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이르는 방편, 理入과 行入
故 강정중(시인)
이 글은 보리달마(菩提達摩)의 돈황본(敦煌本)인 『이입사행론장권자(二入四行論長券子)』의 전부를 강정중 시인이 작고 이전에 번역한 유고이다. 『이입사행론장권자』라는 명칭은 일본 선학자인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씨가 북경도서관에서 보리달마의 행적과 어록이 적힌 돈황본을 발견한 후 우리나라에 전래된 『선문촬요(禪門撮要)』와 대조하여 교정을 하고 붙인 이름이다. 번역에 관해서 말해두자면 직역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의역하였다.
달마의 소전(小傳)
법사는 서역(西域) 사람이다. 남천축국(南天竺國) 출신으로, 위대한 파라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투철한 두뇌를 갖추고 있어서 무엇을 배우든 즉시 통효(通曉)하였다. 열심히 대승(大乘)의 진리를 찾아, 속복을 벗고 흑의(黑衣)의 교단에 들어가서 성자의 혈통을 북돋우었다. 마음을 허적(虛寂)의 경지에 놓아두고, 속세의 말로를 내다보고 내외의 학문을 밝혔기에 그 덕망은 일세(一世)에 높아졌다.
변경의 나라에서 불교가 쇠퇴해가는 것을 유감으로 여겨, 자발적으로 멀리 바다와 산을 넘어서 우리의 한위(漢魏)의 땅에 와서 살게 되었다. 마음이 솔직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들 귀의를 하였지만 겉모습을 따지고 주의주장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즉시 비방을 하고 박해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자가 도육(道育)과 혜가(惠可) 뿐이었다. 이 두 수행자는 젊은 나이였지만 의지가 고매하고 다행히 법사를 만나게 되어 수년동안 제자로 배우면서 삼가 그 지도를 빌어 훌륭히 스승의 정신을 익힐 수 있었다. 법사는 그들의 성의에 감심을 하고 진실의 오의(奧義)를 전했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이 안심(安心)을 하여라”는 것은 벽관(壁觀)이고, “이와 같이 실행하여라”는 것은 네 가지의 행(行)이고, “이와 같이 사람들을 대하여라”는 것은 세간의 비방에서 몸을 지키는 것이고, “이와 같이 방편(方便)을 하여라”는 것은 이상의 어느 것에도 고집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그 유래만을 적어두고 자세한 것은 본문에 돌리겠다.
法師者 西域南天竺國人 是大婆羅門國王第三之子也. 神惠朗 聞皆曉晤. 志存摩訶衍道 故捨素從緇, 紹隆聖種. 冥心虛寂, 通鑒世事, 內外俱明, 德超世表. 悲悔邊隅正陵替, 遂能遠涉山海, 遊化漢魏. 亡心之士, 莫不歸信, 取相存見之流, 乃生譏謗. 于時唯有道育惠可, 此二沙門, 年雖後生, 俊志高遠, 幸逢法師, 事之數載, 虔恭諮啓, 善蒙師意. 法師感其精誠, 誨以眞道. 如是安心, 如是發行, 如是順物, 如是方便. 此是大乘安心之法, 令無錯謬. 如是安心者壁觀, 如是發行者四行, 如是順物者, 防護譏嫌, 如是方便者, 遣其不著. 此略序所由, 意在後文.
[해설]
여기 번역하는 보리달마의 행록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자료이다. 최고라는 의미가 말해주듯이 가장 원시적이니 윤색이나 가필이나 변용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저술자는 달마의 제자인 ‘담림(曇林)’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먼저 담림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두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담림이 “도육(道育)과 혜가(惠可)뿐이었다.
