다.

말라족의 왕국은 또한 당시 16 왕국 가운데 하나였다.

더욱이 말라국의 수도 꾸시나라는 고대 일곱 명의 우주적 최고 지배자, 즉 전륜성왕(Cakravartin)들의 수도였으며, 마지막 전륜성왕인 수닷사나(Sudassana) 시대에는 "꾸사와띠(Kusavati)"로 불려졌다.[23]

 

<대선견왕경(大善見王經, Mahasudassana Sutta)>에 의하면, 붓다는 꾸사와띠의 수닷사나(Sudassana)라고 하는 전륜성왕이었다.[24]

따라서 이것은 고대의 자기 왕국에서 열반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난다 존자와 많은 비구들의 무리가 수행한 붓다는 사왓티에서 라자가하, 베살리, 꾸시나라로 순서대로 가기를 원했다.

이것은 매우 긴 여행이었으며, 그를 매우 힘들게 했다.

그는 사왓티에서 꾸시나라로 가는데 1년 이상이나 소모했다.

노인이었던 그가 걷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매우 강건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행했으며, 그리고 동시에 그는 그가 갔던 어디에서든지 승려들과 사람들에게 설법했다.

 

그가 라자가하에 있는 짓자꾸따(Gijjhakuta, 독수리 봉우리)라고 불리는 언덕 위에 머물고 있었을 때, 그는 승려들에게 화합으로 함께 모임, 화합으로 향상함, 승단의 의무를 화합으로 실행함 등과 같은 일곱 가지 조건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복지 조건들을 설했다.

일곱 가지 조건들이 스님들 사이에서 지속되고 있는 한, 스님들이 이러한 조건들을 잘 숙지하고 있는 한, 스님들은 쇠퇴하지 않고 번영할 것으로 기대된다.[25]

이것은 공동체의 복지와 생존을 위한 매우 유익한 교훈이었다.

 

마침내, 기원전 543년 비사카(Visakha)의 보름날에 붓다는 히란야와띠(Hiranyavati) 강기슭 위에 있는 말라족의 살라 숲에 도착했다.

그는 아난다에게 자신을 위해 두 그루의 살라 나무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가도록 침상을 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웠으며, 한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사자와(獅子臥, Sihaseyya)" 혹은 '사자의 드러누움' 이라고 불렸다.

 

그는 몹시 지쳐있었지만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류를 위해 일을 계속했다.

그는 자신이 열반에 든 뒤,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아난다에게 말했다.

그는 스님들에게 자기들이 의심스러운 것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자신에 의해 개종됐던 마지막 제자였던 유행자 숫밧다(Subbadda)에게 설법했다.

그는 자신을 친견하도록 말라족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자 보아라,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본래부터 모두 이루어진 것들은 쇠퇴한다.

정진함으로써 너희 자신들을 제도하라." [26]

 

이러한 것들이 온건한 방법에 의한 세계의 위대한 개혁자였으며, 위대한 혁명가였던 붓다의 마지막 말씀들이었다.

 

그는 사슴들 가운데 노닐던 한 마리의 사자처럼 일했고, 그가 죽었을 때도 또한 사자처럼 죽었다.

그의 생애는 행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 일하고 또 일했다.

그는 정복자, 우주의 군주 즉, 전륜성왕으로 죽었다.

 

 

마지막 승리


붓다께서 열반에 든 뒤, 아난다는 방금 붓다께서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붓다의 유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라족들에게 말했다.

꾸시나라의 말라족들은 그의 유해를 전륜성왕의 장례식과 같이 다루었다.

즉 유해를 새로운 옷으로 감싸고, 그런 다음 잘 빗질된 모직물과 면직물로 감쌌다.

그들은 붓다의 유해를 각기 다른 종류의 천으로 연속적으로 500번 감쌌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쇠로 만든 기름용기에 유해를 놓고, 또 다른 쇠로 만든 기름용기를 덮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온갖 종류의 향료를 뿌린 화장용 장작들을 쌓았고, 그 위에 세존의 유해를 놓았다.[27]

비사카의 보름날 이후 여덟 번째 날에 세존의 유해는 마꾸따받다나(Makutababdhana)에서 불탔다.

다비 후 말라족들은 자신들의 회의실에서 붓다의 사리들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그들은 7일 동안 온갖 수단을 다해 붓다께 영광과 존경의 예를 표했다.

 

붓다께서 열반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각지로 퍼져 나갔을 때, 이러한 뉴스를 듣고 난 뒤, 많은 왕국의 왕들과 족장들은 붓다의 사리 일부를 얻기 위해 말라족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28]

처음에 말라족들은 누구에게도 사리의 어느 부분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왕들과 족장들은 사리 때문에 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나(Dona)라는 바라문은 참석한 대중들에게 사리를 공평하게 여덟 몫으로 분배하자고 중재하고 조정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사리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용기를 요구했다.

그후 곧 삡팔리와나(Pipphalivana)모리야(Moriya)족이 붓다의 열반 소식을 듣고, 말라족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그들은 단지 타고남은 재만 가지고 갈 수 있었다. [29]

 

그들 모두는 붓다의 사리를 위해 성스러운 탑을 건립하고 찬양했다.

사리를 위해 여덟 개의 탑과 용기를 위해 1개, 재를 위해 1개의 탑이 세워졌다.[30]

따라서 인도의 많은 장소와 많은 왕국에 붓다의 사리탑이 있었다.

