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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에서 점술을 금하는 이유 / 박태원

수선님 2018. 10. 14. 11:25

 박태원·울산대 철학과 교수


“길을 가다 보면 무속인의 집에 불교의 표시인 卍자가 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또한 점술가의 집에는 대부분 불상을 모신 불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에게는 불교와 무속, 혹은 불교와 점술이 친밀한 관계인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를 보면, 불교는 오히려 점술을 금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슨 이유로 점술을 금하는 것인지,

그리고 한국에서 점술과 불교가 오히려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 까닭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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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점술가의 집에 卍자 깃발이 걸려 있고 불단도 모셔 있게 된 연유를 이해하려면

무속과 한국 불교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속의 역사는 실로 오래된 것입니다.

흔히 샤마니즘이라고 불리우는 무속은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기 이전부터 한국인들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신과 인간, 죽은 자와 산 자를 중개해 준다는 샤먼(무당)은 고대인들의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정치 및 종교적 역할이 두드러졌습니다.

만주, 시베리아, 중국 등지에 널리 퍼져 있던 샤마니즘의 일종인 무속은 무(巫 샤먼)를 통해 미래의 예언이나 치병,

죽은 자의 원혼을 풀어주는 등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은 굿이라는 형식을 빌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고대 부족국가 시대의 제천 행사인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도 이 굿의 집단적 형태로 추정됩니다.

단군신화와 같은 우리의 고대 신화에도 이러한 무속 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무속은 애초부터 인간의 세속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역할이 핵심이었습니다.

무당을 통해 신들에게 순조로운 기후와 풍성한 수확, 병자의 치유 등을 기원하는 세속적 이익과 관련된 것이 무속입니다.

그러다 보니 무속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세속적 차원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속의 세속주의는 이후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른바 기복불교를 무속 문화의 영향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무속은 다신관(多神觀)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필요에 따라 다수의 신적 존재들과 교류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무속은 유일신관(唯一神觀)에서 보이는 독선이나 배타성이 약합니다.

무속이 불교나 도교와 쉽게 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세속적 가치관과 다신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무속은

고대부터 한국인들의 일상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 막강한 영향력은 이후 한반도에 들어온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무속은 불교에 영향을 끼쳤고, 불교 역시 무속을 포용하면서 토착화되어 갔습니다.

사실상 한반도에 전래된 모든 종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샤마니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무속은 한국인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 가장 먼저 뿌리내려 종교와 사상의 한 원형처럼 작용했던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볼 때 무속은 불교에 포섭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포섭 과정에서 불교도 무속의 영향을 받습니다.

불교는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결코 배타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주장도 존중하는 불교 특유의 관용성과 포용력은 불교 전파의 역사를 무혈(無血)의 평화로 장식하였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 가든지

그 곳의 토착 문화나 종교들을 배척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려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 불교 전파의 특징이었습니다.

불교 특유의 이 위대한 관용의 정신과 태도는 한반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는 토착 문화와 종교인 무속이나 민간 신앙을 무작정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무속이나 민간 신앙의 가치를 최대한 존중해 주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나갔습니다.

그 흔적은 사찰 건축물에서도 확인됩니다.

한국 절에는 산신각이나 칠성각이 사찰의 한 구성 요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산신 신앙이나 칠성 신앙과 같은 민간 신앙들을 배척하지 않고 불교의 일부로 포용한 결과입니다.

무속 역시 불교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불교는 한국인들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무속 신앙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공존하며 대화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려 했을 것입니다.

무속은 그러한 불교의 관용과 포용적인 태도에 감화되어 불교의 하위 질서로 편입되어 들어왔습니다.

부처님을 최고 자리에 놓고 다른 신적 존재들을 그 아래에 배열함으로써 불교 속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의 무속에서 불교의 표시인 卍자를 내걸거나 불단을 모셔놓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속을 포용하는 과정에서 불교 역시 무속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한국 불교에서 흔히 목격되는 기복신앙이 바로 그 흔적이라고들 말합니다.

치병이나 사업의 성공 등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 기복신앙은 무속의 세속주의가 불교에 미친 영향이라는 것이지요.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려워도 분명 일리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불교에 미친 무속의 영향은 비단 기복신앙에 그치지 않습니다.

