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54칙은 운문문언 화상을 참문한 스님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 운문 화상이 물었다. “서선사에서는 요즘 어떤 말(言句)이 있었는가?” 스님은 두 손을 펼쳤다. 운문 화상은 손바닥으로 한방 갈겼다. 스님은 말했다.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운문 화상이 곧장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스님은 말이 없었다. 운문 화상은 곧장 내리쳤다.
擧. 雲門問僧, 近離甚處. 僧云, 西禪. 門云, 西禪近日, 有何言句. 僧, 卻展兩手. 門, 打一掌. 僧云, 某甲話在. 門, 展兩手. 僧, 無語. 門, 便打.
운문문언(864~949) 화상은 <벽암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당말의 선승으로 달리 소개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하권, ‘감변(勘弁)’에 수록되어 있는데, 본문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화 내용은 같다. 하안거를 마치고 운수납자인 어떤 수행자가 운문 화상을 친견하러 왔다. 운문 화상은 그 스님에게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이것은 선지식이 처음 참문하는 수행자에게 던지는 상투적인 수단이다.
<벽암록> 제10칙과 제35칙에서도 목주와 앙산이 학인에게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처럼 선문답에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원오가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어부가 고기를 불러들이기 위해 수단방편으로 설치하는 도구이다.
즉 수행자의 안목과 식견을 살펴 측정해 보기 위해 던지는 한마디이다. 물의 깊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사용하고, 사람의 안목과 지혜를 파악하기 위해서 한마디 인사말(一句)를 던지는 것이다. 한마디의 말과 행동으로 벌써 상대방의 역량과 안목을 간취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학인을 맞이하는 일상적인 한마디지만 방심할 수 없는 말이다.
‘어디(甚處)서 왔는가?’라고 묻고 있지만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나 위치방향을 묻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소나 방향위치를 등지고는 물음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인사말이라고 할 수 없다. 학인이 장소로 대답하면 장소를 물은 것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고, 단순히 인사로 받아들이면 운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운문이 묻고 있는 ‘어디(甚處)서 왔는가?’라는 한마디에 장소와 학인의 본분을 묻는 두 가지 문제가 내포된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그 스님은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운문어록>에는 운문 화상이 “하안거는 어디서 보냈는가?”라는 질문에 “서선사에서 안거를 보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서선사는 소주(蘇州)에 있는 사찰인데, 이 스님은 광동성의 소주(韶州) 운문산까지 온 것이다. 당시 서선사에는 누가 주지로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등회원> 제4권에는 남전보원의 제자인 소주서선 화상이 행화를 펼친 곳인데, 운문 화상과 시대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회요>에는 서선 화상의 문하에서 수학한 스님이 뒤에 운문의 스승인 설봉선사를 참문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만, 운문 당시의 서선사의 선지식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운문 화상은 스님에게 “서선사의 주지 화상은 어떠한 법문(言句)으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즉 그대는 서선사에서 주지 화상의 법문을 듣고 체득한 경지는 어떠한지 제시해 보라는 말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두 손을 펴서 앞으로 내보였다. 손바닥을 펼쳐 보인 행동을 전수(展手)라고 하는데, 선승들의 선문답에 자주 등장한다.
<운문광록> 중권에도 “운문 화상은 어떠한 법문을 설하는가?”라고 질문하자, 그 스님은 ‘두 손을 펴서 양쪽으로 내렸다(展兩手垂兩邊)’라는 일단이 보인다. <조당집> 제19권, “‘불법의 궁극적인 일은 무엇입니가?’라는 질문에 선사는 양 손을 펼쳤다”라고 하는 것처럼, 양손을 펼쳐 보인 행동은 불법의 근본을 제시하여 보인 행동이다. 이것으로 불법의 근본정신을 하나도 감춤없이 모두 다 들어내 보였다는 의미이다.
