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멸’이란 용수(龍樹, Nagarjuna)의 저서 <중론(中論)> 속 ‘팔불(八不)’의 하나이자,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로서 불교의 존재론을 천명하고 있다. 즉, 불생불멸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하며,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진리이다.
헌데 현상의 세계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했고, 나고 죽음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 어째서 불생불멸인가, 깨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불법(佛法)이라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의 만물은 모두 생자필멸의 원리를 따르는 듯하다. 곧,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렇듯 세상에 한번 태어난 것은 결국 죽거나 없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불생불멸이라 했을까? 그것은 우리들의 분별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태어나는 것들은 반드시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동반하며, 죽어가는 것들은 반드시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동반한다. 이와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죽어간다는 말은 살아간다는 말과 다르지가 않다. 즉, 삶과 죽음이 아무런 걸림 없이 서로 의지해 동시적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데도 우리들의 분별의식은 삶과 죽음을 따로 분리해서 서로 이질적인 다른 세계를 구축해 놓고 분별 망념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이니, 불사(不死)니, ‘불멸(不滅)의 생’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이 말들에서 생각된 영원의 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죽음과 대립한 생이며, 참으로 죽음을 극복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진정한 영원 ․ 무한이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 대립한 생에 집착한 것이며, 생사의 줄을 끊은 생사의 극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립하는 생’이라는 사고방식을 지양하는 곳에 진정한 영원이 포착되는 것이라 설해지게 된다. 즉 ‘불사’가 아니라 ‘불생불멸(不生不滅)’이야말로 강조돼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진정한 극복은 죽음과 대립관계에 있는 생의 극복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가능한 까닭이다. 결국 생과 사 양자의 극복에 의해 진정한 영원이 포착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항상 ‘불생불멸’을 말하고 있다.
즉, 죽음과 삶은 둘이 아니요 공(空)과 색(色)이 둘이 아니라는 깊고도 묘한 뜻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의 분별심은 천국과 지옥, 생과 사, 있다 없다와 같이 세상을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나눠 분별하려고 한다. 이러한 잘못된 착각을 바로 잡으려 하는 인식이 바로 불이사상(不二思想)이다.
불교의 불이사상은 이렇게 생과 사, 둘로 나누어진 개념들의 허구성에 대해서 말하고, 이러한 허구를 만들어내어서 스스로 고통 속에 뛰어드는 인간들의 무지함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이러한 것들 - 허구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진리를 찾으려면 확고부동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 명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철학사에 저 유명한 명제를 만들어 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불교는 데카르트에게 묻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한마면, 고로 ‘나’라는 존재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려는 것이 불이사상이다. 존재를 만듦으로써 비존재를 만들고,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너’라는 상대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는 우리 생각과 마음의 허상을 지적한 불이사상의 출발점이 곧 무아사상(無我思想)이다.
삼라(森羅-天) 만상(萬象-地)이 모두 불생불멸의 자리에 있어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늘 머물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나고 없어지지만 그것은 다만 겉보기일 뿐이고 실제의 모습(본질)은 우주 전체를 보면 불멸이니 그것이 바로 만법의 참 모습이라는 것이다. 온 우주가 원융(圓融)해서 아무리 천만번 변화를 거듭하더라도 본성은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말이다.
인간은 어떠한가. 개개인을 보면 생로병사의 모습이 시시각각 보인다. 육신은 4대(四大)의 화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겉보기의 모습일 뿐, 본성(자성)은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파도가 끊임없이 출렁인다. 파도는 생겼다가 사라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그 파도를 하나하나 보면 파도는 분명히 생겼다가 사라지므로 생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바닷물이 출렁이고 있을 뿐, 그 무엇도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불생불멸이라 함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불생불멸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면 부처님의 근본교설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순된다. 오히려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에 - 변하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 할 수 있다. 파도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다만 출렁이고 있을 따름이다. 제행이 무상해 항상 함이 없으므로 생겨난다는 말도 맞지 않고, 사라진다는 말도 맞지 않다. 생겨난다 하지만 생겨나지 않음이 불생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짐이 없음이 불멸이다.