점술, 예언 등이 불교 신자들의 삶에 가깝게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속의 영향이 일정 부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 불교 신자들은 사주 풀이와 같은 점술에 매우 익숙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단 불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사주풀이로 대표되는 점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말로는 미신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혼사나 사업에 점술가의 판단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최근 들어서는 사주풀이를 일종의 통계학이라 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점술은 각광받는 사업이 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점술에 대한 열기는 세계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불안 심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는 데서 점술 성행의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점술을 금기시 하고 있습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최고의 인간 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점술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합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에는 점술이 진리답지 못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최고의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는 진리다운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부처님은 점술을 진리답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점술의 세계관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점술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이 진리답지 못하기 때문에 점술에 의존하지 말 것을 설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점술의 세계관은 숙명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시(時)에 의해 그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 점술의 기본 발상입니다.

태어났을 때의 별자리에 따라 운명이 주어진다고 하는 점성술도 역시 그러한 숙명론을 깔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정론적 숙명론은 삶에 작용하는 환경의 영향을 크게 중시하는 발상입니다.

인간 존재와 인생의 형성에 개입하는 환경적 요인들의 영향력을 크게 보는 것이지요.

태어난 연월(年月)과 일시(日時)에 의해 인생의 주어진 운명을 점치려는 것이나,

태어날 때의 별 자리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매우 불합리한 미신처럼 여겨집니다.

합리적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보니 사주풀이 점술을 연구하고 신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주풀이 점술이 나름대로 합리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 대표적인 주장이 ‘사주풀이 점술은 일종의 통계학’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기준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볼 때

통계적으로 나타나는 공통점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 사주풀이 점술이라는 것입니다.

‘통계학’이라는 말 자체가 합리적인 학문 체계를 일컫는 용어이다 보니,

‘점술은 일종의 통계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점술이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과학성을 지닌 이론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점술이 통계학적 토대를 갖추고 있는 것인지 솔직히 의문이 듭니다.

사주풀이 점술 이론은 음양오행론을 세상의 온갖 현상에 적용하면서 인생사에까지 연관시킨 연역적 체계이지,

수많은 인간들의 일생을 연월일시를 기준으로 통계적으로 처리한 후에 마련된 이론 체계는 아닙니다.

통계학적 과정을 통해 마련된 귀납적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점술의 합리성을 통계학적 성격에서 구하려는 태도는 너무 억지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점술의 합리성은 오히려 인생을 연월일시나 별자리와도 연결시키는 ‘광대한 관계성의 통찰’에 있다고 봅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사의 넓고 깊은 상호 관계’를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점술의 합리성이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났을 때의 별자리와 인생 행로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그 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 소지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타인은 물론 미미한 티끌이나 풀 한 포기도

한 개인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연기적(緣起的) 통찰이기도 합니다.

태어난 우주 시공간과 인생을 연결시켜 파악하려는 점술의 관점에는

분명 ‘세상의 광대하고 깊은 관계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통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관계성을 지나치게 결정론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태어난 연월일시나 별자리에 의해 인생이 결정된다고 하는 강한 결정론적 사고는 지나친 극단입니다.

불교 역시 사물들이 맺고 있는 불가분리의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결코 인생을 운명론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와 점술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한 인간의 삶은 결코 백지 상태에서 그의 의지나 희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신체적 조건, 가정 환경, 소속된 민족, 사회, 국가, 지리와 기후 등에 의해 인생의 내용이 크게 좌우됩니다.

사람의 인생은 생각보다도 훨씬 환경의 지배를 받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외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같은 조건, 동일한 환경에 놓였을 지라도, 성격이나 행복지수, 삶의 내용은 사람마다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인생은 개인의 자기 의지와 선택으로 만들어져 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이 측면을 중시합니다.

비록 무수한 과거 생의 업력이나 외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언제나 그 모든 한계를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넘어설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자유의 가능성이 완전히 구현된 경지를 해탈이라 합니다.

인생은 자신의 자각과 의지와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측면이 있으며,

인생의 보람과 의미는 바로 그 자유의 가능성을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점술은 자칫 이러한 ‘인생 만들기의 의지와 노력’을 퇴색시켜 버릴 위험성이 높습니다.

태어난 연월일시나 별자리에 의해 길흉화복을 운명적으로 점치면서 인간을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운명론자,

운이나 기다리는 요행주의자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점술의 관심은 재산, 명예, 지위, 결혼과 같은 세속적 차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현재와 미래를 점술에 의해 판단하려 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론의 함정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교는 인간에게 인생의 혁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미 주어져 있는 주관적, 객관적 환경인 업(業)의 노예로 살아가지 말고,

업에서 해방된 자유인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이미 주어진 여건이나 환경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여건과 환경에 짓눌리지 않으며 해탈이라는 최고의 경지를 스스로 성취해 가라고 설합니다.

인간은 그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점술을 금기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출처 : hacobang
글쓴이 : 곰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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