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50. 교외별전(敎外別傳) 10

수선님 2018. 9. 30. 12:46


우리가 일상대화에서 방편이라 하면 어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수단을 말한다.

 

특히,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정식의 수단이 아니라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손쉽게, 또는 임시로, 또는 할 수 없이 취하는 수단을 뜻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좀 부정적인 의미를 깔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결혼을 출세의 방편으로 삼는다’거나, ‘그 사람은 워낙 시인인데, 생계의 방편으로 출판사에 다니고 있을 뿐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아예 임시방편이라는 말도 있다. 어떤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 정식으로 취할 방도는 따로 있지만 그때의 특별한 사정 때문에 일시적으로, 또는 차선책으로 취하는 수단이라는 뜻이겠다.

 

불교에서 방편의 대표적인 예로 흔히 언급되는 것은 불타는 집에서 아이들을 구해내는 방법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비유품(譬喩品)에 보면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는 말이 나온다. 삼계란 세 가지 세계라는 말이고, 이것은 중생이 살아가는 세 가지 종류의 세계를 가리킨다. 욕망에 매어서 사는 욕계(欲界), 욕망은 넘어섰지만 물질적인 조건에 매어 있는 색계(色界), 그리고 욕망과 물질적 조건은 넘어섰지만 정신적인 조건에 매어 있는 무색계(無色界)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해탈하려면 탐욕을 떨쳐버리는 것은 기본이요, 개체로서의 몸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안게 되는 물질적인 조건도 초탈해야 하고 나아가 개체로서의 의식까지도 넘어서야 한다.

 

아무튼, 삼계화택이라 하면 중생의 세계가 온통 불타는 집이라는 얘기이겠다. 어리석음, 번뇌, 괴로움으로 불타는 집이다. 그런데도 중생이라는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사는 그 집이 불타고 있는 줄 모르고 그 안에서 놀고 있다. 시급히 빠져나와야 할 텐데도, 사는 게 워낙 그렇거니 하며 유유자적한다. 진상을 아는 이가 말을 해준다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이 나올 터이다. 깜짝 놀라고 겁에 질려서 우왕좌왕하는 이들도 있겠다. 하지만 대다수의 중생은 자기들의 집이 불타고 있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인 줄 모르고 똑똑한 것으로 착각하며, 괴로움을 괴로움인 줄 모르고 즐거움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두 가지 반응 모두 그들을 불타는 집에서 나오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이 났다는 말을 믿고 놀라는 것이 아예 안 믿는 것보다는 좀 낫겠지만,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없다. 화재에 대한 처신방법을 가르칠 때 침착하라는 얘기를 늘 첫째로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보살들은 솜씨 있게 방편을 쓴다. 예를 들자면 저 밖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다고 아이들을 꼬드겨서 데리고 나온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방편이라는 말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고안된 솜씨 좋은 교화의 방법을 뜻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방편이 진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앞에서도 누차 설명했듯이, 불교의 궁극적인 진실은 결코 언어문자로 담아낼 수 없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선종의 입장이다.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중생의 의식으로 고안해내는 그 어떤 매개체로써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없다고 본다. 중생의 의식은 늘 분별의 틀 속에서 작동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진실은 분별을 떨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불이법(不二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언어문자를 사용한 가르침은 모두 방편설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실 그 자체가 아니다. 교외별전이라는 선종의 종취는 방편을 진실 그 자체로 착각하는 폐해를 질타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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