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에서 말하는 돈오의 교의는 본각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사들의 어록이나 그 밖의 선 문헌에 보면 대오를 경계하는 말씀이 무수히 나온다. 이렇게 하면 깨달을 수 있겠지, 또는 깨달음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수행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잘못 알고 거는 기대이기 때문이다. 본각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깨달음은 이미 온 세상에 펼쳐져 있는 것이지, 어떤 특정 조건에 따라 이루어지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저러하게 수행을 하면 깨달음을 얻겠거니 하는 것은 다 쓸데없이 헤아리고 분별하는 생각(思量分別)일 뿐이다. 본각으로서의 깨달음에는 인과율(因果律)도 적용이 되지 않고 시간의 틀도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깨달음에 관한 한 세간의 어떤 조건을 적용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길이 없다. 세간의 안목으로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수행을 열심히 잘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 하는 것은 조작이요 억지이다. “깨달음이 내 손님으로 오실 때야 피해가지 못하지만 나가서 불러들일 일이야 아니지.” 이철수씨가 <좌탈>이라는 제목의 판화에 쓴 이 글도 바로 그런 뜻이다. 아울러, 그 어떤 세간의 장치도 깨달음으로 가는 통로나 매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세간의 장치에 의지해서 깨달음에 접근하려는 태도 그 자체가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 그래서 선사들이 대오(待悟)를 경계하는 만큼이나 강조하는 것이 무소의(無所依)이다. 무소의라 하면 의지할 바가 없다는 뜻이다. 즉 세간의 그 어떤 것도, 다시 말해 어리석은 분별로 고안해낸 그 어떤 방법이나 장치도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의지할 것은 없다는 얘기이다. 오히려,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수행하면 되겠거니 하고 철썩 같이 믿고 의지하는 것까지 남김없이 떨쳐 버려야 한다. 분별로 지어낸 그 무엇인가를 붙들고 있는 한 깨달음이 원래부터 이미 세상에 가득 차 있음을 깨달을 수 없다. 선사들이 흔히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라는 말을 하는 것도 그런 취지로 이해할 수 있다. 아집(我執)을 비롯하여 집착을 끊고 버리는 수행을 하고 또 하여 이 세간에는 발 딛고 의지하는 자리를 없애가다 보니, 마침내 장대 끝만큼의 자리만 남는다. 그것을 놓치면 어딘지도 모를 까마득한 곳으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다. 그만 떨어져 죽어버릴 것만 같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모든 중생이 본래 이미 다 깨쳐 있다는 것이 본각 사상이다. 그러니 새삼 깨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수행할 때에 깨달음을 기대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깨달음을 기대하는 것을 대오(待悟)라고 한다.
세간의 그 어떤 틀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돈오 즉 ‘단박에 깨친다’고 하는 말은, 깨달음이란 시간의 틀이 적용되지 않는 초시간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천천히 이루어지는 깨달음이 있어 점오(漸悟)라 하고 빨리 이루어지는 깨달음이 또 따로 있어서 돈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끝까지 차마 놓아버리지 못할 그 장대 끝은 ‘이렇게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겠거니’하는 기대요 믿음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동안 수행의 삶을 지탱해준 수행자의 존재의 이유, 바로 불교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그것까지 포기하고 한 걸음 더 내딛으라고 한다. 선불교는 본각으로서의 깨달음에 관한 한 그렇게 철저한 무소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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