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48. 교외별전(敎外別傳) 8

수선님 2018. 9. 23. 11:55


불교, 적어도 대승불교의 세계관, 존재론에서는 불일불이(不一不二, 不一不異)라는 역설이 핵심 명제이다.
 
그 불이라는 개념은 워낙 근본적인 역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인 사변으로는 온전하게 헤아리고 설명할 수가 없다. 그 개념으로 표현하려는 세상의 진상은 불가사의(不可思議)에 해당한다. 언어문자로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역설적인 개념으로, 더욱이 이중부정(二重否定)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이라는 개념은 고대인도 종교사상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불교의 불이 개념은 근본 교리의 무아(無我), 연기(緣起), 중도(中道) 교의를 대승불교 사상에서 확장하고 변용한 명제를 담고 있다.

나가르주나(용수龍樹)라고, 공(空) 사상을 천명(闡明)한 대승불교 사상가가 있다. 흔히 유식(唯識)사상과 중관(中觀)사상을 대승불교 사상의 두 기둥이라고 하는데, 유식사상은 우리의 의식에서 무명(無明)이 일어나고 작동되는 메커니즘을 의식의 심층구조에 대한 분석과 함께 밝혀내었고 중관사상은 공(空)의 이치를 치밀하게 논증하였다.

 

그 가운데 중관사상의 태두가 나가르주나이다. 그의 저술인 <중론(中論)>에 유명한 팔불중도(八不中道), 즉 여덟 가지 부정으로 중도를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불일불이’도 여기에 들어있다. 모든 것이 생겨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불생불멸不生不滅), 없는 것도 아니고 실존하는 것도 아니며(부단불상不斷不常),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불래불거不來不去),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불일불이不一不異)는 것이 여덟 가지 부정이다. 그것이 연기(緣起)의 이치라는 얘기이다. 보다시피 여덟 가지 부정이 둘씩 짝을 지어 네 개의 역설적인 명제를 이룩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 공(空)의 이치를 바탕으로 중도(中道)를 표현하는 명제이다. 연기, 중도, 공의 이치는 굳이 말로 담아내자면 그렇게 이중부정의 역설로나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는 역설 내지 모순이라 여기지만 그 역설 내지 모순을 그대로 온전하게 담고 있는 것이 연기, 중도, 공의 이치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저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개체에 초점을 두고 보면―달리 말해 유아(有我), 분별(分別)의 입장에서 보면―모든 것이 나고 죽거나 오고 가는 존재로 보이지만, 전체 내지 보편의 장에서 보면―분별을 넘어 무아(無我) 또는 연기의 장에서 보면―그런 게 아니라는 식의 궁색한 설명이나 갖다 붙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치는 궁극적으로 워낙 설명이나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과 언어습관은 늘 논리적인 설명과 이해를 요구하지만, 역설과 모순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더 이상 역설이 아니요 모순이 아닌 것처럼 왜곡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하면 갈증이 풀리고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진상에서 멀어져버리고 만다. 그 역설과 모순을 진정으로 푸는 길은 생각으로 헤아리는 데(사의思議)에 있지 않고 논리적인 설명과 이해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언어문자와 그 분별의 틀을 가지고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할 때에는 오히려 진상을 찌그러뜨리는 결과만 낳는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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