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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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님 2018. 9. 9. 14:12

 

 

1. 어느 때 어느 대상이든 현재에 있는 대상하나를
꼭 잡아서 알아차려야 한다.
이때 주의할 일은 있는 대상을 보고 상상하거나
없는 대상을 만들어서 잡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은 모두 현재가 아닌 망상에 속한다.
수레바퀴가 돌 때 닿는 점은 항상 한 지점이다.
그 닿는 지점이 현재다.
닿는 점 밑의 대상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대상을 잡는 것이 위타카(Vitaka)이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주로 어떤 대상을 잡아야 하는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사마타 수행은 모양을 보고, 위빠사나 수행은 느낌을 보는데,
다른 사람의 몸을 보아서는 느낌을 알 수가 없다.
느낌은 자신의 것에서만 나온다. 남의 마음을 알 수도 없고,
남의 몸의 느낌을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는 것이 주된 대상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면,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몸)과 정신(마음)의 성품을 다 알 수 있게 된다.

2. 대상을 잡았으면 그 대상의 모양과 느낌의 변화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모양이란 호흡 할 때는 수축과 팽창,
경행 할 때는 들어서 앞으로 밀고, 놓고, 서고, 돌고 하는 것 등이다.
처음에 사람을 보았을 때,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위타카에 속하고,
그 사람의 생김, 성별, 나이 등을 자세히 알아차리 것은
위짜라(Viccara)이다.
호흡을 볼 때도 단순한 움직임만을 알아차리는 것은
위타카이고,
호흡의 느낌, 강약, 장단, 시작과 끝, 의도, 호흡으로 인해 생긴
몸의 이완, 매 순간마다 새롭게 일어나는 느낌,
그리고 일어난 것은 소멸하고 새로이 시작된다는 것 등을
자세히 알아차리는 것이
위짜라이다.

3. 대상의 모양보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모양을 보는 것은 삔냐타(관념; Pinnyata)을 보는 것이며,
이것은 단순한 것이어서 마음이 쉽게 싫증을 느껴
다른 곳으로 달아난다.
반면에 느낌은 빠라마타(실제; Paramatha)를 보는 것이어서,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재미를 부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달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보는 힘이 약할 때는, 호흡의 경우 먼저 호흡의 움직임을 보고,
경행을 할 때는 발의 움직임을 보라.
그리고 나서 보는 힘이 생기면 느낌을 보라.
호흡이나, 경행을 할 때나, 일상의 동작에서 움직임의 모양을 보면
삔냐타이고,
움직임의 느낌을 보면
빠라마타이다.
처음에는 절대 욕심을 부리지 말고,
단 한가지라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보는 힘이 약할 때 많은 것을 보려고 하면, 더 볼 수가 없다.
단 한가지라도 확실히 보면, 차츰 많은 것들이 보인다.
욕심은 금물이다.
능력에 따라 보는 것이 가장 훌륭하게 보는 것이고
빠른 발전의 지름길이다.
또한 움직임을 볼 때, 계속 움직임을 보면서
Sati가 계속 될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움직임의 모양(삔냐타)의 중앙에 고리를 걸어서 놓치지 않게 하고,
그 움직임 안에 있는 움직임의 성품인 느낌을 잡아야 한다.
이것은 단계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호흡을 할 때 일어남의 느낌은 풍선에 바람을 넣는 것처럼
밀어주는 공기의 압력을 느껴라.
그리고 꺼짐은 툭 떨어지면서 바람이 빠지는 느낌을 느껴라.
경행을 할 때의 느낌은 발을 들 때 가벼운, 나아갈 때 가벼움,
놓을 때 무거움, 단단함, 부드러움, 차가움, 뜨거움... 등을 느껴라.