그래서 본성을 봐야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본래자리를 허공에 비유한다. 허공을 보면, 구름도 떠가고 해와 달, 별들이 있고, 새들이 날아가고, 바람이 분다. 그러나 허공 그 자체는 늘 그대로 텅 빈 모습이다. 모습이라고 하나 모습도 없다. 본래자리 그 자체는 늘 그대로다. 그러니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착각은 사물을 잘못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릇에 담긴 얼음을 두고 밖에 나갔다가 다시 방에 들어왔을 때, 그릇에 물만 담겨있다면 어린아이는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얼음과 물이 서로 별개의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 하나하나를 별개의 것으로 보는 탓이다. 전체를 알고 보면 얼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물이 생겨난 것도 아니다.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됐을 뿐이다.
이와 같이 인간 개개, 삼라만상 하나하나를 보면 생멸이 있는 것 같지만, 우주 전체를 두고 보면 작은 존재 하나하나에 생멸이 있는 것 같은 모습도 하나의 작은 변화일 뿐 우주 전체엔 변화가 없다. 일체만법이 이와 같으므로 우주는 불생불멸이다. 그래서 불생불멸한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 한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이다.
곧,「이 세상의 모든 법은, 그것이 생명이 있는 것이건, 무생물이건 간에, 그 모두가 애초부터 생겨나는 일도 없고,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 따라서 사라지는 일도 없다.」― 상주법계(常住法界)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세상은 ‘지금 있는 이대로’ 적멸(寂滅)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또 <화엄경>에서는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한다. 곧, 한 없이 연기할 뿐, 그 본디의 모습은 모두가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체가 다 융화해, 온 우주가 아무리 천만번 변화를 거듭하더라도 상주불멸(常住不滅)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알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상주불멸이란 항상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머무른다는 말이다. 우주의 본 모습은 불생불멸, 본래모습 그대로란 말이다. 이걸 모르면 불교는 영영 모른다고 선지식들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중생은 생멸의 세계에 빠져 있다. 생겨난다, 사라진다는 현상(겉보기)만을 놓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제법의 공(空)한 도리를 모른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볼 줄 알면 생은 생이 아니요, 멸은 멸이 아님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언설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 우리 범부들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제로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생(生)과 멸(滅)을 부정하는 것이다. 낳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는 것이다. 작은 개개를 보지 말고, 크게 보란 말이다. 넓게 보란 말이다.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보란 말이다. 즉, 공(空)으로 보란 말이다.
불생불멸의 근거엔 공(空)의 도리가 있지만, 공(空)은 그 어떠한 표현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런 표현도 맞지 않다.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공을 허공에 비유하지만, 그 허공 역시 어떤 단어나 설명으로도 표현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허공엔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허공을 알 수 있다. 물체가 없는 곳이 곧 허공이다. 허공처럼 불생불멸한 것이 우리 마음의 본래모습이다.
이 생멸하며 찰라 생 찰라 멸하는 이 마음의 본래모습이 공한 것이며, 불생불멸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도 죽고, 마음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걸 반복하지만, 원래 몸과 마음 역시 연기된 것이라 자체의 실체가 없어 공한 것이고, 공 그 자체엔 태어난 것도 없고 소멸될 것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성품 ‘참 나’는 진리이다. 인간의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내 안의 나’라고 하는 성품자리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며, 가도 간 것이 아닌 항상 그 자리에 여여 하게 있으나, 그것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마음의 눈, 지혜의 눈으로는 그 성품의 자리 진리의 이치를 볼 수 있다.
‘참 나’라고 하는 진리는 결코 오고 감이 없으며 생하거나 멸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바꾸어 돌고 돌아 새로운 몸으로 바꾸는 것일 뿐, 진리라고 하는 ‘참 나’는 변함이 없이 존재한다. 생멸하는 마음이 있고, 불생불멸하는 마음이 있다. 둘 다 마음이다. 불성(佛性)도 마음이다. 그러나 불성은 생멸하지 않는 불생불멸심이다. 중생은 이 불생불멸심을 찾을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것이다.
여러 경전들에서 불생불멸에 관해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경전 몇 가지를 골라 어떤 말씀이 있는지 살펴보자.
* <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一切法不生(일체법불생) - 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一切法不滅(일체법불멸) - 일체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若能如是解(약능여시해) - 만일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諸佛常現前(제불상현전) -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리라.
“모든 존재는 생기지도 않으며 또한 소멸하지도 않는다. 만약 이러한 이치를 알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앞에 나타나 있음을 보리라.”고 했다. 일체만법은 생겨나지도 않고, 일체만법은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와 같은 내용을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신다, ― 깨침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하는 말이다.
