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97칙 金剛經罪業消滅 - 금강경의 설법

수선님 2018. 10. 28. 12:49

관련 이미지 <벽암록> 제97칙은 <금강경> 가운데 남으로부터 경멸과 천대를 받는 수행으로 죄업을 소멸한다는 경천(輕賤)의 설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금강경>에 말씀하시길 ‘만약에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은 과거세에 지은 죄업으로 응당히 삼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하겠지만, 지금 금생에 사람들의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과거세에 지은 죄업이 곧 소멸된다’고 하였다"


擧。金剛經云。若爲人輕賤。是人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輕賤故。先世罪業。則爲消滅


<벽암록>67칙에 양무제가 부대사를 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도록 하였고, 소명태자는 이 경을 32과목으로 나누면서 본칙을 ‘능정업장(能淨業障)’이라고 하였고 규봉종밀은 경죄성불(輕罪成佛)의 의미로 보았다. 특히 선문에서는 <신회어록>과 <돈오요문> <종용록>58칙에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중요한 공안으로 주목하고 있으며, <전등록>29권에 법안문익도 이 일단에 대한 게송을 읊고 있다.

 

본칙은 <금강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면 만약에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은 과거세에 지은 죄업으로 응당히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하겠지만, 지금 금생에 사람들의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과거세에 지은 죄업이 곧 소멸하고 마땅히 아뇩다라샴막삼보리를 얻으리라”

 

<금강경>은 선종의 소의경전으로 수지독송하면 업장소멸과 불가사의한 공덕이나 영험이 있다고 하며 금강경독송의 민간신행까지 성행하였다.

 

원오는 ‘평창’에서 “교학가들이 20장 정도 되는 경전을 가지고 자꾸 돌려 읽는 것을 지경(持經)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업보와 무슨 관계가 있나. 어떤 사람은 경전은 반드시 영험이 있다고 하나, 그렇다면 이 한 권의 책을 한가한 곳에 펴 놓아라 거기에 무슨 감응이 있는가? 그러나 법안선사는 ‘불지(佛地)를 증득한 자를 지경(持經)이라 한다’고 하였다. <금강경>에서도 ‘모든 부처님들이 위없는 정각을 이루는 법이 모두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했다. 말해봐라! 무엇으로 이 경전을 만들었는가?”라고 경전의 수지독송과 영험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비난하고 있다.

 

<육조단경>에도 내 마음이 바른 선정일 때 경전을 수지(持經)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경(持經)은 경전에 설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마음이며, <금강경>의 근본사상인 사구게(四句偈)를 깨달아 불법을 남에게 설하여 깨닫도록 하는 설법의 공덕이 수승한 것이라고 설한다.


<돈오요문>에도 ‘어떤 법사가 <반야경>을 수지하면 공덕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믿는가?’라는 질문에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경전의 영험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전은 단지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며, 종이와 먹으로 만든 문자는 본질적으로 공한 것이다. 어디에 영험이 있는가? 영험이란 경전을 수지한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기에 신비적인 감응이 본인의 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권의 경전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경전의 가르침을 수지하지 않는다면 경전 자체가 어떤 영험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과거에 지은 죄업이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천대를 받은 덕택으로 소멸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금강경의해>는 이 일단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경전을 수지한 사람은 마땅히 일체 인천의 공경과 공양을 받아야 하지만, 다생에 무거운 업장이 있게 된 까닭에 금생에 비록 모든 부처님들의 심히 깊은 경전을 수지하면서도 항상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남의 공경과 공양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경전을 수지하였기에 아상과 인상 등을 일으키지 않아서 원수거나 친한 이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고, 항상 공경을 실행하여 마음에 번뇌와 원한이 없고, 탕연히 사량분별하는 것이 없어서 순간순간 항상 반야바라밀을 실행하여 물러남이 없다. 능히 이와 같이 수행함으로써 무량겁으로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무겁고 나쁜 업장들을 모두 소멸하게 한다. 또한 이치로 말하면 선세(先世)란 앞(과거)에 일어난 번뇌 망념의 마음이요, 금세(今世)란 번뇌 망념을 자각한 뒤(지금)의 마음이다. 뒤에 깨달은 마음으로 앞의 번뇌 망념의 마음을 업신여겨서 망심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 까닭에 선세(先世)의 죄업이 곧 소멸된다고 하는 것이다. 번뇌 망념이 이미 소멸되었으면 죄업이 성립되지 못하며, 곧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일단은 <신회어록>의 주장을 토대로 한 것인데, <금강경>에서 주장한 근본사상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등 사상(四相)을 텅 비운 반야바라밀의 실천이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멸시나 경천을 받을 지라도 업장이 생기지 않는다.

