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49. 교외별전(敎外別傳) 9

수선님 2018. 9. 30. 12:45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에는 늘 온갖 분별의 틀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보고 ‘남자다!’라는 판단을 내린다고 하자. 순간적으로 내리는 판단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 찰나의 순간에 굉장히 많은 분별의 틀이 작용하고 있다. 우선,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분류하는 틀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사람과 여느 동물을 가르는 분별도 작용하였다. ‘수컷이다!’라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더 세밀히 따져보면 외양의 특징을 가지고 이리 저리 분류하는 여러 가지 틀이 동원되었다. 예를 들면 머리 길이라든가 체형, 옷차림 등등 각종 시각적인 자료를 남자나 여자의 특징으로 분류하는 틀을 작동시키고 그 분별을 종합해서 여자가 아닌 ‘남자다!’라는 판단에 이른 것이다.

 

모든 분별의 틀, 분류법은 직접 경험이나 간접 경험을 통해서 학습된다. 물론 간접 경험을 통해서 학습되는 것이 훨씬 더 많을 터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배우는 것이 다 그런 분류법이다. 맞는 답과 틀린 답을 잘 가려낼 줄 알아야만 좋은 성적을 올리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인정받는다.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늘 분류법을 배운다. 긴 성장기간을 통해서, 나아가 살아가는 내내 우리는 갖가지 분별의 틀을 배우고 내면화한다.

 

그 시대,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분별의 틀을 잘 체득하고 잘 구사할 줄 알아야지만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칭찬이요 ‘분별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비난이다.

순간순간 엄청난 양의 분류를 재빨리 진행시키면서도 우리가 그 복잡한 과정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것은 각종 분별의 틀이 워낙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있고 분류의 작용이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분별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이 다양한 국면이 펼쳐지는 것이 삶의 현장이다. 각종의 국면이 닥칠 때마다 각자가 새로운 대처 방법을 궁리해내야 한다면 정말 살기 힘들 터이다.

 

인류는 삶의 다양한 국면에 대처하는 방법을 각종 분별의 틀로 정형화해서 전수해 왔으며, 그것으로 무장한 덕분에 우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현장을 헤쳐 나가며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편리한 도구로서 전수되고 학습되는 그런 분별의 틀이 너무나 내면화되고 언어와 제도 등 온갖 장치를 통해 고착되다보니,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가두고 조종하는 주인 노릇을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분별의 틀을 넘어서 의식을 확장하기가 무척 어렵다.

 

불교에서 무아(無我), 연기(緣起), 중도(中道), 공(空), 불이(不二) 등의 개념으로 말하는 세상과 존재의 궁극적인 진상은 불가사의(不可思議), 즉 생각으로 헤아리고 따져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앞에서 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보통 사물과 현상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분별의 틀, 분류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도 워낙 철저하게 분별의 틀 속에 갇힌 우리의 의식은 거기에도 분별을 적용하여 헤아리려고 한다. 그리고 문자언어가 분별의 틀이라는 감옥의 간수 노릇을 한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선종의 외침은 그 간수의 손아귀를 떨쳐버리고 분별의 감옥에서 벗어나라는 얘기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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