여기서 불생불멸하는 우주의 섭리가 항상 존재하는 현상을 ‘부처가 나타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주의 섭리가 곧 부처이며, 이 현상을 이해하면 곧 부처가 보인다, ― 깨침을 얻는다는 말이다. 우주의 섭리와 부처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원칙을 말한다. 삼라만상의 원칙을 노자는 도(道), 공자는 성(誠), 불교에서는 부처(佛)로 표현했다.
따라서 성철((性澈, 1912년~1993) 큰스님은 불생불멸이 불교의 골수를 드러내 보이는 말이라 하셨으며, 팔만대장경 안에 부처님 말씀이 그렇듯 많고 많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불생불멸을 깨쳤으니, 불생불멸은 불교의 근본원리인 것이고,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된다고 하셨다.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일찍이 규명한 이론이다. 비눗방울 하나도 아예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렇게 허망하게 보이는 비눗방울도 아주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어디엔가 어떤 또 다른 형태로 변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태는 변하더라도 그 질량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태우면 외형은 사그라지지만 종이를 태운 에너지와 재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이다. 그리고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 불생이다. 이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연기 - 가합(假合) 해서 잠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새롭게 생기게 하지도 못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진리이다. 이것을 공이라 한다.
* <법화경>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是法住法位(시법주법위) - 이 법이 머물러 있는 법의 자리(세계)
世間相常住(세간상상주) - 세간상(世間相)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이 법이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에서 ‘이 법’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한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모든 현상계는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이 세간에 늘 그대로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萬象)이 모두가 불생불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불생불멸하는 이 법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간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세간 이대로가 불생불멸하는 절대법이다. 이와 같은 모든 만법의 참모습을 불교에서는 제법의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이러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원리를 깨치지 못해 눈이 어두워 착각을 함으로써 진리가 본래 생멸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구름에 가려 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광명세계가 암흑세계가 될 수는 없다. 불생불멸을 바로 알면 언제든지 진실(진리, 진여, 부처)이 눈앞에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일체만법(一切萬法)]이 불생불멸이고, 부처이며, 극락세계이고, 절대세계(완전한 세계)라는 뜻이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나고 없어지지만, 그것은 다만 겉보기일 뿐이고, 실제의 내용에서는 우주전체가 불생불멸이니,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참모습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은 늘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새롭게 생기지도 않으며, 또한 존재하던 것이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존재의 실상을 지혜의 눈으로 꿰뚫어 보면 진실로 그렇게 여여 하건만, 다만 존재를 보는 그 사람의 견해가 그것에 미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몸도 마음도 그렇게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즉,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다.
일체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이 도리를 바로 알려면 확철히 깨쳐야 한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고, 알려야 알 수도 없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불교에 대해서 영영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산 중에 들어가 눈감고 앉아서 참선을 하거나 도를 닦아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도를 깨치기 전에는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다행히 요즘은 과학만능시대이니까 과학이 그 열쇠를 풀어주고 있다.
현대물리학인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이 등장하면서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입자를 소립자(素粒子)라 했다. 이들 소립자들은 다시 수많은 소립자들로 형성돼 상호의존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를 밝혀냈다. 즉, 우주는 양자적(소립자)으로 서로 얽혀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로서, 소립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생불멸(진여의 작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학적실험이 화엄사상과 법화사상을 너무나 확실하게 잘 말해주고 있다.
* <중론(中論)>의 귀경게(歸敬偈)에도 ‘불생불멸’란 말이 나온다.
용수(龍樹)의 저서 <중론(中論)> 첫머리 귀경게(歸敬偈)에 나오는 팔불(八不)의 하나가 불생불멸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중도(中道)의 이치는 모든 법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없이 갖가지 인연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해 설해진 것이다.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으로 극단적인 양변을 여의고, 그러므로 중도는 곧 연기의 법이며, 공한 법이고,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떠난 적멸의 법이다.
즉,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질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내가 멸한다고 없어지는 법도 아니다. 나 이전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멸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불생불멸의 법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슨 법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바로 연기법(緣起法)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컨대, 여기에 나무와 또 하나의 나무가 있다고 할 때, 이 나무와 나무[인(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연(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과(果)]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나무와 나무 사이에 본래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무라는 인(因)에 힘을 가해 비벼 주는 연(緣)으로 인해 결과인 불[과(果)]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이 만들어진 것은 나무 때문만도 아니고, 공기 때문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 때문만도 아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를 비롯한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화합해 모일 때에 불이란 결과를 생(生)하게 할 수 있다. 젖은 나무를 아무리 비벼도 불을 얻을 수 없으며, 공기가 없는 곳에서 나무를 비벼도 불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했기 때문에 불도 자연히 꺼져 소멸하게 된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해 인연소멸(因緣消滅)하는 것일 뿐이다. 즉, 불이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멸하듯, 존재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생멸할 뿐이다. 본래 생멸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망념 된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일어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실상은 거짓모습이다. 즉, 삼라만상은 인연의 있고 없음에 따라 생멸변화 할뿐이요, 현상 그 자체에는 아무런 자성(自性), 즉 실체성이 없음을 말한다.