4. 호흡이나 경행을 할 때
시작과 끝을 따라가면서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때는 집중하는 힘이 필요하다.
사실 알아차린다는 것은, 호흡 하나를 볼 때,
일어나는 시작과 꺼지는 끝까지를 다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어남, 꺼짐 하나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마음이 산란한 상태이며 위리아(정진력; Viriya)가 부족한 상태이다.
이 때는 호흡을 보려고 하지말고,
그 순간의 마음(心)을 보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되도록 해 주어야 한다.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서는 호흡을 볼 수가 없고,
계속 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괴로운 마음(心)으로 좌선을 망치기도 한다.
호흡을 보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안보일 때는 안 보이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마음(心)을 보는 것이다.
또한 호흡을 볼 수 없을 때는, 절대 보려고 하지 말라.
애써 보려고 하면 긴장이 되어서 호흡은 더 숨는다.
그 때에는 마음(心)을 보거나 몸(전신)을 보거나 하여
자연스럽게 호흡이 나타나도록 한다.
이처럼 호흡 하나의 일어남, 사라짐, 시작과 끝조차도
완전히 보지 못하면서 Sati가 지속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때 호흡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를 따라가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위리야이다.
호흡을 볼 때 시작과 끝은 일어남과 사라짐이 아니다.
시작은 일어남이지만, 호흡의 끝은 사라짐이 아니고,
사라지고 난 뒤에 오는 정지된 상태인 휴지부가 끝이다.
그래서 호흡을 볼 때는 1.일어남 2. 사라짐 3. 휴지부의
3단계로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
호흡이 빠를 때는 일어남과 사라짐 밖에 못 보지만,
보통의 호흡에서는 반드시 휴지부(정지된 상태)를 알아차려야 한다.
망상이 들어오거나, 혼침에 빠지거나, 마음이 달아 날 때는
휴지부에서 Sati를 놓치고 쉬고 있다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5. 수행 중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의 의도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몸은 마음의 의도에 의해 움직인다.
팔, 다리, 몸을 움직이는 것, 심지어 눈썹 한번을 깜빡거리는 것도
마음의 의도 없이는 되지 않는다.
몸은 마음의 의도 없이 움직일 능력이 없다.
모든 몸의 움직임에는 의도가 있지만, 의도를 알아차리기란 쉽지가 않다.
습관적으로 빠르게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지된 동작에서 움직이려고 할 때부터,
하나씩 의도를 알아차려 나가야 한다.
경행 중 서 있다가 돌 때는 돌려는 의도를 알고 돌고,
돌고 나서 서 있다가 앞으로 나갈 때는 나가려는 의도를 알고 나가고,
이렇게 정지된 동작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
하나씩 그 의도를 알아차려 나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차츰 대상을 넓혀 나간다.
의도를 많이 보는 것은 Sati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중요한 노력이다.
의도를 많이 보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나고,
Sati가 끊기지 않아 삼매(Sammadhi)가 생긴다.
의도는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알 수가 있지,
산란하거나 분주한 마음일 때는 볼 수가 없다.
의도는 언제나 있는 것인데 항상 놓치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치는 대상이다.
그러나 보는 힘이 없는데 지나치게 의도를 보려는 것에
집착하면 오히려 장애가 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증장 되도록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몸은 마음에 의하여 움직이고,
마음은 다시 '안, 이, 비, 설, 신' 의 다섯 가지 물질과
'의(意)' 한가지의 마음에 의해 일어난다.
요약하면, 마음은 6근(根)의 물질과 마음에 의해 일어난다.
이처럼 물질과 마음의 관계가 모두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며
여기서 하나씩의 의도를 알아차려 나가야 한다.

6.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로 보아야 한다.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Sati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Sati 챙기기에도 급급한 상태에서는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는 Sati를 챙기고 있을 때,
다시 새로운 마음이 Sati를 챙기고 있는 그 대상을 보는 것이다.
아는 마음을 다시 보게 되면 대상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고
Sati가 끊어지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마음이 달아나 망상을 하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때 대상에 명칭을 붙이게 되면 아는 마음을 다시 알 수가 없다.
그때는 그럴 여유와 능력이 생기기 어렵다.
또한 아는 마음을 다시 아는 것은
항상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서 아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마음이 본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래서 무아(無我)를 볼 수 있다.

7. 이처럼 Sati가 이어지면 삼매(Samadhi)가 생긴다.
사마디는 고요함의 상태이다.
경행 중에도 Sati가 이어지면 순간 사마디가 생기며
이 사마디는 좌선에 좋은 영향을 준다.
사마디가 생겼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이는 고요함의 상태이기 때문에 거기에 빠져
Sati를 놓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마디는 Sati가 없으면 안된다.
고요해진 만큼 더 섬세한 Sati가 필요하다.
이 때 섬세한 Sati를 두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의 발전을 보기가 어렵다.
Sati 없는 사마디는 혼침에 빠지며
상상으로 만들어낸 대상에 가공의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더 섬세하고 강한 Sati를 두기 위해서
정진력(Viriya)가 필요하다.
Sati(알아차림)는 많을수록 좋고 다다익선이다.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 Sati이다.

