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교외별전이라는 구절 뒤에는 흔히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따라온다. 마음이라는 말은 인도불교사상에서도 많이 쓰이기는 했지만, 중국불교사상에서는 이 마음이라는 개념을 특히 많이, 그리고 매우 중요하게 사용하였다. 그 용례를 분석해서 여러 가지 복잡한 뜻을 자세하게 파헤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지만, 여기서는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제쳐놓고 좀 단순한 이해를 구해보기로 한다. 이심전심이란 직역하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는 말이다. 통로가 되는 마음은 누구의 어떤 마음이며 전해지는 마음은 누구의 어떤 마음인가? 통로가 되는 것은 부처님과 나의 마음일 터이다. 말이나 문자로 된 가르침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는 얘기이다. 경전에 문자로 고착화된 가르침을 통해서는 진리가 고스란히 전해지지 못하므로,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겠다. 그리고 전해지는 마음이란 곧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 깨달음 체험을 가리킨다고 보면 되겠다. 선종에서 이심전심의 효시가 되는 사건으로 흔히 거론하는 것이 이른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에피소드이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인데, 어느 날 석가모니가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 모으고는,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는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고 한다. 여느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섭(迦葉)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는 얘기이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교, 특히 선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그 말을 쓸 때 떠올리는 개개인의 마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거기에서 마음이라 하면 깨달음, 반야(般若)와도 같은 뜻이고 세상의 진상 전체를 담은 뜻이다. 개개인의 마음도 그 속에 녹아있다. 마음이 개인의 마음으로만 일하고 있을 때에는, 간혹 서로 통하는 수는 있겠지만 결코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세상의 진상 전체를 담을 때에는 어느 누구, 어느 무엇의 마음과도 통하지 못할 것이 없다. 서로 다른 개체 사이에 말이나 다른 어떤 매개도 통하지 않고 마음으로, 달리 말해 저절로, 뜻이 통하려면 모두가 한마음이어야 한다. 그 한마음이란 이를테면 바로 위에서 말했듯이 깨달음, 반야, 세상 전체를 담은 진리 그 자체이다. 거기에 동참하는 이의 마음은 개인의 마음일 뿐 아니라 보편자의 마음이고 세상 전체가 공유하는 마음이니 누구와도 다 통한다. 아무튼, 이심전심이란 그러니까 경전의 문구에 매달리기보다는 자기가 직접 세상의 진상을 깨치는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 체험을 통하여 부처님의 깨달음 체험이 전해진다. 나의 깨달은 마음을 통해서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이 이어지고 재생산된다. 석가모니의 시대에서 수 천 년이 지난 뒤에 그와는 다른 인종으로 다른 땅에서 한 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내가 직접 깨달음을 체험하고 깨달은 마음을 가질 때에는 석가모니의 깨달음이 고스란히 내게서 발현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문자를 인정치 아니하고(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로 전해지는 가르침 이외에 뭔가 다른 경로로 전해오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교외별전·敎外別傳), 무엇을 통해 무엇이 전해지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는 바로 이 대목이다. 이제 이심전심이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는 것으로 교외별전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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