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거스님 유식30송 > 제 15 강
제 22 송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그러므로 이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 더불어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 마치 저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 등의 성질(性質)과 같아서 이러한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보지 않음이 없지 않다.
전 송(頌)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에서 변계소집(遍計所執)을 멀리 여의면 원성실(圓成實)이 된다 하였고 본 송(頌)에서는 원성실이 의타기와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지도 않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의식(意識)은 5근(五根)과 5진(五塵)이 부합(符合)하여 생기(生起)하는 데 왜 의타기(依他起)라 하는가 의문할 수 있으나 심식(心識)에서는 외경(外境)인 5진과 내경(內境)인 5근 모두가 진아(眞我)가 아니고 타물(他物)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경과 내경이 부합하여 생긴 마음은 당초부터 진아(眞我)의 심(心)이 아니거늘 사량(思量)하고 분별하고 집착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계소집을 깨달아 멀리 여의면 본래 청정한 원성실(圓成實)의 마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제1구의 고(故)는 21송을 이어 본 송을 시작하기 때문에 소이(所以)의 뜻이다. 또 차여의타(此與依他)라고 한 차(此)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지칭한 것이다.
제2구에서 제1구의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로 더불어라고 한 송을 계승하여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은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말로서,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가 같은 것은 원성실(圓成實)은 성(性)이 되고 의타기(依他起)는 상(相)이 되므로 상(相)은 성(性)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성(性)이 없으면 상(相)이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만법은 원성실(圓成實)을 떠나서 따로 의타기(依他起)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의타기(依他起)의 법은 모두 원성실(圓成實)을 바탕으로 하여 나오기 때문에 같다고 한 것이다. 다르다고 한 것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아니며 의타기성(依他起性)도 또한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아니다. 원성실성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불멸하여 항상하지만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연생(緣生)이므로 무상(無常)하고 변멸(變滅)하여 원성실성과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한 것은 의타기법(依他起法) 중에 원성(圓性)의 진실성(眞實性)이 확실히 존재하고 원성실의 진공(眞空) 중에 역시 묘유(妙有)를 함유(含有)하여 만법을 생(生)할 수 있으므로 같다 하였고, 한편 원성실은 연기법(緣起法)이 아니고 생멸무상(生滅無常)이 아니므로 연기법에 의해서 존재하고 연기법이기 때문에 생멸하여 무상한 의타기와는 같지가 않아서 다르다고 한 것이다.
제3구에서 무상등성(無常等性)이라 한 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제행무상(諸行無常)·유루개고(有漏皆苦)·연기성공(緣起性空) 등 소승(小乘) 4법인(四法印)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4법인을 수행하여 의타기에 의해 생기(生起)한 모든 법이 무아(無我)임을 깨닫고 무상(無常)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4법인(四法印) 등을 수행하여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성취하고 원성실의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자리에서 저 의타기성의 무상(無常)을 깨닫지 않은 자가 없으므로 말구(末句)에서 원성실에서 의타기를 보지 않는 이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비불견(非不見)의 견(見)은 증견(證見)의 뜻으로 깨달음을 의미하고 원성실에서 의타기를 깨닫는다는 것은 곧 의타기를 멀리 여윈다는 뜻이다.
제 23 송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곧 이 3성(三性 : 遍計所執性, 依他起性, 圓成實性)에 의지하여 상(相), 생(生), 승의(勝義)라고 하는 3무성(三無性)이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 설(說) 하시기를 일체법이 무성(無性)이라 하신 것이다.
이 송(頌)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음을 확고히 드러낸 송(頌)이다. 중생이 나[我]라고 여기는 심식(心識)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이 3성(三性)의 시작이 경계를 의지하여 생기(生起)하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기 때문에 마음이란 경계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으므로 본송(本頌)에 3무성(三無性)이라 하여 본무자성(本無自性)임을 밝힌 것이다.
이는 마치 부싯돌이 부딪쳐야 불이 일어나듯 마음도 경계에 의해 일어나므로 3성(三性)의 마음이 본래 없다 한 것이다. 경계에 의해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 경계에 부동(不動)하고 계탁분별(計度分別)하지 않으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되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이루거니와 본래 없는 마음이 경계에 의해 일어난 것을 집착하여 내 마음이라 하고 사량(思量)하고 헤아리면 이것이 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어 윤회(輪廻)의 씨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3무성(三無性)이라면 마음은 왜 존재하는가. 그 근원을 규명해 보면 부싯돌이 부딪치지 않으면 불이 존재하지 않지만 부싯돌이 부딪치므로 불이 일어나듯 마음은 본래 나고 멸함이 없으나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인연에 의해 멸(滅)하므로 연생연멸(緣生緣滅)인 것이다. 자성(自性)에 생멸(生滅)이 없는 것을 본무자성(本無自性)이라 하고 연생연멸(緣生緣滅)하는 마음을 집착하고 계산하는 마음을 변계소집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이 3성(三性)의 소이연(所以然)이 연(緣)이요, 연(緣)은 실(實)이 아니므로 3무성임을 깨달음으로써 마음의 집착을 끊을 수 있고 경계에 부동할 수 있는 것이다.
3구(三句)의 밀의(密意)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부처님의 설법이 의미가 깊어 참된 뜻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밀의(密意)라 하고 둘째는 부처님의 뜻이 심히 깊어서 입지(入地)하지 못한 수행자가 헤아려 알 수 없기 때문에 밀의(密意)라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밀의로 설하셨다고 한 것은 경계에 의해 마음이 생기(生起)하고, 생기한 마음을 계산하여 집착하고, 생기한 마음을 계산하여 집착하지 않는 3성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마음의 실(實)인 줄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범부중생(凡夫衆生)을 위하여 3성이 모두 무자성(無自性)임을 설(說)하시어 일체만법의 성상(性相)이 모두 공(空)임을 드러내 주셨기 때문이다.
이는 3성을 세워 마음의 생처(生處)를 설(說)하시고 3무성을 세워 3성에 대한 집착을 파(破)해 주신 것이니 이것이 곧 밀의(密意)에 해당된다 하겠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마음의 주처(住處)를 3성으로써 밝히시고 범부가 곡해(曲解)하여 제법의 자성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할까 염려하셔서 3성의 자리가 본래 무성(無性)임을 설하시어 제법의 성상(性相)이 모두 공(空)임을 드러내 주신 것이다. 무성의 자리는 집착할래야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을 파(破)할래야 파할 것이 없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자리인 것이다.
-이글은 월간 '불광'지에 연재 된 혜거스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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