그러나 사마디가 지나치면 혼침에 빠지고
또 위리야가 지나치면 마음이 산란해진다.
또한 믿음이 지나치면, 맹목적 신앙에 빠진다.
그래서 Sati 외는 모든 것이 알맞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특히 위리야(Viriya)가 지나치면 마음이 들뜨고 산란해져서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
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치면 마음이 앞서고
바라는 마음(心)이 생겨서 몸이 긴장한다.
몸이 긴장하면 아무리 대상을 보려고 해도
대상에 마음이 붙지가 않는다.
그래서 위빠싸나수행을 할 때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도를 권장하지 않는다.
일례로 자비관을 하는 것조차도 크게 권장하지 않는다.
언제나 알아차리는 것만이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양을 할 때나 절을 할 대 조차도 오직 알아차리는 것만을 말하지,
특별한 기도나 존경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믿음은 지혜가 균형을 받쳐 주어야 한다.
믿음과 지혜가 서로 균형을 잡고,
그 중간에 Sati, Samadhi, Viriya가 항상 조화를 이루어야
이상적인 상태의 수행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수행을 해 나가면 Piti(환희심)가 생긴다.
Piti가 일어날 때 그 환희심으로 수행이 절정에 이른 것으로
오해하는 수가 많다.
그때 특별한 능력도 생길 수 있지만.
Vipassana수행에서는 낮은 단계의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는 환희심이 생기고,
빛이 나타나고 하는데,
이 때의 빛은 삔냐타일 뿐이다.
Piti가 올 때마다 알아차려서 빠지지 않으면
그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8. 그리고 다시 어려운 과정을 거쳐 정진을 하면
행복감(Sukha)이 생긴다.
좋고 행복한 것도 알아차려야 할 대상일 뿐이다.
행복이 목표는 아니다.
닙빠나(Nibbana)가 목표다.
행복하기 위해 집착을 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있다.
행복은 불행을 잉태한다.
그래서 욕심(Lobha)이 분노(Dosa)를 일으킨다.
Dosa 는 Lobha 때문에 일어난다.
Dosa의 자연적 성품(본질)이 그렇다.
9. 이런 상태를 알아차려서 수행을 계속 하면 한군데 집중하여,
대상을 아는 마음만 있는 에까가타(심일경성; Ekagata) 상태가 된다.
이것을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사마디를 일념삼매(一念三昧)라고 표현하나
사마디는 고요함이고, 에까가타가 이에 해당한다.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을 때, 너도 나도 남도 없고,
대상의 본질을 알게 되어, 지혜가 생긴다.
대상과 아는 마음(心)만 있는 상태가 빠라마타(Paramatha)의 상태이며,
이 때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특성을 알게 되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삼법인(三法印)을 보게 되는 지혜가 난다.
자신의 물질과 마음을 보지 않고,
다른 대상의 성품을 보았을 때는 삔냐타가 섞인 빠라마타이다.
끝까지 오직 보아야 할 대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다.

10. Sati를 챙기기 위해서는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어야 한다.
수행자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쉬움과 회한, 그리움 같은 것들 뿐이다.
미래는 아무리 계획해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자신의 마음(心) 조차도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현재를 잊고, 미래를 구상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다.
오직 현재의 Sati를 챙기는 것만이 가장 진실한 대상이다.

11. 수행자는 정직해야 된다.

마음이 자신을 속이는 것에 넘어가지 말고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을 볼 때 자신의 마음이 추악해서 도저히 볼 수가 없고,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정직하게 그 상황을 피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때의 그 마음은 자신의 마음(心)이 아니고, 욕심(Dosa)의 마음이다.
그 마음(心)의 주인공은 Dosa이다. '나'는 없기 때문이다.
그 Dosa의 마음(心)도 순간에 일어났다가 순간 사라진다.
마음은 내가 주인이 아니고 매 순간 일어나는 그 순간이 주인이다.
그러니 그것이 나의 마음(心)이겠는가? 인터뷰를 할 때도
보지 않는 것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은 아만심이며,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 수행하는데, 왜 또 거짓을 꾸며내야 하는가?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마음(心)의 속성이다.
잘 보이려고 하지 마라. 그때 그때 그것을 알아차려야
참으로 진실한 수행자가 된다.
정직하지 못한 것은 더 정직해질 수 있는 기회이다.
그래서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12. 또한 마음가짐을 긍정적으로 가져야 한다.
온갖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유혹이 있어도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야한다.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한 순간에 바뀌고 만다.
한 생각은 나의 세상을 바꾸고, 나의 인생을 바꾸고,
오늘 하루를 바꾸고, 한 순간을 바꾸어 버린다.
내가 바뀌면 가족도 바뀌고 사회도 바뀐다.
부정적인 견해에서 긍정적인 견해로 바뀌면
이미 절반은 좋아진 것이다.
그쪽으로 행동만 하면 된다.
매 순간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마음(心)을 단순하게 가져야 한다.
진리는 간단 명료하고, 단순하고, 명쾌하다.
복잡한 것은 삔냐타고 진리가 아니다.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라.
꿰뚫어 보는 힘은 단순한 것으로부터 온다.