일체법의 생(生)은 인연이 화합해 나타나는 것이며, 멸(滅)하는 것도 인연이 다 돼 사라질 따름이다.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팔불(八不)에서 가장 먼저 생과 멸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다. 이는 인연의 유무에 따라 생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생멸에 대한 집착을 고쳐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생멸’이라는 고정된 실체적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불(不)’이란 부정의 개념을 도입했을 뿐이다. 여기서 ‘불(不)’이란 부정의 의미라기보다는 ‘연기’의 의미로 이해함이 옳다. 인연생기해 인연소멸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불(不)]는 의미이다. 이 ‘불생불멸’은 우리에게 존재 본성의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떠한 고정된 것이 아니며, 멸해 없어졌다고 해도 완전한 단멸(斷滅)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인연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겉모양을 바꾸었을 뿐이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이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 뿐이지 그 본성(本性)에 있어서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물이 추위를 만나서 영하의 온도가 되면 얼음이 되고, 이 얼음을 끓이면 열이라는 연을 만나 수증기가 된다. 물과 얼음, 수증기를 각각 따로 보면 생과 멸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생멸이 따로 없다.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수증기이다. 단지 모양만 바뀌었을 뿐 물의 성질은 멸하지 않는다.
*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경우를 보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 이 제법의 본질이 곧 공한 모습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 생하고 멸하는 것이 없다.
<반야심경>의 이 말도 같은 맥락에서 존재의 본질을 밝힌 대목이다. 첫 구절의 ‘시제법공상’이란 말은,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제법의 본질이 곧 공상(空相)이라는 말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공 한 것이라는 말이다. 공은 본래모습이 없지만, 중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공한 모습이란 용어를 쓴 것이다. 공한 모습이 바로 불생불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공한 모양은 바로 불생불멸을 비롯한 남 녀, 남 북, 밤 낮 등 온갖 상대개념을 다 포함하고 있다. 공한 본질 속에는 이 모든 것을 흡수함과 동시에 표상으로 확산시키는 상반된 작용을 갖고 있다. 그만큼 공은 역동적이다.
그리고 일체법이 존재하는 모양이 바로 공이기 때문에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며,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본질에 있어서 생성과 소멸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 이면에 모든 현상은 생할 수도 있고, 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본래 공이기 때문이다. 즉 불생불멸은 역생역멸(亦生亦滅)과도 통하는 말이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만법이 사라진다. 세계를 만들고 파괴하는 것이 마음이지만 그 마음은 원래 형체가 없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세계와 우주를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마음이 가정과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주인공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마음은 원래 생한 적이 없고(不生) 그렇기 때문에 멸하지도 않는다(不滅)고 했다. 그리고 해탈의 핵심이 공(空)이다. 연기의 핵심이 또한 공(空)이다. 당연히 사성제(四聖諦)의 핵심 역시 공(空)이다. 그걸 설명한 것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이상과 같이 여러 경전에서 불생불멸을 논하고 있다. 일체만상이 다만 인연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겉모양을 바꾸었을 뿐이다. 예컨대, 금목걸이의 경우를 보자, 처음 금목걸이가 좋아 보여 10 돈이 되는 금목걸이를 샀지만, 오래 가지다가 보니 지루해져서 반지로 바꾸려 한다. 그래서 1돈 짜리 금반지로 바꾸어 여럿이 함께 나누어 가지려고 한다. 금목걸이는 필요성이 다했기에 - 싫증이 나서 없애지만, 새로 금반지 10 개가 생겨났다. 이것을 보고 금목걸이는 죽고, 금반지는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인연 따라 겉모습을 바꾼 것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내용을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니 그들은 짧은 시일 안에 곧 깨달음을 성취했다. 이렇듯이 초전법륜의 근본골자는 중도(中道)에 있었다. 생과 사를 버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완전히 버리고, 옳음과 그름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버린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무(無)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완전히 걷히면 밝은 해가 나오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는 광명이 있을 뿐이다. 유와 무를 완전히 버리면 그와 동시에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세계, 곧 융통한 세계가 벌어진다. 중생의 어두운 눈에는 있고 없음이 분명히 상대가 돼 존재하지만, 지혜의 눈을 뜨고 보면 유와 무, 곧 있고 없음이 완전히 없어지는 동시에 유와 무가 완전히 융합해서 통하게 된다. 이렇듯 중도(中道)의 세계란 유 ‧ 무의 상대를 버리는 동시에 양 변을 융합하는 세계를 말한다. 양 변을 버리는 동시에 양 변을 융합하는, 이 중도의 세계가 바로 모든 불교의 근본사상이며, 대승불교사상도 여기에 입각해 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一卽一切 一切卽一)”라는 이 사상도 중도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와 일체라는 것은 곧 양 변이다. 