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만법의 근본’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우리의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이라고 했다. 세상의 온갖 일과 물건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저런 인식과 판단을 한다. 그리고 그 인식과 판단을 철썩 같이 옳다고 믿는다. 물론 인식과 판단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새로운 인식과 판단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쪽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자기의 인식과 판단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대상의 진상이 워낙 그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인식되고 판단될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두고 이러저러하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내용은 그 대상의 진상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우리가 사물의 진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기실 우리의 그런 생각을 사물에다가 덮어씌운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것을 일컬어 망상(妄想), 망념(妄念)이라고 한다. 왜 우리는 사물의 진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마음대로 왜곡해서 지어내고 그 망상, 망념을 사물에다가 덮어씌우고는 바로 그것이 사물의 진상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가? 아집(我執) 때문이라는 것이 불교의 진단이다. 아집은 이기적인 탐욕을 수반한다. 아집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기본인 무아(無我)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태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아집과 탐욕의 필터를 통하여 보고 인식하며 판단하기 때문에 사물의 진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하고 지어낸다는 얘기이다. 마치 사진기 렌즈 앞에 색깔이 있는 필터를 끼우면 무엇을 찍더라도 그 색깔로 채색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무엇을 보든지, 아무리 이른바 객관적으로 본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아집과 탐욕이라는 필터를 가지고 채색해버린다. 그러면, 그런 식으로 왜곡되지 않은 진상 그대로의 사물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저 산이, 저 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이익이 되는가 하는 시각에 보이는 그런 모습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어떤 것이라는 말인가? 내 눈이 아집과 탐욕으로 뒤틀려서 잘못 보고 있는 것이지, 저 산이 사실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런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이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다. 여기에서 눈이라고 하는 것, 본다고 하는 표현은 이를테면 정신의 눈이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가 왜곡되지 않은 정신의 눈으로 보아야 할 사물의 진상은 불이(不二)요 연기(緣起)라는 것이 불교의 진단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여기에서 지어낸다 함은 모든 것의 의미를 우리가 규정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이를테면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우선 나쁜 면부터 살펴보자.
‘나’라는 것이 절대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로 있다고 여기고, 따라서 나와 나 아닌 것을 분별하는 구도를 가지고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태도이다. 그러한 ‘나’는 당연히 그 개체로서의 나를 중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가늠하지, 나 아닌 것들의 입장에서, 또는 세상 전체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개체로서의 나의 입장과 이익을 고집하고 추구하는 운동력이 거기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것이 탐욕이다. 이기적(利己的)인, 즉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는 탐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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