이 두 수행자는 젊은 나이였지만 의지가 고매하고”라고 자기보다도 나이가 낮은 제자의 수행에 관해서 이렇게 적어두고 있는 그 겸허한 태도를 보면 오히려 도육이나 혜가보다도 더 고매한 인품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담림은 필수(筆受)였다. 필수란 경론을 번역할 때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설하는 내용을 적합한 한문의 용어를 찾아내서 필기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전통사상뿐 아니라 토착신앙에까지도 조예가 깊고, 탁월한 지식이 없이는 필수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 담림은 보리유지(菩提流支)를 비롯해, 여러 법사들의 번역을 도우면서 북위(北魏)의 낙양을 중심으로 활약한 유능한 승려였다.
담림이 어떤 계기로 달마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등의 명저가 있고 『승만경(勝經)』의 연구자로서도 널리 명성을 떨친 사람이며, 길장(吉藏)의 『승만보굴(勝寶窟)』에도 “임법사(林法師)의 소(疏)”라는 내용이 인용될 정도로 당시의 불교학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보리달마약변대승입도사행(菩提達摩略辯大乘入道四行)』의 서(序)도 담림이 쓴 것이다. 이 책은 달마가 간결하게 가르친 사행(四行)을 적어놓은 것으로 수행자의 구체적인 생활태도에 관한 지침서이다.
이 책은 도선(道宣)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도 인용되고 있었으나 돈황본이 발견됨으로 해서 그 내용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도선의 손으로 엮어진 『속고승전』이라는 책이 우리나라의 고승들을 논할 때도 여기저기 전거로 인용되고 있기에 여기서 간략하게 그 내용을 적어두겠다.
『속고승전』은 양(梁)의 혜교(惠皎)가 엮은 『고승전(高僧傳)』을 송대(宋代)에 이어받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수(隨)·당(唐)의 불교에 공헌을 한 사람들의 전기를 집대성한 것으로 『중국불교통사』의 제2집이다.
이 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습선편(習禪篇)」이며 여기에는 좌선 실천자들의 기록 뿐 아니라 불교가 중국에 정착된 경위와 초조(初祖)들의 행적 등을 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공인의 통사이기에 정치적으로 윤색이 된 점도 많고 사실과 다른 점도 많다고 알려지고 있으니, 도선의 글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나의 참고자료로서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이다. 도선도 의학(義學) 출신인 담림에게 주목을 하고 특이한 위치에서 그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두 가지의 입장, 이(理)와 행(行)의 발견
본래 깨달음[悟]에 이르는 방편은 많다. 간략하자면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이입(理入)이고,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이입이라는 것은 경전에 의하여 대의(大意)를 아는 것이다. 심(心)을 갖고 있는 사람은 범부이든 성인이든 똑같이 동일하고 진실한 심(心)을 갖고 있다고 깊이 믿는 것이다.
다만 객진(客塵)으로 그저 덮여져 있기에 분명히 보이지 않을 따름인 것이다. 만약 헛된 생각을 버리고 진실에 돌아가서 올바르게 벽관(壁觀)을 지킨다면 자기나 타인이나, 범부나 성인이나 다 평등하고 평정심으로 되어서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고전(古典)의 가르침만을 따르지 않고 이미 이(理)와 명부(冥符)하여 다시는 분별을 일으키지도 않고, 고요히 무위(無爲)의 경지로 될 것이다.
이것이 이입이다.
다음 행입(行入)이라는 것은 네 가지의 생활지침으로 그밖의 것들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하면 제 일은 ‘보원행(報怨行)’이고, 제 이는 ‘수연행(隨緣行)’이고, 제 삼은 ‘무소구행(無所求行)’이고, 제 사는 ‘칭법행(稱法行)’이다.
夫入道多途, 要而言之, 不出二種. 一是理入, 二是行入. 理入者, 謂藉敎悟宗, 深信含生凡聖同一眞性, 但爲客塵妄覆, 不能顯了. 若也捨妄歸眞, 凝住壁觀, 自他凡聖等一, 堅住不移, 更不隨於文敎, 此卽與理冥符, 無有分別, 寂然無爲, 名之理入. 行入者, 所謂四行, 其余諸行, 悉入此行中. 何等爲四, 一者報怨行, 二者隨緣行, 三者無所求行, 四者稱法行.