하나와 일체를 버리면 그것이 바로 중도가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가 되는 것으로, 삼라만상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평등하게 서로 주고받는 상응작용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 제법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중도연기(中道緣起)의 세계이며 화엄의 무애법계(無碍法界)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화엄사상이며, 곧 불교 전체의 사상이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일진법계(一盡法界)를 말한 것도 모두 중도에 입각해 있는 사상이다. 대승경전이 시대적으로 봐서 부처님이 돌아가신지 몇 백 년 뒤에 성문화된 것이라고 해도 그 근본은 부처님사상 그대로이다. 부처님사상이 중도에 있는 것과 같이, 화엄과 법화 또한 중도를 그대로 전개시키고 있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과 사, 유와 무를 초월해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성(空性)의 올바른 이해이다. 즉,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이며, 그렇기에 공(空)이고, 중도(中道)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본성, 모든 존재의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원하고, 무한해 본래 생과 사가 없다.
* 과학으로 증명되는 불생불멸 - 등가원리(等價原理)
인류역사에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돼 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해서 요즘은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됐다. 그만큼 불교원리는 과학적이란 말이기도 하다.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돼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質量), 이 두 가지로 구성돼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봤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로서, 서로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을 설명했으나, 요즘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한다. 질량이라는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이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서로 전환한다는 것은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리하여 50여 년 전 아인슈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했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라 했다.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원자탄, 수소탄이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키면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원자탄이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거꾸로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 이것이 수소탄이 된다.
이로써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한다는 것이 입증됐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나오고 수소탄이 나왔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앤더슨(Anderson, Carl David, 1905~1991)이다.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했다.
그 뒤에 세그레라(Emilio Segre)는, 독재자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에게 쫓겨 미국으로 망명한 이탈리아 학자였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다.
이것은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한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가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가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얼음이다. 에너지와 질량 관계도 이와 꼭 같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상대성이론에서 제창됐지만 양자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에너지가 완전히 질량으로 전환하고 질량이 완전히 에너지로 전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쌍생쌍멸(雙生雙滅)이라고 한다.
모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할 때, 쌍(雙)으로 변화하는 현상을 쌍생성이라고 한다. 앤더슨 실험에서도 광(光)에너지를 물질로 전환시킬 때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나타났다. 또 양전자와 음전자를 합하니까 완전히 쌍으로 없어져 버렸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할 때는 쌍생이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할 때는 쌍멸이다.
이것은 중도(中道)의 공식, 곧 쌍으로 없어지고 쌍으로 생기는 불교에서 말하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원리와 일치한다.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할 때 음전자와 양전자가 쌍으로 나타나니까 쌍생이 되고, 이것은 곧 쌍조(雙照)에 해당한다. 또 유형의 질량 곧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없어지면서 무형의 에너지로 전환하니까 쌍멸이 되고, 이것이 곧 쌍차(雙遮)에 해당한다. 이처럼 쌍으로 없어지면서 한 쪽이 생기고, 또 쌍으로 생기면서 한 쪽이 없어진다. 쌍차쌍조의 공식이 에너지와 질량이 전환하는 과학이론으로 완전히 증명이 된다.
이와 같이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 그대로이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나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돼 조금도 증감이 없다. 곧 부증불감이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이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곧, 법계(法界)라고 한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라는 말이다. 이처럼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이며 상주법계이다. - 성철 스님
*맺는 말
현대과학계에서도 질량은 완전히 없앨 수 없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완전히 새로운 물질도 만들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은 <반야심경>의 제법공상 불생불멸(諸法空相 不生不滅)과 잘 들어맞는다.
