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스크랩] 62. 돈오(頓悟) 6

수선님 2018. 10. 28. 12:51


어떤 스님과 돈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 스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내 생각에, 돈오라는 건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중생을 부처님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참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가 본각사상을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설명은 앞에서 누누이 하였다. 본각이란 모든 중생이 이미 깨쳐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얘기이다.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 그걸 알고 살아가느냐 모르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걸 안다면 모든 중생을 부처님으로 섬기며 살게 마련이다.

 

이와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얘기로는 조선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와 무학 대사가 나누었다는 대화가 있다. 이성계가 무학 대사에게 ‘나는 스님이 돼지로 보입니다.’라고 했더니 무학 대사는 ‘내게는 당신이 부처님으로 보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그 얘기 말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지만 부처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이다.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임을 아는 이에게는 모두가 부처일 뿐이다. 하지만 그걸 모르면 중생과 부처가 구별되고, 부처란 뭔가 색다르고 별나고 멀리 있는 존재라고만 생각된다. 그래서 가까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중생으로만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님인 줄 아는 이에게는 모두가 부처로 보인다는 말은 ‘본각의 이치를 깨달은 이는 본각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동어반복이다.

 

달리 말하자면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으로 산다’는 식이다. 부처님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부처님이라야 부처님으로 살 수 있다’고 답변한다면 실제로는 아무런 답변이 안 된 셈이다.

그러나 선(禪)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말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다. 본각 사상에 충실하자면 ‘부처님이 되면 부처님으로 살 수 있다’고 해도 틀린다. 부처는 되고 말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경전에 보면 해탈, 열반은 불가득(不可得), 즉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대목이 흔히 나온다.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얻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 본각 사상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해탈, 열반, 성불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내가 이렇게 또는 저렇게 수행하면 부처가 되겠거니 하고 기대하는 것은 해탈, 열반, 부처라는 상(相)에 사로잡혀서 일으키는 망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합장하고 절하며 “성불합시다”라는 인사를 나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성불하여 있다고 하는 본각 사상을 배웠으면서도, 우리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부처님으로서 살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각의 이치에 입각해서 보자면 망상일 뿐이지만, 또 한편으로 현실에 입각해서 보자면 정직함이다. 이는 단순하게 논리로만 보자면 분명히 모순이지만, 불교신행의 역동성이 우러나오는 가장 깊은 샘이 바로 거기에 있다. 불교신행의 목표는 간단하게 말해서 부처님으로서 사는 데 있다. 그런데 선사들은 우리 모두 이미 부처님이라고 가르친다.

 

그 가르침을 철저하게 믿으면서 또한 나는 지금 부처님으로 살고 있지 못함을 정직하게 자인한다면, 내 삶의 모든 순간이 모순으로 닥쳐온다. 사람은 모순을 모순인 채로 내버려두고는 살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믿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없애려는 치열한 노력의 원동력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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