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가르치기를 모든 苦는 집착에서 생긴다고 가르칩니다.
그 集이 멸함으로써 苦는 저절로 滅해 진다라고 또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苦를 만나면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왔는가하고 두리번 거립니다.
마음은 여러 갈래로 흐트러지기 시작하며 갈피를 못 잡고 안개 속에 있게 됩니다.
이런 상태 있을 때에는 어떤 가르침을 가져다 자신의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하지만 산만한 마음만 더 할 뿐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 합니다.
마침내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에 따라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 그 문제 앞에 서성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소위 말하는 번뇌입니다.
사람이 살아 가다가 이런 경우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산만하고 번뇌스러운 마음을 붙들어 매어 내 마음 가장 가까이 가지고 와야 합니다. 피하려고 한다거나 어떤 테크닉을 가져와 해결하려 하지 말고 자신있고 용감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변명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상대에게 불평을 전가시켜 해결하려는 마음은 더 더욱 삼가 해야 합니다.
사실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대는 나에게 없습니다.
오직 내가 만들어 놓은 상대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만들어놓은 상대는 내 마음 안에 있는 마음 입니다. 이 내 마음이 없으면 상대는 존 재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내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마음을 살펴보게 되면 마음의 실체를 대강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음과 한시간도 좋고 하루도 좋고 일주일도 좋습니다. 아니 한달도 좋습니다.
이 마음을 알자마자 같이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어 봅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실체는 더 또렷해지며 우리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자성에 의해 그 실체라고 보고 믿었던 것이 사라지기 시작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마음의 실체라는 것이 본래 없음을 확인 하게 됩니다.
본래 없으면서 만 가지 실체를 통하여 작용을 하게 되니 알 수 없는 마음만 있게 됩니다.
이 알 수 없는 것이 소위 말해지고 있는 "이뭣고 "입니다.
이뭣고 이지만 이 뭣고 하는 생각의 실체가 떨어져 나가버린 상태에서의 이뭣고 이기 때문에 어떤 다른 사량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럴때 이뭣고는 이뭣고를 할수록 나라는 것은 떨어져 나가 버리며 오직 알 수없는 이뭣고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흔히 이뭣고를 할 때 내 생각을 깔아 놓고 이뭣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른 이뭣고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모든 의식의 잡된 것들은 저절로 떨어져 나가 버리며 몸과 마음을 놓게 됩니다. 이럴 때는 오직 이뭣고만 있을 뿐 아무 사념이라고는 없습니다. 앞을 봐도 이뭣고 뒤를 봐도 이 뭣고 앉고 서고 운전하고에 상관없이 이 뭣고만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도 없으며 삶이라고 붙들고 있는 어떤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오직 눈앞에 알 수 없는 생각이 아닌 한생각만 있습니다.
어떤 깨달음을 기다리는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과거니 현재니 미래니 얻으니 잃으니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그냥 몸과 마음은 가벼우면서 부드럽고 이 삶 속에 묘의 눈만 있을 뿐입니다.
이 묘의 눈은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 얻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잃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이때 있는 눈을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만나되 분별을 하고 분별은 하되 분별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고와 집도 없으며 고집멸도도 없습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노사진도 없습니다.
불은 시방세계에 있습니다. 처처가 불이며 화엄이 펼쳐집니다. 삶속에는 불보살의 나툼이 있을 뿐 다른 중생 같은 것은 없으며 고를 받는 중생을 봄에 자비심만 있습니다.
여기서 보살의 원이 자라납니다.
이런 공부의 근본은 처음 모두가 고에서 시작 됩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고는 곧 바로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고를 피하려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러 가까이 해야 할 대상입니다. 고 있는 곳에 불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고를 인정 하지 않으려 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진실 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원망이나 불평으로 확산 시키지 말고 받아드려 감싸 안고 사는 것부터 배워야 된다고 봅니다.
고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더 설명을 요하면 시궁창에 진흙이 없으면 연꽃이 피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을 구하기 전에 고를 가까이 하고 같이 사는 것부터 배워 보십시다.
그리고 내가 나를 용서 하듯이 남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용서함으로 이사회도 같이 넉넉해지는 삶이 되도록 공부해 봅시다.
현웅 스님 법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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