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廻光返照)>
회광반조(廻光返照)란 밖으로 향해 찾는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들여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밖을 향해 찾는다는 것은 바로 진리와 자아의 발견을 먼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또 언어나 문자에 의해 자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임제(臨濟義玄, ?~867) 선사는 <임제록(臨濟錄)>에서 말했다.
「그대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스로를 돌이켜 비추어봐라 다른데서 구하지 말지니, 그대 마음이 부처님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언하편자회광반조(爾言下便自回光返照), 갱불별구(更不別求), 지신심여조불불별<知身心與祖佛不別)」
여기서 '회광반조'는 빛을 돌이켜 되비춘다. 또는 그냥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회(廻)'는 전환, '광(光)'은 광명이란 뜻으로 빛을 돌이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빛이란 바로 불심ㆍ불성ㆍ본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반조(返照)'는 석양빛이 되비추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회광반조'는 밖으로 찾는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본심, 즉 불성을 비춰 보는 것을 말한다. 밖을 향해 찾는 마음을 뒤집어 안으로 자기를 반성해서 자아(自我), 본래면목을 보는 것이다.
선(禪)사상에서 문자와 언어에 의존하지 말고 자기를 회고반조(回顧返照)해서 바로 심성(心性)을 조견(照見)하라고 하는데, 모든 변화는 밖이 아니라 바로 자기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직시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마음이 밖으로만 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관찰할 때 비로소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인도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천신들이 모여서 인간사를 논했다. 인간들은 왜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인가? 그것을 살펴봤더니 행복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천신이 제안을 했다. 행복을 어디에다 감추어버리자. 그리하여 히말라야 산꼭대기에 감추자. 바다 속에 감추자, 여러 안이 나왔다.
이때 제석천(帝釋天)이 말했다.
“인간들은 영악하기 때문에 어디에 감추어도 찾아 낼 것이다, 그러니 딱 한 곳 인간들의 마음속에 숨겨 놓으면 못 찾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속성은 항상 밖으로 향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단다. 그래서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문(禪門)에서 말하기를, 천당지옥 방촌지중(天堂地獄方寸之中)이라 했다. 천당도 지옥도 마음 안에 있다는 말이다.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마음의 지족(知足)에 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천당도 되고 지옥도 된다. 그러므로 나의 실체(實體) 본질(本質)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내는 주제가 바로 회광반조이다.
※방촌(方寸)---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 마음이 가로 세로 한 치 크기의 부피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회광반조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비추던 것이 스스로 비출 수 있는 힘을 되찾아서 비춘 것을 되비치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의 심성이 반조된다는 말이다. 즉, 밖을 향해 찾는 마음을 뒤집어 안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반성해서 곧바로 자기심성의 신령한 성품을 비쳐 보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욕심에 끌려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다가, 죽을 때가 임박하면 온전한 정신이 한 번 번쩍 들 때가 있다고 한다. 바로 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지나온 자기의 일생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광반조이다.
촛불은 다 타서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번 확 타오르고, 태양은 지기 직전에 화려한 색깔을 내뿜고, 사람도 늙어서 죽기 직전에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이 걸 불교의 선문에서는 자기 밖의 욕망을 향하는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돌이켜서 자성(自性)을 직시한다는 의미로 가다듬어 선의 방법론으로 삼았다.
“새들도 죽을 때가 되면 그 울음소리가 구슬퍼지고, 사람도 임종이 다가오면 그 마음이 선량해진다.”는 논어(論語)의 구절도 바로 이 회광반조의 정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형수가 처형되기 직전에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 회광반조의 정신을 살려내서 날마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본다면, 우리의 인생은 정말이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선은 늘 밖을 향해 두리번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밖을 향해 헐떡이다가 자신을 잃어버린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상황과 대상에 끌려간다. 또한 우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너무 긴장해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굳어지는 순간에 허둥대며 곤경에 빠지곤 한다.
따라서 일거수일투족이 내게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일거수일투족이 마음 아닌 것이 없음이라, 일상의 모든 것을 안으로 돌이켜 보는 것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할 때 생각함을 알고,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말함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언행을 알면 바로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수행이 깊어져 닦을 것이 없으면 행 이전에 행을 알아 그르칠 일 없게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화를 내면, 화를 냈음을 알고, 그렇게 알면, 그 화가 스스로를 돕지 못하는 일인 줄 알아 화를 다스릴 것이므로 극단으로 치닫는 일 없이 매사를 여여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일이 아닌 타인의 언행을 볼 때도 누군가 그릇된 언행으로 주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 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지기 보다는 자신의 언행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모든 경계는 다 나의 스승이다. 물, 불, 바람, 사건, 사람, 그리고 수, 상, 행, 식이 다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란 말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체를 내 마음의 거울에 조용히 비춰보면 그로써 공부하는 바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자등명(自燈明)하다고 하셨다.
