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출신으로 지금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베르나르 포르(Bernard Faure)라는 학자는, 돈오의 ‘돈’에는 세 가지 중층적인 뜻이 있다고 하였다. 진리는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끝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다가 시간이라는 틀을 갖다 대어 인식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개체로 보고 너와 나를 가르는 주객(主客)의 구도, 그리고 공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우리 사고방식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그래서 진리라는 개념을 가지고도 거짓에 상대되는 것, 어느 때 어느 곳, 누구에게는 없을 수도 있는 그런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진정으로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라면 그런 어떤 틀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본각이란 바로 그런 진리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단박에 깨친다는 것도 시간의 흐름 중 매우 짧은 기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시간 속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이렇게 무명번뇌와 씨름하며 살아가는 자리에서 보면 분명히 수행의 과정이라는 게 있고 누구는 그만큼 치열하게 수행하며 살았으니 깨친 듯하고 누구는 못 깨친 듯하다는 구분이 엄연하며 중요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전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인용하며 언급했듯이, 본각이니 불각(不覺)이니 시각(始覺)이니 하는 개념들은 말로 못할 것을 굳이 말로 설명을 하자니까 짐짓 고안했을 뿐이지 정말 본각의 자리에서 보자면 못 깨친 범부 중생이라는 것도 없고 비로소 깨친다는 사건도 없다. 본래 깨쳐 있다는 말조차 쓸데없는 소리이다. 그냥 세상의 진상이 시작도 끝도 없이 펼쳐있을 뿐이다. 그러면 도대체 깨달음을 체험하기 위해 수행을 하고 그러다가 실제로 ‘한 소식’을 하고 하는 건 다 뭐란 말인가? 선불교는 모든 것을 온통 그 닦아 깨치는 문제로 수렴시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게 다 본각, 불각, 시각이라는 개념처럼 방편일 뿐이라고 본다. 그런 교의와 개념, 수행의 행위와 깨달음 체험의 일화가 다 이를테면 수사(修辭)일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자칫 그게 다 거짓이라는 뜻인가 보다 하는 쪽으로 생각이 갈 수도 있겠는데, 그건 또 아니다. 참이 아니면 거짓이고 거짓이 아니면 참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버릇도, 우리가 모든 것을 상대적인 틀에다가 집어넣으려고 하는 분별의 습성에 흠뻑 젖어 있기 때문에 작동한다. 본각이라는 개념,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돈오라는 개념도 그런 상대적인 관념, 분별의 틀 너머의 자리에 그 낙처(落處)가 있다. 그러니까 ‘단박에’라거나 ‘빨리’라는 말에 속아 그것을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틀이 적용되지 않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첫째는 신속하다(fast), 둘째는 완전하다(perfect), 그리고 셋째로 무매개(無媒介, im-mediate)라는 뜻이 복합돼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속하다’ 함은 빠르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초시간적이라는 뜻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터이다. 내가, 그리고 모든 중생이 본래 깨달아 있음은 초시간적인 세상의 진상(眞狀)이라고 보는 것이 본각 사상이다. 본래 그러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거나, 지금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조건이 충족되면 그 본래의 진상으로 되돌아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논서(論書)에 흔히 말하듯이 전에 있던 것이 이제는 없어진 것도 아니요, 전에 없던 것이 나중에 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특히 선종에서는 지금 바로 여기 중생과 세상이 그대로 진리의 모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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