또한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단이 보인다. “조주선사는 새로운 스님에게 ‘요즘 어디서 왔는가?”라고 질문했다. 그 스님은 “오대산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조주는 “문수를 친견했는가?”라고 질문했다. 스님은 손을 펴 보였다. 조주는 “그러한 흉내를 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문수는 누가 친견한 것인가?”라는 대화가 있다. 여기서도 자신이 바로 문수이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원행을 손을 펴 보인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다.
동산양개 화상이 학인들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조도(鳥道), 현로(玄路),전수(展手)의 세 가지 방편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조도(鳥道)는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며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경계에 걸림 없는 무심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고, 현로(玄路)는 일체의 차별 견해를 초월한 공적한 경계에 살도록 하며, 전수(展手)는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수(展手)는 수수(垂手)나 수자(垂慈)와 같은 말로 부모가 손을 내밀어 어린애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처럼,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행을 말한다.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에 저자거리에 나아가 중생을 구제하는 ‘입전수수(立廛垂手)’는 이러한 보살도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법화사상에서 말하는 수적(垂迹)은 부처나 보살이 중생교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신을 나툰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보살의 근본을 본지(本地)라고 하며 화신으로 몸을 나툰것을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고 한다.
그런데 스님이 손을 펴서 내보이자 운문 화상은 전광석화와 같이 손으로 그 스님을 한방 후려쳤다. 덕산의 방망이와 임제의 고함과 같이 운문의 안목은 일체의 분별심과 거짓 흉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원오는 그 스님이 남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살림살이에 대하여 도적의 살림이 파산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이러한 운문의 행동에 그 스님은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내 말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후려갈기면 어떻합니까’라는 강한 의사 표현이다. 그러자 운문 화상은 그 스님이 행동으로 보인 것처럼, 곧장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손을 펼쳐보인 행동은 같지만 그 스님은 남의 흉내를 낸 것이고, 운문 화상은 그 스님을 위해서 불법의 대의를 숨김없이 모두 다 행동으로 제시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 스님은 운문의 자비심과 행화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없었다. 그래서 운문화상은 그 스님을 본격적으로 곧장 내리치며 정신 차리도록 지시한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어떤 선지식을 모시고 불법을 공부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독자적인 지혜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하는 것이다. <전등록> 제29권에 ‘장부는 하늘을 찌르는 뜻이 있으니 여래가 행한 길도 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나 여래의 경지까지 초월한 독자적인 안목을 구족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호랑이의 머리와 꼬리를 일시에 잡으니” 운문화상의 선기와 방편적인 수단이 원만하고 뛰어남을 칭찬한 말이다. 처음 운문 화상이 곧장 한방 후리치리고, 나중에 운문 화상이 두 손을 내밀어 보이자, 그 스님이 대답하지 못하자 역시 또 한방 먹인 것은 정법의 안목으로 지도한 것이다. 운문의 교화방법은 전후와 수미(首尾)에 지혜의 방편법문으로 일관되게 대응하여 제시한 것을 읊고 있다.
“늠름한 위풍이 천하(四百州)에 떨쳤네.” 앞의 한 마디로 본칙 공안의 입장을 읊었지만, 다시 뜻을 이어서 운문에 대한 찬사를 연장하고 있다.
“운문화상의 덕망과 지혜의 선풍은 중국 천하 4백주(四百州)에 두루 하네. 아무리 중국 땅이 넓다고 할지라도 운문 화상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고 지극히 높게 찬탄하고 있다. 원오도 “온 천하 사람들의 말문을 막고 있네. 누구 한 사람 운문화상 앞에서 일언반구도 제시할 수가 없다.”고 찬탄하고 있다.
“도리어 묻노니 어쩌면 그렇게 험준한지 알 수 없어라.” 설두 화상이 학인에게 제시한 문제의 질문으로 운문 화상의 선기작용이 험준한 경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설두는 운문을 대신해서‘한번 용서해 준다’ 라고 했다.” 어떻게 운문의 험준한 선기를 파악해야 할 것인가? 잘 사유하고 사유해야 할 것이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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