고요히 앉아서 참선함을 말하는데, 참선할 때의 마음자세라 할 것이다. 회광반조로써 조심(調心)하면 육신의 느낌이 사라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경계가 온다고 한다. 물론 아무런 느낌이 없다 해도 정신은 더욱 생생하며 바쁘지 않고 한가해 분명하고 또렷하다. 그리하여 무아(無我)의 경계를 체인하게 되는 것이다. 무아를 알면 제법도 무아인 줄을 알 것이고, 열반적정을 알게 되는 수행의 한 방법 중 ‘마음 갖춤’을 일러서 회광반조라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춰보려 하지 않고 그냥 나의 대상으로 보려고만 한다. 여기서 내 마음의 거울이란 적정(寂靜)해서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어떤 느낌이나 생각, 행동이 일어나더라도 내 마음이 적정하면, 마치 잔잔하고 맑은 호수면 위로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아 그림자는 물에 선연히 비취되 물은 휘젓지 않는 것처럼 된다. 그렇게 비춰보는 게 자심반조(自心返照) 회광반조(廻光返照)이다.
이 건 언어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내면세계를 회고반성(回顧反省)하는 까닭에,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조고각하(照顧脚下)란 말뜻과 같은 맥락이다.
방안의 등불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방안의 대상을 비추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을 비추는 것이다.
객체를 비추는 것은 대상인식이요, 주체를 비추는 것은 자체인식이다. 이 둘 중 중요한 것은 자체인식이다. 등불이 그 빛에 의해 객체로서의 대상을 비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행에 있어서는 그 객체를 비추는 자체를 자체가 비춘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은 자체에 비춤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용일여(體用一如)이다. 다시 말하면 즉체즉용(卽體卽用)이다.
이것을 인간의 자성(自性)에 비유하면 자성은 그 자체에 비춤, 즉 지혜의 작용이 함장 돼 있어서 지혜의 작용이 스스로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자성은 달리 말하면 함장식(含藏識)이다. 자성청정(自性淸淨)이다. 대주 혜해(大珠慧海, 8~9세기) 선사의 표현에 의하면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다. 이러한 자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광반조(回光返照)이다.
또한 역으로, 즉 거꾸로 생각하는 것을 회광반조라 할 수도 있다. ‘물은 흐른다’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회광반조해서 물이 올라간다고 생각해봐라. 물이 수증기가 돼 위로 올라갈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이와 같이 반대로도 생각해봐야 거기에 진리가 있을 수가 있다. 그리하여 회광반조란 한 생각 일어 난 그 자리를 돌이켜 비춰 보는 것이다.
똑 같은 사안을 두고도 보는 주체의 관점이 다르다 보면 보는 것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 보는 관점에서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보는 세계도 다르게 보인다. 보는 것이 다르고, 보이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하고 싸운다.
그 투쟁의 관점이 밖에 있는 것일까? 안에 있는 것일까?
그것을 따지는 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이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분별하는 것들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인 내 마음에 있으니까 안으로 돌려보자는 것이 회광반조이다.
모든 의식을 안으로 돌려 보자는 것이다. 의식의 초점을 안으로 돌리는 것이다. 회광반조의 초점에는 통찰만 있다. 통찰은 꿰뚫어 보는 반조(返照)를 말함이다. 그곳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다. 오직 진실만 있다.
어쩌면 우리 현대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 잃어버린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것은 끝없이 무언가를 쫓아가는 욕망 때문이다. 욕망은 끝이 없어 가질수록 더 목말라 한다. 재물, 권력, 명예나 사랑에 미치도록 목말라 찾지만 그 결과 더욱 탐욕스러워지고 집착하게 돼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서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무엇이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찾아봐야 한다. 그래서 선사들은 늘 강조한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라[방하착(放下着)]”
“나를 돌이켜 봐라[회광반조(廻光返照)]”
「각(覺)과 지(知)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명확하다. 알고는 있으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알 지(知)'요, 아는 것이 실천으로 바로 이어지면 '깨달을 각(覺)'이다. 단순히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는 것만으로는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는 것이 교만이 되면 잘못 아는 것이어서 병이되고 전도된 몽상격이 된다 그러므로 바르게 아는 깨달음이라야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지혜롭게 깨달아야 한다.
마음이 있지만 행하지 못하면 마음이 없는 것과 같고, 마음도 있고 행도 있으면 모든 부처님과 같다 - 유심불행동무심(有心不行同無心) 유심유행동제불(有心有行同諸佛)
마음은 있고 행이 없으면 마음을 먹지 않은 무지한과 다를 바가 없으며, 마음이 있고 실천행도 뒤따르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불자란 조용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 이것이야말로 수행의 기본이다.」 - 혜거 스님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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