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58칙 趙州分疎不下 - 조주화상과 지도무난(至道無難)의 함정

수선님 2018. 9. 2. 12:16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제58칙은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신심명(信心銘)>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는 설법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했는데, 요즘 사람(時人)은 이 말에 집착하여 함정에 빠진 것 아닙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한테 이와 똑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어떻다고 분명히 설명할 수가 없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是時人窟否. 州云, 僧有人問我,  直得五年分疎不下.

 

본칙의 주제도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인데, <벽암록>에 세 번째 등장한다.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이 말을 많이 인용하여 학인들에게 법문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 문하의 제자들과 선승들이 조주화상을 찾아와서 <신심명>의 대표적인 말을 인용하여 조주화상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여기도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찾아와서 “화상은 <신심명>에서 주장하는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여 법문을 하고 있는데, 요즘 사람이 이 말에 너무 빠져 집착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신심명>의 일절에 대해서는 몇 차례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스님의 질문에서 먼저 주의해야 할 말은 요즘 사람이라는 ‘시인(時人)’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요즘 사람, 혹은 당시의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사람을 지칭한 듯한 객관적인 표현이지만, 질문한 스님은 세간의 여러 일반적인 사람들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주화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조주화상 당신은 자구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란 말을 인용하여 법문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지도무난이라는 언구에 너무 집착하여 함정에 빠져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상당히 날카롭게 비꼬며 힐문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함정이라고 번역한 말은 과굴(窟)이라는 말인데, 새집, 혹은 구멍이라는 의미이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좁은 구멍에 빠지고, 이 말에 집착한 포로가 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벽암록> 제3칙의 수시에 “(선승들이 제시한) 하나의 선기작용이나 하나의 경계, 혹은 한마디의 말이나, 하나의 문구를 가지고 깨달음의 체득하려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면 멀쩡한 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구멍에 떨어지고 함정에 빠지게 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과굴(窟)은 깨달음의 경계나 언어 문자 등에 집착하여 벗어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번뇌나 생사, 보리와 열반, 미혹함과 깨달음, 그 어느 한쪽의 경계에 치우치거나 집착하면 모두 함정(窟)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원오는 “저울추를 밟으니 무쇠처럼 견고하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저울추에만 신경쓰다보니 올바르게 저울질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법수행에서 자타(自他)와 미오(迷悟),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등 어느 한쪽에만 집착하면 그 집착은 무쇠와 같이 단단하게 굳어버려서 진실된 불법수행을 할 수가 없게 된다고 평한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금으로 만든 쇠사슬에 속박된 것을 ‘금쇄난(金鎖難)’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금으로 만든 쇠사슬은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지만 여기에 속박되면 도리어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전등록(傳燈錄)> 제27권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무위무사인이 어째서 금의 쇠사슬에 얽힌 수난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조작심과 작위성이 없고, 번뇌 망념의 일 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하게 사는 사람이 금쇄난에 떨어진 것은 무위무사라는 조사선의 참된 정신을 잘못 이해하고 글자대로 생각하여 무위무사라는 언어문자에 집착하고 빠져서 무애자재한 자유와 지혜작용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황용혜남선사어록>에도 어떤 스님이 “무위무사인이 어째서 황금의 쇠사슬에 속박된 수난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말도 똑같은 입장이다. <벽암록> 제88칙에는 “금쇄(金鎖)의 현관(玄關)을 때려 부숴라!” 라는 말도 있다. 현관은 깨달음을 체득하는 지극한 관문인데, 깨달음의 경지에 집착하지 말고, 무애자재한 반야의 지혜를 전개하는 삼매경을 뚫고 나가도록 지시한 말이다.

 

그 밖에도 어떠한 깨달음의 경지에도 안주하거나 주착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강조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는 반야경전에서 많이 주장한 무주(無住), 무상(無相)의 구체적인 실천을 선불교의 입장에서 강조한 말이다. 질문한 스님은 조주화상 당신은 수시로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법문하고 있는데, 이 말에 속박되고 집착하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질문한 스님이 이 말의 함정에 빠져있으면서 남도 그렇게 함정에 빠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조주화상까지 의심하고 있다”고 꾸짖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을 향하여 “아! 그 일 말인가?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한테 그대와 똑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났지만 아직 뭐라고 분명히 설명 할 수가 없어 말없이 가만히 있네”라고 바보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조주화상은 ‘분소불하(分疎不下)’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엇이라고 분명하게 해명(分疎) 할 수가 없다(不下)고 말한 것이다. 원오는 조주의 이 말에 대하여 “질문에 밀려 낯을 붉히는 것보다 바른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착어하여 조주화상이 솔직하게 대답한 것을 칭찬하고 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는 생기있는 법문은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만이 설할 수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지도가 어려움이 없다는 언어문자로 지도의 경지를 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로 설명 할 수 없다는 언어도단(言語道斷)과 중생심으로 체득할 수 없다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도(至道)의 세계를 어떻게 5년이나 10년이 지났다고 언어 문자로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천년만년이 지나도 언어문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뭐라고 분명히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조주는 함정에서 그에게 대답한 것인가? 함정 밖에서 그에게 대답한 것인가?” 이 공안을 읽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에 집착하면 함정에 떨어진 것이고, 이 말을 놓아버린 사람은 천지와 하나되고, 일체의 만물을 초월하여 곳에 따라 주인이 되어 자유자재한 지혜로 살 수가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코끼리(象王)가 기지개를 피며 신음하고, 사자가 고함을 친다.” 이 말은 조주화상의 역량이 광대하고 또한 그의 지혜작용은 준엄한 모습을 형용하여 짐승의 왕이라고 하는 코끼리과 사자에 비유하고 있다. 빈신(嚬呻)이라는 말은 평소에 초원에 누워있는 짐승이 손과 발을 쭉 펴고 하품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코끼리가 초원에 누워있다가 크게 다리를 펴고 긴 코를 높이 쳐들어 움직이며, 길게 으르렁거리며 신음하는 것처럼, 조주화상은 태연한 얼굴로 5년이 지났는데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을 읊고 있다.

 

원오는 “부귀중의 부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도 결여된 것이 없는 복덕원만한 모습이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역량이 광대한 것은 코끼리와 같고, 지혜작용이 민첩하고 준엄한 것은 사자와 같다.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수많은 짐승이 항복하는 것처럼, 조주화상이 스님에게 대답한 말을 사자의 포효에 비교하여 읊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은 평범한 말로 대답한 것이기에 ‘맛도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맛도 없는 이 말에 무한의 자미(滋味)가 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조주의 말을 씹고 또 씹어서 묘미(妙味)를 찾아봐야 한다. 맛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단맛인가? 쓴 맛인가? 어떤 맛인가? 찾아서 사량분별하는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지도의 경지는 공간적으로 ‘남북동서’ 시방세계에 두루하며, 시간적으로 언제나 ‘태양(까마귀)과, 달(토끼)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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