[해설]
‘이입(理入)’이란 원효의 해석에 의하면 환정(還淨)의 원리, 즉 시각(始覺)의 절차를 따라서 본각(本覺)에 합일되는 것이다. 본각이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두고 하는 말이니 그 의미에서 원효는 환정이라 해석했다고 보인다. ‘행입(行入)’이란 원효의 해석에 의하면 환정을 위한 실천이다. 그러나 달마의 행입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수행자들의 일상적인 생활태도에 논점을 두고 있다.
대의(大意)는 불교의 ‘대의(大義)’, 불(佛)의 ‘대의’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으나 달마선의 입장에서 볼 때 불(佛)의 의(意)로 읽으면 좀 무리가 있다.
객진(客塵)은 심(心) 밖에서 들어오는 오염(汚染)을 말하며 명부(冥符)는 두 개가 딱 일치되는 것이다.
벽관(壁觀)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는 ‘각관(覺觀)’으로 되어 있다. 각관은 벽관보다도 더 오래된 용어이다. 원효는 마명(馬鳴)보살의 『기신론(起信論)』은 『금강삼매경』을 소의(所依)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고 『금강삼매경』에서 ‘각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달마의 『이입사행론』은 『금강삼매경』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먼저인가는 아직 결론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달마의 『이입사행론』이 불(佛)의 소설(所說)에 의한 것으로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 선술된 것이라는 학설도 있지만 그것도 하나의 학설에 불과하다. 그럼 담림의 글을 해설하겠다.
담림은 달마의 가르침을 ‘이입(理入)’과 ‘사행(四行)’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 요약은 거의 결정적으로 달마사상의 요체를 밝혀주는 것이 된다.
이입의 ‘이(理)’는 도리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이(理)는 일반용어로 말하면 섭리(攝理)의 ‘이(理)’이고, 불교용어로 말하면 여리(如理)의 ‘이(理)’이다. 즉 본래부터 산천초목도 갖추고 있는 근본적인 성(性)의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입이란 그러한 삼라만상의 진리 속으로 들어간다는 해석이 된다.
필자가 여기서 산천초목, 삼라만상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화엄사상이나, 더 나아가서는 의상이 우리나라의 화엄사상을 이리무애(理理無碍)에 둔 것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무애를 떠나서는 우리나라 특유의 선사상에도 또한 도달할 수 없다.
달마선에서 세우고 있는 행입(行入)은 실천적인 지침으로 아주 소박하다. 이 행입은 별도로 소승(小乘)의 선(禪)과 관련시켜서 논하기로 하고, 우선 용어에 대해서 적어두기로 하겠다.
이입이나 행입의 ‘입(入)’이란 교학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용어이고, 우리말로는 ‘들어간다’라고 밖에는 해석이 안 되지만, 본래의 뜻은 ‘관철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입열반(入涅槃)이란 ‘열반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열반을 관철하는 것’이니, 열반에도 머물러서 열반에 집착할 수도 없게 된다. 바로 이러한 입(入)인 것이다.
이입은 섭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섭리를 관철하는 것이니 섭리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행입은 행을 관철하는 것이니 행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순차적으로는 이입을 하여 행입에 들어가게 되지만, 이것은 용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理)와 행(行)은 일관(一貫)으로 관철되어야만 한다.
네 가지의 실천
어떤 것이 보원행(報怨行)인가. 너희들은 괴로움을 느끼면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전생부터 무한한 겁을 되풀이 하면서 근본을 잊고 말(末)만을 찾았고, 유(有)의 세계에 방황하면서 항상 원한을 품고, 어디까지나 피해를 받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다. 금생에서 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전생의 악업의 결과이다.
천신(天神)이나 악마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마음에 달갑게 인수(忍受)하고, 원망하는 말같은 것은 입밖에 꺼내지 말아야 한다.
경전에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개의치지 말아라. 왜냐하면 인내(忍耐)는 근본에 미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원행(報怨行)’이라고 부른다.
