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 즉 단박에 깨친다는 얘기는 선종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하지만, 선사들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점차 수행하는 과정을 밟아가서 마침내 깨달음이 터지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뜬금없이 터지는 것이란 말인가? 선의 문헌에 나오는 얘기들을 보면 다분히 그런 인상을 받곤 한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그야말로 뜬금없는 얘기인데, 그런데도 선종에서 그토록 힘주어 말하는 것을 보면 뭔가 연유가 있기는 있을 터이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단박에 깨친다는 교의의 바탕 가운데 하나는 본각(本覺) 사상이다. 실상은 중생이 모두 이미 깨달아 있는데, 다만 어리석어서 자기가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있음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어리석음만 떨쳐버리면 된다. 특별히 새로 깨닫고 말고 할 것이 없다. 하지만 어리석음을 떨쳐버리고 진상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어떤 과정이 있을 터인데 어찌 단박에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든다.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탐욕을 귀중하게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 그걸 채우려고 살아가는 모든 행태가 어리석음이지만, 그런 행태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와 너를 구분하는 분별 때문이다. 그 분별 또한 불이법(不二法)이라는 진상의 터전에서 보면 아무런 근거도 없고 실체도 없는 환상일 뿐이다. 그래서 전에도 말했듯이 이에 대해 불교의 가르침에서 흔히 등장하는 것이 꿈의 비유이다. 사바세계에서 제 한 몸 보존하고 영달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다 꿈같이 허망하다. 그리고, 꿈속에서는 그게 꿈인 줄 모른다. 물론 간혹 꿈속에서도 이게 꿈인데 하는 의식이 아련하게 들 때가 있다. 그래도 꿈속의 상황에서 허우적거리기는 마찬가지이다. <구운몽(九雲夢)>을 비롯해서 꿈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많다. 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꿈속에서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깨보면 그 모두가 허망하고 자기는 원래 제자리에 있더라는 얘기이다. 현실에서 보자면 그 제 자리에서 벗어난 적도 없고 그러므로 되돌아 길을 밟아오는 과정도 없다. 꿈은 현실이 아니니까, 현실을 말할 때에는 끼어들 데가 없다. 본각이라는 것도 그런 얘기를 하는 개념이다. 그런 본각의 입장을 바탕으로 하는 돈오라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는 깨친다는 게 본래 없다는 뜻이라고까지도 할 수 있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그러나 돈오를 핵심 교의로 들고 나온 것은 선종이었다. 선종에서는 돈오를 가지고 자기의 정체성을 표시하는 배지로 삼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교종에서는 점오지만 선종은 돈오라고 내세웠던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어떤 일에나 점진적인 과정이 없을 수 없겠건만, 아무튼 선종에서는 단박에 깨치는 것을 강조한다. 선사들의 어록을 보면 단박에 깨쳤다는 일화가 무수히 나온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것도 당사자의 수행이 쌓여서 그럴 만하게 되는 과정이 있었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비유컨대, 풍선이 터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터지기까지는 바람을 불어넣는 과정이 생략될 수 없다. 석가모니의 대각(大覺)도 긴 수행, 심지어는 무수한 전생(前生)에 걸친 수행의 결과라고 하지 않느냐 말이다.
그런데 불교, 특히 대승불교, 더 특히 선불교에서는 그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고 본다. 관념으로 지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떨쳐버리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이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을 나누는 분별이다.
'선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60. 돈오(頓悟) 4 (0) | 2018.10.21 |
---|---|
[스크랩] 59. 돈오(頓悟) 3 (0) | 2018.10.21 |
<쌍차쌍조(雙遮雙照)> (0) | 2018.10.21 |
[스크랩] 57. 돈오(頓悟) 1 (0) | 2018.10.14 |
[스크랩] 56. 교외별전(敎外別傳) 16 (0) | 2018.10.14 |