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나 ‘마하반야바라밀’ 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말은 [마하반야바라밀]에서는 [반야]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는 [보리]이다.
나머지는 [보리]나 [반야]의 성격이나 역할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아뇩다라’라고 하는 것은 [(無上), 최고 높다]는 뜻이다. ‘아’는 [없다(無)]는 뜻이고 ‘뇩다라’는 윗 상(上)을 뜻하는 것이므로 [무상(無上)]을 말하는 것이다.
‘삼먁’의 ‘삼’은 바를 [정(正)]이고 ‘먁’은 평등할 [등(等)]을 의미하고, ‘삼보리’는 바른 깨달음 즉 [정각(正覺)]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하는데 핵심은 보리이다.
보리란, 깨달음 즉 [(覺)]이다. 각[(覺)]이라는 것은 안다는 것인데 느낌을 가지고 환히 비추어서 보는 것이라 하여 [각조(覺照)], 또 [관조(觀照)]라 하여 보아서 살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지혜이고, 지혜란 아는 것이며, 아는 것이란, 반야인 것이다. 글자로는 보리, 반야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다.
반야라는 것은 지혜이므로 보고, 아는 것이고, 보리라고 하는 것도 깨달음이므로 알고 보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는 것이다. 바로 보면 다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보리를 정견(正見)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로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이다. 바라밀이라는 것이 해결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바로 보면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고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보지 못하고 사견(邢見)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견은 번뇌이고 정견은 반야보리이다.
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반야는 마하반야바라밀이다. 마하는 역시 무상처럼 크다는 뜻이다. 그렇게 큰 지혜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이다.
문제는 보리, 반야가 다 알고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알고 보는 것을 지견(知見)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보리가 불보리(佛菩提), 부처님의 반야를 불지혜(佛知慧), 부처님의 지견을 불지견(佛知見)이라 한다. 그렇다면 중생의 지견도 있을 것인데 그것을 중생심이라 한다. 중생이 알고 중생이 보는 세계이다.
중생이 어떻게 보고 있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보았기에 해탈을 얻었으며 중생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기에 문제가 계속 따라다니는가 하는 것이다.
예전에 농가에서는 소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었다. 농사에 이용하는 소를 농우(農牛)라고하는데, 그 거대한 소가 사람이 이끄는 데로 간다. 힘은 사람보다 훨씬 세지만 사람이 끄는 데로 가는 이유는 코에 구멍을 뚫어서 코뚜레를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허구한날 근심 걱정을 하는 것일까?
나이가 많건 나이가 적건 많이 배우던 적게 배우던 모두가 근심 걱정 속에 살고있는 것이다. 소가 힘이 약한 사람에게 끌려 다니는 것은 코뚜레 때문이고, 사람이 근심걱정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은 구하는 마음 때문이다.
중생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다. 구하는 마음만 놓으면 해탈이다. 나를 묶은 것은 구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 구하는 마음만 놓고 나면 어떤 구속도 없고 어떠한 고통도 없는 것이다.
구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해탈이다. 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주 쉬운 것이지만 중생에게는 너무 힘든 것이다. 그래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백 척 높이(약 33m)의 난간에서 한걸음 내딛는 것처럼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일체 구하는 마음을 다 놓는 상태를 이야기 한 것이다. 또 달마대사가 면벽수련을 했다고 하는데 벽을 보고 앉았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체 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목적(無目的)인생관, 탈목적(脫目的)인생관, 초목적(超目的)인생관이 생겨야만 벽을 향해 앉을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세상에서 구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냥 구하지 말라고 한다면 절대 되지 않는다. 바로 보아야 구하지 않을 수 있다. 금강경에 “약견 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였다.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본다는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모든 보이는 것은 오래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똑바로 보면 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상(相)이 상(相)이 아닌 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상을 상으로 보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또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하였는데 오온을 오온으로만 보고 오온이 개공인지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우주 만물의 실체가 불생불멸인데 그 불생불멸을 보지 못하고 만상차별로만 보기에 여기에서부터 사견과 정견이 나누어지게 된다.
정견으로 보면 구하는 마음이 있을 수가 없는데 정견으로 보지 못하고 사견으로 보게 되니까 구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생기고 그 구하는 마음 때문에 근심걱정이 하루도 떠날 날이 없는 것이다. 마치 소가 코뚜레에 끌려 다니듯이. 우물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사람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반가워서 그 사람을 만나려고 들어간다면 그는 사람은 만나지도 못하고 자칫 죽을 수도 있다. 보는 순간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물속에 보인 사람은 바로 자신의 그림자임을 보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상이 비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계속 구하지만 만족하지는 못하고 인생만 늙어간다. 이와 같이 구하는 마음이 속박이다. 따로 나를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다. 그림자가 보여도 나의 그림자이므로 구할 대상이 아님을 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좋게 보니 좋은 것이지 본래 좋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보이면, ‘내가 나쁘게 보니 나쁜 것이지 본래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보이면 그것이 정견이다. 그것이 반야이고 그것이 보리이다.