13.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한다.
확신 없는 믿음은 맹목적 신앙에 빠지지만
확신에 찬 믿음은 위리야를 생기게 한다.
Sati가 끊기지 않기 위해서는 위리야가 필요하지만,
위리야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어야 생기게 된다.
확신에 찬 믿음을 갖기 위해 부처님 법(法)을 알 필요가 있고,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해 보는 것이 수행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정기적으로 법문을 듣는다.
법문(法門)을 들으면 신심이 나서 정진력(위리야; Viriya)가 절로 생긴다.

14. 언제나 편안한 마음상태가 되도록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마음가짐이 바른가 잘못 됐는가를 보고,
긴장했는가? 괴로워하고 있는가? 탐심을 가지고 있는가?
화를 내는가? 미워하고 있는가? 를 보아야 한다.
수행을 할 때는
어떻게 되게 하려고 하지말고 없애려 하지말고,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기본자세여야 한다.
바로 이것만이 해답이라는 것이
붓다가 우리에게 전한 가장 고귀한 진리이다.
되게 하려고 하거나 없애려고 하면,
마음(心)이 평정을 잃는다.
평정심(Upekkha)의 상태가 아니고서는 궁극적 해탈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보아도 본 것을 알아릴뿐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들어도 들은 것을 알아릴뿐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말하는 것도 알아차릴뿐 시비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수행자는 때로는 시체처럼 지내야 한다.
시체는 자존심도 없고, '나'라고 하는 아상도 없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수행에서 가장 걸림돌이다.
문제가 일어난 곳에는 항상 '나'라고 하는 것이
자리잡고 분란을 일으킨다.
남의 허물은 내가 평가할 일이 아니다.
내가 알아차려야 할 대상일 뿐이다.

15. Dukha Vedana(고통스러운 느낌)를 볼 때는
웨다나(Vedana)의 참 성품을 보아야한다.
고통스러운 느낌을 보는 방법으로는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을 때
① 느낌(Vedana)으로 인해 생긴 못 견디는 마음(心)을 보는 방법과
② Vedana 자체를 직접 알아차리는 방법과
③ 경미하거나 너무 오래 계속되는 Vedana일 경우에는
그때 호흡을 보는 방법, 3가지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 선택을 해야겠지만,
고통스러운 느낌이 더욱 커져서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못 견디는 마음(心)을 보는 것이 가장 수승한 방법이다.
이때 마음(心)을 보는 것은,
물질(몸)은 아파도 마음(心)은 아프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 준다.
또한 아픈 것을 아는 마음(心)을 본다는 것은
아픈 것 자체를 객관화시키고,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 준다.
아픈 것을 아는 것은 Sati로 현재이지만,
다시 아픈 것을 아는 마음(心)을 보면
먼저 있던 Sati가 뒤에 생긴 마음(心)을 보는 Sati에 의해
과거의 일로 전환된다.
마음(心)은 한순간에 하나밖에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아픈 것을 아픈 것을 아는 마음(心)이 밀어내고
새로운 관찰자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통증이 경감된다.
통증을 아는 마음(心)이 새로 생겨 통증을 밀어내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증의 경감에 있지 않고,
병이 났을 때 둑카 웨다나 (고통스러운 느낌)가 생겼을 때,
수행자의 임무는 그 느낌으로 인해 물질과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 반응이란, 웨다나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못 견뎌하는가? 없애려고 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만이 수행자의 진정한 임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설령 없애려고 했을 때도 그것이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도 지혜다.
없애려고 하면 탐심이 나서 더 긴장하게 되고 열이 더 나게 된다.
그래서 통증은 더 증가한다.
그러고도 없어지지 않으면 화(Dosa)가 나서
부글부글 끓는 마음(心)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럴수록 웨다나(Vedana)는 더 강하게 기승을 부린다.
번뇌는 탐심과 진심을 영양분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더욱 번뇌만 커진다.
툭카 웨다나의 참 성품은 무엇인가? 둑카 웨다나가 일어 났을 때
무엇을 보아야 되는가?
둑카 웨다나는 사람이 살아있고 몸(물질)을 가지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고통스러운 느낌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의 현상일 뿐이라는 것.
고통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
물질의 고통은 물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마음과는 상관없다는 것.
고통은 옮겨다니지 않고 각 세포마다 연속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옮겨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고통은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고통을 일으키는 나도 없고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나도 없고
고통을 겪고 있는 나도 없다는 것,
단지 고통은 고통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
좌선 중(中)에 생기는 고통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피가 통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
바로 이런 고통을 통해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유익한 기회라는 것,
등등을 알아야한다.
고통스러운 느낌을 잘 알아차리면,
고통스러운 느낌 위빠사나를 하는 것으로 매우 유익한 일이 많다.
우선 고통스러운 느낌을 통해 닙바나를 얻을 수 있고,
죽기 전에 몹시 고통스러운 상황을 알아차려 극복할 수 있고,
혼침을 막을 수 있고,
인내심을 키울 수 있다.
수행자는 괴로운 느낌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수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유익한 경우가 많다.