붓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사리와 재들조차 불교도와 당시 인도의 모든 계급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위대한 왕들과 많은 족장들은 붓다의 사리에 예배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승리, 죽음 뒤의 승리였다.

이제 그는 바라문의 개념에서 최고의 군주인 전륜성왕이었다.

그는 전륜성왕으로서 바라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인정을 받았던 것이었다.

 

만일 붓다께서 아난다가 주장했던 대로 라자가하나 사왓티와 같은 큰 도시에서 열반에 들었다면, 그의 유해는 전륜성왕과 같이 다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그의 사리도 다른 왕국들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자따삿뚜와 꼬살라의 왕과 같은 위대한 왕들은 분명히 누구와도 사리를 나누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그들을 대항하여 무모하게 싸우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식으로 붓다의 사리도 라자가하와 같은 큰 도시 한곳에만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계획 가운데 마지막이었지만 결코 가장 덜 중요한 계획은 아니었다.

누구나 전 불교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유물로서 붓다의 사리에 예배를 했다.

그는 비록 단 한번 평범한 왕이었지만, 우주적 군주, 즉 전륜성왕이었다. <끝>

 

 

Notes:
1) "Lakkhana Sutta", Sacred Books of the Buddhists, Vol. IV,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II, translated by T. W. Rhys Davids and C. A. F. Rhys Davids, London: Published for the Pali Text Society by Luzac & Company Ltd., 1975, p.138. [Return to Text]
2) "Agganna Sutta",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II. p.80. [Return to Text]
3) "Lakkhana Sutta",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II, p.137. [Return to Text]
4) "Ariyapariyesana Sutta(聖求經)", The Middle Length Sayings, Vol.I, tr. by I. B. Horner, London: Luza & Company Ltd., 1954, p.207; "Mahasaccaka Sutta(薩遮迦大經)", M.L.S. Vol.I,p.295; "Bodhirajakumara Sutta", M.L.S. Vol.II, p.281; "Sangarava Sutta(傷歌邏經)", M.L.S. Vol.II, p.401. [Return to Text]
5) "Ariyapariyesana Sutta", M.L.S. Vol.I, pp.207- 208; "Bodhirajakumara Sutta", M.L.S. Vol.II, p.281; "Sangarava Sutta", M.L.S. Vol.II, p.401; "Mahasaccaka Sutta", M.L.S. Vol.I, p.295. [Return to Text]
6) "Mahasihanada Sutta", M.L.S. Vol.I, pp.91-110. [Return to Text]
7) "Ariyapariyesana Sutta", M.L.S. Vol.I, pp.214-15; "Bodhirajakumara Sutta)", M.L.S. Vol.II, p.281. [Return to Text]
8) "Ariyapariyesana Sutta", M.L.S. Vol.I, pp.213; "Bodhirajakumara Sutta", M.L.S. Vol.II, p.281. [Return to Text]
9) "Ariyapariyesana Sutta", M.L.S. Vol.I, pp.214-15; "Bodhirajakumara Sutta", M.L.S. Vol.II, p.281; "Mahavagga", The Book of the Discipline. Vol.IV, tr. by I. B. Horner, London: Luzac & Company Ltd., 1951, pp.11-2. [Return to Text]
10) "Mahavagga", The Book of the Discipline. Vol.IV, pp.15-8. [Return to Text]
11) L. De La Valle Poussin, The Way to Nirvana,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7, p.53. [Return to Text]
12) "Mahavagga", The Book of the Discipline. Vol.IV, pp.19-21. [Return to Text]
13) Narada Thera, Buddhism in a Nutshell, Colombo: the Ceylon Daily News, Lake House, 1954, p.22. [Return to Text]
14) "Culakammavibhanga Sutta", M.L.S. Vol.III, pp.249 and 253. [Return to Text]
15) Attasalini, The Expositor Vol.I, tr. by Maung Tin, London: the Oxford University Press, 1920, p.88. <譯註: Attasalini는 팔리 論藏(Abhidhamma Pitaka)의 첫번째인 法集論(Dhammasangani)의 주석서이다.> [Return to Text]
16) Narada Thera, Buddhism in a Nutshell, pp.24-5. [Return to Text]
17) Graves Chamney Haughton, Manava-Dharma-Sastra, or The Institutes of Manu, London: Cox and Baylis, 1925, Vol.II, ch.VIII, p.286.[Return to Text]
18) "Mahavagga", The Book of the Discipline, Vol.IV, p.80. [Return to Text]
19) "Agganna Sutta",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V, tr. by T.W. Rhys Davids, London: Luzac & Company Ltd., 1921, p.80. [Return to Text]
20) "Mahaparinibbana Sutta",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I, p.108. [Return to Text]
21) "Agganna sutta",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V, p.94. [Return to Text]
22) "Culasaccaka Sutta" M.L.S. Vol.I, pp.289-90. [Return to Text]
23) "Mahaparinibbana Sutta",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I, p.108. [Return to Text]
24) "Mahasudassana Sutta",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I, pp.199-232. [Return to Text]
25) "Mahaparinibbana Sutta",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I, pp.78-85. [Return to Text]
26) "Mahaparinibbana Sutta",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II, p.178. [Return to Text]
27) Ibid. pp.182-83. [Return to Text]
28) Ibid., pp.187-90. [Return to Text]
29) Ibid. pp.189-90. [Return to Text]
30) Ibid. pp.190-91. [Return to Text]

 

출처 : 붓다의 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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