이것을 모르고 자꾸 좋게 보이는 것은 구하고 나쁘게 보이는 것은 버리려고 하는데, 버리려고 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구하는 것이다. 사람도 좋게 보이는 사람은 당기고 나쁘게 보이는 사람은 밀어내는데, 사람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나한테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쁠 수가 있고, 나한테 나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에게서 좋은 면이 나올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는 힘은 다 가지고 있는데, 그 힘을 어떻게 끌어내는가 하는 것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
원효스님께서는 기신론에서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라고 하셨다.
내가 마음을 어떻게 일으키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육조스님께서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두고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스님과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라 주장하는 두 스님에게 “불시풍동 불시번동 인자심동(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이라 하여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라 하신 것은 이 모든 것의 정답을 함축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보리이고 반야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제상이 비상인 것인데, 형상이 아닌데 형상인 것으로 잘못 보아서 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사견이고 어리석은 치이다. 잘못 봄으로 구하는 마음이 생기고 구하는 마음대로 안 되니까 분노가 생긴다. 이것이 중생심이다.
사견과 탐욕과 분노를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중생에게 고통이 끊이질 않는다. 우주만물을 보면서 자기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고 자기의 그림자이고 그것 자체가 불생불멸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를 알려면 분노가 얼마나 있는가를 보면 된다.
보통 때에는 화가 안 날 수도 있어 화를 안 내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분노가 일어날 때가 있다. 그것은 분노가 자기 자신도 모르는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는 것이다.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에 따라 화를 내는 성격도 다 다르다. 화가 나고 욕심이 났을 때 보통 싸우게 되는데 이것은 반야행으로 해결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는 관조와 반조를 하면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러한 욕심을 하고 깊이 생각하면 자신의 부질없는 탐욕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또 탐욕은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고 그 허망한 생각을 자세히 관조하면 허망한 생각이 없어지고 평정이 되찾아지게 된다. 그러면 미움도 고통도 없어지게 되고 해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천수경에서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이라 하였다. 자신의 본래 성격, 반야의 본래 성격, 보리의 본래 성격을 자꾸 돌아보면 내 마음이 맑아지면 세상이 맑아지고, 내 마음이 넉넉해지면 세상이 넉넉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행복의 근원을 자기의 마음을 맑히는 것으로부터 찾는 것이 반야바라밀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그런데 자기의 마음을 맑히지는 않고 계속 좋은 사람은 끌어당기고 미운 사람은 가서 싸우기만 하면 한날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다.
이것이 중생의 윤회인 것이다. 미운 사람과 싸우면 내 마음이 편해지지도 않는다. 미운 마음을 마음속에서 없애버려야만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점점 마음이 맑아지면 ‘세혹(細惑)이 영진(永盡)이라’ 미세한 삿된 의혹이 영원히 다 없어진다고 하였다.
중생들은 자기가 좋게 보아서 좋은 것이고 나쁘게 보아서 나쁜 것임을 알다가도 순간 잊고 그냥 좋은 것이고 또 나쁜 것이라 생각하고 화를 내게 되는 미혹함을 범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이 없이 항상 깨어있는 것을 상각(常覺), 대각(大覺), 정각(正覺) 이라 한다.
“원명(圓明)이 변조(遍照)”라 둥글고 끝없이 밝은 보리가 항상 두루 비추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눈이다. 불성을 알고 인과를 본다고 하는데, 불성이라는 것은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아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제상이 비상임을 알고 인과를 볼 수 있겠는가?
한 손으로 다른 쪽 손가락을 잡고 세게도 눌러보고 약하게도 눌러보라. 세게 누르면 아프기도 하고 살짝 누르면 아프지는 않지만 느끼기는 할 것이다.
느끼는 것은 아는 것이고 그것을 누가 느끼는가 그것이 불성이다. 반야이고 보리이다.
또 살짝 누르면 아프지 않지만 강하게 누르면 아픔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인과이다.
우리의 몸 자체가 태어나서 이제껏 살아온 인과이다. 또 유전자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전해온 인과이다. 그래서 삼세인과(三世因果)라 하여 과거의 인과 현세의 인과 미래의 인과가 있다.
자신의 몸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인과이다. 그 몸의 어디를 눌러도 다 감각이 있는데 그것이 반야이다. 반야는 없는 곳이 없다. 또 내가 보는 만큼 보는 것은 인과이다.
좋게 보면 좋게 보이는 것이 인과이고 나쁘게 보면 나쁘게 보이는 것은 인과이다.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것은 항상 잘 보는 것이다. 언제나 물가에 가서 물에 비친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임을 아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욕심이 일어나고 화가 날 때 그것을 구하고 싸우는 것은 윤회이며, 분노가 일어났을 때 분노를 일으키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 자기의 욕심에서 화가 났음을 알게 되고, 욕심을 돌아보면 허망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욕심은 허망한 것이다. 욕심의 결말은 허망한 것이다.
욕심의 대상은 현상에 있는 것이고 현상은 무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무엇을 구해놓아도 오래가는 것이 없다. 그런데 욕심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그것을 모르고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게 되면 불같이 화가 나게 된다.
탐욕과 분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는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잘못 보는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자꾸 닦고 자기의 마음을 자꾸 돌아보아서 자기탐욕과 자기분노로부터 점점 벗어나면 복 받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문도 잘 듣고, 예불도 잘 하고, 경전도 잘 읽고, 쓸데없는 일로 메여서 싸우지 말고, 나이가 들수록 놓고 살려고 노력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종범스님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429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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