16. Sukha Vedana (행복한 느낌)가 생길 때도
Sukha Vedana의 참 성품을 보아야 한다.
행복한 느낌이 생기면 기분이 좋고,
기쁜 마음(心)이 들 때 집착이 생기고 아만심이 생긴다.
그때 즐거움에 빠져 Sati를 놓치게 되어 망상에 빠지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혼침에 빠진다.
피곤할 때 오는 혼침은 사전에 알아차릴 수 있는데,
기분 좋을 때 오는 혼침은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온다.
수카 웨다나가 생겼을 때는 이처럼 Sati가 약해진다.
둑카 웨다나의 화내는 마음(心)은 알기가 쉽지만,
수카 웨다나의 기분 좋은 마음(心)은 알기가 어렵다.
마음(心)이 풀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심과 아만심이 생기는 지도 모르고
Sati를 놓치는 것도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기쁜 느낌이 있을 때
바로 기뻐하는 마음(心)을 알아 차려야 한다.
기분이 좋고 기쁘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그 시간 수행은 끝이 나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수카 웨다나도 알아차려야 할 중요한 대상이다.

17. 무엇도 바라지말고(Alobha) 다 받아들이여,
일어나는 대로 다 알아차리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18. 수행자는
①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화내는 것을 참고,
욕심부리는 것을 참고,
남을 평가하는 것을 참아야 한다.
미워하거나, 피하거나, 싫어하거나, 화내는 것이
모두 진심(Dosa)에 속하는 것이다.
가려움과 순간의 고통도 참아야 한다.
②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1시간을 참고 견디면 하루가 이롭고,
하루를 참고 견디며 한 달이 이롭다.
한 달이 이로우면 일년(一年) 일생(一生)이 이롭다.
인내는 닙바나를 가져온다.


③ 열정이 있어야 한다.
계속 끊임없이 노력하고 스님(사야도; Sayado)의 말씀을 응용하여
자기 것으로 개발해야한다.
수행은 모두 같을 수가 없다. 같은 것도 있지만,
자신의 특성에 따라 본인이 노력하여 자기 테크닉을 개발해야 된다.
자기 테크닉을 개발한다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자기 방법을 스스로 찾는 것이다.
크고 작은 이러한 테크닉은 무수하다.
이것은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자제한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참는 것으로,
좋거나 나쁘거나에 따라가지 않고 평등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아플 때도 참는 것이 자제력이다.
인내심을 갖는 다는 것은 지구력을 가지고 계속 참아 가는 것이다.
자제력과 인내심은 탐심(Lobha) 진심(Dosa)이 일어나지 않게 참는 것이다.
열정이 있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 열정은 끈질기게 계속시키는 마음(心)이다.
열정은 위리야(정진력)를 말한다.
자제력이 있어서 인내심이 생기고,
인내심이 있어서 열정이 계속될 수 있다.
자제력과 인내심과 열정이 있는 수행자(요기; Yogi)는
아무런 문제없이 수행을 할 수 있고 빠르게 닙바나에 이른다.
그러나 이 셋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 없고
결코 닙바나에 이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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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자모임광장
글쓴이 : 일 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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