제 2의 수연행(隨緣行)은 중생1)에는 자아가 없고 어느 것이나 인연에 따른다. 고락(苦樂)도 똑같이 항시 연(緣)에 맡기고 산다. 설령 보람직한 결과나 영예를 얻었다 하더라도 모두 전생의 자기자신의 응보인 것이며, 지금 바로 그것을 얻었다 하지만, 연(緣)이 없어지면 무(無)인 것이다. 기뻐할 것도 없고, 좋든 나쁘든 인연의 차제(次第)로 심(心)에 증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쁨의 바람에도 동하지 않고 암묵으로 도(道)에 계당(契當)한다. 그래서 ‘수연행(隨緣行)’이라 부른다.
제 3의 무소구행(無所求行)은 세간의 사람은 언제나 자기자신을 잃고 어디서나 욕심만 부리니 이것이 구(求)함이라는 것이다. 지자(智者)는 진리에 눈을 뜨고 원리적으로 속(俗)과 정반대이며 마음을 무위(無爲)에 두고 몸은 운명대로 움직인다. 이렇게 하여 만유(萬有)는 공(空)으로 되고, 무언가 바랄 것도 없게 된다. 아름다운 공덕천여(功德天女)와 미운 암흑여(暗黑女)는 항시 붙어다니며 헤어지지 않는다.
불편없이 살아온 삼계(三界)는 마치 불붙은 가옥이다. 몸을 지닌 자는 모두 괴로워하고 어느 누구도 안심을 못한다. 여기까지 알게 되면 어떤 것에도 몽상은 그치고 구할 것도 없어진다.
경전에 “욕구가 있으면 누구든 괴로워하고, 욕구를 갖지 않을 때 사람은 즐기게 된다”라고 적혀 있다. 확실히 알게 되니 욕구를 갖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도인의 삶인 것이다.
제 4의 칭법행(稱法行)은 자기가 본래 청정하다는 도리, 이것을 법(法)으로 하는 것이다. 이 도리에 있어서는 어떠한 개별적인 입장도 모두 공하다. 어느 것에도 염착(染著)할 것도 없고 피차(彼此)를 구별할 수도 없다.
경전에 “법(法)에는 중생이라는 것이 없다. 중생이라는 오염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법(法)에는 개별적인 아(我)라는 것이 없다. 개별적인 아(我)라는 오염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고 적혀 있다.
지자(智者)는 만약 이 도리를 체득할 수가 있다면 법의 진실에 합당하게 행동을 하게 된다. 법은 무엇이든 아끼지 않음으로 신체와 생명 및 재산을 모아 보시를 하여도 마음으로 그러한 것들을 아끼지도 않고 자기자신과 상대자와 보시물, 이 세 가지가 본래 공함을 잘 이해하고 무엇이든 부탁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고, 오직 오염을 씻기 위해서 중생을 구제하면서도 그러한 내색을 보이지도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자리(自利)로써의 타리(他利)이며 그렇게 하여 개오(開悟)의 도(道)를 성취하는 것이다.
보시가 이러한 것이니 다른 다섯 가지도 똑같다. 번뇌의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서 육도(六度)2)를 행하면서 또한 행할 것도 없다. 이것을 칭법행(稱法行)이라 부른다.
