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적인 어법에서 지식이 많다고 하면 대개는 곧 지혜가 있다는 말과 통하는 뜻이다. 대개 감각이라 하면, 바깥에서 어떤 자극이 가해지니까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경이 발동하여 그 자극을 느끼게 되고 그 자극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생체 작용을 가리킨다. 굳이 구별하자면, 알아차리는 것은 지각이다. 그러나 아무튼 지각은 그렇게 감각과 뗄 수 없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지각은 기본적으로 한 개체가 외부의 다른 개체나 현상에 대해 일으키는 반응이다. 한편, 우리의 일상 어법에서 지각이라는 개념은 이를테면 감각내용에 대한 자동적인 인식작용보다 좀더 나아간 정신작용까지 그 뜻이 확대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 사람 참 지각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할 때 지각이란 단순히 그때그때 감각된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아차리는 작용만 뜻하는 게 아니다. 전체적인 상황도 알고, 그 상황에서 지금 자기가 감각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가늠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그 상황에서 적절한지, 또는 어떤 기준에서 옳거나 그른지 제대로 판단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의 지각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는 말이 사려분별(思慮分別)이고, 이런 것을 두고 굳이 구분하자면 단순한 지식에 그치지 않는 지혜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우리가 ‘지각이 있는 사람’, ‘사려분별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면 곧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러한 일반적인 지혜와는 또 다른 지혜를 이야기한다. 그런 일반적인 지혜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궁극적인 지혜는 또 따로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세간의 지혜를 넘어 출세간의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전에 언급한 적이 있듯이 속제(俗諦)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진제(眞諦)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여기에서 진제란 우리 이야기의 맥락에서 편의상 불이법(不二法)을 가리킨다고 해도 되겠다. 경전의 내용을 줄줄 외우고 그 문구의 뜻을 해박하게 안다고 해도, 그런 가르침을 자기 자신이 직접 쏟아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 선불교의 입장이다. 그만큼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만 매달렸고 또한 그것을 가지고 보람과 행복으로 여기게 되니, 진정한 지혜를 추구하는 데에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본다. 경전으로 기록된 그 가르침을 준 이, 즉 부처와 불이가 되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보는 것이 선불교의 입장이다. 교외별전이라는 구호가 나온 취지를 거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그러나 또 한편으로 굳이 지식과 지혜를 구별해서 거론하기도 한다. 불교, 특히 선불교에서는 엄격하게 구별한다. 선불교에서 지식과 지혜를 구별할 때 지식이란 외부에서 부딪쳐오는 자극에 대해서 감각과 지각을 일으켜서 그게 뭔지 알아차리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기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좋은지 싫은지를 가늠하는 가치판단이 포함된다.
세간의 일반적인 지혜는 어디까지나 한 개체로서 자기중심적인 감각, 지각, 지식, 사려분별과 연장선상에 있다. 주객(主客) 분별의 구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하고 즐거운지, 어떻게 하면 내게 이익이 되는지가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다.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불이라는 세상의 진상을 깨친 지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선불교의 입장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세간적인 지혜도 기실은 지혜가 아니라 지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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