 

선세(先世)의 죄업(罪業)이란 무엇인가? 본래 죄성(罪性)은 공(空)한 것이며 무자성(無自性)이기에 불가득인 것이다. 번뇌 망념이 일어난 마음이 선세(先世)요,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한 지금의 마음이 금세(今世)라고 주장하고 있는 말은 남종선에서 돈오견성을 체득하는 가르침이다.

 

<신회어록>과 종밀의 <도서> <좌선의>에서는 “망념이 일어나면 망념이 일어난 것을 자각하라. 망념을 자각하면 망념은 없어진다(念起卽覺 覺之卽失)”라고 요약하고 있다. 망념을 자각할 때 번뇌 중생심을 불심으로 전환하여 돈오견성(頓悟見性)할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죄업은 중생심으로 만든 업장이지만, 망념의 자각으로 일체의 업장을 텅 비움과 동시에 불심의 지혜로 업장을 소멸하게 된다. 그래서 선을 자각의 종교라고 한다.

 

<돈오요문>에는 경전의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어떤 사람이 선지식을 만나지 못해서 악업을 짓고 청정한 마음이 삼독의 무명에 뒤덮여서 들어나지 못하기에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 금세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 것은 곧 지금 발심하여 불도를 구함으로 무명이 다 없어져, 삼독이 일어나지 않고 곧 본심이 명랑하여 다시 산란스럽지 않고, 모든 악이 영원히 없어져버리므로 금세 사람들의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무명이 모두 없어져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연히 해탈한 것이므로 마땅히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발심한 때를 금세라고 하는 것이지, 다른 생을 받는 격생(隔生)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일심으로 수행하면 과거의 업장을 소멸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돈오요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견성하지 못한 사람은 소멸할 수 없지만, 견성한 사람은 마치 태양이 비추면 서리와 눈을 녹이는 것과 같다. 견성한 사람은 풀더미를 수미산처럼 쌓아도 하나의 별과같이 밝은 불로 태워버리는 것처럼, 업장은 풀더미와 같고, 지혜는 불과 같다”


<대보적경>112권에도 “백천만겁의 오랜세월에 익힌 나쁜 죄업도 하나의 지혜로 관하면 모두 소멸한다. 등불의 밝음은 성스러운 지혜이며, 어둠은 모든 죄업”이라고 설한다. <육조단경>에 하나의 등불이 만년의 어둠을 없애고, 하나의 지혜가 만년의 어리석음을 소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밝은 구슬이 손아귀에 있다”


금강의 본체를 밝은 구슬(明珠)로 비유했다. 일체중생이 모두 구족하고 있는 명주를 체득하여 손에 쥐고 있는데,

 

“공적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리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반야의 지혜를 구족한 사람에게 이 명주를 준다.

 

“호인(胡人)과 한인(漢人)이 오지 않으니, 전혀 기량이 없다”


설두는 경전을 수지한 공덕자를 읊고 있다. 명주는 호인이나 한인이 오면 그대로 비추지만, 불법을 체득한 사람은 아무런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기에 비춤이 없고, 명주라는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 기교와 기량을 쓸 용무가 없어진 것이다.

 

“이미 기량이 없으니, 파순(波旬)이 길을 잃는다”


금강의 지혜를 구족한 사람은 일체의 기량이 없기에 번뇌 망념의 악마인 파순도 접근 할 수가 없다.

 

“구담(瞿曇)이여. 구담이여. 나를 찾을 수 있는가?”


파순도 못 찾는데, 석가는 자취와 흔적이 없는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다시 말했다. 감파했다”

 

설두는 부처와 마구니도 일제히 모두 감파해 버리고, 자취 없이 본분의 경지에 있다고 자신 있게 읊었다.

 

성본스님 /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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