云何報怨行. 修道行人, 若受苦時, 當自念言, 我從往昔, 無數劫中, 棄本從末, 流浪諸有, 多起怨憎, 違害無限. 今雖無犯. 是我宿殃惡業果熟, 非天非人所能見與. 甘心忍受, 都無怨訴. 經云, 逢苦不憂, 何以故, 識達本故. 此心生時, 與理相應, 體怨進道, 是故說言報怨行. 第二隨緣行者, 衆生無我, 竝緣業所轉, 苦樂齊受, 皆從緣生. 若得勝報榮譽等事, 是我過去宿因所感, 今方得之, 緣盡還無, 何喜之有. 得失從緣, 心無增減, 喜風不動, 冥順於道, 是故說言隨緣行. 第三無所求行者, 世人長迷, 處處貪著, 明之爲求. 智者悟眞, 理將俗反, 安心無爲, 形隨運轉, 万有斯空, 無所願樂. 功德黑闇, 常相受逐, 三界久居, 猶如火宅. 有身皆苦, 誰得而安. 了達此處, 故於諸有, 息想無求. 經云, 有求皆苦, 無求則樂. 判知無求眞爲道行. 第四稱法行者, 性淨之理, 目之爲法. 此理衆相斯空, 無染無著, 無此無彼. 經云, 法無衆生, 離衆生垢故. 法無有我, 離我垢故. 法無有我, 離我垢故.智者若能信解此理, 應當稱法而行. 法體無 Q, 於身命財, 行檀捨施, 心無놜惜. 達解三空, 不倚不著, 但爲去垢, 攝化衆生, 而不取相. 此爲自利, 復能利他, 譯能莊嚴菩提之道. 檀施旣爾, 余五亦然. 爲除妄想, 修行六度, 而無所行, 是爲稱法行.
[해설]
『유마경(維摩經)』의 「제자품(弟子品)」에 “법(法)에는 중생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중생은 번뇌가 무수히 생김을 의미한다.
달마의 사행(四行)과 소승에서 세운 사념처(四念處)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두기로 한다. 여기에 밝혀지는 사행은 달마사상의 실천덕목을 잘 요약한 것으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소승의 사념처와 대조되고 있다. 특히 사념처의 부정관(不淨觀)을 배제시키고 사행의 덕목 자체가 무엇인가를 수행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바꿔 말하면 즉 이입(理入)의 일상화라고 해석이 될 것이다.
후에 달마사상의 중추를 이어받게 되는 마조(馬祖)는 “도(道)는 수증(修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마조의 스승인 남악(南岳)의 회양(懷讓·677~744)도 “수증(修證)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개념은 벌써 초기의 이입사행(二入四行)의 구조 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마사상의 정법(正法)에 대한 자세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서 나타나는 일상적인 실천덕목이다. 담림의 시대적인 배려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태도가 담림 자신의 선관(禪觀)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달마사상과 정법은 표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달마선은 초창기에 경가(經家)로부터 박해를 받았다고 보여진다. 이 점은 일상적인 실천덕목으로써의 사행의 내용에서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최대의 덕목으로 인욕(忍辱)을 먼저 내세워서 세간의 비방으로부터 심신을 보호하는 순물(順物)을 설하고, 사물에 전혀 집착을 하지 않는 방편(方便)은 달마선의 필수적이고 불가결한 생활태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른바 신흥종교가 겪게 되는 고난을 달마선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반야를 종(宗)으로 하는 벽관(壁觀)은 잘못하면 스스로 구제될 수 없는 공견(空見)에 빠지게 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어록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는대로 공견을 엄하게 다스리고 있다. 달마선의 사행이 소승의 사념처와 다른 점은 앞에서 말한 순물(順物)과 방편으로 벽관 그 자체를 지켜나갔다는 일상적인 생활의 실천에서 나타나게 된다.
달마선은 바로 일상적인 생활 속에 도리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경가(經家)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게 된 것도 정법을 실천에서 찾는 달마의 선관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故 강정중씨는 193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시인이요, 불교사상가요, 디자이너로 다양한 삶을 살았다. 원효사상에 심취하여 원효의 『대승기신론해동소』와 『금강경삼매경론』, 원효 관련 논문 등을 다수 발표했다. 선사상에도 몰입하여 월간 『선문화』의 해외편집위원으로 선 관련 논문들을 발표해 오다 2000년 7월 작고했다. 이 글은 고 강정중씨의 유고임을 밝힌다.
1) 여기서 말하는 중생(衆生)은 덧없이 생멸하는 사물들을 가리킨다.
2)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知慧)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3443252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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