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진상은 불이(不二)라는 개념에 담겨 표명된다. 그저 모든 개체들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있다고만 하면, 일단 개체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각 개체가 고유하고 독자적인 존재이되 다른 개체들과 관계도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보통 누구와 누가 관계가 있다고 하면, 그처럼 각 개인이 고유한 독자적 존재임을 이미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고유한 독자적 존재 사이에서 부모와 자식이거나 친구거나 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강의시간에 무아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게 곰곰 생각해보면 다 남에게서 받은 것이요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다. 이 몸부터 그렇고 지식과 사고방식도, 취향도 따지고 보면 내게서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지식도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이요, 직접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도 결국 체험의 대상과 교섭하면서 갖게 된 지식이다.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볼 때, 정말로 내게 고유하고 독자적인 것이 뭐가 있나? 모두들 갸우뚱하다가, 한 학생이 대답하였다. 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다던데요. 내가 대답하였다. 지문의 모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지문이라는 현상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문도 내게 고유하고 독자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요즘 방송되는 한 공익광고가 재미있다고 느꼈다. 자동차 정지선을 지키자는 캠페인인데,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혼자만 산다면 정지선이라는 것도 필요 없으리라는 내용이다. 그렇다. 혼자만 존재한다면 정지선과 차선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그런데, “혼자만 존재한다면”이라는 조건은 사실상 전혀 현실성이 없는 조건이다. 불교에서도 그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개체들의 고유한 독자적 개체성은 부인한다. 무아의 교리가 그런 뜻이고 대승불교에서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교리가 또 같은 뜻이다. 엄연히 개체이면서도 개별자가 아니라는 그 사연, 달리 말하자면 불일불이(不一不二)라는 역설적인 진상은 불가사의(不可思議)에 해당한다. 이리저리 생각으로 따지고 헤아려서 가늠하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언어문자에 온전히 담아서 드러내거나 설명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말에 담으면 그 즉시 역설의 어느 한 쪽이 찌그러지고 역설이 죽어버린다. 선종에서 언어문자를 지극히 불신하면서 교외별전을 외치는 이유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삼라만상이 다 독자적인 개별자로 보이지만 기실은 그렇지만은 않고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있다는 얘기이다. 대승불교 사상에서는 연기법(緣起法)이라는 개념을 그런 진상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모든 것이 연기적 존재라고 할 때에는 고유한 독자적 개체성을 넘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는 존재 양상을 의미한다. 무아(無我), 즉 고유하고 독자적인 개체성은 없음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이라는 것이 개체의 존재 그 자체를 부인한다고는 할 수 없다. 세상의 삼라만상은 다 엄연한 개체로 존재한다. 다만, 모든 개체는 개체로 보일 뿐이고 기실은 그 존재 전체가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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