주인과 나그네가 있다고 하자. 항상 머무는 게 주인이고, 항상 왔다 갔다 하는 게 나그네이다. 중생은 항상 왔다 갔다 하는 그 나그네를 주인으로, 즉 ‘나’로 여긴다. 변화 없이 항상 머무는 불생불멸의 진여불성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 이 생멸하는 생각을 ‘나’로 여기는 한, 절대로 탐심(貪心)과 진심(瞋心)이라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즉,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다. 자존심을 버려야 고통이 사라지는데, 불생불멸의 진여를 깨닫지 못하는 한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다.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과 얄팍한 자존심은 버리지 못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깨달음에는 먼 사람이다. 아상(我相)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진여(眞如)-불성(佛性)-공(空)」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이 걸 깨닫지 못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헛일이다. 이 생멸하는 생각을 주인, 즉 ‘나’로 여기고 도를 닦는 건 모래로 밥 짓기와 같다. 주인은 항상 머물러 있다. 항상 고요하며 적멸한 채로 머물러 있다. 영원하다. 변화가 없다. 그게 주인인데, 우리는 이 생멸하는 생각을 주인으로 여겨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진여-불성-공」을 깨닫는 것만이 대안이다. 이 길밖에 없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불생불멸을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범부중생이 불생불멸을 논하는 것은 과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불생불멸하다고 해서, 영원하다, 변함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반대로 무상(無常)하다는 것이다. 무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 사물의 실제 모습을 묘사한 말. 어떤 형상, 어떤 존재도 항상 하는 것은 없다. 영원불멸하는 것은 없다. 늘 변화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불생불멸을 논한 <화엄경>, <법화경> 등 불경이나 <중론> 등 논서들이 모두 대승불교에 속하는 경 ․ 논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가장 핵심사상이 되는 것이 공(空)인데, 그 공을 다룬 경전이 바로 600권 <대반야경(大般若經)>이고, 그 걸 압축시킨 것이 <반야심경>이다. <대반야경>의 핵심이 공(空)이고, 연기(緣起)의 핵심 또한 공(空)이다. 당연히 사성제의 핵심 역시 공(空)이다. 그걸 설명한 것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공(空)사상을 논한 <반야경>계통의 경전은 대중이나 아라한(阿羅漢)에게 설법한 내용이 아니다. 주로 보살들을 위해 설한 내용이다. 그래서 어렵다. 아라한들조차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워 그들에게 설하지 않았다. 그러니 <반야경>은 대중을 위해 설한 내용이 아니다. 대중에게 이런 고차원적인 내용을 설해봤자 대개가 이해를 하지 못해 의심하거나 헛소리라고 치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부처님에겐 치명타이다. 설법이 대단히 퇴보하게 되므로, 그들에겐 아예 설하지 않은 것이다.
불생불멸의 원리는 심심 난해해 부처님의 혜안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하지 못했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돼 현대과학의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돼 있음을 증명해 구체적 사실로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2천 600년 전에 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했고, 과학은 2천 600년 후에 불생불멸을 실증해 시간차는 있으나 그 내용은 상통한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바로 보면 그 견해가 다를 수 없다. 다만 부처님 혜안의 탁월함에 감탄할 뿐이다.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접근한 과학이론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 불생불멸의 상주법계(常住法界)에는 증감과 거래(去來)가 영절(永絶)한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의 실상(實相)이다.
우리 인체에 대해서 현대과학이 설명하는 변화의 현상을 살펴보자. 우리의 몸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수많은 세포들은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반복하며, 노쇠한 세포는 계속해서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의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약 7년 사이에 몸의 전체세포가 바뀐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육체와 7년이 지난 후 내 육체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육체의 모든 세포는 그 동안 생사를 수없이 거듭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고, 7년 전이나 7년 후나 모두 같은 ‘나’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세포는 죽고 살지만, 좀 더 크게 인간을 놓고 보니 생사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죽는다고 했을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본성을 철견(哲見)해 보면, 죽고 사는 것은 우리의 분별심일 뿐이며, 다만 인연의 가합(假合), 가멸(假滅)에 불과하고, 다만 인연화합으로 인한 모습의 변화가 있을 뿐이지 본래 자성(自性)에는 생멸이 따로 없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 미 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성철 스님, 무비 스님, 법상 스님을 비롯한 많은 분의 글과 자료를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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